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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 8-9 부록-발표글 모음 pp271-340
발표글 1
[기고]광우병 대책위에 드리는 고언(08.06.07)
비상한 시국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동안 촛불시위에 쭉 참여해왔던 한 시민으로서 최근 집회에 대해 느낀 바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특히 (광우병) 대책위가 행진과 시위에 관여하지 않았던 지난 5.31.밤과 대책위와 사회자가 좌지우지하려던 어젯밤(6.6)의 행사는 많은 점에서 대비가 되더군요.
한 달여나 계속된 이 투쟁의 특징과 생명은 학생을 비롯한 시민들의 각성과 자발성 그리고 비정형성입니다. 그동안의 대중투쟁들이 투쟁을 준비하고 주도하는 주최 측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통제되고 통솔된 집회문화였다면, 촛불소녀로 상징되는 이번 투쟁은 중학생들까지도 미친 소등의 문제를 자신들의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고, 이명박과 조중동으로 상징되는 극우세력에게 분노와 저항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5.31. 청와대입구에서 물대포를 맞으면서도 해산되지 않고 완강하게 저항한 시민들은 만약 누군가가 혹은 어떤 집단이 지시하고 리드했더라면 결코 표출될 수 없는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구호와 투쟁방법을 창안할 수가 있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경찰이 방송을 하려고 하면 ‘노래해! 노래해!’ 하면서 대응한다든지, 물대포 맞으면서도 세탁비 내놓으라든지, 전경들 퇴근시켜라고 구호를 외치기도 하고, 어떤 노조나 운동조직원도 아닌 자발적인 모임들이 혹은 인터넷 동호회들이 김밥과 식수를 준비해 오기도 하고 밧줄과 장갑을 오토바이로 실어오기도 하고, 남자들만 따로 모이라고 해서 옆 담을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대치하면서 날을 지새우는 동안 시민들은 정말 즐겁고 행복하게 새로운 시위와 저항문화를 창조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6.6. 행진은 사회자가 리드하면 구호를 따라하고 노래를 부르지만 거기엔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의지를 억압당하는 수동적인 참여자가 있었을 뿐입니다. 확성기를 든 사회자가 없었던 이전의 행진과 시위에서 느꼈던 해방감과 기쁨은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어제도 많은 의욕적인 시민들이 늦은 밤에 청와대로 가는 것은 참여자도 줄어들고 채증도 곤란하고 더 위험하니까, 행사는 짧게 하고 낮 시간에 바로 행진을 시작하고 청와대로 가자고 했음에도 대책위는 수많은 시민들의 요구를 억압하면서, 자유발언으로 시간을 질질 끌어 김을 뺀 다음에도 행진마저도 빙빙 돌면서 9시도 넘은 시간에야 청와대쪽에 갈 사람은 가라고 하더군요.
시민 모두가 주인으로서 주권자로서 자주적으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투쟁을 전진시키고 있는데, 왜 대책위는 대중을 억제하고 통제하고 관리하려 하십니까?
이제 시민들은 당신들의 관리와 통제와 리드를 받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냥 처음 촛불집회 할 때처럼 당신들의 역할은 아주 작고 짧게 끝내도록 하십시요. 파병반대든 FTA반대든 간에 이름의 앞부분만 바꾼 대책위가, 항상 투쟁의 수위를 조절한답시고 혹은 투쟁을 관리통제한다는 온갖 의혹을 받으면서, 심지어는 대중들이 나아갈려고만 하면 경찰과 합의해서 정리집회나 일삼으면서 투쟁을 배반해 온 게 한두 번이 아니잖습니까? 투쟁을 관리하고 통솔하겠다고 어줍잖은 욕심내지 마시고 그냥 약간의 뒷받침만 하시길 바랍니다.
민주시민들은 당신들이 나서지 않을 때 훨씬 책임감있게 훨씬 즐겁고 창조적으로 이 투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제발 이 민주시민들을 당신들의 각본과 사회자나 따라다니는 수동적인 군중으로 만들지 마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발표글 2
[기고]개사기 FTA가 국익이 될 거 같아서 미친 소를 받아들였다고라? (08.06.19.)
오늘 무뇌아의 회견을 보면, FTA만 되면 성장잠재력이 높아지고 34만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기고 GDP가 10년간 6%가 높아지기 땜에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미친 소를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증말 미치겠군요. 우리 국민에게(무뇌아하고 재벌대기업은 빼고) 광우병보다 백배 천배나 위험한 것이 FTA이죠.
미국과 FTA(나프타-북미자유무역협정)를 맺은 멕시코를 보면, 1990-2003까지 교역이 4배나 증가했어도, 200만 명의 농민이 일자리를 잃었고, 매년 140만개의 일자리가 필요한데도 나프타 이후 단지 300만개밖에 만들어지지 않아, 나머지는 비정규직 극빈층으로 전락하고, 1994년부터 2002년까지 제조업 부문에서는 단지 50만개, 연평균 6만2,000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동안 내수산업은 오히려 80만개의 일자리가 줄어들었지요.
미국의회보고서는 한미 FTA로 지들이 매년 160억불의 흑자를 본다는데, 한국정부와 조중동만 매년 30억불씩 흑자를 볼 거라고 우기고 있지요.
환율변동폭이 명바기 땜에 20%나 올랐는데, 자동차 관세는 겨우 2.5%, 반도체는 1.5%밖에 안 되고 그나마도 자동차는 현지생산할 거고, 개성공단이나 동남아에서 가공한 한국섬유류는 원산지조항 땜에 관세혜택도 못 보는데 FTA로 관세가 철폐되면 수출과 일자리가 늘어난다고라? 완죤 개사기죠.
나프타에 대한 유엔인권보고서는 ‘멕시코는 미국의 농업식품산업의 쓰레기통이 되었다면서, ‘개방된 국경과 세관의 부패와 함께, 건강에 대한 조사가 없다. 멕시코에 들어오는 음식은 미국시장에서의 소비가 거절당했거나 인구의 최하층을 겨냥한 가격대의 것이다. 이러한 예 중의 하나가 암을 유발하는 곰팡이를 만드는 aspertosina와 함께 팔리는 옥수수이다. aspertosina가 함유된 옥수수는 미국에서는 동물 소비용으로 팔리는 것이고,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오직 공업용으로만 사용될 수 있다. 이와 똑같은 제품이 값싸게 팔리는 멕시코로 수출되고 대중들은 너무나 가난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런 종류의 값싼 음식을 소비한다. quelbuleterol이 함유된 고기, 항생제가 과도하게 들어있는 닭고기, 우유 대체물 혹은 식물성 유장으로 만들어진 성장호르몬이 들어있는 우유도 똑같다. 거기에서 우리는 쓰레기, 찌꺼기, 유해한 화학성분들을 먹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고 고발하고 있지요.
물론 FTA가 좋은 점도 있지요. 단 당신이 상위 1%에 드는 사람이라면….
웹퇴(FTA)가 되면 외제차가 싸게 들어오고, 명품도 싸게 사게 되고, 의료시장 개방되면 수준높은 치료도 받을 수 있지요. 근데 그보다 중요한 건 세계 최고수준으로 개방된 한국이 모든 산업 특히 서비스 산업을 개방하고 전기 가스 수도 철도 민영화하면 식코에서 보는 것처럼 생활고 땜에 자살하는 서민들이 부지기수가 될거라는 점이지요. 대기업들은(삼성과 국민은행의 외국인 지분이 60%가 넘는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민영화된 공기업을 하나씩 꿰차고 떼돈을 벌겠지만….
근데 진짜 우리가 주권국가의 국민으로서 열받는 것은 투자자제소조항이지요.
미쿡기업이 한국에 투자했다가 손해보면 제3의 법정에 한국정부를 제소해서 손해배상을 해줘야 되는 조항인데요, 벡텔이 볼리비아에 투자했다가 공해 땜에 사업을 못하게 되자 볼리비아 정부를 제소해서 5억불(5,000억원) 뜯어가고, 캐나다 정부는 에틸사에게 패소해서 환경법안 철회하고 1,300만불 물어주고, 메틸클라드사는 독성폐기물을 못 묻게 한다고 소송해서 1,670만 달러 뜯어가고, 등등등 주권국가가 자국민을 위한 정책을 폈다가 개박살난 사례는 수없이 많지요.
작년에 놈현이 퍼준 FTA 4대 선결조건 생각나나요? FTA하기 전에 쇠고기/의약품/스크린쿼터/자동차 배기가스규제를 왕창 개방하라는 거였죠.
시방 아무리 쇠고기나 민영화 반대해도 FTA 한방이면 끝나버리죠. 행여나 한국국민들의 반대로 개방한 걸 물릴까봐, 한번 개방한 것은 물릴 수 없다는 역진방지조항(렛칫조항)까지 들어 있지요. 만약에 FTA 발효 후에 미국넘들이 한국에 병원짓고 땅투기하고, 공기업 사들였다가 국민들의 반대로 규제하고 못하게 만들면 미쿡넘들 손해본 거 다 물어주고도 규제를 못하게 된다는 것이죠. 이렇게 국가주권과 다수국민의 이익을 화끈하게 퍼주고도 FTA만이 살길이라고 개사기를 치고 있는 넘들이 바로 놈현과 무뇌아와 조중동이지요.
(이외에도 FTA 독소조항은 수없이 많은데 아고라에서 함 검색해 보세요.)
자 정리합시다.
1. 무뇌아는 즉각 방빼고(사퇴하고)
2. SRM이 완전 제거된 20개월 이하의 쇠고기만 수입한다는 재협상은 기본이고,
3. 국민의 정당한 항의를 군홧발로 짓밟은 어청수 등 폭력진압자들은 파면 구속하고,
4. 수도 전기 가스 철도 의료보험 등의 민영화는 절대로 안 되고,
5. 개사기 FTA도 즉각 폐기하고(국회는 비준동의안을 글자 하나 수정할 수 없고 단지 가부만 표결하게 되어있음),
6. 이제부터 국민의 뜻에 따르지 않는 넘들(대통령과 국회의원)은 언제든지 자를 수 있는 국민소환제(지자체장과 의원들에게는 이미 시행되고 있음)의 실시 등
이상 6개 조항을 민주시민의 최소요구로 내걸고 요번에 반드시 관철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중동문(문화일보)과 SBS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지긋지긋하게 말려죽이면 됨.
헌법이 보장한 정당한 저항권에 입각하여, 공공의 적들이 폭력을 행사하기 전까지는 비폭력으로 하되, 단 무저항이 아니라 적극적인 저항으로 국민을 배반한 쥐바기와 딴날당 수구꼴통을 끝장낼 때까지 투쟁!!!
87년 민주항쟁을 완성시킬 민주시민의 요구 6개항
1. 쥐바기는 물러나라.
2. 미친 소는 즉각 재협상하라.
3. 폭력진압자 파면구속하라.
4. 사회공공재 민영화 절대 반대한다.
5. 개사기 FTA비준안을 즉각 폐기하라.
6. 국민소환제 실시하라.
발표글 3
촛불과 우리의 과제(08.06.24.)
1. 촛불투쟁의 경과
여중생들로부터 시작된 촛불정국은 MB정부에 대한 대중의 거대한 저항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광우병 우려로 시작된 촛불은 수도와 의료 등 공공재와 공기업 민영화 반대와 언론장악(KBS, MBC, YTN 등) 시도 및 조중동 반대로 나아가고 있으며, 촛불을 든 첫날부터 100일도 안된 MB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명박퇴진의 구호가 나왔고, 며칠 전 특별회견에서는 대운하와 공기업민영화에 대한 (기만적인) 양보를 끌어내기도 했고, 지난 6.21. 추가협상 발표에도 불구하고 3-4만명의 시민이 광화문의 철야행동에서 강력한 항의와 저항을 보여줬습니다.
2. 촛불투쟁의 현 상황
지금까지의 성과만으로도 MB정부에 대하여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힌 것은 사실이고, 특히 대운하와 공공재의 민영화는 상당한 브레이크를 걸었다고도 봅니다.
