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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 조작인가, 대선 조작인가

[손석춘 칼럼] 언론도 대선 부정 의혹의 한 당사자일 수 있다는 성찰이 필요하다
 
입력 : 2014-03-11  11:19:43   노출 : 2014.03.11  11:32:16

경제민주화가 흐지부지 되고 복지공약도 뒷걸음질 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감시를 신문과 방송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형. 그나마 국정원의 ‘간첩증거 조작’ 사건에서 위안을 찾아야 할까요. 국정원장 책임을 추궁하는 조선·중앙·동아일보의 사설을 읽으면 새삼 ‘언론 자유’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형과 제가 기자 새내기 시절에 한국 언론을 끌어가던 동아일보의 편집국장과 정치부장을 영장도 없이 연행해 짐승처럼 팬 기관이 바로 국정원의 전신 중앙정보부였습니다. 편집국장 이채주는 회고록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여버릴 수 있다는 말에 소름이 끼쳤다. 책임자급의 사나이는 주황빛 전등 아래에서 마치 거인처럼 커 보였다”고 기록했지요.

그런데 이형. 언론자유를 확인할수록 더욱 오늘의 언론 상황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국정원이 증거 위조를 지시했다면 “30~40년 전에나 있을 법한 일로 조직의 존재 이유까지 의심받을 사건”이라고 비판합니다. 사설을 낸 시점에서 ‘수사 대상'은 국정원 대공수사팀의 팀원인데 “(국정원이) 위조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알았다면 위조 지시까지 했는지” 매섭게 따집니다. 이어 국정원을 “위험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씁니다. 

중앙일보 사설도 “진실게임의 대상이 아니라 철저한 수사를 통해 그 몸통을 밝혀내야 할 대상”이라고 부르댑니다. 국정원이 몰랐다고 공식 해명했는데도 “지금까지 밝혀진 정황과 진술 등으로 볼 때 국정원이 과연 위조 사실을 몰랐는지 의문”이라며 국정원이 “우리 법치주의의 기반을 허무는 중대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을 질타합니다. 검찰은 “어느 선까지 지시와 보고가 이뤄졌는지 밝혀내야 한다”면서, “꼬리만 잘라내고 수사를 끝낸다면 특검 수사로 가는 수밖에 없음을 명심하라”고 다그칩니다. 동아일보 사설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형. 눈치 채셨겠지요. 지금까지 인용한 따옴표의 추궁을 국정원의 대선개입 댓글에 적용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적중하지요. 그런데 서류 조작으로 국정원이 법치주의 기반을 흔들었다며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고 존재이유까지 묻는 숱한 언론인들이 왜 대선개입 사건에 대해선 끝내 모르쇠로 일관할까요. 

서류 조작과 대선 조작 사이에 무엇이 더 큰 범죄인가, 무엇이 법치주의 기반을 허무는 중대 범죄인가를 천연덕스럽게 물어야 하는 제가 차라리 우스꽝스러울 정도입니다. 

이형. 그래서 동아일보 사설이 흥미롭더군요.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줄기차게 비판하는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을 비판하며 “국정원 댓글이 선거 결과를 뒤집을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고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단언합니다. 이어 “정의구현사제단만 한 용기를 갖고 있지 않아서 박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정당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언구럭부립니다.

과연 그런가요? 참으로 놀랍습니다.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철저한 수사’ 촉구는 할 생각이 전혀 없는 그 판단력이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그 이유로 ‘선거 결과를 뒤집을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고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대목은 생게망게합니다. 범죄 사실에 대한 실체적 진실 규명이 언제부터 다수결로 바뀐 걸까요? 제대로 된 수사도 않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을까요? 더구나 정의구현사제단만한 용기가 없어서 침묵하는 게 아니라고 사뭇 당당합니다.

이형. 제가 보기에도 ‘용기’가 넘칩니다. 서류 조작 의혹보다 견줄 수 없을 만큼 큰 ‘국기문란 범죄’인 대선 개입에 대해 남김 없는 의혹 해소를 요구하지 않는 논설,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촛불은 물론, 민주시민의 분신까지 모르쇠하는 보도는 용기가 아닙니다. 만용, 더 나아가 여론 조작이지요. 서류 조작 사건으로 대선 조작 의혹을 덮으려는 의도는 아닐까 의심마저 듭니다. 

언론기관과 정보기관이 앞다퉈 조작에 나서면서 나라꼴은 무장 망가지고 있습니다. 기실 두 기관이 주고받은 여론조작은 사건 발생 초기부터 심각했습니다.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한 댓글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경찰의 거짓 발표는 신문과 방송을 통해 확대됐습니다. 이를테면 문화방송 <뉴스데스크>는 문재인 후보가 흑색선전과 정치공작을 계속한다고 비난하는 박근혜 후보의 육성을 29초나 내보냈지요. 통상 리포트에서 육성은 길어야 12초 안팎인 사실에 비춰보면 파격적 편파방송입니다. 당시 <뉴스데스크> 시청률이 6~7%인 사실에 비춰보면, 국가 권력기관들의 대선개입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 확대 됐다고 보아야 합니다. 언론 또한 대선 부정 의혹의 한 당사자일 수 있다는 성찰이 절실한 까닭이지요. 지금이라도 국정원의 대선개입 의혹을 신문과 방송이 책임감 갖고 보도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형. 국정원에 대한 특검 요구는 한낱 정파적 정치공세가 아닙니다. 박근혜 정부로서도 의혹을 깔끔히 씻어냄으로써 곰비임비 이어질 국력소모를 막을 기회입니다. 

언론사 안팎의 상황이 녹록하진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펜과 마이크를 쥔 사람들의 어깨가 무겁고 그만큼 보람도 더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건투를 빕니다.
 
 
▲ 손석춘 건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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