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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당상관 벼슬 내린 국내 최고 거목

세종이 당상관 벼슬 내린 국내 최고 거목, 한때는 30m 더 컸다

 
홍경낙 2012. 11. 23
조회수 30425추천수 2
 

홍경낙 박사의 이야기가 있는 나무 ② 용문사 은행나무

1100살 국내 최대 거목, 해마다 은행 15가마 생산하는 활력 유지

나무 부러지고, 복토로 묻히는 등 높이 들쭉날쭉…이웃마을 1200살 '낭군'은 타계

 

gin1.jpg »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나이 많은 나무의 하나로 꼽히는 용문사 은행나무. 마의태자가 심었다거나 의상대사의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는 등 설화도 많다.

 

인간의 조상인 사람속 유인원은 250만 년 전에야 그 꼴을 갖췄는데, 마지막 공룡이 숨을 쉰 것은 6500만 년 전이다. 공룡이 지구의 주인이던 중생대 쥐라기(1억 8000만~1억 5000 년 전)에는 언젠가 ‘인간’으로 이어질 들쥐만한 야행성 포유류가 갓 번식하던 때였다.

 

한마디로 아이들의 원시시대 그림 3종 세트인 ‘돌도끼 든 원시인, 분출하는 화산, 거대한 공룡’의 조화는 불가능했다는 말씀이다. “그럼, 돌도끼 든 원시인 대신에 뭘 넣으면 좋을까?” 은행나무 하나 그려 넣으라고 알려 주시라. ‘살아있는 식물 화석’이라고 불리는 은행나무(Ginkgo biloba L.)는 1억 7000만 년 전에 살았던 조상 종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원시시대부터 살아와서일까? 문화재청이 보고한 수령 1000년 이상 된 노거수 8그루 중 5그루가 은행나무고, 큰 나무 순위 1, 2위에도 은행나무가 올라 있다. 그 중에서도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의 천연기념물 제30호 ‘용문사 은행나무’는 나이와 크기 자랑에 전설과 기담까지 더해져 유명세를 누리고 있다.

 

gin3.jpg »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로 돼 있지만 용문사 은행나무는 한때 지금보다 30m 가까이 큰 67m였던 적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키 큰 나무는 ‘공식적(?)’으로 용문사 은행나무다. 그런데 그 ‘높이’가 참 묘하다. 1919년 ‘조선거수노수명목지(朝鮮巨樹老樹名木誌)’에는 이 나무의 키가 63.6m로 되어 있다가 1962년 천연기념물 지정 당시(1962년 12월 3일)에는 60m, 2003년에는 57m, 2005년 측정에는 39.21m, 다시 2009년 자료에는 67m, 2012년 현재 문화재청 자료에는 42m와 현지의 안내문에 41m로 되어 있다.

 

여의봉인가 보다. 이런 널뛰기의 배경에는 고종 황제가 돌아가셨을 때 큰 가지가 하나 부러져 그렇게 되었다거나, 1970년대에 석축을 쌓고 복토를 해서 작아졌다는 등등 그럴 듯한 설명도 붙어 다닌다.

 

용문사 은행나무의 키는 2005년에 연세대 손홍규 교수가 사다리차까지 동원에서 측정한 39.21m가 가장 정확해 보이지만, 바람에 살랑거렸을 나무꼭대기를 1㎝ 단위까지 쟀다고 하니….

 

그리고 두 번째로 큰 나무는 38m의 경남 ‘함양 운곡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406호)’로 되어 있다. 하지만, 산림청 녹색사업단에서 주관하는 ‘코리아 빅 트리(Korea Big Tree)’ 프로젝트에는 수고 40m짜리 나무도 10여그루 넘게 적혀 있으니 누구 키가 더 큰지는 더 두고 볼 일이겠다.

 

gin2.jpg » 약 1100살로 추정되는 용문사 은행나무의 가슴높이 둘레만도 14m에 이른다. 밑둥에 혹 같은 것이 달려 있다.

 

용문사 은행나무의 유래에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망국의 서러움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던 길에 손수 심었다는, 혹은 신라의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자라났다는 전설도 있다.

 

노거수의 신령함을 반증하려는지 생생한(?) 이야기도 많다. 1907년 정미의병(丁未義兵) 때 일본군의 방화로 절문을 지키던 사천왕전(四天王殿)이 불타 없어졌지만 용문사 은행나무는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부터 ‘천왕목(天王木)’으로 지정돼서 절을 지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나라에 변고가 있으면 소리를 낸다든지, 나무를 자르려고 하면 상처에서 피가 쏟아지고 마른 하늘에 벼락이 친다든지…. 아마 우리나라에서 사연이 제일 많은 나무도 용문사 은행나무가 아닐까 싶다.