그리고 여러 사회적 의제(공기업 민영화와 FTA 반대 등)는 점차 확대되고 있고 강해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지금까지의 투쟁을 보면 중고등 학생을 비롯한 시민들이 MBC와 경향, 한겨레 등의 언론과 아고라를 통해서 학습하고 투쟁하면서 아고리언을 비롯한 네티즌들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투쟁이 발전되어 왔고, 비폭력 절대론자들의 회의를 극복하고, 비폭력이면서도 완강한 저항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대책회의는 투쟁을 선도하고 리드하기보다는 의제를 축소하고, 시민들의 창조적인 투쟁을 억제하고 소부르주아적인 합법 혹은 준법투쟁을 강요하면서 관료적이고 무책임한 태도로 상당한 불신을 받으면서 항상 시민들보다 한 걸음 내지 두 걸음 뒤에서 투쟁을 억제하는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3. 전망과 과제
추가협상까지 구걸한 정부가 재협상을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난감한 일이고, 시민들 역시 광우병 우려의 완전한 해소없이 저항이 사그러들 것 같지가 않습니다. 결국 촛불의 규모는 약간 축소되더라도 완강하고 지루한 장기전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대중투쟁의 폭발 앞에서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었다는 자괴감을 표출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분명 이 투쟁을 키워가고 승리로 이끄는 데에 우리의 역할을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향후 정국에서의 의제는 민영화와 FTA비준이라고 생각되고, 특히 FTA비준안은 국민의 절반이 찬성하고 있고 야당마저도 2/3가 찬성하는 상황이라, 광우병 정국이 끝나면 곧바로 통과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남은 투쟁과정에서 FTA반대 여론과 투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참으로 중차대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국회의 절대다수가 보수에게 장악된 상황에서 명박퇴진이란 구호의 공허함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은 국민소환제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화물연대 투쟁에 대한 네티즌들의 지지에서 보듯, 이 투쟁은 보수언론에 의해 조성된 노동운동에 대한 불신(노동자와 시민의 이분법적인 사고)을 극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노동자들이 시민들의 투쟁에 선봉에 서서 투쟁을 엄호하고 앞장서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집단이기주의적인 투쟁이나 귀족노동자들의 투쟁이라는 불신을 극복하고 시민과 노동자의 통일로 나아가는 중요한 순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개별 사업장과 산별의 이해를 넘어서 신자유주의 매국정권에 대한 투쟁의 전선을 구축하는 것은 참으로 중대한 과제일 것입니다. 민노총이 선봉의 결의를 하고 매 투쟁마다 1,000명에서 3,000명의 대오를 촛불의 선봉대로 조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입니다. 물론 각목을 들 필요도 없이 맨손으로 아니면 촛불만 들고 시위에 앞장서고 시민과 함께 토론하면서 전투성을 보여주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대책위의 타협성을 극복하고 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별도의 비타협적인 운동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비타협성을 보여준 아고라와 안티 이명박을 포함하여 사유화 저지 공동행동 등이 함께하는 느슨한 연대체나 네트워크를 만들고 현장에서 긴밀히 서로 존중하고 토론하면서 투쟁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당면 투쟁에서 중요한 것은 기존의 투쟁처럼 일사불란한 투쟁이 아니라 모두가 주권자임을 자각한 즉 각성되고 결의에 찬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체로서 자주적이고 창조적으로 투쟁을 키워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정되지도 않는 권위를 가지고 이끌려는 투쟁이 아니라 대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밑받침하고 조력하려는 자세가 참으로 중요한 관건이라고 생각됩니다.
4. 결어: 과제
그러므로 현시기에 있어서 우리들의 과제는 대책위의 한계를 뛰어넘어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이 투쟁을 승리로 이끌 신망있는 대중적인 운동체를 만들어 내고, 이 투쟁을 반신자유주의 전선으로서 발전시키기 위하여, 특히 공기업 민영화를 포함한 반FTA 의제를 선전을 통하여 의제를 확대하고 심화시키는 것, 그리고 노동자들의 투쟁을 시민들의 촛불투쟁과 결합시키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당면구호는 이명박 퇴진/미친 소 재협상/폭력진압자의 처벌/사회공공재 민(사)영화 반대/FTA 반대/공영언론장악시도 철회와 조중동 반대/국민소환제 실시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족) 20일 시청 앞에서 사회주의OO신문에는 취지가 명백하지는 않으나 공권력 해체와 민주공화국을 뛰어 넘자면서 공권력 해체와 직접민주주의(소환제)를 어려운 말로 설명하는 대자보도 있었고, 사회화(국유화)가 대안이라는 모 조직의 유인물도 있었습니다.
이런 주제들이 항상적인 선전의 대상임은 부인할 수 없겠지만, 당면 현실에서 대중의 정서에 맞는 혹은 투쟁을 고취시키고 발전시키는 선전인가에 대해서는 저는 대단히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오늘도 아고라에는 대책위에 끌려다니다가 청와대 근처에도 못 간다면서 몇 사람만 낮에 모여서 돌파하자는 글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맨 먼저 촛불을 든 여중생이건, 코엑스의 개념녀건, 20일 날 친구들과 함께 청와대와 한나라당과 조중동을 방문하여 항의의 피켓을 든 촛불소녀들이건, 조중동 광고주들에게 매일 항의전화하고 대검과 경찰청 홈피에 나도 구속하라는 네티즌이건, 한나라당 의원에게 18원씩 입금하고 영수증 우송하라는 운동을 펴는 네티즌, 나아가 시위현장에 밧줄을 준비해오는 사람들이건, 혹은 커피와 김밥을 준비해오는 동호회원이건 간에 이 운동의 동력의 핵심은 자주적이고 창조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존의 관성을 과감하게 극복하고 그들과 정서를 공유하면서, 가르치고 이끌려는 입장이 아니라 모든 권위와 타성을 버리고 그들과 대등한 동지로서, 함께 토론하고 공유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발표글 4
모임취지와 운영방안 (08.07.18)
촛불 연행자들이 먼저 단결하자!
1. 뭉칩시다.
함께 연행되어 44시간동안 우정을 다졌던 동지들이 뜻을 모아서 이 카페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촛불의 순수한 정신을 가지고 뭉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여서 촛불의 승리와 이땅의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을 찾아봅시다. 우선 연행자들은 많이 가입해주시고, 다른 카페와 모임과 지속적으로 접촉하여, 하나의 모임으로 만들어 봅시다.
2. 적극 실천합시다.
움츠리지 말고 내가 아닌 누군가가 해줄 것이라는 방관자의 자세에서 벗어나, 내가 아니면 아무도 실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3. 민주적으로 합시다.
운영진은 머슴입니다. 앞장서는 사람은 아무런 특권이 없습니다. 회원의 뜻에 따라 헌신할 특권만 있습니다.
4. 사람을 찾습니다.
카페의 운영과 모임의 실무를 위해 헌신하실 분은 적극 나서 주십시오.
발표글 5
권태로운창님 그리고 연행자 동지들께…(08.08.05)
안녕하십니까?
저는 촛불연행자들의 모임 http://cafe.daum.net/candlearrested 에서 임시로 머슴을 맡고있는 서른즈음에입니다. (저희는 회원은 주인이고 운영진은 머슴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글은 개인자격으로 쓰는 글입니다.)
먼저 촛불의 승리를 위해 앞장서시는 창님께 열렬한 연대의 인사를 드리면서 아울러 저희 연행자들에게 보여주신 연대의 말씀에도 감사드립니다.
며칠전 창님께서는 시위와 관련하여 연행된 900여명이 넘는 분들은 반드시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면서… 대한민국 상식사전 아고라 책에 의한 수익금과 이외의 모금활동 등등을 통하여 이 분들이 짊어지게 될 벌금을 최대한 해결하도록 힘쓰겠다는 글을 올리셨더군요.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한편으로 고맙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론 부담스런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촛불은 모두 하나인데 저희가 왜 부담을 드려야 하는지…
얼마 전 떡찰이 연행자들에게 100-300만원의 벌금을 물리겠다는 개수작을 한 바 있었습니다. 정식재판만 청구해도 몇 십만 원으로 줄어들 뿐만 아니라, 검찰조서 작성과 1심, 2심을 거치면 최소한 6개월 후에나 부과될 것이 분명한데도, 이 시점에서 떡찰이 이런 발표를 한 이유는, 연행자들을 도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촛불에 참여하려는 시민들에 대한 위협이 목적임은 분명할 것입니다.
무려 석 달 동안 촛불 외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평화적인 시위에 대해 공권력을 빙자하여 군홧발과 방패, 물대포 등 온갖 범죄적인 불법행위를 멈추지 않는 견찰은 공권력을 빙자한 조폭에 불과할 것입니다.
저희는 이러한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와 남용에 대해 결코 좌시하지도 않을 것이고 용서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촛불을 든 것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듯이, 연행자들 또한 떡찰의 이러한 범죄적 도발에 대하여 결코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이길 것입니다. 우리가 모인 것은 벌금을 적게 내고 벌금을 깍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당한 공권력에 맞서서 무죄를 주장하고 쟁취하기 위해서입니다. 법정에 섰을 때 우리는 결코 온정을 구걸하지 않고 무죄를 쟁취하고 헌법정신을 관철할 것입니다.
끝으로 촛불이 줄어들고 견찰과 떡찰이 설치니까 위축된 마음에 저들의 횡포에 패배감을 느끼시는 동지들도 계시겠지만, 어떠한 폭압에도 넘들이 촛불을 끌 수 없고, 이 분노를 억압할 수 없다면, 쥐박이가 물러나기 전에는 이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우리가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면 결국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연행자 동지 여러분! 광주항쟁에서도 보았듯이 이기면 민주항쟁의 유공자이고 지면 폭도가 됩니다. 우리가 승리하면 다 끝나는데, 이기면 국가보상금까지 나올텐데, 왜 싸움이 끝나지도 않은 이 시점에서 우리가 벌금을 걱정합니까? 지금은 오직 촛불의 승리를 위해 더욱더 투쟁의 의지를 끌어올릴 때일 뿐입니다.
최후의 승리를 위해 끝까지 투쟁합시다!!! 투쟁!!!
발표글 6
회원 여러분께…(08.08.28)
또 대표의 독선으로 논란이 분분하군요. 송구합니다.
저는 이 글에서 저의 판단과 입장을 밝히고자 합니다. 굳이 저의 견해를 강요하거나 동조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논란의 발생지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대책회의에 대하여
저는 지난 4월말 촛불이 시작되던 날부터 촛불과 함께하면서, 촛불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첫날부터 명박퇴진이라는 구호가 나온 이래, 촛불이 거리로 나왔을 때에 단 한 번도 이 구호에 주저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 보았습니다. 5월과 6월이 지나도록, 대책회의는 단 한 번도 공식행사에서 명박퇴진이나 명박심판이란 구호를 외쳐본 적이 없습니다. 말만 1,800개 단체 운운하지 실제로 운영위회의에는 많아야 50여개의 단체가 참석해서, 명박퇴진을 구호로 내걸면 탈퇴하겠다고 무려 다섯 시간이나 협박하던 단체가 대부분이었습니다.
7월에 들어서 처음으로 명박심판이란 구호가 행사의 끝에 나왔었고, 행사가 끝나고 행진을 시작한 직후에 처음으로 대책위 마이크에서 이명박은 물러가라는 구호가 잠깐 나왔었습니다. 그러나 광화문으로 행진을 하려는 대중을 의도적으로 다른 곳으로 이끌거나, 차벽 앞의 촛불이 싸울 때에 도망가는 것은 거의 매일 보던 풍경이었고(단 하루만 약간 늦게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주말집회를 낮에 해야만 제대로 투쟁할 수 있다는 수많은 항의를 묵살하면서, 끝까지 밤7시 집회를 고집하여 수많은 비난을 받은 것은 여러분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7월 초 10만이 넘는 촛불이 모였을 때, 투쟁을 가로막고, 싸우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고 고립시키기 위하여 밤새 음악회를 계속하면서 온갖 수단을 다했었습니다. 그때 대책회의의 농간을 꾸짖는 저의 영상이 YTN에도 크게 보도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대책회의가 단 한 번도 촛불과 같은 구호를 외쳐본 적도 없고 투쟁을 같이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행여라도 투쟁을 할까 봐, 행여라도 투쟁이 커질까 봐 항상 방해하고 억제한 것만 보았을 뿐입니다.
