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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핵 재앙 경고 "함께 살 것인가, 모두 죽을 것인가"

 
[전쟁 국가 미국] 반핵 여론 일어나다
2017.09.05 07:48:45
 

 

 

 

2차 대전 후, 미국의 정치군사 지도자들은 핵무기를 전후 국제질서 형성 및 유지의 핵심 수단으로 사용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핵무기가 정당한 전쟁 무기라는 점을 미국 국민들에게 각인시켜야 했다. 핵무기가 인류의 양심과는 양립할 수 없는 절대 악이라는 일말의 의혹도 제기되어서는 안 됐다. 미국 정부가 원자탄의 인간적 참상을 드러내는 증언, 기록, 사진, 동영상 등의 공개를 철저히 차단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의 여론도 대체로 핵무기 사용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1945년 말부터 핵무기의 인간적 참상을 보여주는 증언과 기록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미국에서도 핵무기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맨해튼 과학자들의 평론집 <함께 살 것인가, 모두 죽을 것인가(One World or None)>,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존 허시의 현장 르포 <히로시마> 등이 발표되면서 반핵 여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심적 과학자와 작가, 언론인, 종교인 등의 문제 제기로 흔들리기 시작한 핵무기의 정당성은 제임스 코난트 하버드대 총장을 비롯한 관변 지식인과 미국 정부의 주도면밀한 선전전에 의해 다시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다. 대다수 미국인들이 핵무기를 정당한 전쟁 무기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후 약 15년간 핵무기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은 거의 제기되지 않는다. 

1946년 핵무기의 정당성을 둘러싼 미국 내 담론 투쟁의 과정을 두 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그로브스 "더 좋은 핵무기를 만들어야" 

1945년 8월 말 열린 의회 청문회에서 레슬리 그로브스는 "미국이 원자력(핵무기) 개발을 계속하지 않는다면 이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면서 핵무기의 성능 향상을 촉구했다. 심지어 그는 만일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미 국민 4천만 명이 사망하겠지만 생존자들의 보복 공격으로 결국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섬뜩한 증언을 천연덕스럽게 하기도 했다(아직 소련이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던 때임을 상기해보라!). 

그로브스의 발언은 극단적이긴 했지만, 대다수 정치군사 지도자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이나 제임스 번스 국무장도 같은 생각이었다. 즉 원자탄은 미국 대외정책의 필수불가결한 무기라는 것이었다.  

반면 일부 공직자는 미국의 핵 독점이 미소 간 핵 군비 경쟁을 초래할 것으로 예견했고 이를 막으려 했다. 2차 대전을 진두지휘했고 전쟁 직후 퇴임한 헨리 스팀슨 전 전쟁부 장관과 존 매클로이 차관보가 그들이다.  

두 사람은 전쟁 이후 '인류가 당면한 핵심 문제는 소련의 독재가 아니라 원자탄'이라고 생각했다. 이 문제에 관해 소련과 진솔한 대화를 통해 핵 군비 경쟁을 막아야 한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었다. 두 사람은 9월 12일 트루먼에게 비밀 메모를 보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우리는 당장 원자탄 문제에 관해 소련과 논의해야 합니다...지금 그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하지 않고 원자탄을 보유한 채 단지 (핵무기의 국제 관리에 관한)협상만을 계속한다면 우리의 의도, 그리고 목표 및 동기에 대한 소련의 불신은 커질 것입니다" 

이에 따라 소련은 "맹렬하게 원자탄 개발을 추구할" 것이고 결국 "치명적 성격의" 군비 경쟁이 계속될 것이라는 게 이들의 판단이었다.  

(<원자폭탄 만들기>의 저자인 리차드 로즈에 따르면 미국은 1995년까지 50년간 핵무기 제조에 5조 달러를 사용했다. 소련 붕괴의 주요 원인 중 하나도 바로 핵 군비 경쟁에 따른 경제 피폐다.) 

그러나 스팀슨과 매클로이의 선견지명은 무시됐다. 대다수 정치군사 지도자들은 미국의 핵 독점을 유지할 작정이었고 적어도 10~15년 내에는 소련이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할 것으로 자신했다. 

