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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 3-9 제3장 항쟁의 본질과 특수성 pp95-145

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 3-9 제3장 항쟁의 본질과 특수성 pp95-145

 


제3장 항쟁의 본질과 특수성

국민을 배반한 정권에 대한 항쟁

촛불항쟁의 본질은 무엇인가? 2008년 촛불은 미친 소는 죽어도 먹기 싫다는 국민에게 방패로 찍고 군홧발로 밟아서라도 먹이겠다는, 국민을 배반한 정권에 대한 항쟁이었다.

“하나의 정치체제로서 근대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형식적인 대의제 민주주의의 극단으로서, 아무리 보통 직접 평등 비밀의 선거를 하더라도,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은 단지 이념일 뿐이고 실제로는 4년에 한번 투표권을 행사할 때만 유권자일 뿐, 평상시에는 통치의 대상 혹은 피치자일 뿐이다. 즉 국민이 뽑은 정치인들이 국민으로부터 독립된 권력으로서 국민에게 대립물로 서서 국민을 소외시키는 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본질이다.1) 마치 <<1844년 경제학?철학 초고>>에서 맑스가 언급한 것처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하에서는 인간이 생산한 상품과 사회적 관계가 인간으로부터 독립하여 인간에 대한 적대적인 대립물로서 나타난다는 것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촛불은 단지 광우병 협상이라는 행정행위가 위험하고 잘못되었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국민이 뽑은 권력과 대통령이 국민의 뜻을 받들고 복종하기는커녕 배반하고 적대하는 것에 대한 분노의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이것은 형식적이고 기만적인 부르주아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분노로서, 그 자체에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포함하고 있다.2) 즉 자신들이 뽑아 준 권력이 맘에 안들 때 4년이나 5년 후에 표로 심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분노가 너무 커서 당장 갈아치우자는 열망이 ‘명박퇴진’으로 나타난 것이고, 이는 기껏해야 조작과 동원의 대상이었던 유권자인 시민이 정치로부터 소외되고 억압받는 피치자이기를 거부하고 주권자로서 직접 정치에 개입하는 행동이다.”(발표글 13)

그것은 부르주아 대의제 민주주의 즉 허구적인 대리주의의 한계가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었지만, 대중의 상상력은 심판, 탄핵, 퇴진 등 여전히 대리주의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통치자에 대한 감상적 악마화를 동반한 배제를 통해, 정상국가에 대한 희구로 나타났다. 모든 기성의 권위주의를 거부하고 ‘상상력에 권력을!’이라는 모토 하에 새로운 가치와 이념을 꿈꾸었던 프랑스의 68혁명과도 다른 모습이었다.
대중의 상상력은 87년의 형식적 민주주의 체제의 회복을 바라는, 정권과 통치자에 대한 즉자적 부정에 머무른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은 87년의 형식적인 직선제 민주주의의 산물이었지 그 부정으로서 성립한 것은 아니었다. 당선된 지 100일도 안 되는, 즉 통치의 정당성은 없지만 선출의 정당성은 있다는 사실도 전두환 독재의 성립 때와는 달리 대중의 상상력을 억압하는 요소 중의 하나였다.

억압당하고 왜곡당한 반신자유주의 투쟁

촛불항쟁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위협당하고 있는 민중들이 ‘미친 소’ 수입이라는 파렴치한 공격을 계기로 폭발한 즉자적이고 자생적인 투쟁이었다.
항쟁의 계기가 되었던 미친 소란 무엇인가? 미국의 축산업자와 사료업자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은 결코 먹지 않을 독극물을 미친 정부에게 강요한 것이었다. 미국은 이미 자국과 FTA를 맺은 멕시코에 암과 각종 질병을 유발하기 때문에 자국에서는 동물의 사료로도 쓰지 않은 GMO 옥수수를 수출하여 멕시코 민중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3) 이것도 자본의 이익을 위해 진행되는 세계화의 한 단면이다. 또한 촛불시민들이 민감하게 반응을 보였던 의료민영화란 복지의 축소(민중의 삶에 대한 공격)이자 상대적 과잉자본4)을 위한 시장화 정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미친 교육’이라고 불렸던 이명박의 공교육 포기 정책은 교육의 서열화와 시장화이다. 아마 한국만큼 청소년을 학대하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도 인생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은 청소년들을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나라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그 과정에서 권력과 재력이 있는 집의 자녀들은 좋은 스펙을 쌓아 부와 권력을 세습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청소년들에게는 낙오된 인생을 자신이 공부를 못한 탓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체제에 순응하고 체념하게 만든다. 이것이 서열화/경쟁화의 효과다. 전국 일제고사를 강요하고 평준화를 무너뜨리고 특목고를 만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경쟁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서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며 사교육을 시킨다. 이 과정을 통해 교육의 시장화도 진행되는 것이다.
공공재의 사유화와 4대강과 같은 개발정책 그리고 용산학살의 비극을 가져오고 온 국토를 투기장으로 만든 각종 부동산 정책 역시 과잉자본에게 투기의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은 물론 중국, 태국, 두바이, 그리고 남유럽의 수많은 신자유주의 정권하에서 부동산 투기의 광풍이 불었다. 2008년에 시작된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촉매제가 되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라는 것도 상대적 과잉자본의 욕구에 부응한 것이었다. 경기부양을 운운하며 투기를 조장하면서 넘치는 돈을 서민들의 ‘미래의 소득’을 담보로 빌려주었다. 버블이 끝나고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을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미국의 서민들에게 돌아가고, 투자자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구제 받았다. 미국이란 나라에서는 상위 1%가 전체 국부의 절반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투기를 노리는 과잉자본이 2003년에는 300조원, 2007년에는 800조원으로 추산되었다. 그들에게는 돈이 넘치는 것이다. 이것이 상대적 과잉자본이다. 가진 자들은 너무 많이 가지고 있고, 없는 자들은 너무 없다. 과잉자본의 투자처와 투기처를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 바로 시장화/사유화이다. 개방과 효율을 빙자하면서 진행되는 전력과 물 등 각종 공공재의 사유화와 의료, 교육 등의 시장화는 바로 그 본질이 상대적 과잉자본의 탐욕을 채워주기 위해서 자행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민중들의 삶이 유린되는 것이다.
이처럼 촛불과 용산과 쌍차, 의료민영화, 공공재의 사유화,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청년실업의 양산, 이 모든 것은 하나로 묶여 있다. 일자리가 위협받고 삶이 위협받는 그 모든 것의 배경에 탐욕을 배반할 수 없는 과잉 축적된 자본이 있고, 그 자본의 탐욕을 위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된다.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란 개방과 효율의 탈을 쓰고 진행되는 현단계 자본의 축적 전략이다. 누구를 위한 자유이고, 누구를 위한 세계화인가? 그것은 바로 축적위기에 몰린 자본 혹은 투기적 독점자본을 위한 것이다. 신자유주의란 결국 축적위기에 몰린 자본의 천국을 위해 국가와 자본이 끊임없이 노동과 복지를 공격하는 축적체제인 것이다.5) 온갖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청년실업 등 일자리에 대한 공격과, 교육의 서열화와 시장화, 의료 전기 물 등의 공공재의 사유화, 부자 감세, 서민을 울리는 부동산 투기 조장 등, 한마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란 80년대 이후 축적위기에 몰린 자본과 국가가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민중의 삶에 대해 자행하는 전면적인 공격인 것이다. 촛불항쟁이 한창이던 2008년 여름의 고환율 정책 역시 서민의 피땀을 수탈하여 수출대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한 것이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와 비즈니스 프랜들리란 바로 이런 것이다. 부자 감세나 파견노동제의 확장, 타임오프제도 마찬가지이다. 촛불항쟁은 이러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위협당하고 수탈당하는 민중들의 즉자적인 저항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투쟁은 대책회의에 의해 억압당하고 왜곡당했다. 안단테는 서명문안에서 대운하, 영어 몰입식 교육, 보험 민영화, 고소영, 물가정책, 천황 호칭, 공권력을 동원한 강제연행, 쇠고기 고시, 독도 문제 등을 제기했고, 안티엠비는 민영화 서민말살, 대운하 국토절단, 대기업 규제완화, 자사고 100개, 부도덕, 고소영?강부자 내각, 대북위기고조 등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 불만의 대부분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의해 유린당하고 위협당하는 이 땅의 서민 즉 민중들의 삶의 문제였다. 대중은 항쟁의 초기부터 6대 현안을 제기하고 청와대로 가고자 했지만, 대책회의가 지긋지긋하게 ‘고시철회’와 협상무효’만 강요하면서 문화제를 밤늦게까지 질질 끌었기 때문에, 광우병 협상문제만 부각되면서 비정상적 통치자에 대한 증오만 남게 되었다. 촛불항쟁은 분명 반신자유주의 투쟁이었지만, 대중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투쟁의 슬로건과 성격이 왜곡당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촛불항쟁은 타락한 운동에 의해 억압당하고 왜곡당한 반신자유주의 투쟁이다.

신자유주의 경찰독재국가에서의 미발달한 낮은 단계의 투쟁

“소위 재벌주도하의 한국자본주의가 IMF 후 그 축적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책이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무엇보다도 시장만능의 미명하에 노동의 유연화/비정규직의 양산, 복지의 축소, 의료 교육 전기 수도 가스 철도 등 공공재의 민영화/사유화, 투기적 금융자본을 위한 개방 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고, 이 모든 정책은 하나같이 힘없는 자들에게서 빼앗아 힘있는 자들을 살찌우는 소위 20대 80의 입장을 관철하는 것입니다. 이 땅 민중들의 고통의 뿌리는 바로 이 신자유주의로 표현되는 20의 80에 대한 철면피한 약탈에 기인하는 것이고, 바로 이를 관철하기 위해 이에 저항하는 민중을 억압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여기에서 형식적 민주주의를 형해화하고 공권력을 동원하여 억압하고, 조중동과 뉴라이트 수구꼴통들이 동원되고 있는 것입니다.”(발표글 10)
“이러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있어서 가장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은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민중이다. 전체 근로자의 60%가 월 100만원도 안 되는 비정규노동에 시달리고 있고, 청년들을 비롯한 광범위한 실업은 전체 민중에게 굴욕적이고 동물적인 삶을 강요하고 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칠 수밖에 없고, 이를 억압하기 위한 자본의 독재형태가 신자유주의 경찰독재국가인 것이다.”(김광석, 2009)

형식적 민주주의가 확립된 나라에서는 우선 악법을 만든 다음 ‘법질서’를 빙자하여 공권력을 동원하는 ‘경찰독재’가 일반적이다. 나라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신자유주의 정권은 민중을 억압하기 위한 각종 악법을 만들고 있다. 시민적 인권이 존중된다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애국법과 반테러법으로 시민의 권리를 위협하고 있고, 한국에서도 기왕의 인터넷재갈법 등 각종 언론억압법도 부족하여 G20특별법과 집시억압법을 만들고 있다. 또한 공익사업장이나 필수유지업무의 지정 등 각종 노동악법으로 거의 모든 파업이 불법이다.6) 노동자가 파업을 하면 자본가는 손해보게 되어 있다. 하지만 온갖 악법으로 노동자의 파업을 불법파업으로 규정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한다. 이 모든 것이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경찰력에 의거한 독재이다. 반민중적 세력이 걸핏하면 들먹거리는 것이 바로 이러한 ‘법질서’인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파업할 때 경찰이 단 한번이라도 노동자나 민중의 편을 든 적이 있었던가? 경찰은 시민의 지팡이여야 하지만 실제로는 민중을 억압하는 몽둥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몽둥이인가? 한줌도 안 되는 지배세력과 특권층을 위한 것이 아니던가? 이것이 바로 계급지배의 도구로써 기능하는 국가의 본질이다.7)
노무현 시절 무수히 보아 왔던 철거민 투쟁에서는 경찰력보다 용역이 주로 동원되었다. 이것은 경찰독재의 일종인 ‘경찰용역독재’이다. 경찰이 구사대와 용역의 온갖 불법을 비호하면서도 용역만으로 안될 때 노골적인 공권력이 등장한다. 뉴라이트 역시 용역의 일종이다. 기륭과 용산과 쌍차에서, 공권력이어야 할 경찰이 용역의 탈을 쓴 조폭과 한 통속이 되어, 이 땅의 노동자와 민중을 얼마나 유린하고 있는지 우리는 똑똑히 본 바 있다. 폭력의 초월적 담지자로서의 공권력의 본질은 투쟁하는 시민들이 도로로 나섰을 때, 노동자와 철거민들이 생존을 위해 투쟁할 때,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수많은 억압적 악법들은 민중들을 숨막히게 하고 체제에 대한 굴종과 체념을 강요한다. 공권력과 법질서는 내 안의 억압으로서 내면화된다. 그리고 순진함을 가장한 소심한 저항이 시작된다. “시위의 자유가 없는 중국에서 우보(牛步) 산책의 제안이 있었다. 그냥 시 중심가 광장에서 서로 어울리지 말고 천천히 어슬렁거리면서 산책만 하자는 제안이었다. (벨로루시에서는) 독재자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광장에 나와 웃으면서 아이스크림이나 먹자는 실천도 있었다.”(김광석, 2009) 거대한 공권력에 저항할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에 법과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애교 섞인 투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중의 분노가 소심함을 넘어 가두로 진출할 때, 거대한 공권력은 민중을 배반하는 적대적 폭력으로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촛불항쟁의 초기에 나타났던 문화적인 감수성에 가득 찬 투쟁, 애교 섞이고 재기발랄한 투쟁은, 공권력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의지할 곳이라곤 도덕적 우위밖에 없는 시민들이 선택하는 저항의 한 방법이다. 물대포에 ‘온수’를 외치고, 전경들에게 ‘오빠 놀아줘’를 외치는 본질은 이런 것이다. 하지만 대중이 자신의 힘을 자각하고 항쟁이 격화되어 곤봉과 방패가 난무할 때 ‘낭만의 외투’는 어느 틈엔가 벗지 않을 수 없다. 촛불시민이 거리로 진출하고 ‘광화문’을 외칠 땐 촛불로 자신을 포장할 이유가 없다. 촛불은 저항의 상징이지만, 투쟁이 격화되면 버려야 할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8) 조롱과 해학, 플래시 몹 등 ‘비적대적인 낭만적 투쟁’9)은 공권력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그리고 투쟁의 낮은 단계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촛불항쟁은 본격적 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한 미발달한 낮은 단계의 투쟁이었던 것이다.

