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역사 바로 세우기 기획인터뷰②] 김명인 인하대학교 교수
15.08.18 19:22l최종 업데이트 15.08.18 19:22l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0년. 우리 현대사는 유례없이 빠른 경제성장을 일구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을 소유한 이들의 학살, 내란, 부정선거, 고문과 각종 인권유린으로 점철된 오욕의 역사이기도 하다. <오마이뉴스>와 '(가칭)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준비위'는 뒤틀린 우리 역사의 문제점을 되짚어 보고, 역사의 정의를 다시 세우기 위한 운동을 촉구하는 기획 인터뷰를 연재한다. [편집자말] |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10만여 명의 학생이 모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총격에 쓰러진 후, 잠시 동안 따스했던 이른바 '서울의 봄' 때의 일이다. 당시 서울역에 모인 학생들에게는 효창운동장에 공수부대가 출동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선택의 기로. 각 학교 총학생회장단이 모여 오랜 시간의 논쟁 끝에 군 출동의 빌미를 주지 말자며 해산을 결정한다. 그 유명한 '서울역 회군'이다. 뒤에 벌어진 일은 알려진 대로다. 2일 뒤인 5월 17일 확대된 비상계엄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광주의 살육으로 이어진다. 찰나의 봄, 그리고 여름과 가을을 뛰어 넘은 긴 겨울의 시작이었다.
대학가는 한동안 침묵의 움츠림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12.12군사쿠데타 1주년을 하루 앞둔 1980년 12월 11일, 서울대학교에 A4지 2장 분량의 유인물이 살포된다. <반파쇼학우투쟁선언문>. 유인물을 살포했던 4명의 학생이 연행되면서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 출범 직전의 대규모 공안사건으로 비화된다. 학림사건과 부림사건의 전조가 된 <무림사건>이다.
현재 인하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과 교수인 김명인은 당시 <반파쇼학우투쟁선언문>을 직접 쓴 무림사건의 주범이다. 연행 후 치안본부 대공분실(일명 '남영동')로 끌려간 그는 그곳에서 잔인한 고문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 이근안을 만난다. 컴컴한 남영동 고문실.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지난 13일, 김명인 교수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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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인 인하대 교수 서울대 77학번인 김명인 교수는 일명 <무림사건>으로 이근안의 국내 공안사건의 첫 고문대상이 된다. 그러나 김명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만 해도 이근안은 꽤 젊잖은 편이었다. |
ⓒ 한영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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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회군이 광주시민 희생에 결정적인 원인"
- 선생님은 1980년 5.17계엄 이후 서울대의 첫 시위로 알려진 일명 <무림사건>의 주모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기 전에 당시 학생운동의 상황을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1970년대 후반 서울대의 상황은 민청학련 사건(1972년 유신을 선포한 박정희 정권이 1974년 긴급조치 4호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40명을 체포한 당시 최대의 학생운동 공안사건-기자 말) 이후 1975년 5월 22일의 김상진 열사 추모집회(이른바 522사건)로 많은 재학생들이 투옥되거나 제적되고 나서는 한동안 투쟁의 흐름이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당시 서울대에는 학회라는 독특한 서클문화가 있었어요. 고전연구회나 흥사단아카데미, 기독학생회처럼 본부에 등록된 (반)공개 서클도 있었지만, 법과대의 경제법학회, 농법학회, 사회대의 한국사회연구회, 농업경제학회, 국제경제학회, 사회복지학회, 인문대의 역사철학회 등 사실상 비공개 운동서클인 각종 학회들이 무척 많았어요. 빠뜨리면 섭섭할 친구들이 있을 텐데(웃음).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되고 학내 시위가 어려워지고 나서는 이 학회 핵심들이 은밀하게 모여서 학생운동의 방향, 전략 등을 논의하는 틀을 만들었는데, 이걸 '언더'라고 불렀습니다. 아마도 1977년부터 1979년 10.26사건이 터지기까지 일어났던 크고 작은 교내시위는 이 '언더'에서 조직됐다고 봐야 할 겁니다. 주동자들은 대부분이 학회에서 성장한 4학년생들이었는데, 저는 역사철학회의 77학번 대표로 참여했습니다.
