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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충돌, 한반도 전쟁으로 가나?

미‧중 충돌, 한반도 전쟁으로 가나?
 
2016.04.29 15:34:58
북핵의 뿌리는 정전체제가 빚은 냉전구도

'종교·문명의 대전환과 큰적공'을 주제로 원광대학교와 원불교가 개최한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진징이(金景一) 베이징대 교수의 발제문을 전문 게재합니다.

 

진 교수는 지난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 상황의 본질을 '미국과 중국의 충돌'에서 찾습니다. 미국은 부상하는 중국의 영향력을 제어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북핵 문제를 다뤄왔으며 이는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배치 문제로까지 파생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진 교수는 북핵 문제가 북미 갈등을 넘어 중미 갈등의 한 복판에 있으며, 중미 갈등의 집약체인 북핵 문제가 해소되지 않으면, 한반도에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전쟁 같은 "화약 냄새 풍기는 사태"가 다시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강대국들의 전략 갈등이 전쟁으로 비화된 역사를 재현하고 있는 북핵 문제에 해법은 없는 걸까요. 북한에 더 많은 제재를 가하라고 중국을 압박하는 것만이 능사일까요. 진 교수는 "우선 북한의 핵 동결과 한미 합동 군사훈련 중지를 맞바꾸고, 나아가 북핵 폐기와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라고 출구를 제안합니다. 

  

긴 분량의 글이지만 중미 관계와 북핵 문제의 역사를 심도 깊게 다뤄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북한 핵실험 정국의 본바탕을 이해하는데 보탬이 될 것입니다. 원제는 '중미관계와 북핵 문제'입니다. 

  

 

▲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해 양자회담을 가진 버락 오바마(왼쪽 끝)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오른쪽 끝) 중국 국가 주석 ⓒAP=연합뉴스

 

  

들어가는 말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1차 핵실험을 강행하자 중국은 즉각 성명을 발표하여 북한이 "국제사회의 보편적 반대를 무시하고 제멋대로(悍然)핵실험을 실시했다"고 하면서 중국은 이를 단호히 반대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사용한 "悍然"이라는 단어는 지난시기 미국과 같은 적대국에나 사용하던 언어이다. 북핵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후 북한이 2차, 3차, 4차 핵실험을 했을 때 중국은 이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북한 핵실험을 규탄하고 유엔 제재에 동참하면서 북핵에 대한 중국의 기본 입장이 흔들림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의 핵실험이 도를 넘게 진행되면서 본래 북한과 미국에 의해 불거진 북핵문제가 점차 미국과 중국의 갈등으로 번졌다. 북한이 2차 핵실험을 강행하면서부터 한미일 일각에서는 북핵 문제에 대한 중국의 역할을 강조하며 중국이 북한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북핵 문제 해결의 키는 중국이 쥐고 있다고 하였다. 북한의 3차 핵실험 후 중국은 북한과의 관계를 전례 없이 냉각시키면서까지 유엔 안보리 제재결의를 이행하였지만 한미일은 여전히 중국에 북한에 대해 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요구하였다. 북한이 4차 핵실험을 강행하자 미국은 본격적으로 북핵에 대한 중국 책임론을 거론하면서 중국의 북핵 정책이 실패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양국은 책임론 공방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핵실험은 북한이 하고 타깃은 중국이 되고 있는 것이다. 왜 북핵 문제가 종당에는 중미간의 갈등으로 비화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중미관계는 북핵 문제 해결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근대사 이후의 동북아역사를 보면 한반도는 지정학적 특성상 늘 당대 주요 강대국들의 갈등과 충돌이 굴절되어 왔다. 이른바 G2로 불리는 중미갈등 역시 예외 없이 한반도 문제에서 부딪치며 역사를 재현하고 있다하겠다.  

  

본론은 중미관계의 역사와 현실에서 중미갈등의 근원을 밝히고 한반도 지정학적 특성에서 북핵 문제의 근원을 찾으면서 북핵이 중미갈등의 매개로 떠오르게 된 원인과 북핵 문제 해결의 전망을 살펴보려한다.  

  

중미관계의 역사와 현실 

  

일찍 1940년대 중일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때 중국 공산당은 중국의 항일전쟁을 돕고 있는 미국과 연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1944년 7월 미국 정부는 미군 관찰조를 중국 공산당의 근거지인 연안에 파견하였는데 중국 공산당은 이를 중국 공산당의 "외교사업의 시작"이라고 평가하였다.   

  

1944년 11월에는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가 파견한 특사 헐리가 연안을 찾아 마오쩌둥과 회담을 하였으며 쌍방은 국민당 정부를 모든 항일 당파와 무소속 정치인 대표들이 참여하는 연합정부로 개편하며 중국 공산당의 합법적 지위를 승인하는 등 "다섯개 조항 협의초안"을 체결하였다.  