결국 촛불을 뒷바라지 한 적은 있지만 촛불과 함께 투쟁을 함께한 조직도 아니고, 항상 촛불의 투쟁을 방해하던 조직이었고, 따라서 진정으로 촛불의 승리를 위해 투쟁한 조직이 아니라는 점에 대한 저의 판단은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할 수가 없는 확신입니다.
촛불이 저항이고 투쟁이라고 할 때, 진정으로 승리를 바라고 싸우는 집단도 아니면서, 촛불의 뒤에서 혹은 촛불의 옆에서 촛불의 위신과 명망만 챙기는 데 관심이 있는 조직이었다는 판단을 합니다.
저는 대책회의가 촛불을 뒷바라지 한 것에 대하여는 수고했다는 말을 할 수도 있겠으나, 촛불의 저항과 투쟁을 억제하고 방해하고 촛불을 결정적인 패배로 이끈 행동에 대해서는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즉 대책회의는 촛불이 아니라 촛불을 배반한 조직이라는 소신에 대하여 물러설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촛불이 시들자, 대책회의는 과거의 위신이 그리워서인지 여기저기 이러저러한 촛불과 연대를 하겠다면서 개입을 시작했고, 분란을 일으키고 있는 중입니다. 이 중에 저의 모임도 있습니다. 아마 저희와 연대하고 저희 이름으로 모금이라도 한다면 대중의 눈에는 그럴싸하게 보이고 모금함도 두툼해지겠지요.
그러나 어느 촛불조직이든 간에, 그 속에는 차벽 앞에서 싸웠거나 가투를 했던 동지들이 있고, 그들 대부분은 대책회의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을 가지고 있는 현실도 부인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대중으로부터 신망을 잃어버린 조직이 자신의 신망을 되찾기 위하여 또다시 촛불을 이용하고 편승하려는 현실에 대하여 저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고, 우리 모임에도 설령 저와 견해를 같이하는 동지가 많지 않을지라도 그분들은 대책위에 대해 분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이러한 판단이 당연하고 대다수의 회원들이 공감할 것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칠지만 단호한 조치와 입장을 표현한 바 있습니다.
견해의 차이와 극복에 대하여
지금 회원들 중에는 이러한 저의 의견에 공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지난번에 대책회의가 도움을 주겠다면서 자신들에게 합류해 줄 것을 제안한 적이 있었고, 제 개인 입장은 부정적이라고 했더니 전체의 의견을 물어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한동안 공지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들의 연락을 받고 제안의 내용을 알아본 바, 너무 허무맹랑해서 그 제안을 삭제키로 합의한 바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미 거절의 뜻을 명백히 밝혔는데도, 대책회의의 인권팀장은 저희에게 아무런 상의도 없이 자신에게 허용되지도 않은 게시판에 대책회의의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한 바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무례하고 뻔뻔한 사업방식과 작풍에 대하여 분노를 금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삭과 자퇴를 요청하고 듣지 않으면 강퇴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만약 우리가 대책회의와 손잡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가지고 논쟁한다면 우리는 분열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만약에 손을 잡겠다는 것이 다수의사로서 관철된다면, 저를 포함하여 대책회의를 지극히 싫어하는 사람은 이 조직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대책회의가 기웃거리고 관여하려고 하는 모든 촛불들은 대책회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불필요한 논쟁과 분란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것은 이미 대중의 평가 속에서 신망을 잃어버린 조직이 스스로 해소하기는커녕 순수함도 없이 옛 위신을 되찾고자 권위적으로 개입하기 때문에 촛불 속에 빚어지는 분란일 뿐입니다. 저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즉 다른 모임에 와서 변호사도 아닌 사람이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은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분노뿐만 아니라, 자기조직의 이기심 때문에 저희 모임을 포함한 여러 촛불 조직에 분란을 일으키고 있는 행위에 대한 분노를 금치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임의 현실에 대하여 그리고 침묵하는 다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공안견찰 등에 반대한다든지 혹은 뭉칩시다 싸웁시다 이깁시다는 우리 모임의 취지에 공감하여 가입하신 분들도 계시지만, 소극적으로 다가올 벌금 등에 대한 공동대응이나 법률적인 도움을 바라고 가입한 분들도 계시고 여러 사정으로 투쟁이나 카페 활동에 나서지 않고 침묵하시거나 아예 가입만 한 채 소속감도 없으신 분들도 상당히 많은 수를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카페에 결합하여 댓글이라도 다는 분은 10%도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분들 중 상당수는 대단히 투쟁적이라는 것도 잘 아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침묵하는 다수와 투쟁적인 소수가 함께하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비록 앞장은 서지 못하더라도 앞에서 투쟁하는 사람에게 박수치고 지지하는 사람 심지어 침묵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모임에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투쟁을 하는 사람이 소수일지라도 투쟁을 안 하는 조직으로 하자든지, 혹은 투쟁을 비난하고 방해한다면 그분들은 이 조직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조직을 깨지 않는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투쟁하는 사람도 당당히 함께할 수 있을 때 이 조직은 깨지지 않고 또 존재가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체성에는 형식적 다수결은 의미가 없습니다. 소수가 함께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대책회의를 혐오하는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길은 대책회의에 대한 분란이 없어지는 것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이 점에도 형식적 다수결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면 대책회의와 함께하겠다고 하는 순간 그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는 소수는 이 모임을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 대한 고려 때문에 저는 우리 모임의 정체성과 계속성을 위하여 다수결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개인적 분노를 참을 수 없었기에 거칠은 독단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조직을 깨지 않기 위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분란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부득이 의사수렴의 번개를 제안드린 것입니다. 오늘 중으로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어차피 의견을 수렴해도 전 회원의 10%는커녕 5% 남짓이기도 하지만 방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모임의 정체성을 지키고 조직을 깨지 않기 위해서는 논의에 부쳐서도 안 되는 사안이 이미 분란이 되고 있기 때문에, 부득이 의사수렴을 통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밝히면서 거듭 저의 무능력과 독선에 대하여 사과를 드리는 바입니다.
서른즈음에 올림.
(여러분들의 의견을 댓글로 취합하겠으니 많이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발표글 7
촛불 그리고 촛불정신(08.09.05)
1. 촛불은 무엇인가?
번개 때, 처음 만난 사람들이지만 얘기는 한없이 즐겁고 함께하고 싶은 까닭은 무엇인가?
4달이 넘도록 KBS 앞에서 촛불을 들고 날을 새우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100여 일 동안 함께 외쳤던 촛불은 누구이고, 위험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가투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왜 우리는 촛불을 들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서 저항하고 있는가? 이 투쟁을 이끄는 힘은 무엇인가?
아마 맨 처음엔 제 나라 국민들에게 미친 소를 못 먹여서 환장한 놈들이 국민을 속이는 것도 모자라 방패로 찍고 군홧발로 밟아서라도 먹이려는 정권에 대한 분노였겠지요.
그 분노와 불신은 미친 교육, 민영화, 뉴라이트, 조중동, 딴나라당에 대한 분노로 커져갔고 의제는 어디까지 확장될지 우리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단지 이들 한 무리의 세력들의 말도 안 되는 처사에 대한 분노만이 우리를 이렇게 끈질기게 이끌어 온 힘일까요?
저는 우리가 비록 확실히 느끼지는 못할지라도 단지 분노만이 혹은 우리가 정당하다는 확신만이 우리를 여기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촛불을 들게 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학생과 시민과 임신부를 칼과 총으로 학살하는 것에 분노하여 일어선 시민군이 진압당한 후에 즉 분노와 슬픔은 남아 있지만 더 이상 저항을 계속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즉 촛불에는 불의에 대한 분노 외의 그 무언가가 촛불 속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어떤 사람은 날마다 KBS에 가서 밤을 새우고, 어떤 사람은 자기 돈으로 전단지를 만들어 뿌리는 걸까요?
저는 이 모든 저항이 자기실현의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쟁사회에 찌들은 소시민으로서 더 많이 가져야 되고, 더 높이 올라가야 되고, 단지 나와 내 가족만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했던 무기력이 세뇌된 인간들이, 처음으로 국가권력과 한줌의 세력들이 자신의 삶을 유린하고 부정하는 것을 깨우치고, 평화로운 촛불에 동참하면서 자신의 작은 실천이 유의미하고 역사를 바꾸는 힘이 된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실천 속에서 처음으로 내가 아닌 내 이웃과 공동체를 위한 실천 속에서 자아의 해방을 맛본 것입니다. 그 순간 존재의 합일화 즉 나와 남이 아니라 우리라는 합일화의 과정을 통해서 소외된 자아가 해방된 기쁨과 희열을 맛본 것입니다.
새문안 교회에서 버스를 끌어내기 위해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밧줄을 당길 때, 물을 가져오는 사람, 부채를 부쳐주는 사람, 떡을 가져 오는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인생에 처음으로 정말 순수하고 정당한 열정 속에서 이름모를 사람들과 함께하는 희열! 권위적이고 경쟁적이고 이기적인 사회 속의 왜소하고 고립된 소아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타자와의 합일화를 통한 희열과 행복감을 맛본 것이고, 그 속에서 의미있는 자아를 실현하면서 기왕에 쫓기듯 찌들어 살아왔던 소아가 무의미해지고, 매일의 작은 실천이 주는 자아실현의 행복에 빠져든 것이 아닐는지….
나와 내 주변이 모두 순수한 열정과 분노 속에서 함께하고 있다는 것, 나도 그 속에서 존재의 해방감을 느끼면서 행복하다는 것, 바로 이 행복감과 해방감의 경험이 너무나 좋고(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의 본성에 합치하니까), 그 행복을 유린하는 권력이 너무나 밉고 용서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인류가 억압과 피억압의 역사를 시작한 이래 이처럼 뜨겁고 순수한 열정으로 희열과 행복을 느낀 경험이 거의 없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4.19 때 이승만을 쫒아 낸 기쁨이 우리에게 비할 수 있을까요?
도로에 나선 당당하고 수많은 촛불 속에서 느끼는 해방감과 수많은 사람과 함께하고 있다는 다시 말하여 나와 내 옆 사람이 우리가 되어 서로 사랑으로 묶여가는 희열, 무의식 속에 잠재되었던 두려움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해방된 자아를 향해 나아가는 환희. 이 모든 해방감과 희열과 환희가 바로 촛불이 느끼는 행복감과 일체감의 근원인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가 처음으로 만나면서도 함께한다는 마음과 순수한 열정으로 하나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서로에게 엔도르핀을 주는 즉 인간의 본성에 합치하는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2. 광장민주주의에 대하여
저는 촛불은 본질에 있어서 집단지성이 이끄는 광장민주주의이고 직접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국가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택하고 있고, 국민은 말로만 주권자일 뿐 선거 때만 주권을 행사하고 평소에는 국가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습니다.
주인인 국민을 주권자가 아니라 유권자로 보는 것이 이 체제의 비극의 시작인 것입니다.
고대의 아고라 후의 직접민주주의는 1871년 파리코뮌 때였습니다. 당연하게 봉기군들은 스스로의 대표를 뽑고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었고, 함께 모여서 결정하고 함께 실천하고 투쟁했습니다. 앞장서는 사람에게 어떠한 특권도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직접민주주의이고 광장의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100일간의 촛불 내내 우리가 위대했던 것은, 사이비인 대책위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우리에게 명령하고 지도하는 권위를 가진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모두가 주인이 되어 토론하고 결정하고 실천하고 함께 투쟁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촛불정신이 광장민주주의이고 직접민주주의의 구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어느 조직이든 대표자와 운영진을 뽑고 그들에게 결정과 집행을 맡깁니다. 심지어 작은 계모임도 그렇고 작은 동창회도 그렇습니다. 조직이 크면 클수록 그 성원은 조직의 주인자리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으로, 저는 우리 조직이 촛불정신에 투철하기 위해서는 구태의연한 우리 주위의 조직처럼 회장을 뽑고 총무를 뽑고 그들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모두가 주인으로서 동등하게 참여하는 새로운 직접민주주의의 틀을 구현해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운영의 편의상 대표와 머슴단을 두되, 모든 일은 언제든지 함께 모여 결정하고 실천하자는 취지에서 모임의 기본운영방침과 틀을 제시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대표와 운영진에게 맡길 때 회원들은 수동적으로 되고 소외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까닭으로 머슴단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고, 모든 종류의 회의에 가령 운영진 회의에도 모든 정회원이 마음대로 참석하여 동등하게 토론하고 결정할 수 있는 개방적인 운영을 하려고 해왔던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결정에서 최대한 모두에게 개방하여 함께하는 것이 촛불정신에 합치할 것입니다.
