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센터 연구고문이 26일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과 동아시아 평화체제 구축'을 주제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 앞서 이규수 강덕상사료연구원 원장과 대담을 진행했다. [사진-조천현]](https://cdn.tongilnews.com/news/photo/202607/217088_117361_645.jpg)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과 동아시아 평화체제 구축'을 주제로 26일 일본 도쿄도 조치대학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
오후부터 시작되는 학술회의에 앞서 이날 기조강연을 수락한 강성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센터 연구고문을 이규수 강덕상사료연구원 원장이 회의장에서 미리 만나 대담을 진행했다.
안 의사 유해발굴에 관한 남북의 협력 방안과 유해 발굴 후 고국으로 봉환하는 구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노학자의 눈빛이 반짝인다.
유해발굴은 "남쪽이 단독으로 하는 것보다 같이 하는게 좋을 겁니다. 서로 사이가 나쁘면 그렇지 않겠지만 지금 '공화국'과 중국 관계가 좋기 때문에 영향을 많이 고려할 겁니다"라며, 조심스럽게 기대감을 드러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하라"는 안 의사의 유언을 떠올리며, "만약 유해가 확인되면 봉환은 안 의사의 고향인 해주나 활동하던 남포로 되어야 한다"는 '의견일치'가 단 1%의 상이(相異)도 없이 단박에 이루어졌다.
강 고문은 독일의 정치적 박해를 피해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어머니와 조국에 대해 '밤에 떠오르는 생각'을 시로 남긴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를 이야기하며, 결국 '애국심의 어원은 고향에 대한 애착심'이라고 강조했다.
'고국'은 곧 '고향'이라고 말할 때는 격정이 일었던 것 같다. 지난 2021년 8월 서거 78년만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출생지이자 고향인 평양, 활동지인 연해주와는 아무 연고가 없는 대전현충원으로 봉환된 일을 거론하며 "매우 섭섭했다"고 말했다.
"일제 식민지시대에 활동했던 분들이고 분단이 되기 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이념이나 정치적 판단을 넘어서야 한다"고 했다.
'남과 북이 힘을 합해 안 의사 유해를 찾아 고향으로 봉환하고 그곳에 동양평화기념관을 세우는 구상'에 대해 '탁월한 발상'이라고 격려했다.
"실현 가능하며, 누구나 찬동할 수 있는 일이다. 역사를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해외에서 태어난 역사학자로서 해야 할일은 기꺼이 하겠다"고 다짐하듯 말했다.
그 자신 생존해 있는 몇 안되는 '재일사학'의 상징이니 더더욱 그럴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김달수, 이진희, 강재언, 박경식, 강덕상... 일본 사회 내부에서 차별에 맞서면서 일제의 사료를 근거로 식민사관을 허물고 일본이 은폐, 축소하려는 조선 지배와 침략의 실상을 실증적 연구로 비판하며 '재일사학'의 토대를 쌓아올린 기라성같은 선배들은 이제 그의 곁에 없다.
1900년대 초 항일 독립운동을 연구해 온 연구자로서, 재일 조선인들의 자랑인 '재일사학'의 관점과 태도를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책임감을 온몸으로 증언하는 듯하다.
다음은 안 의사 유해발굴에 대한 남북 공동협력과 동아시아평화체제 구축을 중심으로 '재일사학'과 성과와 한일관계의 미래 등에 대해 강 고문과 미리 주고받은 서면 질문-답변 자료와 당일 일문일답을 재구성한 전문이다.
대담은 26일 오전 11시부터 1시간 동안 진행됐으며, [통일뉴스] 이승현 편집국장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김태우 부장이 배석했다.
