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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이정씨 8남매 ‘민주화운동 40년’

[커버스토리 - 6·10항쟁 30주년]민청학련 오빠, 5·18운동 동생들과 독재 맞서…촛불도 함께 들었죠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ㆍ이정씨 8남매 ‘민주화운동 40년’

지난 5일 이강, 이정, 이황씨(왼쪽부터) 남매가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에 섰다. 1972년 박정희 정권 시절 유신 비판 유인물 ‘함성’을 자취방에서 함께 만든 남매는 지난겨울 촛불집회까지 40여년을 민주화운동 현장에 있어왔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지난 5일 이강, 이정, 이황씨(왼쪽부터) 남매가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에 섰다. 1972년 박정희 정권 시절 유신 비판 유인물 ‘함성’을 자취방에서 함께 만든 남매는 지난겨울 촛불집회까지 40여년을 민주화운동 현장에 있어왔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1973년 3월 서울역 플랫폼에 내린 이정씨(69·당시 24세)를 기다리던 건 마중 나온 고향 친구뿐만이 아니었다. 기차에서 내린 이정씨는 서울대에 다니고 있던 6촌오빠를 봤다.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오빠”라고 외쳤다. 옆에 있던 건장한 사내들이 그녀와 친구를 순식간에 붙들었다.

둘째를 출산한 언니의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 난생처음 상경한 그녀는 어딘지도 모르는 서울의 한 경찰서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당시 전남대 법학과에 다니던 오빠 이강씨(71·당시 26세)의 친구라는 사람도 붙잡혀 왔다. 그제서야 이정씨는 지난겨울 이강씨, 동생 이황씨(63·당시 18세), 오빠 친구였던 김남주씨(1946~1994)가 함께했던 일이 떠올랐다. 형사들이 얼굴을 모르는 이정씨를 잡기 위해 친척 오빠를 서울역까지 데리고 나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나중에 알려졌다.

■ 자취방서 만든 첫 유신 비판지 ‘함성’ 

이정씨는 6남2녀 중 셋째였다. 전남 해남군 마산면의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와 큰살림을 꾸리면서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던 어머니는 남매들을 광주로 유학 보냈다. 이정씨는 광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과 고등학교, 중학교에 다니던 오빠와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도맡았다.

 
1980년 2월3일 서울형사지법 대법정에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구속된 이재문씨(일어선 사람)와 김남주씨(이씨 뒷줄 왼쪽) 등 피고인 73명에 대한 공판이 진행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 2월3일 서울형사지법 대법정에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구속된 이재문씨(일어선 사람)와 김남주씨(이씨 뒷줄 왼쪽) 등 피고인 73명에 대한 공판이 진행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전남대 법대에 다니다 1972년 군에서 전역한 이강씨는 10월17일 ‘유신’이 선포되자 고향 친구 김남주씨와 함께 광주 동구 산수동 작은 자취방에 자주 모였다. 밤새 담배를 태우며 이야기를 이어가던 어느 날 이강씨는 등사기를 들여왔다. 방문과 창문을 담요로 막고 12월부터는 ‘함성’이라는 제목의 8절지 크기의 인쇄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이황씨도 형들과 함께 등사기를 밀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유인물 500장에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글들이 가득했다. 이정씨는 밥을 해주고 심부름을 했다. 이강씨와 김남주씨는 ‘함성’을 대학의 휴교령이 풀린 그해 12월10일에 맞춰 전남대를 비롯해 광주고, 광주여고, 전남여고, 광주공고 등에 뿌렸다. 

이정씨(오른쪽에서 두번째)가 5·18여성회 회원들과 함께 지난겨울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가해 사진을 찍고 있다. 이정씨 제공

이정씨(오른쪽에서 두번째)가 5·18여성회 회원들과 함께 지난겨울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가해 사진을 찍고 있다. 이정씨 제공

이정씨가 서울역에서 붙잡히던 날 오전. 광주에서는 학교에 가던 이강씨와 입시학원에서 수업을 듣던 이황씨가 경찰에 체포됐다. 형에 이어 전남도경 대공공작분실 지하 취조실로 끌려간 이황씨는 고문과 폭력으로 만신창이가 된 형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황씨는 “한참 취조를 받는데 옆 사람 목소리를 들어보니 형이었다. 아침에 멀쩡했던 사람이 반나절도 안돼 그렇게 변해 있었다”고 기억했다.

3남매는 그해 봄 나란히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 혐의로 같은 법정에 섰다. 이정씨는 불구속이었지만 오빠와 당시 18세로 미성년자였던 동생은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정씨는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몇 달 만에야 포승줄에 묶인 오빠와 동생을 볼 수 있었다. 수십 번 울었다”고 말했다.