3. 우리들의 언어에 대하여
먼저 저는 촛불은 미친 소 미친 교육이라는 말도 안 되는 억지와 부당함에 대한 항의에서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법연행, 공포분위기 조성 등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공권력을 빙자한 조폭들의 폭압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저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모임에는 앞서는 사람도 있고 뒤쳐지는 사람도 있고, 시위도 마찬가지고 저희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100일간의 촛불이 위대했던 것은 불의를 두려워하지 않고 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폭압이 아무리 심할지라도 저항을 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기가 옳다는 정당성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명칭은 존재를 규정지우는 것이고, 안티2mb나 민처협이나, 평화행동단처럼 그 조직의 지향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우리 모임의 수식구는 그러한 저항의 지향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친목을 위주로 하는 ‘연행자모임’, 그리고 벌금 등의 공동대응을 위주로 하는 가령 ‘민변과 함께하는 연행자 모임’, 마지막으로 부당한 공권력과 공안탄압에 저항하는 ‘공안견찰과 정치떡찰에 반대하는 연행자 모임’이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 구성원의 성향이 변하여 친목 위주의 모임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친목 위주냐 자구 위주냐 아니면 저항 위주냐의 문제에 있어서 주로 저항 위주의 동지들이 앞장서고 있고 자구 위주를 바라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물론 저항 위주라고 할지라도 조직의 계속성과 투쟁의 지속성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므로 합법의 틀 내에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대다수의 성원이 동의해야 하기 때문에 낮은 강도의 저항부터 시작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구만 할 것이냐 아니면 저항도 할 것이냐의 차이는 촛불을 계속할 것인지 아닌지의 차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점에서 우리가 촛불이었다가 아니라 촛불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한다면, 우리 존재의 가치는 부당한 공권력에 대한 저항과 촛불 승리를 위한 투쟁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작고 낮은 실천일지라도 저항을 멈추지 않는 것이 우리 존재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항의 출발은 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놈들의 협박에 위축되어 스스로 정당하고 당당한 언어를 자기검열하는 것이야말로 촛불인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 스스로의 정당함을 확신하고 나아가기 위하여 당당하고 정당한 우리의 언어를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사파티스타의 부사령관인 마르코스가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무기(Our word is our weapon)’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나는 동지들이 우리들의 정당한 언어이자 무기인, 공안견찰, 정치떡찰, 공안탄압에 대한 저항의 표현을 결코 스스로 먼저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결국 저항과 투쟁이란 두려움을 극복하고 우리의 언어를 당당하게 되찾는 과정인 것입니다.
4. 촛불은 이름없는 촛불이고 실천하는 촛불이어야 한다.
저는 촛불이라면 우리의 뇌리에 박혀 있는 모든 종류의 비민주적이고 반인간적이고 차별적인 권위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누군가가 이 사회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무슨 지위에 있든 간에, 촛불 속에서는 단지 순수함과 열정과 도덕만으로 판단된다는 것입니다.
촛불 속에는 기왕에 유명하고 명망있는 사람도 있고, 국회의원도 있겠지만, 직접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은 모든 종류의 권위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짜르 치하에서 반란을 일으킨 병사 소비에트(평의회)처럼 해방된 공간에서는 계급도 필요없고 단지 전제정치에 투쟁하는 동지애만 인정되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광주항쟁 때 도청에 모였던 시민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택시운전을 하던 사람이 사령관이 되고, 고등학생도 당당히 총을 들고 회의에 참가하여 발언하고 자신과 관련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87년 세대나 386이 과거에 한때 순수했을지라도 기존의 권위에 굴복하고 물드는 순간 그들은 순수함을 잃고 단지 과거의 명망을 자산으로 삼아 기존의 권위에 편입되었지만, 촛불은 집단지성의 힘으로 순수함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순수한 정열로 남기 위해선 끝까지 억압적인 사회 속에서 형성된 복종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때문에 무슨 명망과 권위를 내세울 때 그는 이미 촛불정신과는 먼 사람과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촛불 정신만이 21세기의 인류가 실천하고 이루어 갈 기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끝까지 이름없는 하나의 촛불로서 저항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발표글 8
촛불과 변혁운동(08.09.25.)
(발제요청에 부응하기 어려워서 주로 제 경험과 생각을 두서없이 편하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1. 촛불은 무엇인가
촛불은 무엇보다도 저항이라고 생각함. 부당함에 대한 분노와 정의에 기초한 순수한 열정의 자발적이고 집단적인 저항으로 규정할 수 있음. 무도한 공권력에 대한 도덕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우월성을 확신한 개미떼들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음. 또한 자기 정의를 확신하고, 옳다고 믿는 자신부터 먼저 실천하는 순수한 헌신이고 열정이라고도 할 수 있음. 이러한 촛불은 집단지성이고 그 자체에 기존의 허구적 권위를 용인하지 않는 광장 민주주의=평의회 민주주의를 내재화하고 있다고 보여짐.
2. 아날로그 운동권이 느끼는 당혹감의 실체
변혁을 꿈꾸어 왔던 기왕의 운동권들이 거대한 촛불과 맞부딪쳤을 때 느껴지는 당혹감의 정체는 무엇인가?
도대체 이들은 어떻게 동원된 것이고, 이처럼 훌륭한 실천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정치적 훈련이나 정치의식은 낮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해서 그들은 정확하게 자기의 방향을 잃지 않고 세련되게 싸우는 것인가?
<몇 가지 사례>
_투쟁의 전반기 5-7월까지
5월의 어느 날 시청광장에는 미친 소 복장을 입은 여성이 있었음. 독도문제가 나온 이후 몇 달 동안이나 계속 일본대사관 앞에서 1인시위를 하는 여성이 있었음. 조중동의 왜곡보도가 노골화되자 광고주에 전화를 걸자라는 선동이 아고라에 떴고, 이를 실천하는 개미떼들이 있었음. 이 운동은 지난 8/30 언소주로 발전되었음. 청와대에 가려는 노력이 번번이 차벽에 막히자 어디선가 밧줄을 준비해온 사람들이 있었음. 광화문에서 밤을 새면 어디선가 음료수와 먹을 것을 준비해 온 사람들이 있었음. 촛불다방이 생겨났음. 유모차 부대가 나왔음. 예비군과 의료진이 나왔음.
_투쟁의 후반기 7-9월까지
주말마다 가투를 공지하는 권태로운창, 8.15 평화행동단(연행자원 연좌조직), 가투나 집회를 책임지고 선동하고 이끄는 전대협, 촛불승리 시민연대, 강남아고라, 관악 아고라, 경기 수원 아고라의 실천. 날마다 명동에서 뉴라이트 비판 홍보물을 돌리는 사람들(안티 2MB와 민처협). 부산이나 의정부에서 경향과 한겨레신문을 돌리는 사람들. KBS, YTN, 조계사, 서울대 병원에서 몇 달째 노숙을 하면서 촛불을 드는 폐인들이 나왔음.
이들을 관통하는 것은 자기가 옳다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지성이라는 점임. 이것은 기존 운동권의 조직적 사업과 같은 관성이 아니라, 인터넷상의 이용과 소통의 행위가 그 자체에서 주어지는 평등함과 자발적인 개인의 의지라는 특성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음, 즉 네티즌은 기존 운동처럼 조직적인 틀을 통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지성에 합류하는 데에는 개별적 확신만으로 족하다는 점임.
그리고 이것은 눈팅족도 있고, 키보드 워리어도 있지만, 다중 가운데는 실천에 옮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설득력있는 행동방안을 냈을 때, 이를 공감하고 따라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동일한 실천의지를 갖는 사람들이 카페를 결성했을 땐, 토론을 통해서 더 나은 방법론을 찾아 실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음.
나아가 기존의 운동권처럼 전략전술 혹은 기획목표와 실천방안을 먼저 고민하는 방식으로는 나올 수 없는, 혹은 그러한 사고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무모하다고 할만한 실천이 있음. 몇 달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저녁이면 KBS에 출근하여 날을 새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회칼테러가 났다고 했을 때 함께해야 된다면서 서울대 병원의 주차장에서 몇날 며칠을 밤을 새는 사람들이 있음.
성과 혹은 승리에 대한 전망이 아니라 그냥 분노와 공감 혹은 동참으로 족하고 그 이상 바라지 않는 사고방식이 있음.
이것은 운동권에서는 하나의 전투에서 동력과 전술을 고민하는 데 익숙하지만, 네티즌은 처음부터 집단에 소속된 개인이 아니라 그냥 다중 속의 일인으로서 자기의지만으로 자기행위를 결정해온 관성 때문에, 자기가 참여한 거대한 물결을 지도하는 그룹이 있다거나 누군가의 지휘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병사가 아니라, 자기와 같은 생각과 참여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얼마나 될지 어떤 결과를 낳을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단지 옳고 정당하다는 자각만 있으면 실천에 옮기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사고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듦.
아무튼 당신이 만약 조계사에 갔을 때, 그저 아무 말없이 촛불을 켜고 앉아 있는 사람을 봤을 때, 조직운동을 한 사람은 한두 시간 같이 할 수 있겠지만 날을 새야겠다 오늘만이 아니라 낼이고 모레고 날을 새야겠다는 사고는 결코 나올 수가 없고, 이것이 촛불 혹은 촛불폐인과 운동권과의 사고방식의 결정적인 차이라는 생각이 듦.
그러나 이러한 무모하다고 보여지는 실천이 거대한 물결을 이룰 때 개미떼는 태산을 움직이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이고, 수많은 개미 중엔 참으로 발랄하고 창조적이고 실천적인 지성이 있게 마련이고 그 실천이 보편성을 가질 때엔 즉 모범이 되었을 땐 즉각 따라하고 함께 한다는 것임.
결국 변혁을 꿈꾸는 운동가들은 완벽한 계획에 집착하지만, 역사의 전진은 결국 대중의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참여로만 가능하다고 할 때(즉 태산을 옮기는 것은 소수의 정예화된 계획이 아니라 무수한 이름모를 개미떼들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솟아오를 때만 가능하다고 하면), 즉 중앙집권적이 아니라 혹은 민주집중제가 아니라 평의회가 광범위하게 확산 성장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고, 이것은 권위와 우월성을 가지고 개입하고 지도하고 리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면서 공감을 이끌어 내는 방식이어야 하고, 바로 이것이 21세기형 변혁모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음.
3. 아고라의 변화
쌍방향 토론매체인 아고라의 특성은, 정치의식과 사회적 의식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모두가 가지고 있는 상식과 도덕, 정의감에 기초하여, 설득력있는 비판과 대안을 올렸을 때, 자기 지식과 확신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정보교환의 장에서 점차 분노의 표출의 장이자 학습의 장에서 실천을 고민하고 실천을 선동하고 조직하는 장으로 바뀌고, 반응하는 다중을 행동으로 이끄는 매개고리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음.
기왕의 카페. 82쿡이나 소울드레서가 소시민의 카페에서, 실천에 참여하는 카페가 된 것은, 광우병이라는 사안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억지라는 분노 즉 완벽한 자기확신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즉 시작은 분노였지만, 점차 그것은 자기 해방의 희열을 주었다는 것과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권력의 억압 앞에 분노와 상처로 바뀌면서 권력의 본질에 대한 자각과 저항의식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줌.
