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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 6-9 제2부 촛불속에서 pp199-236
들어가며
필자는 노무현 시절 내내 주말이면 거리에 있었다. 파병반대, 평택미군기지 반대, 한미 FTA 반대, 평택, 울산, 부산 등등 하루도 쉴 날이 없었다. 주말마다 계속된 파병반대는 1년 이상 계속되었는데 한번 정도만 빠지고 계속 나갔다. 2008년 촛불항쟁에서도 항쟁이 시작되었던 5월 2일 청계광장에서부터 8월 15일 밤 동대문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참가하였고, 새벽이 되어 대오가 해산할 때까지 현장에 있었다.
필자가 이처럼 집회에 참석하는 이유는 ‘왜 이렇게 사람들이 안 나왔냐?’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대중이 있는 곳에 그리고 현장에 함께하는 것을 활동가의 품성으로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큰 역할과 주도적인 역할은 못할지라도 쪽수라도 채우는 게 가장 큰 덕목이고 기본적인 품성이 아니겠는가?
실천을 했으므로 평가를 해야 한다. 집단적 실천이었으므로 집단적으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함께 진행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 촛불 속의 한 사람으로서 주관적인 서술을 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유기적 지식인이어야 하지만, 3류 소활동가로서의 필자의 처지와 무능력 그리고 무딤 때문에 많은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촛불 속에서 필자가 무엇을 고민했는지를 함께했던 촛불들과 공유하고 싶고, 유기적 지식인이기를 지향하는 필자의 동지들과 공유하기 위해 필자가 주로 활동했던 촛불연행자모임을 중심으로 서술해 보기로 한다. 여기에서는 필자가 겪은 모든 일들이 아니라 필자와 모임의 동지들이 부딪쳤던 몇몇 사안에 대하여 어떻게 풀어나갔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촛불연행자모임의 출발
포로가 되었다는 것은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7월 5일 기만적인 국민승리선언이 있은 뒤, 7월 10일 보신각에는 500여명의 시민이 모였다. 집회가 끝나자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인도를 통해 청계를 거쳐 명동을 향했다. 을지로 입구에서 대오가 잠시 무단횡단을 하자 경찰이 대오를 절단하고 행진을 가로막았다. 대오는 흩어지고 50-60 명 정도 남은 상황에서 잠시 소강 상태였는데 전경지휘관이 시민들에게 욕설을 하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과 다투다가 체포하라고 하였다. 항의하던 두 명의 젊은 청년이 필자 쪽으로 도망쳐오다가 전경에게 붙들렸다. 한 사람을 떼어내고 두 번째 청년까지 떼어냈을 때 화풀이로 연행되었다. 악착같이 발악하고, 닭장차 속에서도 항의하고, 미란다 원칙의 고지도 연행 후 5시간 만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다음날 아침에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냈다. 용산 경찰서에는 여섯 사람이 연행되었는데, 필자만 따로 조사를 받았다.
44시간 만에 풀려나면서 연락처를 교환하고 연행자모임 카페를 만들기로 하였지만, 며칠이 지나도 카페가 만들어지지 않아 일주일 만에 다시 모였다. 모두가 카페를 만드는 데는 공감하였지만 맡을 사람이 여의치 않아서, 다음날인 7월 18일 청년 백수인 앨리와 필자가 ‘공안견찰과 정치떡찰에 반대하는 촛불연행자모임’이란 이름으로 카페를 개설하였다.1)
당시 연행자가 매일 발생하였고 검찰은 벌금으로 시민을 협박하고 있었다.
“얼마 전 떡찰이 연행자들에게 100-300만원의 벌금을 물리겠다는 개수작을 한 바 있었습니다. … 무려 석 달 동안 촛불 외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평화적인 시위에 대해 공권력을 빙자하여 군홧발과 방패, 물대포 등 온갖 범죄적인 불법행위를 멈추지 않는 견찰은 공권력을 빙자한 조폭에 불과할 것입니다.
연행자 동지 여러분! 광주항쟁에서도 보았듯이 이기면 민주항쟁의 유공자이고 지면 폭도가 됩니다. 우리가 승리하면 다 끝나는데, 이기면 국가보상금까지 나올텐데, 왜 싸움이 끝나지도 않은 이 시점에서 우리가 벌금을 걱정합니까? 지금은 오직 촛불의 승리를 위해 더욱더 투쟁의 의지를 끌어올릴 때일 뿐입니다. 최후의 승리를 위해 끝까지 투쟁합시다!!!”(발표글 5)
7월 하순부터 아고라에 이런 글을 매일 올리면서 연행자들의 단결과 투쟁을 선동하였다. 8월 초에 대략 300-400명의 회원의 가입이 이루어졌고, 8월 12일경에 40명이 넘는 연행자들의 첫 정모가 이루어졌다.2)
집회장과 가까운 종로 근처에서 적당한 음식점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삼겹살을 굽고 자기소개를 하면서, “난 그때 어디 있었는데”, “그때 앞 쪽에서 어떤 사람이 어땠는데 당신이었냐”는 등 서로가 참여했던 투쟁을 회고하면서 함께 싸웠던 동지들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8.15를 앞두고 갈수록 거세지는 진압과 투쟁 속에서, 동지에 대한 신뢰와 애정 그리고 저항의 의지를 확인하는 소중한 자리였다. 이후에도 몇 번의 정모와 총회 등의 자리가 있었지만, 이날 참석했던 동지들의 모임에 대한 애정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이날 정모에는 8.15를 앞두고 ‘대통령님 대화해요’라는 엽서보내기 운동을 하던 소금사탕이 와서 끝장연좌를 선동했다. 체포조가 오더라도 도망가지 않고 풀려나도 다시 연좌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에 그 슬로건이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연행에 굴복하지 않고 꺾이지 않는 저항의지를 보여주자는 점에서 많은 회원들이 공감했고 즉석에서 6명의 회원이 자원했다. 이런 연유로 연행자모임에서는 815평화행동단을 형제카페로 지정하고 항상 두 조직의 연대를 중시했다.
이 날 식비는 60만원이 넘게 나왔지만 걷혀진 돈은 절반이 안 되었다. 회비를 1인당 10,000원으로 하되, 직업이 없거나 부담이 가는 사람은 내지 않아도 좋다고 했기 때문이다.3) 평범한 직장인에게야 큰 부담이 안가는 회비이지만 실직자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는 배려에서였다. 기계적인 균분(n분의 1)은 공평한 것 같지만 결코 공평하지 않다. 같은 촛불이고 같은 회원이라면 미안하거나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같이 어울리고 뒤풀이도 같이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있는 사람이 좀 더 내되, 없는 사람에게 부담감을 안주는 것이 공평한 것이다. 촛불이 월수입 100만 원 이상의 소득이 있는 사람을 자격으로 삼지 않은 이상 기계적인 균분 방법을 따라야 할 이유가 없다.4) 이 세계가 돈이나 소득이나 재산 때문에 차별받는 세상이라면 최소한 동지들 내부에서는 그러한 차별이 없어야 하는 게 올바른 생각이고, 이러한 방침은 이후에도 연행자모임의 모든 공식적인 모임에서 관철되었다. 그럼에도 가을이 끝나갈 무렵에는 열성적이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그 중에는 뒤풀이 비용이나 교통비가 부담된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민주주의에 대하여
“촛불은 본질에 있어서 집단지성이 이끄는 광장민주주의이고 직접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국가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택하고 있고, 국민은 말로만 주권자일 뿐 선거 때만 주권을 행사하고 평소에는 국가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습니다. 주인인 국민을 주권자가 아니라 유권자로 보는 것이 이 체제의 비극의 시작인 것입니다. … 저는 우리 조직이 촛불정신에 투철하기 위해서는 구태의연한 우리 주위의 조직처럼 회장을 뽑고 총무를 뽑고 그들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모두가 주인으로서 동등하게 참여하는 새로운 직접민주주의의 틀을 구현해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발표글 7)5)
흔히 말하듯 우리들의 삶이 돈과 물질의 노예라는 것은 돈과 물질이 인간이 만든 것임에도 인간으로부터 독립하여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돈과 물질만이 아니라 국민이 뽑은 대통령과 국회의원도 국민으로부터 독립하여 국민을 배신하고 소외시키는 것이 이 체제의 경제적인 소외이고 정치적 소외인 것이다.
“그렇다면 촛불의 미래 혹은 촛불의 이상 즉 정치적 소외의 극복은 어떠한 모습일 것인가? 그에 대한 해답은 촛불이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대중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자주적인 직접행동에 기반한 광장의 민주주의 혹은 집단지성이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어떠한 기성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광장에 평등하게 나서서 모두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참여한다는 점에서 직접민주주의의 이상을 품고 있는 것이고, 실은 이러한 직접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도 1871년의 파리코뮌이나, 러시아혁명 때의 평의회(소비에트), 광주항쟁 때 도청광장에 모여 항쟁지도부를 선출하고 시민군을 결성하여 싸운 사례에서 보듯 피치자에 대한 억압의 도구로서의 본성을 갖는 국가라는 권력장치를 부정하는 즉 억압과 소외의 기제를 부정하는 혁명적 민주주의에 다름 아닌 것이다. 억압과 소외를 부정하고 참다운 민주주의와 평등세상을 꿈꾸는 모든 실천은 이처럼 궁극적으로 직접(혁명적)민주주의의 틀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러한 직접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대중의 자기 통치, 혹은 자기 지배의 실현에 다름 아니다.”(발표글 13)
만약 미친 소 수입의 결정권이 국민에게 있었다면 촛불은 이명박과 싸울 필요도 없었다. 주인을 배반할 가능성이 있는 대리주의가 아니라, 국민이 직접 결정하고 직접 실천하는 즉 의결과 집행의 통일은 직접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모든 일을 모든 국민이 한 자리에 모여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매개 혹은 대리의 문제가 대두된다. 사장이 부장에게 대리시킬 때 부장은 사장을 배반하지(소외시키지) 않는다. 즉 대리의 성격이 문제다. 파리코뮌에서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이 문제를 파견제와 소환제6)로 해결했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고안해낸 것이 ‘탈권위와 탈특권에 기반한 헌신의 원칙’이었다. 즉 모든 선출직 혹은 앞장서는 사람은 ‘특권 없는 머슴’ 혹은 ‘탈권위적 헌신체’여야 한다. 이 원칙은 카페를 개설한 첫날 <모임취지와 운영방안>에서 “민주적으로 합시다. 운영진은 머슴입니다. 앞장서는 사람은 아무런 특권이 없습니다. 회원의 뜻에 따라 헌신할 특권만 있습니다.”고 제시되었다.(발표글 4)
“그러므로 단지 운영의 편의상 대표와 머슴단을 두되, 모든 일은 언제든지 함께 모여 결정하고 실천하자는 취지에서 모임의 기본운영방침과 틀을 제시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대표와 운영진에게 맡길 때 회원들은 수동적으로 되고 소외될 것입니다.7) 바로 이런 까닭으로 머슴단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고, 모든 종류의 회의에 가령 운영진 회의에도 모든 정회원이 마음대로 참석하여 동등하게 토론하고 결정할 수 있는 개방적인 운영을 하려고 해왔던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결정에서 최대한 모두에게 개방하여 함께하는 것이 촛불정신에 합치할 것입니다.”(발표글 7)
연행자모임의 규약은 이런 이상과 원칙하에 설계되었다.
