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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팔뚝 천만 개 자르고, 개선문 세우다

 
[유라시아 견문] 브뤼셀 : 다문화사회와 다문명세계
2017.07.08 12:26:12
 
 

 

 

 

1. 암흑의 핵심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다. 선입견이 무섭다. 편견이 무겁다. 색다름을 새로움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고정관념이 고약한 장애물이 된다. 낯선 것을 익숙한 틀로써 변형하여 재단하기 일쑤이다. 20대의 세계관으로 반세기 여생을 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글줄이나 읽었다는 이들일수록 그러하기 십상이다. 단단하기보다는 딱딱하다. 그렇게 아재가 되고 꼰대가 되어간다. 살아가기에는 편할 것이다. 그 편리함을 신념이나 신조로 근사하게 포장할 수도 있다.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최대한 선입견을 버리려고 애쓴다. 머리를 말랑말랑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천진한 눈으로 천일 견문을 이어가려고 했다. 그 훈련이 통 안 통하는 곳이 브뤼셀이었다. 


아는 게 병이다. 나는 네가 지난 세기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아는 만큼 여행의 경로도 달라졌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데르뷰덴이다. 중심가에서 동남쪽으로 뻑은 소와인 숲에 자리한다. 구태여 시내에서 15km 정도 떨어진 곳부터 찾은 것이다. 몽고메리 역에서 44번 트램을 타면 된다. 목적지가 종점인고로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었다. 느긋하게 창 밖을 감상할 수 있었다. 광대한 녹지 사이로 여러 나라 깃발이 보인다. 각국 대사관이 밀집한 외교가와 고급스런 주택지도 스쳐간다. 과연 유럽의 수도다운 풍경이다. 트램역에 내려서도 곧장 공원이 펼쳐진다. 아름드리 수목들에 곳곳에 조형된 연못들도 어여쁘다. 일요일 점심, 가족끼리, 친구끼리, 연인끼리 오순도순하다. 저 멀리 눈에 드는 코끼리 동상마저 살아 걸어 다닐 것 마냥 생기가 돌고 활기가 넘친다. 마침내 왕립 중앙아프리카 박물관에 당도한 것이다. 

 

▲ 왕립 중앙아프리카 박물관. ⓒ이병한

 

 

5년 전이다. 박사 논문을 쓰면서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를 추적했다. 베이징과 자카르타와 델리와 콜롬보와 카이로와 모스크바에서 발간된 자료들을 모으고 읽어갔다. 1960년대, 중소논쟁의 한복판.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작가들도 친소파와 친중파로 나뉘어 다투었다. 유'이'(二)하게 이구동성을 이룬 주제가 있었으니, 첫째가 미국과 베트남전쟁이요, 둘째가 벨기에와 콩고 내란이었다. 베트남에서의 미국만큼이나 콩고에서의 벨기에 또한 악명이 높았던 것이다. 그 상징으로서 자주 거론되던 장소가 바로 이 박물관이었다. 사료로써 문자로서만 접했던 장소를 드디어 두 눈에 담게 된 것이다.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


레오폴 2세와 직결된다. 1865년부터 1905년까지 재위했다. 그가 콩고에서 수집한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박물관이다. 건축가 샤를 지로(Charles Girault)에 명하여 루이 16세 양식의 궁전처럼 지었다. 1897년 브뤼셀에서 열린 콩고 박람회의 성과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였다. 내부로 들어서니 높은 돔 천장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내린다. 그 아래 야생동물 표본을 비롯하여 고무, 커피, 코코아 등 식물 자료도 풍부하다. 코발트, 망간, 우라늄, 아연, 다이아몬드 등 광물자원 샘플도 다채롭다. 민속 공예품과 토속 악기, 전통 의상 등도 전시되어 있다. 연중 다양한 특별전과 특강이 열린다고 한다. 벨기에는 물론 유럽에서, 아니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아프리카 연구소가 되었다. 나는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벨기에는 소국일뿐더러 신생국가이다. 겨우 19세기에 등장한 새파란 나라이다. 이 작은 나라의 일개 국왕이 본국의 80배에 달하는 콩고를 '사유지'로 확보했다. 유럽의 후발국가로서 아시아에서의 식민지 획득은 힘들었다고 한다. 최후까지 남은 미답지가 아프리카의 콩고 강 일대였다. 1876년 아프리카 협회를 설립하고, 1882년에는 (동인도회사를 모방한) 콩고회사를 출범시킨다. 그러나 이미 회사 운영을 대신하여 식민지 통치로 전환되던 제국주의 시절이다. 콩고회사 또한 곧장 식민지 기구로 변질된다. 콩고의 위치가 절묘하다. 아프리카의 한복판에 자리한다. 서쪽에서는 프랑스가, 동쪽에서는 영국이 강세였다. 중간 중간 독일과 이탈리아, 포르투갈의 식민지들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 어느 한 나라가 콩고를 차지하면 아프리카에서의 세력균형이 무너질 수 있었다. 그럴 바에야 소국의 왕에게 이 땅을 맡기는 편이 낫다는 담합에 이른다. 레오폴 2세의 사유지에 합의함으로써 완충지대를 설정한 것이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1885년 '콩고 자유국'이다. 