  

이것은 항일전쟁 후기 중국 공산당과 미국의 협력과 연계가 가장 좋았던 표징으로 되었다.  마오쩌둥은 이에 중미 양대 민족이 "세계의 영구적인 평화와 민주중국을 건립하는 사업에서 영원히 손을 잡고 전진하자"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 "협의 초안"은 장개석의 반대로 빛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 의해 폐기되였다. 미국은 2차 대전 종전 막바지에 장개석 정부만 지지하고 다른 모든 당파는 승인하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 제7차 당대표 대회에서 마오쩌둥은 "미국정부가 장개석을 부추기며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으로 미국 반동파의 창궐함을 보여주었다"고 하면서 미국이 중국의 내전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1945년 일본이 투항한 후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이 내전으로 치닫자 미국은 최신식 무기로 국민당군을 무장시키며 장개석의 내전을 물심양면으로 전폭 지원하였다. 마오는 "모든 반동파들은 모두 종이범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장개석 정부를 지원하는 미국과 끝까지 싸울 결의를 다진다. 마오는 "중국의 반동파들을 깡그리 소멸하고 미국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중국에서 내쫓아야 중국은 독립하고 민주를 할 수 있으며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중국 공산당과 미국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국민당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마오는 새 정권을 건립하기에 앞서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진영으로의 "일변도"정책을 선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영국과 같은 나라들과의 수교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 5월과 6월에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의 미국 대사로 있은 존 레이턴 스튜어트(John Leighton Stuart)와 두 차례의 회담을 갖고 미국과의 수교 문제를 토의하였다. 중국 공산당의 선제 조건은 미국 정부가 장개석 정부와의 관계를 끊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미국은 결과적으로 국민당 정부와의 관계를 끊으려 하지 않았고 또한 중국 공산당이 건립하는 정부를 즉각 승인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결국 중국 공산당과 미국 정부의 수교 탐색전은 무위로 끝난 것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장개석이 쫓겨 간 대만이 중국과 미국관계에서 하나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미국은 즉각 제7함대로 대만해협을 봉쇄하여 중국 공산당의 대만 해방을 차단하였다. 그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만 문제는 늘 중미간의 가장 민감한 이슈로 자리잡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과 미국의 악연은 한국전쟁에서의 대결로 이어져 양국이 관계개선을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였다. 한국전쟁으로 양국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미국 국회는 일련의 반중 결의를 통과하였으며 중국에 대한 억제 정책을 도식화, 영구화, 절대화로 끊임없이 강화하였다. 미국은 공산당의 중국을 장기간 승인하지 않고 중국이 유엔의 합법적 지위를 회복하는 것을 저지하고 중국에 대한 봉쇄를 강화하면서 대만에 대한 대규모의 원조를 회복하였다. 한국전쟁 후 중국 역시 전민적인 반미 정치운동을 벌였다. 미국은 중국에 있어서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불공대천의 원수로 등장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중국은 소련 진영에 몸을 담고 미국과 적대적 관계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양국은 1955년 8월 1일부터 1970년 2월 20일까지의 15년에 무려 136차 되는 대사급회담을 진행하였다. 양국이 외교관계가 없고 상호 요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중미 대사급회담은 중국과 미국이 직접 접촉하며 상호 요해를 하고 각자의 입장을 표명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였다. 비록 대사급회담에서 중미가 격렬하게 부딪치고 논쟁하였지만 양국은 점차 상대를 요해하고 이해를 하게 되였으며 결과적으로 이 회담은 1972년 중미 양국이 관계개선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1971년 미국과 중국이 관계개선을 모색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중국과 미국이 소련이라는 강대한 전략적 적수를 두고 협력하여 함께 대결할 필요성을 느끼면서였다. 양국은 1972년 닉슨 대통령의 방중으로 관계개선을 이루지만 대만 문제에서 이견을 보이면서 수교 문제에서는 진전을 보지 못했다. 1978년 역시 소련과 미국의 관계, 소련과 중국의 관계가 가일층 악화되자 중미 관계는 다시 한 번 동력을 얻게 되여 수교에까지 간다.
   

그렇지만 1979년 1월 1일부터 수교를 한 양국은 여전히 대만 문제에서 갈등을 빚어왔다. 미국은 중국 정부의 거듭되는 반대에도 불과하고 대만과 실질적인 당국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대만에 대량의 선진 무기들을 끊임없이 판매하였다. 중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과 수년간 담판을 하였으며 결국 1982년 8월에 중미 <8.17공보>를 발표하여 양국관계를 상대적으로 안정시켰다.    

