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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 7-9 -부록-다중물신론 비판 pp239-270
보론: 다중 물신론 비판
이택광과 조정환 논쟁
2009년 4월 조정환은, 2009년 1월에 발간된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란 책의 일부 필자에 대하여 “논술의 기초조차 파탄 난 이 사고전개 위에 기초한 ‘무조건적 단어들’의 나열”(조정환, 2009: 38) 운운하면서, “지금 촛불은… 사회(민주)주의자, 노동자주의자, 급진주의자 등을 포함하는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부터 전방위의 공격을 받고 있다. 물대포, 경찰기동대, 전경, 방패, 방망이를 동원한 지난해의 기나긴 촛불사냥에 이어 이제 한국의 온갖 정치세력이 신성동맹을 구축하여 이론의 물대포를 앞세우고 촛불 잔불을 끄고자 총출동하고 있는 시간이 지금이다.”(같은 책, 6)는 참으로 황당한 내용의 글을 <<미네르바의 촛불>>이라는 책으로 발간했다.
이에 대해 2009년 5월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의 필자 중의 한 사람인 이택광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조정환의 촛불론 책읽기>라는 글을 통해, “조정환 선생의 <미네르바의 촛불>을 읽었다. … 좀 실망스러웠다. 정교한 분석이라기보다, 그냥 정치팸플릿을 읽는 느낌이랄까. 누구는 거대한 농담을 듣는 것 같다고 했는데, 그런 면도 다분했다. … <그대는>에 대한 비판은 함량 미달이라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 결국 책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이 ‘자율주의 최고’라는 말로 결론이 나는 것 같아서 아스트랄(황당)했다.”1)라면서 소위 이택광과 조정환 간의 촛불논쟁이 시작되었다.
한 달여를 끈 논쟁 끝에, 조정환은 학술적 논쟁에서는 보기 드물게 ‘현실감각을 분석해보고 싶다’는 까마득한 후배로부터 ‘뇌내 망상’증 환자로 씹히면서도, 끝내 ‘왜 촛불이 다중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못한 채로 논쟁은 끝이 났다.
한편 참세상에 <<미네르바의 촛불>>에 대한 서평이 실리자, “어이가 없네”, “처음부터 끝까지 헛소리만 나열해 놓은 책”, “노빠를 다중이라고 생각하는 남한의 자율주의자들의 해괴한 행태가 노무현의 죽음으로 적나라하게 고발되는 모습을 보게 되네요.” 등의 댓글이 달렸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과 댓글은 촛불이 다중이 아니라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 촛불이 다중이고 다중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황당하고 반동적인 것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조정환의 ‘촛불 다중론’ 혹은 ‘다중 물신론’(=예찬론)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가 기반하고 있는 네그리의 핵심주장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들은 존재하는 세계가 국민국가가 각축하는 제국주의 시대가 아니라 제국의 시대이기 때문에 국민이나 민중이 아닌 다중이라고 부른다. “촛불봉기의 주체들은 누구인가? … 이들은 국가로부터 쫓겨난 망명자들이며… 국가 없는 국민은 더 이상 국민이 아니며 새로운 유형의 권력을 창출함으로써만 해방될 수 있는 다수의 사람들인 다중이다.”(조정환, 132) 이처럼 다중론은 국민국가쇠퇴론 즉 제국론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하에서는 네그리의 <<제국>>, <<다중>> 그리고 조정환의 <<미네르바의 촛불>>을 중심으로 그들의 핵심 개념과 주장들을 살펴볼 것이다.2)
제국론의 허구
미친 소, 미친 교육 등에 분노한 촛불은 ‘고시철회’와 ‘명박퇴진’을 외치며 청와대로 가고자 했다. 그런데 이러한 촛불들의 투쟁을 해롭고 반동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 네그리의 말을 들어보자.
“국민국가들―심지어는 가장 지배적인 국민국가들의 주권적 권위는 쇠퇴하고 있으며 그 대신 하나의 초국적 주권형태 즉 전지구적 제국이 출현하고 있다.”(<<다중>>, 27)
“오늘날 다음과 같은 ‘국지적인’ 좌파전략의 다양한 형태의 핵심에서 작동하는 추론은 완전히 반동적인 것 같다. 즉 자본주의적 지배가 훨씬 더 지구적으로 되고 있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국지적인 것을 방어해야 하고 자본의 가속화하는 흐름에 장애물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 오늘날 이러한 국지적인 입장이 잘못되고 해롭다고 주장한다.”(<<제국>>, 81)
“제한된 국지적 자율성을 겨냥하는 기획으로 제국에 저항할 수는 없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우리가 자본의 전지구화에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과정을 가속화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제국>>, 276-77)
“우리는 국민에 의거하는 모든 전략을 그러한 근거에서 거부해야 한다.”(<<제국>>, 434)
“더 이상 민중이 기초로서 가정되지 않으며, 더 이상 주권적인 국가구조의 권력을 잡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다중>>, 118)
이러한 네그리의 주장은, 지구화로 인하여 국민국가가 쇠퇴하고 제국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으며, 국지적인 기획으로는 제국에 저항할 수 없으니 자본의 전지구화에 저항하지 말고 가속화해야 하고, 국민에 의거하는 전략 혹은 민중에 기초하여 국가권력을 잡는 국지적인 기획은 목표가 아니고, 잘못되고 해롭고 반동적이라는 것이다.
어머나 세상에! 국민국가가 쇠퇴하고 제국의 시대가 도래했다니? 그렇다면 G20에 모인 중국, 러시아, 브라질, 일본 등은 국민국가가 아니고 제국인 미국의 식민지나 제후국이고, 각국의 정상들은 오바마가 임명한 똘만이들이란 말인가?
한 가지만 예로 들어보자. 2008년 촛불의 도화선이 된 광우병 쇠고기의 수입은 한미 FTA의 4대 선결조건 중의 하나였다. 미국의 사료자본과 축산자본의 이익을 위해 한국국민에게 미친 소를 먹이기 위한 것이 광우병 협상이다. 즉 자본의 이익을 위한 전지구화이다. 여기에 저항하여 한국국민은 이명박에게 재협상과 퇴진을 요구했다. 즉 국민국가에 기반한 국지적 기획이다. 그리고 촛불시민들이 이명박의 퇴진을 외치며 거리로 나섰을 때 국민국가의 공권력의 탄압을 받았다.