문화장벽론 혹은 문화절대론
나영 동지는 “살수차 뿌리면 운동권은 ‘폭력경찰 몰아내자’는 결의를 호소하지만, 네티즌은 온수나 이온음료를 달라는 구호를 외쳐요. 기본적으로 감수성이 다른 거죠.”라면서 분노와 위트의 감수성의 차이를 지적한다.10) 그런데 이러한 차이를 절대화하여, “비장미에 넘치거나 수동을 강요하는 권위적인 낡은 운동권이 새로운 주체들의 새로운 감수성에 적응하지 못했다”든지, “낡은 운동권은 한문투의 8박자 구호부터 버려야 한다”고 얘기하는 ‘문화절대론자’ 혹은 ‘문화장벽론자’들이 있다. 하지만 현실의 촛불투쟁에서 ‘온수’를 외치는 청소년과 ‘폭력경찰 타도하자’는 386 세대가 서로 충돌한 적이 있었던가? 낡은 세대가 ‘온수’나 ‘차비 줘’라는 구호를 선창하지는 못했지만, 그 구호가 그 상황에 어울리는 것을 알고 즐겁게 따라하지 않았던가? 분명히 말하지만 감수성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 차이가 장애가 된 적은 없었다. 권위적이고 관료적인 문화는 극복의 대상이지만, 대책회의에 대한 비난은 권위적인 작태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비투쟁적인 작태에 대한 비난이 본질을 이루고 있다. 싸우려고 하고 이기려는 마음만 같다면 감수성의 차이나 문화적인 차이는 큰 장애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항쟁이 치열해질수록 위트는 사라지고 분노와 비장미가 압도하게 되었다. 촛불들이 가투할 때 특히 강남역 4거리에서 운동회를 할 때 8박자 구호밖에 외칠 것이 없었다. 8박자 구호는 이 땅의 대중들이 투쟁 속에서 발견해낸 것이다.
그런데 위트나 낭만적 감수성에는 민주화 20년 이후 억압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의 체제의 보편성(즉 모두의 국가, 국민을 위한 국가, 시민의 지팡이 등)에 대한 믿음이 들어있다. 이 믿음이 깨졌을 때 분노와 비장미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비적대적 낭만성은 적대의 미발전 단계에 조응하는 것이다. 물론 운동권과 시민들 간에는 많은 거리감이 있고 감수성도 그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운동권과 시민의 감수성이 다르다는 것은 본질적 문제가 아니다. 힘의 대결이 본질인 적대적 투쟁에서 문화적 감수성은 부차적인 것이다. 항쟁 속에서 운동권이 무기력했던 주된 이유는 감수성이 달랐기 때문이 아니라, 조직되지 않은 현실대중과의 소통의 고리를 발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혁명적 낭만주의는 고수되어야 하지만, 비적대적 낭만성은 현실대중의 감성으로서 존중의 대상이지 우열을 가려 굴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촛불들의 실천들

촛불시민들이 항쟁의 전 기간 동안 ‘고시철회’와 ’협상무효’의 슬로건만 강요당하면서, ‘명박퇴진’의 구호 외에 다른 슬로건을 익힐 기회가 없었던 점은 이후의 실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촛불시민들은 미친 소 반대 외에 조중동 반대를 슬로건화하고,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와 YTN 등의 지킴이에 크게 결속하였다. 촛불시민들이 조중동, 공영방송, 언론악법, ‘진알시’(진실을 알리는 시민들-한겨레와 경향신문 살리기 운동으로 주로 휴일에 무상 배포한다), ‘조반마’(조선일보 반대 마라톤) 등등 언론문제에 대해 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다른 나라의 투쟁과 비교하여 매우 이례적이다.11) 촛불들은 KBS지킴이인 노란천막과 YTN지킴이, 언소주(언론소비자주권 국민캠페인), 진알시 등의 카페를 만들어 결합했고, 2008년 말 언론악법저지를 위해서 민주당사 농성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항쟁 초반 조중동 광고주에 대한 전화걸기 운동은 한때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것은 항쟁의 확산과 승리를 위해 공정한 보도가 중요하다는 인식과 민주주의의 핵심이 언론에 있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고, 타인이나 전체 사회로부터의 정당성의 ‘인정’과 ‘평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대인의 감수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12) 무릇 모든 사회적 투쟁이란 정당성의 다툼이라고 할 때 기왕의 운동권이 헤게모니의 다툼이나 대항 헤게모니의 측면에서 접근했다고 한다면, 촛불들은 공정성의 확보를 중시했다.
또한 촛불시민들은 천황 호칭과 굴욕 외교에 반발하였고, 독도망언과 관련하여 일본대사관 앞에서 1인시위를 하거나 요미우리 신문과의 소송운동을 벌이기도 하고,13) 뉴라이트의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하는 교과서에 반대하는 등 민족주의적이거나 애국주의적인 감수성을 보여주었다. 일본대사관의 친일행사에 참여한 나경원 의원 등을 친일파로 규탄하고, 조중동에 반대하는 판넬14)도 친일행적을 폭로하는 내용이 크게 부각되었다. 2009년 겨울에는 안중근 서거 100주년을 맞아 시민추모음악회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항쟁이 끝난 후 촛불들의 실천을 보면, 2008년 가을에는 최대 300명 정도가 기륭투쟁에 결합하기도 하였고, 12월 6일에 있었던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5차 행동에는 서명 동참자가 10,000명을 넘었고, 집회장에는 1,000여명이 참석하기도 했다. 초겨울에는 대한문에서 출발하는 촛불산책(100여명 정도가 1-2명으로 조를 나누어 앞의 조와 30m 이상의 간격을 두고 촛불만 들고 광화문 일대를 도는 침묵행진)이 있었고, 연말에는 민주당사에서 언론악법 저지를 위한 농성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2009년 1월 하순에 시작된 용산투쟁에는 전문 시위꾼으로 불린 300여명이 지하철로 이동하는 야간 가투의 큰 동력으로 참여하였고, 여름에 있었던 쌍차 투쟁 등에도 몇 십 명 정도가 결합하였다. 한편 2009년 가을에는, 안산 등의 재보궐선거에서 후보단일화운동을 전개한다든지, 6.2 지방선거에서 반MB연합의 지향 속에서 선거참여 독려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항쟁이 시작된 이래 촛불시민들과 촛불카페들은 공영방송 지키기 운동에서 언론노조나 미디어 행동과 함께하였고, 공공재의 사유화 반대는 공공노조와 함께하는 ‘공감 2009’/‘공감 2010’의 틀로, 의료민영화 반대는 주로 진알시가 결합하였지만, 공영방송 지키기 운동 외에는 큰 호응을 모으지 못했고, 최근에는 4대강 반대를 중심으로 결합하고 있다. 조중동 광고주 전화걸기 운동이나 조중동 불매운동은 거의 유실되었다. 2009년 12월에는 진알시와 삼국(화장발)과 소울드레서 등이 조계사에서 김장나누기 행사를 하기도 하였다.

항쟁의 6대 의제(쇠고기, 대운하, 공기업민영화, 의료민영화, 정부 언론통제, 공교육 자율화) 가운데 촛불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고 결합한 것은 공영방송 지키기와 대운하 혹은 4대강 반대이다. 즉 공공재의 사유화 반대와 의료민영화 반대는 힘을 얻지 못하였고, 미친 교육(교육의 자율화/경쟁화/시장화) 의제는 소실되었다. 2008년 12월 일제고사 반대운동으로 정은주 교사 등이 해직되었을 때, 촛불들은 집회장에 잠시 참석하였지만 전교조 농성장이나 투쟁에 결합하지 않았다. 미친 교육의 문제는 항쟁의 초기 주역이었던 10대들이 제기한 중요한 의제였음에도 심화되지 않았다.15) 촛불들이 보여준 놀라운 대중의 자기학습능력은 미친 소의 뿌리인 한미 FTA 문제나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고통의 표현인 비정규직이나 청년실업 나아가 신자유주의 체제의 본질에 대한 본격적 학습으로 발전되지 않았다. 기륭투쟁이나 비정규직반대 선언운동16)은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비없세’(비정규직 없는 세상)나 ‘함께 맞는 비’와 같은 카페를 낳기도 하고, 2009년에는 ‘청년유니온’ 운동으로 발전되기도 하였지만 아직 큰 호응을 못 얻고 있다. 촛불항쟁은 반신자유주의 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지만, ‘고시철회’와 ‘협상무효’의 슬로건만 강요당하면서, 그 발전이 억압당하고 왜곡당했던 것이다.

항쟁의 비교를 통해 본 특수성

촛불항쟁의 특수성을 분석하기에 앞서 08년 촛불과 87년 민주항쟁을 비교하는 것이 08년의 특수성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배경: 87년 ?80년 광주학살 이후 전두환 정권의 권위주의적 억압체제는, 83년부터 표면화된 학생운동의 성장 때문에 억압 일변도에서 유화국면으로 전화하였다. 많은 조직사건과 화염병을 수반하는 데모가 있었고, 연행과 구속에도 불구하고 투쟁역량은 재생산구조를 갖추었다. 또한 학생인자들의 노동운동으로의 이전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08년 ?IMF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권 하에서 추진된 구조조정 등 노동의 유연화와 공공재의 사유화를 비롯한 각종 신자유주의 정책과 부동산 투기바람은, 전체 근로자의 절반이 넘는 840만 명을 월 소득 123만원에 불과한 비정규직으로 양산하는 등 노동자와 민중의 삶을 유린하고 박탈하여 사회의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계기와 진행: 87년 ?87년 4월 차기 대통령을 또다시 체육관에서 간접선거로 뽑겠다는 전두환의 발표는, 군부독재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민중의 광범한 저항에 부딪쳤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고리로 하여 6월초부터 시작된 항쟁은, 노태우의 ‘6.29 직선제 수용’의 발표가 있기까지 약 20일간 계속되었으며, ‘호헌철폐’와 ‘독재타도’의 슬로건하에 학생들이 앞장선 시위는 경찰의 제지를 무력화하고 시내 중심가를 해방공간으로 만들었다. 백골단과 사과탄을 앞세운 진압에도 불구하고 화염병으로 무장한 대학생들의 줄기찬 시위는 넥타이부대(남성 화이트칼라)와 시민 그리고 노동자들의 결합으로 공권력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지배계급에게 남은 수단이 군대를 동원한 계엄령밖에 없게 되자 전두환은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고, 항쟁지도부(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이를 수용했다.17) 항쟁지도부와 시민들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노동자들은 공장으로 돌아가 공장 민주화 혹은 노조민주화 투쟁을 시작하였다. 7월부터 9월까지 약 3개월 동안 전국의 사업장에선 노동자 투쟁의 대분출이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노동자계급은 91년 전노협과 95년 민주노총의 건설로 나아가는 토대를 만들었다.
08년 ?한미 FTA를 추진해야 할 아무런 합리적 이유도 없을 뿐만 아니라18) 온갖 독소조항19)으로 가득 차있음에도, 그리고 시민사회단체의 광범위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 김종훈 등과 함께 ‘FTA 5적’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한미 FTA를 밀어붙였다. 노무현의 독선과 무능력 그리고 노동자계급에 대한 억압은,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좌파에 대한 광범위한 환멸을 불러일으켰고, 지지율은 20%대 아래로 추락하였다. 07년 대선에서 대중은 경제를 살리겠다는 신자유주의 우파인 이명박을 선택했다.
당선 후부터 강부자 내각을 꾸리고 ‘어륀쥐’ 교육을 운운하면서 서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던 이명박은, 한미 FTA의 4대 선결조건의 하나였던 쇠고기 협상에서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감안할 때 결코 허용할 수 없는 미친 소 수입개방을 미국 방문의 선물로 주고 말았다. 그러자 경쟁만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의 직접적 희생자였던 10대 청소년들의 ‘미친 소 너나 먹어! 미친 교육 반대!’의 외침이 터져 나오고, 대중의 분노와 저항은 급속하게 분출되었다. 1,700개가 넘는 시민사회단체가 결합한 광우병 대책회의는 항쟁의 지도부가 아니라 보조자의 역할을 하겠다고 하면서도 대중의 투쟁을 억압했다. 광범위하게 진출한 대중의 저항은, 고시 강행과 함께 자행된 공권력의 무력진압과 연행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다가, 8.15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대규모적인 투쟁은 막을 내렸다.

