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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맞춤공식으로 풀 수 있는 수학문제가 아니다.

혁명은 맞춤공식으로 풀 수 있는 수학문제가 아니다.

 

트로츠키는 1937년 독특한 문제의식과 방법론을 이행기 강령으로 제출한 바 있다. 설령 그 시대에 합당했을지라도 70년도 더 지난 21세기에 새롭게 따져보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도 이성을 충족시키지 못한 이행기 강령을 도그마(교조) 혹은 맞춤공식으로 삼아 강령초안에 그대로 베끼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되기에 몇 가지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지도력

이행기 강령의 첫 장(사회주의 혁명의 객관적 조건)의 첫 문장은, “노동계급의 지도력이 역사적 위기에 처해 있다.”이고,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역사적 조건이 아직도 `무르익지' 않았다는 요지의 모든 언사는 무지나 의식적 기만일 뿐이다. 노동계급 혁명을 위한 객관적 조건은 `무르익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물러 터져 썩어가기 시작하였다. 바로 다음 시기에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지 않는다면 인류문화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다. 이제 노동계급 그리고 특히 노동계급의 혁명적 전위가 나설 차례이다. 인류의 역사적 위기는 혁명 지도력의 위기로 환원된다.”고 맺고 있다.

 

이런 주장을 두 번째 장(노동계급과 그 지도부)의,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은 이제 자본가 계급의 편으로 확실히 넘어갔다. 전 세계 특히 스페인, 프랑스, 미국, 그리고 여러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코민테른은 냉소를 머금으며 반혁명을 수행하였다.이 결과 세계 노동계급의 혁명은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서 또 하나의 장애물을 만났다. `인민전선'은 러시아 10월 혁명의 깃발을 흔드는 척하면서 자본가 계급과 화해하고 있다. 결국 노동계급의 투쟁은 거세되고 파시즘이 등장하였다....

대중의 정치적 진로는 무엇보다도 썩어 들어가고 있는 자본주의의 객관적 상황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기존 노동계급 조직들의 배신적 정치에 의해서 결정된다. 물론 첫 요인이 가장 결정적이다. 역사 법칙의 힘은 관료기구의 힘보다 더 강력하다. 레옹 블룸의 프랑스 인민전선이 주창한 `사회' 입법이나 스탈린이 조작한 모스크바 재판 등 사회주의를 가장한 배신자들의 방법들이 아무리 다양해도 노동계급의 혁명 의지를 꺽지 못한다.노동계급 지도력의 위기는 인류 문명의 위기이며 이 위기는 오직 제 4 인터내셔널만 해결할 수 있다.역사의 시계를 되돌리려는 배신자들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대중은 이 사실을 더욱더 명확히 인식할 것이다.”와 연결해서 해석하면,

 

트로츠키는 무르익은 객관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주체역량이 부족하다고 서술하지 않고, 지도력의 부족을 얘기한다. 대중은 불만에 가득차 투쟁에 나서려고 하는데 부족한 것은 오직 코민테른과 스탈린 등의 배신자들로 야기된 혁명지도력의 위기이다. 그러나 자본가 계급을 타도할 혁명역량 혹은 주체역량은 단지 대중의 불만이나 의지뿐만 아니라 대중의 조직역량과 투쟁역량, 의식역량의 여러 측면으로 이루어지고 당 등의 올바른 지도력은 그 일부에 불과한 것은 자명하지 않는가? 당의 지도역량은 대중의 투쟁 속에서 대중역량과 상호작용하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대중의 투쟁과 그에 의해 달성된 역량과 동떨어져서 훌륭한 지도력이 있을 수 있다는 황당한 발상!!! 훌륭한 투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오직 지도력의 부재 혹은 잘못된 지도력으로 보는 이 황당한 발상!!!

인류의 역사적 위기는 혁명 지도력의 위기로 환원된다.”느니, “노동계급 지도력의 위기는 인류 문명의 위기이며 이 위기는 오직 제 4 인터내셔널만 해결할 수 있다.”면서 스스로를 훌륭한 지도력으로 자임하고 세계혁명의 지도를 맡게 될 그날을 기다리시는 위대한 제4인터 지도자 동지들!!! 대중과 동떨어진 훌륭한 지도력은 위대한 수령론과 동일한 대중관을 공유한다. 이러한 비맑스적 대중관과 투쟁관 그리고 코민테른과 스탈린에 대한 지독한 감정적 증오와 교만이야 말로, 스페인 공산당과 코민테른이 선두에 서서 파시스트와 피터지게 싸우고 있을 때 현실을 바르게 파악하지 못하게 한 가장 큰 장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도력은 자임하는 것도 아니고, 미리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대중과 함께 투쟁 속에서 성장해간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고, 지도력에 대한 유별난 집착은 버려야 한다.