그럼에도 네그리와 조정환은, “한국국민 여러분! 국민국가는 쇠퇴하고 있습니다. 미친 소 수입과 같은 자본의 전지구화에 저항해서는 안됩니다. 촛불시민들이 국민에 의거하거나 민중에 기초하는 전략인 ‘재협상’을 요구하거나 명박퇴진의 투쟁을 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되고 해롭고 반동적인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촛불시민들이 국민국가의 공권력인 이명박의 경찰들에게 짓밟히고 있을 때, 혹은 노무현 시절 농산물수입개방을 반대하다가 농민들이 두 명이나 경찰들의 방패에 찍혀 죽을 때, 고매하신 네그리와 조정환은 촛불시민과 농민들이 반동적인 투쟁을 하다가 짓밟히고 맞아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국민국가가 시퍼렇게 살아 있음에도, 국민국가가 쇠퇴하고 존재하지도 않은 제국의 시대3)가 도래했다면서 국민국가와 싸우는 짓은 반동이라는 이 허무맹랑한 주관적 관념론이 바로 네그리주의의 실체이다. 이러한 네그리의 주장을 조정환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광우병 사태는 국민국가가 전 지구적 자본의 단순한 관리기구로 축소되는 한편에서 미국 같은 국가의 경우에는 영토를 넘어서 주권을 행사하는 제국 질서의 모순적 양상을 보도록 만든다.”(조정환, 53)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국민국가가 초국적 금융자본, 지구제국의 마디로 형해화되고, … 그러면 다시 와해된 공화국의 재건, 국가재건을 주장해야 되는 것일까? … 오늘날 지구화하는 생산, 삶정치적 생산의 국면에서 와해되는 국가형태의 재건을 통해서 안전보장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 다중은 민중, 인민, 국민이라는 주체성들이 구성했던 안전보장 장치인 국가와는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조정환, 61-62)
이처럼 조정환은 “국민국가가 지구제국의 마디로 형해화되고, 지구화하는 생산의 국면에서 와해되는 국가형태의 재건을 통해 안전보장을 추구하지 말고, 다중은 민중, 인민, 국민이라는 주체성들이 구성했던 (국민)국가와는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발명하자”는 네그리의 핵심적인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즐겨 인용하는 사파티스타 선주민 공동체마저도 “반군이 장악한 지역조차… 커피, 수공업제품, 노동력, 목재, 천연자원 시장에서 고립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재배되는 옥수수로는 3개월밖에 연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음식, 의약품, 옷 같은 다른 물건들은 시장에서 돈을 내고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멕시코 군대는 숲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순찰하면서 사실상 선주민 공동체를 감금하고 있다.”(하먼, 2009: 16) 사파티스타는 제국으로부터의 탈출은커녕 멕시코 정부와의 협상과 선거개입으로 국민국가 내에서 생존을 꾀하고 있는 중이다. 사파티스타마저도 잘못되고 해롭고 반동적이라는 ‘국지적 기획’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2001년 12월 아르헨티나 민중들이 한국의 촛불항쟁처럼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나 독재자를 몰아내었을 때, 자율주의자들은 조직되지 않고 뭉치지 않은 자생성(자발성)이 위대하다고 칭송했지만, “급진좌파의 상당부분은 사회운동의 자율성이란 미명 하에 대통령 선거를 무시하였다. 그 때문에 페론주의를 앞세운”(캘리니코스, 2009: 242)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정권을 갖다 바친 적이 있었다. 존재하는 국민국가와 국가의 변혁을 무시하는 자율주의자들의 이론이 전 세계인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순간이었다.
네트워크 투쟁
온갖 비정규직과 파견직을 양산하고 구조조정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대하여, 노동자계급은 단결하여 싸워야 한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민주노총의 총연맹과 같은 조직으로 뭉쳐서 통일된 투쟁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네그리의 얘기를 들어보자.
“더 이상 민중이 기초로서 가정되지 않으며, 더 이상 주권적인 국가구조의 권력을 잡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게릴라 구조의 민주적 요소들은 한층 더 네트워크 형식으로 확장되며, 조직은 점점 더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가 된다.”(<<다중>>, 118)
“중앙집중적 동일성 아래 통일된 투쟁인가 아니면 우리의 차이들을 긍정하는 독립된 투쟁인가 사이에서 하나를 확연히 선택하도록 한다. 다중의 새로운 네트워크 모델은 이러한 선택들 둘 다를 대체한다. … 새로운 전지구적 투쟁순환은 개방적이고 분산된 네트워크 형식을 취하는 공통된 것의 기둥이다.”(<<다중>>, 267-68)
조정환의 얘기도 들어보자.
“민중에서 다중으로, 당에서 네트워크로, 국가에서 코뮌으로.”(조정환, 7)
“복수적인 다중들이 그 환원할 수 없는 복수성 속에서 하나의 다중으로 행위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은 이제 이념적 당이 아니라 횡단적 네트워크의 형태에서 찾아지기 시작했다.”(조정환, 43)
“네트워크주의는 그 특이한 힘들의 어떤 것도 희생하지 않으면서 그 힘들이 공통의 목표를 위해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조정환, 269)
이처럼 네그리와 조정환은 “중앙집중적 동일성 아래 통일된 투쟁”을 하는 민주노총 같은 조직을 해체하고, 탈모던하게 “개방적이고 분산된 네트워크 형식”을 취하는 메신저질이나 하자고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자율주의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아우또노미아’ 운동이란 노조를 통하지 않는 ‘살쾡이 파업’과 같은 것으로 ‘대장없는 오합지졸’들이 자본가들을 곤혹스럽게 하여 임금인상에 기여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율주의자들은 그처럼 훌륭한 투쟁이 이탈리아 자본주의에 대하여 손톱만큼의 상처도 주지 못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에는 함구하고 있다.
노조가 관료적이고 비민주적으로 타락했다면 그 노조를 바꾸면 된다. 자신들이 만든 노조조차 민주화할 수 없으면서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는가? 뭉치면 위계와 억압이 발생한다는 ‘과두제의 철칙’을 운운하며 ‘중심없는’ 네트워크질이나 하자는 것은 자본가들과 제국주의자들의 이익을 위해 네그리가 고안해낸 참으로 악의적인 요설일 뿐이다.
미네르바의 촛불
조정환이 <<미네르바의 촛불>>을 쓴 목적은 첫째는 촛불과 진보적 지식인들간의 이간질이다. 둘째는 촛불에 빌붙기 위한 것이고, 궁극적인 목적은 자율주의와 네그리주의를 끼워 파는 것이다. 이 점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만약에 누군가가 “지금 남조선에서는 헐벗고 굶주린 촛불이라고 부르는 다중들이 미제의 괴뢰인 이명박 도당에 반대하여 떨쳐 일어났습니다. 촛불다중은 제국과 자본의 세계를 끝장내고 공산주의의 과업을 완수할 창조적 역능을 가진 존재로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라고 한다면, 정신병자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김정일 위원장이 한 말이 아니다. 조정환의 말을 들어보자.
“맨 위에 신자유주의 제국의 군주국 미국이 있다… 이때의 미국은 단순한 국민국가가 아니다. 그 아래에 신자유주의 우파, 그 아래에 신자유주의 좌파가 있다.
그 아래에 사회민주주의 우파… 그 아래에 사회민주주의 좌파가 있다. 사노련, 노동자의힘, 노동해방실천연대 등이 이에 속한다. … 이상의 대의주의 정파들에 의해 대의되지 못하거나 혹은 그러한 대의를 거부하는 사회적 존재들이 있다. 이들은 사회학적 차원에서 노동의 공통되기에 기초한다. 이들의 이념은 주권, 자본, 국가, 민족, 사회학적 의미의 계급 등에 묶이지 않는다. 오히려 생명, 삶, 자유, 사랑 등이 이들의 이념을 더 잘 표현한다. 앞서의 대의 정치세력에 의해 대의되지 못하는 여성, 아이, 청소년, 노인, 다수의 네티즌 등은 물론이고 촛불봉기에 참가했던 이름 없는 무수한 사람들(이른바 ‘나홀로파’) 중의 상당수가 자각적이든 무자각적이든 이러한 감성에 따라 움직였다. 직접행동주의적 아나키즘과 코뮤니즘은 이러한 경향을 정치화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조정환, 192-95)
미국과 한국이 단순한 국민국가가 아닌 제국의 군주국이나 제후국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황당한 수작인지는 앞서 얘기했다.
그런데 세상에! “촛불봉기에 참가했던 이름 없는 무수한 사람들(이른바 ‘나홀로파’) 중의 상당수가 대의되지 못하거나 대의를 거부”했다니… 사회민주주의 좌파에게도 대의되지 못했다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호감을 보였다는 말인가? 아니면 정상배들을 싹 쓸어버리고 혁명정부라도 세우려고 했다는 말인가? 촛불은 ‘명박퇴진’을 열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한 적도 없고, 부르주아 대의제 민주주의를 부정한 적도 없다.
