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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 2-9 제2장 항쟁속의 쟁점들 pp45-94

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 2-9 제2장 항쟁속의 쟁점들 pp45-94

 

제2장 항쟁속의 쟁점들

 

심판인가? 퇴진인가? 타도인가?

촛불은 ‘미친 소, 미친 교육 반대, 미친 소 너나 먹어!’라는 피켓을 든 10대 여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으나, 광우병에 대한 공포보다는 이명박정권에 대한 불만이 훨씬 컸고, 가두행진과 투쟁 속의 주된 구호는 ‘명박퇴진’이었다. 이명박에 분노한 촛불은 청와대로 가고 싶어 했고, 새문안교회 골목을 뚫고자 했으며, 광화문과 종로 등 광장과 도로를 해방시키고 공권력과 대치했다. 그것은 분명한 ‘정권퇴진운동’이었다. 
촛불의 적은 초반부터 이명박, 한나라당, 조중동, 뉴라이트로 정리되었다.(민족반역자처단협회, 2008) 촛불을 규정짓는 수많은 정체성 중 으뜸인 것은 극도의 증오감을 수반한 이명박 퇴진이다. 촛불은 결코 이명박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안티엠비가 주최한 4월 26일과 5월 2일 집회에서는 ‘명박탄핵’이었지만, 처음으로 도로로 진출했던 5월 24일에는 ‘고시철회’와 ‘협상무효’만이 아니라 ‘독재타도’가 외쳐지고, 7월이 되자 ‘해체 한나라당, 타도 이명박’의 구호도 스스럼없이 나왔다.
그럼에도 광우병 대책회의는 ‘고시철회’와 ‘협상무효’만 외치다가, ‘명박퇴진’이 대중의 열망이 되자 간신히 ‘명박심판’을 얘기했다.1) ‘심판’이란 선거로 선출되었으니 다음 선거 때 투표를 잘 하기로 하고, 지금은 ‘퇴진’을 외치며 싸우지 말고 지역에서 생활정치를 하면서 ‘미국산 쇠고기 불매운동’이나 하자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이 아무리 선거를 통해 당선되어 선출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국민을 배반한 것이 명백한 이상 통치의 정당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퇴진 요구는 정당한 것이었다.
폭압이 거세어지고 분노가 커질수록 몰아내고 싶었지만 타도할 힘은 없었다. 국민은 자기가 선출한 공복에 대해서 그 공복이 자신을 배반할 때, 물러날 놈은 물러나라 하고 몰아낼 놈은 몰아낼 권리가 있다. 이것은 저항권이고 법률의 잣대로 정당성을 논할 필요가 없다.
대통령을 몰아내면 대안이 있느냐, 청와대를 왜 가느냐고 걱정하는 촛불도 있었다.2) 그런데 이승만이 쫓겨나고 박정희가 죽었다고 헌정질서가 문란해졌던가? 이명박이 물러나든 쫓겨나든 그 다음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어떠한 통치세력이나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민의를 더 존중하거나 눈치 보는 세력일 테니까….
총체적으로 볼 때 촛불은 결코 광우병 소에 대한 정책반대운동이 아니라 국민을 배반한 정권에 대한 퇴진운동이라고 규정해야 한다. 따라서 대규모 가투가 사실상 막을 내린 8월 15일까지의 투쟁의 성격은 ‘항쟁’이다. 이것을 봉기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정권을 타도하고자 하는 의지와 힘이 충분히 결속되고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쌍차(쌍용자동차)에서 아무리 격렬하게 싸워도3) 혹은 용산투쟁에서 ‘명박퇴진’을 아무리 외쳐도 퇴진운동이 아니었던 것은 퇴진을 밀어붙일 의지와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촛불은 타도를 위해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루고자 하는 치열함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4)
한편 항쟁 초기에 ‘탄핵’이란 구호가 있었다. 그러나 탄핵이란 헌법상의 절차로 한나라당이 장악한 국회에서 국회의원 2/3 이상이 찬성해야만 하는 것으로 현실성이 없는 슬로건이었고, 대중들이 거리로 진출한 이후 이 구호는 사라져 갔다. 그리고 간혹 ‘타도’라는 구호가 나오기는 했지만 지속되지는 않았다. ‘퇴진’은 ‘물러나라’는 뜻이고, ‘타도’는 ‘몰아내자’는 뜻이다. 이 점은 87년 6월 항쟁에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가 주된 슬로건이었던 점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몰아내자’를 외치기 위해서는 힘에 대한 확신도 필요하지만, 분노와 열망도 그만큼 커야 한다. 하지만 정권과 체제의 적대적 본질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오직 맨손으로 청와대로만 가고자 했을 뿐, 항쟁의 미발달로 타도 투쟁의 단계에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촛불은 끈질겼지만 치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촛불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였다.

깃발 부대와 폭력 선동을 경계했던5) 촛불은, 5월 2일에는 ‘미친 소는 너나 먹어’, ‘이명박은 물러가라’고 외치기도 하고, 경찰이 위협하자 다시 침묵 집회를 하기도 했지만, 불과 보름도 안 지난 5월 17일에는 ‘고시 철회’나 외치면서 문화제나 하고 있는 대책회의 대신에 ‘이명박을 탄핵하자’며 여의도에서 가두행진을 하였다. 5월 28일 “노동자들이 붉은 조끼 입고 깃발 들고 와도 되느냐”고 물었을 땐 큰일 날 것처럼 반대하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음 날인 5월 29일 대책회의가 공식적으로 가두행진을 결정했을 때 이를 이끈 것은 민주노총의 깃발과 서울지역 대학생들의 깃발이었다. 아고라와 유모차 부대의 깃발이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촛불은 스스로 깃발의 필요성을 깨우쳐갔던 것이다. 5월 31일이 지나면서 많은 깃발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6월 초 새문안교회 골목에는 민주노총을 비롯한 수많은 운동단체들의 깃발이 등장했다. 시민들은 어느 틈엔가 깃발과 조끼를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합법의 틀 내에서 신고된 가두행진을 얘기하던 사람들이 5월 24일에는 광장과 도로를 점거하고 스크럼을 짜고 청와대로 진격하였다. 비폭력을 외치던 사람들은 끊임없이 있었지만, 6월 1일 밧줄이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은 환호하며 함께 당겼다. 6월 10일에는 스티로폼을 쌓지도 못하게 하는 사람들과 왜 산성을 안 넘어 가느냐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6월 21일에는 대책회의의 제안으로 국민토성을 쌓고 많은 시민들과 깃발이 올라갔다, 6월 25일과 26일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토성을 쌓고 닭장차 위로 올라갔다. 6월 하순부터 다시 밧줄이 등장했고, 색소포를 앞세운 강제진압과 연행에도 끊임없이 대치하면서 해산하지 않았다.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깃발과 구호는 물론이고, 단순히 촛불만 들던 문화제6)에서 신고된 가두행진으로 나아가고, 평화적인 행진은 ‘광화문’과 ‘청와대’를 외치면서 전경차를 끌어내고 진압경찰과 대치하고 싸우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순수와 비폭력론의 고찰

촛불이 변화하고 발전하던 과정은 순수와 비폭력을 외치던 사람들이나 의견이 점차 소수가 되고 사라져가던 과정이기도 하였다. 촛불이 말하던 순수와 비순수, 폭력과 비폭력의 본질은 무엇인가? 구호도 외치지 말고 깃발도 들지 말자는 그 주장의 이면에는, 죽창이나 파이프를 들고 싸우는 노동자들과의 차별화를 통해 언론이나 공권력으로 하여금 촛불시민을 적대하거나 탄압하지 말라는, 혹은 운동세력으로 오해받아 탄압받고 싶지 않다는 그런 심리가 들어 있다.7) 이것은 조중동을 증오하면서도 조중동의 논리에 세뇌된 시민들이 자기 안에 내면화된 억압을 극복하지 못한 것을 보여준다. 무릇 민중을 억압하는 권력이란 노골적인 폭력이 아니라 억압을 내면화함으로써 체제에 순응하게 하고 저항을 체념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체제의 유지를 위한 중요한 도구로서의 이데올로기의 역할이다. 따라서 모든 투쟁은 이러한 내면의 억압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민중을 억압하는 권력과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내면의 억압과 상상력부터 해방시키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내면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란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니라 온갖 권위주의와 대리주의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하고, 기존의 체제를 뛰어넘는 상상력을 획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촛불항쟁 속에서 철저히 진행되지는 못하였다.

폭력은 무조건 나쁜 것인가? 그렇다면 전두환을 몰아내기 위해 날마다 화염병을 들었던 80년대의 학생들은 테러범이고 범법자인가? 공수부대의 만행에 맞서 무기고를 털어 스스로를 총으로 무장했던 광주시민은 폭도인가? 생존을 유린하는 자본의 폭압 앞에 쇠파이프로 저항한 쌍차 노동자들은 법질서를 유린하는 폭도인가?
국민의 정당한 의사표현을 군홧발로 짓밟고 방패로 찍고 곤봉을 휘두르는 공권력은 조폭과 다름없는 부당한 폭력이지만, 이에 맞선 시민의 저항은 정당한 폭력이다. 부당한 공권력에 달리 대항할 방법이 없을 때, 억제된 폭력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부당한 폭력을 넘어뜨리는 것은 정당한 폭력이다. 시민의 정당한 저항은 합법과 불법을 따질 필요가 없다. 폭력이나 무장 외에 달리 방법이 없을 때는 무장을 하고 폭력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기면 민주화 유공자가 되는 것이고 지면 폭도가 될 뿐인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경우에 ‘무조건 비폭력’을 외치면서 간디의 후손 행세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폭력의 정당성은 시민의 적이 되어버린 공권력의 태도와 행동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탄압받을지 모르고 폭도로 몰릴지 모른다면서 무조건 끝까지 비폭력을 운운하는 것은 한참 잘못된 것이고, 그보다는 오히려 판단의 초점을, 첫째 현재의 상황이 폭력 외에는 자기를 지키고 자기의사를 관철할 다른 방법이 없는가를 따져 볼 일이고(보충성의 원칙), 둘째로는 폭력을 사용했을 때 자기를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계속성의 원칙).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촛불이 아무리 군홧발에 짓밟히더라도 무장(쇠파이프와 화염병 등)을 하는 것은 처음부터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아무리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조직되어 있지 않고 투쟁 속에서 단련되지 않은 촛불들이 그리고 프락치가 득실거리는 상황에서 폭력투쟁을 선동하고 준비하기란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예를 들어 80년대의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은 서로를 잘 알기 때문에 즉 조직과 투쟁 속에서 단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화염병을 비밀리에 준비할 수도 있었고 앞장선 사람을 엄호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차벽이 중대한 장애로 작용할 때에 누군가가 준비해 온 밧줄에 환호했던 것처럼 특히 야만적인 폭력이 계속되는 상황에선 소수의 사람이 준비해 온 쇠파이프나 화염병이 환영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쇠파이프로라도 저항해야 할 만큼 혹은 쇠파이프가 환영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전투적인 분노와 의지는 형성되지 않았다. “가슴은 화염병을 들고 싶지만, 머리는 아직 아니라고 외치는”8) 상황이었던 것이다.
촛불항쟁 내내 경찰은 거의 방어적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청와대로 가고자 했을 때 경찰은 방어적인 입장에서 차벽으로 막고 소수만이 남게 된 새벽에 해산작전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바로 그 때문에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상대적으로 안전함을 느낄 수 있었고, 남성 청장년층뿐만 아니라 유모차부대를 포함한 여성들과 노약자들도 의지만 있으면 시위에 함께할 수 있었다. 시위대가 다수임에도 경찰이 공세적인 진압으로 나온 경우는 시위대가 청와대의 코앞까지 갔던 6월 1일 새벽과, 관보 게재가 이루어지고 경찰이 수세에서 공세를 선언한 6월 25일부터 6월 29일, 그리고 8월 5일 부시 방문일과 8월 15일 정도였다. 시민들이 의지만 있으면 버틸 수 있는 차벽과 소화기, 물대포, 색소포 정도가 아니라, 전두환 시절 백골단에게서 보았던 무조건적인 구타를 수반한 폭력적 진압은 거의 없었다. 경찰의 공격적 진압에 맞서 대치하던 6월 하순의 상황이 계속되었다면 시민들은 어쩔 수 없이 각목이라도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순수와 비폭력을 얘기했던 촛불은, 침묵집회와 문화제에서 거리행진으로 나아가고, ‘청와대’를 외치며 닭장차를 끌어내면서 도로를 점거하고 경찰과 맞서 싸웠다. 이처럼 촛불의 의식과 투쟁은 한 단계씩 치열해졌지만, 때로는 방어적 폭력이 정당화될 정도로 야만적인 진압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조직되지 않은 대중이었다는 주체적 조건 때문에 폭력투쟁으로 발전할 수 없었고, 공권력 역시 강온을 조절하는 억제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폭력적 대결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스티로폼 논쟁과 6월 10일의 의미