“본회의 모든 활동은 촛불정신(광장민주주의 또는 직접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운영하되, 일상 업무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헌신할 의무 외에 아무런 특권이 없는 머슴단과 머슴단 대표를 언제든지 선출하고, 소환할 수 있다.(⇒머슴단회의의 의장은 머슴단이 1개월씩 교대로 맡되, 머슴단 회의에서 호선한다.)8)
정회원은 머슴단 회의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회의에 참여하여 발언권과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회의의 소집자는 평회원들이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해야 한다.
머슴단은 개방적인 회의체로 운영하며, 우리 모임의 모든 주요업무에 대하여 심의하고 결정한다.”(참고자료 7)
이 규약의 가장 큰 특징은 “개방적 회의체로 설계되어 정회원이면 사실상 운영위원과 동일한 권리”(발표글 15)를 갖기 때문에, 선출된 사람들의 권한이 일반 회원과 똑같다는 점이다. 즉 특권은 없고 헌신할 의무만 남은 것이다. 몇 줄 안 되는 규약이기는 하지만, 의결과 집행의 통일, 파견제와 소환제, 특권 없는 헌신체, 개방적 회의체, 이 정도면 지구상에서 가장 진보적인 규약이라고 할 수 있었다.9)
탈권위와 개방
촛불 연행자들이 가장 중시해야 할 점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저항체의 건설이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민주적인 훈련이었다. 민주주의란 제도만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참여하는 사람들이 민주적으로 단련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민주주의의 이상과 탈권위적 헌신이 강조되었다.
“우리 모두가 직접민주주의 한번 제대로 해보자고 했으면서도, 사실 우리들이 그동안 겪었던 모든 조직형태가 권위주의적이고 위계적이었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없으면 우리의 이상과는 다른 행동을 하면서도 별 문제의식을 못 가지고 비민주적 행동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 위험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머슴단은 회의체로 운영한다고 규정했다면, 머슴단은 집행부나 지도부가 아닌 의사수렴에 봉사하는 기구여야겠지만, 만약에 머슴단이 자기들끼리만 정보를 독점하고 판단하고 집행한다면, 혹은 대표가 혼자서 판단하고 지시한다면, 설령 그들이 아무리 훌륭한 판단력과 도덕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혹은 그게 훨씬 능률적일지는 몰라도 모든 사람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중시하는 직접민주주의나 광장민주주의와는 다른 형태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정보의 최대한 공유, 사전제공, 개방된 충분한 토론, 경과의 보고, 평가와 비판의 기회의 제공, 이런 모든 것들은 자각있는 단체들에선 이미 시행하고 있는 민주적 요소들인데, 어쨌든 촛불조직의 앞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이런 점에 세심한 감각과 배려가 없으면 비민주주의와 싸우는 우리들이 스스로 비민주적인 행동을 닮아가는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발표글 9)
“이를 위해서 모든 회의는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는 취지와 함께 사전에 공지되어야 한다는 것과, 모임의 사정과 사업에 대해서 수시로 보고하고, 안건에 대한 이해도의 공유를 위해 회의안 역시 충분히 사전 공지되어 토론될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소홀히 할 때 연행자모임 역시 민주주의가 형해화 될 위험이 있다고 할 것이다. 최대한 함께 알고 함께 판단하고 함께 실천하고, 보다 더 많은 성원이 참여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을 하는 것에 민주적 조직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할 것이다.”(발표글 13)
민주주의란 결국 모두가 평등한 인격의 주체이고 판단과 실천의 주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불리한 것은 우리말에 낮춤말이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다가도 가까워지면 형님 동생 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친해지자면서 서로 반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만큼 비민주적인 것은 없다. 왜 서로 가까움을 확인하기 위해서 말을 트거나 낮춰야 할까? 그것은 권위적인 따라서 비민주적인 문화의 유산일 뿐이다. 민주주의란 끝까지 서로 높여주는 것이다.10)
민주적이고 개방적 회의체에 대한 실험과 실천은 계속되었다.(발표글 15) 단지 모임내에서만이 아니라 연대해야 할 다른 카페의 사람들까지도 함께 논의하고 결정했다. 2009년 들어 모금운동과 후원회를 추진하면서부터 머슴단만이 아니라 머슴단이 아닌 회원들이 더 많거나, 연대하는 타 카페의 사람들이 더 많은 회의구조가 정착되었다. 우연하게 동석한 사람이라도 촛불의 사업이기 때문에 촛불이라면 누구나 동등하게 논의에 참가할 수 있었다. 연대라는 것이 단지 이름만 빌려주는 연대가 아니라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고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민주주의와 연대를 익히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모임 속에는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사노련의 좌파까지 너무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한편으로만 치우치면 단결을 해치고 민주주의를 해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점을 자각하고 단결과 연대를 위해서 반대파와 불만파들을 머슴단과 회의에 끌어들이는 작업이 지속적이고 의식적으로 추진되었다. 머슴단에도 평소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 좌파적 성향만이 아니라, 노무현 성향이거나 애국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 입장이 강한 사람들, 투쟁파가 아닌 자구파들을 의식적으로 합류시켰다. 촛불연행자후원회를 추진할 때에도 부정적 입장이었던 촛불시민연석회의와 안티엠비에게 기획단회의에 파견을 요청하였다. ‘함께 하자’와 ‘민주적으로 하자’는 우리 모임의 핵심 사업원칙은 끝까지 관철되었다.
그리고 놈들의 탄압과 감시 때문에 혹은 프락치에 대한 우려 때문에 방어벽을 쌓는 경우가 있었다. 카페에서 ‘읽기’와 ‘쓰기’ 권한을 제한하여 소수 회원들만 사실상의 논의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한 모임의 판단은, 프락치는 어떤 경우에도 막을 수 없다는 것과 프락치를 막기 위해 방어벽을 쌓는다면 프락치는 볼 수 있지만 일반회원은 못 보게 된다는 것이었다. 무슨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혁명적 봉기를 준비하는 조직이 아닌 바에야 차라리 모든 것을 공유함으로써 오히려 위축에서 벗어나 당당한 실천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오프에 한번이라도 결합한 사람들이 모두 공유할 수 있는 방어벽은 초기에 한두 달간 운영되었다. 방어벽 안에서는 매일 공유해야 될 사안과 함께 판단해야 할 사안이 제출되었고 실질적인 토론이 이루어졌다. 같은 회원들 내에서 자꾸 등급을 만들어 폐쇄적인 방을 만들고, 소수만 공유하는 것은 그만큼 특권이고 차별이고 권위적이며 비민주적인 것이다. 우리 모임의 경우 비연행자의 경우 처음에는 ‘후원회원’으로 분류하다가 나중에는 ‘정회원B’로 바꾸고, 모임의 대표가 될 자격 이외에는 정회원과의 모든 차별을 없앴다. 모든 정보는 모든 회원(준회원과 가입신청자도 포함하여)에게 최대한 개방하고 공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런데 어떤 결정과 행동이 비민주적이라고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은 쉽지만,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민주적이라고 비판하는 우리들 자신이 한번도 제대로 된 민주적인 조직생활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군대는 물론이고 가정, 직장, 학교, 이 모든 것들이 실은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원리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비민주적이고 권위적인 것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우리 자신이 세뇌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발표글 13)
아무리 규약이나 제도가 훌륭해도 운영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머슴단은 3개월에 한번씩 주기적으로 교체되었지만, 민주적 운영에 대한 경험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표로 선출된 사람들이 그것을 명예나 권위로 생각하기도 하고, 때로는 독단적으로 때로는 폐쇄적으로 때로는 권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결국 대표직을 없애고 머슴단내의 호선으로 의장직을 돌아가면서 맡는 제도로 바뀌었다. 열성적인 사람은 누구나 모임의 의장이 될 수 있게 되자 권위주의는 많이 극복되었다. 더 이상 의장이나 대표직을 명예나 권위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11)
“저는 촛불이라면 우리의 뇌리에 박혀 있는 모든 종류의 비민주적이고 반인간적이고 차별적인 권위를 인정해서는 안된다고 믿습니다. 누군가가 이 사회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무슨 지위에 있든 간에, 촛불 속에서는 단지 순수함과 열정과 도덕만으로 판단된다는 것입니다. 촛불 속에는 기왕에 유명하고 명망있는 사람도 있고, 국회의원도 있겠지만, 직접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은 모든 종류의 권위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87년 세대나 386이 과거에 한때 순수했을지라도 기존의 권위에 굴복하고 물드는 순간 그들은 순수함을 잃고 단지 과거의 명망을 자산으로 삼아 기존의 권위에 편입되었지만, 촛불은 집단지성의 힘으로 순수함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순수한 정열로 남기 위해선 끝까지 억압적인 사회 속에서 형성된 복종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때문에 무슨 명망과 권위를 내세울 때 그는 이미 촛불정신과는 먼 사람과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끝까지 이름없는 하나의 촛불로서 저항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발표글 7)
우리 모임에는 인터뷰 요청이 참 많았다. 68혁명 이후 독일 녹색당에서는 개인의 이름을 밝히거나 얼굴을 드러내는 인터뷰를 금지한 적이 있었다. 새로운 권위를 낳을 가능성을 배제하자는 것이었다.12) 그러나 우리 모임은 촛불연행자들이 자기 정당성을 당당하게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가급적 고르게 기자회견의 기회를 갖도록 했다.13) 아고라의 베스트 작업도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홍보책임자가 하도록 했다.14) 이처럼 탈권위주의를 위한 노력은 모든 측면에서 꾸준히 진행되었다.