촛불의 정치성향은 노사모라고 불리는 노무현 지지자들이나 의료민영화를 굳게 밀어붙인 유시민과 열린우리당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좌파부터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등 사회민주주의까지 다양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나 부르주아 정치체제를 부정하고 이루어질 수 있는 혁명적 대중의 직접통치는 아니었다. 이 점은 촛불 속에 나타난 무수한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적 담론이나 노무현 서거 시에 드러난 관대한 통치자에 대한 흠모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조정환은 “여성, 아이, 청소년, 노인, 다수의 네티즌 등은 물론이고 촛불봉기에 참가했던 이름 없는 무수한 사람들(이른바 ‘나홀로파’) 중의 상당수”가 대의주의 정파에 의해 대의되지 않거나 대의를 거부하고 아나키즘과 코뮤니즘의 지향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용산투쟁과 쌍차투쟁에서 사노준(사회주의노동자당건설준비위원회)을 비롯한 좌파들이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제도 투쟁정당론과 대체권력론에 입각한 ‘노동자의힘’의 후신인 사노준은 최근에 사노련(사회주의노동자연합)의 일부와 합하여 사노위(사회주의노동자당건설 공동실천위원회)를 발족한 바 있다. 이런 변혁추구세력을 체제 내에서 활동하는 사회민주주의 세력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모욕적이고 악랄한 모략중상이다. 모략과 중상은 단결할 줄 모르는 소부르주아 개인주의자들의 고유한 특성이다.
그리고 무슨 직접행동주의적 아나키즘 운운하는데, 2006년 가을 한미 FTA 반대투쟁 때, 시위대가 동대 후문에서 차벽에 막혀 있었다. 그 때 검정 옷 입은 몇 사람이 대오 근처에서 얼씬거린 적이 있었는데, 한국에서 아나키스트가 대중들 앞에 얼굴을 비춘 것은 그때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물론 쇠파이프는커녕 결코 전투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촛불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정치적 자기표현이다.”(조정환, 324) “다중은 모두 가난하다.”(<<다중>>, 173) 이처럼 촛불이 다중이고 다중의 정체성이 빈자(가난한 자)라는 것은 네그리와 조정환의 핵심주장이다. 결국 이 말은 촛불이 분노와 정의감 때문이 아니라 가난해서 거리에 나섰다는 얘기다. 기륭의 비정규직은 자본의 부당한 처사 때문에 싸운다. 단지 가난 때문이라면 노점상이나 식당 종업원으로 취업을 하면 되지, 월 80만원도 안 되는 일자리의 회복을 위해서 1,000일이 넘게 노숙투쟁을 할 필요가 없다. 촛불도 가난 때문에 춥고 배고파서 거리에 나선 것이 아니다. 이명박정권의 부당한 처사에 분노하고 항의하기 위해 싸운 것이다. 모든 투쟁은 이기주의적인 목적이 아니라 부당함에 대한 정의로 싸우는 것이다.
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다중인 촛불이, 가난 때문에 거리에 나왔고, 무수한 ‘나홀로파’의 상당수가 혁명적 봉기를 일으켜 부르주아 대의제 정당체제와 정상배들을 쓸어버리고 혁명적인 대중의 자기지배 즉 직접민주주의인 아나키즘과 코뮤니즘를 갈구하는 감성을 가지고 움직였다는 이 황당함!
이 문장을 양심적으로 쓰려면, “촛불은 가난 때문이 아니라 이명박정권에 대한 분노와 정의감 때문에 거리로 나섰지만, 형식적 민주주의인 87년 체제의 회복을 바랐을 뿐 부르주아 대의제 민주주의를 벗어나려는 꿈을 꿔본 적이 없었다. 촛불은 신자유주의 좌파와 사회민주주의 사이에 있었다. 친미반공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채, 입으로만 반자본과 코뮤니즘을 외치면서도 세계화와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자율주의자들은 이명박이나 노무현과 같은 신자유주의 우파나 신자유주의 좌파와 가까웠지만, 착취제도를 부정하고 투쟁하기보다는 보장소득이나 운운한다는 점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우파에 가까웠다. 실천적 변혁세력인 노동자의힘과 사노련 등은 자신의 깃발을 들고 촛불과 함께 싸웠다. 그러나 조정환 등의 자율주의자들은 국가권력과 싸우는 촛불들의 투쟁이 해롭고 반동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뒤에서 구경이나 하면서 변혁세력들을 모략중상이나 하기에 바빴다”라고 써야 한다.
그러고 보면 이간질과 모략중상질은 자율주의자들의 특성인 모양이다. 사실상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의 필자들은 촛불 속에서 열심히 싸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촛불을 ‘운동의 정치’라는 측면에서 “촛불의 주체를 정치적 주체로서 반성하는 작업”(서동진, 2009: 9) 즉 촛불이 넘지 못한 지점을 분석해 보려고 했다. 분석과 비판은 완벽하지 못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정환이 “지금 촛불은… 사회(민주)주의자, 노동자주의자, 급진주의자 등을 포함하는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부터 전방위의 공격을 받고 있다. … 한국의 온갖 정치세력이 신성동맹을 구축하여 이론의 물대포를 앞세우고 촛불 잔불을 끄고자 총출동하고 있는 시간이 지금이다.”(조정환, 6)고 한다든지, “억압, 냉소, 기만, 환멸을 넘어 촛불이 승리한다”면서 자신만이 촛불의 편이고, 좌파 지식인들이 마치 촛불에 대해 “억압, 냉소, 기만, 환멸”을 보인 것처럼 매도하는 것은 참으로 염치없는 수작이고 명백한 이간질이다. 이런 점들은 <논쟁>에서 이미 거론된 바이다. 투쟁 속에서 이간질만큼 나쁜 짓은 없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약과다.
동일성과 특이성 그리고 공통성
기륭전자와 성모병원의 비정규직은, KTX 여승무원과 이마트의 비정규직과 결코 단결하면 안 되고 차이로 남아 있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네그리 등 자율주의자들의 얘기를 들어보자. “탈근대의 사회에서 비물질노동이 질적인 면에서 헤게모니적”(<<다중>>, 146)이 되었으며, “산업노동자들, 비물질적 노동자들, 농업노동자들, 실업자들, 이주자들 등등은 다중이며”(<<다중>>, 199) 그리고 “다중은 특이성들의 집합이고, 특이성은 그 차이가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주체, 차이로 남아있는 차이를 뜻한다.”(<<다중>>, 135)고 주장한다.
이 나라는 전체 봉급생활자의 절반이 넘는 840만명이 월 평균 123만원의 저임금을 받는 비정규직인 참으로 야만적인 자본주의 사회이다. 일터의 광우병이라고 부르는 비정규직의 철폐를 위해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정규직이 단결해야 한다는 것은, 그가 어느 회사 어느 공장에 다니든 혹은 산업노동에 종사하든 비물질노동에 종사하든, 비정규직이라는 처지의 동일성에 기초하여 단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네그리의 주장에 따르면, 이마트의 비정규직 판매원들과 성모병원의 비정규직 간병인들은 비물질노동자들이고, 기륭전자의 비정규직과 동희오토의 파견노동자들은 산업노동자들이다. 즉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특이성들의 집합인 다중”이기 때문에 차이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단결해야 한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노동자라는 처지의 동일성과 통일성을 기초로 하여 단결해야 한다. 그럼에도 네그리는 산업노동자와 비물질노동자를 가르고 차이와 특이성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 주장이야말로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해치는 참으로 범죄적인 이간질이다. 단결해도 시원찮을 판에 분열과 이간질을 한다. 이것이 바로 노동자계급을 이간질하기 위해 분열주의자인 네그리와 비르노 등 자율주의자들이 비물질노동과 다중론을 제기한 반동적 목적이다. 탈근대의 특수성으로 비물질노동을 강조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변함이 없음에도 혁명의 주체와 성격이 바뀌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조정환도 네그리를 본받아 “20세기 중 후반…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주권의 변화를, … 대중노동자에서 사회적 노동자로의, 민중에서 다중으로의 주체성의 변화를 가져왔다. 촛불은 지구상황 속에 편입된 한국에서 산업노동과 대중노동이 주도했던 투쟁의 한 순환이 종결되고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하에서 기존의 산업적 공간적 지역적 세대적 경계를 넘어 구성되는 다중이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의 형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조정환, 58)이며, “다중은 그 환원할 수 없는 특이성 속에서는 다중들이며, 그것의 공통되기 속에서는 다중이다.”(조정환, 42)고 말하고 있다.