6.10 문화제가 끝나기 전인 밤 8시 30분 스티로폼을 준비한 인권단체는, ‘비폭력은 무저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면서 컨테이너 앞의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하여, ‘산성을 넘자는 것이 아니라, 산성보다 높이 쌓아 저항의 의지를 보여주자’는 퍼포먼스를 준비했다. 그러나 이것을 산성을 넘자는 것으로 오해한 일부 시민들은 인권단체의 말을 들어 보려고도 하지 않고 ‘비폭력’을 외치면서 무조건 방해하고 제압해버렸다.(참세상 기사)
“이명박은 이미 국민으로부터 심판받았다”는 대책회의의 마무리 발언 후 밤 9시가 넘어 출발한 행진 대오가 곳곳에서 차벽과 컨테이너에 막혀 광화문으로 돌아왔다. 자정 무렵 인권단체는 컨테이너와 거리를 두고 스티로폼으로 연단을 쌓으려고 했다. 그러나 ‘비폭력’을 외치는 사람들은 다시 연단을 쌓는 것 자체를 가로막았고, 한편으론 왜 컨테이너에 붙여서 안 쌓느냐고 항의하는 사람들이 뒤엉켜서 서로 몸싸움을 벌였다. 아고라에서는 인권단체를 폭력을 유도하는 프락치로 단정짓고 성토가 빗발쳤다.
한 시간여를 옥신각신하다가 연단을 쌓는 것으로 합의하고도, 붙여서 쌓을 건지 떼어서 쌓을 건지 서로 대립하면서, 새벽 2시가 되어 컨테이너에 붙여 연단이 쌓아졌다. 그리고 세 시간의 자유발언 후에 깃발만 올라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것도 처음에는 태극기와 아고라 깃발만 올라가는 것으로 했다가 모든 깃발이 올라갔다. 새벽 5시가 넘었고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인권단체의 사회자는 난장판 속을 오가는 고함소리에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무질서의 극치였다. 5시간이나 토론한 끝에 합의한 결론은 결국 인권단체의 원래 계획인 퍼포먼스였다. 자기와 의견이 다르더라도 상대가 의견을 밝힐 기회를 주고 서로 토론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최소한의 소양도 보여주지 못했다. 만 명이 채 못 되는 시민들 대부분은 자리에 앉아 중앙을 주시하고 경청했지만, 폭력투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음에도 주로 ‘무조건 비폭력’을 외치는 몇 십 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단순히 스티로폼을 쌓는 행위 그 자체 혹은 산성을 넘자는 시도 그 자체를 폭력으로 독단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힘으로 관철하려 했다.
이날의 결론에는 모두가 합의했지만 그것은 현실과의 타협일 뿐이었다. 컨테이너가 높으면 닭장차를 넘어가든 혹은 차벽을 돌아 청와대로 향해야 할 시간에 소모적인 논쟁에 빠져 버렸다. 많은 사람들은 지루한 토론을 지켜보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컨테이너 앞에서 벌인 이날의 논쟁을 ‘폭력과 비폭력 논쟁’이라고 부르지만 작명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전경버스를 끌어내고 차벽을 넘으려 하는 것은 폭력이 아니다. 화풀이를 위해서 끌려 나온 버스를 부수고 불을 질러도 기껏해야 기물 파괴인 것이지 폭력이 아니다. 최소한 신체에 상해를 가할 수 있는 각목이나 파이프 혹은 화염병을 동원했을 때 폭력 투쟁 혹은 폭력 시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마저도 공권력이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조폭과 같은 정권이라면 정당한 폭력이다. 아무도 폭력을 쓰자고 하거나 혹은 무장을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는데도, 상대방을 폭력으로 매도하며 ‘비폭력’을 외치면서 자기 의견만을 관철하려고 했던 것 자체가 엄청난 독선이고 폭력이었다.
이날의 논쟁은 퍼포먼스라도 해서 의지를 보여주자는 ‘저항파’에 대해, 순수를 가장한 ‘소심파’와 청와대로 가야 한다는 ‘투쟁파’ 간의 논쟁이었다. 폭력으로 오인받을 행동을 해서 빌미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게 소심파의 주장이었다. 그들은 비폭력을 찬미하면서 자신들의 의지를 폭력적으로 관철하려고 했다. 어떻게든 청와대를 향해 가려는 투쟁파가 다수였지만 5m가 넘는 산성을 올라갈 수는 있어도 뛰어내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다른 방안을 찾아야 했지만 밤이 너무 깊었고 결국 그 자리에서 실천 가능한 행동은 강력한 의지의 표현밖에 없었다.
승리를 위해서는 모이기만 해서는 안 되고 더 나아가야 했지만, 승리를 위해 행동했어야 할 순간에, 혹은 논쟁이 필요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쟁했어야 할 순간에, 대화와 토론 그 자체가 유린당하다가 퍼포먼스마저도 폭력이라고 규정하는 소심파 때문에, 발언의 주된 내용은 “비폭력을 주장하며 사람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을 막는 것은 또 다른 방식의 폭력이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냐”는 등 소심파의 비폭력론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결국 논쟁은 퍼포먼스를 승인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되어버렸다.9) 즉 논쟁의 구도가 잘못 설정된 것이었다. 그리고 5시간 만에 얻은 결론은 처음에 인권단체가 제시한 결론과 같았다. 6월 21일 국민토성이라는 동일한 유의 퍼포먼스가 아무런 이의 없이 받아들여진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6월 10일은 시민의 의지를 관철시키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날이었지만 그처럼 허무하게 지나갔다. 그리고 승리의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100만 명을 모으려고 했고, 30만 명은 모일 것으로 예상되었고, 100만 명이 모였다. 그렇다면 모였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승리를 위한 행동계획이 준비되어야만 했지만 ‘평화대행진’도 아닌 ‘평화대잔치’로 끝났다.
즉 대책회의는 이기려는 의지가 없었다. 답답했던 인권단체는 퍼포먼스라도 해야 한다고 스티로폼을 준비했지만, 그리고 그 행동이 당연히 지지받을 줄 알았지 격렬한 논란이 될지는 몰랐다. 만약 소심파들이 연단을 쌓는 것 자체를 방해하거나 문제 삼지 않았다면, 연단을 일찍 쌓고 자유발언을 빨리 시작할 수 있었다면, 그날 그 순간에 무엇을 할 것인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토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소수임이 밝혀지자 집으로 갔다. 투쟁파 혹은 넘자파 역시 의지는 넘쳤지만 대안은 제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인권단체의 현실론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10)
의견과 의지의 차이가 큰 사람들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하나의 결론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토론했다는 점에서, 이날의 토론은 ‘광장의 민주주의’를 실현했다는 의미는 있지만 ‘광장의 지성’은 작동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서로 의견이 다를 땐 의견의 취합을 위한 최소한의 사회권 즉 사회자의 권위는 인정되어야 했음에도, 자기만이 옳다는 지극히 독선적인 소수의 사람들이 자기 의사를 강요하고 관철하려 했기 때문에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조직되지 않은 개인들에 입각한 최소한의 중심도 없는 투쟁의 한계였고, 그 한계가 바로 승리를 가로막는 한계였다.

넘으려면 넘을 수도 있었고, 이기려면 이길 수도 있었다. 산성을 꼭 넘고 싶으면 높은 컨테이너가 아니라 그보다 낮은 차벽을 스티로폼이나 모래주머니를 쌓아 넘으면 된다. 사다리를 가져와도 되고, 중장비를 동원하여 닭장차를 끌어내어도 된다. 전경버스를 치우기 위해 불도저를 동원하겠다는 노조도 있었다.11) 몇 십 명이 넘어가면 안 되지만 천명 이상 넘어가면 차벽은 와해될 수밖에 없다. 설령 못 넘어가더라도 넘어가려는 열망을 끊임없이 진지하게 보여주면 된다.12)
만약에 폭력이 그토록 싫고, 차벽을 넘을 수도 없고, 청와대에 갈 수 없다면, 그냥 광장에 주저앉으면 된다. 경찰이 아무리 많아도 3만이나 5만이 넘는 시민에게 강제적인 해산작전이나 진압을 시도할 수는 없다. 만약 강제로 해산작전을 시도한다면 터져 나오는 분노가 정권을 삼켜버릴 것이니까…. 따라서 10만이나 20만 명이 모였을 때 이명박이 집에 갈 때까지 광화문에서 헤어지지 않으면 된다. 솥단지 걸어 놓고 1주일만 광화문에서 밥해 먹으면 된다. 구호를 외칠 필요도 없고 현수막만 걸어놓고 즐겁게 지내면 된다. 단 청계광장이나 시청광장과 같이 교통에 불편을 주지 않는 곳은 안 된다. 그것은 공권력에게 협조하는 것이니까…. 문화제를 해도 광화문 광장에서 해야 한다. 단 새벽에도 3만 명 이하로 줄어들면 안 된다. 아니 그 이하의 수가 지켜도 좋다. 침탈이 있으면 전 시민이 즉시 나오기로 약속하고 교대로 지켜도 된다. 대중의 의지를 끝내 억압할 수 없다면 이명박은 집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기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용산범대위’와 같은 전투적인 항쟁 지도부가 대중의 열망과 지혜를 수렴했다면 반드시 넘을 수 있었을 것이다.

‘될 때까지 모여라’고 해서 100만 명이 모였지만, 밤새 토론하느라 지쳤고 성과는 아무 것도 없었다. 동 틀 무렵 컨테이너 위에서 휘날리는 깃발을 보면서 누군가는 감동했겠지만 이날을 기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비폭력을 외쳤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사가 관철될 수 없어서 집으로 돌아갔고, 뭔가를 기대하며 끝까지 싸워 보려던 사람들도 실망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승리의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6월 25일~6월 29일 탄압과 대치의 시기와 6월 30일 미사의 의미

6월 19일의 특별담화 후 물러설 곳이 없었던 이명박은 6월 25일 고시를 강행하면서 강경진압에 나섰다. 6월 25일 138명, 6월 28일 59명, 6월 29일 131명 등 무차별 연행만이 아니라, 인권지킴이 조끼를 입고 있었던 이준형 변호사까지 각목에 맞아 두개골이 깨지는 등 노골적인 폭력진압이 시작되었다. 이학영 사무총장도 군홧발에 짓밟혔고, 국회의원임을 밝혀도 얻어터졌다. 그리고 시청광장이 봉쇄되었다. 6월 25일부터 6월 29일까지의 국면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는 항쟁의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이다. 과연 촛불이 꺼져가거나 위축되고 있는 상황이었는지, 아니면 공권력의 탄압을 맞받아치면서 커나가고 있던 상황이었는지….
대책회의 실무자들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되고 참여연대와 한국진보연대에 대한 압수수색이 시작되자, 이에 위기를 느낀 대책회의는 종교계와 민주당에 합류를 요청하였다. 7월 4일 대책회의 긴급운영위에서는 집회를 평화적으로 마치지 않으면 더 이상 같이할 수 없다며 겁먹은 시민단체들이 퇴장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13)
이런 상황에서 대책회의의 요청으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나서서 월요일인 6월 30일부터 3일간 시청광장에서 미사를 열었다. 촛불을 위로하는 사제단이 비폭력과 평화를 강조하는 침묵시위를 제안했을 때, 시민들은 그 뜻을 존중했다. 그리고 다시 목요일과 금요일에 목사님들과 스님들이 앞장선 행진에선 ‘공포와 두려움이 없이 거리로 나간다’(참고자료 1)는 기조 하에 ‘이명박은 물러가라’고 외쳤다.
사제들은 양심상 폭력에 유린당하는 촛불을 더 두고 볼 수 없어서 나왔겠지만, 그 상황은 촛불이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폭력진압과 무차별 연행이 속출했음에도, 6월 25일 2만 명, 26일 4만 명, 28일 12만 명이 집회에 참여하여 경찰과 맞섰다. 그리고 주말인 7월 5일 50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 사실상 이 시기는 투쟁의 의지가 강고해지고 대중의 동력이 다시 상승하는 때였던 것이다.

정권퇴진을 외치는 투쟁은 언젠가는 공권력의 폭력적인 탄압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 폭압을 넘어설 수 있으면 승리하는 것이고, 폭압에 위축되거나 굴복하면 지는 것이다. 6월 25일 이후의 상황은 그동안의 낭만적인 오픈게임이 끝나고 드디어 쌍방의 진짜 실력을 겨루는 본선게임이 시작된 것이었고, 시민들은 속출하는 연행자와 부상자에도 불구하고 전의를 불태우며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경찰의 폭력을 맨손인 시민들이 돌파할 수 있을지 아니면 새로운 투쟁양상으로 변할지는 아직 판단할 시기가 아니었다. 공권력이라고 하여 무한정한 폭력을 쓸 수는 없는 것이고 그들에게도 한계는 있다. 이승만의 졸개들은 소총을 쏘다가 무너졌고, 전두환은 3천 명의 광주시민을 학살하여 제물로 삼았지만, 민주화 20년을 경험한 시민들에게 이명박이 사용할 수 있는 폭력은 분명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기껏해야 곤봉과 물대포이고 최루탄이겠지만 이 땅의 민중들은 이미 그것을 이겨낸 경험이 있다. 그리고 시민들은 이명박의 폭력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강해지고 있었다.
시민들이 폭력적이어서 경찰이 폭력적이 된 게 아니라, 경찰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맨몸으로 맞서면서 굴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시민들에게는 비폭력과 평화를 얘기할 필요가 없었다. 시민들의 정당한 투쟁이 폭압에 못 이겨 ‘종교의 외투’의 보호를 받아야 된다면 그것은 역사를 30년 이상 후퇴시키는 것이다. 사소한 투쟁도 빨갱이로 몰리던 유신시절에 종교의 외피로 보호해주었던 그런 시절은 지났고, 결코 그 시절로 돌아가서도 안 되었다.14) 사제단이 나서야 될 시기가 있다면, 그것은 폭압이 극심해진 마지막 순간에 ‘총을 쏜다면 나를 먼저 쏘아라’고 하면서 대중의 맨 앞에 서는 것이다. 싸우고자 하고 이기고자 하는 대중의 열망에 앞장서는 것이다. 사제단은 억울함을 전면에 내세우는 용산투쟁과는 달리 공공연하게 정권퇴진을 외치는 항쟁에서는, 공공연하게 앞장서도 될 때까지 더 억제하면서 대중과 함께 즉 대중의 앞이 아니라 대중의 옆에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6월 30일 미사에서 “겨우 꺼놓은 촛불을 왜 되살려 놓았느냐고 원망이 많더라”며, 비폭력과 평화를 강조하는 침묵시위로 마감하면서, “대통령도 우리 국민도 모두 승리했다”고 말한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계에 의해서 촛불이 진정되거나 순화되었다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6월 30일부터 7월 4일까지 종교계가 주관하는 집회는 주중 집회였다. 그동안 촛불의 전투력은 주말에 발휘되어 왔다. 주말인 7월 5일 국민승리선언 대회에는 대책회의 내의 갈등으로 동원에 총력을 다하지 않았지만 무려 50만 명이 다시 모였다. 촛불의 열망과 의지는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주말인 7월 12일과 제헌절인 7월 17일에도 2만 명의 시민들은 치열하게 투쟁했다. 그럼에도 촛불이 7월 6일 이후 광장을 되찾지 못한 것은 7월 5일 이후에 대책회의가 벌인 희극들 때문이었다.
7월 5일의 희극들

‘될 때까지 모여라’고 해서 6월 10일 100만 명이 모였지만, 이명박에게 감명을 준 ‘아침이슬’을 부른 것 외에는 승리를 위한 아무런 기획이나 실천이 없었다. 그리고 ‘국민승리선언’을 위한 날인 7월 5일 50만 명이 모였다. 이미 6월 10일 100만 명이 모였어도 아무런 성과를 끌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단지 모이기만 해서는 안 되고 문화제만 해서도 안 되었다. 그러나 이날 기획되고 관철된 것은 평화대행진과 심야 음악감상회였다. ‘평화적이지만 완강히 저항한다’는 기조는 ‘평화’만 남고 ‘저항’이 사라져버렸다. ‘비폭력 평화 축제파’가 제안한 ‘비폭력 전술팀’(참고자료 1)은 완강한 저항에 저항하는 팀이 되어버렸다.
6월 20일 ‘정권반대 불사 선언’ 이후 6월 25일부터 탄압이 거세어졌지만 시민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저항의 의지를 키워가고 있었다. 하지만 대책회의(혹은 대책회의 내의 타협파 혹은 제도 내 존법파)는 항쟁이 부담스러웠고 그만두고 싶었다. 투쟁을 끝낼 명분을 위해서 청와대에 요구조건을 전달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거절당했다. 쪽팔려서 후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국민이 승리했다’면서 불매운동이나 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이 승리했다’는 선언은 수모를 감수하고서라도 투쟁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한편의 희극이었다.

