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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때문에 끌려간 청년, 40년 만에 무죄 선고받다

[재심: 바로잡은 역사] '삼청교육대'라는 국가폭력의 역사적 심판

26.02.15 19:28최종 업데이트 26.02.15 19:28

1980년 제5공화국 정권창출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회정화라는 미명아래 삼청교육대 입소생들이 봉체조를 받고 있다.연합뉴스

1980년대는 한국 조직폭력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시기다. 기업형 조폭이 이 시기의 현상이 됐다. <한국사회학회 심포지움 논문집>(2004.5)에 실린 공유식 아주대 교수의 논문 '한국사회의 조직폭력과 조직범죄'는 "1980년대의 조폭은 유흥업소·빠찡꼬·부동산투기 등을 통해 획득한 부를 바탕으로 합법적인 활동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방성수 <조선일보> 기자의 <조폭의 계보>는 1983년 이후에 "조직폭력배들의 전성시대"로 접어들었다며 "폭력조직들은 오락실·안마시술소·경마·재건축 등으로 사업 분야를 넓혀가면서 황금기를 구가"했다고 기술한다.

그런데 1980년대 초반에 대대적인 폭력배 단속이 있었다. 이때 있었던 삼청교육대 프로젝트의 명분은 폭력배 단속이었다. 삼청교육의 신호탄인 1980년 8월 4일 자 계엄포고 제13호는 "각종 불량배를 일제히 검거·순화함으로써 밝고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포고한다"고 한 뒤 "검거된 불량배는 일정 기준에 따라 분류·수용·순화 조치한다"고 예고했다.

2006년에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삼청교육대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1980년 12월 29일까지 군경에 검거된 '불량배'는 6만 755명이고, 그중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은 3만 9742명이다.

계엄사 주도하에 삼청교육을 담당한 부대는 총 26개 사단이다. 이만한 대군이 폭력배 순화교육에 동원됐다면, 조폭의 역사는 이 시기에 내리막길을 걸었어야 한다. 나중에 되살아난다 해도, 적어도 삼청교육 직후인 1980년대 초중반에는 "조직폭력배들의 전성시대"가 열리지 않았어야 한다. 그런데도 삼청교육 얼마 뒤인 1983년 이후로 조폭의 전성기가 열렸다. 삼청교육의 진짜 목적이 불량배 일소가 아니었고, 그곳에 끌려간 사람들 상당수가 조폭과 무관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어이없이 연행된 사람들

포고 제13호가 발포된 달에 서울 뚝섬유원지(지금의 뚝섬한강공원)에서 23세인 한일영씨가 연행됐다. 2017년 4월 12일 자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그는 부모들의 부탁을 받고 초등학생 7명과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경찰이 다가오더니, '서에 가자'며 그를 성동경찰서로 끌고 갔다.

그는 뚝섬 인근의 성동서를 거쳐 경기도 연천군 육군 5사단 연병장으로 연행됐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빨간 모자'들이 사람들을 짓밟고 굴리고 있었다. 삼청교육이라는 국가폭력 현장으로 그가 내던져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는 폭력배가 아니었다. 현행범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경찰은 다짜고짜 끌고 갔다. 한일영은 "문신 탓이었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수영장에서 훤히 드러난 그의 문신이 연행 사유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불량배 소탕을 취재한 기자들의 대담을 담은 1980년 8월 7일 자 <조선일보>는 어떤 사람들이 붙들려갔는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문신을 새긴 사람은 모두 중벌을 받았어요"라고 말한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인 1970년경에 경기도 가평에서 피아노 과외를 받으며 유복하게 살았던 한일영은 서울 성북구 삼선동의 할아버지 댁을 자주 방문했다. 그러다가 6학년 때인 1971년에 삼선동에서 경찰에 붙들렸다. 그날 입은 옷이 초라한 데다가 집 주소를 정확히 대지 못해 고아로 오인된 것 같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는 서울 은평구 응암동의 아동보호소에 수용되고, 약 8개월 뒤 경기도 안산의 선감학원에 보내졌다. 명목상으로는 부랑아 수용시설이지만 실제로는 인권침해 및 강제노역 현장인 곳에 보내진 것이다. 여기서 새긴 것이 그 문신이다. 1976년에 이곳을 탈출한 그는 4년 뒤 수영장에서 폭력배로 오인돼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한일영처럼 어이없이 연행된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위 대담 기사는 "우범 지역이나 유흥업소 부근을 배회하는 사람도 모조리 잡아들였어요"라고 말한다. 또, 요즘 말로 하면 카공족도 대거 검거됐다. "다방 같은 데에 아침 일찍 출근, 자리만 차지하고 하루 종일 앉아 있는 사람"도 단속 대상이라고 위 기사는 말한다.

