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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월투쟁 때는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필자의 동생은 서울대학교 근처의 고등학교를 다녔다. 1991년 4월 26일, 그날 밤 동생이 서울대 학생들이 긴급히 배포한 유인물을 들고 왔고 그 유인물을 통해 강경대 열사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유인물을 읽으며 뭔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달 전, 노태우 정부 들어 가장 큰 시위였다는 수서비리 반대집회 때와는 확연히 다른 ‘큰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6월 에 이 투쟁의 파고가 꺾일 때까지 거의 매일 시위에 참여했다.


고등학생운동을 하던 이들이 공유하던 정서는, 이번이야말로 노태우 정권을 끝장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놓고 보았을 때, 그 같은 정서가 한낱 ‘바람’에 불과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정서가 수많은 대중적 참여를 가능케 했던 힘이 아니었을까. 1987년 12월의 구로구청에서도 드러나듯이 ‘부정선거를 통해 당선된 노태우 정권’은 ‘집권의 절차적 정당성조차 갖지 못한 정권’으로 여겨졌다. 광주학살의 주범이기도 한 노태우의 집권으로 인해 1987년 6월의 열망은 봉합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백주대낮에 학생을 쇠파이프로 때려죽이는 정권의 폭력성’은 예외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노태우 정권의 본질을 폭로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집권 3년 동안 양산된 수많은 열사와 구속자, 증강된 경찰 병력 등이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였다. 그래서 ‘살인정권, 폭력정권, 노태우정권 타도하자’라는 구호는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었고 이번이야말로 노태우정권을 ‘타도’하고 1987년 6월항쟁을 ‘완수’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보았던 것이다.

 

기억1 : 분신, 고등학생운동 선배의 죽음
 

4월 29일, 연세대학교에서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문익환 목사가 단상에 나와 연설을 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문 목사는 1986년 5월 20일에 있었던 서울대학교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의 연설 얘기를 꺼냈다. 당시는 김세진, 이재호 열사가 분신한 직후였다. 그곳에서 문 목사는 “학생들, 죽지 마라, 살아서 싸워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도서관 4층에서 이동수 열사가 몸에 불을 지른 후 투신했다. 그 얘기를 들려주면서 문 목사는 다시 한번 “일흔 넘은 노인의 부탁이니 더 이상 죽지 말라”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사실 바로 그날, 연세대 운동장에 날아든 소식은 광주에서 박승희 열사가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했다는 얘기였다. 박승희 열사가 분신한 시각은 오후 3시 15분, 하지만 집회장에 온 사람들은 운동장에 와서야 그 사실을 들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박승희 열사의 분신 소식을 들은 이날,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이틀 후인 5월 1일, 안동대 김영균 열사의 분신, 또 이틀 후인 5월 3일 경원대 천세용 열사의 분신이 이어졌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5월 4일 이전까지 이런 분신 사태가 속출하고 있음에도 당시 주최측은 거리로 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 점이 많이 의아했었지만, 지도부가 ‘분노를 축적’하고자 했던 것으로 이해했었다. 당시 투쟁의 주무대는 연세대학교였는데 5월투쟁 내내 연세대학교는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그래도 학교 바깥, 거리로 진출하는 건 자제했다. 지금은 그것이 혹 야당(신민당과 민주당)의 참여를 이끌기 위함이 아니었을지 추측해본다.


어쨌든 고등학생운동을 하던 이들은 5월투쟁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그 참여는 개인적인 참여는 아니었다. 1989년 전교조 출범과 뒤이어 전교조․참교육 사수 투쟁, 학생자치권 탄압 분쇄 투쟁 이후, 고등학생운동의 상황은 위축되었다. 잘 알다시피 1989년은 노태우정권이 공세기로 전환했던 때였고 노동운동, 대학생운동 등에도 탄압 국면이 본격화됐다. 고등학생운동은 1990년 심광보 열사, 김수경 열사 투쟁을 겪으면서 위축되었다.