사실 ‘직접민주주의의 이상을 추구하는 혁명적 민주주의’란 거창한 것 같지만, 실은 모든 것을 함께 상의하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실천하는 민주주의이다. ‘함께 상의하는 민주주의’는 우리 모임에서 ‘탈권위적 헌신’ 혹은 ‘특권없는 머슴론’과 함께 ‘개방적 회의체’의 실질화로 관철된 것이다.
저항의 원칙
“촛불연행자는 촛불임과 동시에 연행자라는 이중규정에 의하여, 촛불의 하나로서 촛불의 승리를 위해 투쟁하고, 공안탄압의 희생자라는 측면에서 공안탄압을 저지하고, 연행자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공안탄압에 저항한다. 우리 모임의 투쟁은 헌법정신과 촛불정신에 따라 실천한다.”(참고자료 7)
이것은 연행자 모임의 규약의 일부이다. 필자는 연행자모임이 당연히 저항에 앞장서야 된다고 믿었지만, 다른 지역촛불조직이나 중앙의 의제촛불조직과는 다르게, 유일하게 처지의 동일성에 기반한 대중조직이었다. 가령 자주적 저항조직인 민처협과 같은 조직에서는 민족반역자 처단이라는 명제에 대해 시비가 있을 수 없다. 즉 의지와 사상의 공동체인 것이다. 하지만 연행자모임은 마치 노동조합처럼 연행자라는 처지의 동일성에 기반한 대중조직이었다. 단순히 정보나 도움을 얻기 위해 가입한 사람도 있고, 법률적인 지원과 자구 노력만 하자는 사람도 있고, 친목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창립총회를 앞두고 모임의 정식명칭인 ‘공안견찰과 정치떡찰을 반대하는 촛불연행자모임’에서 ‘공안견찰과 정치떡찰을 반대하는’이라는 관형구가 부담스럽다면서 이를 빼자는 의견이 나왔고, 총회에서는 ‘촛불연행자모임’을 정식명칭으로 하되 관형구를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타협안이 통과되었다.(발표글 7) 그리고 연행자들은 대부분 앞장서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다른 모임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점은 모임의 발전에 원심력으로 작용하였다.
8.15 이후 대규모 저항이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모임의 기조에 대해서 논란이 생겼다. 한편에선 연행자들이 앞장서서 싸우자는 투쟁파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선 싸우려면 다른 투쟁조직에 가서 싸우고 자구적인 사업만 하자는 자구파가 있었다. 이때에 우리 모임의 결론은 공존하자는 것이었다. 투쟁파와 자구파로 갈리지 말고 서로 비난하지 말고, 싸울 사람이든 싸우지 않을 사람이든 서로 불편하게 대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잠잠해졌지만 이 갈등의 골은 깊었다. 침묵하는 다수, 눈팅만 하는 다수의 의지는 무엇이었을까?
인권팀장 사건
8월 하순 당시 우리 모임에는 우리 모임의 고문으로 위촉을 받은 민변의 변호사들이 운영하는 법률상담게시판이 있었다.15) 그런데 어느 날 대책회의 인권팀장이라는 자가 제멋대로 상담에 답하는 글을 올리고 있었다. 마치 남의 병원에 가서 의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의사 자격도 없는 사람이 의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의사인 양 진찰을 하는 것과 같았다. 당연히 사리를 따져서 예의를 지킬 것을 요구했지만, 자기도 상담할 권리와 자격이 있다는 둥, 무슨 인권탄압이라면서 필자의 독재 하에 신음하고 있는 연행자모임을 반드시 구출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런 깽판에 호응하여 연행자도 아니면서 시민단체 출신인 모 회원이 필자가 1,800개나 되는 대책회의에 대든다는 등 소란을 멈추지 않았다. 인권팀장의 소란은 너무나 예의가 없고 몰상식했기 때문에 많은 회원들의 비판을 받았다.16) 이 사안은 자주적 조직에 대한 침해이고 참으로 권위적인 작태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필자가 빨갱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모임의 안과 밖에서 필자와 우리 모임이 빨갱이이고 너무 투쟁적이라는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17) 모임의 사업과 투쟁에 앞장서지 않는 회원 7-8명이 안티 빨갱이 회합을 가진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모임이 애국촛불전국연대와 민민연의 지지파로 갈린 것도 이때부터였고, 투쟁파와 자구파의 갈등이 표면화된 것도 이때부터의 일이었다.
“지난번에 대책회의가 도움을 주겠다면서 자신들에게 합류해 줄 것을 제안한 적이 있었고, … 한동안 공지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들의 연락을 받고 제안의 내용을 알아본 바, 너무 허무맹랑해서 그 제안을 삭제키로 합의한 바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미 거절의 뜻을 명백히 밝혔는데도, 대책회의의 인권팀장은 저희에게 아무런 상의도 없이 자신에게 허용되지도 않은 게시판에 대책회의의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한 바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무례하고 뻔뻔한 사업방식과 작풍에 대하여 분노를 금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삭과 자퇴를 요청하고 듣지 않으면 강퇴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만약 우리가 대책회의와 손잡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가지고 논쟁한다면 우리는 분열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
침묵하는 다수와 투쟁적인 소수가 함께하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비록 앞장은 서지 못하더라도 앞에서 투쟁하는 사람에게 박수치고 지지하는 사람 심지어 침묵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모임에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투쟁을 하는 사람이 소수일지라도 투쟁을 안 하는 조직으로 하자든지, 혹은 투쟁을 비난하고 방해한다면 그분들은 이 조직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 투쟁하는 사람도 당당히 함께할 수 있을 때 이 조직은 깨지지 않고 또 존재가치도 있을 것입니다. … 마찬가지로 대책회의를 혐오하는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길은 대책회의에 대한 분란이 없어지는 것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이 점에도 형식적 다수결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면 대책회의와 함께하겠다고 하는 순간 그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는 소수는 이 모임을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발표글 6)18)
촛불카페들은 2008년 가을이 전성기였다. 아직 열정이 살아 있을 때 양적이고 질적인 성장을 했어야 했고 그 점은 우리 모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생긴 지 한 달 반밖에 안 되는 모임을 인권팀장이 흔들어버린 뒤 후유증은 참으로 컸다. 모임을 앞장서서 맡을 사람이 없었다. 간신히 한 사람이 나섰지만 한 달도 못되어 그만두고 2008년 말까지 대표가 공석이었다. 머슴들은 투쟁적이고 열의가 있었지만 모임은 표류하였고 카페는 활기를 잃어갔다.
정식재판청구운동
모임에서는 카페가 개설되자마자 7월 하순부터 단호한 정식재판 청구운동을 선동하였다.
“얼마 전 떡찰이 연행자들에게 100-300만원의 벌금을 물리겠다는 개수작을 한 바 있었습니다. 정식재판만 청구해도 몇 십 만원으로 줄어들 뿐만 아니라, 검찰조서 작성과 1심, 2심을 거치면 최소한 6개월 후에나 부과될 것이 분명한데도, 이 시점에서 떡찰이 이런 발표를 한 이유는, 연행자들을 도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촛불에 참여하려는 시민들에 대한 위협이 목적임은 분명할 것입니다.
우리가 촛불을 든 것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듯이, 연행자들 또한 떡찰의 이러한 범죄적 도발에 대하여 결코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이길 것입니다. 우리가 모인 것은 벌금을 적게 내고 벌금을 깎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당한 공권력에 맞서서 무죄를 주장하고 쟁취하기 위해서입니다. 법정에 섰을 때 우리는 결코 온정을 구걸하지 않고 무죄를 쟁취하고 헌법정신을 관철할 것입니다.”(발표글 5)
연행자가 발생하면 주말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행자들의 접견을 해왔던 민변에서 9월말 촛불연행자들의 정식재판 무료변론을 결정하였다. 참으로 고마운 결정이었고, 우리 모임도 적극 홍보와 안내에 나섰다. 총 1,300 여명의 연행자 중 7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정식재판을 청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변호사들이 참으로 헌신적으로 촛불과 결합해 주었다.
애국촛불과 민민국
그 무렵 애국촛불전국연대와 민생민주국민회의(민민국)의 결성이 추진되었다. 두 조직 모두 민족주의나 애국주의의 경향이 강했지만 양자는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애국촛불은 촛불조직들의 자주적인 연대체였지만, 민민국은 사실상 대책회의가 촛불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 명망가들을 앞세워 간판만 바꿔 단 것이었다. 투쟁의 발목이나 잡았던 대책회의가 “촛불이 투쟁일변도로 가두에 나섰기 때문에 패배했다”는 인식을 깔고서, 무슨 촛불을 계승한다면서 민생운동 즉 민생을 주장하는 시민운동을 하겠다는 것은 기왕의 촛불항쟁에 대한 아무런 반성도 없이 촛불들의 자주적 운동을 낡은 틀로 가둬버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명박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결집해야 된다면서(조직노선),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는 슬로건은 도저히 함께할 수 없다는 온갖 시민단체와 신자유주의 세력인 민주당까지 끌어모아 자칭 국민적 지도체를 자임하면서(정치노선), 모든 국민이 편하고 즐겁게 참여하는 무슨 페스티발이나 소비자 운동이나 하겠다는(투쟁노선) 민민국은, 촛불의 투쟁과 성장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또다시 촛불투쟁을 방해하고 억제하는 힘으로 작용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결코 촛불의 연대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 애국촛불시민연대에 대하여는, 일단 자주적인 촛불들의 연대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그 주된 의제가 (정치노선) 우리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신자유주의나 비정규직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뉴라이트 반대나 친일파 청산을 중심에 놓고 있는 점이 촛불의 다양성이나 당면과제에 대한 실천을 협소하게 만들 우려가 있습니다.”(발표글 10)
민민국은 ‘시즌2’를 운운하며 청계광장에서 ‘민주주의 페스티발’19)이라는 행사를 한 것과 기왕의 시민압력운동단체들처럼 기자회견운동을 한 것 외에는 운동의 성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애국촛불과 경쟁하면서 촛불조직을 줄 세우려는 작태는 개탄스러웠다. 연고를 앞세우며 촛불조직들에 개입하고 영향력있는 사람들을 포섭해가는 것은 자주적 조직들을 분란에 빠뜨리는 경우가 많았다.20)
저항들
검찰은 2008년 10월 1일과 2일 양일간, 촛불집회 불구속 입건자 700여명을 송치 받아 그 중 90여명을 50만원에서 300만원까지의 벌금형으로 약식기소를 했다.
