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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령초안 단일안 토론자료에 대한 의견
1. 관점의 정립을 위하여
구 사노준에서 강령을 토론할 때 공유된 인식들은, 강령은 계급투쟁의 지침이어야 하고, 강령의 독자는 (지식인이나 선진활동가가 아닌) 대중이며, 우리들의 실천과 이론의 성과를 풍부하게 담아내야 된다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당을 만들려고 하는가? 특정한 정파당 예를 들어 트로츠키주의당? 직업적 혁명가들의 당? 나는 이런 당이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사노준이나 사노위가 열심히 싸우면서도 박수는 받을망정 조직이 확장되지 않고 정세에 대한 개입력과 투쟁력이 갈수록 약화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남한의 현실을 보았을 때 우리가 만들어야 할 당은 사회주의를 공감하면서 비타협적으로 자본과 싸울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혹은 그들을 최소한 후원회원이로라도 조직할 수 있는 당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당은 혁명적 언사를 앞세우는 직업혁명가들의 당이 아니라, 제도에 매몰되지 않고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대중들이 실천으로 결합되는 정당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존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런 점에서 혁명적 언사주의, 특정 정파당주의, 골방사회주의는 모두 경계대상이다. 우리 당의 강령은 남한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중에서 투쟁에 헌신하는 모든 세력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강령이어야 한다.
세계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자본주의를 폐절하고 공산주의의 세상을 만들겠다는 맑스레닌주의를 자칭하는 수많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세력들이 - 수많은 분파로 갈린 트로츠키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무당파 등등- 함께할 수 있는 강령이란 무엇인가? 지금 남한 사회주의자들에게 요구되는 당과 강령이란 어떤 것인가? 민노당이 전선당이었다면 사노위는 정파연합당이다. 이는 존재하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동의 실천을 가능케 할 강령을 만들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각자가 자기만의 정파에 독특한 주장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트로츠키나 스탈린의 언어가 아니라, 맑스와 레닌의 언어만 주장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개인이 트로츠키를 어떻게 생각하든 강령에서는 트로츠키주의에 독특한 주장을 빼어야 함에도 이를 끼워넣은 것은 다양한 관점을 가진 정파연합당의 강령이 될 수 없다. 스탈린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도 함께할 수 있는, 혹은 노사과연과 노정협, 다함께 사노신도 공동의 강령 하에서 분파활동을 할 수 있는 그런 강령이어야 하고, 사회주의에 공감하고 투쟁하는 대중을 묶어낼 수 있는 강령이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단일안은, 지나치게 트로츠키주의적 일방적 주장과 방법론으로 가득차 있다는 점에서 잘못되었다고 본다.
트로츠키의 주장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역사적 사회주의와 스탈린 그리고 코민테른의 실천에 대한 부정적 입장.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항상적 위기 그리고 그에 따른 세계전쟁, 혹은 전쟁위협에 대한 특별한 강조. 일국사회주의에 대비되는 세계혁명과 국제주의의 강조. 지도력의 강조. 최소강령과 최대강령이 아닌 이행기강령이란 방법론을 내세워 노동자평의회, 공장위원회, 노동자 통제, 무장 등 이중권력 하의 특수한 시기와 특수한 상황에서 출현하였던 특정한 조직형태와 전술형태를 권력장악으로 나아가게 하는 핵심적 고리로 사고하는 경향으로 볼 때, 이번 단일안은 옳고 그름을 떠나 트로츠키주의 일변도라고 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남한 사회주의자들의 단결을 해칠 것이다.
2. 강령의 검토
제1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혁명
1-1, 1-2는 전문의 성격을 갖는 바, 전쟁, 공황, 생태재앙을 부각하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현실태인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화 축적체제하에서 대중의 주된 고통이 자본과 국가의 일자리와 복지 등 노동자와 민중에 대한 공격으로 빚어지는 노동빈곤과 복지축소, 공공재의 사유화 속에 관철되는 수탈 등등이라고 할 때, 전쟁문제를 전면에 서술하면서 공황과 생태재앙만을 서술하는 것은 대단히 빈약하고 협소하며,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이 20세기 전반기의 제국주의 전쟁의 시기처럼 그토록 중대한 고통인가? 신자유주의하에서는 공황시기뿐만 아니라 일상적 시기에도 일자리없는 성장이라고 운위되듯이 노동빈곤이 일상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공황만을 부각하는 것이 올바른가? 생태재앙이 대중이 겪는 3대 고통인가? 이 부분은 영구위기론과 세계전쟁 필연론(제국주의하에서 세계전쟁은 필연이고, 전 세계인민이 전쟁의 위협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희한한 발상)의 시각을 교정하고 보다 더 풍부하고 균형있게 서술되어야 한다.