- 그 '언더' 모임에서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시위도 주도했던 건가요?
"서울역 시위 전체를 주도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서울대는 주도했다고 봐야지요. 10.26, 12.12가 일어나면서 어떻게 대처할 거냐는 논의는 굉장히 많이 했어요. 우리가 본격적으로 언더 조직을 만들고 비밀리에 사람을 키우는 일을 한 게 77년부터인데, 한 3~4년 정도 학내에 조직을 잘 만들어서 사람들을 많이 키워놨어요. 그런데 학생들의 의식수준을 끌어 올리는 작업이 어느 정도 끝나야 더 큰 역량을 모을 수 있다는 생각했기 때문에 서울대는 1980년 5월 14일에야 첫 가두시위에 나갔습니다."
- 준비를 철저히 하려다보니 막상 대중행동에는 발이 느렸던 거군요. 5월 14일 시위에는 학생들이 많이 참여 했습니까?
"당시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모인 사람이 대략 8천 명에서 1만여 명이라고 추산되고 있는데 사실 이게 계산이 잘 안 돼요. 전에는 그렇게 많이 모인 적이 없었으니까요. 경찰들이 교문을 겹겹으로 막고 있었는데 이 정도 숫자가 되니까 결국 뚫고 나가게 되더군요. 경찰들이 일부러 터준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학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돌 나르고, 던지고... 정말 어마어마하게 싸워서 뚫고 나간 건 사실이에요."
-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치열하게 싸워서 5월 15일에는 10만여 명이 서울역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학생운동 지도부들은 계속 싸우기보다 해산을 결정했어요. 우리 민주화 운동사에서 뼈아픈 실책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1만 명, 2만 명은 감당이 되는데, 각기 다른 대학에서 10만여 명이 모였으니까 우리도 많이 당황했어요. 우리 내부('언더' 그룹-기자 말)에서도 '계속 싸우자', '아니다. 해산해야한다' 논의는 분분했지만 그 엄청난 인파가 모인 상황에서 효율적으로 의견을 모을 여건이 되지 않았어요. 설사 어떤 의견 일치를 보았더라도 당시 관광버스 안에서 난상으로 이루어지던 각 대학 학생회장단 회의에 의견을 전달할 방법도 없었고요.
또 그런 의견을 서울대 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에게 전달한다고 해도 그 사람 혼자서 대다수 온건한 입장이었던 학생회장단 전체 의견을 모을 방법도 없었을 겁니다. 결국 학생회장단에서 '해산하자'는 결정이 나오고 시위대가 흩어지기 시작하니까 다시 모을 방법도 없었어요. 당시 학생운동의 역량으로는 불가항력이었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물론 그렇다고 회군에 대한 역사적 책임까지 면할 수는 없겠지요."
- 당시 해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역사의 행로가 달라졌을까요?
"글쎄요. 당시 효창운동장에 공수부대가 왔다는 소식이 퍼졌어요. 물론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랐죠. 그렇지만 계속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쪽에서는 '오히려 (공수부대가 왔다면) 그게 더 좋다'는 입장이었어요. 해산하자는 쪽은 미국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아요. '공수부대까지 왔다면 미국이 좌시하지 않을 거다, 회군해서 공수부대에 빌미를 주지 않고도 신군부를 컨트롤 할 수 있다'라고 본 것 같아요. 당시 운동권에 영향력이 컸던 정치인도 회군 입장이었고. 굉장히 판단하기 어려운 순간이었어요.
만일 회군하지 않았다면 정말 공수부대를 투입했을까? 쉽게 못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당시는 정보도 부족했고, 또 누군지 모르겠지만 버스를 밀어서 전경 한명이 죽고 여러 명이 다친 사건도 있었어요. 그 사건도 해산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그렇지만 만일 다음 날에도 그 정도의 인원이 나왔다면 전두환도 공수부대를 동원해서 폭력적으로 진압하든, 퇴각하든 도박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저도 당시에 회군하자, 회군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번갈아 들 정도로 매우 혼란스러운 입장이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어느 쪽이 옳았을까 판단이 잘 안 서요."