  

<8.17공보>가 발표된 1982년부터 1989년 천안문 사건에 이르기까지 중미관계는 밀월을 누렸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원만하였다고 할 수 있다. 양국 무역은 1971년 1억 달러가 채 안되던 것이 1982년에는 54억 달러, 1989년에는 187억 달러로 급증하였다. 이 시기 중국은 개혁개방에 들어섰으며 미국은 그런 중국을 물심양면으로 지지하고 지원하였다. 미국은 중국이 미국이 희망하는 궤도에서 발전하기를 바랐다. 즉 중국이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로 나아가고 정치적으로는 서방 민주제도에 접근하며 사회적으로는 끊임없이 개방을 하여 국제 사무에서 미국의 "리더 지위"에 지지를 하고 보조를 맞추기를 바랐다. 한마디로 미국은 중국이 미국의 "리더"를 받아들이는 "민주국가"로 전변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사실 중국이 현대화를 실현하는 과정에 있어서 미국 요소의 영향이란 어디에나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의 강력한 "외부의 힘"으로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미관계는 1989년 천안문 사태 후의 진통을 겪은 후 1992년 미국이 대만에 150대 전투기를 수출한 문제, 1995년 대만영도자 리덩후이 미국 방문, 1996년 대만해협 위기, 1999년 미국이 유고 주재 중국 대사관을 폭격한 문제 등으로 계속 갈등을 빚어왔다. 아들 부시는 집정하면서 중국과의 관계를 클린턴 시기의 "전략적 파트너 관계"를 "전략적 경쟁 관계"로 되돌려놓았다. 그럼에도 양국관계는 곡선으로 줄곧 오름세를 보여왔다. 양국은 지역안보, 아태지역 안정 등 여러 가지 국제안보 문제에서 광범위한 협력을 전개하였다. 경제무역 영역에서는 큰 발전을 가져와 양국 무역액이 1991년의 252억 달러로부터 2001년의 1214억 달러로 증가하였다.    

  

중미관계가 새로운 밀월관계로 들어선 것은 "9.11" 테러 사건이 일어나면서였다. 미국은 냉전 후 미국에 대한 주요 위협은 국제 테러리즘과 각종 비전통 안전 위협이라고 인식하면서 전략관을 조절하였다. 이 시기 미국은 대국들 속에서 전략적인 경쟁자와 대상자를 찾을 여유가 없었다. 미국은 미중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게 된다. 중국을 미국의 반테러 파트너로 인정하고 중국의 지지를 바랐던 것이다. 미국은 중국에 대한 전략적 자리매김을 "전략 경쟁 대상자"로부터 "전략적 파트너"로 다시 되돌려 놓았다. 중국은 범세계적 반테러 전쟁이 가져다 준 전략적 기회를 잘 포착하여 미국의 반테러 전쟁을 지지하면서 미국과 전방위적인 관계개선을 이루었다. 미국은 중국의 가장 큰 무역 파트너로 부상하였다. 이 시기는 닉슨의 방중 이후 가장 좋은 단계이자 가장 안정된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이 시기는 바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열리면서 중국이 의장국이 되어 북핵 문제에서 미국과 협력을 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중국이 개혁개방 후 가장 급속한 성장을 이룬 시기이기도 하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중국을 서방 가치관념을 받아들이고 국제적 규범을 준수하며 미국 주도의 체계에 융합되는 나라로 이끌어가려 하였다. 미국의 엘리트들은 중국이 여러 국제조직에 융합되면 미국과 함께 세계를 다스리는 책임을 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현 국제질서에 도전할 가능성도 낮아진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중국이 예상을 깨고 급부상하고 미국과의 차이가 급격히 축소되면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시각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중국과 미국의 경제 규모 차이를 보면 미국은 1980년대에는 중국의 15배 이상, 1990년대에는 10배 이상이었고 2000년에도 8배가 되던 것이 2005년에는 5.8배로 좁아졌고 2009년에는 2.9배로, 2014년에는 1.8배로 급격히 축소되었다. 바로 2005년을 전환점으로 미국은 중국과의 "접촉" 전략을 끝내고 "경제규모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지만 서방 민주와 인권기준을 계속 거절하는 중국"에 대해 배척하고 견제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키신저가 말했듯이 "미국 공화당의 많은 사람들은 모두 중국을 이미 무너진 소련처럼 생각하며 줄곧 소련을 해체했던 방법으로 중국에 대해 외교적으로 대결하고 경제적으로 배척하면서 의식형태 싸움을 하려 하는 것이다. 민주당의 많은 사람들은 마치 미국이 유일한 목표가 중국에 미국의 체제와 원칙을 복제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후 미국경제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고 중국의 전 세계적인 정치, 경제 지위가 두드러지고 미국과의 실력 차이가 급격히 좁아지면서 미국은 점차 중국을 배척하고 견제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기 시작하였다. 중국과의 관계를 상호 이익을 창출하는 관계로부터 제로섬 관계로 보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중국은 미국에 의해 서방 규범체계의 수용의 대상으로부터 점차 견제를 받는 대상으로 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이 "아태 재균형" 정책을 펼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오바마 정부가 내놓은 "아태 재균형" 정책은 아태지역 각국 간의 군사안전 요소를 두드러지게 강조하면서 중국을 포위하고 새로운 전략 충돌 태세를 조성하는 것으로 비쳐진다. 그렇게 됨으로써 냉전 후 상대적인 평화발전을 이루어왔던 아태 지역이 또다시 새로운 집단 대결로 갈 위험을 안게 된 것이다. 중국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신형 대국론"을 내놓았고 아시아를 상대로 신안보관을 내놓으면서 공동, 협력, 종합, 지속가능한 안전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실크로드" 정신으로 "일대일로"의 새로운 협력을 창도하면서 아시아 이익공동체와 운명공동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시진핑은 "태평양은 넓고 넓어 중국과 미국을 용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를 일각에서는 중국이 미국과 태평양을 절반씩 나누어 관리하자는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그것은 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시진핑의 이 말은 "일산불용양호"(一山不容二虎), 즉 한 산에 두 마리 호랑이가 공존할 수 없다는 뜻의 중국 속담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중국과 미국이 태평양에서 협력하며 공존할 수 있다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중국이 창도한 "신형 대국론" 역시 신흥대국으로서의 중국은 신흥대국이 필연적으로 수성대국에 도전하던 역사를 깨뜨리고 새로운 신흥대국과 수성대국의 관계를 창조하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중국이 바라는 "신형 대국론"이 무색할 정도로 전개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이제 중국주변의 남해, 동해, 대만해협, 황해에서 전면적인 대결로 들어간 태세이다. 동북아 나아가서 아태 지역의 주요 모순으로 떠오른 중미관계는 역시 한반도에서 북핵을 매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역사적 패턴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 지정학적 특성상 역내 주요 모순으로 떠오른 중미관계는 한반도에서의 힘겨루기로 새로운 자리매김을 도모하면서 동북아 나아가서 아태 지역의 새로운 질서 구축을 지향해 나갈 것이다.

