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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11개 단 이 사람, 인생 제2막에서 던진 돌직구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한림대국제대학교대학원 정치경영연구소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1-09 오전 8:00:01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서울에 상경해 열심히 소설을 써대던 한 청년이 있었다. 그런데 8·90년대란 시대는 그가 원고지와 씨름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1991년 4월 20일에 강경대가 죽어 두 달 동안을 영안실을 돌아다녔다. 시신탈취를 막는 싸움판이 벌어지고, 울고불고 그때 진짜 미치겠더라. 당시 '재야의 장의사'라고 불렸다.(웃음) 딱 보면 이게 얼마짜리 장례인지 나왔다. 내가 정말 장의사인가 하는 생각도 했다.(웃음)"

늘 '허허하하' 웃는 그이지만 사실은 '서로 창자가 이어져 있다'고 할 만큼 각별하던 동생 박래전을 먼저 보냈던 아픔이 있다. "장례 치를 때까지 실감이 안 났다. 나중에 장례를 치르고 나니까 환상을 보기도 하고 환청 현상도 겪었다. 한동안은 하던 일을 아무것도 못하겠더라. 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해서 유가협(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에 가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인권운동을 하게 되었다"라고 한다. 동생을 잃은 아픔이 그로 지금도 고통의 현장에 더 깊게, 더 빨리 스며들게 하는 건 아닐까.

"대선후보들이 이야기하는 정책, 비전 등의 상당부분이 인권의 언어로 얘기할 수 있고 인권의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대선주자들이 인권을 내세우면 우리 사회의 깔려있는 보수층에서 싫은 기색을 하고 그러면 표가 날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인권을 앞세우려 하지 않는다"며 속상해한다. 그래서일까 그가 최근 김미화 씨와 함께 '인권의 눈'으로 본 대선 전망서인 <대선 독해 매뉴얼>(클 펴냄)를 내놓았다. "단지 잘 살겠다는 멍청한 구호에 속지 말고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 때문에 얼마나 사람이 많이 죽는지 제대로 알자. 경제문제도 인권의 관점으로 접근해서 풀어야 한다"는 그의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 묵직한 돌직구를 날려주었으면 참 좋겠다.

"운동권 진영에서 가장 큰 문제가 정파적인 문제다. 이런 것들이 자꾸 운동을 왜곡시키고 대중들의 참여를 막고 그들의 자발성이 분출되는 것을 막는 것 같다. 정파가 종파화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식으로 가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역량을 결집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라며 대중과 유리된 채 정파 이익 중심의 운동을 전개하는 운동권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내가 용산철거민 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용산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을 맡게 된 것도 정파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운동권 내 여러 정파가 서로가 견제하는 상태에서 나는 그동안 인권운동가의 삶을 살아오면서 두루두루 다 친하고 실용적이고 실사구시적이라 일은 일로써 얘기하자고 하면서 용산 사회를 맡게 된 것이다.(웃음) 마이크를 잡는 순간 '이건 구속이구나'라고 생각했고 예상대로 갔다(웃음)"라며 허허 웃는다.

"나는 지금 인생의 제2막을 살고 있다. 소설가가 되려는 꿈을 갖고 대학에 들어가서 소설을 썼던 것까지가 제1막이다. 그다음은 원치 않는 운동권이 되어 운동을 사는 게 제2막이다. 2막을 60살까지 살려고 한다. 제3막의 삶은 1막에서 못 이룬 소설가의 꿈을 이루는 것이다."

운동 정파들 간에 대립으로 인해 문제를 조정해낼 이가 없을 때 '이건 구속감이구나'를 알면서도 마이크를 잡은 그. "인권센터를 통해, 대리하는 운동이 아니라 피해자가 스스로 주체로 서게 하는 인권운동과 사람들이 차분히 인권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자기의 권리를 찾아가는 길을 밟아갈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의 모델을 만들어 가고 싶다"는 그. 그가 바라는 인권센터가 속히 건립되었으면, 그래서 인권의 인프라가 우리 사회 곳곳에 세워졌으면. 그래서 그를 집회 장소가 아닌 소설가 박래군 책 사인회에서 날이 속히 왔으면.



▲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프레시안(최형락)


별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까지 11개를 다신 걸로 알고 있는데 이후 추가된 것은 없나(웃음)

추가될 가능성은 앞으로 있다. 희망버스 재판이 중단됐는데 이게 확정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고 이번에 생명평화대행진도 잘 되면 또 별을 달수도 있다.(웃음)

지금까지 수감 생활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때를 꼽는다면?

스물여섯 살 때 들어갔을 때 감옥에서 겪을 수 있는 것은 다 겪어봤다. 나는 원래 여리고 소심한 사람이긴 하지만 감옥에서 있을 때 항상 싸우는 일을 많이 했고 그래서 걸핏하면
보안과 지하실에 끌려가서 맞고 묶이고 징벌방에도 갔다. 그 속에서 투쟁도 배우고 민중의 삶도 배웠다. 그때 감옥이 정치 대학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87년 4월 13일 영등포 교도소에서 형이 확정되어 대전교도소로 이감되었는데, 대전교도소는 일반수들도 꼴통들만 가고 양심수들 중에서도 문제가 많은 사람들만 골라서 보내는 곳으로 유명하다. 수감되었을 당시, 직선제 개헌을 번복하는 4.13 호헌조치까지 있었으니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다. 5월에 소 내에서 교도관들하고 싸움이 있었다. 5.18 단식 농성을 3일 하고 난 뒤 기운도 없는데 나를 붙잡아 돼지묶음이라고 해서 다리랑 손을 묶어 독방에 갖다 집어넣었다. 그동안 수없이 수갑도 차보고 묶이기도 했는데, 대전교도소는 정말 질이 달랐다. 못 견디겠더라.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혀를 깨물었다.

죽겠다고 혀를 깨문 것인가?

