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능력주의, 지배층엔 '축복' 절대 다수 국민엔 '재앙'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psythkim@naver.com

다른 기사 보기

능력주의’라는 가짜 정의를 비판한다 ➀

신자유주의 떠받치는 지배층의 정의론

능력주의를 정당화 하는 ‘사회적 기여도’

능력주의는 필연적으로 불평등 낳는다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가장 대중적인 정의론, 즉 다수의 사람들이 지지하고 있는 정의론은 아마 능력주의일 것이다. 능력주의 정의론이란 노력, 능력, 사회적 기여도 등에 따라 분배하는 것이 정의이고 이러한 분배 결과로서 발생한 불평등도 정의라고 주장하는 가짜 정의론이다. 능력주의는 개인주의가 강한 청년세대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남성 청년들의 대변자를 자처했던 이준석 같은 극우정치인이 열심히 선전해온 정의론이다. 나는 과거에 『풍요중독사회』라는 저서를 통해 이미 능력주의를 비판한 바 있지만, 이번에 출간한 『우리는 왜 가짜 정의에 열광하는가』라는 저서에서 능력주의를 더 심도 깊게 분석, 비판했다.

토끼는 거북이 보다 더 많이 노력해서 이기나

능력주의 지지자들은 성공이나 출세의 원인이 능력이라고 믿는데, 이 능력을 암묵적으로 노력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즉 성공한 사람을 단지 능력이 있는 것만이 아니라 노력도 많이 한 사람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력과 능력은 명백히 다른 것으로서 두 가지가 비례관계에 있다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노력에 따른 분배는 원칙적으로 능력주의 정의론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엄격한 노력주의는 능력주의와 적대적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능력주의 지지자들이 단지 능력을 노력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을 뿐이지 능력주의는 노력에 따른 분배가 아닌 능력에 따른 분배가 정의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낳는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큰 성과를 내기 마련이다.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시합을 하면 토끼가 너무 긴 시간 동안 낮잠을 자지 않는 이상 달리기 능력이 우월한 토끼가 거북이를 항상 이기게 되어있다. 이 경우 토끼에게 더 많은 분배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능력주의 정의론이다. 그런데 토끼와 거북이가 단 한 번만 시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같이 시합을 한다면 토끼의 재산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지만 거북이의 재산은 쥐꼬리만큼씩 늘어날 것이다. 그 결과 토끼와 거북이 사이의 불평등이 매우 심해진다. 그러나 능력주의 정의론에 따르면 이런 불평등은 능력에 따른 분배의 결과이므로 정의롭다.

 

정의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우리는 왜 가짜 정의에 열광하는가'(김태형, 2025, 갈매나무)를 참고

능력주의 정당화 위해 첨가한 ‘사회적 기여도’라는 양념

능력에 따른 분배가 정의롭다는 주장은 약육강식의 논리라는 비판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육체적 혹은 지적 능력 등이 뛰어난 사람, 즉 능력이 우월한 사람한테 더 많은 분배를 해주는 약육강식의 사회는 맹수가 약한 동물들을 잡아먹으면서 살아가는 동물의 세계와 본질적으로 같다. 돈 버는 능력이 가장 뛰어난 아버지가 자기가 벌어온 돈을 혼자서만 쓰고, 돈 버는 능력이 떨어지는 노인과 아이는 굶주려야만 하는 가정을 정의롭다고 할 수 없듯이,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부를 독차지하는 사회를 정의롭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무조건 더 많은 분배를 해주는 것이 도덕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능력자이지만 나태한 토끼보다는 능력은 떨어지지만 성실한 노력자 거북이에게 더 많은 분배를 해주는 것이 도덕적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이 때문에 능력주의 정의론은 능력에 따른 분배가 정의라는 주장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사회적 기여도라는 양념을 첨가했다.

최근의 능력주의 정의론은 사회적 기여도에 따라 분배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한다. 똑같이 8시간을 일하더라도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 볼펜을 생산할 것이다. 이때 전자의 사람에게 더 많은 분배를 해주는 것은 그가 단지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사회에 더 많이 기여했기 때문이다.

즉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사회에 필요한 물건을 더 많이 생산함으로써 사회에 더 많이 기여했으므로 그에게 더 많은 분배를 해주는 것은 도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즉 정의롭다. 능력주의 정의론에 의하면 ‘능력 = 사회적 기여도’이다. 따라서 사회적 기여도에 따라 분배하는 것이 정의롭다면 능력에 따라 분배하는 것도 정의롭다.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사회에 더 많이 기여해서 더 많은 분배를 한다는 주장은 일반인들의 도덕관념에 부합된다. 능력주의 정의론의 주장, 즉 사회에 더 많이 기여한 이들에게 더 많은 분배를 해주는 것이 정의라는 주장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맞는 소리네”라고 반응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회나 공동체에 더 많이 기여한 사람들을 존경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더 많은 보상이 주어지는 것을 당연하다고 믿는다.

능력주의 정의론은 ‘능력 = 사회적 기여도’라는, 현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교활한 공식을 도입함으로써 도덕적 비난에서 상당히 자유로워졌고 일반인들의 도덕관념에 대한 호소력도 갖게 되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왼쪽부터 여승주 한화그룹 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이재명 대통령,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기선 HD현대 회장, 하준경 경제성장수석. 2025.11.16 연합뉴스

능력주의는 신자유주의에 특화된 분배원칙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적 정의, 신자유주의적 정의이자 승자의 철학이다.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의 최종 단계인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린 이후에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첫째가는 분배원칙으로 등극했다.