이날(7월 5일) 대책회의는 작심하고 비폭력 평화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 도로에 나가있는 대중을 철야 음악감상회로 줄기차게 유도했다. 그러나 50만 명이 넘는 대중은 음악감상이나 하려고 집회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시민들은 불만과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서 나왔고, 저항과 투쟁을 하기 위해서 나왔다. 하지만 대책회의는 비폭력과 평화의 미명하에 투쟁의 열기를 식히고 있었다. 국민승리선언과 비폭력과 평화의 강조는 이명박에 대한 쪽팔림을 넘어 저항하고 투쟁하고자 하는 대중에 대한 우롱이고 기만이었다.
100만 명이 모이고 50만 명이 모여 스스로를 기만하는 축제와 재롱잔치가 끝난 뒤, 이명박은 자신감을 얻었고 대중은 승리의 희망을 잃었다. 많은 대중은 전망을 잃고 집으로 돌아갔고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평화와 안전이 보장되어야만 많은 시민이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비폭력 축제론’은, 투쟁의 의지를 배반하는 어떠한 집회도 승리의 전망과 동력을 소실시킬 뿐이라는 교훈을 배반한 것이었다. 그동안 항쟁의 과정을 살펴보면 5월 24일~5월 31일, 6월 25일~6월 28일처럼 투쟁이 격화되고 탄압이 심해질수록 더 많은 시민들이 나왔고, 6월 10일이나 7월 5일처럼 기만적인 축제나 하고난 후에는 참가인원이 급속히 감소했다.

한편 음악감상회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은 종로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이때에 시민들이 경찰과 충돌할까 봐 ‘눕자행동단’이 시민들의 앞에 끼어들어 경찰을 마주보고 앉았다. 여러 번 말하지만 촛불은 폭력을 당한 적은 있어도 폭력을 사용한 적도 없고 폭력을 사용할 능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눕자행동단이 시민을 등지고 앉아 있는 것은 마치 시민의 폭력성을 억제하려는 것과 같았다. 경찰의 폭력을 규탄하기는커녕 경찰을 자극시킬까 봐 시민을 억제하는 듯한 이러한 행동은 난센스였다.15) 새문안교회 골목에서 전경과 대치하면서 소화기와 방패에 신나게 깨지고 있는 같은 시민들을 향해, 뒤에서 비폭력을 외치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이 또한 한편의 희극이었다.

깃발회의

공권력의 체계적인 공격에 맞서 슬기로운 저항과 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중심이 있어야 한다. 중심이 없어서 적들이 쉽게 탄압할 수 없었고 그래서 투쟁이 오래 갈 수 있었다는 것은 헛소리다. 투쟁은 오래 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승리가 목적인 것이다. 모든 투쟁은 중심이 있든 없든 탄압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중심이 없고 조직되지 않은 개인들의 의지에만 의존할 때 그 대중은 탄압을 견디어 낼 수 없다. 자발적인 개인들의 합은 공권력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탄압에 차례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 촛불항쟁의 전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16) 용산투쟁은 전형적으로 중심이 있는 투쟁이었고 끈질기게 싸워서 승리를 쟁취했다. 승리를 할 수 있는 조건은 적의 공격과 탄압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중심을 만드는 것이고, 그 중심이나 지도부가 얼마나 강한 의지와 지혜를 가지고 대중의 열망과 지혜와 의지를 조직해 내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대책회의는 중심에 있었지만 처음부터 항쟁을 함께하거나 앞장설 생각이 전혀 없는 조직이었다. ‘아고라386’은 가투를 선동하고 선두를 자임했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안티엠비는 독자집회와 가두행진으로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합법의 틀 내에서 활동한다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항쟁의 지도부를 자임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17) 다만 앞장서는 깃발 중에서 세력이 큰 깃발이었다.
대책회의가 7월 5일의 희극을 연출한 뒤 꼬리를 사리자 투쟁파들은 고립되었다. 공권력의 전면적인 공격에 맞서 대오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6월 28일부터 투쟁의 선두에 서서 환호를 받고 신뢰를 쌓아왔던 ‘전대협’이 드디어 7월 19일 전면에 나섰다. 시민들이 대오도 갖추지 못한 채 토끼몰이를 당하는 희생을 막고자 했다. ‘깃발회의’를 소집했고 자신들의 계획을 얘기하고 동의를 구했다. 그리고 투쟁을 리드했다. 대중들은 모두 그들의 지휘에 따랐다.
역사상 어떤 위대한 항쟁도 투쟁이 심화되면 자생적인 중심 혹은 지도부가 뜰 수밖에 없다. 파리코뮌이 그러했고 광주항쟁이 그러했다. 탄압과 보복에 맞설 수 있는 효과적인 방어와 공격을 위해선 유능한 중심이 필요하다. 중심이 없는 투쟁은 결코 이길 수 없다.
7월 19일, 이날 전대협은 종로전투에서 헌신성과 전투성 그리고 탈권위적인 지도력을 발휘했다. 비록 항쟁의 전 과정을 책임지는 전략지도부가 아니라 일시적인 전술지도부였지만, 항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투쟁하는 대중들 모두의 신뢰와 동의 속에 태어난 작은 중심이었다. ‘깃발회의’는 대중이 창조적으로 발견해 낸 위대한 틀이었다. 대중의 자발성과 앞장서는 사람들의 의식성이 어떻게 결합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훌륭한 해답이었다. 1871년 파리의 시민과 노동자들이 혁명적 자치정부인 ‘파리코뮌’을 창조했다면, 2008년 촛불은 ‘깃발회의’를 발명해 낸 것이다.
조직되지 않은 대중들이 중심다운 중심이 없어서 이길 수 없었던 그리고 질 수밖에 없었던 투쟁에서, 비록 작은 중심일망정 민주적인 방식으로 신뢰를 수렴하여 일시적으로나마 중심을 만들어 낸 것은 밧줄을 당기고 차벽을 넘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있는 전진이었다. 그러므로 7월 19일은 패배한 이 항쟁 속에서 비록 늦기는 했지만 작더라도 가장 의미있는 진전을 이룬 날이었다. 깃발회의는 자발성과 의식성, 그리고 민주적 중심(권위)을 위한 중요한 해법을 담고 있었다.

배반의 날 8월 15일

7월 5일 국민승리선언, 즉 항쟁포기선언 이후 남은 사람들은 투쟁파였다. 이들은 약 2만 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그들은 새문안교회 골목 안에서 전경과 싸우고 있을 때, 방패로 찍고 벽돌을 집어던지는 전경을 향해서가 아니라, 맨손으로 전경과 대적하는 같은 시민을 향해서 ‘비폭력’이나 외치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청와대로 가고 싶었고 이명박을 끌어내리고 싶었다. 7월 12일에는 경찰과의 대치를 피하면서 2만 명의 시민들이 끝없이 게릴라 가투를 전개했고, 7월 17일, 19일, 26일, 그리고 부시가 방문한 8월 5일에는 종로의 대로에서 공권력과 대치했지만, 곤봉과 방패를 앞세운 경찰에게 밀렸다. 그러나 강경한 진압작전에도 대오는 허물어지지 않았다. 허물어지면 다시 복구하면서 항쟁의 의지를 분명히 보여줬다. 맨손인 그들은 투쟁을 멈출 수는 없었지만 승리의 전망은 보이지 않았다. 결전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미 개점휴업 상태인 대책회의와는 별도로 아고라에서 [815 100만]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알고 있었다. 8월 15일이 최후의 항전이 될 것임을….

6월 25일 이후 탄압이 심해지자, 대책회의는 정권반대운동이 대중의 열망임이 확인되었지만 격화되는 거리투쟁에 부담을 느끼면서 동요하기 시작했고 내분이 생기면서 기능을 잃어갔다. 대중의 기대와 질타를 외면할 수 없어서 주말집중투쟁이라도 하겠다고 했지만, 시청광장의 봉쇄와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간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8.15 집회는 이처럼 결코 함께할 수 없는 두 가지 지향이 섞여 있었다. 하나는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투쟁적인 시민들의 열망이었고, 다른 하나는 더 이상의 투쟁이 부담스러워서 사직인사를 하면서 짐을 벗어버리려는 대책회의의 자세였다. 대책회의에는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사임행사가 필요했다. 비록 ‘집회를 짧게 하고 가두행진에 나선다’는 계획은 있었지만, 그들에게 의미있는 것은 ‘짧더라도 공식적인 사임행사’가 더 중요했다. 사임행사에 의미를 두는 대책회의와 가투에 의미를 두는 시민과의 모순이었다.
시청광장은 당연히 봉쇄될 것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행사가 중요했던 대책회의에게는 사직서를 들려 줄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신세계백화점 앞 로터리가 집결지로 결정되었다. 이곳은 서울에서도 가장 도로 폭이 넓은 곳이고 무려 5거리나 되는 로터리이다. 왕복 10차선의 가로로 뻗은 종로는 세로 방향에서 공격이 들어와 설령 허리가 잘리더라도, 인도에 사람이 많을 뿐만 아니라 작은 골목도 많아서 해산이 목적인 공격은 별 효과가 없다. 그 때문에 전선은 대체로 광화문 쪽 한 방향에서만 형성된다. 부시 방문 날에도 경찰은 오직 한 방향에서만 공격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종로는 5,000 대오만 되어도 갇히지 않고 저항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지만, 신세계 앞 광장은 대치할 수도 없고 명동 쪽으로 피신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
대책회의가 잘 들리지도 않고, 별 의미도 없고,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은 작별사인 선언문을 읽는 동안 진압경찰이 속속 도착했다. 밤 8시쯤 낭독이 끝나자 진압경찰과 체포조가 색소포와 곤봉을 가지고 사방에서 쇄도했다. 대오는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명동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을지로에서 동대문까지 달려갔지만 밤 9시가 넘어 아무런 중심이나 지침도 없이 두타 앞에 서있는 동안, 양 방향에서 대오를 갖춘 전경들이 달려들자마자 그냥 흩어졌다. 8.15통일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상경했던 통일선봉대 노동자들은 귀가를 서둘러야 할 시간이기도 했다. 그들은 10월에 있을 총파업을 열심히 해보자고 다짐하면서 ‘투쟁’의 구호를 공허하게 외치며 뿔뿔이 흩어졌다. 그토록 벼르던 ‘815 100만 대첩’은 대치 한번 못한 채로 허무하게 끝이 났다. 그리고 도심에서의 대규모 저항도 막을 내렸다. 순박한 개미떼들의 반란과 꿈이 마지막으로 배반당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항쟁의 고양과 쇠퇴―비폭력 축제론의 허구

촛불항쟁 기간에는 두 번의 고양기와 한 번의 회복기가 있었다. 2008년 4월 6일 안단테가 시작한 탄핵 서명은, 4월 25일 5만, 27일 7만, 28일 10만, 30일 21만, 5월 1일 40만, 5월 2일 60만 명으로 폭발적으로 고양되었다. 그리고 안티엠비 회원은 4월 19일 16,700, 4월 24일 21,600, 5월 2일 8만, 5월 29일 16만 명으로 증가했다. 안티엠비 회원은 한때 18만 명에 육박하였으나 16만 명 선을 유지했다. 결국 항쟁의 확장기는 5월 말과 6월 초에 거의 끝났고, 그 뒤로 새로운 사람들이 합류하지는 않았다.
한편 촛불집회의 주말과 휴일 참여자를 기준으로 보면, 5월 2일~6월 10일까지 계속 증가하고 있고, 이 기간 중인 5월 하순에는 예비군, 유모차, 의료팀과 386의 등장이 두드러졌고, 6월 10일 전국노래자랑 이후 급감하였다가 6월 14일 3만 명을 기점으로 다시 7월 5일까지 상승하였다. 7월 5일 철야 음악감상회 후에는 2만 명으로 추산되는 전투적인 가투파만 남았다.

이러한 사실은 4월 하순부터 5월 2일까지 폭발적인 증가가 있었고(1차

날 짜
5/3
5/10
5/17
5/24
5/31
참가 인원
20,000
18,000
40,000
50,000
150,000
연행자
 
 
 
37
228
날 짜
6/7
6/10
6/14
6/21
6/28
참가 인원
200,000
700,000
30,000
60,000
120,000
연행자
12
 
 
12
59
날 짜
7/5
7/12
7/17
7/19
7/26
참가 인원
500,000
20,000
20,000
5,000
5,000
연행자
 
3
7
17
42
표 1_ 촛불집회 참가자 수의 변동 (서울지역)

고양), 다시 6월 10일까지 완만한 2차 고양이 있었으며, 6월 10일 이후 급감하였다가 7월 5일까지 점진적으로 다시 회복했지만, 대책회의의 배반으로 동력이 쇠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투쟁이 치열하고 탄압이 격심했던 5월 24일~31일, 6월 7일 등과, 6월 25일~28일 사이에 집회 참가자가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7월 5일 집회는 대책회의가 내분으로 인해 적극적인 동원을 하지 않았음에도 50만 명이 모였다. 이러한 사실은 집회가 평화적이어야 시민들이 참여한다는 비폭력 축제파의 주장과는 반대로, 투쟁의 열망을 배반하면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촛불과 대책회의의 불행한 만남

안티엠비는 이미 4월 26일과 5월 17일에 ‘명박 탄핵’의 구호를 내건 합법 집회를 신고하고 합법적인 가두행진을 하였다. 부산에서는 이미 5월 10일에 화물연대가 앞장서서 주간에 합법적인 가두행진을 하였다. 5월 24일의 첫 가두 진출(즉 신고되지 않은 도로 점거)도 가투파의 주도 하에 시작되었고, 이후의 수많은 가두투쟁 역시 신고 여부나 합법 여부를 따지지 않고 전개되었다. 즉 대중은 항쟁의 초반부터 거리로 나서고자 했고, 5월 24일부터는 국민을 배반한 정권에 대해 정당한 저항권을 행사하였다. 그럼에도 대책회의의 비공식적인 거리행진은 ‘다함께’가 리드한 5월 26일부터였고,18) 대책회의가 공식적으로 가두행진에 나선 것은 5월 29일부터였다.
대규모 가두진출이 이루어지는 주말에는 평일보다 30분이나 1시간 빠르게 전철이 끝나고 새벽 2시면 좌석버스도 끊어진다. 밤 11시가 넘으면 대오가 1/3로 줄고, 새벽 1시가 넘으면 또 1/3로 줄었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 대오가 1,000명 이하로 줄면 진압과 연행이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주말집회를 저녁이 아닌 오후에 시작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그럼에도 대책회의는 밤 9시나 10시가 다 되어 문화제를 끝냈다. 문화제를 언제 시작하고 언제 끝내는가는 가두행진 혹은 가두진출에 대한 의지를 가늠하는 척도이다.