자유국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유럽의 식민통치 가운데서도 가장 잔혹한 장소였다. 혹은 개인 재산이었으므로 더더욱 자유롭게 착취가 자행되었다. 자동차 발명으로 타이어 수요가 폭발하던 무렵이다. 천연 고무 가격이 급상승한다. 국왕의 사고 속으로 막대한 돈이 쏟아져 들어왔다. 졸부는 좀체 어질기가 힘들다. 벼락부자의 채찍질이 더욱 거칠어졌다. 중노동에 항의하는 이들은 오른쪽 팔을 베어버렸다. 그 형벌로 희생된 숫자가 '천만'을 헤아렸다.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 표기가 잘못된 것인가 동그라미를 그리고 물음표를 달았다. 그런데 카이로에서 나온 문서에서도, 타슈켄트에서 작성된 문헌에서도 '천만'이라는 숫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17세기의 균형이 붕괴되어버린 19세기의 초상이었다. 몸통에서 떨어져 나와 뒹굴거리는 천만의 까만 팔뚝이 벨기에의 선입견으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100년이 더 지난 오늘날의 벨기에 인구가 천만이다. 착잡하기보다는 참담하다. 그 '문명화 사업'의 본질을 일찍이 꿰뚫어본 예외적인 사람도 있었다.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이 바로 벨기에의 콩고 수탈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다. 이 작품을 모티브로 삼아 베트남으로 무대를 옮겨 제작된 영화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이다.  

 

 

▲ 생캉토네르 개선문. ⓒ이병한

 

 

샤를 지로는 세기의 건축가였던 모양이다. 브뤼셀이 자랑하는 생캉토네르(Cinquantenaire) 개선문 또한 그의 작품이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거대함에 압도된다. 파리의 개선문보다 더 크지 싶다. 벨기에 건국 50주년을 기념하여 1880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건설된 것이다. 그런데 규모가 너무 커서 최종 완성된 것은 1904년이라고 한다. 양 날개로는 왕립미술역사박물관과 왕립군사박물관이 들어섰다. 천만의 팔뚝을 잘라내며 축적한 거대한 부가 이곳 브뤼셀에서 찬란한 건축물로 승화한 셈이다. 식민지 경영은 너무나도 달콤했던 모양이다. 1960년 콩고가 독립한 이후에도 그 중독된 맛을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광산 지역만 분리 독립시키는 교묘한 방안을 획책했다.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여 지방 세력의 무장투쟁을 독려했다. 피비린내 진동하는 콩고 내란이 시작된 것이다. 베트남전쟁과는 달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1960~70년대 인도차이나의 밀림에 못지않은 지옥의 묵시록이 펼쳐졌던 장소가 아프리카의 콩고이다.  


생캉토네르 광장에도 사람들이 가득했다. 따뜻한 봄 햇살에 싱그러운 녹음. 음침한 제국주의 시대와 콩고 내란의 그림자는 말끔하게 소거되었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자에게는 망각이라는 축복이 수여된다. 역시 아는 게 병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나는 좀처럼 즐겁지가 않았다. 즐길 수가 없었다. 이 예쁘장한 중세풍 도시가 되레 야속하고 얄미웠다. 빅토르 위고가 '위대한 광장'이라고 찬탄해마지 않았다는 그랑플라스의 회화적 아름다움 앞에서도 어쩐지 배알이 더욱 꼬이는 것만 같았다. 바삭함과 촉촉함이 환상적인 궁합을 이룬 벨기에 와플마저도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차라리 독주가 땡겼다.  

2. 아세안의 기적 

빨빨거리고 돌아다니지 않는다. 관광 명소를 즐겨 찾지도 않는다. 점과 점 사이 선 잇기를 좋아한다. 명소와 명소 사이, 도시의 공기를 들이킨다. 하늘과 태양과 구름을 나침반 삼아 무작정 걷는 쪽이다. 카메라도 잘 챙기지 않는다. 카메라를 메는 순간 렌즈가 주인이 된다. 정작 나는 목줄 찬 안내견이 된 기분이다. 카메라는 어디까지나 '업무용' 장비일 뿐이다. 발길 닿는 대로 하염없이 걷다가 마음에 드는 카페가 보이면 진지를 차리고 책 읽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곳에서 사람들 구경하는 것이, 사피엔스를 관찰하는 것이 훨씬 더 재미나다.