하지만 학교 내에서 조직화는 꾸준히 진행됐고 학생회 선거와 동아리 조직, 그리고 정파들이 개입되면서 좀 더 강고하게 조직되어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를 기반으로 수세 국면을 벗어날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로 5월 투쟁을 인식했던 것 같고, 그동안 학교 내에서 조직되었던 활동가층과 대중을 결집시켜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1991년 5월의 거리에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것보다는 각 학교별, 지역별로 조직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으며 또 그에 맞춰서 여러 회의와 집행 단위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알다시피 그때는 핸드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고 거의 유일하게 사회단체들의 팩스통신망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PC통신이 소수의 인구 사이에서 막 등장하고 있던 때였다. 그래도 고등학생 공개단체들과 전교조 학생사업국을 통해 타 지역의 상황은 어렴풋하게 공유하고 있었다.


1991년 5월 투쟁 기간 동안의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한) 고등학생운동의 활동은 별도의 글에서 다룰 것이겠지만 이런 정보 공유를 통해 당시 분신 자살한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그리고 5월 18일 분신한 보성고등학교 김철수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등학생운동 활동가들은 그들의 죽음을 ‘고등학생운동을 했던 선배가 죽었다’는 의미로 이해했고 ‘이건 대학생들의 죽음이 아니라 고등학생운동 선배들의 죽음이다’라는 정서로 받아들였다. 당시 분신 자살한 학생 4명은 모두 고등학생운동 활동가 출신이었던 것이고 경찰의 폭력 진압에 사망한 강경대 열사도 재수 시절 전교조 교사들에게 도시락도 전달하면서 얘기를 듣기도 하고 학생운동을 하는 누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들었다. 고등학생운동을 하는 이들로서는 경험적 공통성 속에서 세대적 동질성을 느꼈던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기억2 : 5월투쟁과 김대중 씨

 

다시 4월 29일로 돌아가보자. 연세대학교에서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국민대회’가 열렸던 그날 말이다. 당시 연세대학교 운동장은 굉장히 넓었는데 그 공간이 가득 차서 넘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단상의 크기만 해도 굉장히 넓었고 재야인사 등 내빈석에 앉은 사람들만 해도 굉장히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들 중에는 신민당 김대중 총재 대신 이우정 수석최고위원이 참석했다. 사회자가 그의 이름을 소개하자 집회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보수야당 각성하라!”는 구호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웅성거렸던 것이 기억난다. 신민당은 대책회의에 참석하기는 했지만 5월 투쟁 내내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다.

 

사실 김대중 총재는 투쟁의 초반기였던 4월 28일부터 시련을 겪었다. 그날 그는 당직자들과 함께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강경대 열사 빈소에 찾아와 분향을 했다. 그 뒤 학생회관에 들렀다 나서는데 학생들은 그의 면전에 “보수야당 각성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아마도 그날 받은 느낌 때문에 그가 4월 29일 집회에 참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5월 투쟁 과정에 그가 거리에 나선 건 그리 많지 않다.


김대중 총재는 5월 투쟁의 동력이 연세대학교 학내에 머물지 않고 범대위 주도로 거리로 나아가기 시작하자, 5월 4일, 영수회담을 언급하고 ‘여야절충 용의’를 표명했다. ‘정권퇴진 투쟁’에 나선 범대위와는 달리 “중산층의 동요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치권 내의 정치투쟁 원칙”을 표명하기도 했다. 김대중과 신민당은 대통령사과, 내각 총사퇴, 백골단 해체, 집회 시위의 자유보장 등을 요구했는데 내각 총사퇴와 내각제 포기에 집요했다.
 

