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반도체 산단이 단순한 말잔치로 끝나지 않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현재 추진 중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조성을 과감히 중단하거나 전면적인 속도 조절에 나서는 것입니다.
기업이 동원할 수 있는 자본과 인력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용인에 수백조 원을 쏟아부으며 대규모 공장을 짓는 와중에 동시에 호남에도 전공정 팹을 올린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만약 이번 발표가 용인 산단을 다 짓고 난 후, 2030년대 후반이나 2040년대에 호남 투자를 시작하겠다는 식의 순차적 계획이라면, 이는 냉정하게 말해 시간 끌기용 카드이자 대국민 희망 고문일 뿐입니다.
벌써부터 그런 조짐이 보입니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24일 관훈클럽 초청 관훈토론회에서 "용인에 짓기로 한 것을 짓지 않고 지방으로 간다는 차원이 절대 아니다"라며 논의 중인 지방권 투자는 용인 이전이 아닌 "새로운 클러스터를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관련 기사 : 김용범 "호남·충청 반도체 클러스터, 용인 짓기로 한 것 옮기는 것 아냐"). 이건 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수도권 집중을 막고 RE100 요구에 부합하려면 호남 산단이 지금 즉시 시작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타임라인이 빠진 발표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입니다. 삼성전자의 경우 평택 P6 라인 완공 및 가동 이전에 호남 투자를 시작해야 하고, SK하이닉스는 용인 클러스터 1공장(팹)을 지은 후 2공장으로 넘어가기 전, 바로 호남으로 방향을 선회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국가 경제의 리스크를 줄이고 에너지를 찾아 움직이는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 기업들은 RE100 달성 목표 시기를 은근슬쩍 2050년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글로벌 빅테크 고객사들은 이미 '2030년'으로 데드라인을 못 박아두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발표에 명확한 타임라인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리스크 분산의 묘수
두 거인 기업의 투자 소식에 호남 지자체들이 제 살 깎아먹기식 유치 경쟁을 벌이거나, 반대로 특정 한 지역에 두 회사의 팹을 몽땅 몰아넣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반도체 팹을 지방으로 분산하려는 핵심 이유 중 하나는 지정학적·인프라적 리스크 해소에 있습니다. 과거 미국 텍사스 한파로 오스틴의 삼성 팹이 멈추거나 대만 지진으로 TSMC 라인이 멈췄을 때 글로벌 공급망이 어떻게 요동쳤는지 우리는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한 지역에 모든 시설을 몰아넣으면 전력, 용수, 가스 등 인프라에 가해지는 부담이 임계점을 넘게 되고,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나 사고 발생 시 국가 반도체 산업 전체가 마비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따라서 호남 내부에서도 철저한 분산 배치가 필요합니다. 가장 효과적인 시나리오는 한 회사는 전북에, 다른 한 회사는 전남·광주권에 배치하는 전략입니다.
전북은 새만금을 포함해 광활한 부지와 서해안의 풍부한 신재생 에너지 인프라를 바탕으로 대규모 전공정 팹을 안정적으로 수용하기에 최적입니다. 전남·광주는 이미 앰코코리아를 비롯한 글로벌 후공정(패키징) 기업들의 기반이 탄탄하게 닦여있는 만큼, 이를 연계한 첨단 반도체 전·후공정 벨트를 조성하기 유리합니다. 양사를 전북과 전남으로 나누어 배치할 때, 인프라 과부하를 막고 호남 전체가 골고루 발전하는 상생의 시너지가 완성될 수 있습니다.
K-반도체의 한계 깨기… TSMC·UMC와 유럽 팹까지 품어야
마지막으로, 이번 호남 반도체 산단 조성을 국내 대기업 두 곳만의 유치전으로 제한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더 넓은 세상을 봐야 합니다. 대한민국 반도체는 메모리 분야에서는 세계 최강이지만, 정작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자 전체 시장의 70%를 차지하는 시스템 반도체(파운드리 등) 시장에서는 세계 점유율이 단 3% 안팎에 불과한 고질적인 약점을 안고 있습니다.
이 한계를 깨부수기 위해 대만의 TSMC, UMC 같은 세계적인 파운드리 기업이나 인피니언,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같은 유럽의 첨단 시스템 반도체 회사들의 팹을 호남으로 유치하는 글로벌 오픈 전략을 정부와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펼쳐야 합니다.
현재 대만과 유럽의 반도체 기업들은 중국과의 지정학적 위기 분산과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동남아(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와 미국, 일본 등지에 공격적으로 해외 팹을 짓고 있습니다. 그들이 새로운 부지를 선택할 때 가장 골머리를 앓는 핵심 요소가 바로 안정적인 재생 에너지와 정교한 제조 생태계입니다.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는 전력·용수 인프라의 안정성, 숙련된 엔지니어 풀, 그리고 반도체 장비·소재 공급망의 성숙도 측면에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앞서 있습니다. 여기에 호남의 압도적인 재생 에너지 환경과 파격적인 세제 혜택, 인허가 특례 등 국가 차원의 딜이 결합한다면 글로벌 공룡 기업들을 끌어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해외 유수 기업들의 팹이 호남에 둥지를 트는 순간, 대한민국은 메모리 편중을 벗어나 명실상부한 세계 시스템 반도체의 허브로 한 단계 도약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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