이상과 같은 비교를 통해 살펴볼 때, 87년 투쟁과 08년 투쟁은 대중이 광범위하게 결합하고 진출했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87년은 화염병을 동원한 대학생들의 선도적이고 헌신적인 투쟁이 넥타이부대를 비롯한 노동자계급과 시민들의 결합으로 백골단과 사과탄 등 공권력의 폭압을 뚫고 나감으로써 정권의 양보를 강요하여 작은 승리라도 쟁취한 투쟁이었고, 조직적이고 대중적이며 폭력적인 투쟁이었다.
이와 비교하면 08년 투쟁은 광범위한 분노와 불만을 기반으로 대중의 진출이 이루어졌지만, 자발성과 인터넷을 통한 비조직적 동원과 여학생, 배운 녀자, 유모차, 82쿡, 소울드레서, 개념찬 언니들, 화장발, 쌍코 등에서 보듯 여성들의 진출이 두드러진 투쟁이었다. 또한 초기 국면에서 재기발랄함과 풍자와 해학이 두드러진 투쟁이었으며, 완강하고 끈질기지만 비조직적이고 비폭력적인 투쟁이었고, 공권력의 폭압 앞에 위축되고 좌절된 투쟁이었다. 즉 08년의 새로움을 규정하는 단어는 자발성, 여성, 탈모던(네티즌과 발랄한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항쟁이 끝난 후, 87년에 참여했던 수많은 시민들은 대중운동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으로 진출하였고, 아직까지도 여러 사회운동의 중추에 남아있다. 반면 08년 촛불은 야비한 탄압에도 촛불을 끄지 않은 채 끈질긴 저항을 계속하지만, 독자적인 이념이나 담론 혹은 대규모의 독자적 저항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용산투쟁이나 공영방송 지킴이, 의료민영화 반대 혹은 MB심판이나 투표독려와 같은 운동과 이슈에 참여하고 연대하였다.
이것은 68년 파리에서 학생들로부터 시작된 5월 항쟁이 노동자계급과 결합하여 격렬한 저항 끝에 진압당한 후, 젠더(성해방)나 생태(환경), 소수자 운동 등 소위 ‘뉴레프트 운동’으로 혹은 새로운 ‘정체성 운동’으로 발전한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또한 2001년부터 남미의 아르헨티나나 볼리비아 등에서 조직되지 않은 대중의 폭발적인 투쟁으로 신자유주의 정권을 몰아낸 것과도 다르다. 물론 그 투쟁들은 대중의 자기지배 혹은 민중권력을 이루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불과 2-3년 만에 신자유주의 정권이 다시 들어서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처럼 투쟁의 주체와 양태에서 08년 투쟁은 여타의 항쟁과 많은 차이점 혹은 새로운 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새로움이 무엇인지,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2008년 촛불항쟁은 비록 신자유주의 정권을 몰아내지도 못했고 새로운 이념이나 운동을 창출하지도 못했지만,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였고, 끈질기게 지속된 투쟁이었고, 그 과정 속에서 촛불들은 진화하고 변화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촛불을 한마디로 정의 내린다는 것은 곤란하고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명박을 결코 용납할 수 없는(감상적 악마화) 촛불의 정체성을 얘기하자면, 불의와 싸우는 정의였고, 끈질긴 저항이었다는 점과 대중의 직접행동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모든 항쟁이나 투쟁이 정의의 투쟁이겠지만, 촛불들은 특히 자기 정체성을 ‘정의’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는 전기세와 수도세를 걱정하던 서민들이 대책회의의 억압이나 주체의 미성숙이나 항쟁의 미발달로 5대 의제였던 의료민영화나 공공재의 사유화 반대 혹은 비정규직 반대 투쟁과 같은 민중적이거나 계급적인 요구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직 미친 소 반대나 공영방송과 같은 보편적인 국민이나 시민으로서의 요구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음에도, 촛불들은 은연중에 노동자계급이나 운동권과 다르다는 점 혹은 노동운동이나 계급운동은 순수하지 않다는 심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모 촛불연대체에서 민주당은 물론 민주노총에 대해서까지 은연중에 자신들만이 고결한 정의인 것처럼 행동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20) 그러나 촛불만이 고결하고 정의롭다는 의식은 슬로건의 미발달로 인한 탈계급적인 추상적인 정의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질 수 있고, 이것은 촛불들의 자기 정당성의 발전을 제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역사상의 모든 투쟁이 정의를 기반으로 한 대중의 직접행동이었다면, 촛불투쟁은 ‘끈질김’이 구분되는 특성일 것이다. ‘될 때까지 모여라!’는 이 특성이 표현된 것이다.

촛불폐인

촛불투쟁의 특성 중의 하나로 ‘끈질김’을 들 수 있다. 100일이 넘는 긴 항쟁, 그리고 이명박이 집에 갈 때까지 결코 촛불을 내릴 수 없다는 그 끈질김은 어디서 나오고, 무엇 때문이었을까?
먼저 운동의 억압을 들 수 있겠다. 이명박은 끊임없이 열받게 하는데, 대책회의가 촛불을 청계광장에 가둔다거나, 비폭력을 운운하며 투쟁을 억압한 것이 항쟁을 장기전으로 만들었고, 항쟁의 매듭이 분명하게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촛불의 외침이 정당한데도 조금도 인정받지 못한 상황에서, 피아간의 모든 역량을 다한 싸움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패배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기지는 못했지만 굴복할 수 없었고, 촛불이 정의라는 확신과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역에서 촛불을 끈질기게 들게 한 힘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와 정의감 그리고 모든 힘을 다해 싸워보지 못한 점만이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끝없는 저항을 이어가게 하는 힘은 아니다.

“왜 우리는 촛불을 들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서 저항하고 있는가? 이 투쟁을 이끄는 힘은 무엇인가?
아마 맨 처음엔 제 나라 국민들에게 미친 소를 못 먹여서 환장한 놈들이 국민을 속이는 것도 모자라 방패로 찍고 군홧발로 밟아서라도 먹이려는 정권에 대한 분노였겠지요. … 그렇다면 단지 이들 한 무리의 세력들의 말도 안 되는 처사에 대한 분노만이 우리를 이렇게 끈질기게 이끌어 온 힘일까요?
저는 우리가 비록 확실히 느끼지는 못할지라도 단지 분노만이 혹은 우리가 정당하다는 확신만이 우리를 여기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촛불을 들게 할 것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학생과 시민과 임신부를 칼과 총으로 학살하는 것에 분노하여 일어선 시민군이 진압당한 후에 즉 분노와 슬픔은 남아 있지만 더 이상 저항을 계속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즉 촛불에는 불의에 대한 분노 외의 그 무언가가 촛불 속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어떤 사람은 날마다 KBS에 가서 밤을 새우고, 어떤 사람은 자기 돈으로 전단지를 만들어 뿌리는 걸까요?
저는 이 모든 저항이 자기실현의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쟁사회에 찌들은 소시민으로서 더 많이 가져야 되고, 더 높이 올라가야 되고, 단지 나와 내 가족만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했던 무기력에 세뇌된 인간들이, 처음으로 국가권력과 한줌의 세력들이 자신의 삶을 유린하고 부정하는 것을 깨우치고, 평화로운 촛불에 동참하면서 자신의 작은 실천이 유의미하고 역사를 바꾸는 힘이 된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실천 속에서 처음으로 내가 아닌 내 이웃과 공동체를 위한 실천 속에서 자아의 해방을 맛본 것입니다. 그 순간 존재의 합일화 즉 나와 남이 아니라 우리라는 합일화의 과정을 통해서 소외된 자아가 해방된 기쁨과 희열21)을 맛본 것입니다.
새문안교회에서 버스를 끌어내기 위해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밧줄을 당길 때, 물을 가져오는 사람, 부채를 부쳐주는 사람, 떡을 가져 오는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인생에 처음으로 정말 순수하고 정당한 열정 속에서 이름 모를 사람들과 함께하는 희열감! 권위적이고 경쟁적이고 이기적인 사회 속의 왜소하고 고립된 소아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타자와의 합일화를 통한 희열감과 행복감을 맛본 것이고, 그 속에서 의미있는 자아를 실현하면서 기왕에 쫓기듯 찌들어 살아왔던 소아가 무의미해지고, 매일의 작은 실천이 주는 자아실현의 행복에 빠져든 것이 아닐는지….
나와 내 주변이 모두 순수한 열정과 분노 속에서 함께하고 있다는 것, 나도 그 속에서 존재의 해방감을 느끼면서 행복하다는 것, 바로 이 행복감과 해방감의 경험이 너무나 좋고(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의 본성에 합치하니까), 그 행복을 유린하는 권력이 너무나 밉고 용서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도로에 나선 당당하고 수많은 촛불 속에서 느끼는 해방감과 수많은 사람과 함께하고 있다는 다시 말하여 나와 내 옆 사람이 우리가 되어 서로 사랑으로 묶여가는 희열, 무의식 속에 잠재되었던 두려움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해방된 자아를 향해 나아가는 환희. 이 모든 해방감과 희열과 환희가 바로 촛불이 느끼는 행복감과 일체감의 근원인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가 처음으로 만나면서도 함께한다는 마음과 순수한 열정으로 하나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서로에게 엔도르핀을 주는 즉 인간의 본성에 합치하는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발표글 7)

이처럼 촛불을 끌 수 없는 힘은 분노와 정의감만이 아니라 항쟁 속에서 맛본 해방과 희열이 해방된 자아로 나아가는, 즉 이 사회가 강요하는 소외를 극복하는 자기실현의 과정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촛불폐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평상시의 우리들의 삶이 너무나 소외되어 있어서 일상 속에서는 아무런 기쁨이나 가치를 못 느끼고 오직 촛불들과 함께하는 시간만이 유의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만큼 현대사회가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기실현을 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여성과 청소년

촛불항쟁의 키워드는 네티즌(혹은 인터넷), 여성, 청소년 그리고 대중의 자발성이다. 왜 청소년들이 먼저 나섰고, 여성의 진출이 두드러졌는지, 인터넷에 친화적이었는지는 깊이 탐구할 주제이다.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성인 남성보다도 훨씬 더 많은 억압과 소외를 경험하고 있으며 생명과 먹거리와 민주주의에 대한 감수성이 훨씬 더 크다는 것, 그리고 청소년들이 교육의 서열화와 시장화로 심각하게 학대당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22) 여학생들이 남학생들보다 적극적이었다는 것은 “걔들(남학생들)은 게임밖에 안 해요”라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여학생들이 삶과 사회적 관계 그리고 교류에 대한 관심과 친화성이 더 높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상의 모든 투쟁에서 여성들이 오히려 더 용감하게 앞장서고 헌신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앞으로도 항쟁이 발생한다면 여성과 청소년들이 또 앞장을 설 것인지, 혹은 전 세계적으로 확립된 신자유주의적 억압 하에서 여성과 청소년들이 앞장설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2008년 세계적인 경제위기(경제위기란 무엇보다 민중 특히 하층민의 삶을 유린한다)가 발발했을 때, 미국과 독일, 프랑스와 같은 몇몇 나라에서는 대학생들의 등록금 인상 반대투쟁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23) 그리고 2009년에 있었던 프랑스의 300만 총파업은 연금 개악과 같은 복지의 축소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이었다. 그리스를 비롯한 경제위기에 몰린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노동자계급이 구조조정과 복지를 쟁점으로 투쟁하였다. 2010년 10월에도 프랑스에서는 연금개악에 반대하여 350만 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하였고, 경제위기 하에 있는 유럽의 다른 나라 역시 노동자들의 투쟁이 거세어지고 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까지 “우리는 계급투쟁을 하고 있다”면서 학교를 봉쇄하고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합류했다. 즉 똑같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투쟁이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노동자계급이 주력을 이루고 있고, 그 외에 대학생들(일부 국가에서는 고등학생들)이나 도시하층민들(남미)이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2008년 한국의 촛불항쟁은 노동운동이 침체된 상황에서 즉 노동자계급이 자신감과 힘을 잃은 빈 공간에서 좌절과 억압을 받은 경험이 없는 청소년들과 감수성이 큰 여성들이 앞장선 것이다. 노동운동이 침체되지 않았더라면 노동자들은 촛불과 함께 나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고, 운동이 살아 있었더라면 노동자들은 시민들과 함께 민중의 정체성24)으로 누구보다 앞장서서 명박산성을 넘었을 것이다. 결국 청소년과 여성이 앞장선 것은, 그들이 이 체제의 가장 큰 억압과 소외를 겪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의 감수성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동운동이 침체됐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25)

네티즌

인터넷은 단순한 도구만이 아니라 현대인의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26) 정보와 지식을 교환하고 획득하는 장일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감성과 의견과 인격이 부딪치는 또 하나의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디지털 유목민’이 사는 공간이 아니라, 현실의 삶과 고통을 그대로 지닌 네티즌들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촛불항쟁에 앞장섰던 네티즌은 신자유주의에 고통받고 위협당하는 민중 혹은 소외된 대중의 또 다른 모습이고 그 일부이기도 하다. 바로 그 때문에 네티즌들이 이명박의 반서민적 정책에 열받는 것이고, 마이클럽, 소울드레서, 화장발, 쌍코 등의 동호회에서 미친 소, 미친 교육, 의료민영화, 대운하 등등의 의제에 분노하고 공감을 표시하는 것이다.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디지털 유목민’은 없다. 그럼에도 익명의 공간인 사이버 세계에서의 네티즌들의 활동양식은 현실 속에서 행동할 때와는 다른 문화적 모습을 보인다. 즉 현실의 삶에 규정되고 있는 동일인의 양면성이다.