5월 4일에는 신민당의 차량시위에 학생들이 서강대생들이 ‘보수야당 물러가라’고 야유를 보내며 차량을 걷어차기도 했다. 이날 시위에도 김대중 총재는 역시 불참했고 20여 명의 국회의원과 30여 명의 당직자만이 참가한 가운데 약식으로 치러졌다. (5월 5일 경향신문 5면) 또 5월 5일 국민대에서 열린 신익희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던 김대중 총재 일행에게 학생들은 ‘보수야당 각성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계란과 폭음탄을 던지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거리에 나타났던 5월 15일, 강경대 열사 영결식장에서 김대중 신민당 총재가 조사를 읽는 도중 학생들은 “보수야당 물러가라”, “살인만행 공동주범 신민당은 각성하라”, “열사의 죽음 앞에 정치 흥정 웬말이냐”는 등의 구호를 외치고 야유를 보냈다. 학생들은 또 “살인정권 민자당과 밀실에서 협상할 땐 언제인데 여기 와서 왜 조사를 읽느냐”고 외치며 우우 하는 소리로 야유를 보냈다. 이날 식장에는 “열사의 뜻 거래흥정, 정치협상 획책하는 보수야당 자폭하라”는 신민당 비방 현수막이 곳곳에 나붙어 있기도 했다. (5월 15일, 동아일보, 3면) 김대중 총재는 원래 이날 조사를 읽을 생각이 없었고 신민당 이우정 수석최고위원을 통해 장례위원회에 그의 뜻을 전달했지만 장례위에서 거듭 요청해 나선 것이었다. (5월 14일, 동아일보, 3면)

 

하지만 김대중 총재의 줄타기 행태, 그리고 그에 대한 젊은 운동권의 불신감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해 1월에 터진 노태우 정권의 수서비리 사태에 대한 평민당-신민당의 미온적인 태도가 그랬다. 수서비리는 수서 지구 택지개발 과정에서 26개 주택조합과 한보주택에 특별 분양한 것으로, 이 과정에서 평민당으로도 2억 원가량이 흘러들어갔다. 국회 건설위에서 평민당이 합의를 해줬음은 물론이다.
 

그런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평민당의 대응 자세는 처음에는 꽤 강경했다. 전국적으로 대규모 집회를 추진하면서 중립거국내각과 의원 총사퇴 후 총선 실시를 주장했다. 하지만, 민정당-노태우 정권과 마찬가지의 비리를 제1야당이 저질렀다는 사실에 대한 따가운 눈초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보라매공원 집회를 추진하던 평민당은 지방자치 기초의원 선거(3월 26일)을 앞두고 투쟁을 접고 의회 내 정치투쟁과 선거 국면으로 전환한다. 중앙선관위에서 기초의원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장외집회는 불법이라고 유권해석을 내린 데 굴복한 것이었다. 남은 것은 재야 및 학생들이었다. 3월 16일, 수서비리 규탄 가두시위가 전개됐고 경찰은 총력으로 대응했다. ‘총력’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M-16과 38구경 권총으로 공포탄을 발사하기도 했고 전국적으로 4,406명을 연행하기도 했다. 5월 투쟁 당시 김대중 총재의 행보는 수서비리 때와 비슷하게 닮아 있었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민정당에서는 광역의원 선거를 계기로 5월 투쟁에서 신민당을 분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5월 투쟁이 끝난 후 김대중 총재는 운동권과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6.20 광역의원 선거에서의 패배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뚜렷해졌다.


반면 김대중 총재에 대한 짝사랑은 5월 투쟁 내내 지속됐던 대책위원회의 행보처럼 이어졌다. 5월 투쟁을 주도했던 국민연합과 전민련의 구조를 재편하기 위한 논쟁은 지루하게 이어졌고 그해 12월 1일, 11개 부문 단체와 13개 지역조직이 참가하는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이 결성됐다. 전국연합은 “1992-93년 권력재편기에 대비하기 위해서 민족민주세력의 통일적인 조직건설이 필수적이라는 판단으로 추진”됐고 앞으로 “민중주도의 민주대연합을 통한 민주정부수립을 위해 투쟁할 것”이라고 밝혔다.(동아일보, 1991년 11월 3일, 15면; 경향신문 1991년 12월 2일, 2면) 1992년 총선에 독자후보를 내기도 했던 전국연합은 그러나 12월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와 정책연합을 12월 2일 성사시키고 지지를 선언한다. 당시 유행했던 “당선 가능한 야당후보 지지”론의 귀결이었다. 그러나 사실 민주당과 김대중은 이와 같은 재야의 지지를 크게 신경쓰거나 한 것 같지는 않다. ‘자기 주머니 속의 표’ 정도로 생각하고 오히려 ‘중산층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온건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소위 ‘뉴 DJ 플랜’에 방해가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관훈클럽 토론회 때도 그는 자신이 ‘중도우파’로서 노선에 변화가 없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결국 14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는 큰 표차로 낙선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기억3 : 패배감과 울혈증