우리 모임은 10월 7일 프레스센터에서 ‘단 한 푼도 낼 수 없다. 우리는 저항한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약식명령에 대한 불복과 정식재판의 청구, 폭력경찰에 대한 고소 및 고발, 헌법소원 등의 방법을 통해 끝까지 불복투쟁을 펴나갈 것이며, 최악의 경우 3심이 끝나서 벌금이 최종 확정될 경우에도 ‘단 1원도 낼 수 없다! 우리는 저항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워 벌금납부 거부 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을 밝혔다. ‘대박이 났다’고 할 만큼 언론의 관심도 뜨거웠고, 동지들도 고무되었다.
10월 18일에도 탑골공원 앞에서 기자회견 후에 ‘촛불형사처벌 규탄 및 집회/시위 자유 쟁취 결의대회’(제1차 촛불연행자대회)를 가졌다. 각자가 받은 약식명령장을 찢어버리고 집회를 마친 후 ‘이명박은 물러나라’를 외치며 청계광장까지 당당하게 가두행진을 했다. 많은 시민들이 환호했고 시민들과 촛불들은 서로 고무되었다. 2기 머슴단은 굉장히 열성적이고 추진력이 강했다. 어청수를 꿇어앉히고 달걀세례를 퍼붓는 퍼포먼스를 비롯해 약식명령장을 찢어버리는 행사 등 모든 프로그램과 출연자 그리고 기자회견문과 발표자를 치밀하게 준비했다.
우리 모임의 강력한 반발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검찰은 11월에 들어 전원 기소방침에서 후퇴하여 경미한 연행자들에게는 ‘법 체험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조건으로 불기소하겠다는 양보안을 내 놓았다. 4시간의 법질서 교육과 4시간의 교통정리에 참여하는 내용이었는데 200-300명 정도가 혜택을 보았다.
모임에서는 ‘법 체험 프로그램’에 대해 타협적이라고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이 있었지만, “기소유예와 법률체험프로그램의 수용을 선택받는 경우에는 개인의 결단에 맡겨야 된다”(발표글 11)고 정리하였다.
투쟁과 학습
모임에서는 8월 하순에 여성회원들을 위한 별개의 게시판을 만들어 ‘촛불마녀군단’으로 규합하였다. 대찬 여성전사들이 참 많았다. 그 해 가을 연행자모임의 많은 동지들은 밤거리를 흔들었던 투쟁에 함께했다. 기륭전자는 물론이고, 홍대, 대학로, 강남역 등에서 전개되는 운동회에 빠짐없이 참석하여 즐겼다. 촛불마녀군단을 포함하여 20여명 남짓한 동지들이 고정 멤버였다. 기륭에 갔을 때는 전체 촛불 중21) 10%는 우리 모임의 회원들이었다. 용산투쟁 때는 경찰들에게 깃발을 뺏기기도 하면서 13-14명의 동지들이 전철비를 아끼지 않고 끝까지 시내구경을 했고, 명동에서 열린 야간 체육대회에는 단체로 참가했다. 2009년 8월 말 용산범대위가 서울광장을 탈환한 후 경찰에게 포위된 50여명 중에는 우리 모임의 동지들 10여명도 함께했다.
2008년 겨울에 접어들자 동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겨울에 지난 여름을 평가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잡는 사업이 필요하였다. 학습이 필요하였다. 우리 모임에서도 여러 번 학습조를 만들려고 시도하였지만 성과가 없었다.22) 2009년 여름 출소자들을 중심으로 ‘청계마을 사람들’23)이란 토론소모임이 만들어졌지만, 일부가 구속자모임을 별도로 추진함에 따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촛불전담변호사 모시기 운동, 연행자?구속자 챙기기 사업,
연행자 콜전화의 운영
연행자모임은 연행자들의 단결과 저항을 위한 단체이지만, 연행자라는 특수성 때문에 연행자모임이 해내야 할 특별한 몫이 있었다. 정식재판청구운동이나 연행자와 구속자의 면회 그리고 연행자 콜번호의 운영 등이 그것이다. 취약한 조직역량 때문에 우리 모임이 자기 역할을 충분하게 해내지는 못했지만 연행자들에게는 큰 의지처가 되었다.
2008년 5월 29일부터 6월 3일까지 민변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고시에 대한 헌법소원’을 위한 ‘국민소송 청구인단’을 모집했고, 10만 명이 넘는 폭발적인 참여가 이루어졌다. 민변은 9월말 이때에 남은 소송비용을 연행자들의 무료변론에 쓰기로 결정했다. 사건 당 기본 30만 원의 예산은 인건비는커녕 복사비와 교통비에도 못 미칠 정도였다. 여기에 가투 시의 ‘인권법률감시단’의 운영과 주말마다 심야에 발생하는 연행자들의 접견까지 실시했다. 이 모든 것은 회원 변호사들의 헌신과 희생으로만 진행될 수 있었다.24) 2009년이 되자 무료변론 사업은 1심의 절반도 진행되지 않았는데 2심까지 맡는다는 것은 예산상의 문제도 심각했고 회원변호사들도 너무 지쳤다. 민변은 이러한 상황에서 용산투쟁 연행자들은 배제하고 2008년 촛불항쟁 때 발생한 연행자들의 1심 무료변론만 책임있게 마무리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동안 정식재판청구운동을 선동해 온 우리 모임으로서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용산투쟁이 시작되자 연행자와 구속자가 속출했다. 용산투쟁의 연행자들도 포함하여 2심까지 무료변론을 추진하고 특히 새로 발생하는 구속자에 대한 법률지원과 부상자들에 대한 뒷바라지가 필요했다. 우리 모임은 민변에 호소했다. 결국 민변의 결단으로 2008년 촛불연행자의 2심 무료변론이 결정되었다. 너무도 고맙고 미안한 일이었다. 희생과 헌신은 민변의 변호사들이 하는데 민변의 파트너로서의 우리 모임은 안정적이지 못하여 홍보사업에조차 큰 도움을 주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용산투쟁이 격화되자 우리 모임은 연행자와 구속자의 면회사업에 앞장섰다. 우리 모임이 나서기 이전에 이미 구속자를 많이 낸 애국촛불에서는 면회투쟁을 결의하고 거의 매일 면회를 다니고 있었고25), 출소한 후에 매주 면회를 다니며 영치금을 넣어주는 홍길동삼촌과, 하루에 한 사람만 면회가 되기 때문에 출소 후 10여 일 동안 매일 서울구치소로 면회를 다녔던 이진숙 동지26)도 있었다. 그 외에도 영치금을 조용히 후원해 주는 온달과 같은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 모임은 이런 동지들과 함께 매달 면회사업을 조직하여 구속자와 연행자들을 면회하고 영치금을 넣었다. 영치금은 보통 1인당 5만원씩 넣었는데, 매달 70만 원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런 사업은 용기와 격려를 주는 사업이기도 하고 그 자체가 촛불의 저항과 단결을 고취하는 사업이기도 했다. 따라서 면회사업도 단순히 위로와 격려만 전하는 과정이 아니라 저항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었다. 하루에 한 명만 면회할 수 있는 규정은 무력화할 필요가 있었다. 도로교통법을 다 지키면 가투가 안 되듯이, 교도소 규정대로 따르면 큰 시간을 낸 많은 동지들이 보고 싶은 얼굴을 다 볼 수가 없었다. 우리 모임은 갈 때마다 교도소 측에 시비를 걸고 소란을 피우면서 ‘악법은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줬다.(발표글 12)
우리 모임은 용산투쟁이 격화되자 연행자 콜전화를 운영했다. 연행자가 주로 발생하는 주말과 심야에는 민변에 전화 받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연행자 발생을 콜전화로 접수하여 민변 사무처의 변호사들에게 전달했다. 이 과정에서 심야나 다음날에 접견할 변호사가 제때에 수배가 안 되면 사무처의 송상교, 설창일, 서선영 변호사 등이 휴일을 포기하고 접견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편 모임에서는 인적사항이 파악이 안 되면 면회도 안 되고 영치물도 넣어줄 수가 없어서, 막상 경찰서에 갔다가도 허탕을 치거나 변호사가 오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많았다.