 

2. 망상들

● 비밀외교의 완전 철폐; 모든 조약과 합의는 노동자와 농민 모두에게 공개하라.

● 노동자 농민 위원회의 직접 통제하에 노동자와 농민의 군사훈련 및 무장을 실시하라.

● 노동자 조직이 선출한 근로인민을 지휘관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군사학교를 창설하라.

● 공장, 광산, 농장 등과 긴밀히 연결된 인민의 민병대로 상비군을 대체하라.

이것은 ‘제국주의와 전쟁에 대한 투쟁’이란 장에 서술되어있는 요구이다.

 

만약에 누군가가 “나는 너를 칼로 찍어 죽일 것이다. 그러니 네가 가진 칼을 나에게 다오!!!”라고 한다면 정상적인 심리상태일까? 인민을 전쟁으로 내몰수 밖에 없는 부르주아 정권을 타도하자!라고만 하면 좋을 것을 노동자 농민의 통제하에 군사훈련과 무장을 시켜달라고? 이러한 요구가 최대강령으로 이끄는 가교적 강령이고 요구가 된다고? 이것은 단지 탁상머리 혁명가가 골방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만들어낸 망상일 뿐이다.

 

기업비밀이나 영업비밀의 공개

이번 단일안에도 기업비밀이나 영업비밀의 공개와 노동자 통제가 들어가 있다. 비밀이 공개되거나 노동자계급이 통제할 수 있다면 노동계급에게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요구가 강령적으로 실천할 핵심적 요구가 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강령적 요구란 전략적 단계를 관통하는 대중의 절실한 요구이다. 이 요구를 중심으로 대중을 선동하고 조직하고 투쟁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비정규직 철폐와 같은 요구가 그것이다. 그 요건은 수많은 대중을 투쟁으로 결합시킬 수 있는 광범위하고 절실한 요구이다.용산투쟁 때 수사기록 3,000쪽의 공개요구가 있었다. 외한은행의 먹튀와 싸울 때도 공개요구가 있고, 외교협정 반대투쟁 때도 이면합의서의 공개요구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공개요구는 당해 투쟁에서 상대방의 정당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혹은 약점으로 삼아 최종 승리를 위한 고리로서 제기하는 것이다. 즉 공개가 최종요구가 아니라 최종승리를 위한 고리나 매개로서 제기하는 부차적 요구인 것이다. 즉 모든 공개요구는 절대적 최종적 요구가 아니라 부차적 요구이다.

영업비밀의 공개가 혁명투쟁에서건 혹은 일개 작업장의 투쟁에서건 그토록 승리를 위한 절대적 요구라면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투쟁에 왜 공개요구가 중심요구로 등장하지 않는걸까? 그것은 대중이 무식하고 이행기 강령으로 무장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현실투쟁에서 부차적이기 때문에, 혹은 절박하지 않기 때문에, 즉 절대적이고 핵심적 고리가 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류의 요구를 강령적 요구로 삼으면서 영업비밀을 확보하는 것이 혁명투쟁을 승리로 이끄는 관건으로 선전한다면 황당하다.

오늘날 주식회사는 3%의 지분만 있으면 회계장부의 열람권이 있다. 그리고 우리사주를 15%이상 확보하고 있는 노조도 많다. 그런데 그들이 열람권을 확보하고 있다고 해서 더 혁명적이고 투쟁적이던가? 이것은 단지 자본가의 자의적인 경영에 대한 제약요건인 것이지 절대적으로 확보해야만 하는 유리한 고지가 아니다.

 

작업장통제, 노동자 통제

대중이 통제력을 확보할 수 있다면 좋은 것이다. 작업중지권, 신규투자나 배치에 있어서 사전협의권이나 동의권 등등도 마찬가지다. 노사정 위원회나 기업경영위원회의 참가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노동자의 이익에 좋기는 하다. 그런데 이런 권리는 자본과 노동의 힘의 역관계에 따라 때로는 얻기도 하고 때로는 잃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복지도 마찬가지로 계급투쟁의 산물이고 성과다. 특정한 투쟁에서 이러한 요구를 내걸고 싸울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통제력의 확보가 공장 내에서 이중권력을 형성하여 혁명투쟁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관건적 경로일까? 최고강령으로 이끄는 가교적 요구일까?