광주지역 인권변호사였던 홍남순 변호사가 변호인으로 나섰다. 함석헌 선생은 서울에서 내려와 재판을 두 번이나 방청했다. 유신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한 ‘함성’에 대한 재판은 오히려 박정희 독재를 부각시키는 사건이 되면서 방청석이 가득 찼다. 이강씨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이황씨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 이정씨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 공수부대에 맞선 남매 

8남매는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박정희 시절 유신반대 운동에서 시작된 남매들의 민주화운동은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1989년 조선대생 의문사 진상규명 운동, 2016년 촛불집회까지 40년 넘게 이어졌다. 지금도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와 5·18여성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강씨는 반유신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또다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가 이듬해 가석방됐다. 1979년에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때 이정씨는 5월27일 새벽 전남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았다. 항쟁 기간 광주기독병원에서 헌혈을 하는 시민들의 접수 등을 돕던 그는 도청의 시민군들을 위해 주먹밥을 만들었다. 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은 여성 13명 중 이정씨가 가장 나이가 많았다.

공수부대 진입 직전인 오전 3시쯤 시민군 상황실의 설득으로 이정씨는 다른 여성들을 이끌고 도청을 빠져나와 인근 동명교회에 숨었다. 

그가 피신하던 날 밤 당시 전남대 1학년이었던 동생 이연씨(57)도 시민군으로 금남로 YMCA 건물에서 새벽을 맞고 있었다. 항쟁 기간 ‘투사회보’ 등이 발행된 YMCA는 도청과 함께 공수부대의 진압작전 목표였다. 날이 밝자 이정씨는 동생을 찾기 위해 YMCA와 도청에 고꾸라진 시신들을 헤집었다.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며칠 뒤 이연씨가 계엄군에 붙잡혀 상무대 영창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심한 폭력을 일삼은 교사의 처벌을 요구하는 성명을 내고 학교를 자퇴한 뒤 이연씨는 검정고시로 친구들보다 1년 늦게 대학에 진학했었다. 8남매 중 4번째 투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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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2월 풀려날 때까지 이연씨는 요시찰 인물들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갖은 폭력에 시달렸다. 이정씨는 2013년 영화 <변호인>에서 고문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대학생 진우를 보면서 동생 연이가 생각나 내내 울었다. 그리고 도청 탈출을 도와줬던 대학생이 생각났다.

그는 “함께 숨어 있자”는 이정씨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도청으로 돌아가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이정씨는 “그래도 우리 동생은 살았지만 그날 도청에서는 동생 또래의 청년들이 많이 죽었다”면서 “당시 피신했던 여성 13명 중에는 ‘도청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여고생도 있었다. 그들을 꼭 다시 만나고 싶다”고 했다. 

■ 피할 수 없는 운명, 6월항쟁 

5·18 이후 집안에 짧은 평온이 찾아왔다. 만기 출소한 이강씨는 농민운동을 시작했고, 늦깎이 대학생이 된 이황씨는 ‘광주환경공해연구회’를 만드는 등 지역 환경운동을 이끌었다. 광주 진흥고에 다니던 막내 이윤씨(52)는 공부를 잘했다. 형들은 “막내만은 제대로 키워보자”며 서울대 의대에 진학할 것을 권했고 뜻대로 됐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987년 6월항쟁으로 평온은 끝났다. 경찰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 이한열 열사는 막내동생 이윤씨의 고교 친구였다.

이강씨는 ‘민주쟁취국민운동 광주전남본부’ 사무처장을 맡으며 광주와 전남 지역 6월항쟁을 이끌었다. 이한열 열사 사건 이후 가족들의 기대와 달리 서울대 의대에 진학한 이윤씨는 빈번하게 시위 현장에 나섰다. 13대 대선이 치러진 1987년 12월16일. 광주에 있던 가족들은 이윤씨를 텔레비전 뉴스에서 봤다. 이날 오전 서울 구로을에서는 선관위 관계자가 투표함을 개표소로 옮기는 도중 투표함 안에 부정 투표용지가 들어 있다고 확신한 시민들이 몰려드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시민들은 “투표가 끝나기도 전에 투표함을 왜 개표소로 보내느냐. 부정 투표의 증거물인 투표함을 지키겠다”며 구로을 선관위가 있는 구로구청을 점거하고 40여시간 동안 농성을 벌였다. 선거함을 깔고 앉은 사람들을 보여주는 텔레비전 뉴스 화면에 이윤씨가 있었다. 경찰이 투입됐고, 이 사건으로 1000여명이 연행돼 이 중 200여명이 구속됐다. 이윤씨는 28일 동안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진 뒤 겨우 풀려났다. 

큰형 이강씨도 다시 한번 수배를 당했다. 1989년 5월 조선대 학생이었던 이철규 열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이강씨는 ‘진상규명투쟁위원회’ 상황실장으로 나섰다. 수배가 내려진 그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강, 이정, 이황씨는 지난 5일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에 섰다. 지난겨울 광주에 사는 3남매는 이곳에서 시민들과 함께 촛불을 밝혔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장면을 지켜봤다. 이정씨는 “시민들의 힘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다시 시작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오빠와 동생들이 하는 일이 옳다고 믿었고 한번도 후회한 적 없다. 촛불집회가 보여준 것처럼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뤄내는 것”이라는 이정씨는 “새로운 시대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 햇빛이 비치는 그런 세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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