1-3의 “(6) 자본주의는 공황이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사회이다. 공황은 자본의 과잉축적과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의 필연적 결과”등의 서술은 올바른가?
맑스가 자본론에서 이야기한 공황론은 과잉생산 공황론인데, 요즘 다함께의 정성진 등은 과잉생산론에 대립하여 이윤율 경향적저하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윤율 경향적 저하는 30-50년이라는 장기에 관철되는 현상이고 이것이 경향인 것은 상쇄요인도 엄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30-50년의 경향적 법칙이 수십년만에 찾아오는 대공황이라면 몰라도 어떻게 10년을 주기로 하는 공황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론이 될 수 있겠는가? 동의하기 어렵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정부성에 기초하여 서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3-4. “세계자본주의의 일부인 한국자본주의는 미일 제국주의의 정치적․경제적 지배력을 받지만, 동시에 한국자본주의보다 하위에 위치해 있는 국가들에 대한 착취적-억압적 성격을 갖고 있다.”라는 서술이 올바른가?
이론은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 삼성, 현대 LG 등 한국의 독점자본이 미국과 유럽 중국 동남아 남미 동구에 투자를 하고 다른 초국적 자본과 경쟁 각축하는 현실은 무엇으로 인식해야 하는가? 그들을 포함한 여러 독점자본 중 외국인 비중이 60%에 달하는 것은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이것은 불균등발전으로 인하여 한국의 독점자본이 아류제국주의 단계까지 성장했다는 측면과, 현대자본주의에서는 각국의 독점자본이 무슨 일방적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합하고 각축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또한 현대국가는 과거처럼 독점자본의 배타적 식민지에 대한 요구를 관철하는 첨병이 아니라, 평상시에는 이들의 축적을 위해서(독점자본의 앞잡이인 국가가 무역과 금융 등의 개방 등 자본의 천국을 위해 FTA 등 세계화를 강요하는 것이나 노동과 복지를 공격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위기 시에는 국가의 개입이 없이는 위기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국가독점자본주의단계에 들어섰음을 말해준다.
단계론이나 사회구성체를 규명하는 이유란 당해 자본주의의 운동법칙과 모순관계 특히 계급모순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이다. 국가가 없이는 운동할 수 없는 독점자본이 전면에 나서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민중간의 모순이 명료해 졌을 때, 한국은 식민지, 반식민지, 종속, 신식민지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아류제국주의로까지 발전한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이고, 케인즈주의적 축적이 불가능하게 되자 신자유주의적 축적체계(regime)를 관철하고 있는 것이 전 세계적인 현실이다.(제국주의가 독점체의 성장으로 인한 타국가 타민족간의 대립의 측면이라면, 국독자는 국가와 독점자본을 한편으로 민중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사구체적인 규정이다.-단일안이 사구체적인 규정을 회피하는 것은 유감이다. 단일안의 곳곳에서 주변부나 식민지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것도 거슬린다. 지구상에 식민지가 몇 나라나 된다고..., 중심-주변으로 사고하는 것도 맑스적 방법론이 아니고)
제2부 계승과 혁신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재구축한다
“1-3. 동시에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 실험을 발본적으로 평가한다.” 이하의 서술은 너무 일방적이고 이처럼 상세히 서술할 가치도 없다. 특히 작성자가 아무리 이 서술을 올바르다고 판단하고 있을지라도 이것을 관철하는 것은 이 주장에 동의하지 못하는 비트로츠키주의자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정파연합당의 강령원칙에 반한다.