콜번호가 생기자 약식명령을 받은 연행자들이나 소환자들의 상담이 많이 들어왔다. 사소한 애로사항이나 궁금증을 ‘같은 촛불’에게 물어보고 수사에 대응하는 비법을 공유하는 것도 당사자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촛불연행자후원회
겨울이 되고 촛불이 잦아들자 탄압이 극심해졌다. 채증자료를 바탕으로 소환자와 구속자가 늘어갔다. 용산참사가 일어나자 연행자와 구속자가 속출하였다. 특히 구속자들의 법률지원문제가 심각했다. 모금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발표글 11) 모금사업에 대한 기본입장과 후원회 결성을 추진한다는 방침은 오랜 논의 끝에 2009년 3월 8일 제3차 총회에서 통과되었다.(참고자료 8)27)
그러나 1월말부터 타 카페에서 연행자와 부상자를 위한 모금운동을 시작하면서 문제가 꼬였다. 모금운동이란 목적과 주체, 관리방법이 적절하고 신뢰와 권위가 있어야 한다.(발표글 11) 작은 금액으로 해결될 일도 아니고, 돈이라는 게 자칫하면 잡음이 나기 마련이라 신중하고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이 문제는 자주적 조직 간에 대의를 확인하고 합리적인 대화나 토론으로 해결책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대화를 위해서 상대방 카페의 운영진에게 공식적인 답변을 요구하는 비공개 의견서를 보냈지만 묵살되었다. 상대 조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이 진행되는 상황은 모임 내의 여러 사람들을 강경하게 만들고 상대방 카페에 가서 설전을 벌이는 경우도 생겼다. 아고라에 공개적인 입장을 밝히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지만, 다시 한 번 최선을 다해서 대화로 풀어보기로 하여 물밑 대화가 추진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2009년 2월 하순 연행자모임과 안티엠비, 촛불시민연석회의, 평행단, 예비군, 인권단체연석회의 등이 참석한 초동회의28)가 꾸려졌다. 회의가 시작되자 한 여성동지가 안티엠비를 대표해 안티엠비의 자주적 사업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주장했다.29) 하지만 연행자를 위한 모금사업을 개별 카페가 진행할 것이 아니라 전체 촛불들이 함께 해보자는 것과 공신력있는 기구를 만들어 추진하자는 연행자모임의 입장은 다른 참석자들 전체의 공감을 얻었고, 여러 번의 회의를 거쳐 촛불시민연석회의와 안티엠비도 함께하는 기획단으로 발전되었다. 4월초에 연석회의와 안티엠비의 공식적인 동의를 얻어 촛차, 유모차, 예비군, 그리고 연행자모임 등 6개 모임의 공동명의로 공청회를 열었다. 그러나 안티엠비와 연석회의 내부에서는 독자모금론을 고수하거나, 혹은 연석회의의 특별 사업팀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고, 누구 마음대로 공청회에 이름을 올렸느냐고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30) 이런 곡절 끝에 6월 중순에야 촛불연행자후원회 준비위원회가 출발할 수 있었다. 후원회에는 우리 모임과 예비군, 촛차, 유모차가 함께 집행위원회를 맡게 되었다. 집행위원회는 심의의결기구인 운영위원회31)의 감독을 받는 구조였다.
당시에 촛불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경찰의 표적이 되어 있었고, 연석회의와 애국촛불에서 많은 구속자들이 나왔다. 많은 모임의 카페지기들이 불안해하였고 후원회의 ‘촛불전담변호사 모시기 운동’에 공감을 표시했다.32) 후원회에서는 서울구치소로 면회를 자주 갔다. 그 과정에서 후원회에 반대했던 연석회의와 안티엠비의 많은 사람들이 후원회에 호의적으로 바뀌었다.33) 하지만 시기를 많이 놓쳤고 사업이 탄력을 받지 않았다. 후원회에서 추진한 ‘촛불전담변호사 모시기 운동’은 소수의 몇몇 사안에만 변호사비를 지원했을 뿐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촛불시민연석회의
조직되지 않은 시민들이 중심다운 중심이 없어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항쟁이 끝난 후, 촛불들의 단결과 투쟁을 추진한 두 번의 큰 시도가 있었다. 애국촛불전국연대와 촛불시민연석회의가 그것이다. 연석회의는 2009년 1월부터 ‘하나되어 함께 가자’는 슬로건으로 촛불들의 단결과 투쟁을 추진하였고, 3월에 40여개의 촛불단체와 개인들이 결합하여 출범하였다. 연석회의는 용산참사가 일어나자 사고 당일부터 ‘용산참사특위’를 구성하여 적극 결합하였고, 용산참사 현장인 ‘남일당’ 건물 앞에서 경찰과의 긴장된 대치상태에서 출범식을 결행하였다. 특히 2009년 3월 당시 정권의 탄압으로 살벌한 분위기였음에도 매주 서울역 독자집회를 고수한 것은 용산참사의 불법성을 알려내고 촛불의 저항의지를 살리는 데 적지 않은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추진하는 사람들도 다양하였고, 촛불들도 다양하였기 때문에 전체 촛불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는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를 한꺼번에 묶으려는 시도보다는 지향이 비슷한 세력들이 먼저 힘을 합하여 투쟁을 전개하면서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34) 연석회의는 분향소 사건35) 등을 거치면서 불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초하였다. 연석회의에 대하여는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연석회의가 운영위원들의 다수가 구속되거나 연행되는 탄압을 받으면서도, 서울역 독자집회를 고수한 것과 용산투쟁과 쌍차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한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노무현 서거를 둘러싼 갈등
2009년 5월 3일 노무현이 서거하자 추모의 분위기가 대단했다. 촛불카페들은 앞 다투어 영정을 내걸었고, ‘평생 품에 안고 살아가겠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모임에만 영정이 안 걸렸다. 처음 보는 회원이 ‘연행자모임, 이 빨갱이 새끼들!’이라는 글을 자유게시판에 올렸다. 모 동지가 ‘추모를 넘어 추앙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글을 올렸고, ‘노무현 시절 얼마나 많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탄압을 받았는지 아느냐’는 글도 올라왔다. 여기에 열성적인 전 대표36)를 비롯한 회원 두 사람이 불만을 품고 탈퇴했다. 모임의 분열을 가져올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것은 서로가 살아 온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다. 결국 노무현이 아무리 나빠도 초상을 치르는 상황에서 비판하는 글을 올리는 것은 지나쳤다고 정리되었다. 우리 모임이 대중조직이고 다수의 정서가 추모의 감정이라면 존중되는 것이 맞다. 비판글들을 자삭하기로 하고 서둘러서 추모의 입장을 밝히면서, 영정을 안 건다고 불만스러워 하는 회원들이 직접 영정을 올리기로 하였다.37)
DVD 매체사업
후원회가 결성될 무렵 후원회의 사업으로 매체사업이 제기되었다. 촛불투쟁을 DVD로 만들어 모금사업에 활용하자는 기획이었다. 다행히 영상은 훌륭하게 완성되었고, 여러 번의 시사회를 거쳐 09년 10월에는 성대하게 ‘촛불영상제’를 치렀다. 사업경험이 없는 촛불들이 서로 힘을 합하여 그것도 여러 단위의 촛불들이 힘을 합해서 큰 행사를 치러낸 것은 중요한 성과였다. 다만 DVD는 원래의 계획대로 후원사업의 매체로 활용되어야 했지만, 제작자들이 DVD를 개인의 성과물로 집착하여,38) 별개의 카페를 만들고 DVD의 무상배포와 영상의 인터넷 공개를 강변하면서, 너무 지나친 행동들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몇 개월 동안 후원회에 결합한 많은 동지들의 노력과 수백만 원의 예산은 사적 영상의 홍보에 이용당한 결과가 되어버렸다.39)
D인터넷신문
2009년 8월 D신문이 연행자를 돕겠다면서 티셔츠를 판매했다. 한 달에 3,000만원어치를 팔아 1,500만원의 수익을 내고 있는데, 월 200만원을 벌금대납에 쓰겠다는 것이었다. 장사 속이 뻔했지만 촛불전담변호사의 필요성을 얘기하여 두 달 분의 수익금을 이전 받기로 하고 인터뷰할 사람들을 주선해줬다. 그러나 약속과는 다르게 월 200만원씩만의 생색내기는 변함이 없었다. D신문과 갈등이 생겼지만, 모임의 토론결과는 사적 기업이 영리행위를 하는 것을 막을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별도의 입장을 밝히지 않기로 하였고,40) D신문은 두어 달 뒤 사업을 접었다.
제2차 촛불연행자대회―쌍방향 집회
2009년 3월 제3차 총회에서 모금사업과 함께 가을에 ‘전국촛불연행자대회’를 추진하기로 결의되었다. 여름이 지나면서부터 연행자모임의 머슴단은 애국촛불을 비롯하여, 후원회와 영상제 사업에 합류한 단위들41)과 논의를 계속하였다. 집회의 목적은 연행자들의 단결과 저항의지의 과시였다. 용산투쟁이 시작된 이래, 합법적인 집회 특히 촛불들의 집회는 불허될 것이 뻔한 상황에서 공공연한 합법집회를 쟁취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불허될 경우 가처분신청을 통해서라도 악착같이 집회를 열기로 하고 일정에 여유있도록 한 달 전에 집회신청을 하였다. 집회신청은 예상대로 불허되었고, 모임은 서울행정법원에 금지통고처분에 대한 가처분신청을 하여 합법집회를 쟁취할 수 있었다.42)
대회를 위하여 모임은 많은 토론과 준비를 하였다. 이 대회를 연행자모임만이 아니라 이미 후원회의 논의에 참여하는 단위를 포함해서 여러 촛불단위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대집회로 추진한다는 것과, 기존의 집회처럼 수동적 관객과 보여주는 무대의 구조가 아니라 대중이 집단적으로 꾸려가는 쌍방향 집회를 중심에 두었다.
집회는 2009년 12월 12일 서울역 광장에서 오후 2시부터, 민중의례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및 ‘전과 14범’ 노래로 시작되었다. 무대 전면에는 10m×5m의 대형 현수막에 ‘삽질 쥐박이’의 그림을 배경으로 ‘이명박 가카 만수무강 기원 촛불대동놀이’로 꾸미고, 무대 아래에는 가로×세로 각 2m의 고사상을 세로로 세웠다. 제기에는 의료민영화나 4대강과 같은 각종 MB정책이 올라갔다. 집회참가자들은 미리 준비한 용지에 ‘가카’에 대한 악담과 급살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용지에 써서 고사상에 붙인 후 ‘퍽 유 (fuck you)’를 먹였다. 가카의 ‘급살기원 고사문’이 낭독되는 동안 모든 참가자들이 고사상 앞으로 나와 가카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두 번 절하고 한번은 고개를 돌려 참지 못하는 기쁨의 웃음을 터뜨려주는 풍자가 있었다. 그 사이 고사상에는 대형 쥐그림이 올려졌다. ‘명바기 졸개’라고 쓰여진 방패를 든 전경들을 고사상 앞에 세워 놓고, 참가자 전원이 악담을 하면서 똥처럼 만든 찰흙을 전경들에게 던졌다. 똥을 다 던진 다음 (실제) 엿을 강제로 입에 먹였다.43) 고사상의 대형 쥐에게도 욕을 하면서 똥을 던졌다. 다음에는 출소자들에게 ‘공권력 우롱대상’ 수상식과 상패전달식을 했고, 마지막으로 1m 크기로 확대한 약식명령장을 여러 개 만들어 찢어버리고, 모두가 어깨걸고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부르면서 끝을 맺었다. 집회는 감동적이었다.