![강성은 고문(왼쪽)과 이규수 강덕상사료연구원 원장 [사진-조천현]](https://cdn.tongilnews.com/news/photo/202607/217088_117362_932.jpg)
일본 내 안중근 사상 연구의 흐름과 패러다임 전환
□ 이규수 강덕상사료연구원 원장 : 선생님께서는 이번 기조강연 논고를 통해 일본 내 안중근 연구를 시기별 패러다임 변화(제1기: 패전~1970년대 / 제2기: 1980년대~2000년대 초반 / 제3기: 2000년대 초기 이후)에 따라 매우 입체적으로 체계화해 주셨습니다. 박경식 선생의 실증적 연구를 필두로 최서면, 김정명 선생의 극적인 옥중 기록 및 『동양평화론』 발굴이 당시 일본 지식인 사회와 학계에 던진 학술적 충격과 그 구체적인 여파에 대해 보충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 강성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센터 연구고문 :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에 대하여 일본에서는 패전 후 오랫동안 전쟁 이전과 마찬가지로 연표에 등장하는 하나의 사건으로만 기술되었을 뿐, 독자적인 연구대상으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일본 사회는 안중근에 대해 해방 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암살자'라는 정도밖에 이해를 못했죠. 안중근의 삶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안중근에 대한 공적인 평가에 있어서도 조선은 '애국열사'로 , 일본에서는 '암살자'(테러리스트)라는 것이였죠. 안중근은 조선과 일본사이 역사인식의 차이를 상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1970년대 들어서 박한식 선생을 비롯한 많은 재일 조선인사학자들이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특히 저는 김정명 선생과 최서면 선생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해요. 기본자료를 많이 발굴하고 연구차원에서 자서전인 [안응칠력사], [安응칠소회], [동양평화론]과 공판기록을 발견해서 안 의사의 행위뿐만 아니라 그 내면에 있는 사상의 높이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됐습니다. 그 결과 감동한 일본 역사소설가들이 안중근을 소재로 한 소설을 상당히 많이 펴냈습니다. 소설은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때문에 안중근의 이미지가 1970~1980년대에는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그렇지만 종래의 '암살자'라는 인상을 뿌리부터 뽑아내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어요. 특히 일본은 1990년대 후반부터 '자유주의 사관'이라는 이름 아래 점차 우경화 색채가 강하게 되고, 정부 차원에서도 공화국과 한국, 조선민족에 대해 차별하는 언사들이 많이 나오게 됐습니다. 최근에는 이같은 정부의 입장에 고무된 우익 성향의 민간도 나서서 구체적으로 정치화하는 운동을 벌여나가고 있습니다.
2024년 군마현 당국이 조선인 강제동원희생자 추도비를 철거하고, 도쿄도지사가 2017년부터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추도행사에 추도문을 보내지 않고 추도제 장소 옆에서 우익단체인 '소요카제'가 방해행동을 하고 있죠. 우익 성향의 사람들이 이렇게 계속 소란을 일으키면 시민단체들이 주춤하게 되고 결국은 조용히 받아들여지게 되는 거에요. 고치현에서 벌어진 일은 아주 전형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안중근에 대한 일본의 인식에는 아직도 '암살자'라는 인상이 계속 뿌리깊에 남아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후 안중근 연구는 비약적으로 진전하게 되었는데, 역사연구뿐만 아니라 전기류의 소설도 많이 출판되어서 평화주의자인 안중근의 사람됨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죠. 그런 측면에서 '암살자'라는 안 열사의 이미지는 많이 극복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평화론』이 지닌 독자성과 근대 '아시아주의' 비판
□ 메이지 일본 집권층이 침략 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운 기만적인 '동양 평화' 프레임이나 쑨원 등의 중국 중심적 '대아시아주의'와 비교할 때,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한·중·일 3국의 자주독립과 동등한 주권 존중을 전제했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차별성을 지닙니다. 선생님께서 정리해 주신 안 의사의 혜안(공동 은행, 공용 화폐, 다자간 평화군 등)이 오늘날의 동아시아 정세에 던지는 보편적인 평화 메시지는 무엇인지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
■ 19세기말~20세기 초에 동아시아 각지에서 동양평화, 아시아연대론이 동시적으로 등장합니다. 일본의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일본을 맹주로 하는 '연대'를 부르짖는 침략주의였고 조선의 애국계몽운동 일부에서 나온 '동양주의'론은 일본의 '보호국'을 초래하는 친일논리였습니다. 중국의 쑨원(손문)이 '대아시아주의'를 제창했지만 그 기축은 어디까지나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질서 상이 농후했습니다.
그런데 안열사의 '동양평화론'은 서양열강의 동아시아 침략에 대항하여 조선, 일본, 중국의 자주독립에 기초한 3국연대를 제시한 것으로 다른 나라의 '평화론'과 차이가 있고 최익현, 유인석 등 의병장들의 주장을 계승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최익현이나 유인석과는 달리 3국연대의 실천방법까지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 실천방법이 오늘날에도 유효한지 아닌지는 검토해 보아야 하지만 근·현대 시기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행한 대외행동을 반성하고 앞으로의 동아시아에서 상호이해와 평화창조를 전망하는데 있어서 동아시아 공동의 사상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일본 사회가 안 의사를 '항일 영웅'이나 '테러리스트'라는 단선적 프레임에 가두지 않고, 일본 근대 문명의 야만성을 성찰하는 사상적 거울로 삼기 위해 어떤 점을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 일본 사회나 학계에서는 '약육강식'의 역사관이 매우 농후합니다. 제국주의 시대를 약육강식의 시대로 보고 제국주의로 갈 것인지, 식민지로 전락할 것인지에 대해 양자택일해야 한다는 인식에 기초한 역사관입니다. 제국주의 시대에 세계 대부분 지역이 종주국과 식민지로 양분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거기에 논리적인 필연성은 없습니다.