맨해튼 과학자들의 입을 막아라 

미국의 핵 독점이 10년 이상 지속될 것이란 지도자들의 판단은 오판이었다. 소련은 미국보다 4년여 늦은 1949년 8월 첫 핵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핵무기의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원자탄을 직접 만들어낸 맨해튼 과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일찍부터 다음 세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원자탄의 비밀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원자탄 공격에 대한 방어도 불가능하다, 셋째 원자탄에 대한 국제적 관리를 하지 않는다면 핵 군비 경쟁은 불가피하다. 

이에 따라 맨해튼 과학자들은 대통령과 미 국민들에게 핵무기 및 핵 군비 경쟁의 위험성을 경고하려 했으나 모두 그로브스에 의해 철저히 차단당했다. 예컨대 물리학자 새무얼 앨리슨이 나가사키의 "비극"을 언급하며 정부의 비밀주의를 비판하자 그로브스는 사람을 보내 '입 다물라'고 경고했다.  

이에 대해 한 언론인은 원자탄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과학자들의 의견이 왜 대중들에게 공개적으로 전달되지 않는지 의구심을 표했다. 또 한 활동가는 "미국의 미래에 중차대한 의미를 갖고 있는 원자탄 관련 정보들이 대중들에게 전달되지 않음으로써 건전한 여론 형성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내용의 항의 서한을 전쟁부에 보내기도 했다. 

미국의 원자탄 개발을 가장 먼저 제안했던 레오 실라르드는 1945년 말, 히로시마 이후 수 주일 동안 과학자들은 "원자탄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 공개적 발언을 금지 당했다고 밝혔다. 요컨대 미국의 대중들은 원자탄 사용에 대한 과학자들의 불만과 우려를 거의 몰랐던 것이다.

아마도 핵 군비 경쟁의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절감했던 사람은 원자탄 제조의 책임자였던 로버트 오펜하이머일 것이다. 그는 10월 중순 로스알라모스연구소 소장직을 사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으로 얼룩진 이 세계에, 그리고 여전히 각 나라들이 전쟁을 준비하는 이 시기에 원자탄이 새로운 전쟁 무기로 추가된다면, 언젠가 로스알라모스와 히로시마라는 이름은 인류의 저주를 받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세계정부가 답이다" : 핵과학자연맹의 탄생 

1946년 3월, <함께 살 것인가, 모두 죽을 것인가(One World or None)>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됐다. '원자탄의 총체적 의미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보고서'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맨해튼 과학자의 주도로 발간된 것이다.  

과학자들은 책의 후기 '인류의 생존이 달려 있다(Survival is at stake)'를 통해 "이 책을 낸 유일한 목적은 핵 군비 경쟁을 막는 데 일조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핵무기로 인해 인류가 직면한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 핵무기는 인류 역사상 최대 위기 중 하나다. 

둘째, 이제 핵문제는 정치적 차원으로 진입했으며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다. 과학만으로는 핵무기의 위험을 해결할 수 없다. 

셋째, 핵무기는 세계적 문제다, 개별 국가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다."
 

▲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노벨상 수상 과학자들과 언론인, 군인 등의 공저로 지난 1946년 출간된 <함께 살 것인가, 모두 죽을 것인가> 표지 ⓒ더 뉴 프레스

나치의 세계 지배를 막기 위해 시작된 맨해튼 프로젝트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을 불러오고, 핵무기의 위험성에 대한 자신들의 경고가 정치군사 지도자들에 의해 묵살되는 것을 보면서 맨해튼 과학자들은 1945년 10월부터 각 연구소 차원에서 모임을 시작했고 결국 1945년 12월 핵과학자연맹(FAS, Federation of Atomic Scientists)의 결성으로 이어졌다(1946년 1월 미국과학자연맹, 'Federation of American Scientists'로 이름을 바꿨다). 

핵무기의 위험을 방지하고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을 도모한다는 것이 이들의 활동 목표였다. 이들은 <핵과학자회보(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발간을 통해 핵과 관련된 정보와 논평을 내는 한편, '종말의 시계(Doomsday Clock)'를 통해 핵전쟁의 위험을 경고해 왔다. 1947년 자정 7분 전에서 시작된 종말의 시계는 1953년과 2007년 자정 2분 전까지 갔다가 현재는 자정 2분 30초 전에 맞춰져 있다(자정은 곧 핵전쟁 발발을 의미한다).

