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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촛불항쟁-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

[ 저자 자평] 2008년 촛불항쟁-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문화과학사)

 

2008년 6월 10일 100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섰다. 87년 민주항쟁 후 20년 만에 보는 대중의 거대한 진출이었다. 그리고 다시 3년이 지나고 운동과 생활은 일상으로 돌아가고 항쟁은 과거지사가 되었다. 100만명이 거리로 나서고도 독재자를 몰아내지 못한 경우도 있었던가? 왜 이길 수 없었던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현실을 넘어설 수 없다.

 

이 글은 단지 과거지사의 정리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위협당하고 유린당하고 수탈당하는 민중과, 항쟁을 억압했던 대책회의로 나타난 타락한 운동질서, 무기력하기만 했던 변혁세력, 이 모든 것은 바로 오늘 우리가 맞부딪치고 있는 그 현실이다. 필자는 항쟁의 분석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문제와 과제를 분석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패배한 투쟁의 위로와 예찬이 아니라 비판과 반성이다. 이길 수 없었던 투쟁과 무기력하기만 했던 운동에는 뼈아픈 반성의 과제가 남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촛불을 위대하고 영원하다고 예찬하는 조정환의 ‘촛불/다중 물신론’은 참으로 해롭다. 더구나 그 예찬이 촛불이 승리를 위해서 극복해야 할 부정적인 측면만 찬양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94쪽)고 주장한다.

 

촛불항쟁은 왜 이길 수 없었던가? 제도내 존법주의자들과 투쟁의 관리위원장들은 왜 대중의 열망을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가? 조중동이 세뇌시킨 내면화된 억압을 극복하지 못한 채, 순수와 비폭력을 운운하며 운동권과 시민을 구분하려는 조직되지 않은 촛불시민들의 한계는 무엇이었던가? 의식성의 관철이 존재이유인 변혁세력들은 왜 운동의 질곡을 깨뜨리지 못했던가?

 

이 책은 이런 문제에 대한 필자의 성찰이다. 그러나 그뿐만 아니다. 촛불은 누구인가? 필자는 그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위협당하고 유린당하는 소외된 대중임을 밝히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는 단지 생산현장에서의 착취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과 문화의 모든 것을 화폐로 소비하게 하는 상품화와 생존경쟁을 강요한다. 즉 현대인은 비단 일터에서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소비생활 등 삶의 모든 곳에서 소외를 강요당하는 존재이다.”(p118) 항쟁에 앞장섰던 네티즌들이 바로 일상 속에서 소외받고 있는 대중의 다른 모습임을 밝히고 있다.

 

필자는 촛불항쟁을 국민을 배반한 정권에 대한 항쟁이고, 억압당하고 왜곡당한 반신자유주의 투쟁이며, 신자유주의 경찰독재국가에서의 미발달한 낮은 단계의 투쟁으로 규정하면서, 항쟁의 키워드로 여성과 청소년과 탈모던(네티즌과 재기발랄한 투쟁)을 분석하고 있다.

 

“촛불항쟁의 초기에 나타났던 문화적인 감수성에 가득 찬 투쟁, 애교 섞이고 재기발랄한 투쟁은, 공권력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의지할 곳이라곤 도덕적 우위밖에 없는 시민들이 선택하는 저항의 한 방법이다. 물대포에 ‘온수’를 외치고, 전경들에게 ‘오빠 놀아줘’를 외치는 본질은 이런 것이다”(102쪽)라면서, 현대사회의 소외된 대중의 또 다른 모습인 네티즌들이 ‘소속감없고 구속감없는’ 개인으로서 항쟁과 카페에 어떻게 결합하고 실천하였는지, 그 한계는 무엇이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촛불을 끌 수 없는 힘은 분노와 정의감만이 아니라 항쟁 속에서 맛본 해방과 희열이 해방된 자아로 나아가는, 즉 이 사회가 강요하는 소외를 극복하는 자기실현의 과정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촛불폐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평상시의 우리들의 삶이 너무나 소외되어 있어서 일상 속에서는 아무런 기쁨이나 가치를 못 느끼고 오직 촛불들과 함께하는 시간만이 유의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만큼 현대사회가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기실현을 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115쪽)

