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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예견된 참사... 언제 죽을지 몰라 잠 못잔다"

 

[르포] 화재로 전소된 구룡마을 일대... 주민들 "정쟁 멈추고 안전시설 만들어달라"

14.11.11 11:54l최종 업데이트 14.11.11 11:54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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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허로 변한 구룡마을 지난 9일 화재로 60여 가구가 전소된 구룡마을 7-B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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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는 가난한 이에게 더욱 가혹했다. 지난 9일 오후 불이 난 구룡마을 7-B지구 판잣집에서 분홍색 슬리퍼만 신은 채 대피한 주민 장아무개(74, 여)씨에게 남은 건 깨진 장독대 속  된장과 간장뿐이다. 강남구청이 임시 대피소로 마련한 개포중학교 다목적강당 2층에서 쪽잠을 청한 장씨가 10일 오전 11시께 다시 찾은 집터엔 타다만 솜이불이 시커먼 재와 뒹굴고 있었다. 

"아이고, 저 솜이불 내가 어렵사리 마련한 거야, 아까워서 어쩌나..."

장씨는 뭐라도 남았을까 싶은 기대감에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집 앞까지 갔다. 하지만 마을은 폐허였다. 그의 집은 앙상한 뼈대만 남기고, 모두 재로 변해 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떠밀리듯 이곳에 와 30년 동안 가사 도우미 등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왔지만 이제는 당장 누울 곳마저 없는 신세가 됐다. 마을을 황망히 바라보던 장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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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허로 변한 구룡마을 지난 9일 화재로 폐허로 변한 구룡마을 7-B지구 일대. 서울시와 강남구청이 개발 방식을 두고 이견을 빚다 결국 재개발이 무산된 이곳은 늘 화재 위험이 도사리는 지역이다.
ⓒ 손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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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 같은 판자촌... "언제 죽을지 몰라 잠 못 잔다"

구룡마을은 서울 안에서 제일 규모가 큰 무허가 판자촌이다. 1988년에 형성돼 저소득층 약 110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이 마을은 나무 합판과 비닐로 지어진 판잣집이 밀집돼 있어 화재 위험이 높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런 우려 속에서 지난 9일 발생한 화재는 7-B지구 63세대를 태우고 혼자 생활하던 남성 노인 한 명을 숨지게 했다. 앞선 지난 7월 28일에도 구룡마을에서 화재가 발생해 6세대를 태웠다. 그로부터 고작 105일 만에 더 큰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관련기사:'강남 판자촌' 구룡마을 또 화재 "다른 데 불 났으면 난리 났을 것")

"이렇게 멋진 곳이 '강남스타일'이라고 해외 언론에 좀 내주세요."

경찰과 소방관이 화재 원인을 밝히기 위해 감식을 벌이는 모습을 폴리스라인 밖에서 지켜보던 50대 여성 A씨가 분통을 터트렸다. 노점상을 운영하며 10여 년 전부터 이곳에서 살아왔다는 그는 "언제 죽을지 몰라 잠을 못 잔다"고 토로했다. 또한 "이번 화재로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언제든 같은 일을 겪을 수 있기에 피해를 입은 주민과 그렇지 않은 주민을 구분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A씨를 불안하게 만드는 건 마을 구조다. 구룡마을은 불에 타기 쉬운 판잣집이 따닥따닥 붙어있다. 그가 안내하는 곳으로 향하자 나무 합판에 비닐과 보온 덮개를 씌운 판잣집 군락지가 눈에 들어왔다. 한쪽 벽에 기대어 손을 뻗으면 반대편 벽이 닿을 정도로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20여 개 집이 여백 없이 이어져있다. 그의 남편은 이곳을 가리키며 "미로 같다"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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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잣집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구룡마을 주민들은 나무로 만든 판잣집이 따닥따닥 붙어 있어 작은 불씨가 큰 화재로 번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화재로 언제 죽을지 몰라 잠을 못 잔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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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불났으면 다 죽었어요, 못 빠져나가."

A씨의 말대로 이곳에서는 대피하는 일도 쉽지 않아 보였다. 통로가 비좁은 데다 골목 중간에는 빠져나갈 길이 아예 없다. 작은 불씨가 대형 참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전기장판, 가스난로, 낡은 전선 등 화재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어 주민들은 '불'에 특히 민감하다.

올 봄에는 혼자 생활하던 노인이 가스레인지 불을 끄지 않고 외출하는 바람에 골목으로 연기가 피어올랐고, 이를 본 몇몇 주민이 황급히 문을 부수고 들어가 불은 끈 적도 있다. 10여 년 째 '미로' 속에서 잠드는 A씨는 이번 화재를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세월호 참사랑 똑같아, 예견된 일이었어."