- 학생들이 해산을 결정하고 결국 광주에서는 살육전이 벌어졌습니다. 만일 공수부대가 출동했더라도 서울이었다면 광주와는 달랐을 것 같습니다.
"광주는 풍선효과였어요. 서울의 상황이 안정되고 나니까 신군부 입장에서는 여력이 남아서 광주라는 제한되고 봉쇄 가능한 지역에 무장력을 투입할 수 있었던 거죠. 물론 광주가 특별히 잘 싸웠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서울역 회군이 광주시민의 희생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무림사건, 그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서울역 회군을 결정했던 학생회장들은 5월 17일, 이화여자대학교 식당에 모여 대책을 논의한다. 김명인은 그 다음 주 월요일(5월 19일)부터 다시 대규모 가두투쟁 방침을 관철시키는 방향으로 학생회장단 회의를 움직이기 위해 그 자리에 참석했다.
그러나 잠시 후 계엄군이 들이닥쳐 학생회장들을 연행했다. 회의장 밖에 있던 김명인은 필사의 탈출을 감행, 주방으로 들어가 식당 아주머니들의 도움으로 주방복과 주방모를 걸치고 감자를 깎으며 겨우 검거를 모면했다. 계엄군과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었지만 밤에도 식당 창고에서 대형 수납장을 벽쪽으로 뒤집어 놓고 숨어 있어야 했다. 결국 새벽녘에야 계엄군의 감시망을 겨우 벗어났지만, '빌미를 주지 말자'며 서울역 회군을 결정했던 학생회장들은 김명인의 표현대로라면 "평생 맞을 것을 다 맞았을" 정도로 심한 구타에 시달려야 했다.
- 학교에 돌아와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7월쯤 되니까 5월에 잡힌 사람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저도 2학기에 복학했어요. 당장 싸울 수는 없었으니 제일 먼저 한 일은 서울의 대학들을 연결해서 은밀하게 대규모의 투쟁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타이밍을 1981년 봄으로 잡았죠."
- 나중에 80년대 학생운동 초기 논쟁인 이른바 '학림-무림 논쟁'에서는 무림쪽이 준비론적 입장에서 시위 자제를, 학림쪽이 전면적 투쟁론을 주장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시위 자제를 주장한 것은 맞죠. 나중에 학림으로 불린 그룹들이 우리에게 '왜 시위 안 하냐, 선도투쟁을 해야 한다'고 강력히 항의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우리는 '은밀하게 1981년 초를 준비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보안이 중요했으니까요. 물론 시위를 한 번 할 수는 있지만 시위하다가 걸리면 그 사람만 잡혀가는 게 아니라 조직 전체가 깨질 가능성이 컸어요.
그 때 은밀하게 조직을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은 마치 준비론을 가장한 운동 포기론자처럼 보였어요. 어떤 사람은 '저 사람들이 광주학살 때문에 질려서 운동 포기했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언제나 싸우자는 쪽과 싸우지 말자는 쪽이 논쟁을 하면 싸우자는 쪽이 이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궁지에 몰렸죠.(웃음)"
- 1981년 초에 봉기를 준비하기 위해 '운동포기자' 소리를 들으면서도 시위를 자제해 왔다고 하셨는데, 오히려 <무림사건>이라는 어마어마한 조직 사건이 터지면서 서울대 운동권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상당히 아이러니한 결과인데요?
"사실 우리는 이게 그렇게 크게 될 줄은 몰랐어요. 학내에서 하도 (시위를 벌여야 한다는) 반발이 커지고 갈등도 심해지니까 '안 되겠다, 피해를 최소화하는 범위 내에서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 정도는 발표하자'는 결론을 내렸죠. 어차피 1981년 초에 큰 시위를 하려면 불필요한 갈등을 지속하기보다는 논쟁으로 가는 편이 좋다고 봤어요. 그래서 광주 이후에 대학생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입장을 내기로 했어요.