따라서 구구하게 따져볼 필요도 없지만 몇 가지 점만 지적한다면,
1-3.(1) “소련 공산당 내부 투쟁을 거쳐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고,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한 1920년대 후반 이후 러시아혁명은 변질, 실패의 길을 걷게 되었다.”, (4)“스탈린주의 반혁명과 결합해” 운운하는 점에 대하여,
=>지구상의 수많은 맑스레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집단적 실천인 역사적 사회주의의 실패를 스탈린의 악마화로 귀결짓는 것은 부르주아 영웅사관이라면 몰라도 사적유물론에 입각한다는 맑스주의적 성찰은 되기 어렵다. 이러한 서술들이 이명박이 집권 후 민주주의를 유린하면서 대중의 투쟁을 짓밟고 노동을 말살하는 것을 오직 악마적 심성을 가진 이명박때문이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자본가계급의 재등장을 가져온 옐친의 반혁명이라면 몰라도 러시아혁명의 변질과 실패 혹은 스탈린 시대의 불행을 특점 시점으로 잘라서 반혁명이라고 하는 것도 너무 일방적이다.
특히 1920년대 후반 강제적인 집산화와 초중공업정책으로 수백만의 인민이 기근으로 죽어간 불행에 대하여, 애초에 농업을 경시하고 급격한 집산화는 물론 20년대말까지도 더 빠른 중공업화를 주장한 것은 트로츠키를 비롯한 초좌익들이 아니었던가? 스탈린의 과오를 두둔할 이유도 없겠지만 모든 것을 스탈린의 악마화로 돌리는 것은 아무런 교훈도 얻을 수 없다.
(2) “노동자권력인 소비에트는 무력화되었고, 노동자계급의 직접정치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변질, 파괴되었다. 노동자계급 통제 하의 생산, 즉 노동자계급이 주인이 되는 경제가 아닌 당-국가 관료의 명령경제 체제가 정착하였다.”
소련에서의 계획은 고스플란(중앙계획기구)에서 계획의 초안을 입안하여 지방과 지역 계획기구로 내려가고 이것이 공장단위에서의 토론을 통해 다시 상향해서 계획이 완성되고 실시되었다. 결코 중앙관료의 일방적 명령지시경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할 것은 왜 소련과 동구 등 수많은 사회주의 계획경제들이 자본과 시장에 굴복하게 되었는가? 왜 계획경제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노동자계급의 창의성 자발성이 발휘되지 않고 항상적인 소비재부족과 생산력의 해방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이다.
코르나이가 얘기하듯 모든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연성예산제약의 모순을 벗어날 수 없었고, 상급과 하급 계획단위에서 계획의 흥정과 야합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관료주의로 환원할 수 없는 사회주의사회의 (약자 혹은 뒤떨어진 생산단위에 대한) 온정의 원리 때문이었다. 이러한 온정을 삭감하기 위하여 생산결과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하려는 노력이 하부로의 경영권의 이전과 경쟁과 시장의 활성화의 방향으로 나타난 것이고, 종국적으로 자본과 시장에 굴복한 것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공감하는 바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국가나, 삼성이야 말로 위계적이고 관료적인 조직이면서도 잘만 돌아가지 않는가? 박정희 개발독재국가만큼 관료적인 기구가 또 어디 있는가? 소련이 명령경제였기 때문에 혹은 관료집단 때문에 비효율적이고 망했다는 얘기는 피상적인 관찰일 뿐 동의하기 어렵다.
한편 유고처럼 국가적 소유가 아닌 집단적 소유에 기초한 자주관리(하나의 공장은 소속노동자 전체가 공유하고 생산의 결과에 책임을 짐. 경영권과 분배권 처분권을 가짐)는 노동과정과 노동결과에서의 소외는 극복했을지는 몰라도, 차입을 통한 투자는 늘이면서도 고용은 늘이지 않고 성과물의 분배에만 집착하는 집단이기주의로 귀결되어 망하고 말았다. 역사적인 계획경제의 문제점을 지적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설득력있는 대안(실현가능한 사회주의 계획경제론)을 아무도 아직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적 계획경제론 역시 그냥 원론적인 얘기일 뿐...
