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하나가 정책을 만들다
비슷한 시기 요크에서는 시봄 라운트리(Seebohm Rowntree, 1871~1954)가 자기 고향을 상대로 똑같은 조사를 벌여 최소한의 영양 섭취를 기준으로 삼은 "빈곤선" 개념을 만들었다. 부스와 라운트리의 조사가 겹치며 도출된 결론은 하나였다. 가난은 게으름의 결과가 아니라 늙거나 병들거나 실직했을 때 사회가 아무런 안전망을 제공하지 않는 구조의 문제라는 것. 이 결론은 곧 정치를 움직였다. 재무장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1945)는 부스의 자료를 들고 의회를 설득해 1908년 노령연금법을 통과시켰다. 영국 복지국가의 첫 벽돌이 통계표 한 장에서 나온 셈이다.
한국에 던지는 질문
지금 한국에서도 빈곤과 복지를 둘러싼 말싸움은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 논쟁의 상당수가 통계보다 신념으로 굴러간다. 누구는 복지확대가 나라를 망친다 하고, 누구는 부자 증세가 만병통치약이라 한다. 정작 "실제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어떤 이유로 가난한가"를 발로 뛰며 확인하려는 노력은 뒷전이다.
부스가 놀라운 이유는 그가 원래 복지 확대론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복지확대를 반박하려고 나섰다가 자기 손으로 만든 자료 앞에 무너졌다. 이념보다 사실을 앞세운 태도, 자기 예상이 틀렸을 때 결과를 인정한 태도, 이것이 한국정치와 언론에 가장 부족한 덕목 아닐까. 기초연금이나 최저임금, 기초생활보장제도 같은 정책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에서도, 누구의 확신이 아니라 누구의 조사가 더 촘촘한지를 따져 묻는 문화가 필요하다.
또 하나, 부스의 지도는 부자 동네와 가난한 동네가 얼마나 가까이 붙어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서울의 강남과 그 뒷골목, 재건축 아파트와 쪽방촌이 지하철 한두 정거장 거리에 공존하는 현실도 다르지 않다. 다만 한국은 아직 그 격차를 부스처럼 정직하게 지도로 그려 시민 앞에 내놓은 적이 없다. 불편한 진실을 색칠해 보여주는 용기, 그것이 백 년도 더 전에 어느 배 장사꾼이 남긴 가장 값진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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