당연히 죽겠다고는 안했다.(웃음) 혀를 깨물어 피 좀 흘리면 풀어주겠지 하는 기대감에 그랬다.(웃음) 그런데 혀가 안 끊어지는 거다.(웃음) 그래서 혀를 내밀고 턱을
바닥에 찧으니까 피가 나왔다. 피를 고아서 벽에 피를 뱉어 고함을 지르니 교도관들이 들어왔는데 풀어주지는 않고 소리 지른다고 방성구(防聲具, 재갈)를 물리고 포승줄을 더 쪼였다.(웃음) 몇 시간을 있다가 겨우 풀려나 간 곳이 당시 비전향 장기수들을 수용하고 있었던 특별사동 6동이었는데, 장기수들을 전향 공작하기 위해 일부만 따로 관리하는 '육사하'라는 곳이었다. 거기는 형량이 무기, 10년, 7년 등의 국가보안법 사범들이 있는 곳이었는데, 나는 집시법에 2년형을 받고 거기에 수감된 것이다. 두들겨 맞고 제대로 치료도 못 받으니 고름도 끼고 세게 묶인 곳에는 물집 잡히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보다 훨씬 더 심한,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이 도리어 나를 위로해주고 돌봐주는데 너무나 위로가 되었다.

그때 나는 말하자면 입에 혁명을 달고 사는 기고만장한 혁명가였다. 교도소 투쟁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승승장구했던 투쟁의 경험을 가진 투사 말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보며 내가 지금껏 얼마나 교만하고 오만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 사람들은 새벽 4시든 5시든 자기들이 정해놓은 시간이 되면 딱 일어나서 냉수마찰하고 걸레질하고 명상하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생활했다.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정말로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내가 20대였으니 한참 아래인데도 불구하고 50대, 60대인 분들이 나에게도 꼭 '박 선생'이라고 존대했다. 운동한다고 하면서 하수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치면서 운동가가 겸허해야지, 자기를 내세우면 안 된다는 것들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반성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고 나와서 지금 이렇게 사는 게 아닌가.(웃음) 나는 13개월 살다가 6월 항쟁 가석방으로 나왔는데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20년, 40년을 살면서 변혁에 대한 신념들을 꺾지 않고 사는 모습이 또 새롭게 운동가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었다.

운동을 하면서 힘들어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은 없었나?

운동만 30년 동안 했었는데 왜 없었겠나. 세 번 정도 고비가 있었는데 공통적으로 모두 사람이 싫어졌을 때이다. 사람 때문에 너무나 상처를 입었을 때는 정말 운동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의 진심이 오해받는 부분이 있으면 풀면 되는데 이것이 풀리지 않고 저쪽에서 의도를 가지고 밀어붙여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고 들어올 때는 정말 미치겠더라. 그럴 때면 친한 놈 하나 불러서 계속 술 마신다.(웃음) 그러다가 다른 일 하다 보면 잊고 그러면서 살아온 것이다. 사람 때문에 힘들고 아프고 또 사람 때문에 즐겁고 보람되는 것이 운동인 것 같다.(웃음) 내 경우에는 소심해서 이건 아니다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다음부터는 어떻게 해서든 피하든지 안 섞이려고 한다. 말하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니까.(웃음) 그렇지만 대개는 폭넓게 사람들을 만나고 원만한 관계를 만들려고 한다.


그런 힘든 일을 만날 때도 결국 운동을 포기하지 않는 힘은 무엇인가?

대부분은 사람들은 자기의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내게 온다. 유가협 시절에는 수많은 죽음의 문제, 고문의 문제들이 내게 찾아왔다. 20대 말, 30대 초반에 내가 봤던 시체와
사진만 해도 꽤 많다. 맨 처음에는 끔찍해서 못 보겠던 것이 나중에는 시간 없으니까 사진을 보면서 밥을 먹기도 했다.(웃음) 경찰이나 정부에 의해 고문당했던 사람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그 사람 일이 더 이상 그 사람 일이 아니라 내 일이 된다. '아이씨~ 이런 것을 왜 그냥 놔두지? 이런 것을 외면하고 내가 어떻게 뭘 하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사람보다 내가 더 화가 난다. 특히 그 문제가 착하고 좋은 사람들의 문제라면 더 그렇다. 대추리 사람들하고 지금도 만나는데 사심 없이 통하니까 그 사람의 문제가 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엄청 피곤하게 산다.(웃음) 하지만 이렇게 살다 보면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배우는 때가 많다. 다른 삶을 배워가는 것도 좋고 사람들 자체가 좋으니까 이 운동을 계속하는 거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받는 힘도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박래군의 삶을 생각하면 동생 박래전 열사의 죽음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박래전이 독재타도를 외치며 분신을 했는데, 민주화운동을 하며 많은 열사들의 장례를 함께 치러왔겠지만 막상 동생의 장례를 치를 줄은 몰랐을 것 같다. '서로 창자가 이어져 있다'고 할 만큼 각별한 사이였다고 들었는데 동생의 죽음이 지금의 박래군이 있게 한 것인가?

막상 내 일이 되니까 정신을 못 차리고 장례치를 때까지 실감이 안 났다. 나중에 장례를 치르고 나니까 환상을 보기도 하고 환청 현상도 겪었다. 동생이 키가 컸는데 비슷한 애들을 보면 동생이 보이는 것이다. 분명 내 동생이 "형!"하고 부르는 것 같은데 돌아보면 아니었다. 한동안은 하던 일을 아무것도 못하겠더라. 그러다가 이소선 어머니가 유가협에 나오라고 해서 한 번씩 가서 도와주고 하다 보니까 어머니 아버지들하고 못 쓸 정이 들어 버린 거다.(웃음) 특히 이소선 어머니는 거리를 뒀어야 했는데.(웃음) 사실 유가협에 안 들어갔으면 뭐가 됐을지 모르겠다. 노동운동을 하고 싶었으니까 지금쯤 민주노총에서 뭘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해서 유가협에 가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인권운동을 하게 되었다.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가족이 안 됐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해본다.

동생을 잃었던 경험이 있기에 사람들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나?

그런 것이 있다. 큰 아픔을 겪은 사람일수록 폐쇄적이게 된다. 유가족들은 대중들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것을 자기와 비슷한 아픔을 겪은 사람한테는 가슴을 열고 말한다. 동생을 잃은 아픔으로 인해 공감능력이 커진 탓도 있지만 사실은 같은 경험을 공유한 동질감이 서로에게 있는 것이다.