관료주의의 뿌리라고 말해지는 1인 지배인은 레닌이 관철한 것이었다.(나중에 노동자계급의 자식들을 교육시켜 구지배계급출신들을 물갈이한 것은 스탈린이었고...) 혁명 후 레닌이 소비에트보다 당을 우위에 놓게 된 것은 소비에트가 비록 대중들의 혁명적 기관이었지만, 다양한 세력이 각축하는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을 담보할 수 있을 만큼의 확신은 가질 수 없던 사정이 있었다. 대중의 자기지배는 확장시켜 가야하지만 대중의 자기지배가 곧바로 실현되지 않고 있다든지 임금노예 운운하면서 당운동을 비난하고 레닌주의를 맑스주의의 일탈이며 자신들만이 진정한 맑스주의라는 평의회공산주의자들의 주장도 동의하기 어렵다. 현차정규직노조가 민주적 조직이고 노동자계급의 조직이라고 해서 계급적 원칙에 따라 투쟁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국가를 곧바로 소멸시킬 수 없듯이 노동자 직접정치의 이상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따라서 단일안이 대중의 자기지배의 이상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관료주의를 거론한 것은 이해는 하지만, 세세한 분석과 규정보다는 사회주의의 이상으로의 이행에 실패했다는 정도 멈추면 좋겠다.
“(5) ‘일국사회주의론’, ‘사회주의 생산양식론’, ‘무오류의 당론’으로 대표되는 스탈린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사회주의 조국(소련) 방어론’으로 변질시켰다. 세계혁명을 위한 코민테른은 소련의 외교기구로 전락하였고,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 채 해체되었다.”
레닌주의라는 말은 스탈린이 만들었고, 스탈린주의와 일국사회주의론이라는 말은 트로츠키가 만들었고, 트로츠키주의라는 말은 레닌과 스탈린이 만들었다.
특히 세계동시혁명의 가능성이 희박해진 상황에서 일국에서라도 인민들과 함께 사회주의적인 혁명정책을 수행하는 것을 세계혁명에 대립되는 일국사회주의론으로 명명하고 세계혁명의 성공없이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는 불가능하다는 트로츠키의 주장은 공감하기 어렵다.
“집행위원회는 세계대회에만 책임을 진다.... 집행위원회가 위치하고 있는 나라의 당은 활동의 주된 부담을 짊어진다.... 그러한 나라의 당은 집행위원회에 대한 결정적인 투표권을 지닌 5명의 대표를 임명한다. 게다가 10에서 13개의 가장 중요한 공산당은 결정적인 투표권을 지닌 한명의 대표를 파견할 것이다. 코민테른에 가입한 다른 조직과 당은 집행위원회에 대한 심의권을 갖고있는 대표 한명을 각각 임명할 권리를 갖는다.”(1920.8.4. 제2차 대회에서 채택된 코민테른 규약)
코민테른은 소련공산당의 압도적인 지도력 위에서 다른 나라 공산당들은 심의권만 가졌다. 레닌이 살아있던 1920년에... 제국주의에 둘러싸여 혁명의 성과를 지켜야 하는 국가로서의 소련과 제국주의 내에서 투쟁하는 노동자계급 사이에는 비적대적인 모순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음에도 이 모순을 조화하고 통일시키는 것을 성공하지 못했다는 측면을 무슨 ‘조국방어론’이니 가능성도 없는 ‘세계혁명을 위한 코민테른은 소련의 외교기구로 전락’ 운운은 그렇게 볼 수 있는 사례가 없지는 않지만, 너무 지나친 규정이다. 스페인내전 때 파시스트와 싸우기 위해 국가적인 원조를 하고 투쟁을 조직한 것이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혁명의 성과를 방어해 낸 것은 유감스럽게도 트로츠키나 제4인터가 아니라 스탈린을 위시한 코민테른의 공산주의자들(트로츠키가 매도하는 스탈린주의자들)이었다. 혁명사도 아닌 강령에 왜 코민테른에 대한 평가를 넣어야 할까? 대중은 이런 문제에 무슨 흥미를 느낄까?
대략 살펴본 바와 같이 제2부 1장의 역사적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는 지나치게 세세하고 너무 과도하다. 스타하노프에 대해 흥미를 갖는 대중은 몇이나 될까? 대중은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논쟁에 대해서는 별 관심도 없고 소련사를 평가할만한 지식도 없다. 노동자계급과 근로인민이 대중의 자기지배를 실현하지 못했다든지, 혹은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라는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데에 실패했다는 즉 원인에 대한 규명보다는 결과에 대한 추상적 비판만 넣으면 좋겠다.
