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뮌헨 안보회의 개막을 앞두고 공개된 연례 보고서는 제목부터 직설적이다. 제목은 ‘Under Destruction’, 직역하면 ‘파괴 아래’다. 보고서는 오늘의 세계 질서를 더 이상 점진적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철거용 불도저와 쇠망치가 난무하는 파괴의 대상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파괴의 주역으로 미국 행정부를 지목한다. 트럼프 대통령을 “가장 강력한 도끼잡이”로 묘사해 나토 동맹국들에 대한 방위비 압박, 그린란드 ‘인수’ 발언 같은 사례를 열거한다. 80년 넘게 미국이 주도해 온 전후 국제질서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자기 손에 의해 무너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보고서가 러시아나 중국이 아니라 유럽 엘리트들에 의해 작성됐다는 점이야말로 핵심이다. 서방의 불안한 자기 고백이다.
보고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선 진격과 하이브리드 공세를 위협으로 지목하며 진짜 구조적 불안 요인은 워싱턴의 불확실성이라고 말한다. 유럽은 여전히 미국의 우산 아래에 있지만, 그 우산이 언제 접힐지 모른다는 사실도 공공연히 인식하고 있다.
인도·태평양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보고서는 중국이 “지역 헤게모니를 적극적으로 추구”한다고 적었지만, 그 문장이 던지는 메시지는 미국의 정책이 동맹국들에 더 이상 신뢰를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일본, 한국, 필리핀조차 중국과의 경제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미국이 제시하는 선택지란 사실상 “중국과 결별하라”라는 일방적 요구뿐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미국은 더 이상 다자주의와 국제법을 권력의 기반으로 보지 않는다. 이제 그것들은 국가 이익이라는 이름의 거래 수단으로 전환되었다. 2025년 8월 19일, 백악관이 젤렌스키와 유럽 지도자들을 만난 뒤 트루스소셜에 게시한 2개의 글은 그 변화의 상징이었다. 미국은 동맹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아니라 이익을 추구할 ‘흥정 대상’으로 취급한다는 메시지였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전진하고 하이브리드 전쟁을 유럽 전역으로 확장하는 동안 미국은 조건부 지원과 노골적 강제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2022~2024년 나토 회원국들이 유럽에서 구매한 군사 장비의 51%가 미국산이라는 통계는 유럽이 여전히 미국 무기 시장에 종속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보고서는 유럽이 주도하는 상황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한다. 독일 총리 메르츠의 “대서양 횡단 관계는 변했다, 향수는 유럽의 진보에 도움이 안 된다”라고 말한 최근의 발언도 유럽 스스로가 더 이상 미국의 보호에만 기대서는 존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했음을 보여준다.
인도·태평양 장에서도 모순은 분명하다. 보고서는 중국을 지역 패권 추구자로 규정하고, 미국의 역할이 점점 비일관적이고 불안정해지고 있음을 분석한다. 중국의 경제, 군사력이 실질적 영향력을 구축한 데 반해 미국의 안보 보장은 계산에 따라 흔들린다. 일본, 한국, 필리핀이 방위비를 대폭 늘리고 다자 협력을 강화하는 이유는 단지 대중국 견제가 아니라 미국에 대한 신뢰 상실이라고 진단한다. 2025년 4월 2일 트럼프가 서명한 상호 관세 행정명령은 그 신뢰를 더 갉아먹었다. 보고서는 지역 국가들이 미국의 대중 전략에 편승하면서도 중국과의 경제적 유대를 포기하지 못하는 딜레마를 정확히 포착했다. 미국이 만든 동맹 체제가 더 이상 가치 공동체가 아니라 거래 네트워크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세계 경제를 분석하는 내용은 더욱 직설적이다. 미국이 스스로 설계했던 자유무역 질서를 사실상 포기했다고 평가한다. 세계무역기구(WTO)를 ‘불공정하다’고 공격하고, 대규모 관세를 전략 무기로 사용하는 행태는 경제를 규칙의 영역이 아니라 권력 투쟁의 장으로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중국의 보조금과 수출 통제 역시 비판 대상이지만 보고서의 핵심 문제의식은 미국의 일방주의가 규칙 기반 질서의 종말을 앞당겼다는 데 있다.
개발과 인도적 지원 장은 더 처참하다. ‘지속 가능 개발 목표’를 ‘글로벌리즘’으로 낙인찍고 유엔 기구 예산을 대폭 삭감한 미국의 결정이 국제 시스템에 가장 깊은 균열을 만들었다고 적었다. 그 공백을 걸프 국가들과 중국이 메우고 있다는 사실은 전통적 서방 중심 개발 모델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모든 분석은 하나의 진실로 수렴된다. 서방이 80년간 외쳐온 규칙 기반 국제질서란 사실상 미국의 패권을 정당화하는 언어였다는 점이다. 미국은 전후 질서를 설계할 때 자유와 규칙을 내세웠지만, 그 규칙은 언제나 미국의 이익에 맞게 적용되었다. 중국이 WTO에 가입해 급성장하자 미국은 돌연 “불공정”을 외쳤고,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자 제재를 가하면서도 자신들의 수많은 침략은 국제법의 바깥에서 정당화했다. 특히 지난 1월 3일 베네수엘라를 침공하고 국가수반을 납치 후 국제적 비난이 거세지자 곧바로 66개 국제기구에서 탈퇴를 선언한 순간은 그 이중성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이중잣대가 이제 미국 자신을 잠식하고 있다. 보고서가 말하는 ‘불도저 정치’란 사실 미국이 더 이상 세계를 자기 뜻대로 끌고 갈 수 없게 되었다는 자백이다. 힘의 균형이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그럼에도 보고서는 비서방 국가들이 구축하고 있는 새로운 질서를 여전히 ‘반응적 방어’로만 평가절하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아프리카 대륙자유무역지대, 아세안 중심 협력, 브릭스 확대 등 이미 미국 주도의 질서 바깥에서 새로운 규칙들을 실험하고 있다. 유럽조차 전략적 자율성을 말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만든 세계에서 벗어나 각국이 주권을 중심으로 재배치되는 세계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보고서는 결론에서 “파괴 뒤 재건”을 말하지만, 그 재건의 주어를 명확히 제시하지 못한다. 유럽이 방위비를 늘리고 산업 기반을 강화하면 된다는 식의 희망적 처방만 나열할 뿐이다. 여전히 미국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유럽의 심리를 반영한다. 하지만 진짜 재건은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짜 재건은 제국주의의 보호 질서가 아니라, 주권 평등과 상호 존중 위에 세워진 다극적 협력이다.
이 보고서는 한국 사회에 특히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미국이 동맹을 거래 대상으로 삼는 시대에, 남북 관계를 거짓 안보나 이념이라는 낡아빠진 대결 구도로 몰아가는 정책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다극화 시대의 안보와 생존은 냉전 때와는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유럽이 자율 방위를 논의하듯 우리는 미국의 보호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한반도 평화를 실질적으로 설계하고 실행해야 한다. 중국과 러시아, 북한을 무조건적 위협으로만 규정하는 서방의 논리에서 벗어나, 그들이 제시하는 다극적 질서를 냉정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뮌헨 안보보고서는 “향수는 전략이 아니다”라고 결론짓는다. 맞는 말이다. 더구나 그 향수가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대한 향수라면, 유럽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그 향수에서 벗어나야 한다. ‘파괴 아래’ 놓인 세계에서 진정한 평화는 제국적 질서의 잔해를 철거하는 데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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