소외된 대중으로서의 네티즌27)
촛불폐인이 현대적 삶이 강요하는 소외에 대한 자기실현의 측면이 있다는 점은 이미 얘기했지만, 현대인들이 인터넷에 빠져들고 트위터 등에 열중하는 것도 바로 그들이 소외된 대중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대 자본주의는 단지 생산현장에서의 착취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과 문화의 모든 것을 화폐로 소비하게 하는 상품화28)와 생존경쟁을 강요한다. 즉 현대인은 비단 일터에서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소비생활 등 삶의 모든 곳에서 소외를 강요당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소외된 대중들의 문화적 감수성에 어필하여 성공한 것이 트위터이다. 문화란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현실 속의 대중의 처지와 욕망에 부응하는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한 영역이다. 최근에 현대의 대중들이 탐닉하게 된 트위터의 첫 번째 특징은 가벼운 정보(instant information)의 교류다. 정보라기보다는 가벼운 신상의 표현들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트위터의 중요한 특징은 ‘표현의 문화’다. 침묵하고 있을 때, 혹은 눈팅만 하고 있을 때, 그의 존재는 없다. 오직 트윗(재잘거림)29)을 하고 팔로우를 했을 때에만 그는 존재한다. 표현을 해야만 존재하는 그는 현대인의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30)과 깊은 관련이 있다. 존재를 위해서 혹은 욕망을 위해서 그는 타자(他者)를 필요로 한다. 혼자 힘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그는 전형적으로 소외된 존재이다. 현대인이 트윗에 열중하는 것은 바로 그가 지극히 소외된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인간관계가 있겠지만, 인터넷으로 맺어지는 미지의 다양한 사람들과의 소통은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그리고 짧고 가벼운 언사의 교환이 주를 이룬다. 트윗을 새로운 놀이문화라고 한 것은 예리한 지적이다. 자기를 벗어난 혹은 진지한 관계를 벗어난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은 결국 자기의 허전함을 달래는 놀이가 된다. 현대인이 탐닉하는 혹은 현대인의 감수성에 부응하여 성공한 싸이월드나 페이스북, 네이트온, 아고라 등등 여러 인터넷 공간과 (촛불)카페와 같은 공동체 혹은 트위터는 이처럼 현대인의 소외를 달래는 기능도 하고 있다. 결국 새로운 인터넷 공간은 소외된 대중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그 중요한 특징은 ‘표현(드러냄)의 문화’다.
이곳에선 모두가 착해야 한다. 보편적이고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감정상의 반응을 보여야 하고 그리고 드러내야 한다. 일상의 작은 느낌들을 문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표현의 문화’다. 그리고 이곳에선 (요즘 문화가 다 그렇지만) 서로의 호감을 표현으로써 확인해야만 한다. 이게 ‘칭찬의 문화’다. 칭찬해주세요!, 착해요!, 잘 했어요!, 안타까워요! 등등 감정과 감상의 공감 속에서 서로를 칭찬하고 공감하면서 서로의 우정과 호감과 사랑을 확인한다. 호감을 드러내야만 하는 ‘칭찬의 문화’는 생존경쟁에 내몰리는 적대적 환경 하에 있는 소외된 대중들의 욕망이 만들어 낸 것이기도 하고, 그 자체가 ‘표현의 문화’의 연장이기도 하다.31)
이러한 표현의 문화는 나와 남이 아니라 ‘우리로서 하나가 됨’이나 단결을 중시하는 공동체 문화나 동양적인 정신세계나 지성의 세계와는 정반대의 문화이다. 유교의 군자철학이나 불교의 ‘버림의 철학’에서는 ‘존재(소아)’나 ‘감상’이나 ‘감정’이 표현의 대상이 아니라 억제의 대상이고 극복의 대상이다. 단결을 중시하는 공동체 문화에서는 ‘잘난 체’와 같은 사적 개인의 드러냄이나, 단결을 해칠 수 있는 사적 감정의 표현은 억제된다. 결국 유교나 불교의 덕목이란 공동체에서 존중되는 덕목이고, 이러한 덕목을 갖추고 있는 사람을 우리는 인격자라고 한다. 일상의 작은 감상을 표현하여 주위로부터 공감을 얻고자 하는 문화와, 그러한 표현을 천박하게 보고 표현하는 것을 수치로 아는 문화와의 차이! 이것은 엄청난 차이이다. 공동체적 감수성이 강한 사람들이 트위터에서 오고가는 사랑이나 감성을 속물적이거나 천박하게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32)
촛불항쟁 때 “저 숙제했어요. 칭찬해 주세요!”33)라는 글들이 많이 올라왔다. 이 또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 기반한 표현과 칭찬의 문화다. 바로 이런 문화 때문에도 필자가 현대인들이나 네티즌들을 소외된 대중으로 규정하는 이유이다. 공동체 문화와 공동체에 기반하지 않은 소외된 개인의 문화는 차이가 크다. 표현하고 칭찬하고 격려하는 이런 문화는 항쟁의 초기 자발성에 많은 기여를 했다. 아이돌 스타의 문화 역시 표현과 발산의 문화다. 그것은 억압당하고 있는 소외된 대중의 욕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그들의 발산에 열광한다. 이처럼 탈모던한 현대의 문화적 특질의 중요한 측면의 하나는 표현의 문화이고 대중의 존재양식이기 때문에 운동은 이 특질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소외된 대중의 문화 중의 하나인 트위터는 현대인의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 부응하여 즐거움을 주지만 소외는 극복되지 않는다. 촛불항쟁은 공동체 속에서 하나가 되는 해방의 희열을 주었다. 그 희열은 소외를 극복해가는 자기실현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연예인에 대한 잡담으로 일상의 무료함(이것도 소외이다)을 달래던 네티즌들이 미친 소 반대운동을 하면서 희열을 느끼듯, 트위터들도 선거참여 격려나 4대강 반대와 같은 투쟁에 참여할 때 평상시와는 또 다른 즐거움이나 희열을 맛본다. 이것은 자신이 순수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의 정의에 참여하고 있다는 즐거움이다. 이러한 즐거움은 월드컵 응원전에 참여하는 것이나,34) 인기연예인에 열광하여 적극적인 서포터즈가 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다. 그리고 그 즐거움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크기 때문에 빠져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즐거움은 소외를 극복하는 해방된 자아나 공동체로 향하는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촛불집회의 놀이문화적 측면은 이처럼 소외된 문화의 대체이면서 연장이기도 하다. 결국 네티즌들이나 트위터들이 항쟁이나 투쟁에 앞장서게 되거나 촛불폐인이 되는 것은, 무슨 탈물질적인 문화적 특질이나 유목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현실의 삶이 유린당하고 위협당하고 있는 소외된 대중이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소속감과 구속감이 없는’ 개인으로서의 한계를 짙게 남기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맛보는 희열이란 아직 ‘공동체에 용해된 개인’35)으로서의 희열의 단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속감 없는 개인
“변혁을 꿈꾸어 왔던 기왕의 운동권들이 거대한 촛불과 맞부딪쳤을 때 느껴지는 당혹감의 정체는 무엇인가? … 이들을 관통하는 것은 자기가 옳다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지성이라는 점임. 이것은 기존 운동권의 조직적 사업과 같은 관성이 아니라, 인터넷상의 이용과 소통의 행위가 그 자체에서 주어지는 평등함과 자발적인 개인의 의지라는 특성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음, 즉 네티즌은 기존 운동권처럼 조직적인 틀을 통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지성에 합류하는 데에는 개별적 확신만으로 족하다는 점임.
그리고 이것은 눈팅족도 있고, 키보드 워리어도 있지만, 다중 가운데는 실천에 옮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설득력있는 행동방안을 냈을 때, 이를 공감하고 따라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동일한 실천의지를 갖는 사람들이 카페를 결성했을 땐, 토론을 통해서 더 나은 방법론을 찾아 실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음.
나아가 기존의 운동권처럼 전략전술 혹은 기획목표와 실천방안을 먼저 고민하는 방식으로는 나올 수 없는, 혹은 그러한 사고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무모하다고 할 만한 실천이 있음. 몇 달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저녁이면 KBS에 출근하여 날을 새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회칼 테러가 났다고 했을 때 함께해야 된다면서 서울대 병원의 주차장에서 몇날 며칠을 밤을 새는 사람들이 있음.
성과 혹은 승리에 대한 전망이 아니라 그냥 분노와 공감 혹은 동참으로 족하고 그 이상 바라지 않는 사고방식이 있음.
이것은 운동권에서는 하나의 전투에서 동력과 전술을 고민하는 데 익숙하지만, 네티즌은 처음부터 집단에 소속된 개인이 아니라 그냥 다중 속의 일인으로서 자기의지만으로 자기행위를 결정해온 관성 때문에, 자기가 참여한 거대한 물결을 지도하는 그룹이 있다거나 누군가의 지휘 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병사가 아니라, 자기와 같은 생각과 참여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얼마나 될지 어떤 결과를 낳을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단지 옳고 정당하다는 자각만 있으면 실천에 옮기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사고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듦.
아무튼 당신이 만약 조계사에 갔을 때, 그저 아무 말 없이 촛불을 켜고 앉아 있는 사람을 봤을 때, 조직운동을 한 사람은 한두 시간 같이 할 수 있겠지만 날을 새야겠다 오늘만이 아니라 낼이고 모레고 날을 새야겠다는 사고는 결코 나올 수가 없고, 이것이 촛불 혹은 촛불폐인과 운동권과의 사고방식의 결정적인 차이라는 생각이 듦.
그러나 이러한 무모하다고 보여지는 실천이 거대한 물결을 이룰 때 개미떼는 태산을 움직이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이고, 수많은 개미 중엔 참으로 발랄하고 창조적이고 실천적인 지성이 있게 마련이고 그 실천이 보편성을 가질 때엔 즉 모범이 되었을 땐 즉각 따라하고 함께 한다는 것임.”(발표글 8)

결국 기성 운동권 가령 노동조합의 조합원은 승리를 위해 자기 조합원 대중들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먼저 사고한다면, 네티즌은 소속감 없는 개인으로서 ‘옳다’라든지, ‘효과가 있을 것 같다’는 개별적 확신만으로 실천에 나선다. 즉 성과 혹은 승리에 대한 전망이 아니라, 그냥 분노와 공감 혹은 동참으로 족하고, 그 이상을 바랄 수 없고, 바라지 않는 사고방식이다. 이러한 작은 실천과 제안이 항쟁 초기 고양기라는 조건 하에서 ‘광고주 전화걸기 운동’과 같은 개미떼들의 ‘따라하기’를 이루어낸 것이다. 이처럼 촛불의 실천은 소속감 없는 개인들에 기반한 판단과 동참이 크게 이루어졌고(자생성과 자발성), 이것이 항쟁의 확산을 가져온 힘이었지만, 또한 승리할 수 없는 한계를 내포한 것이기도 하였다. 결국 촛불항쟁은 소속감 없는(조직되지 않은) 개인에 기반한 투쟁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36)

구속감 없는 개인
도심에서의 대규모 항쟁이 벽에 부딪혔을 때 촛불시민들의 카페로의 결집이 두드러졌다.

“신문에 삽입되는 전단지의 반응도가 10만장에 2-300명 즉 0.2~0.3%라고 할 때, 가령 조중동 광고주에 전화하자는 글에 대하여 아고라 방문객 80만 중 800명이 반응하고 실천했다면, 대강 0.1%의 반응을 보인 것이고, (카페는) 아고라의 무수한 방문객 중 행동과 실천을 선동 또는 공지하는 좋은 글에 대하여 반응하는 사람들을 점차 실천과 동원을 통한 순도를 높여 조직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 카페는 이 0.1%만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함. 나아가 대부분의 카페의 참여율이 10% 정도라면 그리고 이들 0.01%가 모여서 10,000명의 투사를 만들어 냈다면 참으로 능률적인 구조라고 아니할 수 없음.”(발표글 8)

이처럼 촛불카페는 현실의 대중이 익숙한 기왕의 ‘다음 카페’에 창조적으로 적응한 측면이 있고, 대중의 현실에 기초한 적절하고 능률적인 공동체라고 할 수가 있지만, 대중조직과는 다른 특성과 한계를 가지고 있다.

“카페 조직은 카페지기와 운영자에게 게시판 운영권이나 등업권, 강퇴권 등을 부여하는 등 중앙집권적으로 설계되어 있기는 하지만―즉 자칫하면 중앙집권적이고 비민주적으로 운영될 소지가 크기는 하지만―회비나 실천 등의 의무를 강제하지 않고 낮은 참여율을 높이기 위한 소통의 노력(즉 민주적 운영을 위한 노력)이 운영진의 민주적 품성에 많이 의존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어쨌든 독재는 중앙집권적이고 위계적 수직적인 데 반해, 민주주의는 수평적 참여를 지향한다고 볼 때, 즉자적 다중37)의 직접참여라는 특성을 갖는 촛불들은, 다수를 그저 회비나 내는 수동적 존재로 만드는 시민단체와 같은 상근자운동체와는 거리가 멀고, 노조나 여러 정치운동체처럼 비록 민주적으로 선출된 집행부와 민주적 의결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중앙집권적이고 위계적인 조직방식과도 친화하기 어려운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직업적인 활동가가 아닌 생활인으로서 참여하는 촛불조직은, 활동과 참여와 의지의 강도가 시민단체나 대중조직과는 전혀 다른 참여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다. 즉 속박이 강하지 않은 혹은 성원의 자율을 침해하지 않고 나아가 강력한 참여나 결의를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대의에 공감하고 참여하는 공동체인 바, 이 공동체는 개방적이고 수평적이며 민주적인 의결과 실천구조에서 낮은 단계의 실천을 추구하는 즉 즉자적 다중이 결합하여 대자적38) 다중으로 전화되는 틀이라고 할 수 있다. …
이처럼 체제 내에서 비판과 개량을 추구하는 시민단체가 다수의 참여를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구조라면, 또 체제저항적인 대중운동체가 민주적이면서도 중앙집중적인 구조를 갖는 것과는 달리, 촛불조직은 낮은 단계의 참여와 실천을 수렴하는 직접민주적이고 개방적인 틀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제3의 새로운 형태의 조직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촛불조직 혹은 카페는, 즉자적 다중의 의지의 공감에 따른 자발적 가입으로 이루어지고 회비와 규율의 강제가 없는 카페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수 성원은 즉자적 다중의 흔적을 가질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대부분의 카페는 회원의 결합도가 10% 내외에 그치고 있다.
즉 촛불조직을 평가하고 판단함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대중조직과 다중조직의 차이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카페에 가입한 회원이더라도 카페의 사업이나 결정에 따르는 것은 개별회원의 자율에 달려있다. 마치 광장의 토론이나 깃발모임에서 무엇으로 결정되든 실천에 옮기는 것은 여전히 개인의 자율이란 점에서 카페는 위계적 집행부와는 친화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 점에서 위계적이 아닌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집행부이어야만 한다.
나아가 혼자서 판단하고 실천하는 습성이 있고 실천의 동기가 자기설득(확신)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대안으로 성원의 다수의 공감이 없는 한 어떠한 동원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떠한 결정과 실천도 위임받은 집행부만의 결정이 아닌 성원들이 직접 참여한 합리적인 토론의 과정이 성패의 핵심일 것이다.”(발표글 13)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개인 즉 ‘구속감 없는’ 개인들이 모인 “카페는 위계적 집행부와는 친화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 점에서 위계적이 아닌 개방적이고 수평적” 조직이어야만 하는 카페는, 낮은 단계의 작은 실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한계를 가지고 있다. 강경파와 온건파, 열성파와 관망파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섬세한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차이에 대한 존중보다 독선과 배척이 묵인되면 구속감 없는 개인들은 침묵하거나 탈퇴해 버린다. 차이가 있더라도 공존하고 함께하려는 노력보다는 차이를 확인하고 헤어져 버린다. 독선과 배척은 특히 개방적인 공동체에서는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한다.
네티즌에 기반한 촛불카페의 특성은 다른 동호회와 마찬가지로 ‘소속감은 있으나 구속감은 없는’ 공동체라는 점이다. 이것은 단결의 기풍을 중시하는 ‘처지의 공동체’인 대중조직과는 다른 점이다. 촛불카페는 의지의 공동체이다. 정치조직은 의지와 사상의 공동체이고 처지의 동일성에 기반한 대중을 전제로 하는 조직이다. 그러므로 정치조직은 단결의 기풍과 공동체의 이상이 존중된다. 결국 촛불카페는 소속감 자체가 없는 개인과, ‘소속감과 구속감이 주어지는’ 대중조직과의 사이에 있는 중간적 존재이고, 양극분해의 힘이 항시적으로 작용한다. 2008년 겨울 투쟁의 전망이 없고 힘들었을 때에, 구속감 없는 공동체인 촛불카페는 동력의 대부분을 상실하였다.39) 대중조직인 노동조합이 어용화되고 타락하더라도 끈질기게 생존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구속감 없는 공동체에서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온존될 위험이 있다. 그들은 카페에 참여하더라도 ‘공동체에 용해되지 않은 개인’으로 남아 있고, 모든 발상이 개인주의적이다. 항쟁의 열기가 식었을 때 자기 이념을 낳지 못한 운동 속에서, 인터넷상의 표현과 칭찬의 문화 즉 소외된 문화가 촛불카페에까지 연장되어 정서의 공동체가 된다든지, 혹은 완장주의(소영웅주의), 배척, 독선, 상처주기, 끌어내리기40) 등등의 병폐가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전거 동호회 같은 카페야 애초부터 도덕을 운운할 이유가 없지만, 정의나 신념을 기반으로 하는 촛불카페에서 운동의 고양기가 아닌 쇠퇴기에 의지보다 정서가 강해질 경우, 도덕의 담지자를 자임하면서 의지의 공동체가 아닌 정서의 공동체가 된다든지 사적 이익에 기반한 타락한 운동이 될 위험이 있다. 이미 기왕의 여러 촛불카페들과는 다르게 ‘촛불’이라는 이름을 앞에 붙여 사적 이익이나 완장에 대한 욕구를 정의로 포장한 이러저러한 새로운 촛불운동체가 만들어지고 있고, 또 만들어질 것이다. 마치 80년대에 통일운동과 민족운동을 피터지게 했던 사람들이, 세월이 지나 한때의 추억만을 공유하면서 초기의 신념을 잃은 채 정서의 공동체가 된 후에도, 도덕과 정의의 포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패거리 짓이나 하는 타락한 정서의 공동체가 될 위험이 있는 것과 같다.41)
똑같이 촛불을 들었다면 함께해야 할 동지이고 투쟁의 현장에서 만나면 그저 반가운 동지이어야 하지만, 같은 카페의 회원임에도 자기와 조금만 의견이 달라도 매도나 야유나 경멸을 서슴지 않거나, 사적 감정이나 증오 때문에 공유할 만한 가치도 없는 하찮은 일을 빌미삼거나 지어내어 모략과 중상질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 역시 ‘공동체에 용해되지 않은 구속감 없는 개인’의 흔적이다. 이런 것들은 ‘타락한 정서의 공동체’에서는 피하기 어렵다. 아무리 꼴보기 싫어도 같은 촛불이니까 함께해야 한다는 단결의 훈련이 전혀 없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공동체에 용해되지 않는 구속감 없는 개인’은 단결의 덕목이 강조되는 대중조직의 기풍 속에서 단련될 필요가 있다.