제3부 우리가 건설할 사회주의와 이행을 위한 투쟁요구”
제3부 제1장의 “우리가 건설할 사회주의”를 분리하여 제2부 1장(역사적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에 병합하고 “제3장 투쟁요구”로 분리할 필요가 있다. 성격상 중복되고 함께 서술해야 할 필요가 있으므로...
노동자평의회- 혁명적 시기에 나타나는 권력기관으로 발전할 수 있는 대중의 자주적 투쟁기관은 파리코뮌, 소련의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레떼, 코르돈 등등 다양하다. 역사적으로 러시아에서 노동자평의회가 성공적이었고 강력했다는 점은, 앞으로 나타날 투쟁체가 생산현장에 기반을 두고 선출되어 상향식으로 조직된 평의회이어야 하고 평의회일 것이라고 하는 점과는 별개의 문제다. 광주항쟁이나 87년 항쟁지도부는 물론, 2011년 아랍의 민중항쟁에서 나타난 봉기와 투쟁의 지도기관도 노동자평의회라고 보기 어렵다. 튀니지에서도 지역노조가 전국적으로 연합하여 항쟁의 주도권을 각축하고 있지만, 역시 노동자평의회는 아니다. 노동자평의회를 가능한 형태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이상형으로 규정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특히 역사적으로 평의회 공산주의 운동이, 1920년대에 이탈리아 등에서 보듯 권력의 쟁취를 중심에 두지 않고 평의회 건설운동에 매몰되었다가 궤멸적 타격을 입는다든지, 중앙계획경제 특히 당적 실천에 대립하는 무정부적이거나 자율주의적인 함의를 가진 운동이었다든지, 등등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 상황에서, 단일안의 곳곳에서 보이는 당의 소멸 운운의 주장과 결부시켜 볼 때 노동자평의회의 강조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당의 소멸-당이란 자주적 결사다. 당이 자립하여 국가위에 서는 것도 맑스주의의 일탈이지만, 국가의 소멸만이 아니라 당의 소멸을 주장하는 것은 평의회주의자들이라면 몰라도 사회주의의 이상으로 거론할 이유가 없다.
피티독재-생산수단을 사회화하자면 자본가계급의 저항은 필연적이고 이를 억압할 수밖에 없다. 부르주아 국가기구와 폭압기구의 파괴도 불가피하다. 그 점에서 피티 독재는 원론적으로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피티독재의 명시가 당의 존재를 불법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지하혁명가들의 당이 아니라 합법공간을 이용할 줄 아는 당을 만들려고 한다면 피티독재는 삭제해야 한다.
노동자국가-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국가(권력) 혹은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권력(국가)가 아니라 노동자국가라고 표현했을 때,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보편성과 충돌하는 측면이 있다. 혁명권력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모든 새로운 계급은 그들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반드시 그들의 이해를 사회의 모든 성원의 공동이해로서 제사할 필요가 있는 바, 그들의 사상들에 보편적인 형태를 부여하고 이것들을 유일하게 이성적이며 보편타당한 사상들로서 제시할 필요가 있다. 혁명을 일으키는 계급은 바로 그들이 하나의 계급에 대립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계급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전체의 대표자로서 등장하며, 그 유일한 지배계급에 맞서서 사회의 전체 대중으로 나타난다.”(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노동자 국제주의와 세계혁명- “전 세계 노동계급과의 연대를 통한 혁명의 확장과 방어 없이 일국에서의 노동자 권력의 유지 또한 불가능하다.”고 표현 중 ‘불가능하다’는 ‘지극히 곤란에 처한다’고 고쳐야 한다.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연대와 단결 그리고 공동의 실천과 투쟁이 어떠한 틀로 추구되어야 하는지는 실천 속에서 가능태를 들어내겠지만, 현재 다양한 정파로 나뉘어 있는 세계의 공산주의자들을 하나의 인터내셔날(하나의 강령을 갖는 국제당)로 묶어낼 가능성도 없고, 제3인터나 제4인터와 같은 틀이라면 별로 바람직하지도 않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노동자 국제연대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스탈린주의 코민테른의 일국사회주의론, 조국방어론과 단절하여 노동계급의 국제혁명을 추동하고 지원하는 기구가 될 것이다.”는 서술은 트로츠키주의당을 만들려면 몰라도 서술할 가치가 없다.