제국주의의 방향으로 가는 것이 주권국가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전후 일본 역사학의 주류는 일본이 제국주의 전쟁을 하게 된 내적 필연성을 규명한다는, 구조분석적인 전쟁원인론이 차지했습니다.
전쟁의 필연성을 규명하려는 방법론은 결과적으로 오히려 '피할 수 없었던 전쟁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실감)을 보강하는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과연 일본에 있어서 하나의 조건인 국제환경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점은 일본 자체가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체제를 만들어가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입니다.
일본이 근대국가로 독립하고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한 것은 조선, 중국에 대한 침략과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독립국가로 발전한다는 것이 조선, 중국에 대한 침략을 불가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와는 다른길, 평화와 인권을 추구하는 길도 있었을 것입니다. 현대 역사연구의 수준에서는 그러한 움직임은 맹아 정도 밖에 발견하지 못하고 있으나 명치정부는 정책결정을 할 때 평화의 맹아를 부수고 침략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제국주의 전쟁을 피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은 아닙니다.
□ 2000년대 이후 이토 유키오 등 일부 일본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통감 정치를 긍정하며, 안 의사의 저격이 오히려 한국의 강제 병합을 앞당겼다는 식의 본말전도식 수혜론이 대두되었습니다. 이미 1909년 검찰 신문 당시 미조부치 검찰관의 설득에 맞서 "일본인을 위해(동양 평화를 위해) 한 일"이라고 일갈했던 안 의사의 반론을 바탕으로, 이러한 일본 내 '식민지 근대' 담론의 허구성을 사학적으로 어떻게 엄정하게 비판해야 할지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 일본 학계에서는 '식민지근대화'론이 1980년대 말 이후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오래전 안 열사가 이를 비판하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종래의 식민지'수탈론'을 비판하고 일제통치하에서 조선에서 근대화가 진전되었고, 이것이 1960년대 이후 한국에서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한 역사적 요인이었다고 하여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적극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에 선 것입니다.
'식민지근대화'론의 문제점은 우선 방법론에 문제가 있습니다. 토대(경제)만을 중시하고 상부구조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제국주의와 식민지라는 민족문제가 자본·임노동 일반론으로 해소되고 있습니다.
또 실증 수준에서도 문제가 많습니다. 19세기의 경제정체설, 토지조사사업, 식민지공업화,그리고 1960년대 개발독재하 경제성장의 '연속성' 등 자료 취급에서 지나치게 일면적입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식민지 조선에서 '근대'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너무 서두른 나머지 '근대' 앞에 형용사로 붙어있는 '식민지'를 부차적인 의미로 읽기때문에 도대체 '식민지'가 무엇인가라는 점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식민지의 '근대'를 과대하게 평가하면 핵심부분인 식민지와 종주국과의 역사적 차이가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 차이는 단순히 '근대'의 양적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면 식민지의 본질은 '근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종주국 총체의 힘에 의한 이민족지배에 있고, 따라서 '식민지'(수탈, 차별, 억압, 폭력관계)가 그 기조를 이룬다고 보아야 합니다.
안중근에 대한 北의 역사적 평가와 사회적 인식
□ 조선(북) 사학계는 역사시기별, 체제 정립 과정별로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 평가의 강조점을 조금씩 달리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기에는 애국주의적 헌신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방법론적 한계를 지적하는 군사 사학적 관점이 주를 이루었다면, 이후 공화국 정권의 정통성과 민족주의 운동사 맥락 속에서 안 의사의 위상을 어떻게 정립하고 변모시켜 왔는지 그 사학적 평가의 추이에 대해 짚어주십시오. 아울러 조선의 각급 학교 교육과정의 역사교과서 등에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동양평화사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술되고 가르쳐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안중근의 활동은 조선통사나 조선력사교과서의 '반일의병전쟁' 부분에서 등장합니다. 교과서에서는 반일의병투쟁에 고무된 애국청년들이 침략의 괴수들과 매국역적들을 처단하는 투쟁을 벌였다고 하여 1908년 3월 전명운, 장인환의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 처단, 1909년 10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1909년 10월 이재명의 이완용 습격을 함께 다루고있습니다. 이들 애국청년들의 습격·처단투쟁은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려는 애국정신의 표현이였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안중근을 애국적인 열사라고 높이 평가하는 한편 테러의 방법으로는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수 없다고 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전민항쟁으로써만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고 지적합니다.