비물질노동자와 산업노동자가 차이와 특이성을 고이 간직한 채 결코 노동자라는 동일성으로 단결해서는 안 된다면 무엇으로 단결할 것인가? 네그리의 주장을 들어보자.
“다중은 서로 모순적인 ‘동일성-차이’의 쌍을 서로 보완적인 ‘공통성-특이성’ 쌍으로 대체한다. … 새로운 전지구적 투쟁순환은 개방적이고 분산된 네트워크 형식을 취하는 공통된 것의 기둥이다.”(<<다중>>, 267-68)
“특이성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을 기초로 해서 행동하는 다중은 능동적인 사회적 주체를 나타낸다. 다중의 구성과 행동은 정체성이나 통일성에 기초하지 않고 자신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에 기초한다.”(<<다중>>, 136)
결국 처지의 동일성으로 단결하지 말고, 착취와 피착취라는 적대의 관계 속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로 단결하지 말고, “노동자와 빈자들 사이의 분할의 선을 넘어, 다중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난”(<<다중>>, 173)이라는 정체성으로 단결하자는 것이다.4) 그리고 이 가난이라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만일 모두를 위한 보장소득의 요구가 국가의 영역을 넘어 전지구적 요구로 확대된다면, … 부의 분배를 위한 이러한 공통적인 기획은 빈자들의 공통적인 생산성에 상응할 것이다.”(<<다중>>, 175)고 주장한다.
네그리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조정환은, “무조건적 소득보장 요구는 비정규직의 생명불안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정규직의 해고불안을 해소하는 수단일 것이며, 정규직/비정규직의 분할을 통해 지배하는 자본의 통치를 파괴하는 방식일 것이다.”(조정환, 166-67), “노동기본권에 기초한 고용안정이라는 방어적이고 복고적인 주장을 넘어설 수 있도록 준비해 나가야 한다. 그 디딤돌은 무조건적 보장소득 요구이다. … 이것은 촛불의 취지와 완전히 일치한다.”(조정환, 204)고 말하면서, 기륭과 쌍차 노동자들이 방어적이고 복고적인 잘못된 투쟁을 하지 말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특이성들로서의 다중이니까 빈자라는 노동의 공통되기를 통해서, 탈모던한 첨단투쟁인 보장소득 운동을 해야 한다고 준엄하게 꾸짖고 있는 것이다.5)
비정규직, 파견제, 구조조정 등 불안정 노동은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비정규직이나 파견제를 허용하고 양산하는 법과 제도를 바꾸면 된다. 그럼에도 이들 자율주의자들은 쌍차 노동자들이 ‘해고는 살인이다’며 쇠파이프를 들고 피터지게 싸우고 있을 때 자본의 노예되는 투쟁이라고 빈정대면서, 노동자라는 이름을 버리고 가난한 빈자라는 다중의 공통되기를 통해서 자본가들에게 부를 분배해 달라고 하자는 것이다.
이 세상이 지옥 같다면, 인구의 3%도 안 되는 자본가들의 착취 때문에 노동자들의 절반 이상이 동물적 삶을 강요당하는 이 야만적 자본주의에 분노한다면, 국가권력이나 정권을 장악해서 변혁하면 된다. 하지만 국가 혹은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율을 외치는 자율주의자들은 국가권력을 장악해서는 결코 안된다고 주장한다.
비물질노동을 들먹이면서 차이로 남자며 노동자들을 이간질하더니, 이제는 동일성이 아닌 공통성을 주장하면서 노동자가 노동자로서 투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려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끊임없는 이간질과 훼방 그것이 바로 자율주의의 본질이다. 자율주의자인 조정환이 촛불과 (노동)운동과의 결합과 연대를 얘기하는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의 좌파 필자들을 매도하고 이간질해야만 하는 그 뿌리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
국가란 공적 영역의 가장 완성된 형태이다. 그런데 국가와 권력으로부터 회피하고 싶은 네그리는 공적 영역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그대신 등장한 것이 ‘공통이익’이다.
“공통된 것의 생산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의 전통적인 분할을 제거하는 경향이 있다.”(<<다중>>, 250)
“공동체(community)라는 용어는 종종 인구들 및 인구들의 상호작용 위에 주권적 권력으로서 군림하는 도덕적 통일체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공통된 것은 공동체나 공적인 것이라는 전통적인 개념들과 관계가 없다. … 공동체의 통일성 속에서 개별적인 것(개인적인 것)이 용해되는 반면, 공통된 것 속에서 특이성들은 사라지지 않고 스스로를 자유롭게 표현한다.”(<<다중>>, 252)
“일반이익 또는 공공이익 개념을, 이러한 재화와 서비스들의 관리에 공통적인 참여를 허용하는 틀로 대체하는 것이다. … 오히려 공공이익에서 특이성들의 공통적인 틀을 향해 전진한다는 것을 믿는다. … 즉 그것은 관료의 수중에 있지 않고 다중에 의해 민주적으로 관리되는 일반이익이다. 이것이 공적인 것에 기반을 둔 국가에서 공통된 것에 기반을 둔 코뮌(communis)으로의 이행을 이루어낼 것이다.”(<<다중>>, 254)
조정환 역시 “다중이 자신의 생명과 삶의 안전보장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 다중은 민중, 인민, 국민이라는 주체성들이 구성했던 안전보장 장치인 국가와는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조정환, 62)고 주장한다.
자, 우리의 생명과 삶의 안전보장을 위협하는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이것은 공적 업무를 관장하는 국가가 재협상이나 검역주권의 문제를 통해서 해결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존경하는 이명박 각하께서는 “다중은 민중, 인민, 국민이라는 주체성들이 구성했던 안전보장 장치인 국가와는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발명하지 않으면 안 되고, 공적인 것에 기반을 둔 국가가 아니라, 공공이익에서 특이성들의 공통적인 틀로”라는 조언에 따라, 국가가 나서서 해결하지 않고(관료의 수중에 맡기지 않고) 민간수입업자의 자율규제에 맡기셨다. 쇠고기 수입업자나 판매상이나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특이성을 간직한 채 다중의 자율공동체를 건설하여 소통과 협력을 통해서 참으로 훌륭하게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공적인 것에 기반을 둔 국가의 시대는 끝났다. 결코 국민이나 민중이란 정체성을 가지고 세계화에 반대하지 말고 국가를 변혁시키려고 하지 마라! 그것은 해롭고 반동적인 것이다.” 이상이 위대한 네그리 사마와 조정환 사마의 말씀이시다.
쇠고기 수입문제가 공적인 문제인 것은 상식이다. 공적인 영역을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로빈손 크루소처럼 무인도가 아닌 사회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는 공적인 영역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이해관계나 이익으로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공적인 것은 정의의 영역이다. 촛불이 거리에 나선 것은 정의감이었다. 공적인 영역인 국가와 정권의 배신에 대한 분노이고 정의감이었지, 예비군과 유모차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면서 공통의 이익이 될 미친 소 수입반대에 일시적으로 함께한 것이 아니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조선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식민지 민중으로 단결한 것은, 노동자와 농민이라는 정체성 이전에 식민지 민중이라는 더 큰 처지의 동일성을 기반으로 한 정의의 투쟁을 위한 것이었지, 이익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이익으로 단결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차이로 남아 있으면서 공통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있다. G20이 바로 그 좋은 예이다. 한국,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등등의 국가는 서로 국익이 충돌한다. 하지만 자본이 야기한 경제위기의 부담을 자국의 민중들에게 돌리는 데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다. 이것은 정의에 기초한 모임이 아니다. 정부에 대한 재벌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전경련도 공통이익에 기반한 조직이다. 현대와 삼성은 각자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일자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성이며 복수성이고 특이성이다.”(<<다중>>, 141) 또한 “공통적으로 행동하는 특이성들”이다.
