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은 채 길가에 버려져 있었다. 지나던 행인이 이 사람을 발견하고 여기저기 살피더니 “국회의원인데 이미 숨이 끊어졌군” 하며 그냥 지나치려 했다. 행인의 말에 놀라 의식을 되찾은 국회의원은 행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나 아직 죽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행인은 “요즘 국회의원의 말을 누가 믿나”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정치인들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담은 씁쓸한 우스갯소리다.

20대 국회의 선량들을 뽑는 총선이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이번 총선에서 여당인 새누리당이 180석을 넘을 확률이 80%라는 전망이 발표된 가운데, 약체 야당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던 야당 지지자들은 그마저도 더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등으로 사분오열되어 있는 현실에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러한 상황이 가져올 가장 큰 위험은, 극도의 정치 불신과 불투명한 전망 속에서 정치적 무관심이 확산되고 장기화될 뿐 아니라 그 폐해가 고스란히 유권자에게로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선거는 민주적인 권리행사의 소중한 기회이며 민주주의체제를 유지하는 중요한 정치수단이다. 물론 선거만으로 민주주의 체제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선거 과정에서 공표된 후보자들의 공약이 선거가 끝나기가 무섭게 폐기되는 일을 숱하게 보아왔고, 급기야는 정치인들의 불통과 독단으로 심화되어 왔음을 우리는 경험했다. 유권자를 기만하고 배신하는 이러한 정치행태에 대해 감시와 저항이 제대로 표출되었다면 오늘의 정치가 이처럼 국민을 외면하는 관성화된 독재로 퇴락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 국회 본관. ⓒ 연합뉴스
 

어찌되었든 또 한 번 기회가 주어진 정치심판의 시점에서 건강한 민주주의 정치풍토를 만들어내는 첫걸음은 유권자들 스스로 선거에 적극적 관심을 보이고 참여하는 것이리라. 국민이 정치를 무시하면 국민 또한 정치로부터 무시당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마땅한 선택지가 없다 하더라도 최선이 아니면 차선, 차선이 아니면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주어진 여건에서 우리가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길이다. 혹자는 선택을 포기하는 것도 중요한 정치적 의사표명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예 투표장에 나오지 않는 것과 기권을 하더라도 투표장에 나와 투표인명부에 서명하고 기권표를 행사하는 것은 의미가 사뭇 다르다. 후자는 이 천박한 정치상황을 유권자가 주시하고 있음을 정치인들에게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정치인들의 나쁜 습속은 궁극적으로 국민의 무관심이 만들어준 결과다. 정치권 인사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병역비리, 부동산투기, 세금탈루, 인사청탁, 논문표절 등 추한 정치인들의 행렬이 개선되지 않는 것은 이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부족했고 선거를 통해 이를 심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러한 정치현실은 국민으로 하여금 정치에 환멸을 느끼게 하고 정치적 무관심으로 이어져 마침내 정치를 더러운 자들끼리의 진흙탕 싸움으로 만들어 왔다. 국민의 무서운 감시의 눈이 있다면 ‘하는 척’이라도 했을 정치인들이 이제는 아예 국민의 눈을 외면하고 유체이탈의 궤변을 늘어놓으며 안하무인의 뻔뻔스런 작태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배경에는 극도로 기울어진 언론지형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선거 때마다 언론은 제대로 된 후보자 정보로 참과 거짓을 가려 대중에게 알리기보다는 “모두가 나쁘다”는 식의 양비론으로 선거를 진흙탕 싸움으로 몰아갔다. 그런 언론보도는 정치불신과 함께 정치적 무관심을 조성함으로써 선거가 끈끈하게 짜여진 진영에 의해 결판나도록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대중과 정치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해야 할 언론이 건강하고 객관적인 여론 형성자로서의 지위를 팽개친 채 정파와 이념에 갇힌 패거리 진영의 한 축으로 기능해 왔던 것이다.

진영문화는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이기고 지는 것 외에 어떤 가치도 발붙일 틈이 없는 진영문화는 과거 오랜 군부독재정권하에서 파생됐다. 진영문화는 민주정부 10년 동안 약화되는 듯 했다가 군부독재의 상징인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집권하면서 매우 깊이 뿌리내렸다. 아무런 가치 기준도 없이 진박, 친박, 중박, 비박, 탈박 등의 해괴한 말들이 횡행하는 것은 바로 이런 천박한 진영문화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진영문화는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적을 제압하기 위해 온갖 기만술과 선전술, 파괴 공작 등이 동원된다는 점에서 정의와 진실,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민주주의 문화와 동거할 수 없다.

선거정국에서 언론의 불편부당과 균형보도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하지만 언론이 지키고 경계해야 할 원칙들은 이 외에도 많다. 후보자들이 현재 하고 있는 말과 선전에만 의존하지 않고 후보자들의 과거 행적을 알려주는 것 또한 언론이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다. 그래야 그들이 하는 말의 진정성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고 했다”는 식으로 후보자의 말을 경마 중계하듯 보도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진위를 따지는 것도 언론이 해야 할 일이다. 특히 언론은 정치 불신을 야기하는 후보자들 간의 네거티브 캠페인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동시에 유권자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선심성 공약에 대해서도 재원확보의 가능성, 정책의 타당성 등을 철저히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1월14일 총선 90일을 남겨놓은 시점에서, 시민단체 및 언론현업단체 등 총 28개 단체가 참여한 ‘2016총선보도감시연대’(총감연)가 출범했다. 지금 이들의 행보가 주목되는 이유는 오늘의 퇴락한 언론현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단순한 보도감시를 넘어 편향보도에 대한 행동지침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총감연은 발족 기자회견문에서 “언론이 전달하는 정보는 유권자들이 지지후보자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전제하고 “국민은 언론에 올바른 정보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총감연은 언론에 대한 모니터 결과를 언론사에 배포하고 공개할 뿐 아니라 극심한 편향보도에 대해 언론중재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선거관리위원회 등에 제소함으로써 언론사와 해당 언론인에게 책임을 묻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더 공정한 언론, 더 성숙한 선거, 더 나은 민주주의를 다짐한 총감연의 활동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