이렇게 준비한 게 1980년 12월 11일 시위입니다. 12월 12일은 12.12사건 1주기니까 정보과 형사들의 감시망이 심할 것 같아서 하루 당긴 거죠. 그래서 저하고 현OO, 최OO 등이 기본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시위를 주도할 4명으로 팀을 꾸리고 저는 선언문을 기초했는데 상당히 강도 높은 선언문을 만들었습니다.
광주항쟁의 교훈을 반영해서 70년대 학생운동권이나 재야 운동처럼 순진한 반정부투쟁 수준을 넘어서는 본격적인 민중혁명 의지를 고취하는 선언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썼어요. 그나마 저는 제목만은 온건하게 <학우들에게 고함>이라고 썼는데 나중에 시위주동팀이 <반파쇼학우투쟁선언문>으로 바꿔버렸지요."
- 처음에는 이 시위가 이렇게 커질 것이라고는 생각 못하셨던 것인가요?
"유인물을 살포하면 연행될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커질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시위를 주도한 4명이 연행되면, 그 친구들이 시간을 벌다가 현OO군의 이름을 밝히고, 그 다음에 현OO군이 연행되고 나면 저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도피생활을 시작하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이 사건의 대내외적 파장이 커지면서 잡혀간 친구들이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어마어마한 고문을 받았어요. 전기고문에 물고문까지 받다보니 엉겁결에 제 이름까지 나온 것 같습니다."
"옷 다 벗어라" 끊임없는 몽둥이질, 물고문, 통닭구이
학생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배포했던 <반파쇼학우투쟁선언문>은 그 논리 정연함 때문에 공안당국으로부터 '외부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는 의심을 받는다. 신군부는 유인물을 작성·배포한 이들이 간첩이거나, 북한의 사주를 받았거나, 최소한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언론에서는 "공산 폭동 혁명론이 대학가에 나타났다"고 보도했고, 대대적인 구속과 수배, 연행자에 대한 무자비한 고문이 이어졌다. <무림사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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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남영동 1985>의 고문 장면 |
ⓒ 아우라픽쳐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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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연행되셨습니까?
"현OO군이 잡혀가면 내가 도피하기로 했었는데 당시 늘 감시당하고 있던 제가 갑자기 사라져버리면 오히려 눈에 띄게 될 것 같아 일상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어요. 12월 16일에 학부 졸업 논문을 발표하고 있는데 형사들이 들이닥쳤습니다. 황당했죠. 계획대로라면 현OO군이 먼저 잡혀가야 하는데 제가 먼저 잡혔으니..."
- 연행되고 어디로 가셨나요?
"처음에는 관악경찰서 지하실로 갔어요. 넓은 지하실에 들어가니까 첫 마디가 '옷 다 벗어라'에요. 옷을 다 벗겨 놓고 '유인물 누가 썼냐?'고 물어요. 내가 썼다고 했죠. 이미 제가 쓴 걸 다 알고 잡아온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몇 번을 확인하더니 (유인물을) 외워보라고 하더군요."
김명인은 8절지(A4 두배 크기)로 앞 뒤 두 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의 유인물을 접속사 몇 개를 제외하고 정확하게 다 외웠다. 먼저 연행된 사람 중 한 명이 고문 끝에 자기가 썼다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자기가 직접 쓰지 않은 선언문을 외우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덕에 그는 고문만 더 당했다. 그러나 김명인은 본인이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정확하게 선언문을 외워냈다. 1차 임무를 완수한 관악경찰서는 그를 서울시경 대공분실로 보냈다.
두 눈을 가린 채 고문실이 쭉 늘어져 있는 서울시경 대공분실로 들어간 김명인을 기다린 것은 건장한 세 사내들의 구타였다. 몇 마디 질문 이외에는 별다른 말도 없었다. 몽둥이질, 발길질, 주먹질... 엄청난 구타가 있은 다음 날에는 물고문과 일명 통닭구이 고문이 이어졌다.
- 묻기 어려운 질문입니다만, 고문은 어떤 식이었나요?