우리는 운동의 고양기에 수많은 대중의 진출을 본다. 그런데 그 대중들은 작업장 통제력이나 노동자 통제력을 쟁취한 대중일까? 통제력을 쟁취한 대중이어서 더 투쟁적으로 나서는 것일까? 내가 보기엔 별 연관이 없다. 오히려 그러한 통제력에 안주하는 경우도 많을 것 같고... 노동자 통제 요구가 필요할 땐 요구를 내걸고 투쟁하면 된다. 영업장부의 공개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요구의 쟁취가 대중들이 혁명투쟁에 나서게 하는 관건적 고리는 아니다.

 

공장위원회, 노동자평의회, 민병대, 무장 등등

이러한 요구들은 단지 특정시기와 상황 속에서 가능한 전술형태와 조직형태에 불과하다는 점은 누차 얘기한 바 있다.

도대체 평의회는 언제 등장했던가? 일반적으로 국가란 폭력의 유일한 담지자이고 초월적 무장의 담지자이다. 공장위원회나 평의회는 자본(의 소유권)을 부정하는 것이고, 따라서 부르주아 권력을 부정하는 노동자 권력이다. 그런 까닭으로 오직 이중권력의 상황- 즉 러시아처럼 낡은 지배계급의 무력이 와해되고 권위가 부족한 임시정부와 노동자평의회의 권력이 각축하는 때라든지, 혹은 칠레의 인민연합 초기에 군대가 구지배계급의 편이 아니라 인민연합정부에 충성하거나 중립을 지키고 있을 때, 바꾸어 말하면 자본가계급의 소유권을 수호하여 줄 무장이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본가계급의 소유권을 부정하는 노동자 권력이 침해받지 않거나 지켜낼 수 있는 상황-에서 비로소 등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가계급의 경찰력이나 군사력이 엄존할 때 평의회는 한시도 지켜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평의회가 건설되었기 때문에 대중이 혁명투쟁으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투쟁의 결과로 역관계의 역전이나 역관계의 대치가 된 결과로 등장할 수 있는 조직형태이다. 이러한 조직형태나 투쟁형태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훌륭한 형태였다는 경험만으로 반드시 거쳐야 할 혁명투쟁의 경로나 선결적 형태로 착각하는 것이야 말로 본말이 전도된 망상이다.

만약에 이러한 요구를 강령적 지침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평소에 평의회의 건설을 줄기차게 선동해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이중권력의 상황 혹은 이중권력으로 넘어가는 상황에서도 군부의 무력화나 권력장악을 중심에 놓고 투쟁하기 보다는 우선 평의회부터 만들고 봐야한다. 그러나 평의회부터 만들어야 할 상황도 있고 그렇지 않는 상황도 있다. 또한 투쟁기관의 형태가 2차대전 이후의 여러 혁명적 투쟁에서 보듯 반드시 노동자평의회의 형태를 취한다고도 볼 수 없다. 2011년의 폭발적인 아랍민중항쟁에서 평의회의 건설이 선동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이행기강령을 미처 접하지 못한 무식한 대중이어서가 아니라 그 상황이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리스나 프랑스의 총파업을 동반한 대정부 투쟁 때 역시 평의회 선동이 나오지 않은 이유 역시 자명하지 않은가? 이처럼 일상적 투쟁은 차치하고 혁명적 혹은 거의 준혁명적 투쟁의 시기에도 평의회 건설의 선동은 특정한 상황에서만 적절하고 가능하다. 즉 모든 혁명투쟁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관건적인 경로가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형태에 대한 집착은 열린 전술을 어렵게 만드는 엉뚱한 슬로건으로서 역시 탁상머리 혁명가가 맞춤공식으로 만들어낸 망상일 뿐이다.

 

3. 강령이란 뭔가?