이튿날 진을 친 곳은 룩셈부르크 광장이다. 마주 편으로 유럽의회 건물이 내다보이는 명당자리다. 지붕을 반원형 돔으로 처리했다. 유럽연합(EU)을 상징하는 파란색 유리창이 돋보인다. 햇볕을 받아 푸른빛을 반사한다. 의회 내부를 구경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싶지가 않았다. 킨들을 열어 EU에 대하여 지젝이 쓴 글을 읽는 쪽이 내 스타일이다. 그런데 다른 책 한 권이 다운로드 된다. 싱가포르대학의 키쇼어 선생이 선물로 보내오신 것이다. 벌써 2년 전이다. 싱가포르 건국 50주년을 기하여 뵈었다. 당시 아세안에 대한 책을 준비하고 있노라는 얘기를 들었다. 2017년 8월이 아세안 창립 5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그새 2년이 훌쩍 흐른 것이다.  

▲유럽의회. ⓒ이병한


2017년 아세안은 노벨평화상을 노리고 있다. EU가 수상한 것은 2012년이다. 5년 사이 무척 머쓱하고 민망해졌다. 영국은 이미 EU와의 결별을 선택했고, 각 나라에서 선거가 열릴 때마다 또 다른 이탈국이 생길까봐 브뤼셀은 전전긍긍한다. 극우파만 준동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지젝 같은 동유럽의 급진좌파 지식인들도 소련의 위성국에서 벗어났더니, 서유럽의 내부 식민지가 되었다며 EU 해체를 목청껏 외쳐댄다. 좌/우 양쪽에서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동네북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에 비하자면 아세안의 성취가 훨씬 값지다며 세계의 관심을 환기하고 촉구하는 것이 <미라클>의 취지였다. 서문에 이어 본문까지 내쳐 읽게 된 것은 '다문명 세계'라는 접근 때문이었다. EU의 다문화사회가 문명간 공존의 방법을 마련하지 못했다면, 아세안(ASEAN)이야말로 여러 문명을 아우르는 독보적인 국제기구라고 자부하는 것이다. 다문화사회와 다문명세계라? 색다른 접근이다. 새로운 발상이다. 뇌가 말캉말캉해진다. 미끼에 훅 낚였다. EU 본부를 앞에다 두고 ASEAN 책을 읽느라 꼬박 한나절을 보냈다. 

 