탈모던

인터넷 공간에서의 소속감 없는 개인들의 자발성과 자생성 즉 네티즌들의 비조직적 자발성은 사회운동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위키디피아나 네이버 지식iN은 네티즌들의 자발성을 성공적으로 조직한 예이다. 한토마(한계레신문의 토론방)나 다른 공간이 아닌 ‘다음 아고라’가 촛불 네티즌들의 공간이 된 것은 그만큼 네티즌의 감성에 부응하여 합리적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촛불항쟁 때 네티즌들의 탈모던한 특성 혹은 감수성이 많이 회자되었다. 탈모던(post-modern)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2차 대전 이후 성립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포디즘(fordism)적 축적체제가 끝나고, 70년대 이후 성립한 포스트 포디즘(post-fordism)적 생산체제와 관련이 있다. 새로운 생산체제가 가져온 변화는, 절대적 빈곤이 상대적으로 극복된 측면과 산업 노동보다는 서비스 노동의 확산, 자본의 축적위기와 관련하여 강요된 노동의 분절화42)와 위계화, 그리고 대가족의 해체와 시민권이나 민주주의의 확장으로 인한 개인과 개성의 존중, 발달한 소비문화와 인터넷 문화 등이 어울려 대중의 생활양식과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촛불은 과거의 아날로그적으로 단절된 무기력한 개인들이 여론과 정보를 독점했던 구래의 통치자들에 대하여, 21세기의 쌍방향 인터넷 소통 웹2.0이란 공간을 통해서 이러한 지식과 정보의 독점을 무너뜨리고, 집단적이고 자발적으로 학습을 시작하고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집단지성과 자유로운 의지의 발로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임. 즉 넷상에서의 자유로운 참여는 억제되지 않은 실천욕구가 그 배경이기도 하다는 점이고, 나아가 선전과 교육과 조직이 아날로그적 현장만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능률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 있음.”(발표글 8)

탈모던의 대표적 특징 중의 하나인 ‘웹 2.0’이라고 표현되는 문화의 특징은 ‘쌍방향성’이다. 즉 포디즘적 사회에서 보이는 획일화된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다양하고 능동적인 행위자의 측면을 갖는다.43) 이것은 현대인 혹은 청소년이나 젊은 세대들이 구세대와 비교하여 개성을 표현하고 드러냄에 익숙한 특징과 관련이 있다. 한편 현대인의 삶은 궁핍과는 관련이 없는 듯하지만,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국가와 자본의 민중의 삶에 대한 공격은 현대인의 존재와 미래를 위협하고 불확실하게 만들어 생존경쟁을 강요하고, 끊임없이 강요되는 삶과 소비의 상품화는 현대인의 삶을 파편화하고 분절화하면서 소외를 강요한다. 현대인은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소외를 강요당하는 존재이다.44) 삶이 끊임없이 위협당하고 소외당하는 분절화되고 파편화된 개인이 현대인이다. 현대의 문화 혹은 탈모던한 문화의 배경은 이런 것이다.
현대인의 이러한 특성에 주목했을 때, 위키피디아나 네이버 지식iN, 트위터 등의 성공을 이해할 수 있다. 위키피디아는 소속감 없는 개인들의 가벼운 참여가 축적되어 소중한 집단적인 결실을 맺는다. 네이버 지식iN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이것이 촛불항쟁에서 보여진 네티즌들의 자발성을 이해하는 고리가 된다. 그것은 탈권위적이고 개방적인 공간에서의 ‘작은 실천’이 타인이나 공동체나 전체에 유의미한 기여가 된다는 희열감이다. 그 작은 실천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으로 상품화가 강요하는 소외에 대한 대응이다.45) 네티즌들의 자발성이란 현대인에게 강요되는 소외에 대응하는 자기실현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결국 소속감 없고 구속감 없는 개인들이 공동체에 참여하고 기여하는 작은 실천이다. 촛불카페 역시 그 연장에서 구속감 없는 개인들의 작은 의지와 실천이 모인 것이다. 촛불항쟁 혹은 촛불운동 그 자체가 소외된 대중인 네티즌들이 탈권위적이고 개방된 공간에서 고무된 작은 실천들의 연장이고 발전이었다. 운동은 현대 대중의 이러한 특질을 이해하고 존중함으로써 대중의 자발성과 만날 수 있고 조직할 수가 있다. 그 고리는 ‘탈권위주의와 개방성에 기반한 작은 실천의 고무’이다. 쌍방향이라는 것도 탈권위주의와 개방성이 자극하는 능동적 행위(자발성)의 다른 표현이다. 이처럼 네티즌들의 자발성이라고 표현된 ‘진지하지 않은 가볍고 작은 실천’을 모아내는 것은 탈권위주의적 개방성이지만, 그 실천이 소속감과 구속감이 없는 개인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과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단결의 기풍이 중시될 필요가 있다는 점은 앞서 얘기한 바와 같다. 또한 ‘진지하지 않은 가볍고 작은 실천’을 모아내고 보다 높은 강한 실천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운동의 몫이다. 그러므로 탈권위적이고 개방적인 결국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저항체의 건설은 끊임없이 시도될 필요가 있다.46)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촛불항쟁 속에서 특이한 점은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적 정서가 처음부터 존재하였고, 강하게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일제와 같은 식민지 지배를 당하는 나라에서는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주의가 당연히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근대국가의 형성에 기여했다. 하지만 근대 세계사를 보면 국가주의, 애국주의, 민족주의는 수구보수나 극우들의 전유물이었다. 히틀러가 독일 노동자들에게 아무 죄없는 프랑스 노동자들과 유태인들에게 총을 겨누게 만든 것이 바로 독일 민족주의인 나치즘이다. 수백만 명에 이르는 죄없는 이라크 민중을 학살하고 있는 ‘더러운 석유전쟁’도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애국주의를 강요한다. 자기 집 강아지는 끔찍하게 사랑하면서도 같은 인간인 이주노동자들에게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끊임없이 선동하는 유럽 극우들의 사상적 기반도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이다. 히틀러가 유치한 1932년 베를린 올림픽이나 전두환이 유치한 88년 서울 올림픽 혹은 2002년 월드컵과 같은 행사는 애국주의를 고무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전 국민이 하나의 국민으로 단결하기에는 너무나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총 취업자의 1/3 혹은 총 급여 생활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으로 월 평균 123만원의 급여로 동물적 삶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40대의 가장이 월 100여만 원의 수입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47) 수십만 명의 젊은이들이 사회생활의 첫출발부터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 시급 4,000-5,000원의 편의점이나 피시방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현실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세는커녕 월세방도 구할 수 없어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미루는 것이나, 경제적 불안 때문에 아이를 낳아 키울 엄두를 못 내어 출산율이 세계 최저(186개국 중 184위)인 나라가 바로 이 나라이다. 또한 100만 명이 넘는 젊은 여성들이 오직 돈을 위해서 유흥업소에서 일해야 하는 곳도 이 나라이고, 삶에 절망하여 자살률이 가장 높은 곳도 이 나라이다.
이 땅의 민중들이 겪고 있는 고통들 중에는 민족적 모순이나 분단의 현실에서 기인한 것도 있겠지만, 전체 국민의 절대 다수가 겪고 있는 이 고통들은 민족이라는 틀로는 파악이 안 된다는 것이다. 출산기피나 청년실업 혹은 구조조정이나 비정규직 문제가 어떻게 민족이나 애국의 틀로서 파악될 수 있겠는가? 촛불이 제기하였던 의료민영화나 전기 수도 등 공공재의 사유화의 이유를 어떻게 친일파 민족반역자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사회경제적 처지에 기반한 계급적 문제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엇박자 속에는 환호하는 국민만 있고, 동시대의 비참한 비정규직의 고통은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항상 이명박이나 이건희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들은 소수 특권층만의 이익을 항상 국익이라고 강변한다. 환율조작으로 서민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수출대기업을 밀어주는 것도 국익이고, 미친 소를 수입하는 것도 국익이고, 한미 FTA나 한EU FTA를 추진하여 가혹한 경쟁 속에서 민중들의 삶을 유린하는 것도 국익이다.
촛불이 스스로의 정당성을 애국주의나 민족주의에서만 찾는다면, 절대 다수의 민중이 겪고 있는 시대의 아픔과 고통에 눈을 감는 배부른 슬로건이 될 수밖에 없다. 삶이 괴로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찾아야 하고 자기 처지의 부당함을 얘기해야만 한다. 그것은 민중이고, 노동자계급이고, 도시하층민이고, 청년백수이고, 실업자이고, 철거민이고, 0교시와 야자를 강요당하는 청소년이고, 무상교육은커녕 수백만 원의 등록금을 수탈당하는 대학생이다. 민중이 민중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이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몫을 찾아야만 이 사회는 정의로울 수 있다.
그럼에도 촛불항쟁 때에 조중동에 세뇌된 일부 사람들이 운동권이나 노동자들이 깃발을 들면 안 된다고 하거나, 비정규직이 왜 촛불에 빌붙느냐고 얘기한 것은 결코 정의롭지 못한 것이었다. 결코 평등하지 않은 이 현실에 눈을 감고, 모두가 애국적 국민이나 민족이나 시민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것은 조중동과 수구세력의 밥이 되는 수밖에 없다.
촛불항쟁의 초기에 애국주의나 민족주의가 항쟁의 전투성을 고양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사회의 진정한 정의를 위해선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그것은 이 사회의 야만적인 부당함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계급적 정의이다.48)
신자유주의에 유린당하는 민중들이 스스로의 정당성을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처지인 노동자계급이나 민중에서 찾지 못하고 민족주의나 애국주의에서 찾으려 했던 것은, 운동의 헤게모니가 관철되지 않은 상황 하에서 80년대에 활동하였던 386세대의 영향이기도 하고, 수구세력들이 세뇌시킨 친미반공주의의 영향이기도 하다. 촛불은 이명박의 독도망언에는 분노하였지만, 막상 미친 소라는 독극물을 강요하는 장본인인 미국에 대해서는 어떠한 항의도 조직하지 않았다. 기존의 민족주의적인 통일근본주의자들이 미국대사관 앞에서 반미집회 한번 조직하지 않은 것도 의아한 일이지만, 그것은 항쟁의 확산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촛불들이 당면한 저항에서 반미가 아닌 반일에 집착한 것은 그만큼 수구세력들에 의해 왜곡된 민족주의 때문이기도 하다. 반미와 반공은 아직도 성역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수구세력들의 최대의 무기이자 헤게모니를 관철하고 있는 반미와 반공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촛불을 비롯한 모든 진보적 운동은 빨갱이로 매도당하면서 움츠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청년실업이나 구조조정과 같은 일자리에 대한 공격은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의 숙명이다. 이러한 공격에 대하여 대학생들이 영어 학원을 다니면서 스펙을 쌓는 것은 개인적인 해결이다. 청년유니온을 결성하여 사회적인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집단적인 노력이다. 1,000명이 다니는 회사에서 200명이 구조조정 대상이라고 할 때, 개인적인 노력으로 그 200명에 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개인주의이고, 1,000명의 전체 노동자가 단결하여 희생을 막아내려고 하는 것은 집단주의 혹은 공동체주의49)이다. 어떤 교차로에서 B가 아닌 A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우연이다. 그러나 그 교차로가 평소에 사고가 많은 곳이었다면 A의 사고는 필연이다. 이처럼 필연은 우연 속에서 관철되는 것이다. 2008년에 시작된 세계적인 경제위기에서 하필 A라는 노동자가 해고를 당하는 것은 우연이지만, A를 포함한 수많은 노동자가 구조조정을 당한 것은 필연이다. 타이타닉이 보유한 보트의 빈자리는 승객의 절반밖에 못 태우듯, 대학생들이 아무리 개인적으로 노력하여도 그 절반이 실업자가 되는 것은 필연이다. 개인주의란 혼자 살자는 것이고, 공동체주의나 집단주의는 함께 살자는 것이다. 개인을 먼저 생각하는 것과 집단이나 전체를 먼저 생각하는 차이이다. 소속감 없는 개인과 구속감 없는 개인은 공동체주의나 집단주의 훈련이 필요하다. 사회의 전체 구성원의 문제에 대한 대중의 직접행동은 이처럼 구속감 없는 개인이나 개인주의의 극복을 요구하는 것이다. 일터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저항의 공동체를 대중조직으로 건설하는 것은 시대의 과제이다.

