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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지원군 유해송환의 현장을 가다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송환의 현장을 가다

정현환 2015. 04. 27
조회수 2 추천수 0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가 중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한국과 중국은 작년부터 협조했다. 우리 (중국) 중앙정부는 이일에 대해 대단히 중시하고 있으며, 우리 인민들은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한국 측 에게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 더우위페이(竇玉沛) 민정부 부부장>

 2015년 3월 20일. 65년 전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한국과 중국은 중국 인민지원군 전사자의 유해를 함께 들었다. 주궈홍(邱國洪) 주한 중국대사가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함에 오성홍기를 덮으며, 백승주 국방부 차관 등이 유해 68구를 배웅했다. 그동안 북한을 거쳐 송환됐던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중국측에 직접 인도되었다. 한국과 중국은 ‘한국전쟁의 상흔’이라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로 향하는 긴 여정에 첫발을 내딛었다. 유해발굴에서 송환까지, 그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앞으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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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홍기(五星紅旗)에 덮인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를 가슴에 품고 있는 중국 인민해방군(人民解放軍) 의장대의 모습.  (사진/ 정현환 기자)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송환의 배경

 

 2013년 3월 29일 당시 중국을 방문 중이던 박근혜 대통령은 류옌둥(劉延東) 중국 부총리 겸 국무위원을 만난 자리에서 “정전 60주년을 맞아 중국 전사자 유해 360구를 송환 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박근혜 대통령의 제안으로, 1년뒤인 2014년 3월 한국은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 437구를 처음으로 중국측에 송환했다. 작년 송환 이후 2015년 3월 20일에도 1년 동안 발굴된 인민지원군 유해 68구를 중국측에 건넸다. 국방부는 이번 유해를 송환하며 “분단 70주년을 맞아 과거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고 양국 관계를 한 단계 격상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렇게 송환된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랴오닝성 선양의 ‘항미원조(抗美援朝, 한국전쟁을 일컫는 중국 정부의 공식 명칭) 열사능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앞으로도 한국 정부는 매년 4월 5일 청명절(淸明節, 중국에서 조상의 묘를 참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날)에 중국에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를 정기적으로 인도할 예정이다. 

 

60년간 타국에 묻혔던 중국 전사자 유해는 총 403구

 

 2013년 중국을 방문 중이던 박근혜 대통령은 방중 나흘째되는 날 베이징(北京) 칭화대학(淸華大學) 환영간담회에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칭화대 학생들 앞에서 중국 방문을 “심신지려(心信之旅, 마음과 믿음을 쌓아가는 여정)”라고 표현했다. 박 대통령은 앞으로 “한·중 두 국가가 우의를 다지는 방안이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서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이 유해들이 이제는 유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얘기했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류옌둥(劉延東) 부총리는 “비가 떨어지는 것처럼 멀리 가더라도 반드시 조국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중국 속담을 언급하며 박 대통령에 감사를 표명했다. 박 대통령의 제안은 곧바로 시진핑 주석에게 보고 됐다.
  곧이어 청와대는 정전협정 이후 지난 1997년까지 한국전쟁 때 전사한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가 403구가 발굴됐다”면서, 그동안 43구를 UN군 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중국 측에 송환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송환되지 않은 360구는 “경기도 파주에 있는 적군묘지에 북한군 유해와 함께 임시로 매장했다”고 언급했다.


우여곡절을 겪었던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송환’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 송환은 엄밀히 말하면 한국이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 유해 송환 문제는 전쟁협정 당사자들 간의 문제이다. 그런데 한국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서명 당사자가 아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 송환은 정전협정 당사자인 UN군사령부와 북한의 군사정전위원회(이하 군정위)가 처리해야 할 사안이다. 
  이러한 사실은 1981년에서 1997년까지 중국군 전사자 유해가 송환된 과정을 보면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이 기간 동안 중국측에 반환된 43구의 유해는 작년과 올해에 중국에 직접 송환된 것과 달리 북한을 거쳐 돌아갔다. 한·중 간의 사안으로 논의된 것이 아니라 군정위와 판문점에서 열린 장성급 회담을 통해 송환됐을 뿐이다. 이번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를 송환하는 과정에 참여한 국방부 관계자도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 송환은 군정위를 통해 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언급했다.


 유해송환 이후 중국 분위기

 