유라시아의 극서에 자리한 유럽과 달리 동남아시아는 2000년이 넘도록 유라시아 문명의 교차로였다. 크게 4번의 물결로 가름해볼 수 있다. 인도의 물결, 중국의 물결, 이슬람의 물결, 유럽의 물결이다. 마지막을 제하고는 비교적 순탄하고 평화로운 물결이었다. 그래서 동남아시아는 지구상에서 문화적, 종교적, 언어적, 민족적 다양성에서 단연 으뜸인 곳이 되었다. 2억5000만의 무슬림에 1억4000만의 불교도에 1억3000만의 기독교인에 7000만의 힌두교도가 더불어 살아가는 풍요로운 땅이다. 세속적 관점에서도 다양한 체제가 공존한다. 왕국과 공화국이 있는가 하면, 공산당이 다스리는 사회주의 국가도 여전하다. 인류의 축약도이자, 압축된 지구인 것이다. 지구촌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다문명 세계, 다체제 지역이 문명의 충돌 없이, 이념과 체제의 갈등 없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음을 인류에게 증명해 보였다는 것이다. 출범 당시 만해도 전망은 무척 어두웠다. 1967년, 동남아시아는 세계의 화약고였다. '아시아의 발칸'이라고도 불리었다. 베트남 전쟁은 최고조로 격화되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깊숙이 휘말려들었다. 태국과 필리핀의 미군기지는 풀가동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 갓 분리 독립한 싱가포르는 존속을 장담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양대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또한 영토 분쟁으로 전쟁 직전까지 치달았다. 내륙부도 해양부도 온통 전운에 휩싸였던 시점에 아세안이 출발했던 것이다. 돌아보니 주역들의 면모가 참으로 흥미롭다. 태국의 타낫(Thanat Khoman)은 프랑스에서 교육받았다. 와인을 사랑하고 유럽 문학에도 조애가 깊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철저한 반식민주의자이기도 했다. 라모스(Narciso Ramos)는 필리핀에서 태어났다. 미국의 역사에 정통한 기독교도였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미국 독립의 아버지들의 이념으로 필리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말릭(Adam Malik)은 수마트라에서 태어난 무슬림이다. 네덜란드어에 농하고 영어도 구사했다고 한다. 수카르노와 더불어 반식민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라작(Abdul Razzk)은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곳에서 리콴유를 만나고 영국에 맞선 반식민주의 운동에 동참한다. 라자라트남(S. Rajaratnam)은 스리랑카의 타밀계 힌두 집안에서 태어났다. 싱가포르로 이주한 후에 반식민주의 운동에 가담한다. 불교도 태국인, 크리스천 필리핀인, 두 명의 무슬림, 그리고 싱가포르의 힌두교도까지. 이들이 모여서 아세안 선언에 조인했던 것이다. 단순한 국가간 회합이 아니었다. 출발부터 문명간 연합체였다. '역사적 동남아'에 정치적 형식을 부여하여 현대적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아, 장탄식이 새어나왔다. 깨달음은 항상 늦다. 1967년 8월의 방콕이 얼마나 위대한 순간이었나를 이제야 알아챈다. 동남아를 누비고 다녔던 2년 전만 해도 눈에 들지 않던 대목이다. 인류의 미래를 앞서 제시했다. 21세기의 선취라고 할만하다. 상상력을 가동해 본다. 기독교도인 트럼프와 유교 좌파인 시진핑과 정교회 신자인 푸틴과 무슬림 하메이니와 힌두교도 모디가 한 자리에 모여서 세계평화, 태평천하를 다짐하는 근사한 조합을 공상해 본다. 흔하디흔한 국가간 회담(United Nations)이 아니다. 문명간 연합(United Civilizations)이다. 기가 막히는 장면이다. 기똥찬 장관이다. 유투브에서 "We dare to dream, We care to share. Together for ASEAN."을 노래하는 '아세안의 길'을 찾아 들었다. 소름이 돋는다. 등잔 밑이 어둡다. 유불도에 기독교와 이슬람까지 혼합시킨 베트남의 민간종교 까오다이 사원도 다시 챙겨보았다. 

▲ 호치민의 까오다이 사원. ⓒ이병한

 

 

50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불안했던 지역을 가장 안정적인 지역으로 탈바꿈시킨 아세안은 향후 50년의 장래도 다짐하고 있다. 첫째는 아래로, 민간으로의 하방이다. 둘째는 아세안 모델의 수평적 확산이다. 민간이 주도하는 기구로 진화함으로써 각국의 정권교체에 따라 갈팡질팡하는 20세기형 국제기구의 한계를 혁파해갈 것이라고 한다. 국제기구에서 민제(民際)기구로 조직 성격을 전환시켜간다는 것이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아세안 도시연합으로 공동주최하는 획기적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아세안 모델을 세계화하는 작업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21세기의 'CIA', 중국(China), 인도(India), 미국(America)의 패권 경쟁을 억제하는 창조적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다. 인도양과 태평양의 평화를 견인하는 주역이 되겠다는 것이다. 21세 전반기의 G2 미국과 중국, 21세기 후반기의 G2 중국과 인도가 천하삼분지계의 중지를 모을 수 있는 방편으로 아세안을 활용하라는 것이다. 2067년을 내다보는 담대한 구상이다. 아세안 100주년을 준비하는 원대한 목표이다.  


감탄을 연발하다 문득 고개를 들자 EU 의회가 달리 보인다. 인도네시아를 지배했던 네덜란드 깃발이 나부낀다.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를 통치했던 프랑스의 깃발도 펄럭인다. 필리핀의 국명에까지 흔적을 남긴 스페인의 깃발도 눈에 든다. 그런데 말레이시아부터 미얀마까지 다스렸던 영국의 깃발은 그새 사라졌다. 브뤼셀의 고위 관료들은 영국과의 이혼 소송으로 골머리를 썩고 있다. 정중앙에 자리한 파란색 EU 깃발이 옹색하다. EU는 '다문명 세계'에 값하는 조직인가? 기독교 일색일뿐더러 '자유주의 근본주의'로 획일화된 기구가 아닌가? 냉전의 주박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난 모임인가? 그제야 건물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무장인력들이 도드라져 보인다. 경찰만이 아니라 특공대까지 투입되어 경비가 삼엄하다. 벌써 EU 의회를 겨냥한 테러가 두 차례나 일어났다. 좌파도 불만이요, 우파도 불평이며, 무슬림들은 불안하고 불편해 하는 기구이다. 유럽과 아랍, 기독교와 이슬람의 평화공존은 난망해 보일뿐더러, 유럽의 동부와 서부 사이에 패인 골도 무척 깊다. 어느 쪽이 신세계화와 진세계화에 부합하는 미래형 혁신체인가? 혹 EU가 ASEAN을 견문하고, 그 노하우를 한 수 배우고 익힐 때가 온 것은 아닐까. 일방적인 학습에서 교학상장, 상호진화로. ASEAN의 노벨평화상을 축원하는 답신 메일을 보내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3. '1989년 체제' 