(故 박래전 열사(당시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는 1988년 6월 4일 "광주는 살아 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파쇼 타도하자"를 외치며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자살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정권을 이어 받은 지 3개월, 민주적 정권교체라고는 하지만 전두환 군사정권이 노태우에게 사실상 권력을 그대로 위임했다. 게다가 87년 6월 항쟁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채 나라는 88올림픽 준비로 분주했다. 박 열사의 장례는 '민중해방열사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재야인사와 학생, 시민 등 4000여 명이 참석했다. 장례식 후 학생들은 '반민중적 올림픽 결사반대'를 외치며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일상을 보면 정말 하루가 분 단위로 나뉘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계속 뛰어다니다 보면 스스로 고갈된다고 느끼는 순간은 없나?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사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활동하면 오래 못 간다. 운동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인데 만약 주체성이 없으면 재미도 없다. 물론 필요에 나를 맞추는 경우도 있지만 같이 기획하고 그 가운데 나의 주도성을 인정받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내가 운동을 요구하기도 한다.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현장에 스며드는 것 같다. 지치지 않으려면 스며들되 때로는 쿨함도 유지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떤가?

쿨 하지는 못하다.(웃음) 사람들 앞에서는 잘 안 우는데 대추리, 용산 때는 뒤에서 많이 울었다. 마치 내가 대추리 주민이고, 용산에서 같이 장사했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현장에 잘 스며드는 이유가 내 외모 덕분이다. 편한 동네 아저씨처럼 생겨서 동네 사람들이 날 형, 동생으로 부르며 편해한다. 그래서 먼저 만난 자기들보다 더 빨리 친해진다며 활동가들이 늘 부러워한다.(웃음)

운동을 하다 보면 내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거지 운동의 주체는 당사자들이 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의 성과도 그 사람들이 가져가는 게 맞고 패배도 그들의 질 수 있어야 한다. 싸움의 결과가 잘 되든 안 되든 우리는 또 다른 현장으로 가지만 그 사람들은 남아서 이 문제를 평생 안고 산다. 그렇기 때문에 활동가들이 내가 이 싸움을 이겨야 하고 내 몫이라고 생각하는 교만을 버려야 한다. 이 부분은 문정현 신부님께 많이 배웠다.

어찌 보면 용산참사 때 신부님을 내가 끌어들인 꼴이었는데 도중에 우리 상황실 쪽과 사제단이 의견을 달리할 때가 많았다. 재판에 어떻게 임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신부님 쪽은 전면 거부였고 우리는 진실규명을 위해서라도 재판과정을 밟아야 한다고 했다. 장례 협상할 때도 우리는 장례협상을 빨리해서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신부님들은 지방자치 선거까지 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서로 상당히 평행선을 달린 상태에서 감정적으로 좋지 않았다. 실제로 신부님이 내가 명동성당으로 수배생활 하고 있을 때 잘 안 찾아오셨다. 그런데 이 과정을 푸는 과정에서 신부님께서 "이 투쟁의 주체는 유가족이고 범대위다. 그들이 하는 것에 우리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박래군이 나와 의견은 다르지만 동지로서 존중한다"라고 하시는 거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도 신부님께서 얼마나 속 쓰려 하시는지.(웃음) 그래도 이렇게 자기주장을 포기하시는 분이 바로 문정현 신부님이다.

인권 문제가 발행한 현장에서 운동가들의 주장이 이해당사자들이 당면한 과제를 풀어가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질 때도 있는 것 같다.

운동권 진영에서 가장 큰 문제가 정파적인 문제다. 내가 용산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을 맡게 된 것도 정파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운동권 내 여러 정파가 서로가 견제하는 상태에서 나는 그동안 인권운동가의 삶을 살아오면서 두루두루 다 친하고 실용적이고 실사구시적이라 일은 일로써 얘기하자고 하면서 용산 사회를 맡게 된 것이다.(웃음) 마이크를 잡는 순간 '이건 구속이구나'라고 생각했고 예상대로 갔다.(웃음) 정파가 없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것이 사람들의 시야를 가둬 두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유리한 대로 끌고 가려고 하고 이런 것들이 자꾸 운동을 왜곡시키고 대중들의 참여를 막고 그들의 자발성이 분출되는 것을 막는 것 같다. 정파가 종파화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식으로 가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역량을 결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인권운동하면서 나도 모르게 어느 정파에 속해있기도 했는데 그게 참 별 볼일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들어 유가협에서 장례를 치르는데 NL열사면 내가 NL이 아니라고 해서 안 갈 것인가? 그렇지 않은 거다. 그 죽음 앞에서 내 입장에서 다르다고 하더라도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파적인 것을 내려놓자고 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보적 인권운동론을 주창하는 사람이다. 인권을 가지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에 우리 사회에 들어와 있는 주류 인권운동과는 다른 결의 인권운동을 '인권운동사랑방'을 통해 개척해 왔다고 생각하는데 내년이 어느새 '인권운동사랑방'이 20년이 된다.

유가협에서 활동비 15만 원을 받고 활동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정말 적은 돈이었는데 생활을 어떻게 했나?

1991년 3월 초에 정말 생계대책 없이 결혼을 했다. 결혼하고 한 달 좀 있어 91년 4월 20일에 강경대가 죽어 두 달 동안을 영안실을 돌아다녔다. 시신탈취를 막는 싸움판이 벌어지고, 울고불고하는 영안실에서 신혼기간 대부분을 살았다. 그 때 진짜 미치겠더라. 당시 '재야의 장의사'라고 불렸다.(웃음) 딱 보면 이게 얼마짜리 장례인지 나왔다. 내가 정말 장의사인가 하는 생각도 했다.(웃음) 그렇게 몇 달 후에 집에 들어가니까 아내가 결혼 축의금으로 들어온 돈도 다 쓰고 이제는 돈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며 울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정말 무책임하게 "어쩌느냐. 그냥 되는대로 살자" 그랬다. 사실 아내가 많이 고생했다. 아내가 자기는 운동을 접고 돈을 벌 테니까 나더러 운동을 하라고 했다. 정말 고마웠다.

