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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유학생과 알츠하이머 걸린 집주인의 시공을 초월한 사랑

 
양태자 2014. 05. 25
조회수 212 추천수 0
 

 

[휴심정] 잊을 수 없는 독일인

알츠하이머 앓던 독일 여성을 끝까지 돌봤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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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유학 시절 세든 집 주인이었던 클뢰어 박사.

알츠하이머병에 걸려서도 유일하게 자신만을 알아보던 그를 양태자 박사는 떠날 수 없었다. 
 


안네마리 클뢰어 박사가 살아 계셨다면 지금 한국 나이로는 96살쯤 된다. 이분의 묘지를 멀리 한국에서 내가 책임자로서 관리하고 있으니 어떤 인연일까. 거대한 우주는 우리 인간들에게 때론 우리가 생각할 수도 없는 기이한 인연 줄을 엮는 것 같다.

 

내가 199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 대학도시 마르부르크에 유학을 가 방을 못 구해 고생 고생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성당에서 알게 된 한 독일 부인이 다리를 놓아 주어서 다행히도 방을 하나 얻게 되었는데 바로 클뢰어 박사 댁이었다. 처음엔 나도 매달 꼬박꼬박 방값을 내는 세입자일 뿐이었다. 이분은 큰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루는 이 집 구경을 하다가 이분이 아직도 흑백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세상에! 왜 아직 흑백텔레비전이냐”고 물었더니 “돈이 없어서”란다. 난 즉시 “제가 방값 10개월치를 미리 드릴 테니 컬러텔레비전을 하나 사라”고 제안했다. 그는 그냥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후에 그 방을 소개해준 독일 부인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너무 우습다”며 킥킥 웃었다. 그분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검소하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이분은 마르부르크신학대학교를 이끄는 주요 리더였다. 뮌스터의 명망가에서 태어난 클뢰어 박사는 수녀가 되려 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가톨릭신학자가 되어 독신으로 살았다. 흑백텔레비전을 보며 소탈하기 그지없는 이분이 이 지역을 방문하는 세계적인 학자들이 꼭 찾아보는 저명학자라는 것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알았다.

 

어느 날은 그가 가로 6㎝ 세로 7㎝ 되는 받침대가 달린 아주 작은 탁상시계를 하나 가지고 왔다. 받침대에는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이 지도에서 한국이 어디 있는지를 알고파서였다. 여성의 손바닥 반쪽도 안 되는 곳에 그려진 세계지도를 보니 한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그냥 한 점으로 찍혀 있었다. 나는 작은 한 점을 한국이라고 가리킬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삼성, 현대 등의 기업이 독일에서 이름을 알리기 전인지라 한국을 잘 모르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렇게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 온 이방인은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그 집에서 청소하는 아주머니도 나를 대놓고 무시하며 괄시했다. 그런데 정작 주인인 클뢰어 박사는 달랐다. 클뢰어 박사가 세입자를 자신과 다름없이 대하는 것을 보면서 청소 아주머니의 태도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이분과 세입자 관계를 벗어나 끈끈한 신뢰가 쌓인 인연으로 나아갔다. 독일은 크리스마스 12월25~26일 이틀이 공휴일이다. 매년 12월26일이면 6명이 모이는 파티가 있었다. 가톨릭 주교와 약학박사 부부, 정치가 부부 등이 함께하는 그 모임에 클뢰어 박사는 늘 나를 데리고 가 수양딸로 소개했다. 당시 대학 등록을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독일어학시험을 앞두고도 많은 독어 실력을 쌓을 수 있었던 것, 무엇보다도 낯선 외국생활에서 심리적인 안정을 취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클뢰어 박사 덕분이었다. 그는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편견없이 사랑을 나누는 데는 넉넉했다. 언젠가는 한 한국인 유학생이 돈이 없어 귀국할 처지에 놓였다. 클뢰어 박사는 그에게 남몰래 장학금을 대주었다.


그분과 나 사이의 정이 끈끈해질수록 주위의 반응도 달라졌다.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이 많고 많은 한국인들을 두고 피부색이 다른 동남아나 아프리카인을 끼고돌 때의 반응과 같은 것이랄까? 나를 고스란히 인정하는 분들과, 시기와 질투와 모함을 하는 이들 사이에서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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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떠난 여행지에서 클뢰어 박사와 양태자 박사.

 

1990년 독일 유학 때 세들었던 
집 주인 안네마리 클뢰어 박사 
이방인에 아낌없는 사랑 나눠줘 
말년 투병에 학업 미루고 병실 지켜 
14년 지났지만 지금도 묘지 관리


클뢰어 박사는 유감스럽게 말년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 그러나 누군가 그분 곁에서 제대로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분이 준 사랑을 내가 갚을 차례라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온 유학인데’ 하는 생각 때문에 공부를 뒷전으로 미루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인연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국에서 나이 들어 만난 그분, 더구나 정신줄마저 놓은 그분을 위해 내 공부를 접고 그분을 돌보는 길을 택했으니 말이다.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내 학위 마무리는 5년이 늦어졌다.


알츠하이머에 걸리면 자식보고도 ‘누구냐?’고 묻는다고 하지 않던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기이하게도 이분은 오직 내 얼굴과 이름만을 기억했다. 주위 독일인들도 정말 묘한 인연이라고 했다. 독일인들의 얼굴과 이름은 다 잊어버려도 유일하게 동양인인 나만을 알아봤으니 말이다. 언젠가 그분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경남 합천 해인사에 우리 가족과 함께 방문했다. 그는 “예전에 꼭 와본 것만 같다”고 몇번이나 말했다. 돈독한 가톨릭 신자로 한국을 처음 방문한 그의 말에서 보이지 않는 끈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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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사랑’이라고 쓰인 클뢰어 박사의 묘지. 양태자 박사 제공

 

 


클뢰어 박사의 장례식 때다. 독일인들이 영정사진을 내게 들라고 했다. 말하자면 상주가 된 셈이다. 상주가 묘지 관리까지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분의 묘지는 한 대행회사가 맡아서 관리하고 있다. 그분이 돌아가신 지 14년이 됐지만 나는 지금도 독일에 가면 늘 클뢰어 박사의 묘지부터 찾는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라고, 나이 차도 많고, 더구나 나이가 들어 만났고, 이제 이생과 천국으로 다시 헤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함께하고 있다. 정과 사랑은 시공을 뛰어넘는다. 독일에 있는 클뢰어 박사의 묘지엔 한국어로 ‘사랑’이라고 쓰여 있다.


양태자 박사(종교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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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자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과 비교문화학으로 석사, 예나 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천국과 지옥』 (독일인 교수들과의 공저), 『서구 기독교의 믿음체계와 전통 반투 아프리카에 나타난 종교 관계성 연구,』『한국 기독교에 나타난 샤머니즘적인 요소들』의 연구 저서가 있다. 2011년 『중세의 뒷골목 풍경<, 2012년『중세의 뒷골목 사랑』, 2013년엔 영성 번역서인 『파도가 바다다』출간했고, 늘 다음 책 출간 준비 중이며 전문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글을 대중매체에 쓰고 있다.
이메일 : hanispecia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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