지성론 고찰

촛불항쟁의 초기 조직되어 있지 않은 시민들이 아고라를 통해 지혜를 나누면서 훌륭한 투쟁을 전개했을 때 누구나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떤 이는 다중지성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대중지성 혹은 집단지성이라고 얘기했다. 촛불항쟁 속에서 발휘된 지성은 어떤 유의 지성이고, 어떤 조건에서 발휘되는 지성일까? 지식(knowledge)과 지혜(wisdom)와 지성(intelligence)은 다르다. 지식과 지혜가 어우러진 것이 지성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대중의 자기학습능력이었다. 그 맹렬한 학습욕은 인터넷을 통한 지식습득에 익숙한 대중들이 이명박으로부터 부정당하는 자기 정당성을 위해 혹은 정당성의 우위에 서기 위한 욕구였다. 러시아 혁명 때 병사들이 정보에 목말라하고 온갖 정치신문을 통해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려는 데 열성적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식의 전달과 선전 선동에 앞서 대중의 습득욕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학습욕구는 언제 생기는가? 그것은 적대적인 상대와 대립하고 투쟁하고 있을 때이다. 무릇 사회적 투쟁이란 명분의 싸움이고 정당성을 다투는 싸움이다. 무력이 앞선 권력에 저항하는 힘은 정당성의 무장에서 나온다.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가 2003년부터 광우병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50) 하지만 대중의 정당성을 이명박이 부정하자 대중은 순식간에 전문적 지식으로 무장했다.
또랑에든소의 ‘사망설’이나 천안함 사태도 대중의 학습욕구를 자극한 사례이다. 가치있는 지식과 정보는 전문가들이나 지식인들이 생산하지만, 그것이 정당성으로 대결하는 대중과 만났을 때 대중의 자기학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파업이 최상의 정치학교이고, 투쟁이 가장 훌륭한 교육자라는 교훈은 촛불항쟁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의 습득과는 다른, ‘실천을 위한 판단을 동반하는’ 지성의 영역이 있었다. 이 지성은 다양한 사람들이 지혜와 경험과 지식을 나누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지성이 얻어지는 조건은 탈권위적인 개방성과 투쟁에서 이기기 위한 하나된 마음과 열정 즉 구심력이 작용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구심력은 수렴되지 않았다. 즉 대중의 토론은 있었지만 그것을 정리하는 사회자 혹은 중심은 없었다. 그럼에도 무수한 의견과 주장들이 걸러질 수 있었던 것은 추천에 기반한 ‘베스트’ 기능과 댓글 기능이었다.
따라서 서로 모순되는 즉 양립할 수 없는 정반대의 의견이 동시에 찬성만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51) 합리적인 의견은 존중 받았지만 감성을 건드리는 의견은 배척당했다. 이명박을 편드는 의견이 ‘알밥’으로 찍히는 것은 당연했지만 노무현을 비판하는 글도 많은 배척을 받았다. 어떤 때는 소중하고 훌륭한 의견이었지만 반응을 못 얻는 경우도 있었다. 6월 10일에는 인권단체를 프락치로 규정짓고 끌어내리자고 선동한 글들이 베스트를 도배하기도 했다.
아고라는 로고스(이성)만이 지배하는 공간이 아니라 파토스(감성)가 지배하는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럼에도 지성이 관철된 것은 고양기라는 특수한 열정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운동의 쇠퇴기에 관심과 열의가 떨어지는 것이나,52) 감성이 지배할 때에 이성이 억압당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추천받고 공감받은 글 혹은 지성이 관철된 글들은 누가 생산한 것일까? 의견은 분석/판단과 제안으로 나뉘어진다. 단지 감성에 일치한다고 지성이 아니라, 사태의 본질을 바르게 분석하고 바람직한 실천방향을 제시한 사람은 자각하든 자각하지 않았든 간에 이미 유기적 지식인이다. 평범한 사람도 의견을 낼 수 있고 베스트에 갈 수도 있다. 그러나 꼼꼼히 보면 지식과 경험과 지혜가 어우러진 의견들은 대부분 지식인들의 글이 많았다. 단지 숙제를 칭찬해 달라거나 혹은 투쟁속보나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글이 아니라 작성자의 지성에 의해 다듬어진 그리고 대중의 감성과 일치하고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그런 의견이었다. 그 지식인은 탈권위적 지식인이고 대중의 일부이다. 즉 대중이자 지식인이다. 이것이 대중과 지식인의 통일이다. 따라서 “지식인이 무지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대중이 지성의 불을 뿜으며 다중이 주인공으로 되고”(조정환, 2009: 88) 있다면서, 지식인과 대중을 기계적으로 대립시키고 은연 중에 반지성적인 입장을 취하는 ‘다중지성론’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지성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먼저 천재의 지성이 있고, 이에 대립하는 대중지성 혹은 집단지성이 있다. 한 사람의 천재보다 보통사람 여러 명의 지혜가 더 낫다는 얘기다. 이것은 한 사람의 투자예측 전문가보다 여러 사람의 비전문가의 예측이 더 정확했다는 제임스 서로위키의 실험에서도 확인되었다.(장호종a, 2009)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개방형 소스 프로그램은 리눅스 컴퓨터 운영체제이다. 하지만 최근에 일어난 3만 8천 건의 개선 중 3만 7천 건이 겨우 1백 명의 프로그래머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모두 운영체제 개선을 위해 기업에 고용된 사람들이었다.”(추나라, 2009)

한편으론 ‘복잡계’ 이론에 따른 ‘떼지성’이 있다. 네그리는 ‘떼지성’이라는 글의 처음을 “분산된 네트워크는 떼(swarm)를 이루어 자신의 적을 공격한다.”고 시작한다. 이어서 “ … 열대지방의 흰개미들이 서로 소통하면서 장대하고 정교한 반구형의 구조물을 어떻게 세우는지 생각해 보라”며 ‘중앙 통제 없는 떼지성’을 찬양한다.(네그리?하트, 2008: 127) 충분한 수의 개체는 일정한 시간을 거쳐 질적으로 훨씬 높은 수준의 행동을 하곤 하는데, 이는 복잡계 이론으로 체계화되었고 곤충이나 박테리아 등의 실험에서 증명되곤 했다. 그런데 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따왔어도 연봉 1,000여만 원의 비정규직을 감수해야 하는 수많은 머리 좋은 시간강사들은 왜 떼지성을 발휘하여 자신들의 처지개선을 위한 훌륭한 투쟁을 만들어내지 못할까? 그것은 인간사회에는 이러한 자생적인 떼지성의 발휘를 억제하는 수많은 사회적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연예인들을 자살로 몰아넣는 악플러들도 전형적인 떼지성이고, 6월 10일 명박산성 앞에서 난장판을 벌였던 사람들도 떼지성이다. 중앙통제 없는 떼(swarm)가 때로는 지성을 발휘할 수 있겠지만, 때로는 터무니없는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자율주의자인 네그리가 떼지성(다중지성)을 찬양하는 이유는, 다중은 단결하지 않아도 지성을 이룰 수 있다는 반동적인 선동을 하기 위한 것이다.

다양한 전문가들이 함께 힘을 합했을 때 가장 이상적인 지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인류의 경험이고 상식이다. 어리석은 사람 천명과 다양한 전문가 천명이 경쟁하면 누가 더 낫겠는가? 이때의 지성은 탈권위적이고 개방적인 환경 속에서 수렴되는 집단지성이다. 보통의 연구소에서 하나의 과제를 여러 명의 전문가들이 함께 해결하는 것도 집단지성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연구원들에게 자율성을 제공하여 얻는 지성은 네그리가 우기듯 다중이 만들어내는 지성이 아니라 전문가들의 집단지성이다.
2008년 촛불항쟁의 초기 아고라에서 발휘된 지성은 이명박이라는 적대적 존재에 대한 즉 이기고자 하는 한 방향의 열망 속에서 발휘된 지성이다. 이 지성은 다중의 지성이기도 하고, 대중의 지성이기도 하고, 집단지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지식과 경험과 지혜가 한 방향으로 모였기 때문이지, 단지 중앙의 통제가 없다는 조건 즉 탈권위적인 조건만으로 생산된 것이 아니다. 아고라에 올라온 훌륭한 의견은 ‘유기적 지식인’이 생산한 것이다.53)
용산범대위는 인권단체와 종교계를 비롯하여 문화예술계, 여러 정당과 정치조직 그리고 대중조직들이 결합한 것이다. 만약 네그리나 조정환이 말하듯 다중지성이나 떼지성이 그토록 위대하다면, 자발적인 시민들에게 투쟁을 맡기고 용산범대위는 만들 필요가 없다. 결국 뭉치지 않아서 위대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자발성이 의식성과 어떻게 조화롭게 통일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자발성과 의식성

촛불항쟁에 있어서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는 촛불이 보여준 자발성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이다. 또한 자발성과 의식성의 통일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항쟁의 초기 시민과 네티즌들의 자발성은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탄복을 자아냈던 ‘중심 없는 투쟁’은 또한 승리를 잉태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공권력의 체계적인 공격에 맞서 슬기로운 저항과 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중심이 있어야 한다.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54)는 보다 나은 연주를 위해서 비록 무능한 땜빵일지라도 지휘자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문제는 중심과 대중과의 관계 즉 의식성과 자발성과의 관계이다. 촛불항쟁은 깃발회의를 창조하였고 그 속에서 신뢰를 얻은 전대협이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탈권위적 헌신체’로서 중심으로 태어났다. 전대협, 안티엠비, 민처협, 전청련, 민주노총, 노동전선, 노동자의힘, 사노련 등등 이 모든 수많은 깃발은 그 자체가 자발성이고 동시에 의식성이다. 자발성과 의식성은 이렇게 통일되어 있다. 의식성이란 자발성의 다른 모습이다. 이기고자 하는 열망이 자발성과 단결을 가져온다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열망으로 어떻게 하면 이길 것인가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바로 의식성이고, 의식성이 최대로 발전한 것이 정치조직이나 당(party)이다. 이러한 정치조직은 (목적)의식성으로 대중 속에서 자신들의 유능함과 헌신성과 도덕적 고결함으로 대중의 신뢰를 획득해야만 한다. 그 의식성은 대중의 신뢰에 기반한 군림하지 않는 의식성이다. 수많은 깃발 중에서 가장 유능하고 헌신적인 깃발이 신뢰를 획득하는 것이다. 의식성과 자발성은 이렇게 만나는 것이고, 만나야 한다.55)
또한 의식성은 모든 자발성을 수렴하고 통제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기도 하다. 예비군이나 전대협이 모이자고 선동하는 것이나, 소울드레서나 마이클럽이 광고를 내는 것이나, 아줌마들이 공항에 쫓아가서 이명박의 귀국을 막는 것이나, 누군가가 광고주 불매운동을 선동하는 것이나, 회칼 테러가 일어나자 조계사에 달려오는 자발성이란, 명령과 지시에 의한 것도 아니고 토론과 회의를 통해 수렴된 것이 아니다. 의식성이란 자발성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과 자발성이 향하는 방향을 제시하면서 점진적으로 다양한 깃발들과 함께 낮은 수준부터 높은 수준까지 단결과 연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힘을 모으는 것이다. 의식성의 관철(지도)이란 자발성을 고양하고 수렴하려는 노력이지 자발성의 통제가 아닌 것이다.

사이버 공간과 아고라?헤게모니의 장

촛불항쟁에서 아고라는 단순한 인터넷 공간이 아니라, 이명박과 ‘알밥’들을 제압한 촛불들이 장악한 공간이었다. 촛불들은 그 공간에서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고, 지성을 만들어 내고, 투쟁과 실천을 선동했다. 안토니오 그람시를 들먹거릴 필요도 없이 그곳은 촛불들이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한 공간이었다. 또한 그 공간은 소외된 대중의 다른 이름인 민중과 서민들의 정서만이 아니라,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노무현 지지자들이 힘을 얻은 공간이기도 하였다. 그곳은 이성만이 아니라 감성이 지배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현실 대중들의 정서가 수렴되는 곳이기도 했다. 온갖 신문매체와 방송만이 아니라 아고라와 인터넷 공간 역시 여론을 만들어 내는 곳이고, 대중의 자발성과 자기학습능력을 고무하는 장이기도 하다. 그곳은 사회의 온갖 세력들이 각축하는 헤게모니의 장인 것이다.
운동은 결국 헤게모니의 다툼이다. 무장력의 다툼이 아니라 정당성의 다툼이다. 사회의 어떠한 세력이든지 자기주장의 정당성이 보편성을 획득했을 때에만, 즉 자신의 주장이 모두의 정의로 받아들여져야만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56) 이런 점에서 시대의 담론과 전선을 대중들의 고통과 절실히 만날 수 있는 진보 대 반진보의 축으로 이동시키는 투쟁은 절박한 것이다.
촛불정국에서 보면 노무현 지지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 외에 정청래 전 의원과, 민주노동당과 이정희 의원, 화물연대 등이 자주 글을 올렸다. 유기적 지식인들은 바로 이곳에서 대중의 언어와 대중의 정서로 대중과 소통하면서 대중의 신뢰와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1)_ “사회로부터 나왔지만 사회보다 상부에 위치하며 사회로부터 그 자신을 소외시키는 권력이 바로 국가인 것이다”(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

2)_ 이 표현은 선동을 위해 과장된 것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분노로 발전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의 싹’을 포함하고 있었다”가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3)_ “멕시코는 미국의 농업식품산업의 쓰레기통이 되었다. ⋯ 멕시코에 들어오는 음식은 미국시장에서의 소비가 거절당했거나 인구의 최하층을 겨냥한 가격대의 것이다. 이러한 예 중의 하나가 암을 유발하는 곰팡이를 만드는 aspertosina와 함께 팔리는 옥수수이다.aspertosina가함유된 옥수수는 미국에서는 동물 소비용으로 팔리는 것이고,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오직 공업용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 이와 똑같은 제품이 값싸게 팔리는 멕시코로 수출되고 대중들은 너무나 가난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런 종류의 값싼 음식을 소비한다. quelbuleterol이 함유된 고기, 항생제가 과도하게 들어있는 닭고기, 우유 대체물 혹은 식물성 유장으로 만들어진 성장호르몬이 들어있는 우유도 똑같다. 거기에서 우리는 쓰레기, 찌꺼기, 유해한 화학성분들을 먹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발표글 2).