무고한 국민을 감옥에 넣어

선감학원, 삼청교육대 피해자 한일영씨이민선

그렇게 끌려간 피해자들은 일상적인 폭행과 가혹행위에 노출됐다. 위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한일영은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죄 없는 민간인을 이리 무지막지하게 때려도 됩니까"라고 항의했다가 일명 지옥탕에 빠졌다. 물과 오줌과 진흙이 뒤범벅인 구덩이에 떨어진 그는 '잠수 훈련'을 받았다. 숨이 막혀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면 조교가 막대기로 눌렀다.

한 달간의 삼청교육을 마친 그는 근로봉사대로 끌려갔다. 가혹행위에 더해 강제노동까지 하게 됐던 것이다. 여기서 두어 달쯤 시달리다가 탈출했다. 그런 뒤 기차에 올라타 화장실에 몸을 숨겼다. 얼마 안 가서 기차가 멈추더니, 헌병들의 군화 소리가 화장실 문 앞에서 끊어졌다.

군법회의에 회부된 그는 계엄포고 제13호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공주교도소에서 1년간 복역했다. 순화교육 및 근로봉사 구역을 무단 이탈하면 "영장 없이 체포·구금·수색하고 엄중 처단한다"는 조목이 유죄 선고의 근거가 됐던 것이다.

이 포고는 어떤 행위에 대해 분류·수용·순화 조치를 부과하겠다고 규정하지 않고, "서민착취배"를 포함한 불량배에 대해 이런 조치를 부과하겠다고 규정했다. 특정 범법 행위가 아닌 특정 사람들을 상대로 사실상의 형벌을 예고했던 것이다.

또 서두에 인용된 것처럼, 분류·수용·순화 조치를 부과하는 구체적 기준을 적시하지 않고, 그냥 "일정 기준"에 따라 부과하겠다고 규정했다. 거기다가 "엄중 처단"이라는 모호한 개념도 사용했다. 형벌 규정의 기본 원리를 무시한 이런 포고령을 근거로 무고한 국민들을 감옥에 넣었던 것이다.

한일영은 석방된 뒤에도 괴롭힘을 당했다. 경찰들이 따라다니는 바람에 마음 놓고 살 수가 없었다. 생계를 위해 넝마주이나 고철 수집 같은 힘겨운 노동도 감내해야 했다.

군부 권력을 민생 현장으로 확대하기 위한 프로젝트

전두환 정권이 불량배 일소라는 미명하에 근 4만 명의 국민에게 그런 만행을 저지른 것은 깡패 소탕을 빌미로 국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목적은 정치적인 데에 있었다는 것이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판단이다.

위 진상조사보고서는 "군부의 권력을 확대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다"고 말한다. "하루빨리 계엄을 종결시키기보다는 계엄사의 권한을 활용하여 민생 치안까지 확대하고자 한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국민들이 계엄군의 일상적인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군부의 권력을 민생 현장으로 확대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다는 결론을 도출한 것이다.

삼청교육은 폭력배 소탕을 핑계로 일반 국민들을 겁박하고 폭행한 국가폭력이었다. 실제 의도가 거기에 있다 보니, 한일영 같은 무고한 국민들이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폭력배 소탕은 당연히 뒷전이었다.

삼청교육 문제는 2000년대에 진실화해위원회와 대법원이 그 위법성을 확인하기 훨씬 전부터 위법 논란에 휩싸였다. 전두환이 퇴임한 해인 1988년부터 세상을 들썩인 국회 제5공화국 청문회에서도 삼청교육이 주요 안건이었다.

6월항쟁을 당한 데 이어 1988년 13대 총선 참패를 겪은 노태우 대통령은 그해 11월 26일의 특별담화를 통해 삼청교육이 "잘못된 공권력의 행사"였음을 시인하고 보상과 명예회복을 약속했다. 그해 12월 12일부터는 시군구 민원실에서 피해자 신고를 받았다. 이런 흐름이 이어지다가 2004년 1월 29일에 '삼청교육 피해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2020년 5월 13일 연합뉴스TV가 보도한 "삼청교육대 피해자, 40년 만에 재심 무죄 판결"연합뉴스TV

한일영이 겪은 국가폭력은 재심 재판의 소재가 됐다. 2020년 5월 12일, 재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방법원은 63세가 된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그에게 적용된 계엄포고 제13호는 위헌이라고 판시했다.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신체 자유와 거주·이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였다. 선고 전에 검찰도 무죄를 구형했다.

이로써, 그가 근로봉사대를 탈출한 행위는 무죄로 뒤바뀌었다. 결국 그가 승리한 것이다. 국가의 사과를 받고 배상을 받는다 해도 허망할 수밖에 없는 승리이지만, 뒤늦게나마 '심판'이 그의 손을 들어준 것은 그를 그렇게 만든 세력과 계승자들이 역사의 패자가 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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