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는 한국 조직폭력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시기다. 기업형 조폭이 이 시기의 현상이 됐다. <한국사회학회 심포지움 논문집>(2004.5)에 실린 공유식 아주대 교수의 논문 '한국사회의 조직폭력과 조직범죄'는 "1980년대의 조폭은 유흥업소·빠찡꼬·부동산투기 등을 통해 획득한 부를 바탕으로 합법적인 활동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방성수 <조선일보> 기자의 <조폭의 계보>는 1983년 이후에 "조직폭력배들의 전성시대"로 접어들었다며 "폭력조직들은 오락실·안마시술소·경마·재건축 등으로 사업 분야를 넓혀가면서 황금기를 구가"했다고 기술한다.
그런데 1980년대 초반에 대대적인 폭력배 단속이 있었다. 이때 있었던 삼청교육대 프로젝트의 명분은 폭력배 단속이었다. 삼청교육의 신호탄인 1980년 8월 4일 자 계엄포고 제13호는 "각종 불량배를 일제히 검거·순화함으로써 밝고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포고한다"고 한 뒤 "검거된 불량배는 일정 기준에 따라 분류·수용·순화 조치한다"고 예고했다.
2006년에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삼청교육대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1980년 12월 29일까지 군경에 검거된 '불량배'는 6만 755명이고, 그중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은 3만 9742명이다.
계엄사 주도하에 삼청교육을 담당한 부대는 총 26개 사단이다. 이만한 대군이 폭력배 순화교육에 동원됐다면, 조폭의 역사는 이 시기에 내리막길을 걸었어야 한다. 나중에 되살아난다 해도, 적어도 삼청교육 직후인 1980년대 초중반에는 "조직폭력배들의 전성시대"가 열리지 않았어야 한다. 그런데도 삼청교육 얼마 뒤인 1983년 이후로 조폭의 전성기가 열렸다. 삼청교육의 진짜 목적이 불량배 일소가 아니었고, 그곳에 끌려간 사람들 상당수가 조폭과 무관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어이없이 연행된 사람들
포고 제13호가 발포된 달에 서울 뚝섬유원지(지금의 뚝섬한강공원)에서 23세인 한일영씨가 연행됐다. 2017년 4월 12일 자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그는 부모들의 부탁을 받고 초등학생 7명과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경찰이 다가오더니, '서에 가자'며 그를 성동경찰서로 끌고 갔다.
그는 뚝섬 인근의 성동서를 거쳐 경기도 연천군 육군 5사단 연병장으로 연행됐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빨간 모자'들이 사람들을 짓밟고 굴리고 있었다. 삼청교육이라는 국가폭력 현장으로 그가 내던져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는 폭력배가 아니었다. 현행범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경찰은 다짜고짜 끌고 갔다. 한일영은 "문신 탓이었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수영장에서 훤히 드러난 그의 문신이 연행 사유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불량배 소탕을 취재한 기자들의 대담을 담은 1980년 8월 7일 자 <조선일보>는 어떤 사람들이 붙들려갔는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문신을 새긴 사람은 모두 중벌을 받았어요"라고 말한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인 1970년경에 경기도 가평에서 피아노 과외를 받으며 유복하게 살았던 한일영은 서울 성북구 삼선동의 할아버지 댁을 자주 방문했다. 그러다가 6학년 때인 1971년에 삼선동에서 경찰에 붙들렸다. 그날 입은 옷이 초라한 데다가 집 주소를 정확히 대지 못해 고아로 오인된 것 같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는 서울 은평구 응암동의 아동보호소에 수용되고, 약 8개월 뒤 경기도 안산의 선감학원에 보내졌다. 명목상으로는 부랑아 수용시설이지만 실제로는 인권침해 및 강제노역 현장인 곳에 보내진 것이다. 여기서 새긴 것이 그 문신이다. 1976년에 이곳을 탈출한 그는 4년 뒤 수영장에서 폭력배로 오인돼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한일영처럼 어이없이 연행된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위 대담 기사는 "우범 지역이나 유흥업소 부근을 배회하는 사람도 모조리 잡아들였어요"라고 말한다. 또, 요즘 말로 하면 카공족도 대거 검거됐다. "다방 같은 데에 아침 일찍 출근, 자리만 차지하고 하루 종일 앉아 있는 사람"도 단속 대상이라고 위 기사는 말한다.
무고한 국민을 감옥에 넣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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