표 2_ 밤 9시 이전에 행진이 시작된 날들과 출발 시각

5/26
5/31
6/1
6/3
6/4
6/5
6/6
6/7
6/8
6/10
20:30
20:40
20:00
20:40
20:10
20:30
20:30
20:30
20:50
21:10
6/20
6/21
6/25
6/26
6/27
6/28
6/29
7/5
7/12
7/19
21:00
20:50
19:30
20:00
20:30
20:30
18:30
20:40
19:30
20:30

* 5/31,6/6, 6/7, 6/10, 6/20 등은 대학로 등에서 사전행사 후 오후 5시경부터 촛불문화제 장소인 시청 쪽으로 행진이 있었다. 6/29(일)은 집회장이 봉쇄되자 시민들이 곧바로 가두로 진출했다.

100일이나 계속된 항쟁 속에서, 대학로에서 사전집회 후 오후 5시경에 시청 등의 문화제 장소로 행진했던 5월 31일과 6월 6일, 7일, 20일 등을 제외하면, 대책회의가 저녁 8시 이전에 가두행진을 시작한 것은  6월 25일과 7월 12일 등 이틀뿐이었고, 오후 8시부터 8시 40분 사이에 행진을 시작한 것은 5월 26일과 31일, 6월1일과 6월 3일~7일, 6월26일~28일, 7월 5일과 19일 등이었다. 대책회의가 시위대의 맨 앞에 서지는 않았지만 늦게까지 남아 시민들과 호흡이라도 같이한 날은 5월 30일~31일, 6월 21일과 25일~28일뿐이었다.
집회 시간, 집회 장소, 구호, 행진코스 등은 투쟁의 의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저녁 7시에 시작하여 밤 9시 혹은 거의 10시가 다 되어 행진을 시작하게 한다거나, 오직 ‘고시철회’만 외치면서 ‘명박퇴진’의 구호가 못 나오게 막는다거나, 경찰이 봉쇄하기 쉬운 병목 같은 청계광장만을 고집한다거나, 청와대나 광화문 방향이 아닌 명동이나 동대문으로 도는 것은, 모두 투쟁의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만큼 대중의 열망을 억제한 것이었다.19)
이명박의 총체적인 국정 파탄에 대하여 대중은 처음부터 5대 현안 혹은 6대 현안을 요구하며 이명박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대책회의의 1+5 의제 확대(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외에?대운하 철회, 의료민영화 반대, 물과 공공재 사유화 반대, 교육 자율화 반대, 공영방송 수호)는 무려 한 달이나 뒤진 6월 9일에 이루어졌고, 그마저도 7월 4일에야 논란 끝에 확정될 수 있었다.20) 대책회의가 의제를 확대한다는 것은 미친 소에 대한 정책반대운동에서 정권반대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대책회의는 6월 11일 “20일까지 재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정권퇴진운동에 나서겠다”고 예고했지만, 막상 제출한 구호는 ‘명박심판’이었고 그마저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명박 퇴진’을 공식적으로 외친 적도 없고 결정한 적도 없었다.(참고자료 2) 그리고 처음부터 일관된 구호는 ‘고시철회, 협상무효’였다. 6월 19일 국민대토론회에서 정권반대의 열망이 확인되었음에도, 대책회의는 내부의 동요 때문에 정권반대투쟁을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결의할 수 없었다.(참고자료 1, 2)
5월 6일 1,500개가 넘는 시민단체가 합의한 것은 ‘협상 전면무효, 책임자 처벌’을 내건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였다. 결국 대중은 6대 현안을 내걸며 ‘명박탄핵’과 ‘명박퇴진’을 외치고 있을 때, 시민단체는 오직 ‘광우병’만을 내건 ‘정책반대운동’을 하고자 했다. 바로 여기에서 촛불과 대책회의의 불행한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시민압력운동단체라는 제도 내 개혁세력들의 한계가 관철된 것이기도 했다.
정책반대운동은 다수가 모여서 압력(문화제나 집회)만으로 해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권퇴진운동은 거리의 투쟁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리의 투쟁은 경찰이 그어놓은 폴리스 라인을 얌전하게 존중할 때에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폭력투쟁이 아니더라도 광장과 도로에서 엄청난 분노를 표출해야만, 그리고 그 의지가 꺾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할 때에만 스스로 물러나든지 기득권층(한나라당을 포함한 지배계급)이 그들의 대리인(이명박)을 버리든지 하는 것이다.
대책회의의 주요 세력들이 ‘민민연’(민주주의와 민생을 위한 새로운 연대기구)으로 간판만 바꿔달 때, 그들은 “촛불시위에서 ‘정권퇴진 불사’라는 말을 사용해 보수세력에게 빌미를 준 점, 시위대의 우발적인 폭력을 제지하지 못한 점이 대책회의의 두 가지 큰 실수였다”21)고 반성하고 있다. 세상에! 대중은 첫날부터 ‘명박퇴진’을 외치며 싸우고 있는데, ‘퇴진운동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퇴진운동을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가, 그마저도 ‘그것은 수사적 표현일 뿐’이라는 말을 언론에 흘리더니, 이제 와서 그게 그토록 큰 실수였다고? 폭력에 짓밟힌 건 시위대인데, 시민들이 투쟁하지 못하도록 실컷 음악감상회나 강요하더니, 이제 와서 시위대가 우발적인 폭력을 써서 이기지 못했다고? 이것이 바로 제도 내 개혁세력들의 한계인 것이다. 그들은 항쟁의 마지막 순간까지 ‘명박퇴진’을 얘기하지 못하고 행여라도 대중들이 정권퇴진운동을 밀어붙일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온갖 수를 써서 대중들의 투쟁을 억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존법주의자들인 제도 내 개혁세력들은 도로교통법을 위반하는 촛불시민들과 함께할 수 없었다. 이것은 제도 내 개혁세력들이 촛불항쟁과 같은 낮은 단계의 반신자유주의 투쟁에서조차 투쟁하는 대중과 끝까지 함께할 수 없다는 본질적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그들은 도로교통법만 존중할 뿐 아니라 민중의 삶을 유린하는 신자유주의 정권도 존중한다.
대중의 열망을 감당할 수 없을 때에는 사퇴하거나 간판을 바꿔 달고 의지가 있는 조직만 참여하면 되는데도, 간판도 안 내린 채 투쟁을 관리하려고 했던 것이 이들의 가장 큰 과오였다. 이 점에서 용산범대위가 꾸려질 때에 ‘명박퇴진’의 슬로건에 동의할 수 없어서 대책회의의 중심이었던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이 참가하지 않은 것은 차라리 책임있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22)
용산투쟁은 보상금이나 더 받아주기 위해 시작한 투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거민의 생존권만의 문제도 아니고, 공권력의 실수에 의한 과잉진압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경찰독재정권인 이명박정권이 촛불항쟁에서 드러난 민중들의 항쟁의지의 싹을 자르고자 작심하고 저지른 학살만행이었다. 국민을 배반하고 국민을 적으로 삼고 학살을 자행하는 정권의 문제였지, 실수를 저지른 경찰 몇 사람의 책임자 처벌이나 재발방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하게 정권의 심장부를 향하는 투쟁이어야 하고 정권반대투쟁이 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모 정치조직에서 ‘명박퇴진’의 구호를 ‘실현의 슬로건’이 아니라 ‘선동의 슬로건’으로조차 내세울 수 없다는 단체들과 함께하지 못해서 시민들의 광범위한 참여를 이끌어낼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반이명박 노선을 명확하게 하지 않은 채 대책회의처럼 투쟁의 수위를 낮추고 광범위하고 나이브한 집회나 했다면 최소한의 승리라도 얻을 수 있었을까? 참여하는 단체가 적어서 시민들이 안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방송녀’가 ‘불법집회’ 운운하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 시민들의 참여는 위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많은 단체가 함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단호한 비타협적 투쟁의 의지가 있느냐의 여부이다.

운동의 질곡과 한계들

촛불 항쟁의 전 시기 동안 대책회의만큼 대중의 비난을 받은 조직은 없었다. 6월 10일 프락치로 매도되었던 인권단체만큼이나 오해에 기인한 부당한 비난도 많았다. 특히 모금함을 왜 돌리느냐며 투명하게 통장으로만 받으라는 주문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시민단체 중 돈 문제가 투명하지 않아 비난을 받을 만큼 타락한 조직은 없을 것이다.
대책회의의 가장 큰 공적은 대중이 모일 수 있는 장을 만들고 대중을 동원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대책회의는 항쟁의 초반부터 투쟁의 지도부가 아니라 현장지원조직임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의 말대로 투쟁에 책임을 지지 않는 보조자라면 최소한 투쟁을 억제하려고 해서는 안 되었다. 대책회의에 대한 비난의 본질은, 대중은 정권퇴진투쟁을 하고 있는데 정책반대운동에 가두려고 했던 점이다. 대중이 5대 현안을 내걸고 ‘명박퇴진’을 외칠 때 ‘광우병’만의 문제로 축소하여 ‘고시철회, 협상무효’만 고집한다든지, 집회를 낮 시간에 하고 가두행진을 빨리 시작하라는 요구를 받지 않은 점이나, 병목 같은 청계광장을 고집하지 말고 시청이나 광화문에서 하자는 요구를 제 때에 받지 않은 점은 대중의 열망과 의지를 억압한 것이다. 이 점이 비판의 대상이다.
그런데 1,700개가 모인 단체라고 해도 회의에 결합하는 단체는 30-40여 개에 불과하였고, 그마저도 다양한 색깔과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싸잡아서 비난하는 것도 문제가 있을 것이다. 또한 한국진보연대와 참여연대가 중심에 있었다고 해서 모든 책임을 두 단체에 돌리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특히 상황실 인력 50여명의 대부분을 두 단체에서 투여한 점이나 고생한 점도 평가되어야 한다.23)

대책회의의 가장 큰 과오는 밤늦게까지 문화제를 질질 끌어서 대중의 투쟁을 방해한 점이다. 이것은 대중의 열망을 배반하는 행위이고 결과적으로는 이명박을 이롭게 한 범죄적 행위이다. 모든 투쟁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만, 항쟁이 패배한 주된 이유가 대중의 열망을 배반하고 투쟁을 배신한 점에 있다면 그 책임소재는 반드시 밝혀야 한다. 도대체 누가, 어떤 세력이 그토록 비난받으면서도 문화제를 질질 끌었는가?

“5월 24일 첫 가두진출에서 시민들이 광화문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박원석 실장이 집회장에서 동참을 호소한 행동에 대해 대책회의 운영위 소집자인 한국진보연대 집행위원장은 “박실장이 그렇게 말해서 깜짝 놀랬다”며, ‘왜 일을 내느냐’는 듯이 유감을 표명했다. … 6월 9일 대책회의 운영위는 6.10 대회를 하루 앞두고 그 대회의 기조를 ‘이명박정권 퇴진불사’로 정하고, 의제도 1+5(광우병 외에 의료민영화, 공영방송, 물과 공공재 사유화, 대운하, 교육)로 결정했다. … 이날의 결정이 언론에 보도되자 대책회의 안팎의 개혁주의자들은 ‘그것은 수사적 표현일 뿐’이라는 말을 언론에 흘리며 … NGO 지도자들은 1+5를 1(광우병 쇠고기 쟁점)이 더 중요함을 보여주는 공식으로 해석했고, 나중에 단일 의제(불매운동)로 가는 발판으로 삼았다. … 6월 20일까지 재협상을 하지 않을 경우 정권퇴진운동을 불사하겠다고 한 후, 보건의료단체연합과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를 제외한 거의 모든 NGO들이 퇴진요구가 섣부르다고 주장했고, ‘막 나가는’ 운동을 말리러 온 것처럼 행동했다. 녹색교통 같은 단체가 대표적이었다. 한국진보연대는 NGO와 거의 다르지 않은 입장으로 일관했다. 한국진보연대 집행위원장은 특히 그랬다.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전농, 나눔문화도 모두 정권퇴진요구에 반대했다. 안티2MB도 퇴진을 지지하지 않았다. … 대책회의 지도자들은 민주노총 지도자들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노동자 투쟁호소를 부담스러워 했다. 특히 한국진보연대 집행위원장은 “타 단체의 활동에 이러쿵저러쿵 하기 어렵다”면서 민주노총 파업에 대한 나의 촉구를 가로막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이 등원을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도 무마한 바 있다. … “이 정권 아래서는 재협상도 어려우므로 정권퇴진이라는 목표를 분명히 제시하고 노동자들에게 진정한 파업에 나서주기를 호소해야 한다.” … 그러나 한국진보연대 집행위원장은 “왜 끝난 얘기를 다시 꺼내느냐”며 나를 윽박질렀다. … (6월 30일 운영위에서) NGO 지도자들은 우선 비폭력 기조를 재차 강조했다. 시위대의 폭력이 탄압을 불렀다는 듯이 말했고, 경찰진압을 부르는 행동은 모두 폭력이라고 규정짓는 듯도 했다. 예컨대 청와대를 향한 행진은 경찰진압을 부르므로 하면 안 된다는 식이었다. 참여연대, 여연, 녹색연합은 모두 이 점을 강조했다. 녹색연합 사무처장은 “청와대로 가자거나 전경차를 끌어내는 전술을 중단하고, 광장문화를 살리자”고 했다.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평화적 행진임을 가시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탑돌이’ 같은 퍼포먼스를 하자고 했다. 여연 공동대표는 7월 5일 집회를 불매운동/안사기 선언운동으로 전환하는 자리로 삼자고 했다. … NGO지도자들은 7월 5일 촛불승리를 선언하고 ‘이제 생활로 돌아가 불매운동을 이어가자’는 전환을 이루자는 것이었다.24) 7월 3일 운영위에서 NGO 지도자들의 입김이 강력히 작용한 기조 전환이 제안되었으나 통과되지 못하자, 7월 4일 다시 긴급 운영위원회를 소집했다. … 종교계집회가 끝난 후 더는 집회를 유지하지 말 것(집회종료선언)과 경찰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는 방향으로 행진하지 말 것이었다. 시민단체 지도자들은 대책회의의 나머지 단체들이 이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7월 5일 집회를 할 수 없다고 협박성 발언을 했다. … 논쟁이 계속되자 여연 공동대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고 시민단체 측 참가자들이 전원 퇴장했다. 한국진보연대 집행위원장은 시민단체 지도자들을 뒤쫓아가 중재를 섰고, 결국 모호한 타협안이 마련됐다.25) 집회를 평화적 기조로 하며, 종교계와 함께 집회를 하고 행진을 한 뒤 10시부터 문화제를 이어간다는 것이었다. …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 임삼진을 비공개 접촉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우리 쪽의 타격이 더 컸다. … 임삼진을 만난 3인(여연 공동대표, 한국진보연대 집행위원장, 녹색연합 사무처장)이 촛불시위를 연착륙시키고 불매운동을 이어가자고 한 장본인들이고 … 대책회의는 6월 10일 ‘퇴진불사’ 입장을 표명한 뒤 너무 오랫동안 이명박에게 시간을 벌게 해주면서 기회를 놓친 실책을 저질렀다. … NGO와 한국진보연대 일부 지도자들은 정권퇴진안을 부결시킴으로써 이 얘기를 다시는 못 꺼내도록 내 입을 막으려 했지만 한국진보연대의 균열로 그럴 수 없었다. 17 대 37로 1+5안과 병렬적 의제확장안이 승리했다. 그러자 민언련, 참여연대, 환경단체 등에서 이 결정을 고수하면 함께할 수 없다고 탈퇴 압력을 가하며 번복할 것을 요구했다.”(김하영, 2009: 206-18)