  

동북아 지각 변동의 진원지 

  

근대사 이후 한반도의 지정학 특성은 한반도가 "고래싸움의 장"으로 되어온데 있다. 동아시아국제정치를 주름잡은 강대국들의 갈등은 예외 없이 한반도를 무대로 전개되어 왔으며 한반도에서 시작된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전쟁이 그 절정이였다. 이 전쟁들은 한반도에서 발생하였지만 모두가 대국 간의 전쟁이었다. 그것은 지정학적으로 강대국들이 한반도를 자기들의 전략에 편입시키면서 갈등과 충돌을 빚은 결과였다. 
     
19세기 말 해양 세력의 대륙 진출은 한반도를 지정학적으로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의 각축장으로 변화시켰다. 대륙 진출을 꿈꾸어 "정한론"을 내걸고 한반도를 자기전략에 편입시킨 일본, 태평양 진출을 목표로 남하 정책을 펼치며 한반도를 자기 전략에 편입시킨 러시아, 한반도에서의 전통 지위를 고수하기 위해 한반도를 자기 전략에 일찍 편입시킨 중국, 러시아의 남하를 한반도에서 저지하기 위한 영국, 한반도의 문호 개방을 통해 동북아에서의 영향을 확대하려 한 미국, 바로 이러한 대국들이 추구하는 목표와 이익, 전략관계가 한반도에서 교차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에는 중일, 중러, 러일 나아가서 영러, 미일 등의 이익관계와 갈등이 굴절되기 시작하였고 한반도는 점차 "동방의 발칸"으로 떠올랐다. 구라파에서의 러시아와 영국의 대립이 한반도에 굴절되어 일어난 "거문도(巨文岛) 사건"이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열강들의 각축 속에서 한반도는 지정학 전략으로 부득불 "제1의 적대국"과 "제1의 협력국"을 가르는 패러다임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루어진 이 패러다임은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 할 수 있다. 이 패러다임은 격변기의 근대에 "이이제이(以夷制夷)", "이화제이(以华制夷)", "인아거일(引俄拒日)" 등 지정 전략으로 구현되어 왔다. 물론 유길준(俞吉濬)의 "중립론" 같은 것도 있었지만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시대상황에서 중립의 길은 없었다. 러일전쟁 전 한국은 엄정 중립을 선언하였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결국 한반도를 무대로 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동북아시아는 승자인 일본이 패권을 추구하는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일본이 실현하고자 하는 질서는 바로 "대동아공영권"의 질서였다.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면서 동북아시아는 새로운 국제질서 구축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세계 최강자로 떠오른 미국과 소련은 모두 자기가 주도하는 질서를 추구하였다. 그것은 미소 대립을 불러왔고 동북아시아에서는 즉각 한반도에서 그 갈등이 굴절되어 한반도분할 점령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불과 3년 만에 한반도는 미소 분할 점령으로부터 남북 분단이라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세계적인 패권을 추구하는 미국과 소련에 있어서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미소 양군은 비록 철거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한반도에 남긴 것은 방대한 군사고문단, 그리고 남북의 불신과 갈등이었다.

