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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내란 재판 때 '5·18 특별법 위헌' 주장한 전상석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현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저서에 [함석헌 평전], [고문과 학살의 현대사],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퀘이커교도. 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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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읽는 『반헌법행위자열전』 전상석 편

군 법무관 시절엔 군단장에 맞고도 굽히지 않아

동양통신 필화사건에 무죄 선고한 강직함도

사법파동 때 판사 153명 집단사표 주동했지만

조금씩 체제 순화, 재일 유학생 강종헌에 사형

고문 조작한 간첩단 박노수·김규남에도 사형

대법관 재임용 탈락 후엔 전경환·장세동 변호

전두환 회고록에 "여간 고마운 일 아니었다"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2권을 펼쳤다. 전상석(全尙錫, 1929~2001) 항목에서 가장 인상적인 일화는 그가 평생 사직서를 품고 다녔다는 것이다. 친구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유신헌법 시절 대통령긴급명령 조치에 불만하여 골프공에 무엇 무엇이라고 쓴 공을 치고 울분을 달래었"으며, 늘 사직서를 써서 갖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직서는 30년 가까운 법관생활 동안 단 한 번도 바깥 구경을 하지 못했다. 속으로는 울분을 삼키면서, 손으로는 사형을 선고하고 긴급조치를 집행했다. 이것이 전상석이라는 인물의 핵심적인 비극이다.

1929년 서울 아현동 출생, 양정중학교에서 법조계로

전상석은 호적상 1929년 9월 4일(실제로는 1928년 음력 7월 14일)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미동초등학교, 양정중학교를 거쳐 1952년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1954년 제6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군 법무관 시절, 거구의 군단장이 얼굴을 때리면서까지 부정처분 사건 피고의 석방을 명령했지만, 그는 "군법회의 재판도 거쳐야 한다"며 끝까지 명령을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권력 앞에서 굽히지 않는 청년의 모습이었다.

 

전상석(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세계사 속의 동류, '명판결과 오욕' 사이를 오간 법관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유형이 떠오른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치 집권 초기까지 활동한 일부 법관들은 처음에는 인권을 옹호하는 진보적 판결을 내렸으나, 체제가 강고해지면서 점차 그 체제의 도구로 변해갔다. 학자들은 이를 "점진적 동화(gradual accommodation)"라 부른다. 단번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타협들이 쌓여 결국 큰 타락에 이르는 과정이다. 전상석의 30년이 정확히 이 궤적을 그린다.

1970년, "기밀이 아니다"라는 명판결

전상석의 이력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1970년 동양통신 필화사건이다. 국방부장관이 국회에서 공개한 내용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기자들이 군사기밀 누설로 기소됐는데, 전상석은 "불특정 다수인에게 공개된 공연한 사실은 기밀이라고 볼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언론은 국가안보와 언론자유의 한계에 대한 '획기적' 판결이라 평가했다.

 

전상석.(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969년 박노수·김규남 사건, 사형선고, 그리고 43년 만의 무죄

같은 시기 전상석은 유럽거점 간첩단사건 1심 재판장으로 박노수와 김규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중앙정보부가 불법구금과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이었다. 박노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법학박사였고, 김규남은 현직 공화당 국회의원이었다. 1972년 7월, 두 사람은 재심이 진행 중이던 와중에 사형이 집행됐다. 2015년 12월, 대법원은 사형 집행 43년 만에 무죄를 확정했다. 재판부는 "사과와 위로의 말씀과 함께 이미 고인이 된 피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했다. 명복을 빌 대상이 이미 43년 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이른바 ‘유럽간첩단’사건으로 재판 받는 피고인들. 오른쪽에서 맨 끝이 박노수. 그 옆이 김규남이다. ⓒ 진실위 자료사진

1971년 사법파동, 눈물 흘리던 리더

전상석 이력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1971년 7월 사법파동이다. 검찰이 판사 3명에 대해 향응수수를 빌미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화가 난 판사들은 성격이 화통하고 리더십이 강한 형사8부 부장판사 전상석의 방에 모여들었다. "이럴 바에 우리 다 쥐약 먹고 죽어버리자"는 말까지 나왔다. 판사들이 문을 잠그고 커튼을 친 채 대책을 논의했고, 회의가 끝난 후 기자들이 들어갔을 때 전상석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서 사표를 썼다. 전국에서 153명의 판사가 사표를 제출하는, 사법사상 초유의 집단행동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1971년 사법파동을 보도한 ㄱ 해 7월 29일 조선일보 1면(나무위키)

유신 이후, 승승장구하는 '체제수호의 첨병'

그러나 사법파동은 허무하게 끝났다. 그리고 1972년 유신 선포 이후, 전상석은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승진했다. 사법파동 주역이었던 유태흥(1919~2005)이 형사지법원장으로 영전한 것처럼, 전상석도 체제의 일부가 됐다. 그가 사표를 썼던 그 손으로, 이제는 재일 유학생 강종헌과 김철현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들은 모두 재심에서 무죄가 됐고, 『반헌법행위자열전』은 "김철현은 2026년 현재도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다"고 적었다.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3·1민주구국선언, "교활한 이중인격자"

1976년 명동성당 3·1민주구국선언 사건 1심 재판장으로서 전상석은 김대중(1924~2009), 윤보선(1897~1990), 함석헌(1901~1989), 문익환(1918~1994)에게 징역 8년을 선고했다. 변호인단 26명이 항의하며 전원 사임했다. 피고인이었던 함세웅 신부는 그를 "아주 교활한 이중인격자"라고 평가했다. 변호사 홍성우는 다른 시선으로 "통이 큰 분"이라고 회고했지만, 같은 사건을 겪은 두 사람의 평가가 이렇게 갈린다는 것 자체가 전상석의 복잡한 양면성을 보여준다.

 

1976년 명동성당 3·1민주구국선언 사건 당시 함석헌. 이희호, 김대중.(함석헌기념사업회)

전두환 정권, 그리고 변호사가 되어서도 전두환을 변호하다

대법원 판사가 된 전상석은 1983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에서 문부식과 김현장의 사형을 확정했다. 전두환이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1986년 대법원판사 재임명에서 탈락한 후, 그는 변호사로서 전경환(전두환의 동생) 새마을비리 사건과 장세동 사건을 변호했다. 그리고 1996년, 전두환 내란재판에서 전두환의 변호인으로 나서 5·18특별법을 위헌이라 주장하며 재판부와 격렬히 충돌했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전상석에 대해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고 길게 적어 감사를 표했다.

 

전상석(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점진적 동화'를 겪은 법관들의 역사는 가장 위험한 경고로 남는다. 한 번에 타락하는 사람은 드물다. 작은 타협들이 쌓여 큰 타락이 된다. 전상석은 사법파동에서 눈물을 흘렸지만, 그 직후 유신체제의 승진 사다리를 올랐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전상석의 사직서를 떠올렸다. 평생 품고 다녔지만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은 그 종이가, 한국사법부의 가장 슬픈 상징으로 남아 있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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