마지막까지 인권운동사랑방에서의 활동비는 36만 원이었고 나머지는 원고를 써서 돈을 벌었다. 정말 원고 기계였다.(웃음) 그렇게 해야지만 교통비랑 최소 후배들을 만나면 낼 술값을 벌 수 있었다.(웃음) 아내가 올해 7월 달까지 15년 동안 동네에서 초등학교 애들 상대로 글쓰기 학원을 한 덕분에 여태껏 살아왔다. 정말 조강지처다.(웃음) 어려운 구조에서 생활을 책임져주고 지지해주고 그러니까 우리 아이들도 나를 지지해준다. 그러니 나 혼자 운동을 한 것이 아닌 것이다. 가족에게 참 고맙다.

가족이 지지해주고 밀어주지 않았으면 활동하기가 편치 않았을 텐데. 아이들은 어떤가?

사실 감옥에 가고 수배생활을 할 때 아이들 걱정이 됐다. 그런데 아이들이 아빠 하는 일에 굉장히 지지해주고 박수를 보내준다. 대추리 때 아내가 탄원서 쓸 때 우리 큰 딸은 아빠가 잘못한 거 없으니까 판사한테 비굴하게 굴지 말고 당당하게 쓰라고 했단다. 용산참사 때문에 수감되었을 때는 아빠 면회 간다고 (학교를) 땡땡이도 치고 그랬단다.(웃음) 애들이 중학교 때까지는 "아휴, 인권운동가라고 하면 애들이 뭘 알아야지. 설명하기가 복잡해"라며 나를 회사원이라고 그러더니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우리 아빠가 인권운동가라고 하고 다닌다. 그중에서 좋은 담임을 만나면 내 이름 정도는 아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단다.(웃음)

엄중하고 무거운 시대의 과제에 늘 반응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낭만이 있고, 아름다운 추억들도 있었을 것 같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꼽는다면?

우리는 참 불행한 시대에 살았다. 그 시절은 내 행복 찾으면 미안한, 대학생인 것 자체가 죄송스러운 그런 때였다. 광주에서 사람을 죽이고 전두환이 집권했고 학교 강의실, 도서관까지 경찰이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도대체 행복하게 산다고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거기에 운동을 한다고 하면 감시가 따라붙으니 한시도 긴장을 늦추면 안 되었다. 그래서 운동권 내에서는 연애금지였다.(웃음) 나중에는 뒷구멍으로는 다 했지만 말이다.(웃음)

ⓒ프레시안(최형락)
내 청춘은 그런 중에서도 되게 더럽다.(웃음)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에 1학년 때는 학생운동 이런 것은 일절 무시하고 소설 쓰고 술만 마셨다.(웃음) 그때가 참 행복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악마의 손길에 의해(웃음) 운동권이 되었고 그 뒤로는 정말 치열하게 살았다. 한 1년 동안 학생운동을 하다가 이제는 재밌게 운동하나 보다 하다가 강제징집을 당했고, 일주일 동안 서대문경찰서에서 두들겨 맞고 그날로 강원도 양구에 있는 훈련소 가서 또 두들겨 맞았다. 맷집이 약했으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웃음)

자대배치를 받았는데 거기에서도 엄청 맞았다. 군대라는 곳이 아무리 사회에서 잘난 놈이라고 해도 이등병 배지 달고 있으면 후줄근해 보이는데 거기다가 훈련소에서 새까맣게 타서 왔으니, 내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겠는가. 고참이 사회에서 뭐하다 왔느냐고 해서 솔직하게 대학 다니다 왔다니까 무슨 농사짓다 온 촌놈처럼 생겨서 거짓말한다고 엄청 때리더라.(웃음) 거기다 연세대학교 나왔다고 하니까 또 때리더라.(웃음) 그렇게 억울하게 두들겨 맞았다.(웃음) 그런 후에 대변을 누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바지를 끌어내리는데 팬티가 안 내려가더라. 엉덩이가 터져서 눌어붙은 것이었다. 그것을 끌어내리면서 그 안에서 진짜 서럽게 울었다. 그때 외모차별 당한 게 한이 되어 그 한으로 인권운동을 하게 되었나 생각하곤 한다.(웃음)

아니다. 친근하고 귀엽게 생기셨다.(웃음)

옛날에는 촌스럽기가 더했다.(웃음) 노동운동할 때 위장취업을 하려면 사람들이 노동자 티가 나게 변장을 해야 하는데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웃음) 시골에서 일하다가 왔다고 하면 바로 통과였다.(웃음) 86년 인천 5.3항쟁 때는 경찰의 경비가 굉장히 삼엄했는데 저 안에 화염병을 반입해야 했다. 그런데 나더러 엿장수로 위장해서 리어카(손수레)에 화염병을 잔뜩 싣고 끌고 들어가라는 거다.(웃음) 경찰이 처음 저지선을 통과할 때는 나를 의심 없이 보냈다가 한 5미터 정도 갔을 때 "저거 뭐야? 뒤져봐!" 그러더라.(웃음) 그때 내 동지들이 뛰어 나와서 경찰을 가로막고 나는 리어카를 끌고 들어가고 그랬다.(웃음). 5.3 동의대 사태(1989년 5월 입시부정에 항의하는 부산 동의대 학생들이 학내로 진입한 전투경찰을 감금했다. 감금된 이들을 구출하려는 경찰과 학생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경찰 7명이 사망했다) 때 썼던 화염병은 내가 다 나른 거다.(웃음) 그 정도로 내 외모가 출중하다.(웃음)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고 하셨는데, 대학교 1학년 때 연세문학상 소설부문에 당선되었다고 들었다. 소설 내용이 궁금하다.

제목이 "땅강아지"로 우리 시골이야기다. 아버지는 아들하고 같이 농사짓고 싶어 하고 아들은 도시로 가고 싶어 하는데 그러다가 아들이 힘든 농사일을 하다가 야반도주하는 이야기다. 문제작이었다.(웃음) 그런데 그 원고를 잃어버렸다. <연세춘추> 신문사에 가 봐도 없더라.