아고라를 통해서 혹은 시위현장을 통해서, 동일한 경험과 지향을 공유한 사람들이 카페를 만들어 내고, 좀더 동질적인 목적의식―이명박타도―을 가지고 새로운 카페로 결합했다는 것. 안티2MB, 민족반역자처단협의회(둘 다 촛불이전부터 있었지만 촛불 이후에 본격화했음) 언소주(언론소비자주권운동) 등등, 10대연합카페, 촛불자동차연합, 8.15평화행동단, 촛불승리시민행동, 그리고 강남, 관악, 은평, 강서 경기 등등의 지역 촛불모임카페.
이 메커니즘을 보면 신문에 삽입되는 전단지의 반응도가 10만장에 2-300명 즉 0.2~0.3%라고 할 때, 가령 조중동 광고주에 전화하자는 글에 대하여 아고라 방문객 80만중 800명이 반응하고 실천했다면, 대강 0.1%의 반응을 보인 것이고, 아고라의 무수한 방문객 중 행동과 실천을 선동 또는 공지하는 좋은 글에 대하여 반응하는 사람들을 점차 실천과 동원을 통한 순도를 높여 조직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 카페는 이 0.1%만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함. 나아가 대부분의 카페의 참여율이 10% 정도라면 그리고 이들 0.01%가 모여서 10,000명의 투사를 만들어 냈다면 참으로 능률적인 구조라고 아니할 수 없음.
4. 촛불 승리와 과제
이제 촛불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고양기를 준비해야 하는 버전2를 고민할 시점이지만, 변혁운동의 입장에서는 의제를 심화시키고 확장시키면서 기왕의 촛불을 단련시키고 고양시켜 새로운 결전을 준비해야 할 고민의 시점이기도 함.
예를 들어, 수원촛불은 매일 수원역 앞에서 100여명이 촛불을 들고 있는 바, 서울처럼 단지 뉴라이트 반대나 회칼테러 반대의 홍보전만 하는 게 아니라, 매주 주제를 바꿔가면서 홍보전을 하고 있고, 여기에 비정규 노조나 공무원노조 경기지부 등이 함께 참여하여 노동과 촛불이 교류하면서 하나되는 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큼.
기륭 역시 네티즌 연대를 통하여 많은 공감을 일으켜 낸 바 있고, 비정규 없는 세상 10,000인 선언에도 대략 80%는 노동 쪽이 아닌 촛불이었다고 생각해 보면, 사회정의와 약자에 대하여 공감하고 반응한다는 점도 있고, 한편으론 촛불이 외롭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듦.
중요한 것은 촛불은 과거의 아날로그적으로 단절된 무기력한 개인들이 여론과 정보를 독점했던 구래의 통치자들에 대하여, 21세기의 쌍방향 인터넷 소통 웹2.0이란 공간을 통해서 이러한 지식과 정보의 독점을 무너뜨리고, 집단적이고 자발적으로 학습을 시작하고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집단지성과 자유로운 의지의 발로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임.
즉 넷상에서의 자유로운 참여는 억제되지 않은 실천욕구가 그 배경이기도 하다는 점이고, 나아가 선전과 교육과 조직이 아날로그적 현장만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능률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 있음.
이 모든 과정에의 참여가 순수히 개인의 자발적 의사에 기초하고 아무런 기성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6/25. 국민토성의 토론에서 보는 것처럼 광장의 민주주의 나아가 혁명적 직접민주주의의 즉 평의회의 정신을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즉 넷상의 광장민주주의는 계급억압적 부르주아 독재와는 친하기 어렵다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가올 평등세상의 평의회 민주주의에 연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음.
이런 점에서 이러한 광장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의 정신과 실험을 촛불의 자주적 조직에서 확장시키고 관철시켜 나갈 필요가 있음. 참고로 연행자모임에서는 아예 촛불 정신을 광장 직접민주주의라고 규정하고 헌신할 의무 외에 아무런 특권이 없는 머슴단을 언제든지 선출하고 소환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기존의 조직과는 다른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는 중임.
현단계 촛불들은 단지 온라인 카페만이 아니라 오프상의 직접 실천을 통해서 스스로 단련시키고 있는 바, 즉 아고라와 카페를 소통과 전달 선전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넷상의 연결이 실천으로 혹은 직접 행동으로 전화하면서 인터넷을 활용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므로, 촛불과 필드에서 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임.
노동자 촛불 실천단이든, 혹은 단위노조의 결의에 의해서이든 간에, 노동자가 한 개인으로 촛불과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노동자로서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촛불과 결합하는 것은 현단계 운동의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임.
촛불 혹은 시민은 사회와 정치와 문화 그리고 소비의 영역에서 추상되는 것이라면, 노동은 생산과정에서 추상되는 것인 바, 시민과 노동자가 이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의식을 심화시킬 때 하나로 나갈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봤을 때,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노동자가 기왕의 촛불과 경험과 정서를 공유하면서 촛불을 확대 심화시킬 수 있다고 할 것임.
굳이 현단계의 촛불을 사회과학적인 틀로 규정하자면 10대부터 50대까지 참으로 다양한 세대와 생업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하여 장기간의 일관된 저항을 굽히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평범한 소시민이 사회진보를 꿈꾸는 급진적 소시민으로 단련되어간 과정이라고 본다면, 프랑스혁명기의 자코방과 같은 급진적 민주주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고, 비록 현단계에서 민족주의 등 경계해야 할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의료민영화나 수도민영화에 날선 반응을 보인 것처럼, 20대 80의 신자유주의적인 공세에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면, 향후의 한국의 변혁운동은 이들 촛불을 어떻게 고양시키고 단련시켜 나가느냐에 성패가 달려있다고 볼 수 있음. 바로 이 점에서 촛불과 결합하여 하나가 되어 진정한 변혁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자는 슬로건을 채택할 필요가 있는 것임. 즉 촛불과 하나 되어 촛불을 키워낼 때에만 변혁운동은 승리의 전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혁명적 군중을 혁명적 대중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운동의 책무임.
5. 몇가지 우려
다음 카페는 대단히 중앙집중적이고 권위적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즉 카페지기의 1인독재체제로 설계되어 있음) 현단계는 자발적 참여로 유지되고 있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민주적 자각이 부족할 때는 운영에서 부정적 요소가 나올 수 있다는 점과, 참여자의 50% 이상이 통일지상주의가 왕성하던 시기를 겪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민족주의 운동세력에 대한 경계가 부족하다는 점과, 민족주의 세력이 헤게모니의 관철을 위해 당장에라도 단일연대체 등을 제안하면서 촛불들의 자주적인 조직과 운동을 개입하고 포섭하려는 시도를 노골적으로 보이고 있는 바, 이 점이 촛불의 승화에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는 현실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음.
예로 진보연대와 참여연대가 주축이 된 상층명망가 중심의 단일연대체를 제안하면서 10/25 민주주의 페스티발을 제출하고 있는 바, 촛불조직에 연대를 제안한 취지문에는, ‘촛불은 대규모집회와 거리투쟁’만을 고집함으로써 일반 국민들로부터 고립되고 위축되었기 때문에 ‘국민 모두가 편안하게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축제가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왕의 ‘안기부와 함께하는 통일축제’라든지,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류의 이벤트 운동으로 자기 존재의 명맥과 위상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음.
이 문제를 돌파하는 데는 관점있는 변혁세력이 촛불과 적극 결합하는 길 외에 없다고 할 것임. 일부에선 단일연대체에 대응하여 촛불자주조직과 상층연대사업을 하면 어떻겠는가라는 고민이 제기되고 있기도 함. 권위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검증 속에서 쌓여지는 것이라면 기륭을 통해 성장한 네티즌 연대와 같은 모델을 만들거나 혹은 확장하여 촛불의 언어로 낮은 단계의 실천을 해보는 게 어떤가라는 의견도 있음. 어쨌거나 지역별 촛불이건 의제별 촛불이던 간에 변혁세력은 알몸으로 이들과 결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함.
첨부: 촛불(폐인?)의 분석과 의제(타 발제문과 동일내용임)
촛불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중고등학생부터 직장인 자영업자까지 매우 다양하고, 30대 후반 이후의 사람들은 과거에 시위나 운동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 많지만, 노동자들의 참여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음. 초반에 운수노조가 조직적으로 참여하여 지지를 받은 것과 기륭전자가 최근에 관심을 끌고 있기는 하지만, 노동과 자본의 투쟁의 성격은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시위현장에서도 노동자들의 참여는 매우 적은 것으로 보임. 특이한 점은 시위가 장기화될수록 70% 이상이 싱글인 것 같음.
격렬한 투쟁이 소멸된 지금에도, KBS, YTN, 조계사, 서울대병원에는 지금도 밤을 지새우는 촛불들이 있음(대략 200명 정도). 그들 대부분은 지난 6월이나 7월 이후 날마다 밤을 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주말마다 날을 새는 사람도 많음. 역시나 수많은 각 촛불카페에도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음. 이 사람들의 의지는 단순한 활동가가 아니라 혁명가적인―정권의 타도를 바라는 측면에서―의지를 보이고 있음. 이 점에서 자신과 같은 촛불로 확인될 때까지는 새로운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매우 큼.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촛불에 집착하게 만들고 심지어 생업과 건강을 포기하면서까지 촛불을 들게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는, 무엇보다도 이 정권에 대한 분노와 상처 나아가 생업과 경쟁에 내몰리던 소시민의 삶에서 자기헌신이 주는 존재의 해방감과 희열이 아니겠는가 생각함.
이들의 정치의식은 천차만별이지만, 최소한 촛불이 정당하다는 것, 자신들은 순수하다는 것, 자기희생과 실천을 하고 있다는 점 등이 강한 동지적 결속력으로 작용하고 있고, 앞으로도 두고두고 우리 변혁 운동에서 촛불항쟁에 참여한 경험의 공유는 강한 결속력과 영향력을 가질 것으로 사료됨. 즉 한국의 변혁운동은 이들을 성장시키는 데 성패가 달려있다고 볼 수 있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네티즌들이 키보드 워리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창조적으로 자신이 확신한 것을 곧바로 실천한다는 것임. (특히 20대와 30대 초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임.) 자기가 옳다고 믿으면 혼자라도 실천에 나서려고 한다는 이 사실이 옳다고 믿으면서도 방관하는 수동적인 기존 운동세력과는 다른 점임.
이미 5월 말부터 촛불의 주적은 이명박, 한나라당, 조중동, 뉴라이트로 규정이 되어있음.
이 규정은 크게 볼 때 자유주의적인 민주 대 반민주의 모습 속에 반신자유주의전선의 초기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음. 그동안의 의제를 보면, 대운하반대, 의료 수도 전기 등의 민영화 반대, 언론장악반대, 왜곡보도를 일삼고 특권층만 비호하는 조중동 반대, 친일파 뉴라이트 반대, 어청수퇴진으로 표현되는 공안탄압과 반민주에 대한 반대가 주를 이루어 왔다고 할 수 있고, FTA 반대는 아직 굳건하다고 할 수 없고 노무현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노빠들도 상당수 대략 10% (초기의 30% 정도에서 세력이 많이 약화됨)가 활약하고 있음. 노빠들은 최근 민주주의 2.0으로 결합하고 있음. 80-90학번(30대 후반부터)들이 주로 통일지상 민족주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까닭과 그들이 각 카페의 중추를 이룬 곳에서는 진보적 변혁적 투쟁에 일정하게 장애가 되고 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반대와 이명박퇴진도 제대로 못 외치는 반독재 국민전선의 허구를 지속적으로 깰 필요가 있음.
이명박정권으로 표상되는 특권층의 신자유주의적 공세의 본질을 폭로하는 데에 있어서, 대책회의의 두 구성원인 통일민족지상주의의 진보연대와 불철저한 자유주의 세력인 참여연대 그리고 노빠가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음.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가장 큰 희생자는 비정규직과 도시빈민이라고 할 때, 관념적으론 이들이 주력이 되어 앞장서야 되지만 이들의 처지는 정보에 취약하고 계급적 의식보다는 가족주의와 개인주의, 수동적 방관적인 처지로 인해 이들이 나서는 데에는 많은 제약이 있고, 결국 현 단계에서는 정치투쟁을 경험한 자각과 헌신으로 무장한 소시민들이 선도하고 있다고 볼 때, 앞으로도 상당기간 이런 현실은 계속될 것으로 보임.