“현대인이 트윗에 열중하는 것은 바로 그가 지극히 소외된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 새로운 인터넷 공간은 소외된 대중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그 중요한 특징은 ‘표현(드러냄)의 문화’다.”(120쪽)

“촛불항쟁 때 “저 숙제했어요. 칭찬해 주세요!”라는 글들이 많이 올라왔다. 이 또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 기반한 표현과 칭찬의 문화다. 바로 이런 문화 때문에도 필자가 현대인들이나 네티즌들을 소외된 대중으로 규정하는 이유이다. 공동체 문화와 공동체에 기반하지 않은 소외된 개인의 문화는 차이가 크다. 표현하고 칭찬하고 격려하는 이런 문화는 항쟁의 초기 자발성에 많은 기여를 했다.”(122쪽)

“소외된 대중의 문화로서의 트위터는 현대인의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 부응하여 즐거움을 주지만 소외는 극복되지 않는다. 촛불항쟁은 공동체 속에서 하나가 되는 해방의 희열을 주었다. 그 희열은 소외를 극복해가는 자기실현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연예인에 대한 잡담으로 일상의 무료함(이것도 소외이다)을 달래던 네티즌들이 미친 소 반대운동을 하면서 희열을 느끼듯, 트위터들도 선거참여 격려나 4대강 반대와 같은 투쟁에 참여할 때 평상시와는 또 다른 즐거움이나 희열을 맛본다. 이것은 자신이 순수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의 정의에 참여하고 있다는 즐거움이다. 이는 월드컵 응원전에 참여하는 것이나, 인기연예인에 열광하여 적극적인 서포터즈가 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다. 그리고 그 즐거움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크기 때문에 빠져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즐거움은 소외를 극복하는 해방된 자아나 공동체로 향하는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촛불집회의 놀이문화적 측면은 이처럼 소외된 문화의 대체이면서 연장이기도 하다.”(123쪽)

“위키피디아는 소속감 없는 개인들의 가벼운 참여가 축적되어 소중한 집단적인 결실을 맺는다. 네이버 지식iN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이것이 촛불항쟁에서 보여진 네티즌들의 자발성을 이해하는 고리가 된다. 그것은 탈권위적이고 개방적인 공간에서의 ‘작은 실천’이 타인이나 공동체나 전체에 유의미한 기여가 된다는 희열감이다. 그 작은 실천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으로 상품화가 강요하는 소외에 대한 대응이다. 네티즌들의 자발성이란 현대인에게 강요되는 소외에 대응하는 자기실현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결국 소속감 없고 구속감 없는 개인들이 공동체에 참여하고 기여하는 작은 실천이다. 촛불카페 역시 그 연장에서 구속감 없는 개인들의 작은 의지와 실천이 모인 것이다. 촛불항쟁 혹은 촛불운동 그 자체가 소외된 대중인 네티즌들이 탈권위적이고 개방된 공간에서 고무된 작은 실천들의 연장이고 발전이었다.”(132쪽)고 밝히고 있다.

또한 필자는 그 작은 실천들의 장점만이 아니라 한계 그리고 운동의 과제까지도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외에 온갖 포스트 모더니즘적 잡론에 대하여도 명확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네그리나 조정환이 말하듯 다중지성이나 떼지성이 그토록 위대하다면, 자발적인 시민들에게 투쟁을 맡기고 용산범대위는 만들 필요가 없다. 결국 뭉치지 않아서 위대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자발성이 의식성과 어떻게 조화롭게 통일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143쪽)

