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시작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아무리 정치가 살아 움직이는 생물 같은 존재라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종잡을 수 없이 변하는 상황은 근래 들어 본 적이 없다. 그 변화의 밑바닥에 어떤 맥락이 숨어 있는지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총선이 다가오고, 새누리, 더민주 양당의 공천 작업이 슬슬 결과를 드러내기 시작하자 희미하게 어떤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새누리당의 작품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더민주의 김종인표 비례대표 후보의 목록을 보자면, 뭔가 앨리스가 뛰어 노는 이상한 나라에 와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글은 그 생소함에 관한 이야기이다. 옳든 그르든 속는 셈 치고 일단 한 번 따라와 보시길 권한다.
새누리당의 공천상황
이쪽은 이해하기 쉽다. 그냥 한 마디로 표현해서 친위대를 구성하는 거다. 청와대에서 뭐라 한 마디만 던지면 알아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줄 거수기 집단을 만드는 것이고, 박근혜 대통령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그냥 믿어주는 집단을 원하는 것이다.
유승민계는 초토화 되었고, 그 중 다수는 탈당을 불사하고 있다. 옥새를 들고 튀기까지 했어도 김무성계 역시 빛을 잃었다. 그래도 뭔가 최후의 한 방이라도 숨겨 놓았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있긴 했지만 역시나 별것 없었다. 친박들은 지난 시절 있었던 공천 학살의 분풀이를 하며 흥분하고 있고, 새누리당의 정체성은 바로 박근혜 자신이 되어 버렸다. 즉, 박근혜에게 대드는 사람은 당과 정체성이 안 맞는다는 것이다. 유승민에게 던지는 친박들의 지적, “당신은 우리 새누리당과 정체성이 안 맞아”라는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다.
남아 있는 사람들, 박근혜 주변에서 샘솟은 관료들, 행정가들은 모두 투입된 셈이다. 어차피 지리멸렬 분당이나 하고 있는 더민주 따위 신경도 안 쓴다. 아니, 총선에서 패배해도 상관없으니 우리 사람들만 남기겠다는 이야기까지 흘러 나왔다.
총선이 지나면 새누리당에는 친박 정도가 아니라 박근혜의 수족같은 사람들만 남는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차기 대선후보가 누가 되더라도 청와대에서 찍어 주기만 하면 무조건 그 후보 밑에서 일렬종대로 헤쳐 모일 예정이다. 그걸 원한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의 사람들'이 경쟁력은 있을까? 실제로 단수공천되지 못한 진박계 후보들이 경선에서 우수수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들이 자신의 능력은 하나도 없이 박근혜의 이름 뒤에 숨어 있는 바보들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박근혜는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총선을 하는 것이다.
<한겨레>
개헌? 물 건너 갔다. 200석은 어림도 없다.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 시킬 180석? 그것도 어림없다. 새누리당도 그걸 바라지 않는 분위기다. 그런 걸 목표로 삼았다면 저렇게까지 칼춤을 추진 못한다. 저들은 그저 과반으로 만족할 예정이다. 어차피 대선에서 이기면 된다는 생각 뿐이다. 그리고 그 대선 후보, 박근혜의 낙점을 받은 후계자가 누가 될지는 모르겠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대통령의 눈에 든 누군가가 되겠지 뭐.
새누리당이 이런 급수 낮은 밑그림을 그려 준 점, 정말로 감사한 일이다. 도저히 승산이 안 보이던 싸움판에 싸워볼 여지가 생겼다. 이 모든 것이 박근혜 대통령의 공덕이라 생각하니 저절로 찬양하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대통령님 화이팅!!
더민주의 지리멸렬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더민주는 '지리멸렬'이라는 단어를 현실정치에 구현하면 바로 이런 꼴이겠구나 싶은 수준으로 망가져 있었다. 당 중앙은 무력하고, 의원들은 뭘 해야 할지를 몰랐으며, 총선 준비는 커녕 일상적인 업무까지도 마비 수준으로 떨어졌고, 분당의 공포와 어디에 줄을 서야 살아 남는가 눈알 굴리는 소리만 가득찬 그런 정당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분당이 되었다. 물론 지금와서 보기엔 분당 수준은 아니고 그냥 몇몇 의원이 작당해서 몰려나간 꼴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당대표 문재인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지 몰라 망연자실하고 있는 걸로 보였고, 원내대표 이종걸은 연일 헛발질(당무 거부 포함)을 하고 있었고, 의원들은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하나 둘씩 빠져나가고 있었고, 총선은 하루 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역대급 참패, 80석 이하를 점유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성질 나쁜 사람들은 80석도 과분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00석이면 승리라는 정청래 의원의 말이 나온 것도 이 시점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중앙은 위기의 심각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걸로 보였다. 이런 상황이면 사실 제일 답답한 것은 총선을 준비해야 하는 의원들이다. 공천의 룰도 확정되지 않았고, 심지어 이번 총선은 지역구 결정도 안되고 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거기에 경선을 해야 하는 건지 전략공천을 요구해야 하는 건지 오리무중의 상태에서 각개전투를 벌이고 어떤 사람은 중앙에 기웃거리고 어떤 의원은 자신의 지역구 활동에 힘을 쏟고 다들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 채로 한숨만 쉬고 있는 상황이었다.