우리는 이러한 김하영 동지의 증언 속에서, 한국진보연대와 일부 시민단체 그리고 그 단체들의 특정 지도자들이 대중의 열망과 투쟁을 배반하기 위하여 항쟁 속에서 어떤 행동들을 했는지 잘 알 수가 있다. 이들이 바로 촛불시민들이 “행여라도 투쟁을 할까 봐, 행여라도 투쟁이 커질까 봐 항상 방해하고 억제”(발표글 6)해 온 당사자들이다. 촛불시민들은 이명박의 폭압에 억압당하기 이전에 이명박의 아르바이트생과 똑같은 행동을 한 ‘직업이 투쟁의 집행위원장이 아니라 투쟁의 관리위원장’인 사람과 겁먹은 존법주의자들에게 관리되고 억압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수많은 단체들이 모인 대책회의가 왜 대중의 열망을 배반하고 억압할 수밖에 없었고, 왜 운동은 대중의 열망에 부응하지 못했는가이다.

시민단체 내의 존법주의자들
“87년 6월 항쟁으로 확장된 민주적 공간은 그 이전의 억압적 통치체제에서 성장하기 어려웠던 시민사회운동이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기왕의 민주 대 반민주라는 구도 하에서 반독재 연합을 이루었던 사회운동 세력은, 신자유주의로의 개편과정에서 자유주의 세력이 보수세력과 함께 신자유주의 좌우파를 이룸으로써, 비판적인 개혁적 세력은 시민운동으로, 진보적 변혁세력은 민중운동으로 분화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진보적 변혁세력은 노동자와 민중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적절한 대응과 반격을 조직하지 못한 채 후퇴를 거듭하고 있는 중이고, 중간에 있는 비판적 개혁세력은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동요하면서 변혁성과 운동성을 상실해가고 있는 중이다.
현 시기의 시민사회운동이 시민을 단지 후원회원과 관객으로 소외시키면서, 시민 없는 시민운동 혹은 상근자나 전문가 집단의 대리주의적 실천에 머물고 있는 것은, 운동의 기반과 전망에 대한 의식의 불철저함에 기인하는 바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시민단체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모호한 태도 혹은 타협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 운동에 대한 장애와 질곡으로 되어 있고, 이 점은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슬로건은 죽어도 걸 수 없다는 대책위 내부논쟁이나 용산 철거민 투쟁에 함께하지 않은 것에서도 확인되는 바이다.”(박석삼b, 2010: 543-44)

참여연대나 여연이나 녹색연합 등의 시민단체는 무슨 혁명조직이나 변혁세력이 아니라, 제도의 틀 내에서 그리고 합법의 테두리 내에서 개혁을 추구하는 단체들이다. 그들은 ‘제도 내’와 ‘합법의 틀’이라는 자기 정체성 때문에 평상시에는 대중보다 앞서 있는 것 같지만, 대중이 폭발적으로 진출하는 항쟁의 시기에는 대중의 뒤에 있을 수밖에 없고, 관성을 벗어날 수 없는 자기 한계 때문에 대중의 열망을 제도의 틀에 가두려고 한 것이다. 대책회의는 처음부터 투쟁의 지도부가 아니라 현장지원조직(보조자)이라고 밝혔다. 바로 여기에서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2008년 촛불투쟁은 단순한 투쟁이 아니라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항쟁이었다. 따라서 존법을 벗어날 수 없는 세력들이 이 투쟁에 앞장선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보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보조만 하는 것도 내란의 공범이 되는데 어떻게 보조를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도로교통법도 어길 수 있는 조직이 못 된다. 따라서 도로교통법을 밥 먹듯이 위반하는 촛불시민들을 앞장서지는 못해도 뒷바라지는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모순이고, 결국 이 모순은 촛불들이 도로교통법을 어기지 못하게 하는 노력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비폭력 축제론’의 본질이다. 그들에게는 전투성과 변혁성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비타협적이고 투쟁적인 시민단체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대중의 열망에 부응하려고 한 수많은 헌신적인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과는 다르게 ‘존법’을 행동의 제1강령으로 삼는 시민압력운동단체26)나 그 지도자들은 평상시에는 대중보다 앞서 있지만 투쟁이 조금만 격화되면 대중의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다. 제도 내 존법주의자들은 촛불항쟁처럼 낮은 단계의 반신자유주의 투쟁에서조차 비타협적으로 함께 맞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항쟁의 ‘중심의 역할’을 요구받았던 대책회의에서 이들 제도 내 존법주의자들이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 촛불시민들의 첫 번째 불행이었다.
‘존법주의’란 민중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 온갖 악법을 양산하여 ‘법질서’의 수호라는 탈을 쓰고 자행되는 신자유주의 경찰독재국가 등이 강요하는 억압에 순응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존법주의자와 비타협주의자가 다른 점은, 존법주의자는 폴리스 라인을 아무리 좁혀 와도 끝까지 존중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고, 비타협주의자는 비록 힘이 없어서 폴리스 라인을 지킬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그 현실에 분노하고 그 라인을 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제도 내 개혁주의자나 존법주의자들의 실천 중에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고발과 비판 등 가치있는 실천이 있지만, 그들은 분노를 담을 수 있는 뜨거운 심장이 없는 까닭으로 대중의 분노를 고무하거나 조직하여 이 현실을 넘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시민 없는 대리주의적 압력운동에 매몰되는 것이다.

패권주의와 보신주의의 야합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책회의 내에도 대중의 투쟁의 열망을 받아 안아야 한다는 단체가 37개나 되었음에도, 왜 17개 단체의 주장대로 ‘비폭력 축제론’이 관철되어 이명박을 위한 재롱잔치나 하게 되었는가이다.27) 물론 김하영 동지의 글에서 보듯 피상적으로 보면 끊임없이 투쟁을 회피하거나 투쟁파를 억제하면서, 투쟁파와 축제파가 대립하고 있을 때 축제파까지 껴안고 가야 한다면서 결국은 축제파의 의지가 관철되게 한 원만한 품성을 지닌 관리위원장에게 화살을 돌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지나간 7-8년간 결코 비타협적이거나 투쟁적이지 않은 누군가에게 투쟁의 관리위원장을 단골로 맡긴 바로 그 질서와 힘이 문제인 것이다.
그동안 우리 운동에서 투쟁의 지도부가 투쟁의 의지를 억압하고 관리하려고 한다는 비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비단 촛불항쟁에서뿐만 아니라 “파병반대든 FTA반대든 간에 이름의 앞부분만 바꾼 대책위가, 항상 투쟁의 수위를 조절한답시고 혹은 투쟁을 관리통제한다는 온갖 의혹을 받으면서, 심지어는 대중들이 나아가려고만 하면 경찰과 합의해서 정리집회나 일삼으면서 투쟁을 배반해 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고”(발표글 1)28) 투쟁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행사나 한다는 비판은 줄곧 있어왔다. 그래도 ‘민중연대’ 때에는 좌파와 우파가 동거하면서 투쟁을 만들어내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에서 패권을 장악한 우파29) 내의 특정 세력들은 좌파를 배제하려고 했다. 그들의 패권주의에 대해서는 새벽길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한 바 있고, 진보신당 역시 단순히 종북문제가 아니라 패권주의에 견디다 못해 민주노동당에서 떨어져 나왔다.30) 그리고 민중연대에서 좌파를 배제하고 만든 것이 통일운동단체들이 주로 모인 한국진보연대였다. 다양한 정치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대중조직인 민주노총과 대중정당인 민주노동당을 한국진보연대에 가입시켜 시대착오적인 통일전선을 만들려고 했다.31) 이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구조조정과 같은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서 총체적인 투쟁이 필요했음에도 민주노총의 80%를 차지하는 대기업노조는 자기 밥그릇을 건드리지 않는 한 투쟁을 원하지 않았고, 이런 대중의 보수화에 영합하여 우파는 국민파와 합작으로 타협적 지도부를 만들었다. 입으로만 투쟁과 총파업을 외칠 뿐 투쟁을 조직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2009년 8월 초 평택에서 쌍차 동지들과 연대하러 간 대중들은 연속 2주 동안이나 경찰에 쫓겨 5km 단축 마라톤을 했다. 그것은 87년 노동자 대투쟁과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과 민주노총을 건설했던 한국 노동자계급의 자존심이 최종적으로 망가지는 순간이었다. 대중의 투쟁의지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일전을 불사하기 위한 준비도 되어 있었다. 하지만 행여라도 폭력세력으로 매도되거나 대중들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하신 노동관료들께서는 7월 25일에는 공장 앞도 아닌 평택역에서 조금 떨어진 법원사거리 앞에서 집회를 하자느니, 새벽에 농성장이 침탈당한 8월 2일에는 하루 종일 뭉개다가 오후 늦게야 평택역 앞에서 촛불이나 들자고 하면서 대중의 투쟁의지를 가로막았다. 촛불항쟁 때 민주노총은 무려 총 120분(=2시간)이나 되는 7.2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2009년 2월 28일 용산 범국민추모대회 때, 여의도에서 전국노동자대회를 끝낸 1만 노동자 대오가 모처럼 전경을 밀어붙이며 시청과 남대문을 거쳐 신세계 앞 명동입구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노동관료들은 8시도 채 안 되었는데 정리집회를 하자면서 대오를 명동성당 앞으로 집결시켰다. 파업을 조직하려고 해도 일선의 대중들이 움직이지 않아 어렵다고 하더니, 막상 대중들이 싸우고 있을 때는 한 사람의 연행자나 희생자도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책임감에 불타올라 행동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과 한국진보연대에서 일부 우파들이 패권을 장악하고 확립한 과정은 운동의 몰락 과정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변혁을 얘기하면서도 투쟁할 생각은 없이 조직의 안위를 지키고 세력의 확장에만 관심이 있는 일부 우파들이 만든 이 운동질서 속에서, 자기 세력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고매한 인품을 갖춘 관리위원장들이 옹립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축제파까지 반드시 함께하려는 고매한 인격자가 수많은 투쟁체에 집행위원장으로 단골로 추대되는 그 힘과, ‘법질서’를 존중하며 항상 노동자들의 부상을 걱정하면서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산업평화’를 위해 애쓰시는 분들을 총연맹의 위원장32)으로 옹립하는 그 힘이 바로 운동질서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일부 우파들인 것이다.
그들은 투쟁의 외연을 확장한다면서 항상 좌파 대신에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를 추구했다. 이제 일부 우파들의 모든 연대투쟁의 원칙은 시민압력운동단체가 함께하느냐 안 하느냐로 결정되고 있다. 변혁과 진보라는 간판은 내리지 않았지만, 실천과 연대는 항상 비전투적이고 비변혁적인 제도 내 존법주의자들과 함께했다.33) 그들을 투쟁으로 끌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사에만 만족하지 않고 승리를 위해 진지하고 비타협적인 투쟁을 하자는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했다.
지난 7-8년간 일부 우파가 다수를 장악하고 패권주의적으로 전투적 세력을 배제하면서 전선과 투쟁은 망가져갔다. 모든 투쟁은 교묘하게 억압되고 관리되었다. 그리고 그 절정이 바로 억압되고 관리된 촛불항쟁이었던 것이다. 일부 우파들은 항쟁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운동의 타락한 질서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것이다.
그들은 대중의 분노를 조직하고 투쟁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전투적인 세력을 배제하면서 대중을 억압하고 배반한 신자유주의 세력까지 포함한 연대를 주장한다. 이것이 일부 우파의 통 큰 그림이고 ‘통 큰 단결’이다. 그러나 그 미래는 자기 존재의 부정이기 때문에 대책회의가 배척받았던 것처럼 대중으로부터 배척받을 것이다. 깜박이도 고장난 채 우회전만 한다면 그들의 미래도 없고 대중의 미래도 없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일부 우파란 통일운동과 민족운동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고 진지하게 실천하고 투쟁하는 사람들이나 조직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조직이나 사람으로 환원할 수 없는 거대한 ‘정서적 흐름’을 말한다. 통일운동을 하는 단체 중에는 ‘평통사(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처럼 참으로 훌륭한 실천을 하는 단체도 있고, 한국진보연대 내에도 평생을 신념에 따라 실천하고 계시는 어르신들의 단체도 있고, 촛불항쟁에 앞장선 ‘추모연대’나 용산투쟁에서 원칙적 입장을 고수한 ‘범민련’을 비롯하여 진지한 실천을 고민하는 많은 단체들이 있다. 민주노동당 내에도 쌍차 농성장이 침탈당했을 때 전국에서 달려 온 수많은 동지들이 있고, 용산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한 동지들도 많이 있다. 필자가 지목하고 있는 것은 이처럼 정치적 신념으로 뭉쳐 그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정치세력이 아니라, 막연한 정서로 어울리면서 투쟁할 의지는 전혀 없이 오직 세력의 확장에만 관심이 있는 일부 경향을 얘기하는 것이다.34) 그들은 정파가 아니라 종파35)다. 통일운동과 노동운동에 기생하는 종파가 문제다. 종파들의 패권주의는 보신주의와 야합하여 거대한 타협적 질서를 만들어 내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운동이 안고 있는 커다란 질곡 중의 하나이다.
항쟁은 끝났다. 투쟁의 관리위원장들과 제도 내 존법주의자들의 억압과 배신으로 제대로 된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한 채로 100만의 열망은 배반당했다. 이제 그들은 역사와 대중 앞에 진지하게 반성해야 한다! 운동을 이토록 타락시킨 일부 종파들은 운동에 기생하는 종파가 아닌 투쟁하는 정파로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노동자 대중과 변혁세력
민주노총을 비롯한 조직운동과 변혁세력들이 대중의 분출 앞에서 대중의 열망에 부응하지 못한 점은 뼈아픈 과오다. 물론 촛불항쟁 기간 동안의 모든 동원은 민주노총을 비롯한 조직대오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5월 24일 집회에는 전국교사대회에 참가한 전국교직원노조 2만 명과 대학생들 5,000명 등을 포함한 5만 명이 모였다. 조직대오가 절반 이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투파의 선동에 대학생 대오가 호응하였다. 5월 29일과 30일에도 민주노총과 학생대오가 기반이 되어 선두에 섰고, 5월 31일 대학로에서 있었던 오후 2시 집회는 대학생들의 전국집회였고, 4시에 예정되었던 대책회의 집회는 민주노총과 시민단체의 연대집회였다. 이들을 기반으로 오후 5시부터 행진이 시작된 것이고, 밤 10시 사직터널과 안국역을 돌파한 것도 조직대오가 앞장선 것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에 노동자와 시민이 신자유주의에 유린당하는 민중으로서 하나가 되었다기보다는, “노동자들이 시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다”36)는 방침에 따라, 개별 전투에서의 전투력이나 몸빵이 아닌 전체 투쟁에서 중심이 되어 방향을 제시하고 선도하지 못했다. 이것은 지난 실천들이 변혁성을 상실하여 노동자 대중이 계급으로서의 자각과 전망을 가질 수 있는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금 우리 운동은 변혁에 대한 총체적인 전망을 가지고 변혁성과 전투성을 복원해야 할 과제를 남겨두고 있다.