대동강 하류에 있는 항만도시인 남포시에 안중근의 기념비가 있습니다. 안중근 열사가 당시 진남포에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던 곳인 남포에 1965년 기념비를 건립한 것 같습니다.
남포시내 중심에 남포공원, 일명 해방산공원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애국열사 안중근선생 기념비'라는 2m높이의 돌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평양 등지에 살고 있는 안중근 후손들이 매년 기념비앞에서 추도행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공화국은 1970년대 중엽과 1986년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따라 안 의사의 조카인 안우생을 단장으로 하는 유해조사단을 뤼순 현지에 파견한 일이 있었고, 당시 발굴단이 뤼순감옥 공동묘지인 둥산포 일대를 답사한 후 '고구마밭으로 개간되는 등 지형변화로 발굴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철수했다'는 사실을 한국의 보도나 학계 소식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그 후 2004년 6월 제15회 남북각료급회담에서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한다는 발표가 있었고 세 번에 걸친 실무협의를 거쳐서 2006년 6월과 2008년 3월~4월 각각 제1, 2차 남북공동유해조사단을 파견하고 중국 정부의 협력을 받아 조사를 실시했지만 안 의사의 유해는 발굴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일련의 전말에 대해서는 조선 사회과학원에서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한국의 보도 이상은 아는 것이 없습니다.
2013년 10월에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 의거 104돌 기념행사가 북남공동으로 개최되었죠. 행사에는 함세웅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과 부이사장인 곽동철 신부 등 가톨릭 사제들과 회원들을 중심으로 50명이 참가하고, 북측에서는 서철수 조선가톨릭교중앙위원회 서기장과 김철웅 장충성당 회장 등 4명이 참가했습니다.
제가 소학교 6학년부터 우리학교에 들어와서 역사를 배우게 되었는데, 안중근 열사에 대해서는 초급부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가르칩니다.
특히 제가 1990년대 이후 2000년대 초에 역사교과서 편찬사업을 맡아 초급부와 중급부, 고급부 교과서를 편찬했는데, 초급부에서는 주로 인물편으로 교과서를 편찬합니다.
안중근에 대해서는 단독 인물로 다루었어요. 안중근 자체에 대해서는 중급부나 고급부 역사교과서보다도 비교적 상세하게 가르칩니다.
교훈을 다루는 것은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에 안중근의 애국심을 중심으로 많이 가르쳤습니다. 역사교육에서는 안중근의 업적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죠.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지만, 2015년 9월 <조선중앙텔레비죤>이 방영한 '렬사가 남긴 교훈'은 윤봉길 열사의 의거(1932.4.29. 중국 상해 홍구공원)를 다루고 있는데, 일본으로 압송해 가나자와에서 총살하고 비밀리에 육군묘지로 통하는 도로에 매장한 윤봉길 열사의 매장지를 1946년 3월 6일 마침내 찾아내어 유해를 정중히 보관한 사례가 있습니다. 당시 결성된지 얼마 안되는 '재일조선인연맹' 이시카와현 본부 일꾼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116년만의 사료 발굴과 매장지 공간 분석의 학술적 의미
□ 이번 학술대회에서 제가 발굴하여 정밀 분석한 1910년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고마쓰 도시무네 기자의 르포 원문은 안 의사의 유해가 묻힌 정확한 매장지가 뤼순 감옥 공동묘지 터인 '둥산포 산 중턱'임을 명백히 가리키고 있습니다. 안 의사에 대한 깊은 사회적 존경을 공유하는 북측의 역사적 성향을 고려할 때, 이 새로운 1차 사료가 지닌 공간적 실증성이 향후 남북 간 혹은 북·중·일 간 공동 아카이브 구축에 어떤 학술적 자극이 될 수 있을지 사학자로서 평가해 주십시오.