김종인이 오자마자 총선 준비를 이렇게 안 해놓은 정당은 처음 봤다고 외친 것도 당연한 일이다.
더민주는 어떤 집단인가?
솔직히 말해 보자. 더민주, 더불어민주당은 어떤 정당일까? 진보정당인가? 보수정당인가? 대안 정당인가? 수권 능력은 있는가? 사람들의 신뢰는 얻고 있었을까? 아무도 모른다.
어떤 지지자들은 더민주는 진보정당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박근혜 정권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그런 또 하나의 보수정당, 새누리 2중대라고 생각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과거의 유물로 남아 해체될 날만 기다리는 좀비 정당이라고 생각을 한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신을 이어받는다고는 하지만 그것조차도 의심스러웠다. 어떤 포스터에는 김대중 노무현보다 김영삼이 앞에 나와 있기도 했었다. 김영삼은 삼당합당을 통해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을 건설한 파운딩 파더잖아.
분명히 정권을 잡았던 경험도 있는 걸로 보인다. 자당의 대선 후보를 지독히도 흔들었고, 당선되자 마자 탄핵을 해버린 정당이었지만 말이다. 과반 의석을 점유해 본 경험도 섞여 있다. 물론 그건 열린우리당이었고, 더민주가 열린우리당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는지는 약간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정말로 혼란스러운 정당이다. 그런 과거를 지닌 정당, 원내 과반은 못되어도 당당하게 제2의 정당인 더민주는 도대체 왜 이러고 있었던 것일까? 박근혜 정권이, 새누리당이 아무리 깽판을 치고 터무니 없는 실정을 해도 더민주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꼴을 보기 힘들었다. 박근혜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5%씩 떨어져도 절대 더민주의 지지율이 올라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핵심은 사람들의 신뢰다. 정권이 아무리 깽판을 쳐도 대안이 되어야 할 더민주를 신뢰하지 못하니까 지지율을 주지 않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었다.
새누리당의 골수 지지자들은 언제나 새누리를 선택한다. 나라를 팔아 먹어도 선택한다. 마찬가지로 더민주의 골수 지지자들은 당원으로서 당해서는 안될 꼴을 당해가면서까지도 더민주를 선택한다. 자신이 보수든 진보든 상관이 없다. 더민주가 보수든 진보든 무슨 정책을 가지고 있건 상관이 없다. 저 나라 팔아먹을 놈들, 친일 매국노의 후예들이자 공약도 하나도 안 지키는 사기꾼 집단인 새누리당으로부터, 유신의 후예, 스트롱맨의 딸 박근혜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올 집단은 더민주 밖에 없다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정된 새누리 지지자 35%, 더민주 지지자 25%를 합쳐 보면 60%가 된다. 나머지 40%의 유권자들은 어디로 간 걸까? 이들 중 절반 정도는 아예 정치에 관심이 없어 투표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투표는 하는 사람들이 '부동층(浮動. 물위에 떠서 움직이는 계층)'으로 존재한다.
이 부동층은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에 실망하고 꼴보기도 싫은데 그렇다고 더민주를 지지하자니 영 신뢰가 가질 않아서 고민하는 계층이다. 이들은 더민주가 신뢰만 보여주면 선택을 아끼지 않을 집단이다. 이들의 선택을 받으면 이긴다.
그러나 신뢰가 없다. 그게 더민주의 최고의 문제였던 것이다.
신뢰가 없는 이유
부동층은 현실적인 계층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선택을 한다. 정치적 사상적 정체성 보다는 현실적 합리적 대안을 요구한다. 고정된 지지자들에 비해 자유도가 높다. 언제든지 선택을 바꿀 수 있고, 정당의 성공 보다는 자신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어찌보면 얄미운 사람들이다. 신분 상으로도 중산층일 가능성이 높고 자신의 일에 신경을 더 많이 쓰는 집단이기도 하다.
이들 거의 대부분은 보수적이다. 당연한 것이 이 사회에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를 자신있게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더민주에게 조차 불만족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데 이익에 따라 새누리를 선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진보는 지극히 소수다.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 한다. 이 사회에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스스로 선택한 스탠스가 진보인 사람은 많이 잡아야 5% 전후다. 최소한 아직은 그렇다. 한 때 민주노동당이 10%를 넘는 정당 지지율을 획득했던 것은 노무현의 탄핵에 이은 열광 속에서 발생했던 일이고, 그 뒤로 다시 쪼그라붙은 것이 사실 아닌가?