하지만 전쟁을 수행하는 보병과 포병은 차이에 기초한 서로 다른 이익이 없다. 그들은 한 나라의 군대일 뿐이다. 공통의 이익이 없어지면 차이로 돌아가야 하지만, 유모차와 예비군 역시 차이에 기초한 서로 다른 이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지구화와 신자유주의에 유린당하는 민중이라는 통일성으로 투쟁한 것이다.
정의감에 기초한 도덕적 통일체는 공동체이고 그것을 추구하는 운동을 코뮌주의6)라고 부른다. 그러나 특이성으로 남아있으면서 즉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공통의 이익을 조절하고 따지는 것은 도적적 공동체가 아닌 야만이 지배하는 이익단체협의회다. 도덕적 공동체를 추구하는 코뮤니스트와, “다중의 공통체, 다중의 코뮌만이 다중의 삶을 무조건적으로 보장해 줄 수가 있다.”(조정환, 355)라면서 ‘공통체’라는 이익단체협의회를 추구하는 네그리주의자들과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공동체주의자(communist)가 아니라 ‘공통이익체주의자’(commonist)들이다.
“관료의 수중에 있지 않고 다중에 의해 민주적으로 관리되는 일반이익”은 얼핏 보아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국가가 사멸한 후에도 혹은 대중의 자기지배가 실현되는 코뮤니즘 사회에서도 공적 업무는 있을 수밖에 없다. 5,000만이 검역업무에 매달릴 수는 없지 않은가? 소수나 일부가 맡을 수밖에 없는 공적 업무를 일부의 시민에게 위임하고 민중의 통제 하에 두던지 혹은 시민들이 번갈아 가면서 맡을지는 업무의 성격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차이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다중들의 이익을 관리하는 공통업무는 아니다.
민중, 대중, 다중 그리고 엑소더스
네그리와 비르노가 스피노자에게서 빌려온 ‘다중’이란 개념은 ‘민중’과 대립되는 주체성이고, 맑스의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체하기 위한 개념이다.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과는 다른 민중이란 먼저 권력으로부터의 피억압의 정체성이다. 일제 때 ‘식민지 민중’이란 용법이 그것을 보여준다. 대중이란 동일한 처지나 동일한 요구와 감정을 가진 집단이다. 노동자대중 혹은 농민대중이라고 할 때 보여지는 용법이다. 이에 비하여 다중은 일자로 환원되기를 거부하는 특이성의 집합인 다양성이다. “국가라는 일자(one), 국가라는 중심으로 구심력 운동을 하는 것이 민중 개념이라면 다중은 국가로부터 멀어지는 원심력 운동을 하는 개념이다.”(이득재, 2008: 102) 그리고 계급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처지의 동일성을 기반으로 한다.
예를 들어보자.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 대중과 농민 대중은 강도 일본과 투쟁하기 위하여 신간회를 구성하였다. 노동자와 농민의 차이와 특이성을 앞세우지 않고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는 식민지 민중이라는 통일성으로 뭉쳤다. 만약 일제가 식민지 민중이라는 처지의 동일성에 기반한 공동의 적이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이라는 상이한 이익을 갖는 공통의 적이었다면 일제를 몰아내고 난 다음에는 흩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결하여 정의가 실현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와 농민의 처지의 동일성은 식민지 민중이라는 더 큰 처지의 통일성으로 뭉쳤다.
이승만 독재나 전두환 독재와 한마음이 되어 싸운 학생과 시민과 노동자는 대중이면서 독재정권에 억압당하는 민중이었다. 촛불예비군과 촛불유모차와 안티엠비는 차이를 고집하면서 미친 소 반대라는 공통이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경찰독재 하에 고통받고 억압받는 처지의 동일성에 기반한 민중으로서, 즉 하나의 통일성인 촛불시민으로서 싸웠다. 이명박과 싸우는 촛불의 정체성은 하나였지, 특이성으로 남아있는 복수성인 다중이 공통의 문제로 싸운 것이 아니었다. 촛불은 “무수히 많은 계급들이 하나의 공통의 의제 앞에서 정치적으로 결집된 무리라는 점에서 다중”(조정환, 133)이 아니다. 촛불은 하나다!!!
이처럼 동일성과 통일성은 단결의 정체성이다. 그러한 단결 속에 하나된 민중들이 자기 내부의 어느 집단을 억압하거나 노동자계급의 농민에 대한 억압은 있을 수 없다. 이익이 충돌하지도 않는다. 예비군의 이익과 유모차의 이익이 따로 있기 때문에 복수의 특이성과 환원할 수 없는 다양성으로 남아 있어야 했던가? 이명박 앞에서 촛불은 하나였다. 제발 차이와 다양성 운운하며 분열을 조장하지 마라!
보통의 사람들은 현실이 힘들더라도 적응하고 산다. 권력의 횡포가 아무리 심하더라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불만스럽고 고통스럽더라도 적응하면서 당하고 살기도 하고, 때로는 권력에 저항하고 투쟁하면서 처지를 개선하거나 세상을 변혁하려고 하기도 한다. 즉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정치적 경제적 현실의 개선과 변혁에 관심을 갖는다. 정책을 반대하거나 정권교체를 바라거나 체제를 변혁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 중앙정치 즉 권력에 관심을 갖는 구심력적인 존재이다.
이에 비하여 양반의 수탈을 피해 지리산 속에 들어간 화전민이나 산적들은 때로는 관군과 싸울지라도 세상의 변혁을 바라지 않는다. 체제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이 없는 집시나 유목민 역시 권력의 횡포에 저항은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중앙(권력)에 관심이 없고, 떠나는 사람들이고 원심력적이다. 마적들, 마약 재배자들, 깡패들, 룸펜들, 군벌, 해적 등등은 그들을 핍박하는 정치권력의 희생자이면서도 세상을 바꾸는 데는 관심이 없다. 떠날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바로 다중이다. 그들은 권력에 맞서 세상과 정치를 바꿀 의사가 없는 뜨내기인 유목민과 같은 존재이다.7) 그들은 체제와 정권과 싸우기 위해서 단결해야 할 이유가 없다. 차이로 남아 있어야 한다. 자율주의자들이 숭배하는, 권력과 체제로부터의 도주와 탈주란 바로 이런 정체성이다. 떠나고 싶지만 못 떠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떠날 수 있고 떠나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차이를 넘어선 단결을 외칠 필요가 없다.
다중에게는 타자(他者)가 없고 투쟁의 대상이 없다. 노동자에게는 자본가라는 대상(타자)이 있지만, 빈자에게는 부자가 투쟁 대상이 아니다.(서관모, 2009: 156-57) 즉 투쟁의 대상이 없으므로, 그들은 해방되기 위해서 떠나야만 한다. 투쟁이 아닌 도주와 탈주 바로 이것이 자율주의자들의 실천론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주노동을 극찬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첫 번째 층위의 공화주의적 원칙을, 즉 도주, 탈출, 유목주의를 본다. 훈육시대에는 사보타주가 저항의 기본관념이었던 반면, 제국의 통제시대에는 도주가 저항의 기본관념일 것이다. 근대에서의 대항은 종종 직접적인 그리고/또는 변증법적인 힘의 대립을 의미했던 반면, 탈근대에서의 대항은 애매하거나 삐딱한 자세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당연하다. 제국에 대항하는 전투는 삭제와 태만을 통해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도주는 어떤 장소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권력의 장소를 철거하는(비우는) 것이다.”(<<제국>>, 282-84)
하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신음하는 전 세계 민중 가운데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못사는 사람들이 탈주를 한다고 해서 그 나라가 바뀔 수 있을까? 이주노동이라는 게 결국은 선진국의 3D업종에 취직해서 돈 버는 것이다. 한 개인에게는 보다 나은 소득을 얻는 일이겠지만 결국은 선진국 자본주의에 포섭되는 것이다.