 

gin4.jpg » 오래된 거목답게 용문사 은행나무에는 전해오는 이야기도 많이 서려있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유명세만큼 몸값도 높다. 2005년 한국방송의 한 예능프로그램(‘대한민국 가치 대발견’)은 향후 200년간 용문사 은행나무의 경제적 가치를 1조 6884억 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용문사 은행나무로 인한 관광수익이 800억원, 이로 인한 지역경제 창출효과가 1조 6000억 원으로 계산한 데 비하여 용문사 은행나무의 관상수로서의 가격 21억 원, 은행 열매 판매 10억 원, 은행잎 판매 4억 원, 목재 가치 49억 원 등을 합쳐도 84억 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정말 ‘이름 값’이 뭔지 확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 이름 값에 더하여 명예도 있으니, 용문사 은행나무도 관계에 진출했다는 사실이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보은 속리산의 정이품송처럼 벼슬아치로서 세종대왕이 하사한 당상관 정3품 품계를 받았다. 조선시대의 당상관은 왕과 정책을 논하는 자리인 당(堂) 위에 앉을 수 있는 남성의 관직이었으니, 용문사 은행나무에게는 낯선 자리였으리라.

 

은행나무는 암수 딴 그루로 존재하는 대표적인 수종이고, 용문사 은행나무는 아직도 매년 열다섯 가마 남짓한 ‘은행’을 생산하는 암그루이다. 세종 재위 당시면 용문사 은행나무가 대략 500살 전후니 성별을 몰랐을 리 없고, 품격에 맞는 벼슬(정3품)을 주자니 여성은 내명부 후궁이나 가능했을 터이다.

 

어쩌면 신령한 나무에 세속적 잣대가 무의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엄연히 ‘낭군’까지 있었던 용문사 은행나무가 당상관이 된 것은 묘한 느낌을 준다.

 

은행 정자가 헤엄쳐 난자를 수정하는 모습을 담은 유튜브 동영상

 

 

 

 

지역 주민들이 말하는 용문사 은행나무의 낭군은 용문사에서 14㎞ 떨어진 양평군 지평면 수곡리에 있었던 1200살(?) 먹은 ‘수곡리 은행나무’이다. 임진왜란 전후에 불이나 15일간이나 탄 후에 속이 빈 채로 다시 500여 년 동안 마을을 지켜주며 살다가 지난 2000년에 수명을 다했다.

 

이 은행나무 부부의 금실 덕인지 근방 마을에는 자손이 끊긴 집이 없다고 한다. 살아있을 때 수곡리 은행나무는 매년 4월이 오면 가지마다 수꽃을 주렁주렁 달고 바람이 불면 용문사 은행나무를 향해 화분을 날려 보냈을 것이다.

 

날아간 화분은 용문사 은행나무 암꽃머리에 붙은 화분실(花粉室)로 가서 5개월을 가만히 기다린다. 그리고 그해 9월쯤 적당한 온도 조건이 맞춰지면 화분에서 화분관이라는 이동통로가 생겨나고 그 끝에서 꼬리 달린 ‘정충’이 두 마리 튀어나온다.

 

정충은 나선형으로 배열된 1000여개의 편모를 움직여서 난자를 향해 헤엄쳐 간다. 그러면 약 한달 뒤에 은행이 열고 다음 세대의 준비가 끝나게 된다.

 

gin5.jpg » 은행나무 DNA 분석 : 은행나무 수그루는 2개, 암그루는 1개의 DNA 줄을 볼 수 있다.

 

용문면은 2003년 보도자료를 내어 은행나무 심기운동을 벌이고, 용문사 은행나무에서 종자와 삽수를 채취해서 생산한 묘목 2만 그루를 보급한다고 했다. 이왕이면 암·수 그루를 가려서 보급했으면 좋겠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로수의 운치를 고약한 썩은 냄새로 망치거나, 물컹물컹 밟혀터진 은행 종의(種衣)로 시커멓게 물드는 보도를 보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은행(열매) 생산농가에서 애써 키운 은행나무가 수 그루인 걸 20년이 지난 결실기에야 알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1년생 이하의 어린 묘목에서부터 성별을 구분하면 되는데, 2011년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유전자원과에서는 이를 위하여 효율적인 디엔에이 분석법을 개발하였다. 손톱만큼의 잎만 가지면, 일련의 화학처리 과정을 거쳐서 그 은행나무가 암 그루인지 수 그루인지 몇 시간 안에 알 수 있다.

 

1000년 넘게 살 텐데 20년이 대수냐 싶지만, 단 서너 시간만 투자하면 그 20년이 두고두고 편할 거라 생각된다. 100년도 살기 힘든 사람의 생각에는 말이다.

 

글·사진 홍경낙/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유전자원과 박사

 

■ 이 글은 국립산림과학원이 발행하는 잡지 <과학이그린> 2012년 3·4월 호에 실린 것으로, 국립산림과학원의 허락을 받아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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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낙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유전자원과 박사
 
이메일 : honeutal@forest.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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