4)_ 사회적 필요를 위한 자본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적절한 이윤을 낼 수 있는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자본을 ‘상대적 과잉자본’이라고 한다.

5)_ 신자유주의를 축적위기에 몰린 현단계 자본의 축적전략으로 보지 못하고, ‘국가의 개입’과 대비되는 ‘시장의 자유’를 추구하는 정책 정도로 규정짓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인식이다. 국가는 끊임없이 자본을 위해 개입하고 봉사해 왔다.

6)_ 이런 악법을 다 지키자는 얘기는 투쟁을 하지 말자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도로교통법을 존중하면 가투는 있을 수 없다. 존법주의자들은 결코 비타협적 투쟁을 할 수 없는 것이다.

7)_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모두의 국가(보편성)라는 ‘형식’과, 실제로는 그들만의 이익(특수성)이 관철되는 ‘내용’ 간의 모순은, 수많은 ‘현상’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관철되는 ‘본질’의 문제와 짝을 이루고 있다. 보편과 특수, 내용과 형식, 본질과 현상, 우연과 필연 등은 (변증법) 철학의 중요한 범주(category)들이다.

8)_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진출할 때는 모두 촛불을 버리고 갔다. 하지만 분위기가 살벌하고 비폭력과 평화가 강요될 때는 촛불을 드는 경우도 있었다. 촛불을 숭고한 평화의 상징이라고 예찬하는 것은 자기최면에 불과한 것이다. 촛불을 절대화하고 미화하는 ‘촛불 물신론(=예찬론)’을 극복하지 않으면 대중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

9)_ 네그리와 조정환은 이런 투쟁을 ‘비대칭적인 투쟁’(조정환, 2009: 134) 혹은 ‘삐딱한 투쟁’이라고 찬미하고 있다. “근대에서의 대항은 종종 직접적인 그리고/또는 변증법적인 힘의 대립을 의미했던 반면, 탈근대에서의 대항은 애매하거나 삐딱한 자세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당연하다”(네그리․하트, 2001: 284). 노예근성에 사로잡힌 네그리의 이 말은, 쌍차 노동자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싸우는 힘의 대립보다는, 도장공장 옥상에 올라가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면서 경찰을 조롱하는 삐딱한 투쟁이 가장 효과적인 것이 당연하다는 얘기와 같다. ‘삐딱한 투쟁’에 대하여는 필자가 김광석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앞의 글을 참고하라.

10)_ 나영, 참세상 인터뷰기사, 08.06.16

11)_ 촛불집회의 첫날인 5월 2일부터 조중동 반대가 외쳐진 것은, 노무현 시절 조중동과의 갈등을 승계한 노사모(안티엠비의 핵심은 노사모로 알려져 있다)의 영향과, 민처협 등의 친일언론에 대한 반감의 공유가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촛불시민들이 다른 의제들보다 공영방송사 경영진의 임면권을 둘러싼 대립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이례적인 것으로 별도의 설명을 요구한다.

12)_ 현대인의 감수성에 대해서는 이 장의 뒤에 나오는 ‘소외된 대중으로서의 네티즌’ 참조.

13)_ 안티엠비가 이명박의 독도망언을 보도한 요미우리 신문과의 소송에 크게 집착한 것은, 항쟁의 본질과 관련이 있는 서민이나 민중적 감수성보다는 ‘감상적 악마화’로 후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항쟁의 패배가 거의 확실해졌을 때에 이러한 사안이 이명박에게 치명적 약점과 반격의 재료로 될 수 있다는 희망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의 퇴진을 주장하는 촛불의 정당성은 넘치고 있었다. 분노의 재료가 넘침에도 새로운 분노의 재료를 갈구하는 것은 이길 수 없는 적에 대한 증오의 단계이다. 또한 이런 소송투쟁은 대리주의를 극복하려는 대중의 직접행동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가령 4대강 공사의 가처분소송을 법원에 냈을 때 그 결정권은 투쟁하는 대중이 아니라 대리적 기구인 법원에 넘어가 버리기 때문에, 결정권을 되찾으려는 대중의 직접행동과는 결을 달리하는 실천이 된다. 촛불항쟁은 미친 소에 대한 결정권을 이명박으로부터 빼앗아오려는 것이었음을 생각해 보라.

14)_ 진알시나 지역 촛불들이 전시한 판넬 내용은 주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친일행적, 4대강, 의료민영화가 주를 이루었고, 공공재의 사유화와 용산학살이 주제로 결합되는 날도 있었다.

15)_ 미친 교육과 관련하여 촛불시민과의 결합이 크게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가 촛불의 감수성 때문인지, 아니면 전교조 등 교육운동 주체들의 열의 부족이나 미숙함 때문인지, 혹은 운동의 위축기 때문이었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언론 관련 카페나 노무현을 지지하는 카페(아름다운 동행)는 만들어졌지만, 미친 교육을 반대하는 모임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미친 교육 반대에 가장 앞장서서 투쟁하고 있는 단체는 ‘평등교육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http://parents.jinbo.net)가 있고, ‘미친 일자리’ 반대에는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http://workright.jinbo.net)가 가장 앞장서고 있지만, 아직 시민들의 참여가 부족하다.

16)_ 대단히 유의미했던 이 운동은, 자발성을 묶어내려는 의식성의 노력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성과의 축적을 위해서는 보다 세련된 방법론과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17)_ 당시에 전두환의 반쪽짜리 양보에 대하여 수용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결국 대통령의 선출방식만 바뀌었을 뿐 사회 전반의 민주화는 관철되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외롭게 싸워야 했다. 이는 핵심 슬로건이 왜소했기 때문이다. 촛불항쟁 역시 6대 현안을 전면에 내걸지 않은 채 단지 재협상과 명박퇴진만 부각시켰을 때 명박퇴진은 이루지 못하고 재협상만 수용될 가능성이 컸다. 비타협적인 최대요구를 구체화하여 내걸지 않고 최소요구만으로 싸울 경우 언제든지 기만적인 양보로 투쟁이 끝나버릴 위험이 있는 것이다. 촛불항쟁이 최소요구(재협상)도 관철하지 못한 것은 대책회의가 고의적으로 슬로건을 협소하게 고착시켰기 때문이다.

18)_ 한미 FTA에 대한 문제점은 ‘발표글 2’를 참조하라. 한국경제의 문제점은 개방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개방이 너무 많이 되어서 문제이다. 세계에서 개방이 가장 많이 된 나라가 한국이다.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가 맺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은 상호 수출액은 증가시켰지만, 새로 생겨나는 나쁜 일자리보다 2배가 넘는 좋은 일자리를 없애 버렸다. 일반적으로 FTA나 세계화는 관련국의 독점자본에게는 새로운 시장과 투자/투기의 기회를 주지만, 내수산업과 일자리와 복지에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다. 반도체와 자동차의 수출이 아무리 늘어도 청년백수와 불법파견 노동자만 늘어나는 것과 같다. 한미 FTA가 미친 소와 스크린 쿼터와 자동차 시장의 개방 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은, 소수의 독점자본의 이익을 위해 자국 민중의 삶과 복지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결국 세계화란 각국 독점자본들의 천국을 위해 전 세계 민중들의 삶을 유린하는 철면피한 공격이다.

19)_ “진짜 우리가 주권국가의 국민으로서 열받는 것은 투자자제소조항이지요. 미쿡기업이 한국에 투자했다가 손해보면 제3의 법정에 한국정부를 제소해서 손해배상을 해줘야 되는 조항인데요, 벡텔이 볼리비아에 투자했다가 공해 땜에 사업을 못하게 되자 볼리비아 정부를 제소해서 5억불(5,000억원)을 뜯어가고, 캐나다 정부는 에틸사에게 패소해서 환경법안 철회하고 1,300만불 물어주고, 메틸클라드사는 독성폐기물을 못 묻게 한다고 소송해서 1,670만달러 뜯어가고, 등등등 주권국가가 자국민을 위한 정책을 폈다가 개박살난 사례는 수없이 많지요”(발표글 2).

20)_ 오늘날 노동조합이나 운동의 중추에 남아있는 40-50대의 386 세대들은 촛불시민들보다 훨씬 더 치열한 투쟁을 해온 사람들이다. 빈손으로 약한 수준의 몸싸움조차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촛불시민들과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들고 싸웠던 운동권 사람들과의 경험의 차이나 문화적 차이는 무척 크다. 일부에게서 보여지듯 촛불만이 순수하고 정의를 대표한다는 자만심이나 자부심은 독선과 배척의 뿌리로서 운동의 발전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할 것이다.

21)_ 이 희열은 카치아피카스가 말하는 ‘해방의 에로스’와 비슷한 감정일 것이다(카치아피카스, 2009).

22)_ 10대들이 20대보다 앞장선 이유에 대하여 10대들의 부모세대인 386 세대의 영향일 것이라는 추론은, 우리 사회에서 40대 후반과 50대 초반의 386 세대가 부동산 투기정책의 혜택을 보는 등 박탈당하고 있는 30대에 비교하여 보다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중산층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별로 설득력이 없다. 특히 다음 장에서 소개되는 김철규와 이해진의 연구를 보면 10대 참가자들의 상당수가 가정형편을 ‘중류 이하’로 대답한 점을 보아도 ‘격세 영향론’은 문제가 있다. 그리고 ‘88만원 세대’라고 얘기되듯 현실 속에서 10대와 20대 그리고 40대와 50대는 살아온 처지와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가지 세대적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대간 차이를 절대화하여 기성세대와 88만원 세대의 대립으로 보는 ‘세대론’은 청년실업을 강요할 수밖에 없는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과 투쟁을 방해할 위험이 있다. 청년실업을 포함한 각종 비정규직 등 일자리의 문제는 결코 세대의 문제로 보아서는 안된다.

23)_ 2008.12 그리스에서는 경찰이 고등학생을 죽인 사건이 알려지자, 고등학생들이 폭동에 가까운 투쟁을 벌였다.

24)_ 시민과 노동자는 민중의 정체성 속에서 통일성(하나됨)을 획득한다.-이 책의 ‘보론:다중 물신론’에 있는 ‘동일성과 통일성 그리고 공통성’ 부분을 참조하라.

25)_ 이 문제는 주체형성의 측면에서 비노동자적인 정체성을 가진 시민과 기층운동이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공격이 단순히 생산의 현장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것을 유린하고 있는 현실에서 새로운 시민적 대중운동의 과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노동운동만의 차원이 아니라 반자본과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대중과 함께 전면적으로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과 의무를 제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새로운 시민운동은 기존의 시민사회운동처럼 “시민을 단지 후원회원과 관객으로 소외시키면서, 시민 없는 시민운동 혹은 상근자나 전문가 집단의 대리주의적” 운동이 아니라 ‘대중의 직접행동’을 기본으로 하는 ‘시민적 대중운동’이어야 할 것이다(박석삼b, 2010).

26)_ 최근 우리나라의 인터넷 사용자의 비중은 30대는 100%, 40대는 87%라고 보도되었다. 네티즌이란 단순히 정보취득이나 게임이나 하는 인터넷 사용자가 아니라 인터넷을 통한 타인과의 교류가 삶의 일부인 사람들을 말한다.

27)_ 여기서는 아고라나 트위터 등 인터넷 공간의 도구적 측면이나 문화나 헤게모니의 각축장으로서의 공간의 측면이 아닌, 인터넷상의 교류에 대응하는 소외된 대중의 문화적 감수성의 한 특질을 살펴볼 것이다. 촛불항쟁 때의 아고라나 최근의 트위터 공간의 도구적 특성을 절대시하면서 무슨 새로운 민주주의가 저절로 이루어질 것처럼 예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 공간의 도구적 유용함은 하나의 조건일 뿐이고, 민주주의란 주체인 대중의 직접적 실천과 투쟁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인터넷상의 폭로와 비판과 저주가 그렇게 힘이 있다면 이명박은 벌써 집으로 갔어야 하지 않겠는가?

28)_ 한국의 공립초등학교의 교사처럼, 영국에서는 대부분의 의사들이 영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료서비스(NHS) 부문에 고용되어 있다. 즉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등의 교육이 상품이 아닌 것처럼, 영국에서는 (최근에 공격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의료가 상품이 아니다. 세금체납자일지라도 서울시내의 도로나 근린공원을 무료로 이용한다. 하지만 민자 도로나 삼성의 에버랜드는 돈을 내야 한다. 즉 상품으로 소비한다. 세콤 등 각종 경비업도 상품이다. 치안이 상품화된 것이다. 자본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상품화한다. 교육, 의료, 보육 등 공적인 것의 시장화/사유화나 물 전기 등 공공재의 사유화의 본질은 이런 것이다. 탈상품화와 탈시장화는 반자본 투쟁의 중요한 요소이다. 이런 측면에서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보육, 무상주택과 같은 탈시장화나 탈상품화의 방향이 아니라, 누구나 같은 액수의 소득을 화폐로 나누어 복지를 상품으로 소비하자는 ‘무조건적 보장소득론=기본소득론’은 참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박석삼a, 2010).

29)_ 네티즌의 특성 중 ‘수다’에 주목하면서 소통능력을 강조하는 학자들이 많은데, 이런 주장은 과도하다고 할 수 있다. 아고라를 보면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감정적으로 배척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과연 이런 유의 소통이 탈권위를 특성으로 하는 진정한 의미의 소통인지 의문이다. 촛불항쟁 때부터 시대적 화두가 소통이 되었지만, 이명박이 미친 소를 고집하는 것은 내외의 독점자본의 이해 때문이지, 그의 독선이나 소통 능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1년 이상 계속된 파병반대나 FTA 반대투쟁 때 보여준 노무현의 독선도 만만치 않았다. 임기 말에 각 부처의 홍보실을 없앤 것은 노무현이었다. 이명박은 이명박대로, 노무현은 노무현대로 소통했지만 한국사회에서 자기와 다른 주장의 인정과 존중이라는 본래적 의미의 소통을 보여준 세력은 없다. 한편 운동권의 근엄하거나 진지한 토론문화와 네티즌들의 ‘수다문화’를 대비시키는 관점이 있다. 그러나 운동단체의 자유게시판이나 토론게시판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거나 자기들만의 고답적인 논쟁만 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반성과 극복방향은 이러한 대비로 파악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운동권의 인터넷이라는 도구나 공간에 대한 적응 능력과 대중의 존재양태에 대한 현실감각과 개방과 공유를 위한 감수성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30)_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호네트는 현대인의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중요한 테제로 삼고 있다. 이 욕구는 ‘무시’에 대하여 반발한다(문성훈, 2009: 276). 현대의 개인들이나 집단 특히 정서적 집단이 조금만 무시를 당하거나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을 때, 발끈하거나 심한 감정적인 반발을 보이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런 경향이 강할 때에는 비판과 반성이 불가능하게 된다.