<함께 살 것인가, 모두 죽을 것인가(One World or None)>에는 앨버트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 로버트 오펜하이머, 한스 베테, 해럴드 유리 등 노벨상 수상자 5명을 비롯한 맨해튼 과학자들과 언론인 월터 리프먼, 미 공군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햅 아놀드 장군 등 15명의 글이 실려 있다.  

기고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핵무기의 위험을 막기 위해서는 '세계 정부'가 답이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출구(The Way Out)'라는 글에서 세계 정부에 관한 구상을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정리했다. 

'현재의 상황: 첫째 각 국가들은 공식적으로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고 하면서도 국민들에게는 항상 전쟁 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 둘째 현대 무기, 특히 원자탄의 특성상 공격이 방어보다 훨씬 유리하므로(대규모 핵 공격을 100% 막아낼 수 없으며 10%의 타격만으로도 궤멸적 피해를 입을 것이므로) 지도자들은 예방 전쟁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해법 : 따라서 핵전쟁의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첫째 각 국가가 분쟁 해결의 권한을 초국가적 기구에 위임하며, 둘째 모든 군사력은 이 초국가적 기구가 독점한다.' 

아인슈타인은 후자의 두 조건을 충족시킬 때에, 비로소 언젠가 핵전쟁에 의해 인간의 몸이 원자로 분해돼 공중을 떠도는 신세를 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1940-50년대 세계정부론이 풍미했던 배경이다. 

맨해튼 과학자들은 이 책의 후기에서 "오늘날 핵전쟁의 위험을 막을 기회와 책임은 바로 미국 국민들에게 있다"면서 이 책을 '읽고 토론하며 행동하라!'고 촉구했다. 그리하여 정치 지도자들에게 국민들이 사태의 엄중함을 똑똑히 알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나아가 용기와 비전을 가지고 핵문제의 해결에 나설 것을 촉구하라는 것이다.  

이 책은 발간 당시 약 10만 부가 팔리면서 미국 사회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전략폭격조사단 "원폭은 전쟁 승리에 기여하지 못했다" 

1945년 가을, 약 1000명으로 구성된 전략폭격조사단이 일본을 방문했다. 히로시마 원폭을 비롯한 미국의 공중 폭격이 전쟁 승리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지 조사는 조사단의 부단장인 폴 니츠가 이끌었고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도 12개 부서 중 한 부서의 책임자로 참여했다. 니츠는 원자탄 사용에 찬성했고 갈브레이스는 반대 입장이었다. 

그러나 조사가 끝나면서 니츠와 갈브레이스의 결론은 일치했다. 원자탄을 비롯한 미국의 공습은 전쟁 승리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실패였다는 얘기다. 이에 앞서 미국은 독일에 대해서도 같은 조사를 벌였으나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공습이 전쟁 승리의 요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조사단은 독일 경제의 파괴보다 공습에 투입된 자원이 더 많았다고 지적했다. 

조사단은 일본 항복의 결정적 원인으로 태평양 전투에서의 참패, 미국의 해상 봉쇄, 소련의 참전 등을 꼽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폭이 투하되지 않았어도, 소련이 참전하지 않았어도, 그리고 (미군의) 본토 상륙이 시도되지 않았어도 일본은 45년 12월 31일 이전에는 확실히(certainly), 11월 1일 이전에도 거의 분명히 (in all probability) 항복했을 것이라는 게 조사단의 결론이다"

조사단은 이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탄이 승리를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면서 천황과 일본 지도부는 "이미 1945년 5월부터 연합국 측의 항복 조건을 받아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고 밝혔다. 원자탄 공격의 역할은 기껏해야 "종전을 앞당겼을 뿐"이라는 것이다.  

(1989년 기밀 해제된 미 육군부의 다른 문서에 따르면 일본 지도부는 항복의 "명분"을 찾고 있었고 소련군 참전을 그 명분으로 삼았다.) 

조사단의 결론은 트루먼이나 그로브스 등 정치군사 지도자들의 그동안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트루먼 등은 원자탄의 역할을 크게 과장해 왔던 것이다. 미국 지도자들로서는 곤혹스런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대중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한다. 나가사키 이후 최초의 원폭 실험인 비키니 핵실험(46년 7월 1일)이 시행되기 불과 수 시간 전에 발표됐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비키니 핵실험에 대한 언론의 대대적 보도 속에 묻혀버렸다. 