  

분열된 한반도가 통일을 강력히 지향하는 상황에서 한반도는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의 최대 변수로 떠올랐다. 구라파에서 첨예하게 대립 양상을 맞은 미국과 소련은 구라파가 아닌 다른 변두리 지역에서 미소 전쟁이 아닌 대리인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결국 한국전쟁이라는 국제전쟁의 대결로 미소의 대결은 한 단락 매듭지었으며 그로인하여 동북아 국제질서가 최종 확립하게 된다. 그것은 또한 세계적인 동서 냉전질서를 최종 고착시켰다. 한반도의 남과 북은 동서냉전의 전초선으로 세계의 냉전질서에 편입하게 된다. 
     
상술한 두 차례의 동북아 질서 전환기에 한반도는 예외 없이 초점으로 부상하였고 그것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전쟁"이라는, 한반도를 무대로 하는 전쟁을 통해 구질서를 붕괴시키거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게 된다. 결국 한반도의 비극은 한반도가 강대국들의 전략에 편입되면서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어간데 있는 것이다. 이 강대국들은 예외 없이 당대 주요 강대국들이였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작금의 주요 강대국인 중미가 북핵 문제에서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을 "역사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북핵 문제의 발단과 미국 요소 
    
 
세계적인 동서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소 세력 균형이 무너지고 나라간의 실력 대비에도 변화가 생기면서 동북아시아는 또 한 차례의 새로운 질서 구축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지만 세계적인 냉전의 종식은 한반도 냉전 구도를 함께 거두어가지는 못했다. 반면 한반도 냉전 구도는 균형이 깨뜨러지면서 그 축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1960-1970년대 한반도 분단 구도에서 우위를 차지했던 북한은 열세에 처하기 시작하였다. 남북한 간의 균형을 되찾으려는 북한 앞에는 세 가지 선택이 가로놓였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앞세우고 일본과 서방나라들과의 관계 개선을 이루어 국제사회에 진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보다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여 힘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다. 물론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 가장 강력한 수단일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개혁개방을 통한 국력의 신장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이 선택한 전략은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병진이라고 할 수 있다.  
    
냉전의 종식에 앞서 북한은 이미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염두에 두어 "대치 상태에 있는 북미관계와 남북관계를 개선하며 미국과의 화해 공존"을 제기하였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북한은 미국과 일본, 한국과의 관계개선에 발 빠른 행보를 보여 왔다. 북미 고위급회의, 북일 국교 정상화 담판, 남북의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 등이 잇달았고 남과 북의 유엔동시가입이 이루어졌다. 
    
북한의 전략은 북한 대 미일한의 냉전구도를 탈피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한반도의 냉전구도를 깨뜨리는 것이었다. 
    
중국이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북한에 통보할 때도 김일성 주석은 한반도가 미묘한 시기에 처해 있기에 중국이 중한관계와 북미관계를 조화하여 고려해 줄 것을 희망하였다. 한마디로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북한의 이러한 지정 전략과 생존 전략은 미국의 대동북아 지정 전략과 상충되는 것이었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세계 유일의 초대강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국제 권력 체계에서의 유일한 초대국의 실력과 지위로 미국 주도 하의 헤게모니 체계를 가일층 강화하여 이른바 미국 주도하의 평화를 실현하려 하였다." 다시 말하면 "미국의 구상에 의한 세계질서의 개편"  을 지향하면서 "세계를 지배하는 리더"로 자처하였던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총체적인 구상은 동북아에서 미일동맹을 축으로 하고 한미동맹을 강화하면서 미국에 지위에 도전하는 나라를 견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미국이 불확실한 변수에 대해 확실하고 명확한 구상을 세웠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미국이 한반도 냉전구도를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냉전구도를 유지하려 하고 북한은 냉전구도를 탈피하려 하였다. 결국 미국과 북한의 지정 전략은 충돌을 불러오게 되었다. 그 충돌의 매개 역할을 한 것이 북핵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북핵 문제로 북한을 압박하는가 하면 북한과 관계개선을 도모하려는 일본과 한국에 대해서도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압력은 대일 교섭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991년부터 시작된 북일 수교 본회담에서 일본은 미국의 제의에 의해 수교 교섭 초기에는 전제로 제기하지 않았던 핵문제를 국교 수립의 실질적 전제로 제시하였으며 이 면에서 미국과 공동보조를 취하였다. 바로 이 핵사찰 문제가 결국에는 북일 8차 회담이 중단된 원인으로 된 것이다. 이 역시 북한이 대외 전략을 미국과의 단독 협상으로 바꾸게 된 하나의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핵 위기 역시 제1차 핵 위기와 비슷한 상황에서 발생하였다. 북한과 한국, 북한과 일본이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실현할 무렵에 불거진 것이다. 미국은 한 면으로는 김대중 정권에 TMD 구상으로 압력을 가했으며 다른 한 면으로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였다. 일본이 북한과 정상회담을 한 후 케리가 평양으로 가면서 제2차 핵 위기가 터졌다. 한국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말을 빈다면 "미국은 남북관계가 호전될 때마다 북핵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즉 "핵문제와 관련해서 북한을 묶어" 두는 것이다.   