"때리고 물고문 하니까 오히려 시간을 벌어준다고 생각했어요. 얻어맞고 물고문 당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됐으니까요. 물고문 할 때 할 말 있으면 손가락을 까딱 하라고 하니까 고문 받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면 손가락 까딱하고... 거짓 진술을 한 뒤 경찰들이 확인할 때 좀 쉬고... 선배 이름을 대라고 하면 나름대로는 별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된 선배들 이름 대고... 저 때문에 죄 없는 선배들이 고생을 좀 했어요. 이틀인가 사흘 정도 그러다가 자기들이 생각하는 게 잘 안 나오니까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옮겼어요."
"자결하지 않는 다음에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별칭이다. 이곳에서 수많은 이들이 고문의 고통에 시달렸다. 1985년 김근태 전 의원을 잔인하게 고문했고, 1987년에는 박종철을 고문·살해해 6월항쟁의 도화선을 만든 그곳이다.
- 남영동에서 선생님 수사는 고문수사로 악명 높은 이근안이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영동으로 가니까 얼굴이 큰 수박만하고 덩치가 하마 같은 사람이 악수를 청하더니 '내가 이근안이다. 이제부터 내가 널 맡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당시에 이근안은 다른 수사관에 비해서 굉장히 점잖았어요. 제가 그때만 해도 꽤나 동안으로 보였던 때문인지 '너처럼 애기 같고 예쁘장한 놈이 올지 몰랐다'면서 '정말 네가 썼냐? 다시 외워 봐라'고 하더군요. 내가 썼다는 걸 믿는 눈치였어요. 다 외우니까 이번에는 왜 이걸 썼는지 쓰라고 해서 몇 번을 썼죠. 평생의 일대기를 다 썼어요. 물론 숨길 건 숨겼지만."
- 이근안 하면 잔인한 고문수사로 악명이 높습니다. 선생님께도 심한 고문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당시 이근안은 저에게 물고문이나 전기고문 같은 건 안 했어요. 제가 썼다는 건 이미 이야기했고 본인도 믿으니까. 대신 저를 굉장히 머리가 잘 돌아가는 똑똑한 친구로 본 것 같아요. 이 사람이 저를 지능범으로 보고, 자기도 물리적인 고문보다는 저와 머리싸움 하는 걸 즐겼던 것 같아요. 게다가 이 사람이 일찍 결혼을 해서 아들이 있었는데 저하고 나이가 같아요. 당시 그 아들이 전경으로 입대해서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경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생각도 좀 났나 보더라고요."
- 그럼 남영동에서는 고문이 없었던 건가요?
"그렇지는 않지요. 다만 칠성판(물고문과 전기고문을 위해 고안된 고문 도구. 이근안이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기자 말)에 올라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세 가지 고문을 했어요. 첫 번째는 볼펜으로 허벅지를 찔러요. 이게 피는 안 나면서 굉장히 아픕니다. 두 번째는 손톱 누르기. 세 번째가 '관절 꺾기'였어요. 손목만 꺾어도 뼈가 탈구되는데 너무 고통스럽더군요. 남민전 관련자인 이재문씨에게도 고문하면서 무릎 꺾고 팔 꺾고 나서 '5미터만 제 발로 걸어가면 널 석방하겠다'고 했다더군요.
저도 그때 결국 다 이야기를 했습니다. 서울대 내에 운동을 지휘하는 비밀 조직이 있다고... 그때쯤이면 대부분 도피했을 거라고 생각했고, 수사대상이 너무 많으면 수사에 혼선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정말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댔어요. 후배들의 이름은 숨겼지만 웬만한 선배들, 운동권 명사들은 전부 관계있다고 떠벌였습니다."
- 육체적인 고통도 그렇지만, 정신적인 고통이 심하셨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서승 선생님(재일교포인 서승은 1971년 서울대학교 유학시절 학원침투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돼 심한 고문을 받던 중 난방유를 뿌리고 분신자살을 시도해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기자 말)이 고문을 받다가 난로 기름을 부어서 분신을 시도하신 적이 있잖아요?
저도 라디에이터에 머리를 박으려고 시도하기도 했어요. 내가 자결을 하지 않는 다음에야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요. 결국... 육체적 고통보다 제가 선배와 동료들의 이름을 밝히고 조직을 와해시키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최대의 치욕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문당한 사실을 말하기도 힘들었어요. 결국 적과의 싸움과 나 자신과의 싸움 모두에서 진 거니까요."