그런 부동층들은 실무적인 능력을 우선시 한다. 그리고 예측가능하게, 합리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선호한다. 예를 들자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과격한 정치인들 보다는 합리적이며 일관된 행동을 하는 관료를 신뢰한다. 과격한 주장 보다는 현실적인 대안을 선호한다. 복지 문제를 꺼내면 증세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다. 혁명보다는 점진적인 변화를 선호하고, 사회에 충격을 주지 않을 정도로 서서히 변하길 원한다.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는 노무현의 참여정부도 과격했었다. 참여정부의 지지율이 정권 말기로 갈수록 급락했던 것은 단지 언론의 조작 때문만은 아니다. 바닥으로부터 다양한 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해서 불편함과 불안감을 느꼈던 사람들이 많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친노, 386운동권, 이런 이름이 붙은 사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정당인 더민주는 그런 부동층에게는 왠지 모르게 불안감을 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조선일보 등의 조폭재벌언론들은 사실상 우리 사회의 메인 스트림의 이해를 대변하면서도 언제나 이 중간 부동층의 구미에 맞는 말로 위장을 한다. 그리고 그들이 더민주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안과 의혹을 부채질한다. 아니 어쩌면 중간 부동층의 그러한 어리석은 속성은 이들 메이저 언론들이 오랜 시간 동안 노력해서 만들어 놓은 사회적 차원의 어리석음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참여정부의 인재풀이 부족했던 것, 몇 가지 정책이 실패했던 것, 그런 흠결들은 이런 부동층에게는 실무적 무능으로 간주된다. 동의하기 힘들지만, 약간 부패하더라도 메인 스트림에 속한 사람들에게 국가 권력을 맡겨야 된다는 판단도 이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비슷한 이유다. 최소한 갑자기 망치지는 않을테니까 말이다.
사실과는 관계가 없다. 그들은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고, 그 인식은 조중동 등에 의해 강조되고 권장되며 유포된다. 저들은 위험한 집단이다. 언제 나라를 김정은에게 팔아먹을지도 모르는 집단이다. 이러면서 말이다.
정청래? 386 운동권 출신으로 탄핵 때문에 졸지에 의원 뱃지를 달게된 막말이나 할 줄 아는 정치인이라고 본다. 내가 아니라 이 부동층들이 그렇게 본다는 것이다. 이해찬? 왕년의 운동권 시절의 경력으로 그런 불안정한 386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본다. 총리라고 맡겨 놨더니 국회 본회의장에서 상대당에게 욕이나 하는 과격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속해 있는 정당을 어떻게 신뢰하겠느냐는 것이다. 거기다가 곳곳에 박혀있는 과격한 운동권 스타일 의원들이 한 둘이 아니다. 통일의 꽃이네 뭐네 하면서 북한까지 갔다온 임수경도 있다. 지금도 핵을 개발하네 미사일을 쏘네 그러면서 우릴 괴롭히는 북한하고 무슨 관계가 있을 것 같은 그런 사람들에게 꼭 금뱃지를 줘야 했는가? 라고 묻고 있다. 그들의 시선이 옳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얄미운 부동층들이 현실사회에서 더민주를 그렇게 보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실무적 무능과 사상적 불안감. 이 두 가지가 부동층들로부터 더민주에 대한 신뢰를 거두어 버린 가장 큰 요인이었다는 지적, 부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중간의 부동층, 조중동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이 사회의 허리를 감당하고 있으며 “난 정치는 잘 몰라”라고 뒤로 물러서는 척 하면서 선거 때만 되면 나와 새누리의 당선을 돕는 그 집단이 우리 사회 유권자 중에 최소한 20%는 된다. 인터넷과 SNS에서 진보적인 의제들을 목청높이 외치는 2~30만의 네티즌들은 이들에 비하면 모래알보다 작은 존재들이다.
참고로 우리 사회 총 유권자의 수는 4천만 명 정도이며, 부동층이 20%라면 8백만 명이다. 진보적 네티즌을 크게 잡아 40만이라고 잡아주면 유권자의 1%다. 이게 바로 더민주가 각종 선거에서 절대 이길 수 없는 마법같은 현실의 핵심이다.
김종인, the 국보위원
문재인 당대표는 안철수 의원의 탈당 이후 김종인을 불러 들인다. 그리고 자신은 뒤로 물러서 버린다. 이 과정에서 둘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김종인은 문재인으로부터 당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았고, 특히 공천에 관해 말 그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받는다. 거기에 김종인이라는 한 개인이 스스로 가지고 있던, 출신성분과 경력에서 오는 권위가 더해진다.