  3월20일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가 중국 본토로 송환된 다음날인 21일 유해는 중국 선양 열사능원(抗美援朝烈士陵園) 지원군 열사기념광장(志願軍烈士紀念廣場)에서 안장됐다. 민정부, 해방군 총정치부, 선양전구부대(瀋陽戰區部隊) 군 지휘관들을 비롯하여 한국전쟁에 참전 했던 노병(老兵)과 참전 용사들과 초·중학교 학생 400여 명이 참석했다. 
 현지 언론매체는 이날의 분위기를 생생히 전했는데, 작년 제1차 한중 유해송환 현장에 참석했던 사업가 장웨이(張偉) 씨는 중국 정부 외문국(外文局) 산하 인민화보(人民畵報)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 인민지원군의 후손이라고 밝히며, “자기 가족의 유골도 이처럼 정중하게 대해주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남방일보>(南方日報)는 사설에서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 발굴 작업에 한국측의 성의에 감사”를 전했고,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 산하 인민왕(人民網)은 “최근 중·한 양국의 전략적 소통이 원활해지고 정치적 상호신뢰가 한층 강화되었으며 두 번에 걸친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가 순조롭게 귀환해 안장된 것은 양국이 여러 분야에서 밀접하게 협력하는 좋은 관계임을 보여 준다”고 논평했다.
 더욱이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송환과 관련된 현지의 뜨거운 분위기는 중국 언론뿐만 아니라 중국 네티즌들의 반응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번 유해 송환을 지켜본 중국인들은 조국으로 돌아오는 유해에 애도를 표하면서 “한국측의 선의와 진지하고 세심한 배려에 만족과 감사”를 드러냈다. 특히, 중국의 한 네티즌(아이디: 一枝梅)은 “중·한 양국이 이제 역사의 짐을 벗었다”고 언급하며, “이번 일의 의미가 남다르고, 한국의 조치에 경의를 표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송환은 중국 지도층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었다. 치더쉐(齊德學) 군사과학원 전 군사역사 연구부 부원장은 “인도주의 정신을 잘 보여준 것으로 중국인과 한국인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매우 감동적인 일”이라고 말하면서 이번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송환을 지켜본 감동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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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0일 중국으로 송환된 유해는 21일 중국 선양 열사능원(抗美援朝烈士陵園) 지원군열사기념광장(志願軍烈士紀念廣場)에 안장됐다. 60여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전우에게 묵념하는 중국 인민지원군 노병(老兵)의 모습. (사진출처: 바이두) 


경색된 '남·북관계'가 되레 유해송환을 이끌어
 
  현재 남과 북의 관계는 악화일로(惡化一路)로 치달리고 있다. 특히, 지난 MB 정권에서 발생한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으로 최악을 맞이했으며, 현 정부까지 이어져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경색된 남과 북의 관계는 현재 그동안 역대 남측 정부와 북측이 불편한 관계 속에서 물밑으로 이루어졌던 인도적 제안마저 거부하고 있는 실정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남과 북의 관계는 남쪽이 중국이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북한의 소통 부재와 대화 단절의 태도는 중국과 경제적·정치적 관계를 긴밀하게 구축해야 하는 한국의 입장과 2011년부터 중국 인민지원군의 유해를 중국으로 송환하는 사업(해외열사기념시설 보호 관리 업무)을 펼치고 있는 중국에게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엔사의 동의하에 한국과 중국은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 송환을 두고 긴밀한 교섭을 펼쳤다. 양쪽은 지속적인 협의를 통해 60여 년간 타지에 매장되어 있던 유해를 인도적 차원에서 교환하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2014년 중국 인민지원군의 유해 437구가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송환을 통해 ‘광복군’ 표지석 설치

 

 194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 광복군이 있었다. 광복군은 과거 중국의 시안(西安)에주둔지를 두고 활동했었다. 광복군은 시안의 창안구(長安區)와 두취진(杜曲鎭) 두 곳에 주둔하며 조국 광복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두 곳이 무관심으로 인해 방치되고 있었다. 이에 박근혜 정부는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송환을 통해 이 두 곳에 광복군 표지석 설치를 정식으로 요청했다. 박 대통령은 2013년 3월 29일 산시성(陝西省)의 자오정융(趙正永) 당서기, 러우친젠(婁勤儉) 성장과 만난 자리에서 “시안(西安)에 있는 광복군 주둔지가 있었던 곳에 표지석을 설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2009년부터 추진해온 정부주도의 사업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앞으로 남은 과제

 

 앞서 말했듯 한국은 정전협정 서명 당사국은 아니다. 이는 앞으로도 한국이 두 차례에 걸친 송환과정에서처럼 중국 인민지원군의 유해가 발굴되고 송환되는 문제에 있어 계속 UN군사령부의 동의를 얻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현재 해외에 묻힌 중국 전사자의 숫자는 11만 5217구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중 99%에 이르는 11만 4000여구가 한반도에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앞으로도 유해발굴 사업은 계속 진행될 예정인데, 유해가 발굴 때마다 UN군사령부의 동의를 언제까지 얻을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더욱이 지금의 중국 인민지원군 유해송환은 현재 남북관계가 경색되는 반면 한중관계가 밀접해지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 세 국가의 관계가 어떻게 바뀔지 장담할 수 없다. 정치·외교적 차원을 넘어 인도적 차원에서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할 지 남한과 중국 그리고 북한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나아가 한국정부는 지금보다 더 큰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 현재 북한은 남북회담 등을 통해 북한 내 남한군 유해 송환에 합의했으면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있지 않다. 명백한 합의 불이행이다. 따라서 앞으로 남쪽도 북쪽에 묻힌 군 유해를 송환받아야 한다.
 정부는 단발성이 아닌 지속적인 중국 전사자 유해송환사업을 진행해야 한다. 이를 통해 남한은 중국정부의 신뢰와 협조를 얻어,  한반도 이북지역에 매장된 국군의 유해송환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미국은 북한과 경색된 외교관계에서도 96년부터 220여구의 미군 추정 유해를 발굴했던 일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북미관계가 단절된 상태였지만 직접 미 국방부 산하 미군 전쟁포로, 실종자 확인 합동사령부 (JPAC, Joint Prisoner of War/Missing in Action Accounting Command)가 북한으로 건너가 북측으로부터 미군 전사자의 유해와 유품을 미 본토로 송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에 반해 우리 정부는 유해송환에 대한 규범이 전무한 실정이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전쟁 전사자에 대한 예우와 기준을 마련하고 기존 제도의 미비점을 보완하여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목숨 바친 이들에 대해 적절한 보상마련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글/정현환, 유원 기자 dondevoy8612@naver.com , bittersweet040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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