"강남구청·서울시에 화재 예방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구룡마을은 지난 2009년부터 올해 8월까지 크고 작은 화재가 11차례 발생해 재개발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곳이었다. 하지만 서울시와 강남구청이 개발방식을 두고 이견을 보이면서 지난 8월 관련 계획이 무산됐다. 

당초 서울시는 지난 2012년 8월 2일 구룡마을을 도시개발지역으로 지정하며 토지 주인에게 땅 일부를 돌려주는 '환지 혼용방식'의 개발 방식을 발표했다. 이런 방식으로 사업비를 줄여야만 주민들의 안정적 재정착을 위한 임대주택 건설과 저렴한 임대료 책정이 가능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강남구가 환지 혼용 방식은 서울시의 일방적 결정이며, 땅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개발이익을 독점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제동을 걸며 사업이 지체됐다. 강남구는 공영개발로 토지를 개발한 뒤 토지주에게 현금으로 보상하는 '100% 수용·사용 방식'을 주장했다.

서울시와 강남구청이 개발방식을 두고 이견을 보이는 동안 주민들의 불안감은 커졌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로 전국에 안전문제가 대두된 지난 5월부터 강남구청에 겨울 화재를 우려하며 안전대책을 세워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하지만 그로부터 얻은 대답은 강남구청의 개발방식을 지지해달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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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일 오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7-B지역에서 화재가 발생해 주민들은 대피를 하고 소방관들이 화재 진압을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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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마을 주민자치회는 지난 8월 12일 강남구청에 공문을 보내고 "개발이 실효된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건 화재 및 재난 시 소중한 주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모든 수단과 보호 시설 설치"라며 ▲ 협소한 골목길 대피로 확장 공사 ▲ 오래된 전기시설 재설치 및 가옥 전기시설 재공사 등을 요청했다. 

하지만 강남구청은 지난 8월 20일 민원 회신에서 "구룡마을은 대부분 사유지인 관계로 생활기반시설을 설치하는 건 불가하다"며 "생활기반시설 설치에 대한 근본적 대책은 구룡마을 도시개발사업이 100% 수용·사용방식으로 재추진되는 것"이라고 답했다. 

또한 주민들은 서울시와 소방방재청에도 안전대책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지만 별다른 조치는 없었다.  그 사이 도시개발법상 개발계획 수립 만료시한(2년)이 지나면서 지난 8월에 재개발이 무산됐다.

화재 다음 날인 10일 오전 '2015 예산안 발표' 후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가진 박원순 서울시장이 "죄책감이 든다"고 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박 시장은 "구룡마을 주민 전원이 재입주할 수 있는 개발계획을 추진했었는데 그게 잘 안됐다"며 "새롭게 개발계획을 세워서 강남구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박원순, "죄책감 느낀다, 강남구청과 개발 논의 다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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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입구에 마려 된 구룡마을 화재민 임시 대피소 9일 오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7-B지역에서 화재가 발생해 집을 잃은 화재민들을 위한 임시 거처가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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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박 시장은 오후 4시30분께 직접 화재 현장을 둘러본 뒤 이재민을 만나 위로했다. 현재 이재민들은 개포중학교와 주민자치회관에 각각 59명(42세대), 53명(21세대)로 나뉘어 머무르고 있으며, 대한적십자사가 보낸 응급구호품에 의존하는 상태다. 

이날 이재민들은 악수를 청하는 박 시장에게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라고 호소했다. 또한 박 시장이 "현재 주민이 평생 살 수 있는 주거 환경을 만드는 방향으로 개발을 추진하는 게 목표"라고 설명할 때는 주민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구청장과 시장의 권한이 반반이다, 강남구청과 빠른 시일 안에 협의하겠다"고 밝히자 곳곳에서 "도대체 언제쯤 협의가 끝나느냐"는 볼멘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유귀범 주민자치위원회 회장은 "(집 노후로) 전선 피복이 다 벗겨져 화재 위험이 크다"며 "참사 없이 올 겨울을 날 수 있도록 안전시설을 마련하는 게 시급하다"고 요청했다. 이어 떠나는 박 시장에게 "(여야간) 정쟁으로 변질되어선 안 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한편 박 시장은 주민자치회관에 이어 다음으로 방문한 개포중학교에서 신연희 강남구청장과 만나 구룡마을 개발을 다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박 시장은 "와주셔서 감사하다"며 손을 내미는 신 구청장에게 "구룡마을은 취약해서 불이 나면 큰 사고로 이어진다, 조금씩 서로 양보해 잘 해보자"고 말했다. 

이에 신 구청장도 주민들에게 "구룡마을은 언제 불이나 사고로 이어질지 조마조마하고 답답했다"며 "박 시장을 모시고 구룡마을을 제대로 개발해 여러분의 주거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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