대책회의 내에서 비타협적 투쟁을 주장하던 좌파를 비롯한 강경파들은 항쟁기간 내내 소수파였다. 그 상황이 일시적으로나마 역전된 것은 7월 4일 긴급운영위에서였다. 김하영 동지의 글에서 보듯, 한국진보연대와 시민단체들 내에서도 대중의 열망을 받아 안아야 된다는 목소리가 다수가 된 사실이 이날 처음으로 확인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끝내 존법주의자들의 비폭력 축제론이 관철되었던 것이다. 이 현실 즉 운동의 상층부에서 비투쟁적이고 타협적인 세력들이 헤게모니를 관철하고 있는 것은 촛불항쟁 전에도 그랬고 촛불항쟁 후에도 여전히 변함이 없다. 항쟁의 열망을 억압했던 그 관리위원장들은 지금도 시민단체와 진보단체의 지도자로서 항상 ‘비폭력 축제론’과 ‘성숙한 시민의식’을 강조하면서 연대 운동의 중심에 서있다.
그렇다면 항쟁기간 내내 변혁세력이나 좌파들은 왜 그토록 무기력했던가? 혹자는 구태의연한 낡은 운동권이 변화된 새로운 운동이나 대중 혹은 대중의 새로운 감수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타성과 관성을 벗어나지 못한 점도 있고, 감수성의 차이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변혁세력이 무기력했던 것이 아니다. 무기력의 본질은 대중의 열망을 짓누르고 있는 타협적 질서를 파탄내고 비타협적이고 투쟁적인 ‘운동의 헤게모니’를 관철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촛불항쟁은 조직운동이 침체된 상황에서 조직되지 않은 시민들이 앞장선 것이었다. 조직운동이 강력한 곳에서는 비조직 대중이나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합류한다. 운동이 살아 있으면 중심만 잘 지키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중심이어야 할 대책회의가 비투쟁적이고 타협적인 질서 하에서 중심의 역할을 배반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질서를 깨뜨려야 했다. 그렇다면 강경파 혹은 투쟁파들이 파병반대투쟁 때처럼 “대책위의 타협성을 극복하고 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별도의 비타협적인 운동체를 만들어 대응하지”(발표글 3)37) 못하고, 항쟁 후반에야 ‘강경파 협의체’38)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물론 결단을 막는 여러 사정이 있었다. 먼저 “깃발도 들지 말고 조끼도 입지 마라”는 ‘순수’를 들먹이며 시민과 운동권을 구분지으려는 듯한 배척의 정서가 있었다. 둘째, 대중의 의지와 의사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6월 10일 명박산성 앞에서 스티로폼 논쟁을 할 때, 변혁세력들은 현장에서 대중을 도와 대중과 함께 명박산성을 넘는다는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비폭력’을 외치는 소심파와 넘자파 간의 논란 속에서 오직 대중의 의사와 의지를 확인하고 존중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많은 노력과 계획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구상과 실천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만 사고하는 데 익숙한 변혁세력들은 대책회의 내에서 논쟁하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현실의 미조직 대중과 눈앞의 운동을 파악하고 적응하는 게 너무 힘들었고, 자신들이 앞장섰을 때 환영받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고, 프락치가 득실거리는 노출된 온오프 공간에서의 선동도 부담스러웠다. 그러다가 시민의 일부로서 적극적으로 참가해 온 것 이상의 결단을 내리고자 했을 때는 너무 늦었다. 결국 현실 대중과 운동의 거리가 너무 컸고, 소통의 고리가 없는 미조직 대중과 열린 공간에 적응하지 못했다.39)
그러나 중심의 역할을 해야 할 운동의 상층질서가 대중을 배반해 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중의 열망을 조직하고 대중의 힘으로 이 질서를 깨뜨려 나아가야 하는 것은 변혁세력들의 본연의 임무다. 이 점에서 5월 24일 가투파인 아고라386이 대책회의의 집회를 파탄시키고 가두진출을 실력으로 관철시킨 행동은 많은 교훈을 담고 있다. 항쟁의 초반부터 마지막 날까지 그들은 끊임없이 선동하고 실천했다. 비록 소수의 개인들이었기 때문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참으로 용기있는 행동이었고 열정이 넘친 실천이었다. 결단을 주저하게 하는 많은 요소들이 있었고 지켜보아야 할 사정이 있었지만, 변혁세력들의 존재이유가 ‘의식성’의 관철이라면, 변혁을 자임하는 세력들이 그 상황을 변화시켜 가야 할 본연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점은 깊이 반성해야 하고 대중으로부터 배워야만 한다. 촛불항쟁에서 의식성을 관철하려는 노력은 변혁세력들보다는 오히려 아고라386을 비롯한 시민들의 자생적인 결사에서 나왔다. 대중의 열망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중의 불만을 조직하여, 조직운동과 미조직 대중 그리고 상층 연대질서 속에서, 운동의 헤게모니를 관철시켜야 하는 과제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제기될 것이다. 변혁세력이 현실의 대중과 투쟁 속에서 대중과 함께하면서 투쟁을 발전시키지 못한 점과, 운동의 헤게모니를 관철하지 못한 채 대중들이 배반당하는 것을 막지 못한 무능력과 과오는 너무나 크다.40)
의료민영화나 공공재의 사유화, 교육의 서열화/시장화, 구조조정, 비정규직, 파견제 등 노동의 유연화를 위해 끊임없이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맞서 저항과 반격을 제대로 건설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97년 이래 신자유주의 공격에 맞서 유효한 투쟁과 반격을 조직하지 못하고 패퇴를 거듭하면서, 운동은 위축되고 대중은 보수화되면서 전투성과 변혁성을 잃어갔다. 여기에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배부른 이기주의자 혹은 귀족노동자들이라고 공격하고 적대시한 노무현과 같은 신자유주의 정권의 기층운동에 대한 끊임없는 배제와 억압도 작용했고, 투쟁할 생각은 전혀 없는 일부 우파와 관료들의 보신주의 동맹의 역할도 컸다. 그러나 전투성과 변혁성을 회복하고 운동을 복원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 아니라 대중과 변혁세력의 몫이다.

촛불시민들의 한계
100만의 열망은 왜 배신당했고, 항쟁은 왜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촛불항쟁은 기층조직운동이 위축되고 침체된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에 유린당하는 조직되지 않은 대중들이 즉자적으로 투쟁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 지구상의 어느 나라에서 100만 명의 대중이 거리에 나서고도 독재자를 몰아내지 못한 경우가 있었던가? 2001년 아르헨티나에서는 조직되지 않은 대중들이 폭발적으로 진출하여 신자유주의를 강요했던 대통령이 헬리콥터를 타고 도망가게 만들었다. 2005년의 볼리비아도 마찬가지이다. 4.19 혁명도 따지고 보면 자생적인 대중들이 폭발적으로 진출하여 이승만을 몰아낸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조직되지 않은 대중이었기 때문에 이길 수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촛불대중은 조직되지는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싸웠다고 할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100만 명의 열망이 모였음에도 폭발적인 분출이 억제당한 것에 있다. 이것이 가장 큰 패배의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무기력하기만 했던 변혁세력은 책임을 면할 수 없지만, 대중의 투쟁을 억압하고 관리한 대책회의 혹은 대책회의 내의 관리위원장들과 존법주의자들 그리고 그러한 질서를 만든 세력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촛불시민들에게는 부족한 점이 없었던 것인가? 그들은 조직되지 않은 개인들이었다. 적과의 투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구심적인 집단적 전투력이 발휘되어야 한다. 투쟁의 열망에 불타는 다양한 전투부대와 그들의 열망을 수렴하여 탄압과 난관을 깨쳐 나갈 수 있는 중심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명박의 아르바이트생이란 비난까지 들었던 대책회의는 중심에 있었으나 중심의 역할을 할 생각은커녕 투쟁을 관리하고 억압했다. 아고라에서는 깃발과 조끼를 그토록 비난하면서도 바로 그 다음날 대중들은 민주노총과 학생들의 깃발을 따라 행진했다. 다함께에 그토록 반발하면서도 대중은 다함께의 깃발을 따랐다. 앞에 있는 사람이 불만스럽지만 독자적인 행동을 꾸리고 관철할 실력이 없는 나약한 존재였다. 이것이 조직되지 않은 대중의 한계다. 이 점은 한편으로 조직운동의 무능력이기도 하다.
또한 촛불시민들은 자신들의 삶이 유린당할 수밖에 없는 이 체제에 대한 인식이 미흡했다. 왜 이명박이 국민을 배반하고 미친 소를 먹이려 하는지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없었다. 민중의 행복이 아니라 자본의 천국을 위해서 민중을 배반할 수밖에 없는 신자유주의 축적체제의 본질에 대해서 무지했다. KTX 여승무원들이 시청광장에 부스를 차렸을 때 “왜 비정규직이 촛불에 빌붙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중동을 증오하면서도 조중동이 세뇌시킨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시민과 노동자를 가르고, 촛불과 운동권을 이간질하는 분열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 좌빨 폭도의 비난이 두려워 체제가 강요하는 내면의 억압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비폭력 순수’를 외쳤다. 체제 내의 제도개선 투쟁이 아닌 항쟁은, 민중과 체제와의 모순이 격화되어 그 적대적 본질에 부딪치지 않는 한 이길 수 없다. 이것이 촛불시민들의 한계였다. 그 외에도 조직되지 않은 개인들에 기반한 투쟁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체제의 본질이 민중에 대한 배반을 숙명으로 하는 것이라면, 대중은 저항할 수밖에 없고 그들은 억압할 수밖에 없다. 이제 2008년의 촛불항쟁의 패배를 딛고 새로이 운동과 투쟁을 건설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패배한 투쟁의 위로와 예찬이 아니라 비판과 반성이다.41) 이길 수 없었던 투쟁과 무기력하기만 했던 운동에는 뼈아픈 반성의 과제가 남아 있다.

 

1)_ “5월과 6월이 지나도록, 대책회의는 단 한 번도 공식행사에서 명박퇴진이나 명박심판이란 구호를 외쳐본 적이 없습니다. … 7월에 들어서 처음으로 명박심판이란 구호가 행사의 끝에 나왔었고, 행사가 끝나고 행진을 시작할 직후에 처음으로 대책위 마이크에서 이명박은 물러가라는 구호가 잠깐 나왔었습니다”(발표글 6). 부록에 실려있는 필자의 ‘발표글’과 ‘참고자료’는 이 책의 맨 뒤에 있는 ‘참고문헌’에 표기된 순번만 표시한다.

2)_ “단 기간에 뭔가 결과를 보겠다고 나서면 우리의 확실한 패배입니다. 이 싸움은 매우 길고 또 지루한 장기전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 제일 좋은 것은 역시 이명박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것이지만 조금 회의적인 것이 현재로서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끌어내린 후 누구를 다시 그 자리에 앉힐지도 걱정이고…우리의 패배는 무엇입니까? 국민적 지지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촛불시위가 토론의 장, 대화의 장, 문화의 장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시위하면 ‘쇠파이프, 최루탄, 죽창’ 같은 폭력적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것을 바꿔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습니다. 더 대중적인 지지를 받아야 합니다.” 임일규, <시위대가 청와대로 갈 필요가 없는 이유>, 08.06.08; 아고라 폐인들, 2008: 92에서 재인용.

“투쟁의 장기화는 시위대의 약화를 가져올 것이고, 그것은 이명박정권이 가장 원하는 방법론임이 분명합니다. 또한 항의의 대상과 장소는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집회 및 시위의 본질적 내용입니다. 버시바우에 불만이 있다면 미국 대사관 앞에서, 오세훈에게 불만이 있다면 시청광장 앞에서, 그리고 이명박에게 불만이 있다면 청와대 앞에서 집회 시위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 우리 국민들은 그 관념에 길들여진 나머지 청와대 앞에서의 시위가 곧바로 불법폭력시위인냥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촛불시위의 장기화는 국민과 국가에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청계천 광화문 시청광장 그리고 각 지방의 분산된 시위대는 효과없는 시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짧은 기간에, 하나의 장소에서 응집된 힘을 보여주는 것이 좋은 방법입니다.” 짐승이라오, <시위대가 청와대로 가야 하는 이유>, 08.06.08; 아고라 폐인들, 2008: 93에서 재인용.