게다가 당시는 미국이 제안한 핵무기의 국제적 관리 방안에 대한 유엔 논의가 시작된 지 2주일 쯤 된 시점이었다. 소련은 핵실험이 자신들에 대한 무력 과시이자 협박이라고 반발했고, 이런 와중에 보고서는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져 버렸다.  

존 허시의 <히로시마> : 반핵 여론이 일어나다 

1946년 8월 31일, 미국의 권위 있는 잡지 <뉴요커>에 원폭 직후 히로시마의 참상에 대한 장문의 르포기사가 발표됐다. 오로지 히로시마 기사만으로 잡지 전체를 도배한 파격적인 편집이었다. 68쪽, 3만 단어에 이르는 이 르포를 작성한 이는 31살의 나이에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가 존 허시(1914~1993년)였다.  

그는 1946년 4월부터 3주간 히로시마를 방문해 생존자 수 십 명을 인터뷰했고 이중 종교인 2명, 의사 2명, 여성 노동자 2명 등 6명의 행로를 집중 조명했다. 일본인 목사와 독일인 예수회 신부, 개인병원을 소유한 나이 많은 의사와 적십자병원 소속의 젊은 의사, 아이 셋을 가진 전쟁미망인과 젊은 여성 사무원 등이 그들이다.  
 

▲ 지난 1946년 <뉴요커>에 게재된 존 허시의 기사 ⓒ뉴요커


허시는 이들이 피폭 직후 겪어야 했던 고난과 참상, 그리고 피폭자들의 연대와 상호 부조를 담담한 필치로 그려냈다. 그는 이 기사를 쓰면서 "원자탄으로 인한 건물 등 물리적 피해가 아닌, 인간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관해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방사능에 의한 고통과 죽음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등장인물의 하나인 다니모토 목사는 강물에 빠진 사람들을 건져내다가 그 사람의 피부가 큰 조각으로 벗겨지는 섬뜩한 경험을 한다. 그 기이한 촉감을 이겨내기 위해 그는 "이건 사람이야"라고 수없이 되뇌며 사람들을 구조한다. 전쟁미망인 나카무라는 피폭 2주일 후 머리를 빗을 때마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는 아찔한 경험을 한다. 

독일인 신부 클라인조르게는 공원에 피신한 피폭자들에게 물을 갖다 주다가 두 눈알이 빠진 채 나뭇더미에 묻혀 있는 일본 병사 20여 명을 발견한다. 사망자 20%가 방사능에 의한 것이라는 전략폭격조사단의 결론을 뒷받침하는 내용이다. 

당초 4회로 나누어 연재하기로 했던 이 기사는 편집자의 결단에 의해 한 번에 모두 발표됐다. 

히로시마 이후 1년이 지나도록 원폭 피해자들의 실상은 미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45년 9월 토마스 패럴 장군과 함께 히로시마를 방문했던 물리학자 필립 모리슨이 그해 12월 의회 청문회에서 자신이 현지에서 보고 들은 바를 증언한 바 있지만, 그것으로 피폭자들의 고통의 전모를 알 수는 없었다. 허시의 르포는 처음으로 그 전모를 보여주는 글이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잡지는 순식간에 매진됐다. ABC 라디오는 허시의 기사를 나흘 저녁에 걸쳐 낭독 방송했고, 다른 지역 방송들도 뒤를 따랐다. 뉴저지 주 프린스턴의 시장은 '모든 시민들은 읽어보시오'라고 권유했다. 별도 인쇄본을 찍어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 아인슈타인은 1000부를 주문했다. 신문들은 너도 나도 기사를 전재하겠다고 나섰다. 허시는 2가지 조건을 내걸고 전재를 허락했다. 수익금은 모두 적십자에 기부할 것, 전문 게재할 것.

신문 칼럼니스트와 편집자들은, 원자탄 사용에 찬성했던 사람들조차 당대 최고의 보도라고 격찬했다. 허시의 르포는 두 달 뒤 책으로 발행됐으며 즉각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뉴욕타임스>는 "원자탄에 대해 농담을 할 정도의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면, 또는 원자탄을 문명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저 놀라운 발명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재앙은 바로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며, 허시의 <히로시마>를 읽고 나면 더 많은 목숨을 살리기 위해 원자탄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했다는 (미 정부의) 주장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뉴요커>에는 독자들의 편지가 쇄도했다. 한 대학생은 "(이 글을 읽기 전까지) 폭격 당한 도시의 주민들을 같은 인간으로 생각해 보지 못했다"면서 미국이 행한 일에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젊은 과학자는 글을 읽으며 내내 울었다면서 원폭 투하 소식을 들었을 때 다른 과학자들과 함께 "환호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한없는 수치심을 느꼈다"고 자책했다. 