2. 이행을 위한 투쟁 요구
트로츠키의 이행기강령이 일상적 시기와 혁명적 시기를 구분하지 못하고, 따라서 최소강령과 최대강령의 의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무슨 가교를 운운하면서 양자를 뒤섞어버린다든지, 별 의미도 없는 전술형태나 조직형태를 요구조건에 집어넣는다든지 등등의 점에서 황당하고 천박하다는 점은 이미 여러번 얘기한 바 있다. 트로츠키주의적인 냄새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당면투쟁강령 정도로 표현하면 될 것이다.
“우리의 전략적 임무는, <혁명의 객관적 조건>과 <노동계급 지도력의 주체적 미성숙> 상태가 노정하는 간극을 뛰어넘는 것에 있다.”에서 객관적 조건과 주체역량의 미성숙이 아니라 ‘지도력의 주체적 미성숙’은 이상한 표현이다. 특히 운동의 성장이나 패배를 지도력에 결부시키는 관점은 받아들일 수 없다. 지도력에 대한 집착과 강조는 당우위론, 종국에는 위대한 수령론의 뿌리가 된다.
(4)민주적 제권리에서 해체해야 할 폭압기구에 전투경찰을 넣는 것이 좋겠다.
“(5) 여성, 성소수자, 청소년, 장애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가부장제의 극복이 빠진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7) 우리는 조합주의, 개량주의, 관료주의에 맞서 현장조합원 운동을 강화한다. 이를 위해 노동조합 안에서 활동하되, 노동조합 체계에 갇히지 않는 투쟁을 벌여낸다. 과거 현장조직운동의 역사에서 보여지듯, 현장활동가들은 노동조합이 가지는 ‘공식성’ 앞에 주저한다. 따라서 현장조합원운동에서 사회주의자(사회주의 현장분회)의 임무는 이러한 현장활동가들의 동요를 극복하고 아래로부터의 현장투쟁, 연대투쟁, 정치투쟁을 강화하며 필요하다면 비공인 파업을 감행하도록 선도하는 것이다. 즉 사회주의 현장분회는 노동조합을 재편할 지도력을 스스로 체화하고 확장시켜야 한다.” 운운의 서술은 현장활동론이라면 몰라도 계급투쟁의 지침인 강령에 언급할 필요가 없다.
‘노동조합 체계에 갇히지 않는 투쟁을 벌여낸다.’, ‘비공인 파업’ 운운하는 것은 불필요한 얘기이기도 하고, 조직적 단결이라면 치를 떠는 아나키스트나 자율주의자들이라면 몰라도 언급할 가치가 없다. 현장조합원운동, 현장분회 중심주의는 노동운동의 한 형태이지 절대적인 형태가 아니다. 이런게 무슨 강령에 요구에 들어가야할 요구인가? (특히 사노위나 노동전선처럼 노동운동의 중앙에 있는 회원이 많은 조직에서 현장분회 결국 사업장분회로 편제하면 전국적인 계급투쟁의 기획은 어떻게 가능할까? 현장활동가들이나 사회주의 활동가들의 존재형태나 조직형태는 현장분회중심주의를 벗어났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하 “(8) 노동자 생산통제-① 현장권력쟁취 투쟁을 노동자 생산통제투쟁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전통을 공장위원회 건설투쟁으로”, “△영업비밀 철폐△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공장위원회 건설”, “② 사회의 전 영역에 대한 노동자민중통제” 역시 트로츠키의 이행기 강령을 베낀 것으로, 특정 국면과 특정 상황 속에서 시도될 수 있는 운동이지만, 계급투쟁의 전략적 지침인 강령에서 이러한 운동이 혁명운동의 전략적 고리가 될 수 있는 강령적 지침이 되어야 하는가는 회의적이다.