가인 김병로의 손자, 박정희 전두환 시절 한국 최고의 경제학자이자 관료, 현행 87년 헌법에 경제민주화 조항을 삽입한 장본인, 그리고 전두환의 쿠데타 이후 국보위에 참여했던 전력이 함께 하고 있다. 심지어 직전 대선에서 문재인의 상대였던 박근혜 진영에 참가해 당시 민주당의 공약보다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버린 경제민주화 공약을 직접 설계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물론 박근혜는 이 모든 공약을, 내가 대통령이 되면 다 한다는 거 아닙니까, 라고 말해놓고 대통령이 되자 일체를 생까버렸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김종인이라는 한 인간의 성격을 100% 파악하기에는 부족하다. 박정희 시절 세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무리하게 도입한 부가가치세를 거의 유일하게 반대했던 인물이다. 70년대 말 그 엄혹했던 시기에 말이다. 박정희 정권은 그로 인해 무너진다. 물론 박정희 정권이 부가가치세 도입으로 인해 무너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박정희 암살의 직접적인 동인이 되었던 부마 항쟁에서, 시위대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시민들의 주류는 부가세로 인해 고통받던 상인들이었다는 정도의 현실적 연관성은 있다.
그러더니 '쿠'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이 민심을 달래기 위해 부가세 폐지를 논의하자 김종인은 '기껏 도입해 몇년 지나면서 이제 좀 안정이 되려는 부가세를 이제와서 다시 폐지한다는 것은 국가 경제에 혼란만 가져올 뿐'이라는 이유로 홀로 반대한다. 직접 국보위에 참여하여 전두환과의 독대까지 하는 과정을 거쳐 부가세 폐지 정책을 없던 일로 해버리고 만다.
그게 옳은 건지 그른 건지는 경제전문가들이 알아서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김종인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경제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한 두 철권통치자들에게 단신으로 정면으로 맞섰던 사람이다. 그게 훌륭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만큼 자신이 믿는 바를 관철시키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이라는 뜻이다.
그게 끝이 아니다. 김종인은 국보위 시절 맺은 인연으로 민정당 소속 의원을 하기도 했고, 나아가 노태우의 경제분야 선생 역할을 한다. 그 인연으로 결국 큰 사고를 친다. 누구나 다 아는 87년 경제민주화 조항 관련 사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후 당선된 노태우 정권에서 전세계적인 호황의 여파로 국내 부동산 경기가 과열되고 가격이 폭등하자, 노태우는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조건으로 전권을 주고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김종인을 불러들인다. 이 때 김종인이 내세운 정책은 주요 재벌의 비업무용 토지, 즉, 부동산 투기용으로 구매해 짱박아 뒀던 토지들을 '강제 매각' 시켜 버리자는 것이었다. 이 정책은 실현되었고, 갑자기 쏟아져 나온 물량으로 인해 실제로 부동산 가격은 급격하게 안정이 된다.
이 조치는 해방이후 대한민국에서 실제로 시행된 가장 강력한 재벌규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대한민국 정부가 재벌을 상대로 이렇게 큰 손해를 끼친 역사가 없다. 놔두면 놔둘수록 올라 떼돈을 벌게 해줄 알토란 같은 땅을 생으로 헐값에 팔게 된 재벌들은 김종인을 증오하게 된다. 오죽하면 현대 왕회장 정주영은 김종인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 치를 떨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후 김종인의 입각이 거론될 때마다 전경련이 결사반대하고 결국 제대로 입각 한 번 못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보면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에도 김종인은 경제부총리 인선에 올랐지만 결국 김진표로 대치 되었다. 삼성의 입김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람이다. 김종인이라는 무서운 할배가 바로 이런 사람이란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김종인, 국보위 출신 김종인, 가인 김병로의 손자 김종인은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독재자 한 명과 싸울 줄은 알지만, 정치적 경험은 없다. 즉,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집단 내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반발을 어루만지며 무난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재주는 없다는 뜻이다. 재벌의 땅을 강제매각 할 때에도 그 스스로 환경을 만들고 일을 추진한 것이 아니다. 노태우라는 막강하고 무소불위한 권력을 등에 업고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저 '전권'을 위임받아 독선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현실화 할 줄 아는.. 전형적인 고위 관료 스타일이다.
이게 문제가 된다.
김종인의 그림
김종인은 모종의 그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뭔지 알기 힘들었지만, 아마도 그 그림을 대략 설명하고 문재인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을 것이다. 그 그림은 마치 알파고와 이세돌이 반상에 돌을 놓듯이 하나하나 현실 세계에 놓여가기 시작했다. 문재인이 이에 대해 사전 동의 했을까? 아니면 그냥 묵인하는 걸까? 아니면 당권을 줬다 뺏기 미안해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그림은 모종의 일관된 맥락이 있다. 그 하나는 중간 부동층이 기존의 더민주에 가지고 있던 불안감을 제거하는 방향이라는 것이다. 실무적 무능? 사상적 불안감? 이를 제거하기 위한 조치는 바로 386 운동권 출신이라는 상징적인 이미지를 가진 후보들을 쳐내는 작업이다. 정청래는 하필 그 이미지가 가장 강력했던 사람일 뿐이다. 지지자들에게는 속시원함을 주었겠지만 부동층들의 이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던 그 특유의 막말을 연상해 보면 왜 그가 그런 이미지의 대표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참여정부 출신들도 쳐냄을 당한다. 문희상, 유인태가 그 대표적인 케이스다. 개인적으로는 존경하는 두 분이며, 순순히 웃으며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다는 점은 적어 두자. 그러나 김종인의 그림에 그 두 사람이 설 자리는 없었다(이 글을 완성한 뒤에 문희상 의원은 구제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내부적 반발이 극심했거나, 대체할 인물이 없었겠지).