집회의 중간 중간에 외쳐진 구호는 ‘이명박은 물러가라!’ ‘한 푼도 낼 수 없다. 연행자를 사면하라!’ ‘촛불은 무죄다. 연행자를 사면하라!’ ‘살인진압 웬 말이냐, 용산참사 해결하라!’ ‘3,000쪽을 공개하라!’ ‘삽질은 재앙이다. 4대강 사업 중단하라!’ ‘747 믿었다가 서민살림 거덜났다!’였다. 준비회의를 수차례 거듭하면서 많은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왔고, 여러 동지들이 힘을 합하여 큰 집회를 성공리에 끝냈다.44)
촛불 실천의 날
“촛불조직 내에서 민주주의를 관철하는 것은 대체권력의 맹아 형성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직접민주주의 혹은 최대한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함께 알고, 함께 토론하고, 함께 결정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중시하는 새로운 형태의 개방적이고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촛불조직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과,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다중에 기반한 촛불조직들이 승리의 전망을 갖기 위해서는, 각각의 특성에 맞는 헌신체로 전화하고, 이러한 헌신체들이 보다 합리적인 실천을 위해 네트워크와 다양한 형태의 연대를 통한 실천 속에서 신뢰를 쌓아가고, 신뢰에 기반한 역할분담의 강화와 확장 속에서, 승리를 위한 총괄기획의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발표글 13)
2009년 가을 용산투쟁에 동력이 안 붙는 사이 ‘촛불바자회’나 ‘김장나누기’와 같은 일회성 행사도 있었지만, 전체 촛불들이 모일만한 투쟁의 장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월1회 ‘촛불 실천의 날’이 제안되었다. 촛불들이 한 달에 한번씩(가령 매월 셋째 주 토요일) 고정적으로 합법집회를 한다면 전체 촛불이 모일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었다. 이 계획의 추진단위를 개방적으로 운영하면 많은 촛불카페들도 함께할 수 있고 당연히 상설적인 연대기구가 될 수 있었다. 연대기구 안에서 서로 토론하고 상의하여 실천한다면 촛불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고, 촛불들이 고정적인 집회를 한다면, 4대강 투쟁이나 비정규 투쟁, 공영방송지키기 투쟁을 하는 단위 등과 실질적인 연대와 결합을 할 수 있는 틀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상설연대체가 성장하여 대중의 신뢰를 받으면 비로소 투쟁의 중심체나 지도체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연대단위와 함께하는 모임의 개방회의에서 제2차 연행자대회도 여러 단위가 공동으로 추진하자고 제안되었지만, 연행자대회는 연행자모임이 주관하고, ‘촛불 실천의 날’은 2010년 2월이나 3월부터 전체 촛불이 연대하여 추진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미 합법집회인 연행자대회를 성공시킨 경험이 있기 때문에 조금만 노력하면 월1회 ‘촛불 실천의 날’ 계획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다.
장엄한 끝장투쟁―노역장 자원과 구출 투쟁
“촛불투쟁이 소강상태에 있고 MB정권이 기고만장한 이 시점이라고 해서, 연행자들이 숨을 죽이고 단지 돈만 걷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당위이다. 최선의 저항 혹은 슬기로운 저항을 통해서 촛불의 정당성과 촛불탄압의 부당성을 알려내고 투쟁으로 키워내는 작업은 한시도 쉬거나 미룰 수 없는 우리들의 의무이기 때문이다.”(발표글 16)
‘한 푼도 못 내겠다’는 입장에서 정식재판청구운동을 벌인 우리 모임의 기조에서 볼 때, 벌금이 확정된다고 해서 모금이나 해서 순순히 벌금을 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문제는 투쟁으로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점이 2009년 3월 제3차 총회에서 모금운동과 연행자대회가 동시에 결의된 이유였다.
벌금 확정자들을 앞세우고 검찰청사나 민주당사(혹은 한나라당사)에 가서 ‘한 푼도 못 내겠다’는 투쟁을 장엄하게 전개하여, 잊혀진 촛불연행자들에 대한 탄압의 부당성을 선명하게 이슈화하는 끝장투쟁이 필요하였다. 이미 2008년 가을에 벌금이 확정되면 몸으로 때우겠다는 사람이 17-18명 정도 되었지만, 설령 의지가 바뀌었더라도 노력하기에 따라서 투쟁의 선봉에 설 노역장 자원조는 꾸릴 수 있었다. 이 제안은 2009년 연초부터 모임 내부에서 꾸준히 토론되었다. 처음에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며 머슴단을 사퇴하는 동지도 있었고 반대의견이나 회의도 많았지만, 반드시 필요한 투쟁이고 결코 무모한 계획이 아니다는 공감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모금이 되더라도 노역장 유치자에 한하여 구출자금을 집행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항쟁의 열기가 식고 대부분의 촛불이 집으로 돌아간 시점에서, 촛불연행자들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는 1,000여명에 달하는 연행자들이 확정된 벌금을 개인의 힘으로 납부해야만 하는 상황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평균 100만원의 벌금은 20일간의 ‘노역장 유치’나 ‘사회봉사’에 해당된다. 대부분의 경우 100만원 때문에 20일간의 노역장이나 사회봉사를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겠지만, 정식재판 청구자의 10%인 대략 70명 정도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사회봉사신청을 할 수밖에 없고, 이미 신청을 한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뭉쳐야 하고 싸우는 수밖에 없다. 오직 연행자들이 싸우고 있을 때에만 모금이라는 사회적 연대도 실현될 수 있고, 오직 그때에만 벌금을 마련할 수 없는 동지들을 구출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금운동은 단지 돈이나 걷자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투쟁과 결합했을 때에만, 투쟁의 관점을 세웠을 때에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투쟁의 관점에 선 모금운동’이다. 그 투쟁은 놈들의 양보를 강요해야 하기 때문에, 애교 섞인 투쟁이 아니라 비장미에 넘치는 ‘장엄한 투쟁’이 될 수밖에 없고, 승리를 기약할 수 없지만 포기할 수도 없는 싸움이기에 ‘끝장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
이 투쟁은 원래 제2차 연행자대회 때 동시에 진행할 계획이었는데, 야간집회의 위헌심판이 받아지면서 촛불재판이 2010년 6월말까지 연기되었기 때문에 분리되었다. 하지만 벌금확정자가 나올 때를 기다려, 우리 모임이 앞장서는 ‘장엄한 끝장투쟁’은 꾸준하게 진척되고 있었다. 촛불들이 결합하는 여러 투쟁이 있겠지만, 연행자들이 연행자 문제를 전면에 내걸고 벌이는 투쟁은 그 자체가 촛불의 정당성을 쟁취하는 투쟁이기 때문에, 전체 촛불과 연대하여 힘있게 전개할 필요가 있다.45)
나가며
많은 촛불들이 지쳐서 혹은 전망을 잃고 집으로 돌아갈 때에, 촛불연행자모임은 ‘모든 회원들이 서로 상의하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실천하는 민주주의 원칙’, 그리고 단결과 연대, 대중노선과 투쟁의 관점을 꿋꿋하게 견지하면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저항과 투쟁의 공동체(탈대리주의에 입각한 탈권위적 헌신의 공동체)를 건설해 왔다. 비록 성과는 미약하였지만 모든 동지들이 마음과 힘을 합한 그 노력은 결코 가볍게 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각주)-----------------
1_ 전에 필자가 대표를 맡고 있었던 이주노동자운동체에서 카페를 운영한 경험도 있고, 민노당의 중앙당과 지구당 게시판에서 활동한 경험도 있기 때문에, 카페의 운영과 활동이 크게 낯설지는 않았다. 다만 카페의 관리와 선동, 회원들과의 대화는 매일 6시간 이상의 노력을 요구했다.
2_ 연행자모임은 2009년 초 총 연행자의 60%에 해당하는 750여명의 연행자와 후원회원을 합하여 1,200명의 회원을 가진 카페로 성장하였다.
3_ 총 45명 중 25명만 10,000원의 회비를 부담감 없이 낸 것이다.
4_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복지국가에서는 똑같은 교통위반을 하여도 범칙금은 소득수준에 따라 다르다. 국가가 임대하는 같은 평수의 아파트 역시 소득수준이나 부양자녀의 수에 따라 월 사용료가 다른 나라도 있다.
5_ 이 글은 연행자모임 창립총회를 앞두고 발표한 토론문이다.
6_ ‘파견제’란 파견된 사람이 파견한 사람들에게 복종하고 봉사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만약에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에 대한 국민소환제가 있었다면, 이명박이나 한나라당은 그처럼 안면몰수하고 국민을 배반하지 못했을 것이다.
7_ “일반적인 시민단체나 사회단체 역시 후원금이나 회비로 운영되면서도, 의사의 결정과 집행은 소수의 활동가나 상근자에게 맡겨져 있는 구조입니다. 지도부나 집행부나 상근자가 판단하고 결정하고 집행하는 구조가 한국사회의 낡은 운동체들의 현주소입니다. … 우리 스스로 머슴단은 지도부나 집행부로서 조직을 끌고가는 권력이 위임된 단위가 아니라는 확실한 인식과 자각만이 우리 모임의 건강한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서 최근 언소주(언론소비자주권 국민캠페인) 등 촛불모임이 비대해지고 고형화되면서 기왕의 권위주의적이거나 독선적인 운영으로 인해 많은 잡음을 일으키고 있는 점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발표글 9).
8_ 2009.3.8 총회에서 대표제가 ‘순환제 의장제’로 개정되었다.
9_ ‘민주집중제’란 의결의 민주주의와 실천의 통일을 위한 원칙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총회민주주의’가 항상적으로 관철될 수 없는 경우 불가피하게 시대의원, 도대의원, 중앙위원 등 매개나 대리가 발생한다. 매개나 대리의 단계가 많아질수록 ‘중층적 대리주의의 위험’이 있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고안한 것이 ‘탈권위에 입각한 헌신과 개방의 원칙’이다. 이 사회의 모든 조직적 인간관계가 권위주의적 위계와 대리주의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모든 실천과 저항의 공동체에서 민주주의를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것은 대체권력의 맹아로서도 중요하다(발표글 13).