“네그리주의를 코뮤니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공통이익체주의’라는 외투를 입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찌들은 소부르주아지들의 반동적 요설”로 정의하는 필자는, “촛불은 국민을 배반한 정권이 물러나길 바랐다. 위정자가 잘못되면 그 위정자를 몰아내고, 체제가 민중을 배반하면 체제를 바꿔야 한다. 이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국가권력을 혐오하고 국가권력의 장악과 변혁론을 부정하는 자율주의자들, 특히 친미반공주의조차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채 금융자본이 약탈하는 재화마저도 창조적 부라고 찬양하는 네그리는, 존재하는 국민국가를 부정하면서, 노동자라는 처지의 동일성이나 민중이란 통일성으로 단결하지 말고, 위계적인 민주노총과 같은 낡은 조직도 만들지 말고, 자본의 노예되자는 비정규투쟁도 하지 말고, 촛불도 노동자도 노점상도 비정규직도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니까 공통의 이익을 위해 자본가들에게 빌붙어서 보장소득을 나눠주기를 간청하자고 한다. 다중에겐 적대하는 타자가 없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투쟁을 해야 할 대상이 없다. “타이밍이 결정적이다. … 삶정치적 다중의 무한한 노력의 오랜 시기가 지난 후에, 엄청나게 축적된 불만들과 개혁제안들이 어느 시점에선가 강력한 사건에 의해, 급진적인 반란의 요구에 의해 변형될 것임에 틀림없는”그날을 기다리며, 절대로 뭉치지 말고 ‘중심 없는 투쟁’이나 찬미하면서, 민주노총도 해체하고 네트워크로 뭉쳐서 메신저질이나 하자고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며, 네그리주의의 온갖 헛소리의 실체를 밝히고 있다.(p268)

 

필자는 이외에도 여러 실증조사와 통계를 분석하여 촛불항쟁의 주체를 밝히고 있다. 그 외에 촛불연행자모임 속에서 활동하면서, 촛불카페들(촛불연행자모임, 애국시민촛불연대, 촛불시민연석회의, 안티엠비 등)의 여러 실천들과 고민들을 그려내고 있다. 또한 촛불은 결코 다중이 아니었고, 다중이어서는 안 된다는 ‘다중 물신론 비판’외에도, 현단계 한국자본주의의 성격과 투쟁과 변혁운동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필자가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이 글은 촛불 속에서 나눈 촛불에 대한 필자의 사랑을 담은 글이다. 촛불과 함께한 사랑만이 아니라 못 다한 사랑을 담은 글이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수많은 견해와 실천에 부딪쳤고, 기왕에 제출된 견해들에 대하여 자기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자 했다. 그것이 토론의 출발점이 되고 운동의 발전에 기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1장 아고라를 비롯한 수많은 자료를 섭렵하여 항쟁의 전개과정을 복원했다.

제2장 광장의 민주주의는 작동되었으나 광장의 지성은 작동되지 않은 6.10 스티로폼 논쟁, 6.30. 미사의 의미, 깃발회의의 의미, 대책회의와 촛불시민의 불행한 만남과 운동의 여러 질곡과 대중운동과 변혁운동 그리고 촛불시민들의 한계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제3장 촛불항쟁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자, 대책회의에 의해 억압되고 왜곡되어 본격적 항쟁으로 발전하지 못한 점을 밝히고 있다. 여학생이 앞장 선 청소년들과 여성 네티즌이 현대의 자본주의하에 소외된 대중이며, 소속감없고 구속감없는 미조직된 촛불들의 여러 특성을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장벽론과 문화절대론을 공박한다.

제4장 여러 슬로건과 실천 그리고 각종 통계자료를 분석하면서, 반신자유주의 성격부정론, 반독재 민주대연합론은 물론, 기왕에 제출된 중산층론, 중간계급론, 촛불다중론을 공박하고 있다.

제2부에서는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저항조직의 하나인 촛불연행자모임의 실천을 그려내고 있다.

제3부에서는 다중물신론을 해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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