비르노는 “미국의 동부 노동자들이 토지를 얻을 수 있는 서부로 대탈주해서 자본가들에게 타격을 주었다”고 말한다.(비르노, 2004: 122) 그래서 동부의 자본주의가 망했던가? 미국의 자본주의가 망했던가? 단지 남겨진 노동자들의 일시적인 임금상승에 조금 기여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조정환은 “이주에 대한 네그리와 하트의 긍정은 이 유목적 운동이 갖는 역사적 세계사적 의미에 대한 진단에 기초한 것으로서 비참에도 불구하고 이주가 갖는 변형의 힘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조정환, 229) “이주하는 다중의 유목적 운동은 그것이 비참에 의해 조건지워진 것이라 할지라도 인류인들의 국경을 넘는 혼종과 새로운 주체성의 탄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계기이며 코뮤니즘을 새로운 수준에서 구축할 잠재력의 축적이라고 보아야 한다.”(조정환, 230)고 주장한다.
그들은 현대의 대중이 떠나는 자의 정체성이라면서 대탈출을 감행하여 자본의 세계를 무너뜨리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삶이 힘들어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새롭게 찾아갈 곳도 무한정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곳도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촛불은 재협상을 바라고, 이명박이 물러나기를 바라는 정권퇴진운동이었다. 이것은 정치를 바꾸고자 하는 전형적인 민중의 모습이다. 결코 자율규제나 믿는 원심력적인 다중이 아니었다. 유모차부대와 예비군과 소울드레서는 차이를 앞세운 다중이 아니라, 이명박과의 싸움에서 촛불로 하나가 된 민중이고 대중이었다. 촛불이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었고 조직되지 않은 자발적 창의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다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광우병, 의료민영화 등등의 문제는 차이를 넘지 못하는 공통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경찰독재정권의 횡포에 시달리고 있다는 처지의 동일성에 기초한 통일된 민중들이 제기한 의제였다.
오직 단결을 죽기보다 싫어하고 뭉칠 줄 모르는 자율주의자들만이 외견상의 차이에 매달리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혁명적 사건이 그러하듯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봉기란 오히려 드문 것이다. 그리고 대중의 자발성은 고양기에는 언제나 일어나는 현상이다. 광주항쟁 때 양동시장의 아주머니들이 김밥을 만들고, 전남대 병원의 간호원들이 시민군을 숨겨주고, 야학 노동자들이 전단을 뿌리고, 택시 운전사들이 무기고를 턴 것은 차이 즉 특이성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전두환의 공수부대의 학살 앞에서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통일성에 기반한 민중이고 대중이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발적이고 창조적이었다는 것은 다중의 특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운동의 고양기에 나타나는 대중과 민중의 특성이다.
“홉스에 따르면 다중은 정치적인 통일(단일성)을 기피하고, 복종을 거부하며, 지속가능한 협정을 체결하지 않는다. 또 다중은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주권자에게 결코 양도하지 않기 때문에 법적 인격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다중은 (다원적 특성이라는) 자신의 존재양식과 행동양식에 의해 이러한 양도를 금지한다. 위대한 저술가였던 홉스는 다중이 얼마나 반-국가적인가를,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얼마나 반-민중인가를 존경스러울 정도로 세련되게 강조했다. … 말하자면 민중이 있다면 다중은 없다. 또한 다중이 있다면 민중은 없다.”(비르노, 2004: 41)
이처럼 비르노가 흐뭇한 심정으로 인용한 홉스의 주장이야말로 다중에 대한 참다운 정의이다. 물론 탈모던한 현대사회에도 이러한 정의에 딱 맞는 존재들이 있다. 소말리아 해적이나 중남미의 마약 재배자나, 이라크의 군벌들이나, 양은파와 같은 깡패들이 바로 홉스가 올바르게 파악한 전형적인 다중이다. 국제인신매매단이나 국제마약밀매단 역시 “정치적인 통일(단일성)을 기피하고, 복종을 거부하며, 지속가능한 협정을 체결하지 않으며,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주권자에게 결코 양도하지 않기 때문에 법적 인격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채로, 제국의 기관인 인터폴과 싸우는 전형적인 다중이다.
A가 인간이 아니라 원숭이라고 주장하려면, A에게 포유류와 영장류의 특성이 있다는 것은 전혀 증명이 되지 못한다. 촛불이 민중이 아니라 다중이라고 주장하려면 촛불이 대중이나 민중은 가질 수 없는 다중만의 고유한 특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 다중의 고유한 특성이란, 정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데에 관심이 있는 구심력적인 것이 아니라, 특이성을 고집하면서 일자로 환원되지 않고 떠나는 유목민과 같은 원심력적인 특성이다. 그러나 촛불은 그런 특성이 없었다. ‘명박퇴진’과 ‘재협상’을 요구하는 촛불이 어떻게 원심력적일 수 있는가? 그것은 국가와 중앙정치에 관심을 갖고 변혁시키려는 전형적인 구심력적인 운동이었다. 촛불을 다중이라고 하는 것은 모욕이다! 자본의 지구화에 맞서 자국의 신자유주의 정권과 싸우고 있는 전 세계 민중을 다중이라고 하는 것은 모욕이다! 촛불이 국가권력과 싸우고 국가권력을 변혁시킬 민중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떠나야 하는 원심력적인 다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반동적 주장이다. 자본의 전자구화에 저항하는 것이 반동적이 아니라 국가라는 형태를 통해 안전보장을 축구해야만 하는 전 세계 민중에게 다중이 되라고 말하는 것이 반동이다!
공통으로 생산한 비물질적 형태의 부
노동자계급을 이간질하기 위해 ‘비물질노동’을 강조하는 자율주의자들은 비물질노동의 결과물인 지식재와 정보재 그리고 금융산업이 올리는 부를 중시한다.
“비물질노동의 중심성은 그것이 생산하는 비물질적 형태의 재산이 갖는 중요성이 증가하는 데 반영되어 있다. … 최근에 사유재산으로서 보호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특허권, 저작권, 그리고 다양한 비물질적 재화….”(<<다중>>, 152)
“우리는 금융자본이 또한 또 다른 얼굴, 즉 미래를 가리키는 공통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금융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 다른 형태들보다 덜 생산적이지 않다. 자본의 모든 형태들처럼 그것도 화폐로 재현될 수 있는 축적된 노동일뿐이다. … 금융자본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미래의 공통된 생산능력들의 일반적 재현으로서 기능하는 경향이 있다.”(<<다중>>, 337)
“엄청난 추상의 힘을 갖고 있는 금융의 세계가 다른 공통적인 사회적 부뿐만 아니라 미래의 잠재력까지 훌륭하게 표현해준다.”(<<다중>>, 371)
이어서 조정환이 네그리 사마의 말씀을 암송한다.
“오늘날 부의 지배적 형태는 비가시적이며 비물질적인 형태로, 또 금융자본의 형태로 존재한다. 금융자본은 개별적 노동시간의 응축을 넘어 생산자들 사이의 사회적 보편적 협력이 가치형태로 표상되고 있는 것이다. 즉 생산자들의 공통되기가 가치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소통과 신용이 금융사회에서 가치실현의 핵심적 전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금융자본의 유통이 필요로 하는 확대하는 부채관계(대부와 원리금 상환)는 비물질적 사회적 노동협력이 필요로 하는 확장하는 소통과 신뢰관계의 가치적 재현이다. 탈근대의 부는 절대적으로 사회적 생산자들의 협력에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근거한다. 금융자본의 파생성(파생상품의 가능성)은 사회적 협력의 창조성과 풍부성에 의지한다.”(조정환, 326)
결국 금융이 부의 지배적인 형태이고 그것은 비물질적으로 그리고 공통적으로 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공통으로 생산된 공통의 부의 분배를 위해 소수의 통제에서 다중의 공통되기로! 바로 이것이 공통체주의자들의 핵심적인 기획이다.