  

북한은 북한대로 핵을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이루는 카드로, 즉 냉전구도를 탈피하는 카드로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에 있어서 핵은 기울어진 균형의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미국과 마주 앉는 카드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북핵 카드란 결국 북핵+지정학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바로 그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북핵 문제는 눈덩이처럼 커져가면서 주변국의 안보에 심각한 우려를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힘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국에는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그러한 무엇이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북핵 문제는 또다시 동북아 역사를 재현하면서 냉전 종식 후 동북아 여러 나라들의 모순과 갈등을 집약적으로  반영해 나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북핵을 둘러싼 중미관계 

  

위에서 서술했다시피 중국의 개혁개방 초기 미국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물심양면으로 지지하여 왔다. 이 시기는 바로 제1차 북핵 위기와 겹치는 시기이기도 하다. 클린턴 정부 시기 중국과 미국은 "건설적 전략 파트너 관계"를 맺었으며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목표로 이루어진 "4자회담"에 함께 참여하면서 한반도 문제를 둘러싼 협력과 대결을 시작하였다 할 수 있다.

  

북미 갈등으로 시작된 제1차 북핵 위기 시 미국은 북핵 문제에서 중국의 힘을 빌리려하면서도 중국의 영향력을 제한하려 하였고 중국은 북한 문제에 한해서 전통적 관계를 유지하는 독자적 정책을 펼쳐왔다. 미국은 중국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KEDO, 세계식량기구의 대북 원조, 북한 미사일 문제 등에서 중국이 미국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중국의 "독자적 행위"가 미국의 정책에 도전이 된다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중국과 미국은 1996년의 대만해협 위기, 1999년 유고 주재 중국 대사관 폭격 사건을 겪으면서 심각한 갈등을 빚던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미국은 인권 문제, 파룬궁 문제, 티베트 문제로 급부상하는 중국을 "악마화"하면서 "중국 위협론"을 잔뜩 부각시켰다. 9.11 사건이 나던 해에는 중미 군용기 충돌 사건까지 터졌다. 미국은 유아독존(唯我独尊)식 일방주의로 중국을 몰아붙였다. 중미간의 이러한 갈등은 "4자회담"에 굴절되어 중미 간의 협력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중국의 역할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아들 부시 정권이 들어서면서 미중관계를 "파트너 관계"로부터 "경쟁자" 관계로 돌려세우면서, 또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함으로써 중미관계, 북미관계는 또다시 냉각기에 들어섰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상황을 돌려세운 것이 바로 미국에서 발생한 "9.11" 테러 사건이었다. 9.11 사건 후 미국의 세계전략 목표는 선차적으로 잠재적인 경쟁대상을 견제하는 것으로부터 세계 범위에서 테러의 위협을 근절하는 데로 옮겼다. 미국은 다른 대국들과의 합작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하였다시피 중미관계는 새로운 밀월관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결실 중 하나가 바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중국 주도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한반도 문제의 전개는 이제 역내 주요 모순으로 떠오른 중미관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다른 한 면으로 볼 때 6자 회담은 미국이 역내 질서를 일방적으로 주도할 수 없을 만큼 이 지역의 역학 관계가 크게 변화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중국의 부상에 따른 변화인 것이다.  

  

사실상 6자회담이 개최되면서부터 2008년까지는 중국의 급속한 부상이 역내 역학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던 시기이자 오바마 정부가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한 것이다. 6자회담이 이를 계기로 2008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을 닫았다는 것에는 음미할 바가 있는 것이다.  

  

위에서 서술하였듯이 근대사 이후 동북아의 역사를 보면 한반도는 지정학적 특성상 늘 역사전환기의 소용돌이에 있으면서 동북아 질서 전환의 장의 역할을 하여왔으며 한반도 문제는 바로 그 전환을 위한 힘겨루기의 매개 역할을 하여왔다. 

  