눈썹이 꿈틀 솟는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본부를 지켜보고 있자니 심란하다. 마음이 어지럽다. 2년간 삭혀온 불만이 터질 것만 같다. 명색이 유라시아 견문이건만, 가보지 못한 곳이 많다.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서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회고해 보고 싶었다. 천 년 전 아랍문명의 절정을 구현했던 이라크의 바그다도도 눈에 담지 못했다. 기독교가 탄생한 시리아 땅도 밟아볼 수 없었다. '이슬람 사회주의'를 구축했다는 리비아의 살림살이도 관찰하지 못했다. 이 곳곳에 구멍이 뚫린 공백지대가 대개 NATO군의 폭탄이 투하되었던 장소이다. 아프간부터 리비아까지, 남아시아부터 북아프리카까지 '민주화'라는 이름의 무질서를 양산하는 전위부대였던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하지 못하고, 나의 이념과 체제와 가치관을 기어코 남에게도 주입시키겠다는 십자군의 못된 습성을 NATO군이 계승하고 있는 것 같다. 
 

▲ 나토 본부. ⓒ이병한


NATO는 명백하게 냉전기의 산물이다. 그런데 냉전 종식 한 세대가 흐르도록 NATO는 해체되지 않았다. 커녕 도리어 몸집을 불리고 근육을 키웠다. 동유럽의 위성국들과 소련에서 분리 독립한 신생국가들까지 거느리는 비대한 조직이 되었다. 군산복합체의 총화로 진화한 것이다. 그러나 그 오월동주도 변곡점에 이른 듯하다. 2016년 나토 창설 60주년을 지나 올해 61번째 회합에서 미국과 유럽의 갈등이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 유럽의 좌장 메르켈이 트럼프에 대한 불편한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포스트-아메리카 세계의 도래를, 유럽의 독자노선을 공공연하게 천명한 것이다. 대서양 사이로 구미(歐美)가 멀어진다. 영국의 이탈로 흔들리는 EU에 이어 NATO 마저도 미국과 독일의 갈등으로 내연한다. NATO 최강 부대의 하나였던 터키마저 멀어지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파죽지세로 동진하던 지난 30년의 기세가 크게 한풀 꺽인 것이다. EU도 NATO도 결정적인 전환기이다. 

 


브뤼셀에서 정작 EU와 NATO를 깊이 천착하지 않았다. 뜬금없이 ASEAN를 더 자세히 살폈다. 엉뚱하달 수도 있겠다. 퉁치고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EU의 속성과 NATO의 실체를 살피는 데에도 동유럽이 훨씬 요긴하다. 1989년 공산주의 정권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져간 이후, EU에 포함되고 NATO에 편입되어 갔던 지난 30년을 복기하는 편이 더욱 이롭다. 그 중에서도 요체는 발칸 반도이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20세기를 열고, 유고내전으로 20세기를 마감한 '암흑의 핵심'이었다. 탈냉전 이후 NATO군의 첫 공습이 단행된 곳도 발칸이었다. 발칸을 '자유민주 세계'로 평정한 이후에 남아시아부터 북아프리카까지 종횡무진 활약한 것이다. 고로 1989년 역사의 종언에 임하여 서구화의 막차에 올라탄 발칸의 경험을 반추하는 편이 EU와 NATO로 상징되는 구세계화의 적폐를 밝히는데도 유용할 것이다. 이미 경제적 복속과 군사적 종속으로 점철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이 무르익고 있었다. '1989년 체제'에 대한 자성과 비판으로 '다른 유럽', '다른 백년'에 대한 담론이 분출하고 있었다.


서구와 러시아 사이 발칸이 자리한다. 유럽과 아랍 사이 발칸이 위치한다. 지난 백년에는 사회주의와 자유주의가 교착하고, 지난 천 년에는 기독교와 정교회, 이슬람이 교차했던 곳이다. 비잔틴제국과 오스만제국, 소비에트연방과 유럽연합까지. 서유라시아 천년의 제국사가 응축된 장소가 바로 발칸이기도 하다. 다시 기차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한다. 유럽 내부의 다문명세계, 발칸 행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에 올랐다. 
 

▲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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