세상에! 특허권, 저작권 특히 금융이 얻는 부가 다중이 공통적으로 생산한 창조적인 부라니! 2008년 가을 전 세계 민중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던 경제위기의 주범인 파생상품이 사회적 협력의 창조성과 풍부성에 의존하는 탈근대적 부라니! 에이즈 치료제의 독점적 특허와 지적 재산권은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이 이 약을 값싸게 이용할 수 있는 길을 막았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적 특허권은 전 세계의 사용자들에게 불법복제의 잠재적 범죄자라는 위협을 가하면서 천문학적인 이윤을 챙겼다. 그들의 이윤은 개발비보다 10배, 100배를 넘는 판매가를 강요하여 민중의 부를 약탈한 강도짓으로 얻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생산한 부가 아니라 범죄적인 약탈이다. 그들이 올리는 이윤은 분배의 대상이 아니라 부정되어야 할 범죄적 부당이익이다. 금융산업이 올리는 막대한 이윤 역시 금융산업 종사자들이 협력과 소통을 통해 공통적으로 창출한 부가 아니다. 그들이 올리는 이윤은 서브 프라이머들과 같은 민중들을 재물로 삼아 얻어진 것이다.
네그리주의자들의 이런 수작은 가령 깡패 조직원 30명이 시장의 상인들로부터 자릿세를 부당하게 뜯어 막대하게 부를 축적했을 때, 그들이 얻은 화폐적 부가 깡패들이 소통하고 협력하면서 공통적으로 생산한 부라고 찬양하면서, 공통으로 생산한 것이니 깡패두목님만 가지지 마시고 졸개들에게도 나눠주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모든 공동체주의자들이 범죄적 부를 부정과 금지의 대상으로 보고 있을 때, 오직 자본주의에 찌들은 공통이익체주의자들만이 이런 범죄적 부를 찬미하면서 공통으로 생산했으니 보장소득으로 나눠 갖자고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네그리가 말하는 ‘공통적인 정치적 기획’(<<다중>>, 277)의 핵심이다. “이른바 분배를 가지고 야단법석을 떨고 거기에 중점을 두는 것은 도대체 잘못된 것이다.”8)
절대적 민주주의
네그리는 다중의 민주주의 혹은 절대적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하지만 명료한 정의는 없다. “다중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위해 주권을 파괴하는 것이다. 주권은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건 불가피하게 권력을 일자의 지배로 제시하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침식한다.”(<<다중>>, 419) 그리고 “다중의 민주주의가 전통적으로 이해되어 온 직접민주주의와 거의 아무런 유사성도 가지고 있지 않고, … 경제적 생산과 정치적 생산은 일치하며, 생산의 협동적 네크워크들은 사회의 새로운 제도적 구조를 위한 틀을 제시해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삶 정치적 생산을 통해 협동적으로 창출하고 유지하는 이러한 민주주의를 우리는 절대적이라고 부른다.”(<<다중>>, 416)는 네그리의 주장은, 네트워크란 말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맑스주의도 국가사멸론을 얘기하고 대중의 자주관리 등을 얘기하니까 시비 걸지 말자. 그런데 네그리는 그 다중의 절대적 민주주의에 대해 “공통된 것에 기초한 다중의 이 새로운 과학은 다중의 어떠한 통일화도 또는 차이들의 어떠한 종속화도 포함해서는 안 된다.”(<<다중>>, 421)고 말하는 것이다.
맑스가 “개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제조건이 되는 사회”9)라고 할 때에는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와 통일이 있다. 하지만 “다중의 어떠한 통일화도 또는 차이들의 어떠한 종속화도 포함해서는 안 된다”고 할 때에는, 개개인의 권리와 이익은 결코 양도되거나 제약되지 않는다. 결국 개인은 공동체와 필요한 한에서만 소통하는 극단적 개인주의이고 이기주의자일 뿐이다. 뭉치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자율주의자들은 통일성을 인정할 수 없다. 소부르주아의 절대적이고 극단적 이기주의에 기반한, 그리하여 차이(개인)에 대한 어떠한 억압도 없는 민주주의가 바로 네그리가 선동하는 이상사회다. 그러나 그 세계는 개인주의자들과 이기주의자들로 넘쳐나는 야만적인 사회일 수밖에 없다.10) 결국 네그리가 말하는 절대적 민주주의란 전경련민주주의 혹은 아파트 값을 올리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부녀회민주주의인 것이다. 그것은 정의와 사랑에 기반한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기반한 공통이익체인 것이다.
관념과 몽상의 세계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네그리를 지금까지 15년째, 그리고 맑스를 30년째 읽고 있다”는 조정환은, 소부르주아 반동철학자인 네그리의 주장을 마치 암송경연장에 출전한 것처럼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 촛불이 다중이고 다중이어야 한다고 우기고 있다. 그러면서도 “‘네그리주의자’나 ‘다중주의’란 말은 사양하고 싶습니다. 나로서는 금시초문이고 앞으로도 쓸 생각이 없다”11)며,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비웃을 수밖에 없는 참으로 썰렁한 개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촛불은 국민을 배반한 정권이 물러나길 바랐다. 위정자가 잘못되면 그 위정자를 몰아내고, 체제가 민중을 배반하면 체제를 바꿔야 한다. 이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국가권력을 혐오하고 국가권력의 장악과 변혁론을 부정하는 자율주의자들, 특히 친미반공주의조차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채 금융자본이 약탈하는 재화마저도 창조적 부라고 찬양하는 네그리는, 존재하는 국민국가를 부정하면서, 노동자라는 처지의 동일성이나 민중이란 통일성으로 단결하지 말고, 위계적인 민주노총과 같은 낡은 조직도 만들지 말고, 자본의 노예되자는 비정규투쟁도 하지 말고, 촛불도 노동자도 노점상도 비정규직도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니까 공통의 이익을 위해 자본가들에게 빌붙어서 보장소득을 나눠주기를 간청하자고 한다. 다중에겐 적대하는 타자가 없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투쟁을 해야 할 대상이 없다. “타이밍이 결정적이다. … 삶정치적 다중의 무한한 노력의 오랜 시기가 지난 후에, 엄청나게 축적된 불만들과 개혁제안들이 어느 시점에선가 강력한 사건에 의해, 급진적인 반란의 요구에 의해 변형될 것임에 틀림없는”(<<다중>>, 424) 그날을 기다리며, 절대로 뭉치지 말고 ‘중심 없는 투쟁’이나 찬미하면서, 민주노총도 해체하고 네트워크로 뭉쳐서 메신저질이나 하자고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겐 투쟁이 없고 실천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기 존재를 나타내는 유일한 방법은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 변혁적인 실천좌파들을 씹고 이간질하는 것뿐이다. 네그리가 뉴라이트 게시판 수준에도 못 미치는 반공의 열망에 불타올라 <<제국>>과 <<다중>>에서 맑스주의를 씹는 것이나, 조정환이 좌파 지식인과 촛불을 이간질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장점이 있다. 현대사회가 개인주의화하고 이기주의적으로 되면 될수록, 특이성을 양보하지 않고 끝까지 차이로 남자는 극단적 개인주의는 호소력을 지닐 수밖에 없다. 적대적 투쟁은 낡은 것이라며 비대칭 투쟁을 찬양하고, ‘중심 없는 투쟁’과 운동의 ‘자생성’과 ‘떼지성’을 찬양할 때, 유구(唯口)좌파는 입만 놀리며 폼만 잡으면 된다. 지휘자가 없어도 오케스트라는 떼지성을 발휘해서 훌륭하게 연주될 것이다.