냉전이 종식된 후 불거진 북핵 문제 역시 이러한 힘겨루기의 매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동북아 주요 모순으로 떠오른 중미관계 역시 북핵을 둘러싸고 줄다리기를 하게 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줄다리기는 중국의 부상과 함께 중미 역학 관계가 변화를 보이면서 본격적인 태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제1차 북핵 위기 시 북핵이 중미 갈등의 매개로 떠오르지 못한 것은 바로 중미의 역학관계가 큰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고 미국이 중국에 대해 "억제"보다 "접촉"에 초점을 둔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북핵의 프로세스는 중국의 부상, 중미 갈등의 심화와 같은 맥락으로 흐름을 보여 오면서 북핵과 중미관계를 보다 긴밀히 얽어매기 시작하였다할 수 있다. 위에서 밝혔듯이 중미관계가 미국의 "9.11" 사건으로 새로운 밀월관계에 들어가면서 6자회담이라는 동북아 초유의 장이 이루어졌다. 중국은 6자회담 의장국을 맡았고 미국은 중국에 역내 질서 구축의 주도권을 맡기는 듯 했다. 6자회담은 열린 지 불과 2년 만에 "9.19 공동선언"을 도출해 새로운 동북아의 밑그림을 그렸다. "밀월"의 중미관계가 동북아에 훈풍을 몰고 오는 듯 했다. 그렇지만 국제적인 반테러 전쟁이 막을 내리는 시점이 중국의 급속한 부상과 겹치면서 미국은 중국을 포위, 견제하는 "아시아 회귀" 전략을 펼치고 북핵 문제에서는 이른바 "인내 정책"을 실시하면서 자기는 뒤로 빠지고 중국을 앞에 떠미는 태세를 보여왔다. 바로 이 시점부터 6자회담이 문을 닫게 된 데는 물론 여러 가지 요소의 원인이 있지만 중미관계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근대사 이후 동북아 주요 강대국들의 전략적 갈등이 한반도 문제에서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한반도에서의 충돌과 전쟁을 불러왔다면 중국과 미국의 전략적 갈등 역시 북핵 문제에서 집약적으로 표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북핵은 결과적으로 미국의 아태 전략에서 지탱점으로 되는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을 극대화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아태 회귀전략"을 펼칠 수 있는 데는 북핵에 힘입은 바가 없지 않은 것이다. 사실 위에서 서술했다시피 북핵 해결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미국이다. 미국은 북한이 요구하는 "북미관계 개선", "평화협정 체결", "안보우려 해소"를 모두 줄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다. 미국은 이 문제들을 전략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미국이 북한의 세 가지 요구를 충족시킬 경우 동아시아에는 미국이 한미동맹, 주한미군, 미일동맹, 주일미군 등 문제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적대국"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미국 시각에서는 북한의 "붕괴"와 미국과의 "관계개선"은 모두 북한이라는 "적대국"이 사라진다는 의미에서 같은 개념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북핵 문제의 핵심은 미국이 북핵 문제를 자기전략에 편입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중미관계가 북핵에 미치는 결정적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연장선에서 6자회담을 살펴보면 우리는 6자회담이 이룬 "9.19 공동성명"에서 내놓은 한반도 영구 평화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동북아 신질서의 밑그림이 현실로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의 과정이 필요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겪어왔듯이 중국과 미국의 갈등은 봉합 단계가 아니라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3차, 4차 핵실험 후의 중미 관계가 그것을 증명해준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북한의 3차, 4차 핵실험은 중미, 중한 관계에 계속 파장을 몰고 왔으며 중국은 계속 주요한 타깃이 되어왔다. 북한의 3차 핵실험 후 비록 중국이 유엔 안보리의 제재를 찬성하고 엄격하게 이행하면서 북한과의 관계에서 냉전이 종식된 후의 가장 엄중한 냉각기를 겪었지만 한미일은 여전히 중국에 압력을 가해 중국이 북한에 대해 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바랐다. 그 영향력이란 다름 아닌 북한에 대해 보다 더 강한 제재를 하고 압력을 가하는 것인 것이다. 또한 북핵 해결의 키는 중국이 쥐고 있다고 하면서 계속 중국을 앞으로 떠미는 형국이 되었다.  

  

북한이 4차 핵실험을 강행한 이튿날 미 국무장관 캐리는 중국외교부장 왕이와의 전화 통화에서 "중국의 대북정책은 실패를 했으며 지금은 북한에 대해 더는 과거의 방식으로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중국 외교부는 "한반도 핵문제의 유래와 매듭은 중국에 있지 않으며 문제 해결의 관건도 중국에 있지 않다"고 하였다. 중미양국은 3차 핵실험 때보다 더 격렬한 갈등을 겪고 있다. 중국은 북핵 문제의 근원은 북한과 미국에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명백히 밝히면서 미국의 책임론으로 반론을 펼쳤다. 중국 언론은 오바마 임기 7년 동안 미국이 북핵문제 해결에서 손을 놓고 있었다고 하면서 미국의 이른바 "전략적 인내" 정책은 북핵 문제를 이용하여 미일동맹과 한미동맹 이 두 전략적 지주를 강화하여 상호 지지하는 삼각체계를 이루어 중국의 부상을 억제하는 전략적 지탱점을 이루려는데 있다고 비난하였다. 중미간의 책임론공방은 한미가 사드 배치라는 카드를 꺼내면서 사드 정국으로 이어졌다. 북한의 4차 핵실험 후 박근혜 대통령이 사드 배치를 공론화하면서 중국은 즉각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중국의 시각에서 볼 때 사드는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전략 일환으로서 사드 문제는 결국 중미문제인 것이다. 중국은 한국이 사드를 한반도에 배치함으로써 미중 갈등을 한반도에 끌어들이는 것으로 보게 된 것이다. 결국 중국과 미국은 협력은 한반도 밖에서 이루고 있지만 갈등과 충돌은 한반도를 매개로 이루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4차 핵실험 후 중국은 미국과 한 달이 넘는 협상과 조절을 거쳐 미국이 내놓은 유엔 안보리 제재안을 조절하였다. 중국은 역사상 가장 강력하다는 대북 제재안에 찬성하면서 제재안을 참답게 이행할 것임을 거듭 밝혀왔다. 표면상 이것은 중미가 북핵 문제에서 협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유엔 제재안에 찬성을 표하면서 다른 한 카드를 내놓았다. 바로 한반도 비핵화와 정전협정 체제의 평화협정 체제로의 전환을 병진하여 추진하자는 내용이다. 중국의 외교부장 왕이는 작금의 세계에서 어떠한 이슈도 압박과 제재를 가하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을 볼 수 없으며 군사적 수단은 더욱 엄중한 후과를 초래하므로 더더욱 취할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 중국이 내놓은 평화협정 체결 주장은 북핵 문제의 근원이 바로 정전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냉전구도에 있다는 인식에 기인한 것이다. 중국의 주장은 표본겸치(标本兼治), 즉 표면적인 것과 근원적인 것을 함께 치유하자는 것이다. 중국의 시각에서 볼 때 북핵 문제를 포함한 한반도 문제의 뿌리는 바로 한반도가 정전체제 하의 냉전구도를 유지하는데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체제와 구도가 있기에 강대국들의 이익관계, 갈등관계, 협력관계, 전략관계가 한반도에 집약되어 상호 작용하고 상호 영향을 주면서 갈등과 충돌을 파생하고 있는 것이다. 