앞으로 소설을 써볼 생각은 없나?

나는 지금 인생의 제2막을 살고 있다. 소설가가 되려는 꿈을 갖고 대학에 들어가서 소설을 썼던 것까지가 제1막이다. 그 다음은 원치 않는 운동권이 되어 운동을 사는 게 제2막이다. 이 2막의 삶을 길게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2막을 60살까지 살려고 한다. 제3막의 삶은 1막에서 못 이룬 소설가의 꿈을 이루는 것이다.(웃음)

1막에서 못 이룬 소설가의 꿈을 이루는 것. 그게 인간 박래군이 꾸는 꿈인가?

60살이 되면 운동을 정리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람이 나이를 먹어서 대표 자리에 있는 것이 운동의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운동의 정년을 둬야 할 것 같다. 나이가 드니까 체력도 체력이지만 판단력도 흐려지고 보수화되더라. 옛날보다 훨씬 더 급격하게 변하는 흐름을 못 따라가는 것 같다. 보수가 되려고 하지 않는데 시대의 흐름을 못 좇아가면 보수가 되는 거다. 운동이 더 혁신적이 되고 젊어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오래된 사람들이 대표 자리를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뒤에서 밀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모습으로 정리를 하고 싶다. 내가 없다고 뭐가 안되는 게 아니다.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마음을 갖기가 사실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도 바뀐 거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도 현장에서 죽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것도 욕심이더라. 이제는 다른 욕심을 부려보는 거다. 나도 내 인생을 살아보자고 생각하는 것이다.(웃음)

현안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문제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를 바꾸는 것도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인생 3막에 정치가가 되어 제도를 바꾸는 일에 뛰어볼 생각은 없나?

없다. 정치는 너무 머리 아픈 것 같다.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나. 드라마 추적자를 보니까 강동윤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 "정치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은 한다." 내가 정치인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일 수도 있는데 진짜 맞는 말 같다.(웃음) 사실 나는 내가 하는 게 이미 정치라는 생각을 한다. 프랑스 철학자 자끄 랑시에르가 '이 사회의 주류가 아닌 비주류, 소수의 사람들이 하는 것이 진짜 정치지 주류가 하는 것은 지배'라고 얘기를 했는데 참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진짜 정치란 누군가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갈등들을 조절하고 자기 권리를 못 찾고 있는 사람들로 주체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하는 인권운동은 아주 훌륭한 정치라고 생각한다. 이런 훌륭한 정치를 30년 이상 해온 것이니까 정치에 미련이 있겠는가.(웃음)

그리고 나는 군사정권 때부터 운동을 해왔다. 계속 운동을 하고 싶어서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대학원도 안가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대학은 졸업했지만, 오로지 운동가로 갈 수 있는 길만 가겠다고 하고 여러 갈림길을 다 차단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이 바닥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을 김대중 정부부터 끌어당기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와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인권과 관련되어 여러 자리가 있었는데, 나는 단 한번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들어가 8개월 동안 봉사했다. 그런데 그것을 하고 나서는 절대로 정치영역으로는 안가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런 자리에 가면 우리가 받는 활동비의 다섯 배까지 받을 수 있고, 그 돈으로 우리 활동하는 후배들과 단체들을 팍팍 밀어줄 수도 있다.(웃음) 정치가 잘 커야 하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정당에 한 번도 가입하지 않고 운동만 한 것은 정치보다 사회운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이 광범위한 토대들을 형성하고 성장할 때 진보정치도 제대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진보정치를 하겠다고 운동하던 역량들을 다 끌어넣어서 정당정치를 하지만, 만약 이 진보정당이 망했을 때 사회운동도 같이 망하게 되는 위험성이 있다. 남미의 니카라과의 경우가 그렇다. 니카라과에서 79년에 좌익운동세력이 정권을 잡아서 올인을 했다가 그 정권이 무너지자 운동도 한 번에 무너졌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을 약화시키면서 진보정당이 가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 강화되면서 진보정당이 가야 하는 것이다. 만약 사회운동역량이 어느 시점까지 가서 넘쳐나서 정당을 만들어야 하는 요구가 생기게 되면 정당이 만들어지고 사회운동이 그것을 풍부하게 끌어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사회운동에 대한 충분한 대책과 전망 없이 정당운동으로 바로 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안에 대해서 들어가 보자. '인권피해 현장에 뛰어들어 피해자들 대신 싸워주는 것으로 활동가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대리전 방식이야말로 활동가들의 에너지를 갉아먹고 인권 피해자들을 대상화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고민 끝에 인권센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1998년 '양지마을 사건'이라고 큰 이슈가 되었던 일이 있었다. 충남 연기군에 한 부랑인 수용시설이 있었는데 진짜 감옥보다 더한 비참한 곳이었다. 거기에서 탈출했던 어떤 한 사람의 얘기를 듣고 일주일 동안 조사를 해서 당시 국민회의 이성재 의원과 몇몇 단체와 함께 그곳에 쳐들어가 거기에 갇혀 있었던 300여 명이 되는 사람들을 전부 해방시켰다. 그 사건이 터지고 언론에는 '노예의 섬'이라고 해서 기사화되었고 우리는 거기서 나온 사람들을 위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대행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 상당수가 가족들에게 버림받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사회복지시설은 죽어도 가기 싫다고 해서 더 이상 손 쓸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나중에 수소문 해보면 이들 대부분은 노숙인이 되어버리거나 죽어 있었다. 이 일을 겪으면서 '과연 무엇이 잘못됐나' 고민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모든 것을 대행해서 언론에 폭로도 하고 소송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옆에서 돕고 그들이 스스로 이 문제를 풀도록 했으면 그 사람들이 이후 노숙자가 되고 알콜중독자가 되어 거리에서 죽어가는 일이 없지 않았겠느냐 하는 생각을 했다. 인권센터를 통해 대리하는 운동이 아니라, 피해자가 스스로 주체로 서게 하는 인권운동과 사람들이 차분히 인권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자기의 권리를 찾아가는 길을 밟아갈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의 모델을 만들어 가고 싶다.