가령 일상적 시기의 투쟁이었던 쌍차투쟁에서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와 공장위원회 건설’을 슬로건으로 내세워야 할까? 아니면 튀니지처럼 준 이중권력의 상태에서 군부해산과 무력화에 집중하지 않고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와 공장위원회 건설’을 내세워야 할까? 사회주의자들이 현장분회로 편제되어, 노동자통제, 민병대, 정당방위대, 무장 등등을 선동하고 공장위원회와 노동자평의회를 건설하면 혁명이 이루어질까? 이행 요구로 거론된 이러한 운동론은 투쟁 속에서 나타나는 조직형태나 전술형태일 뿐 일상적 시기에나 혁명적 시기에나 적절하지도 않고 권력장악을 위한 혁명적 투쟁의 전략적 고리가 되는 운동이 아니다. 도대체 현장활동론이 아닌 강령적 문건에서 이처럼 특정한 운동론-그것도 별로 공감받지도 못하는-을 세세하게 규정하는 경우가 어디에 있는가?
“(10) 제국주의와 전쟁에 맞선 투쟁”의, “현 시기 반제투쟁은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국내외 초국적 자본에 맞선 투쟁이며 IMF를 필두로 한 제국주의 세계기구에 맞선 투쟁이자,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맞선 투쟁이다.”에서
‘IMF를 필두로 한 제국주의 세계기구에 맞선 투쟁’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하다. 한국이 미국의 침략전쟁의 위협에 놓여있는가? 제국주의적 수탈은 FTA로 상징되듯 자본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 무역만이 아니라 금융과 지재권의 개방 등 세계화의 강요가 민중의 삶에 가장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미제가 공황의 위기를 전가하고자 획책한 양적완화로 인한 물가폭등에서 보듯 전세계의 민중에게 위기를 분배하고 전가하는 것이 문제다. 그리스 등에서 보듯 제국주의 금융자본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재정삭감 복지삭감을 강요하는 것이 문제다. 이런 것을 제국주의 기구에 대한 투쟁으로 서술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한국은 침략의 대상이 아니라 제국주의 패권주의의 필요에 따라 전쟁위기와 군사적 긴장을 강요당하고 군사기지로 동원되고 무기시장으로 수탈되는 것이 문제다. 이런 주제들에 대한 투쟁이 반제투쟁이 아닐까?
“(11) 미국의 대한반도 지배 분쇄, 남북 노동자민중이 해방되는 통일”에서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의 비핵화와 평화공존의 주장은 어디로 가고, “이를 위해 남한 노동자계급은 북한 노동자계급이 북한체제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주체로 서나가도록 지원․연대한다.”는 주장을 어떻게 할 수가 있는가?
왜 남한의 사회주의자들이 뉴라이트 꼴통 반공에 찌들은 목사님들과 함께 북의 민주화를 위해서 지원하고 연대해야할까? 남북이 처한 특수한 상황을 고려에 넣을 때 북의 체제를 극복하는 주체를 지원 연대한다는 발상은 참으로 심각하다.
3. 결어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번 단일안은 남한의 사회주의자들이 정파에 상관없이 분파를 만들어서라도 함께할 수 있는 비편향적·비정파적인 강령이 아니라, 트로츠키주의 일변도의 강령이 되어버렸다. 다시 한번 호소하건데 나처럼 트로츠키의 주장과 방법론을 별로 훌륭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물론 노사과연이나 다함께도 함께할 수 있는 그런 강령이 되길 바란다. 스탈린이나 트로츠키의 언어가 아니라 맑스와 레닌의 언어로만 서술되기 바란다. 강령에는 계급투쟁의 지침이 될 강령적 규정만 넣고 세세한 문제까지 규정하고자 하는 특정한 운동론은 넣지 않기를 바란다. 설령 트로츠키주의나 좌익공산주의나 평의회 공산주의가 옳다고 생각하더라도 함께 하기 위해서는 특정 편향을 연상시키는 주장은 빼야한다.
소수의 고립된 실천이 아니라 사회주의에 공감하는 대중을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그리하여 계급투쟁에 대한 개입력을 갖고 주도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기 위해서는, 투쟁 때문에 탄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존재만으로 불법이 될 수 있는 그런 혁명적 언사는 뺏으면 좋겠다. 피티 독재나 노동자 국가, 무장과 같은 단어를 빼도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큰 지장없이 얼마든지 투쟁할 수 있다. 노조 규약에 무장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어서 쌍차 노동자들이 무장투쟁을 한 건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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