결국 축소된 무림, 살아남은 자의 책임감
김명인은 어쩌면 운이 좋았다. 먼저 구속된 이들은 칠성판에 올라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학생사건을 처음 맡았던 이근안에게는 '흥미로운 대상'이었다. 이 흥미는 이근안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똑똑해 보이는 그를 당시 유흥수 치안본부장이 직접 찾아와 '3급으로 특채해 주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거부했다. 그런데 얼마 뒤 이근안의 상관인 당시 치안본부 대공분실장 박처원이 찾아와 이상한 제안을 한다.
-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소환되고 언론에서 간첩조직사건처럼 다룬 것에 비해 무림사건의 결말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경찰에서는 조직사건을 뜻하는 림(林)에, 사건이 안갯속에 있다는 뜻으로 무(霧)를 붙여서 <무림사건>으로 불렀어요.
"유흥수 치안본부장이 찾아오고 나서 박처원이 찾아왔어요. 그러고는 '네 진술을 들으면 유신 때 운동권부터 다 잡아들여야 하는데 그러면 너무 크다. 줄이자'고 하더군요. 수사 받을 때는 사형이라도 받을 줄 알았는데 너무 놀랐습니다. 박처원이 '조직사건으로 다루면 너무 커지고 부담되니까 몇 사람이 주동한 학생시위 사건으로 하자'라고 해서 사건이 축소됐지요. 제가 지니고 있던 서적들 때문에 반공법으로 걸렸는데, 이런 것만 가지고 사건을 전체적으로 축소시켰던 것 같습니다."
세상을 뒤집어놓을 엄청난 간첩조직사건인 듯 시작했던 <무림사건>은 계엄법과 반공법 위반 사건으로 변했다. 타이밍이 좋았다. 1981년 1월 17일 기소가 되어 2월 말에서 3월 초에 첫 재판이 예정되어 있었다.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식과 겹친 것이다. 광주에서의 살육 이후 또 다시 대형사건이 터지는 걸 부담스러워 한 신군부에서 애초의 그림보다 사건을 축소한 것이다. 최소한 사형 구형은 받을 줄 알았던 김명인도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 받고 1983년 8월에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그러나 <무림사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고문을 이긴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고문에 졌다는 '당연한' 결과는 두고두고 그를 괴롭혔다. 함께 조사받은 후배들 대다수가 군대로 강제 징집되었고 그 중 일부는 악명 높은 <녹화사업>에 동원되어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기도 했다. 5공 시절에는 운동권 친구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게 한 악질적인 이 녹화사업 과정에서 6명이 사망했다.
- 출소하고서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죄인이라는 생각에... 괴로웠지요. 그 와중에 녹화사업도 당하고 군대 가서 죽은 친구도 있어요. 감옥에서 나온 뒤로 두문불출하고 운동하던 친구들과도 거의 못 만났어요. 출소 두 달 후에 무역회사에 취직해서 10개월 정도 일하다가 1984년 9월에 복학조치에 따라서 복학을 했어요. 어떻게 계속 싸울 것인가를 고민하다 출판사에 취직하고, 문화운동 특히 문학평론을 통해 싸우자고 결심했지요."
- 지금도 그 때 고문 받은 후유증은 남아 있습니까?
"지금도 가끔 악몽을 꿉니다. 또 잡혀가서 옷 벗기고 항문검사 당하고 취조당하고... 지금에서야 편하게 이야기하지만 한 달 정도를 엄청난 폭력과 심리적 압박 속에서 집중하다 보니까 강박증과 우울증 같은 게 생겼어요. 어떻게든 비난받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일종의 완벽주의자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누가 저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실수를 추궁하면 몸이 확 나빠져요. 얼굴이 달아오르고 붉은 반점이 나타나고 온몸이 가렵기도 하고...그럴 때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지요.