용산참사 같은 경우를 봐도 일반 소시민으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상황이 떨어졌을 때 평생 인권에 대한 사실을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살던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겪었을 때 허둥지둥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인권활동가들이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태이고 이런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생각을 한다.

맞다. 독재 정권 때는 억울하다는 생각조차도 못 했었고, 조금 상황이 나아졌을 때는 억울하지만 어떻게 해볼 수 없으니까 그냥 지나쳤던 것이 지금은 사람들의 의식이 좀 높아져서 자신이 인권을 침해당한 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소송까지 가는 경우들이 꽤 있다. 그런데 이것들이 굉장히 이기적으로 수용되어 있다.

'이기적으로 수용되어 있다'는 말이 어떤 뜻인가?

'내 인권피해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이 인권침해를 당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그것을 굳이 뛰어들어서 휘말려? 송사에 휘말릴 수도 있는데?' 하면서 문제제기를 안 한다는 거다. 이렇듯 인권문제가 철저하게 개인화 되어 있고 이기적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운동진영에도 존재한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매일 욕하는 것이 '평소에는 남의 인권에 대해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너네 해고당하면 인권운동 찾느냐?'라는 것이다. 인권운동이라는 것은 일종의 '품앗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평소에 정말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공감하고 같이 싸울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특히 IMF 이후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던 연대의 가치들이 철저하게 깨져 나갔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진보운동이 엄청난 패배를 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1위고 범죄율도 엄청나게 높아지고 있지 않나. 사람들이 옆에서 죽어나가는 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있다. 내 일이 아니기도 하고, 이런 일들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웃음)

그 맥락에서 볼 때, 용산참사가 무분별한 재개발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이어지지 않은 것엔 자신 또한 언젠가 재개발로 인해 이익을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대중의 심리도 일정 정도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용산 문제는 그런 측면이 굉장히 강하다. 당시 나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목격했으면서도 함께 추모하지 않을까?' 굉장히 고민했다. 사람이 여섯 명이 죽었던 현장의 참혹한 광경을 인터넷 생중계로도 보고 텔레비전으로도 수없이 보고 이제는 <두 개의 문>같은 다큐멘터리로 보면서도 사람들이 왜 침묵하는지 의아했다. 김수환 추기경이라든가, 노무현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같은 경우는 광장에 모여 열렬하게 추모했는데 말이다. 물론 경찰이 원천봉쇄해서 추모대회도 못하고 남일당 현장도 가까스로 유지했던 상황이었으니까 그랬다고 하지만 그 이전에 사람들이 용산 문제 자체를 굉장히 불편하게 여기는 것 같더라.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속에 '나도 내 집 마련하고 싶은데 이게 월급 모아서는 안 되고 땅 투기 같은 것을 해서 한몫 잡고 싶다'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가지고 있는데, 용산 참사는 그런 나의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직시하게 한 사건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뜻 추모의 광장으로 나오지 못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런 가운데도 355일 동안 현장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용산참사로 돌아가신 분들과 철거민들의 처지에 공감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의 연대가 있어서 가능했다. 그래서 버텨낼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던 것, 스스로가 스스로를 잘못이라고 비판해야 했던 상황은 맞았다. 그런 불편한 진실이 바로 용산이었다.

ⓒ프레시안(최형락)
다시 인권센터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현재 10억 원을 목표로 모금을 시작해 5억 원 넘게 모금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얼마 동안에 이렇게 모으신 건가?

2010년 하반기부터 시작했고 실제로 모금활동에 들어간 것은 2011년이니 1년 동안 5억 원 정도 모은 거다. 목표한 것의 반밖에 못 했다.(웃음) 올해 들어와서는 모금을 중단하고 남산 안기부 터를 확보하기 위한 캠페인을 했고, 일정 정도 성과가 있었다. 서울시가 민간 쪽에 공간을 주는 방향으로 해서 남산 안기부 터를 민주·인권·평화의 가치와 관련된 공간으로 쓰게 될 것 같다. 그것은 그것대로 확보하고 원래 우리가 만들려고 했던 민간 독자의 인권센터를 세울 홍대 근처 조그만 집을 마련하기 위해 내년 3월까지 작정을 하고 나머지 돈을 또 모아야 한다.(웃음)

인권센터가 꼭 민간에 의해 독자적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는 지방자치 단체들에서도 인권조례가 만들어지고 전국의 기초 단체까지 하면 16개 시군구에서 인권조례가 이미 만들어졌고, 인권센터와 인권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런 추세가 확산될 것이다. 희한한 것은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 인권이 엄청나게 탄압되고 억눌러지고 있고 국가인권위원회조차 '삐딱선'을 타고 있는데, 저변에서는 인권의 토대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거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지는 인권센터는 아무래도 관이 주도하게 된다. 그런데 민간독자에 의한 인권센터라고 하는 것은 인권단체들이 자기 프로그램을 돌릴 수 있고, 또한 시민들이 쉽게 찾아와서 인권을 배우고 접하고 스스로 자기 활동을 모색해가는 것들이 가능해진다. 사실은 민간의 것들이 먼저 잘 꾸려지고 이 시민의 힘에 의해서 국가 인권위가 만들어져야 하는데, 비록 순서가 바뀌었긴 했지만 어쨌든 민간의 인권센터를 만들어 내겠다는 거다. 우리가 10월부터 다시 12월까지 막바지 모금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다녀야할 것 같다. 굳이 인권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지역의 진보적인 정치의 공간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친근한 삶의 현장 옆에 이런 공간들이 있어 주민들이 모이고 그 사람들이 모여서 민주주의적인 토론 과정도 겪어보고 문제를 같이 풀어가는 것을 경험해보면서 세상의 변화를 위한 진보적 토대들이 아래로부터 만들어지게 해야 한다. 많은 곳들에서 우리가 인권센터를 어떻게 만드는지 보고 있다. 우리가 먼저 인권센터의 좋은 모델을 만들고 이것이 전국적으로 만들어져 관 쪽에서도 만들고 민간에서도 만들어져서 이것이 5년, 10년이 가면 상당한 자산이 될 것이다. 그런 행복한 구상을 해보는 거다.(웃음)

현장 중심의 활동에서 이제는 인권운동의 인프라를 만드는 것으로 운동의 방향을 옮긴 것인가?