■ 안중근 렬사의 유해를 발견하기 위하여 남북 당국과 민간은 갖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현지조사를 거듭하였고 각종 문헌자료들을 발굴하고 분석하였습니다. 2015년 1월 한국의 국가보훈처는 중국정부에 뤼순감옥 공동묘지에 대한 지표투과레이더 조사방식 도입을 정식으로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인 매장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자료를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리규수선생이 1910년 <오사까 마이니찌신문>에 게재된 고마쯔 도시무네기자의 르포 원문을 발견한 것은 안 열사의 매장지를 찾아내는 유력한 자료로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수 있습니다.
□ 고마쓰 기자의 사료에 따르면, 당시 구리하라 전옥은 은폐를 목적으로 안 의사의 관을 일반 죄수(1.2m)보다 훨씬 깊은 '지하 7척' 아래에 특제 백목 침관과 함께 은닉했습니다. 이러한 구체적 수치는 표면 지형 변화라는 기존의 한계를 넘어 고성능 지하관통레이더(GPR), 3D 스캔 등 첨단 과학 기술을 매개로 교착 상태에 빠진 유해 발굴을 새롭게 추진할 수 있는 강력한 로드맵이 된다고 보는데, 이에 대한 견해를 여쭙고 싶습니다.
■ 고고학은 본래 인간의 과거를 유적, 유물을 통해서 분석하는 인문과학이지만 지금은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질학, 등 자연과학의 방법을 깊이 구사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수법으로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 지질·광물 성분분석, DNA 조사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을 조합함으로써 단지 '오랜 것을 분류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환경변화와 인간의 생활, 넓은 지역의 교류 네트와크 등 보다 입체적인 역사상을 그리게 되었죠. 기존 조사사업의 한계를 넘어 지표투과레이더와 3D스캔 등 첨단과학기술을 이용하는 것은 교착상태에 빠진 유해발굴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 확보된 사료에는 안 의사의 무덤 바로 주변에 매장된 일반 사형수 4인(모토야마, 야마무라, 혼다, 위안광가오)의 실명과 처형 타임라인이 구체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일제가 안 의사의 기록은 철저히 지웠을지라도 형사범들의 매장 기록(사자 묘지 배치도 등)은 아카이브에 남겨두었을 확률이 높은 만큼, 이 4인의 기록을 역추적하여 안 의사의 위치를 특정해 내는 '우회적 정보공개 청구 전술'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지표투과레이더나 3D스캔을 비추는 대상지가 확정되어야 하는데, 안 열사의 무덤 바로 주변에 4명의 사형수가 매장되었다고 하면 그 무덤자리를 확정할 수 있는 해당자료를 찾아내야 합니다. 일본 정부가 그 자료의 공개청구에 응할지 앞으로 주목되는군요.
□ 역사적으로 당국 간 대화가 중단되었던 시기에도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민간 차원의 학술·문화 교류는 분단의 빗장을 여는 통로 역할을 해왔습니다. 당국의 정치적 역학 관계나 정권 변동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민간 학술 연대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실천적 전략은 무엇이며, 특히 재일조선인 사회와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이 어떻게 평화의 징검다리 역할을 지속해 나갈 수 있을지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 남북 당국간 대화가 중단되었던 시기에도 민간차원의 학술, 문화교류는 계속해왔어요. 특히 남북역사학자협의회가 그 선도적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 내용은 남북공동학술회의, 남북역사용어공동연구, 고려왕릉·개성만월대남북공동발국조사, 고구려고분 남북공동조사보존사업 등입니다.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조사는 남북이 두번 공동으로 진행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중근이 지금의 '북조선' 지역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사정을 생각하여도 '공화국'이 다시 남북공동조사에 응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방법적으로는 한국의 해당 조직이 단독으로 공화국에 제안하는 것보다 일본의 민간조직, 중국의 민간조직과 한국의 해당조직이 공동명의로 공화국에 제안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남북간보다 동아시아의 견지에서 하자는 것입니다.
□ 제 생각을 잠깐 말씀드리면, 역시 남이건 북이건 안중근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지금 남북 사이의 단절이 계속되는 시기에 공동의 자산인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 함께 노력해 보자는 것이죠. 남북이 같이 하지 않으면 실현 가능성도 거의 없습니다.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 있을까요?
■ 지난 시기 두번에 걸쳐 합동조사 경험이 있죠. 그때는 남북관계 좋을 때였고 중국정부의 지원도 있었습니다. 경색된 남북관계에서 다시 공동조사가 될 수 있을지는 고민이 되죠. 그러나 안중근 열사가 해주에서 태어났고 남포에서 활동했으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또 그 일을 통해서 남북관계 정세가 어떻게 풀릴지를 알 수 있는 징표라고 볼 수도 있겠죠.