그리고 그런 이미지의 최고 좌장인 이해찬을 쳐내기에 이른다. 이 대목에서 실제로 큰 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이해찬은 더민주의 불안요소를 쳐낸다는 의미에 한가지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대상이기도 했다.
바로 두 번째 맥락. 문재인의 앞길에 잠재적인 위험요소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많은 정치평론가들이 김종인의 공천을 친노패권주의 척결이라는 관점에서 분석을 시도하다가 길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왜냐면 똑같은 친노 중에서도 어떤 친노는 쳐내고 어떤 친노는 남겼기 때문이다. 종잡을 수 없는 기준처럼 보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정청래를 쳐낸 자리에 손혜원을 공천하는 모습을 보고 확실한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는 더민주의 이미지를 바꾸는 공천이며 동시에 '친문공천'이었던 것이다. 친노 중에서도 문재인과의 거리 기준으로 분류하자면 비문과 친문이 존재한다. 비문은 쳐내고 친문은 전진배치했다. 한 명 한 명 분석해 보면 이런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나마 의미있는 머리수를 가지고 있던 정세균계도 대거 탈락되었다. 아마도 문재인 이후를 지켜보고 있을 것 같은 박원순의 사람들도 대거 탈락했다. 이건 대놓고 걸림돌 치우는 작업이며, 박원순에게는 이번 말고 다음에 나오라는 명시적인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반면 문재인이 당대표 시절 영입했던 대부분의 사람들, 문재인 키드(Kids)라고 볼 수 있는 후보들은 전진배치 되었다. 쉽게 정리하자면 문재인의 대선 가도에 걸림돌이 될 소지가 있는 자들은 쳐내고, 그 길을 도와줄 동력을 대신 채워 넣었다는 것이다.
이 그림의 끝에 이해찬이 있었다. 이해찬은 문재인이 비서실장 하던 시절에 이미 총리를 했던 사람이다. 문재인보다 배분이 더 높다. 그런 사람이 당내에 잔류하고 있을 때, 그를 중심으로 형성된 세력은 문재인의 대선 가도에 분명히 방해가 된다. 그러나 문재인의 손으로 그를 쳐낼 수는 없다. 이건 서열의 문제이며 도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김종인의 그림에 있는 차기 대권은 문재인의 것이었다. 김종인은 자신의 손에 묻은 피로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더민주의 변화
필리버스터가 있고 난뒤, 그 지저분한 마감처리를 모두가 기억하실 것이다. 그 때 이런 글을 썼었다. <파괴된 필리버스터: 야당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 글에서 '과연 더민주는 가치지향적인 야당인가'하는 질문을 던졌다. 필리버스터에 참여하여 지지자들에게 감동을 선물했던 의원들이 이야기한 가치는 매우 진보적인 그 무엇이었다. 국가는 개인의 정보를 훔쳐봐서는 안된다, 테러방지를 이유로 기본권을 침해해서는 안된다, 국정원은 개혁의 대상이지 주체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런 얘기들이었다.
더민주는 이 가치를 채택하지 않았고 나는 실망했다. 그러나 당시 김종인은 이미 더민주의 모든 권한을 쥐고 흔들고 있었고, 그는 더민주에게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키고 싶어했고 더 이상 확대하기를 거부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더민주는 '진보적 가치'라는 깃발을 버려야 했던 것이다. 김종인의 그림 속에 있는 더민주는 새로운 깃발을 들고 있어야 한다. 그 깃발은 중도 부동층에게 실무적 유능을 보여줄 수 있는 정당이어야 했고, 막말하지 않는 정당이어야 했고, 사상적 안정감을 보여 줄 수 있는 정당이어야 했고, 나라를 맡겨도 망치지 않을 불안하지 않은 정당이어야만 했다. 김종인은 이 사회의 중간 부동층이 가지고 있는 인식, 그 인식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져보고 그걸 설득해서 바꾸거나 하는 노력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들, 중간층 다수의 현재 인식에 영합하기 위한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 속의 더민주가 들고 있는 깃발에는 이렇게 쓰여 있을 것이다.
'합리적 보수'
상상해보자. 더민주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합리적 보수라고 부여하는 광경을 말이다. 이에 대비되는 새누리당은 자동으로 '무능한 극우'로 자리매김한다. 왜냐면 하필 그 시점에 새누리와 함께 정권을 쥐고 있는 자가 박근혜이기 때문이다.