우리 사무처 친구들이 늘 불만이다.(웃음)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로 인권센터를 만드는 것에 집중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다. 매일 사무실에 나오는데 사무실에 있는 평균시간이 한 시간 정도밖에 안 된다.(웃음) 용산, 쌍용 자동차, 교육, 강연, 이런저런 원고로 사무실에 있는 비중이 적다.(웃음) 하지만 정말로 인프라를 만들고 싶다. 후배들이 지속가능한 인권운동을 할 수 있게끔 시스템을 만든 것을 내 목표로 정했다. 그리고 60살에 내 인권운동을 정리하겠다는 생각이 있다. 인권운동을 정리하고 나서는 돈 모아서 후배들 지원해주고 자원 활동하면서 보내고 싶다.(웃음)

조금 더 구체적인 정치 현안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조금은 민감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페이스북을 통해 "'진정성'의 상징이던 그는 점점 기성 정치인과 다를 바 없는 행보를 보였고 급기야 통합진보당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진보정치가 갖는 '진정성의 정치'가 상당 기간 불가능하도록 했다"며 이정희 전 대표의 대선 출마를 강하게 반대했다. 평소 정당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발언을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번에 이렇게 작심하고 이정희 전 대표의 대선 출마를 비판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굉장히 순하게 한 거다.(웃음) 통합진보당 사태는 당권파와 비당권파 사이에서 싸움이 나서 갈라진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2000년부터 10년을 넘게 우리 사회의 진보의 가치를 정치적으로 실현하려고 하는 총체였던 진보정치가 망가진 거라고 본다. 진보의 정치라는 것이 기존의 보수정치와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들이 있었고, 그런 기대들이 통합 진보당에 13명의 의석을 준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대들을 통합진보당 스스로가 보수정당에서도 볼 수 없는 추악한 모습과 추태들을 다 드러내면서 깨 먹은 거다.

진보정당을 대표하는 통합진보당이 깨졌다는 것에 대해서 자기 성찰을 하거나 다시 해보겠다는 진정성 등을 보여주는 노력 등을 다 포기했다. 이정희는 진정성의 정치인이었다. 다른 정치인과 다르다는 이미지를 계속 쌓아왔고 실제로 정말 많이 눈물로 호소했고 맨몸으로 현장의 아픔들에 달려들면서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커왔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다 깨버린 것이다. 지금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가 대선 후보로 나온 상황에서 여기에 만약 통합진보당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고 하면 진보의 의제들을 가지고 견인할 수 있었을 거다. 민주노동당이 예전에 내놓았던 정책들이 이후 보수정당들에서 다 수용되었다. 이제 이정희 대표가 나오면 자기 지지표 2~3% 다지기는 있을지 몰라도, 진보정치가 확장되거나 진보정치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아예 밑바닥 현장에서부터 진보정치를 다시 다져나가겠다고 하면서 실천하는 것이 먼저다. 그런 다음에 차기에나 대선에 나오는 것이 인간적인 도리인 것 같고 정치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철수 후보가 다른 정치인들처럼 뺀질뺀질 거리지도 않고 돌아서면 말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 하니까 대중들에게 먹히는 것 아닌가. 사실 안철수 이전에 진심의 정치인으로 이정희 대표가 있었는데 이것을 다 날렸다. 초기에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던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이것을 다 놓치면서 당내 갈등도 봉합할 수 없는 아주 저급한 수준의 정치실력을 가졌다는 것이 드러나 버렸다. 그랬으면 환골탈태해서 스스로를 새로 만들어갈 생각을 해야 하는데 대선부터 나온다고 하니까 화가 나는 거다.

이정희 대표도 얼마 전에는 진정성의 정치인이었지만 어느 한순간 구태한 정치인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욕심인 것 같다. 개인들의 욕심 또는 자기가 속해있는 세력의 욕심 말이다. 요즘 활동가들 상대로 강연을 나갈 때면 항상 '욕심을 버려라'고 말한다. 사심 없이 열정적으로 잘하면 주변이 이 사람이 정말 괜찮은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 알아준다는 거다. 하수가 '내가 이런 것 잘하니까 나 알아줘'하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올라간 다음에는 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거나 또 주변에서 떠밀기도 해서 거기에 밀려가는 것 같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운동하는 사람,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정말 겸허해야 한다. 똑같이 진보정치를 하는 사람들에게 얘기를 해주고 싶다.

▲ <대선 독해 매뉴얼>(박래군·김미화 지음, 틀 펴냄)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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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김미화 씨와 함께 '인권의 눈'으로 본 대선 전망서인 <대선 독해 매뉴얼>를 내놓았다. 이 책을 내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사람들은 '인권이 이거다'라고 이야기해도 잘 귀담아듣지 않는다. 특히 선거시기에는 인권이라는 것이 아예 실종이 돼버린다. 후보들이 이야기하는 정책, 비전 등의 상당 부분이 인권의 언어로 얘기할 수 있고 인권의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대선주자들이 인권을 내세우면 우리 사회의 깔린 보수층에서 싫은 기색을 하고 그러면 표가 날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인권을 앞세우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단지 잘 살겠다는 멍청한 구호에 속지 말고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 때문에 얼마나 사람이 많이 죽는지 제대로 알자. 경제 문제도 인권의 관점으로 접근해서 풀어야 한다'는 얘기를 해보려고 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인권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고 인권적 관점이 대통령선거에 있어 선택적 기준이 되도록 제시해보고자 했다. 그런데 읽은 사람들은 다 좋다고 하고 참고해 볼 만한 것도 많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안 나가는지 모르겠다.(웃음)