3)_ 쌍용자동차는 2009.4.8 총 2,646명의 구조조정안을 발표하고, 2009.6.8 강제적으로 희망퇴직서를 작성한 1,670명 외에 976명을 전격적으로 해고했다. 이에 쌍차 노동자들은 구조조정과 졸속 매각에 반대하기 위해 ‘해고는 살인이다’는 구호를 내걸고 옥쇄파업을 결의한 뒤, 640명의 노동자들이 도장 2공장 등을 점거하고 2009.8.6까지 77일간의 영웅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4)_ 조정환이 2008년 촛불투쟁을 ‘봉기’라고 부르는 것은 상식에 반하는 아첨일 뿐이다.

5)_ “★시위하실 때 절대 폭력 행위를 선동하는 프락치들에게 휘말리지 마세요. 특히 중고등학생, 대학생분들. 흥분하다가 휘말릴 수 있습니다. 한나라당이나 대통령 측에서 전략적으로 폭력 시위를 유도하는 자들 심어둘 거 뻔합니다. 오래전 시위에도 그런, 낡은 수법이죠. 여기에 부디 휘말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건 폭력시위로 유도하여 탄압의 명분을 만들 테니까요.★ [추가] 깃발 부대 따라다니지 않기! (깃발 부대의 목적은 의경, 전경과의 충돌…저런 수법에 넘어가면 절대로 안 됩니다. 이명박 탄핵을 외치며, 불을 지르거나, 거리의 상점에 폭력을 행사하는, 스파이가 있을 겁니다. 초기에, 주변 분들하고 같이 말리시거나, 촬영 장비가 있다면 정확히 촬영하십시오. 특히, 저놈들이 잘 쓰는 수법이니까 명심하시고 큰 소리로 주변에 알려주세요!”, 피그말리온, <집회 시 깃발 부대 주의하세요. 한나라당 알바입니다>, 08.05.02.

‘폭력 시위는 경찰이 원하는 것, 폭력 시위자는 우리가 신고합니다.’, ‘폭력 시위자는 경찰 프락치다’라는 비폭력 집회를 위한 플래카드 도안도 있었다(아고라 폐인들, 2008: 178).

6)_ 2009.9. 헌법재판소에서 야간옥외집회의 원천적 금지에 대하여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 문화제나 종교행사를 제외한 야간 집회와 시위는 불법이었다. 그 때문에 촛불을 든 야간문화제라는 독특한 집회방식이 생겨난 것이다.

7)_ 헌법제1조, <◐ 민노총이 복장을 착용하고 깃발을 들으면 안됩니다(수정). ◑>, 08.05.28. 조회 4,272, 찬성 475, 반대 42. “물론 촛불 문화제 분위기상 그렇게 됐지만…그런 상황은 절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은 어떠한 빌미라도 잡으려고 혈안이 되있는 집단들입니다…집회는 항상 국민이 주도해야 합니다…어떤 이익을 추구하거나 이념을 가진 집단이 집회를 주도하게 되면…우리 국민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고…여태껏 해왔던 집회가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봐 질 수 있습니다…집회에 참가하지 않은 일반 국민들에게도 좋지 않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일입니다. 지금까지 비폭력 평화적인 방법으로 잘해왔지만…· 다른 단체가 주도하게 되면…초기의 마음이 어느 순간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는 순간의 분위기가 중요한데…ps. 오해를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요…참여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구요…위에 내용을 적은 것은 조심하자는 의미입니다…”

ysgho: 이런 말이 나오는 것 자체가 조중동에 학습된 결과라는 생각 안 드세요? 민노총이 나서면 왠지 불안해지는 듯한…배후 조종설 때문에 이 문제가 거론되는 것이라면, 민노총보다 훨씬 많이 집회에 참석하신 강기갑 의원님과 강의원님께서 속하신 당은 벌써 집회의 배후세력이라고 거론하고도 남았을 것 같지 않나요? 본질을 비켜가는 왜곡된 걱정은 좀 지나치단 생각입니다. 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우쒸: 지금 국민의 이름으로 민주노총이 참가하는 것입니다. 이상한 논리 만들지 마세요.

은률: 민주노총의 참여를 환영합니다. 국민의 이름으로 참여 하신다면 조끼나 깃발은 필요하지 않을 듯 합니다.

새하얀밤, <[베스트]방금 청계천 민노총분 !!!!!깃발 조끼 안됩니다!!!!!>, 08.05.28. 조회 8,008, 찬성 1,179, 반대 44. “방금. 조끼 깃발 가져와도 환영하실거죠?”라고 하시는데…절대 환영 안 할겁니다. 이제까지 쌓아온 국민들의 자발적 시위가 완전히 색깔에 덮히는 겁니다. 국민의 자발적 시위를 민노총 그네들의 것으로 덮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번 시위는 그 어떤 단체도 없는 중립적 위치를 유지하는 자발적 시위여야 합니다!!!!! 민노총 홈페이지에 가셔서 깃발, 조끼 안 된다고 한 말씀씩 해주세요, 이 촛불집회는 국민들이 모이는거지 어떤 단체끼리 모이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깃발, 조끼 들고오면 조중동 신나게 까댈겁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지켜온 비폭력, 평화가 깨지지 딱 좋은거죠…참여를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민노총 주의해 주시기 바라는 겁니다. 정말, 그분 발언 듣고 깜짝 놀라서 급하게 올렸습니다.

H_MAKI: 빌미? 빌미를 안 줘도 알아서 조중동은 자기들 입맛에 맞게 기사 잘 만듭니다. 피켓 들면 빨간색이니 좌익이라 그럴 거고 촛불 들면 화염병에 불붙이는 데 쓴다고 우길 거고 연행되면 폭력을 휘둘렀다고 잡아간다고 하고 가지가지 잘 합니다. 오늘 기사, 참 압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 빼고 나면 집회 이야기는 죽어도 안 꺼내더군요. 그리고 조끼, 민노총분들 입던 안 입던 그건 자윱니다. 다만 국민들을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서 동질감이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고 보니 전투복, 입자 안 입자 논란은 많았지만 정작 집회에서는 입은 사람은 그리 흔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걸로 분열하지 맙시다. 지금은 민노총이건 국민이건 힘을 합쳐야 합니다.

원츄:아고라인 여러분 제발 분열되지 맙시다. 우리의 목표는 이메가와 그 일당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편입니다. 민주노총이 오해받으면 우리가 감싸야지요. 알바들의 먹이가 되지 말자구요.

찬우물: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얘기입니다. 민노총 조합원은 아니지만 민노총 조합원이 민노총 조합 조끼를 입고 깃발을 들고 참여하지 그럼 한나라당 옷 만들어 입고 옵니까. 개신교_야훼: 민노총은 대한민국 국민 아닙니까?? 꼭 붉은 조끼 깃발 들어야 하나요.? 그냥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하시면 되잖아요….”

8)_ 산신령, <[멍퇴]이제 화염병 들어도 되겠습니까?>, 08.06.28. 조회 3,948, 찬성 535, 반대 182.“이제 이대로는 안될 것 같습니다만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추가***찬성이 훨씬 많지만, 댓글은 대부분 아직은 아니라는 글들이 많습니다. 가슴은 화염병을 들고 싶지만, 머리는 아직 아니라고 외칩니다.

다리아님: 조금 전까지 어린아들이랑 광화문에 있다가 집에 들어왔습니다. 저들이 막가고 있다는 것 눈으로 확인하고 왔지만, 화염병은 아닙니다. 양쪽의 피를 부르는 행위일 뿐입니다. 정당성이 없는 쪽이 폭력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고 지금 우리는 지지와 정당성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어적 물리력 이상으로 나온다면 우리의 지지세력을 버리는 행위입니다.

민태수님: 어차피 정부도 강을 건넜다. …최류탄이 나오면 그 다음은 화염병이다. 정부의 의지에 따라 달라진다. 전경이 돌을 던지는 지금 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지만 국민이 많이 참고 있는 것이다. 정말 착한 국민들 ㅜㅜ

lemon님: 화염병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들고 싶네여~~~”

산신령, <[멍퇴]이제는 화염병 들어도 되겠습니까?>, 08.06.29. 조회 2,384 찬성 410 반대 40.“화염병을 들면 지든 이기든 빨리 끝납니다. 이기면 매국노들 쫓아내고 새세상 만들 수 있고, 지면 절망뿐입니다. 찬성은 [추천] 꾹!. 화염병을 들면 많은 분(전경도, 시민)들 다칩니다. 폭도로 매도되기도 합니다. 국민들이 등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반대는 [반대] 꾹!

skdnjscka: 아~! 깝깝하네.. 지금 시민들 등돌리는 거 걱정할 필요없습니다. 이미 등돌릴 놈들은 돌렸구요. 시위 찬성하는 사람은 사실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안 돌아섭니다. 그리고 이미 폭도입니다. 오늘같이 이렇게 깨져도 폭도로 몰릴게 뻔합니다. 지금까지 봐 왔잖아요. 아니면 아예 집회만 하던가…어정쩡하게 이렇게 나가면 시민들만 깨집니다. 깨지고 폭도로 몰리고 이러다간 더 등돌립니다. 절대 평화집회 아니면, 최소한 대등한 힘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화성에서온남자:화염병 등장하면 필패합니다. 그거 원하는가요? 촛불의 동력은 국민들의 지지입니다. 그러나 화염병에 지지해줄까요? 심리적 한계선이라는 게 있습니다. 국민들이 ‘그건 심하네’라고 생각하는 순간 게임오버입니다. 잘 생각들 해보십시오. 흥분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9)_ “A: 비폭력으로 우리가 말하려는 것을 막는 사람들이 더 폭력적이다.

B: 대다수의 국민들이 우리에게 공감해주는 이유는 우리가 지금까지 비폭력을 주장하고 실천해왔기 때문인데, 일부의 소수가 차벽에 올라가 폭력 상황으로 번지게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C: 우리는 컨테이너에 올라가 폭력상황을 만들려 하는 것이 아니다. 예비군들이 정치적 의사표현을 막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 하고 싶다.

D: 물대포를 맞고 경찰에게 얻어맞는 폭력을 당했지만, 컨테이너 위에 올라가지 않더라도 좀 더 적극적으로 우리의 의사표현을 하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전달했으면 좋겠다.

E: 우리가 축제냐 투쟁이냐를 논할 시기는 지났다. 애초에 우리는 시작할 때부터 폭도였다. 이명박이 우리를 평화시민으로 보았으면 컨테이너를 쌓는 유치한 짓을 했겠느냐? 저들은 조직적이고 우리는 비조직적인데 우리가 투쟁이냐 축제냐 방황할 때가 아니다. 발이 아프겠지만 모든 시민들이 컨테이너를 발로 한 번씩 걷어차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F: 컨테이너를 넘어 청와대로 가려는 우리의 뜻을 표현한다면 바로 다음날 조중동은 ‘촛불시위대가 폭도로 변했다’라고 쓸 것이다. 그걸 바라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명박이다. 여러분이 컨테이너를 밀면서 당장은 우리의 힘을 느끼겠지만, 집에서 지켜보는 수많은 시민들은 힘을 잃고 말 것이다.

G: 조중동에게 빌미를 주는 것보다 더 문제인 것은 여기 모인 시민들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감을 갖고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구조적 폭력은 바로 이 컨테이너이고 우리의 저항방식은 바로 민주적인 논의로 정당하게 우리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컨테이너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무력감을 극복하고 싶다. 난 오늘 이 스티로폼을 쌓고 올라가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유영주, 2009: 72-73).

10)_ “6월10일 자정이 넘어, 다수의 군중 뒤에서부터 세종로 네거리를 가로막은 컨테이너 앞으로 대형 스티로폼이 옮겨졌다. 스티로폼은 컨테이너와 다소 떨어진 상태에서 탑처럼 쌓아졌고 발언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발언대 위에서는 자칭 인권활동가라는 한 여성이 뭐라고 계속 떠들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컨테이너 뒤에서 일부가 몸싸움 비슷한 것을 하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컨테이너 앞에서는 수십 명의 기자들과 그리고 기껏해야 20-30명 정도의 사람들이 결사적으로 스티로폼이 컨테이너 안쪽으로 옮겨지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조금 뒤에 연단을 독점한 인권활동가라는 여성은 다수의 대중의 내려오라는 소리에 그만 내려오고 자유발언의 시간이 이어졌다. 두 번째로 자유발언에 올라온 한 시민에 의하여 지금 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항(한쪽에서는 스티로폼이 컨테이너 쪽으로 옮겨지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고 있고, 한쪽에서는 스티로폼을 컨테이너 안쪽으로 붙여서 쌓아야 한다는 상황)을 다수의 대중에게 의견을 물어 보았다. 절대다수의 대중은 당연히 스티로폼을 안쪽으로 쌓아야 한다는 입장에 찬성하였고 그 입장에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 그러나 인권단체의 입장에서는 지금 상태보다 더 높이 스티로폼을 쌓아 이명박에 대항하자는 말로 스티로폼을 안쪽으로 쌓아 올리자는 의견을 무시하고 그것을 막으려 하였다. 하지만 다수의 대중은그들을 물리력으로 끌어내렸고 컨테이너 안쪽으로 탑을 쌓아 올렸다. 오히려 인권활동가라고 하는 사람들과 몇몇 사람들은 (여기에 예비군복을 입은 사람들도 포함됨) 그곳에 탑을 쌓는 것이 위험하고 현 정권에 폭력의 빌미를 주고 그렇게 하는 것이 저들에게 함정에 걸린다는 이상한 논리를 펴면서 결사적으로 막는 바람에 스티로폼 쌓는 것이 시간이 지체되었고 그들에 의하여 스티로폼을 안정적으로 쌓는 것에 방해가 되었다. … 이후에는 몇몇 사람들에 의하여 소수 특정한 깃발만 올라가는 것을 빼고는 (처음에는 태극기와 아고라 깃발만 올라갔음) 다른 깃발을 든 사람들이 올라가는 것을 강제로 저지하고 막았다. 하지만 이것도 다수 대중의 현명한 판단과 그들의 함성과 힘에 의해 이후에는 공평하게 다른 깃발도 모두 올라갈 수가 있었고 모든 깃발들이 함께 시위대 앞에서 힘차게 휘날렸다.”-참세상의 <컨테이너 앞 논쟁 2탄, 비폭력과 직접민주주의>(08.6.13)에 달린 현철민의 댓글.