물론 새누리당 골수 지지자들에게는 더민주가 합리적 보수든 혁명적 좌파든 의미가 없다. 그러나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중도 부동층이다. 그들은 이미 박근혜의 실정에 지쳐 버렸다. 아마도 무리한 개성공단 폐쇄 같은, 골수 지지자들조차 갸웃거리게 만든 그런 실정들이 누적된 탓이겠다.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더민주는 이제 친노의 정당이 아니다, 이제 386 운동권의 정당이 아니다, 보았잖은가, 이해찬도 쳐내고 정청래도 쳐냈다.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실무적 유능? 그것도 보여줄 수 있다. 이 이미지는 아마 여기에서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지지자들에게는 투사 정청래를 자르고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홍보책임자 손혜원을 꽂은 것이지만, 중도 부동층에게는 난폭하게 막말하는 운동권을 자르고 자본주의의 첨병인 마케팅 프로페셔널 손혜원을 선택한 걸로 보인다. 지지자들에게는 전설의 운동권 맏형이자 친노의 좌장이며 새누리를 혼쭐낸 대찬 총리 이해찬이지만, 중도 부동층에게는 강경하고 고집만 센 늙은 운동권, 맨날 데모하느라 공부도 안하던 운동권 떨거지들의 우두머리이자 해찬들 세대를 양산한 무능한 정치꾼 이해찬을 자른 걸로 보인다.
이 변화는 숫자로는 이렇게 표현된다. 맨날 지지하던 25%의 지지만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25% 중에서 스스로 진보를 자처하는 일부(대략 1%가 채 안되는 시끄럽고 말 많은 SNS의 지지자들)를 잃고, 부동층 20%를 얻을 것인가 하는 선택이다. 남는 계산이다.
김종인은 확실하게 더민주를 우측으로 옮겨 놓고자 하고 있다. 그게 옳은지 그른지를 제쳐 놓고 판단하자면, 이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전략적으로 지극히 유리한 선택이고, 또한 박근혜의 실정을 틈탄 효율적인 선제공격이다.
조중동은 일제히 김종인의 선택을 찬양하고 나섰다. 운동권 정당, 친노 정당 더민주가 갑자기 김종인을 만나 합리적 보수로 이미지 쇄신을 하고 나서는 것, 조중동에게는 희소식일 수 밖에 없다. 왜 희소식이냐고?
비례대표 2번이라는 이슈가 있긴 했지만 조중동 3사 홈페이지 메인에 김종인 후보가 등장한다
이들은 사실 누구의 편도 아니다. 이들의 노선은 결국 자사이기주의이지 보수도 진보도 아니다. 독재적 권력 박근혜와 거기에 맞서는 대형 야당 민주당이라는 판은 이들 조중동에게는 결코 맘편한 운동장이 아니다. 오히려 두 개의 보수정당이 서로 교대로 권력을 잡아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며 '할 말은 하면서' 대대손손 해먹을 수 있다. 그런 판에서 더민주가 갑자기 보수의 깃발을 들고 나오며, 메인 스트림과 말이 통하는 사람들로만 판을 채우고 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김종인의 등장 이래, 더민주는 근래 몇년 만에 처음으로 메이저 언론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조중동 뿐 아니라 지상파 방송에도 자주 나온다. 그렇게 필리버스터를 해도 단신 보도도 안해주던 언론들이 김종인은 연일 사설로 칭찬을 해 준다.
인터넷, SNS에서는 연일 융단폭격을 맞고 있는 김종인, 그러나 중도 부동층에게 보이는 그는 신뢰할 수 없는 문제아들만 모여 있는 민주당에 들어가 엉망진창인 체계를 바로 잡아 주고 있는 전문적이고 노련한 관료이자 능력있는 어르신이다.
거기다가 이 행보로 인해, 국민의당은 설 땅이 없어져 버렸다. 공중분해될 지경이다. 연일 보도되던 안철수의 모습이 언론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판을 그렇게 그려놓고 국민의당에게 “생각 있으면 한 명씩 돌아오든가 말든가”라고 메시지를 던지는 김종인은 정말로 잔인한 노인네이기도 하다.
이 그림이 현실화 된다면, 새누리는 좀더 오른쪽으로 밀려나고 더민주는 부동층을 포함한 중원을 차지한다. 행마도 이런 행마가 없고 포석도 이런 포석이 없다.
이 분석이 옳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더민주의 지지율은 가파르게 상승한다. 그리고 김종인은 드디어 더민주에게 107석을 약속한다. 내 분석으로는 그보다 더 나오게 될 걸로 보인다. 김종인은 그저 '최소한'을 말했을 뿐인 것이다. 80석을 우려하던 판을 이렇게 만들어 놨다. 문제는 그 숫자의 의석 위에 앉아 있을 금배지의 얼굴이 사람들이 생각하던 민주당의 전통에 걸맞는 얼굴들이 아니라는 점 뿐이다.