알다시피 6월 3일, 외국어대학교에서 정원식 국무총리 서리가 학생들에게서 밀가루와 계란 세례를 받았다. 그 직후 검찰은 전담반을 편성하고 경찰은 당일 외국어대 등지에서 학생 374명을 연행했고 대규모 검거 선풍이 일었다. 지도부는 그 당시 연세대에서 명동성당으로 거점을 옮긴 후였다.
 

그때 분위기는 어땠나. 몇 가지 상황을 나열만 해도 그때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명동성당은 유서 대필 혐의로 강기훈 씨 출석 여부로 지리한 공방을 계속하고 있었고 성당 측은 지도부에 끈질기게 퇴거를 요청하고 있었으며, 명동 상가 번영회는 평화의 거리를 선포했다. 경찰과 사복형사들이 골목 구석구석 잠복했음은 물론이다.


경찰은 6‧20 선거 직후 공권력 투입설을 흘리고 지도부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지배체제는 효과적으로 방어했다고 확신했다. 무엇보다도 야당이 투쟁에 나서지 않았다. 신민당과 민주당은 6‧20 광역의원 선거에 매몰되어 5월 투쟁을 잊은 듯 ‘공안통치 종식’을 선거 이슈로만 제기했다.
 

이러한 가운데 성균관대학교에서 6월 15일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합동 추모제가 열렸다. 지금도 추모연대 주최로 열리는 추모제로 그해가 두 번째였다. 그날 금잔디 광장에는 (그 당시의 평소 집회 인원을 감안할 때) 정말 소박한 인원만이 모였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자료에는 3,500여 명이라고 한다.) 그날 김승호 전국노운협 의장이 연설한 내용이 기억난다. “지금 범대위 지도부는 명동성당에 갇혀 있다. 우리가 구출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투쟁은 사그라 들었다.

 

잘 알다시피 1991년 6.20 시·도의회 의원 총선거는 민자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민자당 65.1%, 신민당 19.1%, 민주당 2.4%, 무소속이 13.3%를 차지했다. 총 866석 중 민자당이 564석을 차지하는 압승이었다. 신민당은 서울에서 21석을 차지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라도에서만 당선되었고 총 165석을 얻었다. 나머지 결과는 민주당은 총 21석, 민중당 1석, 무소속 115석이었다.


한 달이 넘도록 전국을 뒤흔든 5월 투쟁의 끝은 이렇게 허망한 것이었다. 필자는 선거 결과가 이 투쟁에 대한 대중적 평가라는 데에 동의하지는 않았고 패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운동 경험이 많지는 않았지만 운동의 성패가 그렇게 단기간에 결정된다고 믿지는 않는다. 이제 겨우 1980년 5월 광주로부터 11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성패는 노동운동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전선 재편 문제가 지리한 논쟁을 거듭하고 있었고 총선-대선에 대한 대응 논쟁도 있었지만, <아! 민주정부> 노래를 부르는 쪽이나 <민중권력쟁취가>를 부르는 쪽에 거리감이 있었다. 무엇보다 성장해야 할 때였다. 그 즈음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필자를 비롯한 활동가들은 진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상당수가 노동현장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서울 지역의 활동가들 중 현장 진출을 결의한 활동가들은 대학 입학시험 당일 마석 모란공원에 모여 열사들 앞에 참배했다.