남측에서 단독으로 공동조사를 제안하는 것 보다는 주변국들의 조직이나, 민간이 함께 공동조사를 제안하는 것이 줗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통일뉴스] 미디어를 통해서, 또는 인편을 통해서 전달할 수 있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 새로 확인된 사료에 더해서 좀 더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현대의 공간에 매장지를 비정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시키고, 현재 북과 중국의 관계가 우호적인 것 같으니 남과 북이 동시에 중국에 요청하는 절차를 밟는다면 충분히 현실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인거죠. 남과 북이 공동으로 추진한다, 유해 발굴 후 봉환은 고향으로 한다, 그곳에 안중근 평화기념관을 건립하여 연간 거사일과 순국일, 8.15즈음에 취지에 찬동하는 남과 북, 해외동포와 주변국이 추도행사를 한다는 등의 구상도 해봤습니다. 현실성이 있을까요? 선생님의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현실성울 논하기 이전에 전적으로 찬동합니다. 공화국에서 안중근을 높이 평가하지만, 앞서 말씀드린대로 개별적인 사람의 비석이 건립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카자흐스탄에 있던 홍범도 유해를, 고향을 북쪽에 두고 있는 그분의 유해를 한국에 모셨습니다. 그때 좀 많이 섭섭했습니다. 고향을 기본으로 해야합니다. 북이나 남이나, 좌파나 우파나 모두 애국심이라는 말을 씁니다만 어원적으로 그것은 고향에 대한 애착심이란 말입니다. 독일 시인인 하이네도독일 정부의 침략정책은 비난했지만 고향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시를 많이 발표했습니다.
식민지시대에 활동했던 분들이고 분단 되기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정치적인 색채를 조금 배제한다면 참으로 이상적이고, 또 실현 가능하고 누구나 찬동할 수 있는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해외에서 태어난 재일 조선인으로 해야 할 일들을 하겠다고 말씀드립니다.
동아시아 평화의 관건은 조선(한)반도의 평화
□ 강대국들의 다자간 역학 관계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적 안정은 늘 동아시아 전체의 거시적 평화 체제와 긴밀히 맞물려 왔습니다. 116년 전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구상에 담긴 사상을 반영하여 거시적으로 남북 관계와 한·일 관계는 장기적으로 어떠한 평화적 해법을 모색해 나가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 안렬사가 살았던 당시와 달리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평화의 관건은 분단국가인 조선반도의 평화이고 이 문제의 해결이 선결적입니다. 한국의 경우를 생각하면 무엇보다도 북을 적으로 상정한 한미군사훈련을 중단하여야 하고 북을 적으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을 페지해야 합니다.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은 '과정으로서의 통일'론을 기본정신으로 하고 남과 북의 다방면적인 교류와 협력을 통해서 평화체제의 확립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한미군사훈련이나 국가보안법은 오늘까지도 유지되고 남북간의 경색을 초래했습니다. 이재명 정부의 평화정책이 말한만큼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를 가를 수 있는 시금석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강성은 선생(왼쪽)은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강하게 피력했다. [사진-조천현]](https://cdn.tongilnews.com/news/photo/202607/217088_117364_284.jpg)
고(故) 강덕상 사학의 유산과 계승
□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재일 조선인 최초의 역사학 교수이자 민족사학의 거목이셨던 고(故) 강덕상 선생님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실상을 철저한 실증 사료로 파헤치고, 일제 제국주의의 야만성을 복원하는 데 평생을 바치셨습니다. 곁에서 지켜본 강덕상 선생에 대해 말씀듣고 싶습니다. 또 강덕상 선생님의 연구가 한·일 근현대사 학계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 사학사의 관점에서 패전후 수년간 일본에서 조선사연구는 공백기로 위치지어집니다. 패전후 일본인에 의한 조선사연구가 재개된 것은 1950년 10월 조선학회가 결성되면서부터입니다. 그러나 조선학회는 구 경성제국대학의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종래의 '식민지주의사관'을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식민지주의사관을 반성한 새로운 조선사연구는 1959년 1월 결성된 조선사연구회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패전후 몇년간 조선사연구의 공백기였다는 이해는 엄밀히 말하면 잘못입니다. 이 시기에도 재일 조선인 지식인들에 의한 역사교육과 연구가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림광철선생은 조련 '민족학교'의 조선사교과서를 집필하였고 <리조봉건사회사>(1949년), <조선력사독본>(1949년)을 집필했습니다. 김두용선생은 <조선근대사회사화>(1949년), 김정명선생은 <조선신민주주의혁명운동사>(1953년)를 내놓았습니다. <민주조선>, <조선평론>, <새로운 조선> 등 계몽잡지도 출판되고 허남기, 김달수, 김석범선생들이 왕성하게 집필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학사적으로 이 시기 재일 조선인지식인들의 연구활동을 중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1세 지식인들의 조금 뒤에 박경식, 강재언, 리진희, 박종근, 강덕상 선생들이 나타났습니다. 강덕상선생은 그 분들 가운데 가장 젊었죠. 이 분들은 일본대학에서 사학을 공부하고 연구의 길에 나섰습니다만 당시 조선인은 대학교원으로 등용되지 못하는 시기였으니 재야에서 연구실도 없는 상황에서 경제생활을 병행하는 매우 어려운 조건속에서 연구를 해왔습니다. 이 분들은 조선총련 산하의 '재일조선인사회과학자협회'의 력사부회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유대가 강했습니다.