남은 일은 문재인의 복귀다. 문재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야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문재인은 과격한 진보 정치인이라기 보다는 합리적인 보수에 가까운 정치인이다. 얼마든지 중도 부동층에게 어필할 수 있는 대통령 후보이며, 실제로 그렇기에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나서서 더민주를 보수 정당으로 바꾸기는 어렵다. 그러나 김종인이 깔아 놓은 판 위에서라면 얼마든지 새누리당을 대치할 수 있는 대안정당의 리더로 활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게 문재인이 복귀하고 대선판에 뛰어들면 승산이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문재인이 대권을 잡을 확률은 급속도로 상승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김종인에게는 자신의 경제 민주화 공약들을 실제로 실현할 기회가 주어진다. 얼마나 열받았겠는가 생각해 보시라. 칠순 노인이 사력을 다해 만든 필생의 작품이 박근혜의 대선 사기극에 소모품으로 쓰이고 버려지는 꼴을 보았으니 말이다. 그는 문재인을 통해 이 꿈을 다시 이루려고 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기에 김종인은 총선판이 끝난다고 해도 물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스스로 자신을 비례대표 2번, 남성 후보 중에서는 맨 앞이니 1번과 다름없는 2번에 올려 두었다. 민망한 일이고 남사스러운 일이다. 많은 더민주 지지자들은 이 점에 폭발했다. 노욕이며 노추이며 말바꾸기이며 독선적인 결정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뜻은 뭘까? 자신이 남아 대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까지 당을 장악하겠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자신은 당을 움직이고 문재인은 대권을 잡아야 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경제민주화 공약이 현실화 될 수 있도록 끝까지 휘어잡고 나가겠다는 얘기이다. 박근혜에게 한 번 속고 난 김종인은 더 이상 사기 당하지 않기 위해 담보를 잡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추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바닥에 깔려 있는 의미는 분명히 있다.
변화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번 총선에서 더민주가 당장 과반을 차지하고 박근혜 정권이 몰락의 길을 가지는 않는다.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새누리는 건재하고 과반을 손쉽게 넘길 것이며, 박근혜 친위대가 의회에 생긴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변화의 바람은 이제부터 불기 시작한다. 더민주가 만약 김종인의 그림대로 중간 부동층의 지지를 흡수하기 시작하면 대한민국의 정계는 아주 크게 변화한다. 합리적 보수라는 깃발은 실질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은 유권자를 포섭할 수 있는 깃발이다. 야당으로서 사람들에게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인정을 받는 것은 대권을 향한 가장 중요한 포석이 된다.
박근혜 정권은 진짜 레임덕이 시작될 것이며 박근혜 지지자들은 고립되기 시작한다. 새누리와 더민주의 지지율이 역전되는 순간, 언제나 메이저만을 따라 다니는 권력지향형 인사들이 제일 먼저 새누리에게 등을 돌리게 되면서 격차는 더 벌어진다. 어차피 똑같은 보수당인데 새누리에서 더민주로 자리를 옮기는 것에 대한 부담도 없어진다.
의석수가 과반이어봤자,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정권의 의지는 관철되지 못한다. 거기에 여론까지 가세하면 청와대는 더욱 더 고립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누리에서 먼저 이탈자가 생긴다. 이미 총선판에서부터 쫓겨난 자들이 이탈을 시작했다. 그 중에 박근혜 정권의 초대 보건부장관 진영 같은 사람이 첫 스타트를 끊을 모양이다. 박근혜 정권의 국무회의는 사실상 회의가 아니며 받아쓰기 경진대회라는 점을 지적하며 장관직을 그만두었던 진영 말이다.
(출처: <한겨레>)
유승민의 행보도 궁금해진다. 어찌되었거나 '합리적 보수'라는 타이틀은 원래 유승민 같은 사람들의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자신의 타이틀을 빼앗아 갔다고 저작권법 위반으로 고소할 재주가 없다면 그 타이틀을 실질적으로 보유한 쪽으로 옮겨 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재오 같은 사람은 더 자연스럽게 옮겨탈 수도 있겠다.
어찌되었거나 중요한 것은 새누리의 강고한 제방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합리적 보수라는 타이틀은 그만큼 위력적이며, 더민주가 그 타이틀을 확보한다는 것은 실질적인 정계 개편의 신호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보진영에는 어떤 변화가 올까? 더민주가 좀더 우측으로 옮겨가는 것은 진보진영에게는 희소식이다.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 진보도 아니었던 더민주가 애매하게 진보로 취급되던 시기에 진짜 진보들은 동호회 놀이나 할 수밖에 없었지만, 더민주가 우측으로 옮겨가는 순간 제대로 된 진보정당의 운동장은 따따블로 넓어진다. 더민주에서 이탈한 진짜 진보주의자들이 대거 몰려올 것이라는 점도 있다. 정의당은 땡잡았다. 누가 알겠는가? 이제 변화된 운동장에서 극우로 몰려 쪼그라드는 새누리만큼의 사이즈가 진보좌파 정당들에게 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거나 이 변화의 끝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70대 중반의 노인 하나가 대한민국 정가에 불러온 변화의 물결은 이제 진짜로 시작되고 있는 걸로 보인다. 후세 사람들은 이걸 실질적인 '대규모 정계 개편'의 시작으로 규정할지도 모른다.