  

핵 포기와 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북한은 지난 6자회담에서 "선 평화체제 후 핵 포기"를 주장하여 왔고 미국은 "선 핵 포기 후 평화체제"를 주장하여 왔다. 중국은 이 선후 관계를 동시적 병진 관계로 추진하자는 것이다. 북핵 문제를 전쟁도 아니고 북한 붕괴도 아닌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하자면 이 표본겸치의 목표를 참답게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나오는 말 
     
위에서 서술했듯이 중미 관계는 사실상 지난 세기 40년대 중반에 시작된 약연으로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주로 갈등과 충돌에 전쟁까지 치렀다. 1970년대 초반 관계 개선을 이룬 후 양국은 대결 일변도로부터 대결과 협력이 교차된 관계를 이루었으며 개중에는 밀월관계도 누렸다. 그렇지만 중국의 급부상과 역내 역학관계의 변화는 중미 관계를 또다시 대결 위에 세워놓고 있다. 미국은 양국 관계를 수성대국에 대한 신흥대국의 도전으로 받아들여 "아태 재균형" 전략으로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려하고 있다. 중미 간의 이 갈등은 예외 없이 한반도에 굴절되어 북핵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비쳐지고 있다. 오늘도 한반도는 예외 없이 동북아 전환기마다 강대국들의 전략 갈등이 집약되는 역사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북한의 생존 전략이 충돌하여 빚어진 북미의 북핵 게임은 이제 눈덩이처럼 부풀러 동북아의 안보를 위협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북핵은 미국의 아태 전략에 힘을 실어주고 일본의 군사대국화에 빌미를 제공하여 오면서 한미일 동맹 관계를 전례없이 강화하여 중국에 직간접적인 큰 압력으로 다가왔다. 북핵 문제를 둘러싼 북미 갈등은 이제 중미 갈등으로 비화되고 있으며 한미와 중국의 갈등을 빚어오는 사드 정국까지 불러오고 있다. 결국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역내에는 냉전시기로 회귀하는 듯한 합종연횡이 이루어지고 있다. 동방의 발칸으로 불리는 한반도에 다시 또 화약내가 풍기는 사태는 누구도 바라지 않는 것이지만 엥겔스의 "합력론(合力论)"대로 힘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국에는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그러한 무엇이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작금의 중미 관계는 헨리 키신저의 말을 빈다면 "불확실한" 관계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대립이냐 아니면 협력이냐 아니면 대립과 협력의 병존이냐에서 불확실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자리매김이 확실하게 이루어지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의 모색이 이어질 것이다. 그것은 중미 관계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는 북핵 문제 해결 역시 상당한 시일이 걸릴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중국이 내놓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 역시 상당한 기간의 진통을 겪으며 추진해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중국이 제기한 목표는 두개의 단계로 추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첫 단계로는 북핵 동결과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빅딜 하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로 북핵 폐기와 평화협정을 맞바꿈 하는 것이다.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의 정국은 전쟁이나 동란, 핵 도미노 현상으로 동북아시아를 혼돈으로 몰아넣을 가능성도 없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이 현재 무엇보다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생이나 혼란 발생을 막자고 하는 현실 이유일 것이다. 이제 중국과 미국은 한반도 문제로 갈등을 빚는 예의 태세에서 벗어나 한반도 문제에서부터 협력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나가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미가 협력하여 작금의 긴장 국면을 통제 가능하게 관리하는 것일 것이다. 그 기초위에 북핵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위한 협력을 도모하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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