또 이 분들은 각각의 전문분야에서 중요한 연구업적을 남겼고 재일동포들의 자랑이기도 했습니다. 강덕상선생은 1963년에 <현대사자료6-간또대진재와 조선인>을 펴내고 처음으로 '간또대진재'(관동대지진)시의 조선인대학살을 규명했습니다. 이 연구는 일본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그후 민간에서는 일본 각지에서 발생한 조선인학살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이 펼쳐졌습니다. 강덕상 선생은 그후로도 연구를 계속하여 간또대진재시의 조선인학살은 일본 지배층이 갑오농민전쟁, 반일의병전쟁, 3.1운동 당시 자행한 조선인학살의 연장, 식민지전쟁의 논리적 귀결이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강덕상선생은 민족주의운동과 공산주의운동 사료를 발굴해 <현대사자료 25-30 조선>도 펴냈습니다. 그 사료속에는 '조선국민회' 관련 자료가 있었어요. 거기서 김일성 주석의 부친인 김형직 선생의 이름이 확인되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직속 당력사연구소'가 이를 주목한 일도 있습니다.
강덕상 선생은 여러 연구활동에서 공로를 평가받아 재일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국립대학의 교수로 취임했습니다. 그 분은 늘 재일 지식인들의 연구는 조선반도 본국의 사학이나 일본의 사학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그걸 '재일사학'이라고 했습니다. '재일사학'이라는 의미는 "해방후 남북의 분단, 전후 일본의 차별과 배외주의 속에서 살아온 재일 조선인만이 할수 있는 비판정신과 역사인식이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강덕상 선생님께서 평생에 걸쳐 수집하신 방대한 '니시키에'(일본 전통 채색판화), 풍자화, 근대사 문서 등 '강덕상 컬렉션'은 한·일 관계사의 왜곡을 바로잡고 진실을 증명할 대체 불가능한 민족사적 보물입니다. 이 귀중한 사료들이 일시적인 연구에 그치지 않고 후학들과 시민사회에 온전히 전승되기 위해, 향후 어떻게 장기적으로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 강덕상선생의 자료가 분산되지 않고 한 곳에 보관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료들을 후학과 시민들에게 전승되기 위해 우선 테마별로 분류하고 목록을 만들어야 겠죠. 또 자료를 열람하거나 연구를 할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누구나 자료에 쉽게 접근하고 연구할수 있으니까요.
재일조선인의 시선에서 본 두개 조국
□ 재일조선인 사회는 분단이 낳은 냉전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남과 북 모두를 조국으로 품고 살아온 독특하고 숭고한 위치에 서 있습니다. 그렇기에 평화 체제 구축에 대한 갈망은 누구보다 깊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도 굳건히 지켜온 정체성을 다음 세대인 3세, 4세 청년들에게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는 중대한 과제입니다. 재일조선인의 시선에서 남과 북에 바라는 간절한 염원과 미래 세대에 물려주어야 할 유산은 무엇입니까?