10_ 필자는 운동을 시작한 이래 어떠한 경우에도 말을 낮춰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다. 모임 내에서도 불편하다면서 말을 낮춰달라고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점차로 서로 익숙해지고 편하게 되었다. 탈권위주의는 언어 형식의 민주화부터 시작한다.
11_ 필자는 창립총회 전까지 한 달 반, 그리고 머슴단이 한 명 밖에 안 남았던(갑자기 세 사람이 취업을 하게 되었는데, 두 사람은 지방에 취직이 되었다.) 5기 말에 20일 정도 의장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때로는 평회원으로, 때로는 머슴단에 소속된 사업팀장으로, 때로는 머슴으로 즉 열성회원으로 활동했다. 머슴단 회의에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과 소신 그리고 장단점이 어우러진 가운데, 20대 후반의 대표나 의장(카르페디엠, 사람이 하늘이다, 노말, 점빼는 모두 20대 후반이었고, 40대가 의장을 맡은 경우는 말고 뿐이었다.)과, 그들을 존중하는 주로 30-40대의 머슴단(알콩달콩, 갈데까지, 희망새, 쥐의 반격, 새역사-붉은 악마는 20대이고 올챙이는 50대이다), 그리고 평회원인 필자가 함께했는데, 회의는 항상 애정이 넘치고 마음이 편했다. 특히 필자보다 10살 아래인 백철현(쥐의 반격) 동지가 필자에 대해 항상 가차없는 비판으로 동지애를 관철해 준 것이 모임내의 권위주의를 극복하는 데에 큰 힘이 되었다. 누구든지 권위를 앞세우거나 자기 주장만 고집하지 않고 편하게 의견을 낼 수 있는 분위기가 민주적인 회의 풍토에 기여했다.
12_ 이 점과 관련하여 현재 베네수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실험들이 훌륭한 지도자인 차베스 개인의 실천이 아니라, 베네수엘라 전체 민중의 실천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회적 진보는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니라 단결된 대중의 실천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진보세력들은 한 개인인 노무현에 대한 추앙의 감정이 불편한 것이다. 그것은 대중의 자기해방을 위해서 언젠가는 극복되어야 할 대리주의이고, 소외의 한 형태이다.
13_ 필자에 대한 인터뷰 요청은 거절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한두 번 ‘50대의 박모씨’ 정도로 응한 적이 있다. 집단적 실천이 개인적 실천으로 간주될 위험이나 ‘운동의 사유화’ 경향들은 항상 경계할 필요가 있다.
14_ 면회후기 등의 홍보물은 모임의 홍보 담당이 아고라에서 베스트 작업을 하였다. 사람이 하늘이다, 붉은악마, 알콩달콩, 점빼, 말고 등이 밤늦게까지 고생했다.
15_ 초대 고문은 용산경찰서에서 인연을 맺은 김종웅 변호사였다. 김변호사는 머슴단의 일원이자 법률사업팀장으로서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고, 법률게시판의 게시판지기이기도 하였다. 변호사들이 운영하는 법률상담게시판 외에 가벼운 법률상의 고민을 나누기 위해 법률지식이 있는 회원들이 운영하는 별개의 게시판이 따로 있었다. 김변호사의 후임은 이준형 변호사였는데, 연행자후원회에도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가투파와 함께 도심에서의 운동회에도 앞장서는 등 열정이 남달랐다.
16_ 우리 모임에서는 항상 모든 회원들에게 의견의 자유 심지어 비방과 모략중상을 할 수 있는 자유까지 끝까지 보장되었다. 모임을 비방하는 회원이 있을 경우에는 머슴단 회의의 결정으로 특별히 ‘청문회방’ 등을 개설하여 비방의 자유까지 끝까지 보장하였다. 인권팀장과 모 회원은 깽판칠 자유까지 마음껏 누리다가 자퇴하였다. 이 점과 관련하여 언소주에서 집행부에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한 회원 600여명을 강퇴시킨 것은, 설령 그들이 삼성의 프락치라고 하여도 민주적 조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하였다. 그들이 제기한 비판 중에는 부당하고 비열한 행동도 있었겠지만, 그렇더라도 이를 회원들과 공유하면서 집단지성이 발휘되도록 하지 못한 점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물론 집단지성이 반드시 관철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17_ 노무현 서거 시에도 영정을 게시하지 않았다고 ‘연행자모임, 이 빨갱이 새끼들’이라는 공공연한 비난글이 올라왔고, 연행자후원회가 운동권과 빨갱이 조직이라는 비판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초대 대표였던 필자 이후 2009년 말까지 1년 6개월 동안, 소위 좌파나 진보 성향의 대표란 5기 때 순환제 의장을 한 달 정도 맡은 대학 졸업반이었던 N 동지나 청년백수였던 J 정도였다.
18_ 필자는 인권팀장이 깽판을 치기 시작한지 불과 3-4일 만에 이런 글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대책회의에 대한 혐오는 촛불들의 기본정서인데, 갑자기 대책회의를 편들거나, 앞장서는 사람들의 투쟁성을 비판하는 글들이 올라오는 것은 희한한 일이었다. 필자는 이 분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창립총회 때에 대표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19_ “진보연대와 참여연대가 주축이 된 상층명망가 중심의 단일연대체를 제안하면서 10/25 민주주의 페스티발을 제출하고 있는 바, 촛불조직에 연대를 제안한 취지문에는, ‘촛불은 대규모집회와 거리투쟁’만을 고집함으로써 일반 국민들로부터 고립되고 위축되었기 때문에 ‘국민 모두가 편안하게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축제가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왕의 안기부와 함께하는 통일축제라든지,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류의 이벤트 운동으로 자기 존재의 명맥과 위상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음”(발표글 8).
20_ “현재 대책회의가 기웃거리고 관여하려고 하는 모든 촛불들은 대책회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불필요한 논쟁과 분란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것은 이미 대중의 평가 속에서 신망을 잃어버린 조직이 스스로 해소하기는커녕 순수함도 없이 옛 위신을 되찾고자 권위적으로 개입하기 때문에 촛불 속에 빚어지는 분란일 뿐입니다”(발표글 6). 초기에 우리 모임이 만든 정식재판청구운동의 웹자보의 연락전화번호가 회원도 아닌 U의 것으로 되어 있었다. U는 민민국이 주최한 페스티발의 실무자 역할도 하였는데, 우리 모임을 얼렁뚱땅 대리하여 애국촛불의 회의에 참석한다든지, 촛차나 유모차에 접근하여 대외업무를 대신하기도 하고, K대학 학생회의 내부에도 관여하는 등 정체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21_ 촛불시민이 가장 많았을 때 200-300명으로 추산되었다.
22_ 당시에 내부학습이 가장 잘 되고 있는 곳은 대운하나 의료보험 등을 의제로 하여 학습조를 운영한다든지 강연회를 개최하는 강남촛불이었다. 워낙 인재도 많고 단결도 잘 되었다. 젊은 사람들과 나이 먹은 사람들 그리고 여성과 남성이 이루는 적절한 조화가 큰 힘인 것 같았다. 학습조가 안 꾸려지는 상황에서 필자는 <<소유냐 존재냐>>, <<세계는 왜 굶주리는가?>>, <<G8을 말한다>> 등 양서라고 생각되는 책들을 5권이나 10권씩 주문하여, 필자를 찾아오는 사람들이나 집회장에서 나눠주기도 하고, 때로는 정치조직에서 나오는 신문이나 팸플릿 등을 돌리기도 했지만, 토론으로 발전하는 경우는 없었다. 한편으론 작은 실천이라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경우 애정을 보이고 격려를 했는데, 특히 공안탄압반대를 기조로 하여 평행단에서 발행되는 ‘독재신문’을 높이 평가하고 지원했다. 언론과 관련된 운동에는 조중동 광고주압박운동이나 진알시와 같은 꾸준하고 큰 운동이 있었지만, 운동의 형태면에서 볼 때, 독재신문은 대중의 자기 언론 즉 독립언론(inde-media)이란 측면에서 격려될 필요가 있었다. Inde-media 운동은 미국과 유럽에서 활발한데, 반세계화 투쟁이나 반전운동과 인권운동 등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지난 6.2 지방선거 때 댓글 등의 인터넷 실명제를 거부하는 운동을 주도한 ‘참세상’이 가장 앞선 독립언론인데, 최근에 월 70만원도 안 되는 기자들의 상근비를 지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필자는 사적으로는 진알시 활동가들에게 가장 큰 애정을 느꼈다. 작은 실천이지만 매주 일요일 자기 시간을 희생하면서 꾸준히 실천하는 그 헌신성 앞에선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우리 모임에는 진알시의 핵심적 활동가인 희망새, 올챙이 등이 결합하고 있었다. 이들은 진알시 활동만이 아니라 전투적인 실천에서도 타의 귀감이 되었다.
23_ 청계마을이란 서울구치소가 있는 청계산에서 따온 이름인데, 당시 머슴단의 절반은 구속자였다.
24_ 촛불시민들에게 가장 사랑과 신뢰를 받은 단체는 민변이다. 촛불항쟁에서 법률 전문가들의 진보적인 사회운동단체인 민변은 돋보이는 헌신성으로 대중운동과 결합하는 모범을 보여 주었다.
25_ 특히 홍순창, 테리, 환, 넥타이부대 등이 열심이었다. 이들은 후원회 사업에도 굉장한 열의를 보여 주었고, 우리 모임의 다른 연대사업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
26_ 이진숙 동지는 전견들에게 둘둘 만 신문지를 휘둘렀다가 폭행죄로 구속되었다.
27_ 필자는 이 총회에서 평회원으로서 머슴단에 책임을 지는 모금사업팀장을 자원했지만, 모임의 사업에 결합하는 회원은 몇 사람밖에 안 남은 상황이었다.
28_ 이날 촛차는 바빠서 못 나왔고, 유모차는 주부들이라 회의에 참석할 수가 없어서 위임을 했는데, 회의보고와 진행사항은 그 뒤로도 빠짐없이 전달되었다.