아인슈타인은 원자탄이 사용된 가장 중요한 목적은 아마도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과학자 폴 보이어는 이 글에서 허시가 해낸 일은 미국인들에게 '사악한 쪽발이'였던 일본인을 "같은 인간으로 되돌려 놓은 것"이라며 원자병(방사능 피폭)을 비롯해 원자탄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했다고 평가했다. 

노먼 커즌스 "원폭 개발을 잠정 중단하자" 

허시의 <히로시마>는 미국 내 반핵 여론의 기폭제가 됐다. 그 선봉에 나선 사람은 노먼 커즌스(1915~1990년)라는 언론인이었다. 그는 이미 히로시마 당일, 원자탄에 대해 비판적인 장문의 칼럼 '현대인은 이제 죽은 목숨(The Modern Man is Obsolete)'을 집필해 다음 날인 45일 8월 7일 <새터데이 리뷰>에 발표한 바 있다.  
 

▲ 존 허시가 지난 1946년 펴낸 <히로시마> 초판 표지 ⓒ알프레드 A.크노프

인간에 대해 원자탄이 사용됐다는 데 대해 "매우 깊은 죄의식"을 느낀다면서 핵무기와 원자력의 정치사회적 의미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또 46년 6월에는 아마도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원자탄 사용은 "권력정치(power politics)의 일환"이며 "소련의 참전 이전에 일본을 굴복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46년 9월 14일, 그는 <새터데이 리뷰>에 '생존을 제대로 이해하기(Literacy of Survival)'라는 칼럼을 발표했다. <히로시마> 현상의 의미는 허시의 글 자체의 중요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글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에 있다면서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우리가 시작한 핵전쟁의 의미를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트루먼 등 지도자들의 원자탄에 관한 담론의 허구성을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지적했다. 

"예컨대 우리는 알고 있는가? 앞으로 수년간 원자탄이 내뿜은 방사능에 의해 수 천 명의 일본인들이 암으로 죽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원자탄이 실상은 죽음의 빛이라는 것을 아는가? 폭발과 화염보다도 방사능이 인체에 더 치명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미국 국민으로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가? 미국 국민은, 일본에 원자탄을 사용하기 전에 원자탄 시험 폭발을 통해 사전 경고를 하자는 과학자들의 건의를 정치지도자들이 묵살한 이유를 추궁했는가?

이제 우리는 일본이 히로시마 이전에 항복할 준비가 돼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원자탄 사용으로 수십만 미군 병사의 목숨을 구했다는 주장은 사실일까?"

커즌스는 '현재의 진로를 멈추자. 원폭 개발을 잠정 중단하고 히로시마의 정치적, 도덕적 의미가 무엇인지, 원자력시대는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성찰해보자'고 촉구했다.

제도권의 즉각적이고 운명적인 대응  

허시의 현장 르포와 커즌스의 문제 제기는 미국의 정치지도자와 제도권 학자들에게는 치명적 일격이었다. 그동안 제도권이 공들여 퍼뜨려온 담론, 즉 원자탄으로 수많은 인명을 구했고 원자탄은 다른 무기와 마찬가지로 정당한 전쟁무기라는 인식이 일거에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대응이 필요했다. 하버드대 총장인 제임스 코난트가 앞장을 섰다.

코난트는 커즌스의 칼럼을 읽자마자 과학계의 최고 원로인 바네바 부시에게 연락을 취해 허시와 커즌스가 원자탄이 사용된 맥락을 무시한 채 그 참상과 공포만을 강조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9월 23일에는 제도권의 유력 인사인 하비 번디에게 커즌스의 칼럼을 첨부한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는, 이런 부류의 논평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다"면서 이대로 방치할 경우 "역사의 왜곡"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어 "권위 있는 인물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그 일을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스팀슨 씨"라고 말했다.  
inkyu@pressian.com다른 글 보기
▶ 필자 소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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