"인권적 관점이 대통령 선거에 있어 선택적 기준이 되도록 제시해보고자 했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용산과 쌍용을 겪고 나서 어느 날 우연히 자살 통계를 보고 <경향신문>에 실렸던 이대근 씨의 "우리는 조용히 죽어가고 있다"는 칼럼(2011년 2월 16일 자)을 보면서 깊은 공감을 했다. 하루에 자살하는 사람이 42.6명이고 이것이 일 년이면 만 5000명이 넘는 수이다. 청소년을 포함한 어린아이들이 일 년에 150명 이상이 자살하고 노인층의 자살률도 높고, 전체적으로는 OECD평균보다 세 배가량 되는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다. 매우 비정상적이고, 잘못 가는 야만사회다. 이게 진짜 사람 사는 세상인가. 사람의 목숨마저 보장되지 못한 상태 정말 전쟁터 같은 데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쭉 들여다보니까 이 죽음의 원인이 경제적 낙오에서 온 것이었다. 사회 안정망이 없다 보니 경제적 낙오가 곧 죽음인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서든 풀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012년인 지금에 와서도 생명권을 고민해야 한다는 게 참 안타깝다. 특히나 지금은 모든 잘못을 개인의 무능력함으로 돌려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저항 한번 하지 않고 스스로 조용히 죽어가고 있다.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잘못된 정책과 시스템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사회적 양극화가 더 심해졌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IMF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도입이 되었고 여기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사회복지제도로 보완을 시켜 나가는 것이었다. 가장 좋은 것이 일자리를 충분히 늘리는 것인데 반대로 갔다. 좋은 일자리를 없애고 비정규직을 만들고 상시적인 정리해고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비정규직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자살할 가능성이 높은 대상들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거기에 이명박이 들어와서 다져놓은 신자유주의 길 위에 부자감세니 뭐니 해서 사람들을 더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87년 6월 항쟁 직후에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는데 그때 제기되었던 사회민주화, 경제민주화 이런 부분들을 민주정부에서 도외시했던 결과로, 오늘의 비극적인 현실을 낳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최형락)


박래군에게 자유란?

'자유, 평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평등 없는 자유, 자유 없는 평등'은 성립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유를 얘기하려면 물적인 토대와 조건도 갖춰져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의사표현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면서 산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노동자들 절반 이상이 선거하는 날에도 나가서 일을 해야 한다. 이렇게 빵의 문제가 뒷받침되지 않은 자유는 상당히 공허하다. 민주화됐다고 해서 자유 부분에 확장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사회의 자유는 사실 '사상누각의 자유'인 것이다. 물적인 토대, 사회경제적 토대 없는 자유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이명박 정부에서 더 절실히 확인되었다.

예전에 인권운동사랑방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한참이나 나이 어린 활동가들이, 심지어 청소년 활동가들도 "래군, 래군"이라며 부르는 게 참 인상적이었다. 원래 그렇게 나이 어린 활동가들과도 격의 없이 지내는 편인가?

어느 날 후배들이 나이 문제, 호칭 문제 이런 얘기들을 하길래 "그 얘기는 또 뭐냐?"고 물어봤다. 이런 얘기 할 때 선배가 거부하게 되면 분위기도 삭막해지고 관계도 틀어지게 되기 때문에 짐짓 "어, 그래. 너희 말이 맞아.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불편했다.(웃음) 처음에는 '저 녀석이 반말해?'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나중에는 익숙해지고 격이 없이 하다 보니까 후배들이랑 더 편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후배들이 존댓말을 하지 않아도 정말로 존경받는다고 느낄 때가 있다. 권위가 강제로 내리 먹여짐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생기는 과정들이 필요한 것이구나 생각했다. 1998년쯤 어느 날 초등학교 학생 한 놈이 인권운동사랑방에 놀러 와서 "래군, 래군" 그러는 거다. 우리 딸내미 정도 되는 애들이 와서 "래군, 래군"하니 미치겠더라.(웃음) 대답도 못하고 내가 당황해서 "어, 그래" 그러니까 이제부터 애들이랑 얘기가 되는 거다.(웃음) 만약 여기서 내가 받아들이지 않고 "너 왜 반말 하냐?" 하면 꼰대가 되는 거다.(웃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니 그게 또 익숙해졌다.

한편으로는 형식이 갖는 규정성이 존재하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이런 규정성을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서로 이해되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었던 것을 파괴시키면서 이루어지면 관계가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다. 대중 속으로 들어갈 때는 그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문화에 내가 동의하지 않아도 그들과 같이 동화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라도 생기는 거다. 예를 들어 농촌사회나 노동조합 같은 곳에 들어가면 이 사람들은 굉장히 가부장적인데 거기에 인권감수성을 발휘한다고 해서 "너 왜 이렇게 여성 차별적이냐?"하고 지적해 들어가면 이들과 제대로 이야기하는 기회 자체를 잃게 된다. 오히려 그런 문제점들을 기억하고 있다가 나중에 친해지면서 하나하나 까주면 된다.(웃음) 그러면 나중에 "내가 그랬어? 그런 생각 못했는데…" 이렇게 돼야 하는데 초반부터 가서 지적하고 사고를 바꾸려고 하면 안 된다.

마지막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청년들이 청년 같지 않은 게 문제다. 청년들은 미래를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다 구(舊)체제이고 이것은 무너져서 사라져야 되는 것들이다. 여기에 편입해 적응하려고 스펙 쌓고 구체제가 요구하는 길로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기가 그려갈 미래를 좀 봤으면 좋겠다. 세상은 바뀔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신자유주의가 유지될 거냔 말이다. 이미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생기고 있고 신자유주의를 만들었던 경제체제의 후유증이 경제위기로 나타나고 언젠가 이것이 터질 것이다. 그 뒤에는 또 다른 세상이 열릴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의 야만적인 자본주의를 목도한 인류가 다시 이 경험을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야만적 자본주의에 우리가 편입해서 미래를 걸겠다고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이것은 기성세대로 충분하다. 기성세대들은 살날도 별로 안 남았고(웃음) 미래를 살아갈 청년들이 꿈꾸는 나라를 생각해보고 그 꿈들을 키워나갔으면 좋겠다. 지금은 당장 허황된 것 같지만 그런 꿈을 꾸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사회는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손어진 연구원)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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