29_ 평소에 필자를 오라버니로 부를 만큼 지금까지도 각별하게 지내고 있는 참으로 열정적인 이 여성동지는, 나중에 필자와 다른 회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날 일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면서, 참으로 죄송했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 필자는 이 여성동지의 반대가 촛불들끼리 대립하는 것을 막으려는 충정에서 나온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날은 물론 그날에도 따뜻한 마음으로 동지애를 확인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한편 모 카페에서는 후원회의 매체사업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필자가 촛불의 적이고 이명박과 정부의 프락치”이며, 필자를 “깨부수고 끌어내려야 된다”고 선동할 때, 이들과 환상의 콤비가 되어 그날의 회의에서 필자가 이 여성동지를 (존중의 의미로 사용된) ‘당신’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면서 “전체 촛불을 위해 필자를 반드시 끌어내리겠다”는 맹세를 공공연히 하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증오와 적개심을 호소하기를 멈추지 않은 정의의 사도도 있었다. 기껏해야 사적감정 때문에 중상과 모략을 하면서도 정의를 부르짖는 이들의 행동에서는 최소한의 사회적 윤리와 양심을 찾아볼 수가 없고 오직 지독한 증오와 독선만 남아 있었다. 사정을 아는 많은 사람들과 그날의 회의에 참석한 여러 카페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행동들을 경멸했지만, 사적 감정과 증오의 포로가 되어 스스로의 기억과 양심을 배반하는 열정적인 실천은 많은 사람들을 수치에 동참하게 하고, 우리 모임의 연대사업과 투쟁 그리고 촛불들의 단결을 가로막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모 카페에서는 누군가가 투쟁에 헌신하고 있을 때, 뒤에서 같은 동지에 대해 온갖 음해와 중상을 멈추지 않고 오직 증오와 편견을 퍼뜨리면서 주위를 타락시키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평소에는 착한 짓만 하면서 정의를 부르짖는 촛불들이 조그마한 비판에도 극도의 적개심을 보인다든지, 조금만 불만스러워도 중상과 모략도 불사하는 이런 행동들은 촛불의 불행이고 수치였다. 결국 경쟁과 적대만 강요하는 자본주의라는 병든 사회의 부정적 산물이겠지만, 촛불 속에는 극소수이긴 하지만 이런 사람들도 있었다.
30_ 이들은 연행자후원회가 운동권(혹은 빨갱이)에 치우친 조직이라고 비난하면서, 촛불 자체가 도덕적인데 왜 자기 스스로를 못 믿느냐는 논리를 앞세워 직접 모금하여 직접 집행하는 독자적인 촛불인권운동체를 추진하면서, 2009년 여름부터 똑같은 목적을 가진 연행자후원회와 대립하였다. 연행자후원회는 단순히 모금운동이나 하는 단체가 아니라, 촛불 피해자들을 위한 인권운동단체이다.31_ 운영위원회는 홍세화, 이학영, 민변의 이준형 변호사 그리고 인권단체연석회의에서 파견 나온 김랑희 동지 등으로 꾸려졌다. 예수살기의 최헌국 목사는 용산투쟁이 너무 바빠 결합하지 못했다.
32_ 이때에 ‘촛불나누기’의 그날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촛불나누기’는 촛불카페들의 허브(hub)로, 독자적인 집행역량을 갖지 않고 정보와 사업제안을 공유하는 지금까지 가장 안정적이고 성공한 틀이다.
33_ 이 과정에서 아티젠, 싸울아비, 한글사랑나라사랑 등이 후원회를 지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보여 주었다.
34_ 필자는 당시에 조직의 상과 위상과 조직건설의 경로가 무리하다고 생각하였다. “현실의 실천에 대한 답답함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보고자 무조건 뭉쳐서 힘을 합해보자는 정도의 의식이라면, … 잘 되기를 바라지마는 실천과 투쟁 속에서 쌓아 올린 지도력이 아니라 허구의 대표성에 집착하려는 노력은 결국 회의만 남길 가능성이 큽니다.”(발표글 14) 처음 제출된 연석회의의 조직구성안에는, 조직과 개인이 함께 참여하는 총회에서 “촛불정신을 대내외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공동대표단을 두며 상임대표를 선출하고, … 의제, 지역, 계층별로 그루핑 과정을 거쳐서 대표성과 지도성을 인정받은 분들을 중심으로 운영위원회를 구성하며, 연석회의와 운영위원회에서 결정된 방향과 사업내용 등에 대한 구체적인 실무를 담당하는” 별도의 집행부서가 있었다.(참고자료 6) 특히 “조직을 대표하는” 대표단이 아니라 “촛불정신을 대내외적으로 대변할” 대표단은 압력운동으로 빠질 우려가 있는 대리주의적 표현으로 직접행동이나 직접민주주의와는 결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필자는 이런 비판글 때문에 연석회의와 좀 불편한 관계였지만, 나중에 면회를 다니면서 대부분 열정적이고 순박한 사람들임을 알고 많이 친해졌다. 결국 극소수의 사람들 때문에 주장과 실천이 왜곡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35_ 노무현 서거 시 촛불들은 대한문 앞에 시민분향소를 설치하고 고수하였다. 당시 경찰의 침탈을 피해 상황실에서 관리하던 조의금이 일시적으로 특정인에게 맡겨지자, 특정인과 몇몇 사람들은 다른 용도(투쟁자금 등)로 쓰여질 우려가 있다며 독단적으로 민주당에 맡겼고, 이 돈은 나중에 노무현재단에 전달되었다. 당시 서거 정국을 경건과 추모로만 갈 것이냐, 아니면 애도를 모아 저항이나 투쟁으로 갈 것이냐(혹은 영결식 때 한 판 붙을 것이냐)의 관점의 대립이 있었다. 당시에 추모로만 끝나지 않고 저항을 만들어보자고 결정하고 방송차량과 시위물품 등을 준비한 조직은 연석회의뿐이었다. 설령 연석회의가 일부 성원의 미숙함이나 거칠음 때문에 불신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조의금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경건추모파와 투쟁파 혹은 연석회의를 포함한 모든 촛불들이 공감할 수 있는 틀(상황실을 포함하여) 속에서 공론을 통해 결정되어야 할 문제였다. 결국 지나친 불신과 독선은 추모를 저항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유실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분향소 사건은 촛불의 한계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연석회의가 불신을 넘지 못한 한계는 또한 촛불들의 한계이기도 하였다.
36_ 전 대표는 6차 총회에서 다시 결합하여 머슴단에 합류했다.
37_ 필자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대중의 정서와 의식성의 괴리가 참으로 심각하다는 것과 이 경우 어떤 방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크게 고민하였다. 대중이라는 게 꼭 합리적이라기보다는 감성적인데, 그 정서에 굴복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정면으로 돌파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세월이 지나면 의료민영화나 미친 교육(교육의 서열화와 시장화) 그리고 KTX 여승무원과 기륭의 비정규직의 눈물을 흘리게 한 장본인이 노무현이라는 것을 알게 될지 모르지만, 대중은 듣기 싫어하고 받아들이기 싫어하는데 죽은 사람인 노무현을 정면에서 공격하는 것은 효과도 없이 대중의 정서와 괴리만 가져올 것이었다. 이 문제는 현실 속에서 ‘원칙성’과 ‘유연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의 문제였다.
38_ 영상제에서는 당연히 행사의 취지를 얘기해야 했지만, 제작자를 배려하여 작품을 부각시키고자 후원회와 후원사업의 소개조차 하지 않았다.
39_ 이 일은 이미 DVD가 완성되었던 2008년 7월말부터 충분히 예견된 결과였지만, 내부의 우려와 불만을 무릅쓰고 끝까지 제작자들을 달래고 포용하려 한 필자는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고, 이 일로 후원회 집행위원장직을 사임했다.
40_ 당시에 필자가 제안한 입장글을 밝히자는 안은 물론, D신문 관계자가 모임의 회의방을 볼 수 있는 권한을 제약하자는 안도, 권한의 제약을 위해서는 회원자격의 강등이 필요한데 징계사유가 안 된다는 이유로 모두 1대 7로 부결되었다. 모임이 생긴 이래 논란이 많은 사안인 경우 필자의 제안이 관철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우리 모임은 그만큼 민주적인 토론을 통해서 집단지성을 구현하고 있었다.
41_ 각 단위의 참석자들은 대부분 연행자들과 구속자들이었고, 또랑에든소 후원팀과 같은 단위도 있었다.
42_ 박주민 변호사가 공익소송이라며 작은 비용으로 변론을 맡아 주었다. 집회와 시위는 정당한 권리이므로, 가처분 신청이 불허되더라도 실력으로 밀어붙일 작정이었다. 이것이 올바른 투쟁의 관점이다. 투쟁은 허락받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43_ 이 프로그램은 집회 참가자들 전원이 두 패로 나뉘어 실전을 방불케 하는 가투를 한 뒤, 전경을 때려잡아 엿을 먹이자는 안이 대체된 것이다.
44_ 아무리 쌍방향집회라고 하여도 한 방향의 집회보다는 낫겠지만 집회는 집회일 뿐이다. 평화론과 축제론이 허구인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쌍방향이든 한 방향이든 멋진 집회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집회란 분노를 공유하고 의지를 공유하고 실천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즉 형식이나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니라 분노와 의지와 실천을 모아내려는 열의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벤트주의자’들 역시 경계의 대상이다. 이 대회의 기조는 ‘약올림’이다. 힘으로는 이길 수 없지만 굴복하지도 않겠다는 의지는 조롱과 해학과 풍자로 나타난다. 결국 낮은 단계의 저항으로 그 자체의 미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본격적 대결을 예비하는 것으로만 가치가 있다.
45_ ‘촛불 실천의 날’과 특히 ‘장엄한 끝장투쟁’은 섬세한 감각과 치밀한 기획력과 추진력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전체 촛불의 힘을 하나로 모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다. 그동안 모든 점에서 부족한 필자가 이들 사업을 책임지고 1년 이상 공을 들여왔지만, 2009년 12월 이처럼 ‘연대’가 핵심인 사업에 필자가 적임자가 아니라는 판단에 따라, 이들 사업에서 물러났다. 필자가 보기에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벌금을 마련할 수 없거나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상상 외로 많았다. 얼마 전에도 벌금 200만원이 확정된 백철현 동지가 주변에서 모아준 80만원을 제외한 120만원에 해당하는 24일간의 사회봉사를 했다. 필자의 무능력 때문에 결국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은 참으로 마음이 아픈 일이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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