■ 2023년에 공화국이 '적대적 두 국가'론을 내세운 뒤 남북관계는 경색되어 한국의 많은 통일운동단체들이 자신들의 단체명을 변경하고 <통일>이라는 명칭을 삭제하였습니다. 일본의 조선총련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통일의 상대방인 공화국의 정책변화를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선반도 남북간에는 2천만의 이산가족이 있죠. 재일동포들만 보아도 대다수는 고향을 남쪽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북과 남, 해외동포들이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는 것, 나아가서 낮은 단계의 통일을 이루는 것은 생명과도 같은 절실한 문제입니다. 통일문제는 정치나 경제 위주로 생각하는 것보다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인문학의 견지에서 의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통일은 인권문제로 생각해야 합니다. 인권에는 국경이 없고 그가 어떤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응당 '부여되여야 할' 권리입니다. 지금 남북관계는 경색되고있으나 반드시 사람을 위주로 하는 통일논의로 끌어당겨야 할 것입니다.
가지무라 히데끼(梶村 秀樹)는 1980년에 낸 책에서 재일 조선인운동은 △일본 거주 조선인으로서 조국의 역사적 통일 과제에 호응하는 <조국문제> △일본 사회의 체계적 차별과 탄압에 맞서 생활과 인권을 지키는 <재일문제>라는 이중의 과제를 동시에 추구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재일 조선인운동은 남북코리아와 관계, 일본사회와 국제사회의 지원속에서 운동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5월 한국에서 열린 AFC 여자챔피언스리그전에 공화국의 내고향여자축구단이 참가했죠. 준결승전에서 수원FC, 결승전에서 일본의 도쿄 베르디벨레자를 이기고 우승했습니다. 결승전에서 일본팀을 이긴 것도 기뻤습니다만, 저의 기억에 더 생생한 일은 한국 민간응원단이 비가 억수로 내리는 가운데 열렬하게 응원해 준 모습입니다. 내고향여자축구단 선수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남북 경색 분위기는 절정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절정이 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내려갈 겁니다. 이건 틀림없습니다. 보통 관계로 언젠가는 될 거고 이건 틀림없습니다. 하나의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9월 나고야에서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리지 않습니다. 북에서도 대규모 선수단이 옵니다. 저도 거기에 꼭 갈겁니다. 일본에 져서는 안되지만 내고향여자축구단때와 같은 장면이 많이 나올텐데 그것이 통일기운을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차별 해소와 분단극복은 여전한 목표...조선사학사 정리 계획
□ 선생님께서는 오랜 세월 동안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고 소외된 재일조선인의 사학적 기반을 다지는 실천적 여정을 묵묵히 걸어오셨습니다. 재일사학자 중에는 1950년생으로 가장 연로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학자로서 그간 걸어오신 길에 대한 소회와 함께, 앞으로 연구 목표나 장래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 저는 약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에 서야 한다고 늘 스스로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1926년에 일본에 건너온 직후, 노동판에서 당한 사고로 오른 팔을 잃고 그후 건강을 해쳐 오른쪽 폐와 늑골을 적출하는 신체 장애를 안고 살았습니다. 민족차별과 무학, 신체장애, 빈곤이라는 4중의 고통속에서 4명의 아이들을 키워주셨어요. 일본 소학교에서 민족차별에 괴로워하는 저를 조선학교에 다닐수 있도록 해주신 것도 부모님이었습니다.
웃음을 되찾은 저를 보고 진심으로 기뻐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릴 때는 알지 못해지만 조선학교에서 배우고 성장함에 따라 그들 재일 조선인 1세들의 삶을 잘 이해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식민지지배와 분단상황에 의해 희생되고 신음하는 사람들과 늘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 체험을 계기로 저는 역사연구와 역사교육의 영역에서 재일조선인사회를 규정하는 식민지주의와 냉전·분단이데올로기를 극복할 것을 목표로 해왔습니다. 다시 말하여 일본사회의 민족차별과 조선반도의 분단이라는 상황속에서 우리들 재일조선인이 사는 적극적인 의미를 어떻게 찾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지금 테마로 정한 문제는 '조선사학사' 정리입니다. 한국에서는 '조선사학사'가 일정하게 정리되고 있으나 공화국에서는 사학사연구가 거의 없고 약간 있더라도 한국과는 내용이 매우 다릅니다. 분단이데올로기의 영향에 의한 것입니다. 분단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전 조선이 납득할 수 있는 '조선사학사'를 쓰고싶다는 생각입니다.
해방 전 조선인 사학자들이 쓴 조선역사연구와 해방 후 남조선·한국, 북조선·공화국, 패전 후 일본에서 나온 '조선역사연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고 합니다. 5~6년 계획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