일반적으로 강령이란 부르주아 강령도 포함하여 집권시 혹은 권력 장악시, 예를 들어 ‘비정규직 철폐’처럼 즉각적으로 실천 또는 관철할 요구들과 가령 ‘언론자유 등 민주적 시민권’의 옹호처럼 지속적으로 옹호할 가치를 포함한다. 기왕의 맑스레닌주의적 강령이 사적소유의 철폐나 사회주의의 실현과 같은 최고강령과 독점 등 중요산업의 국유화를 최저강령으로 나누는 것은, 이러한 최저강령이 광범위한 대중을 투쟁으로 결집시키고 이 투쟁이 확산되고 심화될 때 지배계급과의 전면적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달리 말하면 투쟁의 확산과 심화가 혁명적 투쟁으로 질적 도약을 할 수 있는 그러한 요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트로츠키는 단지 최저강령과 최고강령을 자본주의하에서도 쟁취할 수 있는 낮은 단계와 사회주의 혁명 후에만 가능한 높은 단계의 요구로 분류하고, 단발마적 고통에 찬 자본주의는 항상적인 준혁명기 혹은 이행의 시기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들을 연결할 수 있는 가교가 필요하다면서 평의회나 공장위원회 등등 준혁명기나 격변기에 나타났던 투쟁의 성과로 열린 공간에서의 전술형태나 조직형태 혹은 투쟁형태를 무슨 최고강령으로 이끌 가교 운운하면서 이행기 강령이라는 깜직한 방법론을 제출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최고강령과 최저강령이란 기본모순과 당면모순에 상응하는 것으로, 사적소유의 철폐처럼 근본적인 해결방도는 대중들이 당장에는 절박하게 여기지는 않지만(즉 광범위한 대중들을 투쟁에 결집시키기 어렵지만), 비정규직 철폐와 같은 최저강령은 광범위한 대중이 공감하고 투쟁에 나설 수 있는 절박한 요구이면서, 나아가 이러한 최저강령을 중심으로 투쟁을 확대 심화시켰을 때 체제의 본질과 화해할 수 없는 근본적 모순에 대한 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그런 요구를 말하는 것이다.

대중은 지식인들과는 달라서 투쟁 속에서만 혹은 투쟁이 심화될 때에만 체제의 본질을 인식하고 절감할 수 있다. 평소에는 경찰을 시민의 지팡이로만 생각한다든지 혹은 전투경찰도 내 자식과 똑같다면서 물을 가져다주던 촛불시민들이 투쟁이 격화되어 거리에 진출하면서 공권력의 군화발과 방패에 짓밟혔을 때 국가가 모두를 위한 국가가 아니라 특권층을 위한 국가라든지 국가의 본성이 폭력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배계급의 도구로서의 국가라든지 자본가계급의 관리위원회라는 맑스의 정식은 대중이 투쟁을 심화시켰을 때에만 도달할 수 있는 인식인 것과 같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비정규직 철폐와 같은 대중에게 즉각적인 이해가 걸린 요구와는 달리, 단지 조직이나 전술형태에 불과한 노동자 통제, 평의회 건설 등등은 일상투쟁 속에서 절박성이 없기 때문에 강령적 최저요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외에도 트로츠키의 이행기강령이 제출하고 있는 독특한 방법론과 주장은 허다하지만 생략한다. 한마디로 강령이란 전략적 단계를 관통하는 계급투쟁의 지침이다. 따라서 권력 장악 시까지 중심에 놓고 사고하고 선동하고 투쟁을 만들어내야 하는 과제이다. 이 과제를 당면실천강령이라고 부르든 이행기강령이라고 부르든 간에, 강령에 규정한 이상 당원은 그 과제를 항상 중심에 놓고 선동하고 조직하고 투쟁해야 한다. 그런데 영업비밀의 공개, 노동자 통제, 공장위원회, 노동자 평의회, 무장, 새로운 인터내셔날(국제당) 등등은 때로는 특정한 상황에서 적절한 슬로건이 될 수 있겠지만, 일상 시기에나 혁명적 시기에나 혁명을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관건적인 과제가 아니다. 전술형태와 조직형태, 투쟁형태는 유연하게 개방되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강령에 넣어야 할 이유가 없다. 도대체 어느 혁명에 언제나 적용할 수 있는 맞춤공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태도는 자기가 갖고 있는 특정한 주장을 하나라도 더 관철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본을 끝장내기 위해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활동가들과 대중을 보다 더 폭넓게 끌어당길 수 있는 강령을 만들 것인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정한 경향이 고수하는 주장과 방법론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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