이와 같은 상황에서 촛불을 기존운동의 틀이나 관념으로 이해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고, 촛불은 그냥 촛불로서 이해되고 실천될 필요가 있음.
즉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맑스의 명제는 훨씬 더 규모가 큰 역사적 변혁 속에서 현상적으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관철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됨.
발표글 9
총회 참관기(08.09.29)
지난 주 금욜 8.15 평화행동단 총회에 다녀왔습니다.
8.15 행동단은 군화발로 짓이기고 방패로 찍어내고 색소포를 쏘아댈 때, 민주주의와 촛불 승리를 위해서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연행이 되어도 풀려나면 다시 연좌하여 명박독재의 끝을 보겠다고 결의하신 분들이 모인 조직입니다.
그러니 제가 이분들을 뵈면 어찌 존경심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평화행동단의 많은 분들이 연행자이시고, 저희 회원이기도 하셔서 제가 닉만 말하고 우리 모임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도 모두가 사랑으로 넘치시는 분들이라 저를 형제처럼 맞아주셔서 부끄럽기 그지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총회를 참관한 소감은 제게는 큰 행운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얼마전에 우리도 총회를 한 적이 있어서 맘속으로 비교를 하면서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느라, 집에 돌아온 후에도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제게 특히 인상적이었고 제가 잠 못이루고 고민했던 것 몇가지만 적어 보겠습니다.
우선 저희만큼이나 많이 모이신 단원(평화행동단은 단원이라함)들이 빙 둘러앉아 회의를 하는 것이 몹시 좋았습니다. 저희처럼 의장이나 사회자가 다른 회원들을 마주 보고 앉는 구조는 사실 광장의 직접민주주의라기보다는 집행부나 지도부를 인정하는 대의민주주의 방식이라 볼 때, 광장민주주의는 착석 방식부터 원형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겠지요.
즉 집행부나 지도부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절차적 권위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동일한 권리를 갖는 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선, 나아가 헌신할 의무 외에 아무런 특권도 인정되지 않는 머슴봉사단을 둔다는 우리 취지에 비추어 보면, 혹은 가투시에 전대협 분들이 보안을 위하여 깃발들만 소집하여 상황을 공유하고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방식이나, 국민토성을 쌓을 때에 누구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지루한 토론 끝에 합의를 도출해 내는 것이 광장의 민주주의라고 하면, 우리도 말로만이 아니라 좀더 깊은 고민이 필요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직접민주주의 한번 제대로 해보자고 했으면서도, 사실 우리들이 그동안 겪었던 모든 조직형태가 권위주의적이고 위계적이었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없으면 우리의 이상과는 다른 행동을 하면서도 별 문제의식을 못 가지고 비민주적 행동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 위험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머슴단은 회의체로 운영한다고 규정했다면, 머슴단은 집행부나 지도부가 아닌 의사수렴에 봉사하는 기구여야겠지만, 만약에 머슴단이 자기들끼리만 정보를 독점하고 판단하고 집행한다면, 혹은 대표가 혼자서 판단하고 지시한다면, 설령 그들이 아무리 훌륭한 판단력과 도덕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혹은 그게 훨씬 능률적일지는 몰라도 모든 사람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중시하는 직접민주주의나 광장민주주의와는 다른 형태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보통의 회사야 이사회나 경영진의 독재가 관철되는 구조이지만, 일반적인 시민단체나 사회단체 역시 후원금이나 회비로 운영되면서도, 의사의 결정과 집행은 소수의 활동가나 상근자에게 맡겨져 있는 구조입니다. 지도부나 집행부나 상근자가 판단하고 결정하고 집행하는 구조가 한국사회의 낡은 운동체들의 현주소이지요.
우리가 이명박정권에게 분노했던 것은 지들이 설령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하게 판단했다고 할지라도, 국민 대다수가 반대한다는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 아니던가요? 한나라당이 다수라면 모든 반민중적 민중수탈적 법안이 합법적 절차를 통해 통과될 것인데, 우리는 이러한 형식적 민주주의의 탈을 쓴 독선과 비민주성에 대해 반대하는 것부터 시작한 것이고, 바로 이런 것들 때문에 촛불은 광장 직접민주주의를 추구한다고 정의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국민을 말로만 주권자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4년에 한번만 유권자로 대접하는 이 사회의 형식적 대의제 민주주의의 허구에 싸우는 철학이고, 이러한 소외(alienation)의 극복은 진정한 직접민주주의밖에 없다는 자각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엄밀하게 정의하면 촛불이 추구하는 광장민주주의는 위대한 지도자나 특별한 지도그룹을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 혁명적 봉기 뒤에 나타난 파리코뮌이나 병사평의회나 광주항쟁의 시민군이나 모두 혁명적 민주주의에 가장 적합한 틀로서 광장 직접민주주의를 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 모임 역시 그런 철학에 입각하고 있는 조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머슴단은 지도부나 집행부로서 조직을 끌고가는 권력이 위임된 단위가 아니라는 확실한 인식과 자각만이 우리 모임의 건강한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서 최근 언소주 등 촛불모임이 비대해지고 고형화되면서 기왕의 권위주의적이거나 독선적인 운영으로 인해 많은 잡음을 일으키고 있는 점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정보의 최대한 공유, 사전제공, 개방된 충분한 토론, 경과의 보고, 평가와 비판의 기회 제공, 이런 모든 것들은 자각있는 단체들에서는 이미 시행하고 있는 민주적 요소들인데, 어쨌든 촛불조직의 앞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이런 점에 세심한 감각과 배려가 없으면 비민주주의와 싸우는 우리들이 스스로 비민주적인 행동을 닮아가는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대책회의에 참여한 낡은 운동체들이 촛불과 소통하지 못하고 함께하지 못한 것은 이러한 민주주의 철학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이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대의적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로 운영된 바에 기인하는 바도 클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는 낡은 방식의 민주주의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깊이 인식할 때 우리 모임도 발전이 있을 것입니다.
말이 길어졌는데 그 다음으로 사업계획을 토론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8.15 평화행동단의 정체성은 공권력의 탄압에 저항하는 것이라는 점이 분명하기 때문에, 사업기조 역시 공권력의 탄압에 대한 저항에 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촛불과 관련하여 예를 들어 뉴라이트 반대, 테러반대, 공영방송 장악기도 반대 혹은 의료민영화 반대, 신자유주의 반대, 경제파탄 반대 등등 여러가지 중요한 사업과 투쟁이 있지만, 즉 의제가 다양하고 투쟁도 다양할 때는 각 조직은 각 조직의 정체성에 충실한 투쟁을 담당함으로써 총체로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8.15평화행동단은 공권력 혹은 공안탄압반대의 사업기조를 분명히 하고, 그 점에서 공영방송 사수나 뉴라이트 반대와 같은 사업이 아니라, 당장은 어청수 퇴진에 주력한다는 사업계획을 정했고, 사업의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경찰청 앞에서 공안탄압규탄집회를 조직하고 엊청수를 확실하게 끌어내는 방법을 토의하고 있는 걸 보면서 몹시 부러웠습니다.
우리 모임의 정체성은 총회에서 규정된 바 있듯이 단순한 친목과 자구, 자조만이 아니라 촛불승리와 공안탄압을 저지하고 저항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촛불집회에 나갔을 때 우리 모임이 박수를 받고 대접을 받는 것은, 우리 연행자들이 위축되지 않고 촛불의 승리를 위해 저항하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위신은 바로 이 저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모임의 정체성과 사업방침 사업기조는 스스로 명백하게 도출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조와 자구를 위해서 민변과 인권단체와 연대하는 사업뿐만 아니라, 공권력의 부당한 탄압이 가해지는 곳과 공안탄압에 저항하는 곳에 함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역량에 따라 독자적으로 투쟁과 저항을 조직할 수도 있고, 연대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수많은 사업구상과 연대제의들 중에서 촛불투쟁이 우리 모임에게 부여한 역할은 부당한 공권력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에, 가령 기륭투쟁이나 YTN 투쟁이 동시에 있더라도 우리는 공안탄압 규탄투쟁이 있으면 거기에 합류하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나 기조에 맞는 것이 될 것입니다. 즉 우리는 촛불 승리를 위한 모든 저항과 투쟁을 적극 지지하고 연대하고 참여하고 투쟁해야 할 의무와 함께, 우리의 정체성에 맞는 독자적인 실천과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모임도 이러한 광장의 민주주의에 대한 보다 섬세한 주의와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점과, 모든 사업에 있어서 우리의 정체성에 충실한 사업기조와 방향을 잡고 실천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많은 촛불조직들이 초심을 잃지 않고, 단지 독재와 독선에 반대하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온갖 종류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인 소외를 극복하고, 모두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소외되지 않은 주체로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21세기에 구현될 인류의 이상을 구현하는 위대한 실험과 투쟁을 하고 있다는 철학과 긍지를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전 세계의 민중들이 우리의 위대한 저항과 투쟁을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촛불은 단지 정의로울 뿐만 아니라 위대하고 숭고한 것입니다.
촛불 투쟁 만세!!! 촛불 승리 만세!!!
2008.9.29.
(지난번에 제출하기로 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발제문은 이 글로 대신합니다.)
발표글 10
토론회에 붙여(촛불연대체–애국촛불과 민민련)(08.11.07)
1. 공안정국에 우리는 어떻게 맞설 것인가?
이 주제의 문제의식은 주로 투쟁의 형태에 맞춰져 있는 듯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촛불이 감당할 수 있고(계속성), 촛불의 확산에 기여하는 형태(확산성), 그리고 저항과 투쟁성의 담보(투쟁성)라는 세 측면을 충족하면 족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일욜 남한산성에서 수원촛불이 주도한 판넬 선전전과 서명전도 좋은 것이고, 따로 또 같이 산보대회도 좋고, 공안탄압 규탄대회와 같은 합법집회도 좋고, 기륭과 성모병원의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YTN과 함께하는 촛불문화제도 좋습니다. 어떤 투쟁과 실천이든 촛불의 확산과 성장에 기여하는 것이라면 각 주체의 역량에 맞게 추진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촛불이 대규모집회와 가두집회만을 고집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소외 위축되었다는 문제의식에서 모든 국민이 편하고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틀로서 무슨 페스티발이나 문화공연이나 축제 따위의 형태는 참여자들을 객체화 관객화 수동화함으로써 자주적인 저항과 투쟁의지를 고양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라고 생각됩니다.(투쟁성의 결여)
나아가 미신고 기습가투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조심스럽지만, 다수가 참여하기 벅차고 계속성과 확대재생산이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에, 너무 집착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계속성과 확대재생산성의 결여)
촛불들이 창조적이고 다양한 형태로 악착같이 그리고 슬기롭게 싸워나가는 것이 답이 될 것 같습니다.
첨언한다면 이번 노동자대회가 비정규사업장이라든가 사회공공성을 상징하는 부스 하나 제대로 배려하지 않은 채로, 오직 편하고 즐겁게라는 기조에서 본대회의 내용을 거의 공연으로 도배하고, 나아가 전야제 사전행사도 가요제로 대치하고 있는 것은 심히 유감이라고 할 것입니다.