그때 현장에 들어갔던 상당수가 아직도 현장에 있는 것을 안다. 이제 대공장이나 공기업에서 20여 년 잔뼈가 굵은 활동가들도 있고, 비정규직 투쟁의 현장 어디에서나 선봉에 서 있는 활동가들도 보인다. 고등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필자의 경우에는 울산으로 내려갔다. 노동운동 선배들과 상담해 보니 대공장 조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고 마창과 울산을 놓고 고민하다가 사내직훈을 통해 취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처음 가본 울산의 바람은 매서웠고 추웠으며 무엇보다 외로웠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서 고생하고 있을 친구들을 생각했다. 가끔 다른 지역으로 들어간 친구들로부터 투쟁 경험들이 전해져 왔고 주말에는 서로 지역을 찾아가기도 했었다. 그리고 여름이 되고 난 현장을 창원으로 옮겼고 대공장에 들어갔다.


5월투쟁의 패배감은 그때 찾아왔다. 그건 노동운동에 불어닥친 소위 ‘노동운동 위기논쟁’ 때문이었는데, 당시 박승옥이 <창작과비평> 1992년 여름호에 기고한 「한국 노동운동, 과연 위기인가」라는 논문과 그 이후 전개된 논쟁을 보면서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박승옥의 논지는 명료한데 ‘노동운동의 전투성이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고 고립을 자초했기 때문에 이제는 사회운동적 노동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각종 노동단체 기관지에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운동의 변혁적 성격의 탈색과 정치 일정에의 매몰, 그리고 기층 운동(?) 단위의 해체가 함께 진행된 시발점이 1991년 5월 투쟁 이후가 아니었나 생각되고 그 거대한 변환의 노동운동 버전이 이 ‘1차 위기논쟁’이었던 것 같다.


그 논쟁을 듣고 보면서 ‘지금까지의 운동이 잘못되었고 패배였다’고 믿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고 그런 주장은 지난 해 5월, 거리에서 그토록 격렬하게 자신을 내던진 사람들에 대해 모욕감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론은 전혀 다르지만 비슷한 논지를 펴는 사람은 점점 늘어갔고 급기야 1992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 현장에서 이탈하는 주위 사람들이 생겨났고 대선을 경유하자 더 많은 사람들이 현장을 떠나갔다. 그들은 조용히 떠나지도 않았다. 각양각색의 이유가 있었고 비전과 전망에 대해 설파했다. ‘합리적’, ‘시대에 조응하는’, ‘유연한’과 같은 수사들이 중간 중간에 박혀 있었다. 말들도 잘했지만, 필자가 좋아하기도 하던 사람들이라 당혹스러웠다. 패배감이 엄습하기 시작한 건 그때쯤 부터였던 것 같다.

 

1991년 5월 투쟁 이후의 패배감에 대한 고등학생운동 경험자의 회고는 이렇다.

 

정치적인 거로 한다면 이제 민중봉기노선, 대중시위 노선에 대한 철저한 반발로 갔어요. 5월 투쟁 이후에는 거리에 나가는 것 자체에 대해서 “전혀 답이 아니다” 그렇게 된 거죠. 거리에 그렇게 나갔는데도 아무것도 안 된 거 아니냐. (웃음) 콤플렉스 비슷한 것 같아요. 사실은 대중시위가 할 수 있는 게 굉장히 많고 세상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고 굉장히 폭발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죠. 아예 처음부터 안 될 거라는 그런 느낌이 각인이 되어 버린 거죠. 그래서 91년 5월 투쟁 이후에 한 2~3년 동안은, 2-3년? 더 갔는지도 몰라요. 사실 대학 입학한 이후, 체제에 대한 적대감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죠. 지금도 자유롭다고 말할 순 없구요. (2003년 1월 녹취)

 

필자에게도 “그렇게 죽고 싸우고 했는데 이루어진 게 뭐냐!”는 감정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운동이 잘못 됐다”고 부정하는 위기론자들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결국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먼저 현장을 이탈한 선배들과 달리 필자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열패감을 줬고 조용히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패배감의 상흔은 짙게 남았고 지금도 설명하기가 어렵다. 다만 나중에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통해 정태춘이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라고 불렀을 때 펑펑 울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적어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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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3 10:19 2011/05/03 10:19
글쓴이 남십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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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2/05/08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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