11)_ “저희 회사 노조 여러분들은 경유값 인상에 이미 생업에 손을 놓고 계신 분들입니다. 이번 미국소 수입전면개방과 경유값 인상에 대항하기 위해 참여결정하였고 현재 운전석 유리는 제거 작업 및 철조망 장착 작업진행 중이며, 기사분들은 모두 안전모, 안전안경, 방진마스크 착용을 협의한 상태시며, 신변보호를 위해 가스총을 개인구매 하신다고 하십니다. 이명박을 끌어내리기 위해서 저희도 모든 힘을 시위에 투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또한 평화시위를 유지하기 위해 무자비한 진입은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고, 시민분들 안전에 힘쓸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평화시위 위협이라고 하시는 분들 저희는 시민 안전에 최대한 노력할 것이며, 불도저는 전경버스를 치우기 위해 동원하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서울시 진입은 작업이 끝나면 진입 시작할 것입니다.” 주인장, <[부천 중장비 동원 시위참여 업체입니다]>, 08.06.01.

12)_2000년 6월에는 매향리 사격장의 미군부대 철책을 뜯어낸 경험도 있고, 2006년 APEC 정상회담 때는 부산 수영만 다리 입구에서 어청수가 쌓은 컨테이너를 끌어내린 경험이 있다. 한국의 농민들은 2003년 9월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제5차 각료회의’ 반대투쟁에서, 밧줄과 갈고리 그리고 절단기 등을 사용하여 철책을 뜯어낸 경험이 있다. 넘지 못할 장벽은 없는 것이다.

13)_ “여연 공동대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고 시민단체 측 참가자들이 전원 퇴장했다. 한국진보연대 집행위원장은 시민단체 지도자들을 뒤쫓아가 중재를 섰고, 결국 모호한 타협안이 마련됐다”(김하영, 2009: 212).

14)_ 명숙, <종교의 권위가 아닌 시민의 권위로 일어설 때>, <참세상 기고>, 08.07.05 참조.

15)_ 이날 필자가 눕자행동단에게, “폭력은 경찰이 쓰고 있는데도 시민을 등지고 앉아있는 것은 시민들이 폭력을 쓰고 있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이것은 민주시민으로서 너무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니까 경찰을 등지고 앉거나 그렇게 못하겠다면 철수하라”고 질타하자 철수했다. YTN은 이 사건을 촛불시민 내의 갈등으로 보도했다. 투쟁이 격화되면 시민과 함께 공권력과 싸울 것이냐 말 것이냐의 두 가지 선택만 있는 것이지, ‘중간자’의 입장은 적에게만 이로울 뿐이다. 항쟁 초기 일부 예비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촛불과 함께 싸우거나 앞장서서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보호자’의 입장을 취하면서 시민들에게 비폭력을 유도한 것 역시 난센스였다.

16)_ 제대로 된 중심이 있었다면 더 잘 싸울 수 있었다. 대중의 열망과 투쟁의지가 있었음에도 이것을 수렴하고 확산하는 중심이 없었기 때문에 결정적 공격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질질 끌다가 세력이 약해지자 탄압에 무너진 것이다. ‘조중동 광고주 전화걸기’ 운동이 검찰의 조그만 위협에도 위축된 것도 같은 예이다. 그럼에도 ‘네트워크 투쟁’이나 ‘중심없는 투쟁’을 찬미하는 네그리나 조정환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조직되지 않은 자생성이란 고양기에는 밀물처럼 밀려오지만, 승리의 전망이 흔들릴 때에는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다.

17)_ 안티엠비는 2008년 5월 말 카페 내의 회계갈등이 노출되었고, ‘아고라386’과는 다르게 무허가 가두시위를 반대하면서 평화합법시위와 탄핵국민운동 등을 주장하였다.

18)_ “이런 결정적 시기(5월 26일)에 대책회의는 행진 이끌기를 거부했고, 행진에 대해서 사전 논의했던 ‘의지와 능력이 있는 단체들’도 막상 행진 시간이 다가오자 나설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 그래서 우리는 행진을 호소하고 이끌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 직후 대책회의 상황실의 주요 활동가로부터 ‘다함께가 행진을 나서주면 좋겠다’는 메시지가 왔다”(김하영, 2009: 192-93).

19)_ “많은 의욕적인 시민들이 늦은 밤에 청와대로 가는 것은 참여자도 줄어들고 채증도 곤란하고 더 위험하니까, 행사는 짧게 하고 낮 시간에 바로 행진을 시작하고 청와대로 가자고 했음에도 대책위는 수많은 시민들의 요구를 억압하면서, 자유발언으로 시간을 질질 끌어 김을 뺀 다음에도 행진마저도 빙빙 돌면서 9시도 넘은 시간에야 청와대쪽에 갈 사람은 가라고 하더군요”(발표글 1).

20)_ 1+5란 광우병이 우선이고 나머지는 부차적인 의제로 해석될 수 있었고, 7월 4일 대책회의 운영위에서 논란 끝에 병렬적인 의제로 결정되었지만, 시민들은 이들 구호를 익혀 볼 기회조차 없었다.

21)_ 좋은세상, <민민연을 구성한다는 기존 대책위(박원석)을 비판한다>, 08.10.6에서 재인용.

22)_ “참사직후 용산범대위를 구성하면서 투쟁방향을 둘러싼 이견이 존재했다. 투쟁기조, 요구, 명칭에서 <이명박정권퇴진>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용산참사는 이명박정권에 의한 민중살해이므로 투쟁기조, 요구, 명칭에서 이명박정권퇴진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견해와 보다 광범위한 국민적 참여를 위해 구체적 표현에서는 유연성을 발휘하자는 견해가 대립되었다. 후자의 견해는 주로 시민단체에서 제기되었다. 이런 의견을 감안하여 1월 21일 제1차 대표자회의에서 명칭에서는 <이명박정권퇴진> 표현을 빼고 기조와 요구에 이명박정권퇴진을 표현하기로 했다. 그러나 시민단체들은 용산범대위에 불참했다. 1차 대표자회의 후 시민단체와 함께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한국진보연대가 재논의를 제안했다. 1월 27일 집행위원회 사전논의를 통해 기조에는 이명박정권퇴진을 그대로 두고, 투쟁요구에서 ‘이명박대통령퇴진’을 ‘이명박대통령 사과’로 수정하는 조정안을 마련하여 1월 29일 2차 대표자회의에서 토론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날 시민단체들이 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가운데 범민련 등 다수 단체들의 주장으로 ‘이명박대통령퇴진’을 고수하기로 했다. … 공동집행위원장 9명이 확정되었으나 민주노총과 한국진보연대는 내부사정으로 결합하지 못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서 파견한 공동집행위원장은 4월 보궐선거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다. … 용산참사라는 사안의 중대성, 참가단체들의 면면, 과거 전국적 사안별 연대체에서 보여준 이른바 ‘메이저급’ 단체들의 역할 관행 등에 비추어 보면 매우 이례적이었다”<용산범대위 평가서>.

23)_ 참여연대나 시민단체의 활동가 중에서도 대중과 함께하려고 애쓴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24)_ “-특정 지역과 소비자운동 수준에서 불매운동을 진행하는 것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광우병 대책위가 주요사업으로 불매운동을 해나가자는 데 있다. 이는 정부와의 직접대립에서 수입업자나 마트 등 유통 공급업자들과의 대립으로 전선이 이동된다는 점이다. 애초에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더라도 안 사고 안 먹으면 된다고 말한 바 있듯이 일단 유통되면 정부의 책임이 아니라 공급자와 소비자의 문제가 된다는 사실이다. 현 상황에서 이는 명백한 운동의 후퇴다. -더 큰 문제는 불매운동이 촛불집회의 대안으로서 얘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가 불매운동에 집중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촛불집회를 통한 정권과의 대립이 예민하게 형성된 지금의 국면을 이완하고 전선의 변경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된다”(참고자료 2).

25)_ “-시민단체들의 입장은 밤12시까지 집회 또는 행진 종료 공개적으로 선언하라는 것. 그래야 평화집회가 보장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할 수 있다는 주장. 나머지 단체들은 종료선언이 자칫 큰 혼란을 줄 수 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어도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가게 되어 오히려 이후 역량을 축소시키게 된다고 보았음. -격론 끝에 어제 결정에 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날 즈음 여연 대표가 ‘이렇게 되면 대책위와 함께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회의장을 빠져 나오자 시민단체들이 대거 ‘같이 좀 보자’고 하며 함께 회의장을 나감. -한국진보연대의 중재로 종료선언은 하지 않고 집회는 7시까지, 행진은 10시까지 그 이후에는 문화제, 이렇게 시간과 순서만 명기하는 것으로 정리함. 또한 집회 당일 대표단이 국민요구사항을 청와대에 전달하는 것으로 함”(참고자료 2).

26)_ 시민단체 중에는 비타협적이고 투쟁적인 운동체도 있지만, 시민압력운동단체란 시민들 혹은 대중의 직접행동을 추구하는 단체가 아니라, 대다수의 회원은 회비만 내는 후원회원이고, 주된 활동은 상근자나 전문가들에게 맡겨지는 대리주의적 실천으로 이루어지며, 주로 언론보도나 기자회견 등에 의존하는 여론압력운동의 형태를 띤다.

27)_ 여기서 필자가 문제삼는 것은, 7월 4일의 시점에서 퇴진운동에 전면적으로 나설 것인가 혹은 억제할 것인가의 전술국면에 대한 판단의 차이를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항쟁의 전 과정 내내 대중의 열망과 투쟁의지를 억압했다는 점을 얘기하는 것이다.

28)_ 2003년부터 시작된 파병반대투쟁 때부터 많은 동지들이 관리되는 운동에 대해 공개적인 비판을 해왔고, 필자도 여러 번 공개글을 발표한 바 있다.

29)_ 노동운동 내에서는 단병호, 심상정 등을 ‘중앙파’, 노동자의힘, 사노련 등을 ‘좌파’, 민족운동세력을 ‘우파’로 부르고, 그 외에 ‘국민파’가 있다.

30)_ 모 도당 운영위에서는 회의록을 공개하는 것은 상식인데도 표결로 결정하자는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구 민주노동당은 민족주의자만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자와 사회주의자까지 모여 만든 ‘전선’당이다. 당이란 원래 정치사상의 통일체라는 점에서 3파가 공존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언젠가는 분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지만, 동거하는 동안에는 소수에 대한 배려와 연대의 원칙이 작동되어야 했다. 한나라당이 다수라고 하여 모든 것을 표결로 결정하자고 한다면 국회는 존립할 이유가 없다. 다수에만 의지하여 소수와 공존할 생각이 없는 것을 패권주의라고 한다. 그런데 최근 추진되는 진보대연합을 선거연대나 정책연대 혹은 투쟁연대가 아니라 진보대통합당으로 만들자는 것은, 또 다시 3대 세습이나 비판할지 말지로 소모적인 집안싸움이나 할 낡은 전선당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당은 정치사상의 통일체이어야 한다’는 당 운동의 기본원리에 반할 뿐만 아니라 역사의 후퇴가 될 무원칙한 야합론에 불과하다.

31)_ 민주노총 내에는 한국진보연대가 추구하는 통일운동이나 민족운동에 동의하지 못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음에도, 왜 그들이 한국진보연대의 하위 소속단체의 성원이 되어야 할까?

32)_ 촛불항쟁 때의 위원장은, 2005년 울산 플랜트노동자 파업투쟁 때, 노동자들이 손에 쥘만한 것을 두 트럭이나 준비한 것을 알고, 울산 시청으로 달려가 기만적인 타협안을 서둘러서 성사시킨 분이었다.

33)_ 김하영 동지의 글과 <용산범대위 평가서>에서 보듯, 항쟁의 초반부터 존법주의자들인 비폭력 축제파들이 대책회의 내의 다수파를 형성하여, 내용도 없는 문화제를 밤늦게까지 질질 끌어 대중의 진출을 고의적으로 방해하고, ‘고시철회’만 외치면서 ‘명박퇴진’의 열망을 억압하다가, 7월 4일 소수가 되자 “이렇게 되면 대책위와 함께할 수 없다”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든지, 탈퇴하겠다고 협박한다든지, 용산범대위의 구성 때 시민단체들이 ‘명박퇴진’의 슬로건은 죽어도 걸 수 없다며 퇴장할 때, 그들을 붙들거나 민주노총에 대한 파업 호소를 가로막은 것은 한국진보연대 혹은 한국진보연대의 지도자였다. 용산항쟁처럼 중요한 투쟁에서 한국진보연대와 민주노총이 공동집행위원장을 내지 않은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34)_ ‘타락한 정서의 공동체’에 대하여는 제3장의 ‘구속감 없는 개인’을 참조하라.

35)_ 몇 년 전 민노당에서는 술좌석에서 남성 상급자가 여성 하급자에게 재떨이를 던진 사건이 있었다. 종파주의(패거리주의)에 물든 사람들은, 가해자가 NL이고 피해자는 PD계열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여자가 얼마나 싸가지가 없으면 그랬겠느냐”고 두둔하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정치적 신념보다 패거리의 단결이 우선되는 것이 종파이다. 그들은 민주주의나 양성평등이나 탈권위주의 등 진보적 가치에 대한 감수성이 매우 희박하다.

36)_ 민주노총 위원장은 5월 하순 “노동자들이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촛불집회에 참여하도록 하겠다.”고 발언했다.

37)_ ‘별도의 비타협적 운동체’를 만들자는 필자의 이런 주장도 너무 늦었다고 할 수 있다. 2003년 파병반대투쟁 때는 관리되는 투쟁을 벗어나고자, 노동자의힘, 다함께, 사회진보연대, 사회당, ‘이윤보다 인간을’, 민주노동당의 ‘자율과 연대’ 등등이 별개의 ‘선도적 투쟁체’로 결합하여 싸운 경험이 있다.

38)_ “나는(다함께) 대책회의 내 촛불강경파들의 모임에도 참석하고 있었다. 이 모임은 7월 4일 이후 NGO의 촛불 기조 전환에 반대해 시작된 것이었다. 여기에는 노동자의힘, 노동전선, 사회진보연대, 학생행진, 사회당, 문화연대, 평통사, 전태일을따르는민주노동연구소, 추모연대,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보건의료단체연합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김하영, 2009: 218).

39)_ 이상의 서술은 필자만의 주관적 판단일 수 있다. 촛불항쟁 때 노동전선과 노동자의힘, 사노련 등의 좌파 단위에는 항상 ‘짭새’와 카메라가 따라다녔다.

40)_ 용산학살이 벌어졌을 때 사노준을 비롯한 좌파들이 즉각 개입한 것도 이러한 과오를 벗어나기 위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41)_ 그런 의미에서 촛불을 위대하고 영원하다고 예찬하는 조정환의 ‘촛불/다중 물신론’은 참으로 해롭다. 더구나 그 예찬이 촛불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부정적인 측면만 찬양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에 대해서는 ‘제3부 보론:다중 물신론’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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