2. 어떻게 촛불연대를 구축할 것인가는
기왕의 촛불투쟁에 대한 평가와 반성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시청과 광화문을 가득 메웠던 거대한 분노와 함성과 항쟁은 왜 승리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위축되었는가? 즉 촛불 1라운드의 패배의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저는 끊임없이 대중의 자주성을 억제하고, 촛불이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나아가 촛불이 폭발하지 않도록, 촛불을 억제하고 발목을 잡아온 대책회의가 최대의 걸림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즉 대책회의는 그 구성원에서 알 수 있듯이 무슨 혁명조직이나 투쟁조직이 아니라 제도 내의 개량을 추구하는 시민운동 단체였기 때문에, 애당초 항쟁의 지도를 바랄 수가 없는 단체들의 모임이었던 것이고, 바로 그 때문에 대책위 회의에서 무려 다섯시간 동안이나 명박심판이 아닌 명박퇴진 슬로건은 죽어도 걸 수 없다면서 탈퇴 위협을 했던 것입니다. 즉 명박퇴진을 외치고 촛불이 반정부적인 항쟁으로 나가는 것을 감당할 의지와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촛불항쟁을 억제하고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6/10이나 6/25에 시민들이 물대포를 맞으며 차벽과 싸우고 있을 때 청계광장에서 끝까지 음악회를 계속했던 것입니다. 돌이켜 볼 때 차라리 대책회의가 없었다면 촛불은 훨신 더 빨리 스스로를 단련하고 조직할 수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명박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결집해야 된다면서(조직노선),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는 슬로건은 도저히 함께할 수 없다는 온갖 시민단체와 신자유주의세력인 민주당까지 끌어모아 자칭 국민적 지도체를 자임하면서(정치노선), 모든 국민이 편하고 즐겁게 참여하는 무슨 페스티발이나 소비자 운동이나 하겠다는(투쟁노선) 민민국은, 촛불의 투쟁과 성장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또다시 촛불투쟁을 방해하고 억제하는 힘으로 작용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결코 촛불의 연대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촛불은 그 첫날부터 명박퇴진이고 이명박 한나라당 조중동 뉴라이트를 척결대상으로 공유한 바 있습니다. 결집되어야 할 대상과 주체는 최소한 이들 반동들의 척결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의지가 확인된 단체로 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애국촛불시민연대에 대하여는, 일단 자주적인 촛불들의 연대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그 주된 의제가 (정치노선) 우리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신자유주의나 비정규직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뉴라이트 반대나 친일파 청산을 중심에 놓고 있는 점이 촛불의 다양성이나 당면과제에 대한 실천을 협소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대란 어차피 투쟁 속에서 검증된 신뢰를 바탕으로 꾸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현 단계에서는 신자유주의 반대나 비정규 반대, 사회공공성 강화와 민영화 반대, 공정언론 사수, 공안탄압반대 등 여러 의제를 여러 주체들이 실천 속에서 연대를 확장해 가는 가운데서, 보다 강건하고 폭넓은 연대체를 건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우리의 향후 전망은 무엇인가
이 주제는 투쟁의 목표와 방향 전망을 주문하는 것 같습니다.
촛불투쟁은 그 첫날부터 명박심판이나 거국내각 구성이 아니라, 명박퇴진투쟁이었고 이명박 한나라당 조중동 뉴라이트를 척결대상으로 공유한 바 있습니다.
소위 재벌주도하의 한국자본주의가 IMF 후 그 축적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책이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무엇보다도 시장만능의 미명하에 노동의 유연화-비정규직의 양산, 복지의 축소, 의료 교육 전기 수도 가스 철도 등 공공재의 민영화-사유화, 투기적 금융자본을 위한 개방 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고, 이 모든 정책은 하나같이 힘없는 자들에게서 빼앗아 힘있는 자들을 살찌우는 소위 20대 80의 입장을 관철하는 것입니다. 이 땅 민중들의 고통의 뿌리는 바로 이 신자유주의로 표현되는 20의 80에 대한 철면피한 약탈에 기인하는 것이고, 바로 이를 관철하기 위해 이에 저항하는 민중을 억압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여기에서 형식적 민주주의를 형해화하고 공권력을 동원하여 억압하고, 조중동과 뉴라이트 수구꼴통들이 동원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대다수 촛불들이 무슨 계급투쟁처럼 자기의 존재와 처지 때문에 투쟁에 나섰다기보다는, 이명박정권의 말도 안 되는 억지와 강요 때문에 너무나 열받기 때문에 나섰다고 생각합니다. 왜 촛불이 기륭에 가서 비정규직과 함께 촛불을 들어야 되는가라는 분들이 계십니다. 촛불이 대운하와 의료민영화를 반대했던 것은 그 정책이 말도 안 되기 때문인데, 그 정책의 본질은 소수의 투기세력 투기적 자본을 위한 다수의 희생을 강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88만원 세대라고 일컬어지는 청년실업 문제라든지, 비정규직 문제는 바로 소수의 특권을 위해 힘없는 다수의 약자를 희생시키려는 본질이 관철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을 총체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이라든지 1%의 강부자를 위한 정책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강요하기 위해 억압적 폭력이 필요한 것이고 민주주의가 유린되고 형해화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피상적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유린으로 나타나는 이 억압이 사실은 소수의 특권을 위해 다수의 희생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를 깨뜨리기 위해 이 희생자들과 함께하는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이명박 일 개인의 독선 때문에 강요되고 있는 문제가 아니고 일관되게 다수의 희생 위에 특권을 유지하려는 소수가 있기 때문에 관철되는 경향성이라고 할 것이고, 신자유주의라고 말해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이명박이 광우병을 받아들인 것은 FTA를 위해서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소위 FTA 4대 선결조건에는 쇠고기 개방, 농산물개방, 투자제한의 철폐와 민영화가 들어있습니다. 주로 미국의 투기적 금융자본과 한국의 거대 투기세력을 위해 대다수 민중의 삶을 희생시키는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료 교육 전기 수도 가스 철도 등 공공재의 민영화는 결국 한국의 재벌과 미국의 투기적 금융자본을 위한 것입니다. 바로 이들을 위해 FTA를 강요하고 미친 소를 강요하고 민영화 작업을 진행하고, 이에 반발하는 대다수 서민을 짓밟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형해화와 공안탄압이라고 본다면, 촛불이 그 승리를 위해서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들을 촛불로 만들어 신자유주의와 정면으로 싸우기 전에는 촛불은 소수에 머물고 승리를 확신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즉 미친 소 협상이든, 의료민영화든, 언론장악이든, FTA든지 간에 총체적으로 20을 위해 80을 약탈하는 신자유주의를 관철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유린한 것이라면, 유린당한 민주주의의 회복의 내용은 신자유주의로 고통받는 이 땅 민중들이 신자유주의 세력을 박살내는 것이고, 그 구체적인 모습이 20을 위해 80을 희생시키는 굴욕적인 개방(광우병협상이나 한미 FTA)을 파탄시키고, 온갖 사유화 민영화를 저지하고 사회공공성을 강화하는 것과, 노동유연화의 결과인 비정규직의 철폐투쟁 속에 그 길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특히 지금과 같이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한 한국경제의 몰락은 힘없는 서민을 제물로 삼아 위기를 타개하려 할 것이기 때문에, 소수를 위한 특혜정치가 아닌 다수를 위한 사회보장과 공공성의 강화를 전면에 내세울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대강 이런 관점에서 신자유주의의 주된 피해자인 비정규직과 연대한다든지, 서민의 삶을 도탄에 빠뜨릴 민영화나 FTA에 반대한다든지, 놈들의 주된 무기인 공안권력과 조중동을 무력화 시키는 것은 모두 유의미한 투쟁이고, 이러한 여러 의제들이 신자유주의의 철폐를 향하여 거대한 흐름을 이루어 낼 때, 즉 투쟁의 본질을 명확히 할 때 우리의 투쟁은 승리를 향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발표글 11
우리 모임의 저항과 관련된 몇 가지 쟁점에 대하여(09.01.07.)
2008년 5월에 시작되었던 촛불항쟁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무려 1,600여명의 촛불시민이 연행되었고, 그 중 대부분이 약식명령에 불복하여 재판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우리 촛불연행자모임은 촛불탄압을 받고있는 직접적인 당사자로서, 어떻게 단결과 저항을 조직하고 촛불 승리에 기여할 것인가는 우리의 최대의 화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당한 촛불에 대한 공권력의 부당한 탄압에 대하여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에 대하여 혼란이 있는 듯합니다. 이런 점들에 대하여 제 생각을 개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법체험 프로그램 수용 논란에 대하여
연행자 중 아주 경미한 사안에 대하여 떡찰이 법체험 프로그램의 수용을 조건으로 기소유예처분을 내리는 경우에 대하여 논란이 된 바 있습니다.
이 경우에 조건부 수용을 거부하고 벌금이 나오더라도 끝까지 싸우겠다는 분들도 계시고, 일부는 수용한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기소유예처분은 형사처벌은 아니지만, 벌금형은 돈만 내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형사처벌이고 전과기록이 남는다는 점에서, 공무원 등이 되려는 분들에겐 심각한 타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궁극적으로야 우리가 투쟁에서 승리하여 사면 복권을 쟁취하면 해결될 문제이지만, 그리고 사법부가 촛불투쟁에 대하여 벌금 금액은 깍아줄지 모르지만, 무죄선고를 할 전망은 없다는 점에서, 구체적인 한 개인이 법체험 프로그램을 수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서는 개인의 결단과 선택에 맡길 수밖에 없고,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도덕적인 선과 악의 잣대로 비난하거나 폄하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처지’의 공동체인 우리 모임은 저항과 투쟁의 공동체를 지향해야 되는 것은 맞지만, 즉 저항하고 투쟁하는 모임이 될 수 있도록 주장하고 노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렇다고 그렇지 못하는 회원들에게 왜 안 싸우느냐고 비난하거나 마음에 부담을 주어서도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푼도 낼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에 대하여
촛불과 촛불투쟁이 정당하다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우리의 입장임이 분명합니다. 그 때문에 공권력을 빙자한 탄압에 대하여 결코 굴하지 않고 투쟁하는 것은 올바른 방향이고, 따라서 약식명령에 대하여 정식재판을 청구하여 대법원까지 가야 된다는 기본방침은 참으로 올바르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또한 약식명령에 대한 정식재판의 청구나 1, 2심 결과에 대한 항소와 상고는 법률에 명시된 불복절차이므로 당연한 불복의 의사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법원 판결로 벌금형이 확정이 되었을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몇 가지 고민지점이 있습니다. 과연 한푼도 낼 수 없으니 몸으로 때우자는 주장이 올바르고 바람직한 것이냐에 대하여는 속단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때의 핵심은 벌금을 내느냐 안 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정당성을 인정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라면, 벌금을 내든 혹은 벌금을 못 내서 노역장을 가든 간에 국가형벌권의 집행은 똑같은 것이기 때문에, 벌금형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관철되기 위해선 벌금을 안내는 것이어야 되는 것이지 벌금 대신 노역장을 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노역장 역시 놈들의 강제집행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벌금형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면 벌금을 안내고 수배가 되더라도 끝까지 도망다니는 것입니다. 따라서 벌금이나 노역장이나 형벌임이 분명하다면 이를 거부하는 것은 벌금이 확정되더라도 자발적인 납부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나아가 촛불은 정당하니 사면하고 복권하라는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올바를 것입니다. 물론 투쟁을 더욱 가열차게 전개해서 촛불이 승리하는 것이 제일 올바른 방향이겠지요.