31)_ 유치원생들이 인정과 호감을 이끌어내고자 자기를 표현하고 선생님과 주위 아동들이 칭찬으로 반응하는 것이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에 절은 속물들이 많이 모인 곳 예를 들어 S교회와 같은 곳일수록 사랑을 들먹이며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도 전형적인 표현의 문화다. 하지만 그 사랑에는 깊이가 없기 때문에, 미움의 수준도 천박하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존재란 그들이 주고받는 언사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실현하는 사랑과 미움의 깊이로 판단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서로 호감을 표시하고 확인해야만 하는 것 자체가 현대인들의 삶이 그만큼 경쟁적이고 적대적인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32)_ “<한겨레>의 매거진 ‘ESC’에서 소설가 이기호씨가 트위터의 속성을 지적한 내용이 마음에 와 닿는다. 트위터는 “우리를 속물로 만들어주면서, 또 한편 속물이라는 사실을 잘 감추어주는 매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의 말대로 남의 평가에 연연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속물근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초보 트위터 이용자의 고백이다.” 김도형, <[편집국에서] 나의 트위터 도전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27220. html

“자신이 속물임을 감추지 마세요. 남의 평가에 연연하고 남을 의식하는 병이 있어요.” 이기호, <[매거진 esc] 이기호의 독고다이 상담실>,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 esc_section/425941.html.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과 평가에 대한 연연함 때문에 속물적인 느낌을 받는다는 것은, 트위터 혹은 현대문화의 본질이 욕구와 감상의 억제와는 반대인 표현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33)_ ‘칭찬해 주세요’라는 문화적 감수성은 ‘왼 손이 한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말씀과는 정반대의 문화다. 그리고 ‘왼 뺨을 맞으면 오른 뺨을 내밀어라’는 성경말씀은 원래 불교에서 유래된 것인데, 불교에서는 “모든 진리는 나를 부정하는데서 시작한다”(諸法無我 제법무아)에서 보는 것처럼 자존심이나 감정이 표현의 대상이 아니라 억제와 부정의 대상이다. 또한 논어에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愠 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란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 품성과 감정을 억제하는 품성을 말하는 것이고, 명심보감에서 “군자들의 사귐은 담담하기가 물과 같고, 소인들의 사귐은 달콤하기가 감주와 같다(君子之交 淡如水 군자지교 담여수, 小人之交 甘若醴 소인지교 감약례)”는 것 또한 담담하지 않고 속물적인 호감이나 주고받는 달콤한 인간관계를 낮게 평가한다. 결국 이러한 문화는 현대의 ‘표현과 칭찬의 문화’와는 정반대의 문화다.

34)_ 월드컵 응원전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됨의 기쁨은 주지만, 정의에 참여하고 있다는 자기 헌신(희생)이 주는 기쁨과는 다르다.

35)_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는 우리들 인간과 인류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들 인간은 서로 의지하고 힘을 합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도, 개인의 이익이 공동체와 대립하는 것으로 사고한다든지, 공동체 속에서는 개성이 억압될 수밖에 없다는 반인간적이고 악의적인 요설들이 많이 있다. “개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제조건이 되는 사회”(맑스, <<공산주의자 선언>>)라고 할 때에는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와 통일이 있다. 맑스가 밝힌 이 이상은 인류의 꿈이기도 하고,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실현방도를 찾아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공동체에 용해된 개인’이란 서로 존중하고 힘을 합하는 공동체와 조화를 이룬 개인을 말한다. 그 개인은 단결할 줄 모르는 개인주의자나 자기만 앞세우는 이기주의자와는 다르다.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것과 개인이나 개성을 존중하고 포용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36)_ 조중동 광고주 전화걸기 운동이 검찰의 조그마한 위협에도 위축되어 버린 것은 그 좋은 예이다. 의지의 결집 없는 개인들은 권력의 폭압을 넘어설 수 없다.

37)_ 여기서 ‘다중’이란 그냥 다양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38)_ ‘즉자’와 ‘대자’란 원래 헤겔 변증법의 개념이지만, 여기서 ‘즉자적’이란 1차적이고 감각적이며 주관적인 인식이고, ‘대자적’이란 목적과 대상에 대한 분명하고 이성적인 인식을 말한다.

39)_ 시간이 지날수록 40대 이상보다는 구속감이 부족한 젊은 세대들의 이탈이 두드러진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40)_ 가끔 촛불 속에서 보여졌던 상처주기와 끌어내리기와 같은 행동의 본질은, 정의의 탈을 쓰고 진행되는 ‘공동체에 용해되지 않은 구속감없는 개인들’의 사적 증오의 실현이다. 그들은 증오를 생산하고 분배하고 전염시켜 주변 사람들을 수치스런 행위에 동참하게 만든다.

41)_ 개독교가 아무리 사랑을 얘기하고 신도들끼리 아무리 서로를 아껴주고 존중해도 그 사랑이 천박한 것은, 공동체에 용해되지 않은 개인(이기주의나 개인주의에 기반한 속물적 개인)에 기반한 정서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중세의 마녀사냥이나 십자군 전쟁 그리고 ‘우리가 남이가?’ 혹은 ‘끼리끼리 문화’의 본질도 이런 것이다.

42)_ 노동의 분절화란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비정규직과 정규직, 이주노동, 미숙련, 반숙련 노동과 전문직 노동 등 노동자계급 내에서도 다양한 계층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43)_ 집회문화의 쌍방향성에 대한 고민은 이 책 ‘제2부 촛불 속에서-쌍방향 집회’를 참조하라.

44)_ 이처럼 소외(alienation)는 현대인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고리가 된다. 사회주의란, 단지 착취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운동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자연과 사회와 맺는 모든 관계’가 강요하는 ‘소외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운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자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소외에 대하여는 맑스의 <<1844년 경제학․철학 초고>>를 참조하라.

45)_ 이처럼 네티즌들이 위키디피아나 네이버 지식iN에 참여하는 행위의 본질은, 상품화가 강요하는 소외에 대한 대응으로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작은 실천임에도, 일부 기본소득론자들 중에는 ‘공통으로 생산한 부’ 운운하며 대가를 지불하게 해야 한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용난민 시대, 일자리 없나요?]기술발전 성과 ‘그림자 노동’에도 대가 지불해야>, 경향신문, 10.10.16). 위키피디아나 네이버는 네티즌들의 작은 실천이 무상임을 전제로 투자된 자본이다. 이들의 이윤은 무상의 노동을 착취하여 생산한 성과물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부수적 효과(방문객 수나 노출효과)를 상품화하여 판매한 뒤 그의 투자비용(촛불항쟁 때 아고라가 위기에 처하자 대체할 사이트와 서버를 새로 준비하는 데 최소 2억 원 이상이 들 것으로 추산되었다)과 관리비용을 제외하고 얻어진 것으로, 다른 자본의 운동과 하등 다를 바가 없고, 이들 자본의 이윤에 대하여는 이미 과세가 되고 있다. 따라서 다른 자본과는 다르게 이들 자본에 대해서만 네티즌들의 성과물에 투여된 노동에 대한 대가를 추가로 지불하게 하자는 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던 기본 전제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본의 특별 이윤은 중과세나 누진과세의 대상이겠지만, ‘그림자 노동’에 대가를 운운하며 새로운 과세원천인 양 주장하는 것은 대중을 현혹하는 것이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서로 나누는 인간다운 사회와 탈상품화의 원칙에도 반한다. ‘공통으로 생산하는 부’의 허구성에 대해서는 이 책의 ‘보론’을 참조하라.

46)_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저항의 공동체’는 이 책의 제2부 ‘촛불 속에서’를 참조하라.

47)_ 국영방송인 KBS는 PD와 전문기사만 빼고 나머지 촬영보조나 기사는 모두 비정규직이다. 심지어 방송차량의 기사들이 단결하지 못하도록 6개의 파견회사에서 공급받는다. 차량 기사들은 출장과 야근과 철야 수당을 모두 합하여도 월 100여만 원밖에 못 받는다. 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따와도 시간강사는 연봉 1,500만원이 안 된다. 이것은 노동자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사회적 제도의 문제이고, 따라서 계급적 문제이다.

48)_ 계급이란 사회경제적 처지를 일컫는 말이다. 흔히 계급이나 계급투쟁이라고 하면 어마어마한것 같지만, KTX 여승무원이나 쌍차 노동자들의 투쟁만이 계급투쟁이 아니라, 촛불들이 제기한 의료민영화 반대나 전기 수도 등 공공재의 사유화 반대야말로 ‘사회경제적 처지에 기반한 (즉 계급적 정의에 기반한) 투쟁’이라는 본래적 의미의 계급투쟁이다. 모든 정치적 투쟁은 당사자들이 의식하든 않든 간에 계급투쟁인 것이다. 2010.10 프랑스에서는 고등학생들이 “우리는 계급투쟁을 하고 있다”면서, 연금개악안 반대투쟁에 앞장섰다. 이 점에서 수구꼴통들의 친미반공 이데올로기가 극심한 나라에서 언어의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은 투쟁의 출발이기도 하다. “그리고 저항의 출발은 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놈들의 협박에 위축되어 스스로 정당하고 당당한 언어를 자기검열하는 것이야 말로 촛불인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 스스로의 정당함을 확신하고 나아가기 위하여 당당하고 정당한 우리의 언어를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사파티스타의 부사령관인 마르코스가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무기(Our word is our weapon.)’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저항과 투쟁이란 두려움을 극복하고 우리의 언어를 당당하게 되찾는 과정인 것입니다”(발표글 7).

49)_ 보통 집단주의라고 하는데 공동체주의가 더 좋은 표현일 때가 있다.

50)_ 2007.2 노무현은 살코기의 혈액에도 광우병 위험이 있음에도, 이를 안전하다면서 30개월 미만의 쇠고기 수입을 강행했다. 이때 촛불항쟁에서 유명세를 탄 박상표(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는 07.2.21 “도대체 국민의 생명과 안전과 직결된 광우병과 무엇을 바꿀 수 있을지 궁금하다”면서, 송민순 장관, 김현종 본부장, 김종훈 대표, 김무성 의원에게, <미국산 쇠고기가 그렇게 먹고 싶습니까?>라는 공개편지를 보낸 바 있고, 07.2.23 “한미 FTA 협상 체결의 걸림돌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뼈 조각이나 갈비, 그리고 내장까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전면 개방할 경우, 캐나다와 같은 광우병 발생국가로부터 쇠고기 수입을 금지할 명분이 없어지게 된다.”고 비판했다. 광우병 논쟁과 미친 소 반대운동은 이때부터 공개적으로 시작되었다.-박상표의 참세상 기고문 참조.

51)_ 새하얀밤, ‘[베스트]방금 청계천 민노총분 !!!!!깃발 조끼 안됩니다!!!!!’ 08.05.28. 조회 8,008,찬성 1,179, 반대 44.

헌법제1조, ‘◐ 민노총이 복장을 착용하고 깃발을 들으면 안됩니다(수정). ◑’, 조회 4,271,찬성 475, 반대 41.

초령, ‘민노총의 촛불집회 합류 반대하는 분들께’ 08.05.28. 조회 2,449, 찬성 265, 반대 0.

52)_ 작금의 아고라에서 이명박에 대한 고발과 저주가 주를 이루면서도, 지성이 관철된 실천을 위한 제안이 나오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53)_ “이준웅 등의 연구결과를 보면 주목을 많이 받고 찬성 의견을 이끌어 낸 사람들을 ‘온라인 의견지도자’로 분류했는데, 이들이 전체의 11%, 주목을 많이 받지는 못했지만 찬성의견을 많이 이끌어 낸 ‘조용한 설득자’는 4%, 관심은 많이 끌었지만 찬성 의견을 많이 얻지 못한 ‘관심 유발자’는 7%인데, 이들은 주목이나 찬성을 많이 얻지 못한 78%에 해당하는 ‘온라인 일반토론공중’보다, 나이도 많고 학력도 높고, 신문 읽는 시간도 훨씬 길었다. …활짝 열린 기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토론공간은 주로 교육수준이 높은 중년 남성의 전유물이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존의 집단이나 계층이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한다”(이준웅 외, 2007; 장호종, 2009a에서 재인용).

54)_ 원래 들뢰즈가 고안한 이 말은 단결할 줄 모르는 자율주의자들이 즐겨 쓰는 뻔뻔한 농담이다.

55)_ 이런 측면에서 의식성과 자발성이라는 두 대립물의 변증법적인 통일을 보지 못하고, 자율주의자들처럼 의식성 그 자체가 자발성임에도 의식성을 자발성과 대립하는 것으로만 사고하고 의식성을 배척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대중을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게 하여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존재가 되게 한다’는 주체사상은 의식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중은 내버려둬도 자주적이고 창조적’이라는 자율주의보다는 수준이 높지만, 여전히 자발성과 의식성이 대립하고 있다(대중을 지도대상으로만 보는 것을 엘리트주의라 한다). 그리고 그 대중이 구체적인 역사와 사회로부터 규정되지 않은 존재라는 점과, ‘수령론’을 내세워 대중을 수동적 객체로 만드는 점이 맑스주의와도 다르다. 주체사상에서 수령은 기독교의 자애로운 신과 같은 존재이다. “신은 인간의 모든 덕성을 양도받아 스스로를 소외시킨 존재”이다(신을 훌륭하다고 찬양할수록 인간은 신 앞에서 왜소해진다. 신을 찬양하는 묘사는 실은 인간들이 훌륭하다고 느끼는 덕성의 표현이다-엥겔스, <<포이에르 바하>> 등). 즉 아무리 자애로워도 살아있는 수령은 대중을 소외시키는 것이다. 3대 세습만이 문제가 아니라, ‘수령’이나 ‘영도자’라는 개념 자체가 문제다.

56)_ “모든 새로운 계급은 그들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반드시 그들의 이해를 사회의 모든 성원의 공동이해로서 제시할 필요가 있는 바, 그들의 사상들에 보편적인 형태를 부여하고 이것들을 유일하게 이성적이며 보편타당한 사상들로서 제시할 필요가 있다”(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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