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선거

2012/03/23 12:10

‎20년 전 선거가 기억이 난다.
 
1992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한 반의 1/2가량 친구들이 대학에 갔을 때 난 울산으로 갔다.

처음 도착한 울산의 정초는 춥고 쓸쓸했다.
공장은 어마어마하게 컸고 난 그냥 스무살짜리였다.
 
그해 현대공화국 왕 회장은 직접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재벌의 목소리를 높였다.
선거 때마다 돈푼을 뜯어가는 군부와 정치인은 필요 없다며 직접 나섰다.
현대그룹은 사원들을 당원으로 조직했다.
 
늦여름, 난 창원으로 옮겨 한 공장에 다녔다.
바람이 쌀쌀해질 계절의 어느 날, 어렵사리 잔업을 빼고 백기완 선본의 창원 유세 현장에 갔다.
청중들이 "백기완!"을 연호할 때, 술에 취한 한 노동자가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다 똑같은 새끼들!!"
선거운동원들이 서둘러 그 양반을 데리고 나갔고 백 선생의 연설이 잠시 중단됐다.
백 선생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노동자들이 정치적 울분을 술이나 마시고 토하듯이 내뱉지 않아도 될 세상을, 바로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요지.
썰렁한 분위기를 역전시켜 내자 청중들은 다시 백 선생의 존함을 연호했다.
 
그해 선거는 김영삼이 당선되고, 김대중이 낙선했고, 정주영은 3등을 했다.
백기완 선본은 23만 표로 박찬종에 이어 5위를 했지만 완주를 했다.
 
20년 전에 난 그 술에 취한 노동자의 고함이 주정인 줄 알았다.
20년이 지나자 그 말이 내 입에서도 나온다.
"다 똑같은 새끼들!!"
 
물론, 그렇지 않은 후보들도 있다.
또 노동자의 정치, 계급 정치는 갈 길이 아직도 멀다.
계급 정치가 선거와 투표에 갇혀서도 안 되고, 갇힐 수도 없다.
 
그래도 내 정서에서 점점 커져 왔던 것은 "다 똑같은 새끼들!!"이라는 그 외침이었던 것 같다.
이 운동 진영에 넌덜머리가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같은 '운동권', '좌파' 뭐 이런 울타리로 묶이기 싫었던 적도 많았다. (요즘은 이쪽의 전매특허였던 '진보'라는 말을 한명숙, 유시민, 김진표 따위와 나누어 쓴댄다. 상전벽해다. 걔네가 진보면 우린 다 극좌냐? 극좌 하지 뭐!)
아마 그런 점 때문에 10여 년간 투표도 안 했던 것 같다.
 
올해 난 아마 투표를 하기는 할 거다.
투표를 한다 해서 뭐 큰 기대나 그런 건 하지 않는다.
그냥 잠깐 갔다 오는 거니까 할 뿐.
투표 독려 캠페인처럼 "우리의 한 표가 세상을 바꾼다"고 믿기엔 살면서 보고 느껴 가며 박힌 옹이가 너무 깊다.
 
그래도 혹여 남아 있는 작은 기대가 있다면,
진보신당 비례대표 청소노동자 김순자 지부장이 당선되었으면 한다.
 
자본보다 더 자본 같은 어용 한국노총 것들 말고,
이제 한국노총 보다 더 쌩양아 같아진 민주노총 관료 같은 것들 말고(예 : 민통당 이석행, 통진당 조준호)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김순자 지부장이
내 마음 속의 옹이를 조금은 도려내 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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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3 12:10 2012/03/23 12:10
글쓴이 남십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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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ou_topia
    2012/03/23 15:13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때려 잡고 싶게 화가 나지만 희망이 보이니까 찡하기도 하네요.
  2. 2012/05/25 08:50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안녕하세요! ^^ 어제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과분하게 신경을 써주셨는데, 저는 여러모로 미숙해서 적절히 따라드리질 못한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종종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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