잘 될까?
옳고 그름, 보수와 진보
보수와 진보는 결코 '옳고 그름'으로 나뉘지 않는다. 옳고 그름으로 나뉘는 것은 신뢰와 협잡, 유능과 무능, 정직과 거짓 등이다. 보수와 진보는 선택일 뿐이다.
나는 당연히 더민주의 우측이동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나마 원내 제1야당이 진보의 깃발을 버리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 본다면 과반은 아니더라도 굉장한 의석을 보유한 더민주가 진보의 깃발을 들고 있는 것은 사기에 가까운 일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서 더민주를 지지하던 수많은 열성적인 지지자들이 문제가 된다. 그들은 더민주를 왜 지지했을까? 비록 진보정당은 아니더라도 더민주는 최소한의 '진보적 가치'를 손에 들고 서 있는 대형 정당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뛰어 들어온 김종인이라는 전두환 꼬붕(사실 이 표현은 모함에 가깝지만)이 더민주를 보수정당으로 바꾸고 있으니 억울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들이 화내는 것이 이해가 간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우리 사회의 진보는 5%다. 이건 현실이다. “정치는 현실을 반영하지만 현실을 선도할 의무도 있다”는 말을 떠올려 보더라도 더민주가 진보정당이라는 것은 비현실적인 주장이다. 실제로 더민주의 지지자들 상당수는 진보라기 보다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보수이며, 정치에 기대하는 것 역시 진보적 가치라기 보다는 신뢰할 수 있고 부패하지 않은, 그저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수준의 정치를 원할 뿐이다. 심지어 애국이나, 경제발전, 성장, 부국강병 등의 보수적 가치를 선호하는 더민주 지지자들도 많다.
자신을 스스로 더민주의 지지자라고 생각했던 분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진보적 가치를 얼마나 원하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해 보신 적 있냐고 말이다. 비록 소수지만 분명히 진보의 깃발을 든 정당들이 있는데 왜 더민주에 남아 있냐고 말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가 힘들다면 당신은 진보적 가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박근혜 정권에 대한 증오 때문에 그저 카운터 파트를 지지한 것 뿐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더민주의 보수화를 좋아해도 되고, 지지해도 된다. 당신들 주변에는 중도 부동층이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하게 될 것이다. 더민주의 진보성이 미약하긴 하지만 장기적으로 좌클릭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신다면 이 참에 아예 진보정당으로 옮기는 것이 장기적으로 맘 편한 일이 될 것이며 사회적으로도 그게 옳다고 권해 드리고 싶다.
변화는 항상 개인에게 선택을 강요하기 마련이다. 더민주의 지지자들에게는 선택을 해야 할 시점이 다가온 것이다.
만약 이 글에 담겨 있는 믿기 힘든 분석이 사실로 드러나고 더민주가 성큼성큼 우측으로 걸어가 버린다면, 차라리 나는 고마운 마음으로 떠나 보낼 생각이다. 아니 그게 맞다. 새누리와 박근혜 정권에게는 더 이상 합리성과 정직을 찾아보기 힘든 상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는 극우 수구 부패 거짓말쟁이 정당의 위치를 주는 것이 맞다. 차라리 더민주가 새로운 합리적 보수로 탄생해서 그나마 합리적인 보수 정권을 창출해 내길 기원하는 것이 속이 편하다. 그게 김종인의 뜻이며, 그렇게 탄생한 정권은 또 하나의 보수정권이 되겠지만, 최소한 박근혜보다는 훨씬 나을 것 아니겠는가?
원한다면, 또 필요하다면 내 소중한 한 표도 아낌없이 주겠다. 그리고 스스로가 진보적 스탠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은 합리적 보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한 명이라도 더 진보적인 마인드를 갖출 수 있도록 설득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비록 그 끝을 기약할 수 없는 머나먼 미래가 될 지언정, 진보정당이 정권을 잡게 되는 그 날을 기약하면서 말이다.
합리적 보수와 진보가 뒤섞여서 무능하고 부패한 극우 정권을 물리치기 위해 혼전을 벌이는 이 상황, 참으로 기괴한 광경이었다. 그보다는 깔끔하게, 보수와 진보로 갈려 논쟁을 벌이자. 그 쪽이 훨씬 더 아름답지 않겠는가?
부디 이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이번 총선판이 이런 장대한 변화의 시작이 되길 빌어마지 않는다. 김종인 어르신의 생애 마지막 작품이 현실화 되기를 기원한다는 뜻이다.
어르신, 화이팅!!
뱀발
그래도 비례 2번은 너무 하셨어요. 창피하게 그게 뭡니까. 그걸로 사람들이 뭐라 한다고 당무거부까지 하는 건 더 창피합니다. 삐지지 마시고 빨랑 돌아오세요.
끝.
물뚝심송
트위터 : @murutuk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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