무엇보다 죄책감이 제일 오래 남아서... 어떤 즐거운 일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없었어요. 좋은 일로 기분이 좋다가도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맛있는 걸 먹어도 '내가 이걸 먹어도 되나...' 이런 식으로 계속 마음에 남았지요."
- 고문했던 이들에 대한 원망도 남아 있습니까? .
"원망보다는 연민이지요. 그들도 체제가 만든 사람들이에요. 이근안도 아마 경찰이 된 후에 워낙 신체조건이 좋으니까 대공분야 쪽으로 배치된 거고, 또 공도 많이 세우고 전문가가 되니까 80년대 차츰 노골적으로 대공사건 조작이 시작되면서 인생이 망가진 겁니다. 그 사람도 끊임없이 자기 암시를 걸었을 거예요. 애국한다고. 안 그러면 스스로 무너지니까. 연민이 느껴지죠."
"과거 잘못에 대한 인정을, 사죄를 통한 화해를..."
김명인의 증언에 의하면 이근안은 대공수사에서는 매우 잔인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국내 공안사건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했다. <무림사건> 수사로 1계급 특진한 이근안은 이제 서울대 운동권은 끝났다고 봤다.
수사팀도 '공안팀의 승리'로 자부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1981년 3월, 서울대에서는 다시 격렬한 시위가 발생한다. 뒤에 벌어진 학림사건 등에서 이근안은 더욱 잔인해졌고, 결국 김근태 전 의원에 대한 악마적인 고문수사로 수배 길에 오른다. 김명인은 "이근안이 <무림사건> 이후에도 서울대에서 또 시위가 터지니까 학생들은 봐주면 안 된다고 판단하면서 돌아버린 것 같다"고 봤다. 보복심리가 작용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고문수사관 중에서는 이근안이 제일 유명하지만, 멀쩡한 사람을 고문하고 사건을 조작했던 수없이 많은 이름 없는 이근안들은 정체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이제 김명인은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기로 결심했다. 지난 7월 16일 제안된 (가칭)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 사업의 제안자로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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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인 인하대 교수 이근안 고문 피해자인 <무림사건> 주모자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지난 7월 16일 '(가칭)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 제안자에 이름을 올렸다. 과거에 대한 복수심이 아니라 인정과 사죄, 용서와 화해를 촉구하기 위해서다. |
ⓒ 한영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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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월 16일에 제안된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 사업에 제안자로 참여하셨습니다. 그때의 분노심이나 복수심 때문인가요?
"우리가 반(反)헌법 행위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저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마음속에 제 평생에 지울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이들에 대한 적대감이 없지는 않을 거예요.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지금도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 노릇이지요.
하지만 제 개인적 복수심 때문은 아닙니다. 저는 운도 좋았고 학연을 비롯해서 이런저런 조건들이 좋아서 지금 이나마 잘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뿐인 인생이 망가진 사람들, 미치거나 폐인이 되거나 소리 없이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생을 꽃 피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꺾였습니까?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어요.
우리 헌법에 다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국민이 이런 대우를, 이런 피해를 받으면 안 된다고. 이게 최저선인데 이조차도 안 지켜졌다면 이제라도 지켜야지요. 가해자들도 가해자라는 사실 때문에 정상인 사람 별로 없습니다. 명백한 잘못도 부정합니다. 왜? 고통스러우니까 자기 스스로 합리화하고 자기 암시를 걸지 않으면 그들도 못 견디는 겁니다.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사죄와 용서와 화해와 이뤄지면 이러한 심리적 고통과 강박은 상당히 해소됩니다. 고문 조작한 사람들, 헌법과 인권을 유린한 사람들이 잘못을 사죄하고 용서받고 화해의 길로 나서는 것, 그걸 해보자는 겁니다."
고문 피해자들이 평생을 죄책감과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가해자들도 끊임없는 자기 합리화와 자기 암시에 고통 받는 나날을 보낸다. 그것을 벗어날 유일한 길은 자기 잘못의 인정이다. 인정을 통한 사죄, 사죄를 통한 용서, 용서를 통한 화해다. 용기 있는 이들의 제보를 기다린다.
(*제보: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주비위 이메일: badmen81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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