신자유주의의 화신인 이명박은 2010년의 65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정한 사회는 출발의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지는 사회입니다”라고 떠들었다. 그는 경축사에서 정의가 아닌 공정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결과’가 개인 책임이라고 못박았다. 즉 누군가가 가난하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고 누군가가 부유하다면 그것은 그의 노력이나 능력 덕분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주장은 출발만 공평하다면 결과가 불평등하더라도 정의롭다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정의론 혹은 능력주의 정의론이다.

능력주의 정의론이 신자유주의에 특화된 정의론이라는 것은 그것이 집단 간 경쟁이 기본인 과거의 사회에서는 제기되기조차 어렵고 대중화되기는 더 어려운 정의론이라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능력주의 정의론은 개인 간 경쟁이 기본인 사회에서나 통용될 수 있고 환영받을 수 있는, 개인 간 경쟁을 전제로 하는 정의론이다.

오로지 개인 간 경쟁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능력주의

현대조선소와 대우조선소의 노동자들이 집단 간 경쟁을 하는 조건에서 능력에 따른 분배를 한다는 것은 곧 두 집단의 능력 차이에 따라 차별적 분배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현대조선소가 더 많은 배를 생산하거나 판매했다고 해서 현대조선소 노동자들이 대우조선소 노동자들보다 능력이 더 우수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현대조선소가 더 많은 수주를 받는 등 다른 변수가 많아서 양 노동자 집단의 능력을 측정하거나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대조선소의 이윤이 더 높다고 해서 현대 노동자들에게는 높은 임금을 주고 대우 노동자들에게는 낮은 임금을 준다면 대우 노동자들은 그런 능력주의 분배원칙을 받아들이지 않고 집단행동에 나설 것이다. 그러면 현대 노동자들은 대우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을 반대하기는커녕 그것에 연대할 가능성이 높다. 집단 간 경쟁 사회에서는 집단 간 격차를 크게 벌릴 수가 없어서 집단들 간의 관계– 노동자 집단들 간의 관계는 더욱 그렇다- 가 양호한 편이기 때문이다.

만일 정부가 경상도와 전라도를 집단적으로 경쟁시키고 나서 능력에 따른 차별적 분배를 실시하겠다고 선언한다면 어떻게 될까? 절대다수의 국민들은 그런 분배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이간질시켜 싸우게 만들려는 것이자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짓이라며 강력 반대할 것이다. 아마 차별적 분배의 대상이 될 경우 경상도나 전라도 사람들도 집단행동에 나설 것이다. 이것은 능력주의 분배원칙이 집단 간 경쟁에서는 제기될 수도 없고, 적용될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이 8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노동안전 노사정 대표자 간담회에서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류현철 고용노동부 산업안전보건본부장, 양경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김동명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김영훈 장관,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2025.12.8 연합뉴스

개인 간 역학관계로 결정되는 분배의 몫

80년대까지 집단 간 경쟁이 기본이었던 한국 사회는 90년대를 거치면서 개인 간 경쟁이 기본인 신자유주의 사회로 전환되었다.

개인 간 경쟁 사회에서는 집단 간에 어떤 기준으로 분배를 해야 하는가는 관심 밖의 일이고 개인 간에 어떤 기준으로 분배를 해야 하는지가 주된 관심사로 떠오르기 마련이다. 사실 여러 분배원칙이 있기는 하지만 개인 간 분배이든, 집단 간 분배이든 간에 현실에서 그것은 집단이 나 개인 간 역학관계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다. 즉 힘이 센 집단이나 개인이 분배 몫을 더 많이 차지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개인 간 경쟁사회인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집단 간 역학관계가 아닌 개인 간 역학관계에 따라 분배된다. 이때 개인 간 역학관계를 평가하는 가장 쉬운 기준은 능력이다.

그래도 문명사회를 자처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먹이 센 사람이 더 많은 몫을 차지하는 분배원칙에 동의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로부터 개인 간 경쟁사회에서 그나마 대중적 설득력이 있는 분배 기준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능력이다. 신분, 재산, 체격, 학벌 등을 기준으로 분배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반대할 것이지만 능력(사회적 기여도)에 따라 분배한다면 동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능력주의 정의론은 집단 간 경쟁사회였던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등장하기도 어려웠고 절대로 주류 정의론이 될 수가 없었던, 신자유주의 시대를 대변하는 신자유주의 정의론이라고 할 수 있다.

능력주의는 신자유주의 떠받치는 지배층의 정의론일 뿐

신자유주의 사회의 지배층에게 능력주의, 즉 능력에 따른 분배원칙은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유용한 도구이다. 능력에 따른 분배의 결과인 불평등이 정의롭다고 주장하는 능력주의 정의론은 가난한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의 불만과 저항을 억제시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그들이 결과의 불평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부정의한 짓이고 결과의 불평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정의라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은 매사에 자기 탓을 하게 되어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진다.

반면에 능력주의는 돈을 많이 번 사람들, 성공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부나 성공이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고 믿어 우쭐거리게 하고 가난한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의 불우한 삶은 무능력의 당연한 결과였다고 믿게 만든다. 그 결과 부유한 사람들, 성공한 사람들은 가난한 이웃, 실패한 이웃에 대해 동정심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그들을 도우면 더 많은 무능력자들이 발생하고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것이라고 진심으로 우려하게 된다. 이것은 능력주의가 신자유주의를 강력하게 떠받치는 역할을 하는 지배층의 정의론 혹은 그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정의론임을 잘 보여준다. 능력주의 정의론은 극소수 지배층에게는 축복이지만 절대다수의 일반 국민들에게는 재앙이다.

 

저작권자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