2009년 3월, 네그리는 런던대학교에서 열린 컨퍼런스의 발제문에서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국가에 대항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2)며 제국으로의 이행 테제 등을 포기했다.(서관모, 2009: 142) 2000년 <<제국>>을 발간하여 세계화를 찬양하고 미제국주의의 침략전쟁까지 제국의 경찰작용으로 칭송하면서 전쟁광 부시와 월스트리트의 기쁨조 역할을 하던 네그리의 대사기극이 9년 만에 막을 내리던 순간이었다. 허무맹랑한 제국론에 기초하여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유린당하는 전 세계 민중들이 국가와 관련한 정체성인 국민과 민중이 아니라, 제국과 자본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탈주를 감행할 다중이라는 반동적인 헛소리도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자율주의자란 ‘코뮤니즘의 모자를 쓴 자유주의자’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네그리주의를 학술적으로 엄밀하게 정의하면, 코뮤니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공통이익체주의’라는 외투를 입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찌들은 소부르주아지들의 반동적 요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늘도 네그리는 비물질노동에 종사하면서 연봉 수십만 달러가 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프로그래머와 월가의 투자상담사와 같은 혁명전위들이 소통과 협동을 통해 창조적으로 ‘공통되기’를 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건설할 그날을 기다리고 계신다.
채만수 소장이라면, 이런 네그리주의자들의 수작에 대해 무조건적 보장소득을 주장하는 기본소득론자들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진보적임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이여, 제발 사기 좀 작작 처라! 그리고 부끄러워할 줄 알라!”(채만수, 2010)고 말하겠지만, 필자는 이들 ‘공통이익체주의’ 판매업자들이 더 이상 노동자계급이나 변혁세력들에 대해 이간질이나 중상질만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각주)-----------------
1_ 이택광, “조정환의 촛불론 책읽기”, <논쟁>, 09.05.05.
2_ 네그리의 <<제국>>과 <<다중>>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김광석(2008)을 참조하라. 필자가 필명으로 쓴 이 글이 나온 후에 서관모 선생이 동지적인 애정에 입각하여 참으로 소중한 비판을 해준 바 있다.
3_ 네그리가 주장하는 제국은 실체로서의 제국이 아니라 관념으로서의 제국이다. “제국주의적 권력들 사이의 갈등 또는 경쟁이었던 것”은 하나의 현실이었음에도, 이 현실이 ‘단일한 권력이라는 관념’으로 대체되어 왔다고 주장하면서, 제국으로의 이행이 주권의 ‘내재성의 평면’으로의 이행(<<제국>>, 430), 즉 근대주권의 ‘홈패인 공간’으로부터 제국주권의 매끈한 공간’으로의 이행(<<제국>>, 257)이라고 주장하여, … 제국 장치를 ‘내재적 장치’로 규정함으로써 초국민적 권력장치들에 대한 유효한 공격을 위한 이론적 수단을 제거했다”(서관모, 2009: 140-41).
4_ 가난 혹은 빈자란 그것을 낳는 사회경제적 처지가 아니라 그 결과만을 나타내는 몰역사적 개념이다. 노동자가 가난한 것은 자본가 때문임을 알 수 있지만, 누군가가 빈자인 것은 부자 때문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결국 다중이 빈자이고 촛불이 가난하다는 소리는 국가권력과 자본과의 투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 점은 “다중에는 적대하는 타자가 없어서 투쟁이 불가능하다”는 서관모의 앞의 글을 참조하라.
5_ 무조건적 보장소득론=기본소득론은 교육, 의료, 보육과 같은 공적 분야나 주택, 전기, 수도 등 공공재를 탈시장화/탈상품화하는 방향이 아니라, 화폐의 분배를 통해 복지를 상품으로 소비하게 한다는 점, 안정적인 재원확보를 위해 결국에는 소비자인 민중의 부담으로 돌아갈 화폐주조 이익세나 탄소배출 거래세나 네이버iN 등에 참여하는 네티즌들의 나눔을 무슨 ‘그림자없는 노동에 대한 대가’ 운운하며, 자본을 부정하고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조세에 의존하여 자본과의 동반성장론을 편다는 점, 한국의 2009년 총생산=총소비는 약 1,000조인데, 총투자 29.9%, 정부지출 15.6%는 피할 수 없다면, 민간지출은 55.5%인데, 1인당 50만원의 기본소득은 263.9조원(26.4%)으로 추산되는 바, 개개인의 소비적 지출 혹은 화폐적 지출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이 민간지출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이런 점은 독일과 같은 유럽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그 부담의 대부분은 결국 자본이 아니라 급여생활자가 지게 된다는 점, 무상이어야 할 교육과 의료, 주택 등 공적 복지를 심각하게 제약한다는 점 등 수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또한 북유럽 복지국가의 GDP의 50%가 넘는 조세는 기본소득과 같은 무차별적인 복지가 아니라 교육, 의료, 보육, 질병, 노후보장, 실업수당과 같은 보편적이거나 선별적인 복지에 지출되고 있다. 결국 기본소득론은 사회적으로 존중되어야 할 공동체적 가치를 해체하는 데에 이른다(박석삼a, 2010 참조). 한편 자본의 부담을 늘리거나 공적의료를 실현하는 방향이 아니라, 가입자가 의료보험금을 더 내서 보장률을 높이자는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은, 노무현 정권 5년 동안 1인당 보험료가 79% 인상되었어도 의료자본과 제약회사의 탐욕 때문에 보장률은 59%에서 64%로 겨우 5% 증가한 것을 보면, 조선일보의 칭찬을 받을만한 운동임을 알 수 있다. 기본소득론 역시 노동자들이 100년도 넘게 투쟁하여 쟁취한 여러 가치들을 자본보다 앞장서서 부정하는 희한한 주장이다.
6_ 공산주의라는 번역은 잘못된 것이다. 공동체주의가 적절할 것이다.
7_ 자율주의자인 들뢰즈는 현대인이 유목민적 심성을 가졌다며 노마디즘이란 단어를 퍼뜨린 바 있다.
8_ 맑스, <<고타강령 비판>>.
9_ 맑스, <<공산주의자 선언>>.
10_ “여기서, 네그리가 이야기하는 절대적 민주주의의 작동이 곧 권력관계의 한 변용태라는 점이 아주 확실하게 드러난다. 절대적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처럼 주권의 영역을 통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 민주주의는 특이성들이 극한까지 발현되어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는 상태를 가리키므로 주권의 영역을 통해 매개된 개인의 계약에 의해 작동되는 직/간접 민주주의 모델과는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엔 없다. 그동안 난 네그리가 근대 주권의 형식이라고 매개를 엄청 강조했기에 매개, 매개 이러기만 했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는데, 이런 식으로 정의를 하게 되니 매개라는 기제가 무엇인지 아주 정확히 눈에 들어온다. 주권적 권력의 작동이 곧 매개라는 기제이다. 이것이 제거되어야지만 민주주의는 그 논리적 극한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직접적으로 세계 경제, 비물질적 경제라는 공통성을 형성하고 있는 특이성들의 극한에 이르는 발현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지, 매개에 의해 통합되고 억제되는(되어야 하는) 개인이 극한에 이르는 발현을 통해서는 모순에 이를 뿐이다. 즉 자유로운 개인이 그 극한에 이르게 되면 홉스의 전쟁상태가 나타날 따름이며,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인 자유가 그 모순에 빠지게 되는 상황을 나타낼 뿐이다.” 저련, <주권, 권력관계, 절대적 민주주의>, http://cafe.naver.com/abcde1.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368.
11_ 조정환, <논쟁>, 09.05.11.
12_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네그리가 마치 communist(공동체주의자)인 것처럼 얘기하고 있지만, 그는 실은 communism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commonist(공통이익체주의자)라는 점이다. 또한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변혁시키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대항하자(be against)’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명박 등의 신자유주의 정권을 몰아내고 민중적인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냥 대항만 하자는 얘기이다.?적대적 투쟁대상이 없는 대항(자본가 계급과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착취에 대항하자는 것과 같은 얘기)에 대해서는 서관모의 앞의 글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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