따라서 저는 촛불의 정당성을 단지 돈을 안내는 것으로 사고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푼도 못 내겠다는 주장은 촛불은 정당하고 촛불은 무죄이다라는 주장인 것이지 결코 돈 대신 몸으로 때우겠다는 주장으로 바뀌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노역장 유치 역시 벌금형의 강제적인 집행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벌금이 확정되었을 경우에
그렇다면 벌금이 확정되었을 경우에, 자발적 납부 거부운동을 전개한다고 하더라도, 수배되어 검거가 되든 어떻든 간에 어느 시점에서, 벌금을 낼래? 노역장을 갈래? 라는 선택의 시점에서 처지나 결의 정도가 다양한 대부분의 연행자분들이 결국 벌금을 납부하게 되는 상황에서, 벌금을 개인의 결단과 부담에 맡기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해야 할 것이고, 결국 이 문제는 모금을 통해서 지원하는 사업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모금이란 게 아무나 좋은 뜻이 있으니 모금해 달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모금의 주체가 그에 걸맞은 도덕성과 위신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문제는 우리 연행자 모임이 다른 어떤 촛불단체보다도 촛불 승리를 위한 저항과 투쟁에 앞장섰을 때 확보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령 1,000명이 100만원의 벌금이라면 대략 10억원이 되는데, 상당한 호응을 받더라도 이 정도의 금액을 모금하기가 어렵고 결국 선별적 지원이나 혹은 일부 금액의 지원 문제에 봉착하고, 자칫하면 도덕성 시비나 분란에 휘말릴 수도 있는 사안일 뿐만 아니라, 냉정하게 말해서 우리 모임과 같은 임의단체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런 모금을 진행하고 관리하고 집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결국 우리 모임은 모금 사업의 주체로서 앞장서되, 모금의 관리와 집행은 공신력있는 민변 등에게 위탁하고, 지급원칙을 정할 때에 최대한 공정하고 바람직한 원칙이 세워질 수 있도록 민변과 인권단체 등과 함께 결정하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대략 올해 가을부터 대법원 확정이 된다고 볼 때, 6-7월부터는 모금 사업이 전개될 필요가 있고, 그전에 우리 모임의 위신을 쌓는 데에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언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소유예와 법률체험프로그램의 수용을 선택받는 경우에는 개인의 결단에 맡겨야 된다는 것과, 촛불이 정당하고 무죄라는 우리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약식명령에 불복하여 정식재판을 청구하고 3심까지 모든 불복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과, 대법원 확정판결 이전에 촛불이 승리할 수 있도록 우리 모임이 앞장서서 최선의 저항과 투쟁을 조직해야 된다는 것과, 명박퇴진이나 일괄사면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대법원 확정이 되는 경우에, 한 푼도 낼 수 없으니 몸으로 때우겠다는 주장은 무리할 뿐 아니라 그 자체도 부당한 공권력을 집행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발적인 벌금납부 거부운동을 전개하되, 노역장 대신 벌금을 내야 하는 처지에 있는 연행자들을 위해서 가을이 오기 전에 우리 모임이 위신을 회복하여 모금사업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발표글 12
면회후기–연행자모임 서울구치소를 휘젓고 다니다.(09.01.16)
연말 번개 때, 그동안 우리 모임이 구속자 동지들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미안함에, 연말에는 카드도 보내고, 구정 전에 면회도 꼭 가고 영치금도 넣어드리자고 결의를 했었습니다. 주간에 가는 거라 시간이 있는 회원분들이 많지 않을 것 같아 걱정도 되고, 신청인 1인당 한분의 구속자만 면회가 된다는 것 땜에 고심하고 걱정도 했었는데….
머슴단 회의 때는 모처럼 가니까 구속자 16명, 1인당 5만원씩 80만원의 예산을 세웠는데, 평소에 틈만 나면 서울구치소와 안양교도소에 면회 가서 영치금을 넣어주시는 홍길동삼촌님의 조언으로, 가족들이 많이 오는 금욜날 오전은 피하고 목욜날 오후에 가되, 3만원씩만 넣어도 되겠다는 조언에 따라, 참여자가 적으면 1/15와 1/22 양일간 면회를 가기로 했었지요.
그런데 어제(1/15) 서민인 저와 모리님이 전철로 인덕원역에 도착했더니… 주중에도 두어 번씩 면회다니는데 들어가는 무쏘 기름값만 해도 만만치 않으실 칼이쓰마 홍길동삼촌님과, 갑자기 빵빵한 그랜저에 우리 모임의 대표이신 카르페디엠님과 사진예술 전공이신 강패트롤님을 모시고 나타나신 능력남이신 방랑자님, 그리고 외롭게 재판받지 않게 해달라는 여왕님(자유한국님)의 분부에 따라, 평소에 투쟁이 있다거나 동지가 어려운 지경에 있다는 소리만 들으면 달려나오시는 새역사님과 알콩달콩님이 여왕님의 백기사를 자원하고 새벽부터 남부지원에 쫒아가 떡찰과 재판장에게 압박감을 조성해 주신 후에, 혁명전사 쥐의 반격님까지 모시고 인덕원 사거리에 나타나자, 서울구치소가 좀 시끄러워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모인 10명의 연행자모임 회원들이, 2시를 조금 넘어 서울구치소에 도착하여 접견신청서를 작성하고 있는데, 쥐의 반격님이 1인당 한명씩 접견신청하는 게 행형법의 어디에 있느냐고 언성을 높이며 면회실장을 닦아 세우자 접수실이 아수라장이 되었지요. 석방하는 거 빼놓고 다 할 수 있는데 무슨 소리 하는 거냐고 반격님이 윽박지르고… 면회 온 사람들이 구속자 동지들을 다 보고 가야 되겠다고 함께 간 동지들도 언성을 높이고… 좀 따졌더니 뭔 예규집을 내밀어서 그건 니들 편의대로 만든 거고 행형법과 시행령, 시행령 규칙엔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평소에 인품이 고매한 저도 좀 거들고… 암튼 저희들이 계속 시비를 키우니까 면회실 책임자가 고급소파가 있는 귀빈실(?)로 오라고 하더니 결국 신청인 1인당 공범이 아닌 3명의 구속자를 신청하는 걸로 합의를 봤습니다.
그런데 초심님이 전날 출소한 관계로 대책위 같은 단체소속을 제외한 접견대상자는 9명이었는데, 재판출정 가신 분과 가족이 이미 면회를 하신 분들 3분을 빼니 여섯 분이 되고, 그래서 해고자 투쟁을 하시다가 구속되신 두 분을 추가해서 모두 여덟 분을 신청했지요. 9분에겐 모두 3만원씩의 영치금을 넣어드리고, 안양의 이길준 의경에게는 시간이 너무 늦어 새역사님이 따로 회원분들과 다음에 가기로 하고… 홍길동삼촌님은 잡범들과 같이 살면 공동구매로 들어가는 돈이 많다고 하시면서 사비를 9만원이나 들여 세분에게 추가로 넣어 드리더군요.
접견대기실에 들어가는데도 미리 들어오면 안 된다고 교도견들이 시비를 걸어서 울 회원님들이 약간의 파워를 보여주다가, 맨 먼저 시설관리공단에서 싸우시다가 해고되고 업무방해로 구속된 동지를 접견하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아무리 차도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다니면 인도라는 확신을 가지고 계신 울 회원님들이 강남역에서 가두 진출하던 그 실력으로 신청인 수와 관계없이 얼렁뚱땅 7-8명이 밀고 들어갔습니다. 해고자 동지는 60이 다 되셔서 귀밑머리가 희끗희끗 하신데, 저희들이 촛불연행자모임에서 왔다고 하니까 엄청 좋아하시면서, 투쟁의 구호로 접견을 시작하자고 하셨습니다. ‘서민경제 다 죽이는 이명박을 박살내자’고 선창을 하셔서 박살내자! 박살내자!고 구호를 외치다 보니 갑자기 접견실이 농성투쟁장이 된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이 동지는 1심에서도 재판장에게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마라’고 최후진술을 하셨다가 괘씸죄로 실형 1년을 받았는데, 자기 투쟁의 정당성을 조금도 굽히지 않고 싸우시는 모습에 절로 존경의 마음이 우러나왔습니다. 사모님이 면회 와봐야 눈물바다 밖에 안 되니까 아예 접견거부하고 있다면서 군대간 아들에겐 출세하려 말고 소신대로 살아라고 하셨다는군요. 누가 영어의 몸인지도 모르게 면회간 사람보다도 훨씬 더 당당하고 투쟁적인 모습으로 저희를 고무시켜 주셔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면회라는 것이 함께 싸우다가 포로가 되신 동지들에게, 동지들을 결코 잊지 않고 밖에서도 열심히 싸우고 있다는 보고를 드리고 격려를 전달하는 장이기도 하고, 투쟁의 의지를 확인하는 장이기도 한지라, 면회사업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투쟁의 인사로 시작해서 투쟁의 구호로 끝나는 면회시간에 구속자 동지들은 자연히 바깥 투쟁에 대해 궁금해 하시고… 특히 연말 보신각투쟁과 명동의 무한도전에 대해서 궁금해 하시길래 신문에 안 난 얘기를 자세히 전해 드렸습니다.
특히 장기간 구속되어 있으신 분들 중엔 명동 염산투척사건 관계자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그분들 하시는 말씀이 엊청수의 졸개들이 명동성당을 침탈해서 촛불시민을 연행하려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강력한 저항을 보여주려다가 그렇게 된 것인데, 남들이 뭐라 하든지 자신들이 총대를 맴으로써 어쨌든 명동성당에서는 이틀 동안 단 한명의 연행자도 나오지 않은 것에 만족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넘들은 군화발로 짓밟고 방패로 사람을 패는데도 잠에서 덜 깬 채로 비폭력을 뇌까리면서 저항에 앞장서서 싸우시던 분들을 무슨 프락치나 죄인취급하던 분들에겐 꼭 이분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로 분류도 안 되는 넘들과 싸우는데, 촛불 대신 쇠파이프나 새총 들었다고 순수한 촛불이 아니라고 하시는 분들은 이젠 안 계시겠지요….
구속자 동지들 모두 당당하게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씀하시고, 저희도 복창하고, 면회할 때마다 우루루 몰려들어가 투쟁을 외치고 집단면회를 강행하는데, 빡빡한 교도견들도 있는지라, 가끔은 CCTV로 신청인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루루 면회하는 것을 보고는 마이크를 꺼버리고 면회를 중지시키면서 신청인 아닌 사람 나가라는 방송이 나오고… 왜 이리 빡빡하냐? 안 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시비를 붙고… 시비걸다가 면회 못한 시간만큼 다시 면회시켜주라고 요구해서 관철하고… 그래서 재능교육 학습지노조에서 활동하시다가 해고되신 동지는 면회를 세 번씩이나 다시 했습니다.
그런데 교도견들이 방송으로 존칭을 생략한 채 누구누구 몇 호실로 오라고 하자, 역시나 불굴의 투사이신 반격님이 ‘내가 니들 친구냐? 공무원들이 어떻게 민원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고 호통을 치고… 교도관들이 규칙을 어기고 몰려다니면 통제가 안 된다고 왕왕거리자 울 회원님들이 ‘민원인이 왜 통제의 대상이냐? 친절한 안내의 대상이지’라고 하면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면서 면회장을 약간 뜨겁게 만든 뒤에, 결국은 알아 모실 테니 제발 너무 시비를 걸지는 말아달라는 민주교도관들의 간청을 수용하면서, 참으로 재미있고 고무된 마음으로 모두 면회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나올 때는 교도관님들이 넘 미남이시라고 농담도 하고…ㅋㅋㅋ
교도소 문밖에 나오자 미네르바 때문인지 기자들과 카메라가 왕창 기다리고 있어서, 방문기념으로 기자들의 취재 욕망이 솟구칠 정도만큼 구호를 좀 외쳤지요. 조중동 기자도 씹어주고… 서울구치소 입구가 꽤 시끄러웠습니다.
아무튼 요번 면회는 밖에서도 조그마한 타협도 없이 원칙적으로 싸워줘야만 안에 계신 동지들도 편하게 지낼 수 있다는 반격님의 지론에 따라 열나게 재미있는 면회가 되었지요. 참여하신 분들에게 소감을 물었더니 너무 너무 유익하고 즐거웠고, 꿋꿋하게 싸우시는 구속자 동지들을 뵈오면서 투쟁의지가 솟아남을 느꼈다고 하더군요.
촛불연행자모임의 저력을 보여준 하루였습니다.
에피소드도 많은데 다른 분들이 올릴거예요…ㅋㅋㅋ
암튼 저로서는 포로가 되신 동지들을 하루라도 빨리 구출하기 위해서 더욱 가열차게 싸워야겠다는 투쟁의 의지를 다진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발표글 13
촛불조직론 소고(09.01.29)
1.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서의 촛불
2008년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은 무엇이었는가에 대하여, 주체의 측면에서 계급이나 대중의 틀로 파악되지 않는 다중의 자주적이고 직접적 행동이었다고 본다면, 대상 또는 지향의 측면에서는 형식적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의 폭발로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의 노래가 폭발적인 공감을 얻은 것은 이를 반증한다.
하나의 정치체제로서 근대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형식적인 대의제 민주주의의 극단으로서, 아무리 보통 직접 평등 비밀의 선거를 하더라도,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은 단지 이념일 뿐이고 실제로는 4년에 한번 투표권을 행사할 때만 유권자일 뿐, 평상시에는 통치의 대상 혹은 피치자일 뿐이다. 즉 국민이 뽑은 정치인들이 국민으로부터 독립된 권력으로서 국민에게 대립물로 서서 국민을 소외시키는 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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