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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 1-9 제1장 항쟁의 전개과정 pp15-44

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 1-9 제1장 항쟁의 전개과정 pp15-44

 

제1장 항쟁의 전개과정

 


들어가며

2008년 6월 10일 전국적으로 백만 명이 모였다. 이날 시민들은 도심을 거대한 촛불의 바다로 만들면서 청와대를 향해 끝없이 걸었다. 커다란 도로를 메우고 끝도 안 보이는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걸으면서 이번에는 세상이 바뀌기를 바랐고,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 시민들은 곳곳에서 차벽에 막혀 광화문으로 돌아와 ‘명박산성’1) 앞에서 밤을 새며 토론했다. 그리고 날이 샐 무렵 컨테이너 위에 올라간 깃발은 감동적이었지만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날을 기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7월 5일 다시 50만 명이 모였다. 6월 10일 100만 명이 모였지만 이명박에게 감동을 준 ‘아침이슬’을 부른 것 외에는 아무 성과도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승리를 위한 기획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대중은 항쟁의 첫날부터 ‘명박퇴진’을 외치고 있는데도, 항쟁의 마지막 날까지 ‘고시철회’와 ‘협상무효’의 구호만 강요하던 ‘대책회의’2)는 경찰의 폭력을 부르는 행동을 하지 말고 생활 속으로 돌아가 미친 소 불매운동이나 하자면서 대중의 열망을 배반하고, ‘비폭력 축제론’을 들먹이며 철야 음악감상회를 강요했다. 대책회의가 꼬리를 사린 다음, 남은 촛불들은 외롭게 싸워야만 했다. 촛불시민들은 폭력진압과 연행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웠지만, 8월 15일을 마지막으로 공권력에 밀려 도심에서의 항쟁은 막을 내렸다.

대규모 투쟁이 막을 내린 2008년 8월 15일까지가 항쟁기라면, 그 후 ‘용산 학살’3)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지역 촛불로의 전화가 두드러지고, 주말마다 게릴라 가두투쟁이 전개되었던 투쟁력의 정비와 저항의 시기였다. 전국적으로 최대 8,000명 정도가 지역 촛불로 결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었고, 가투에는 200-300명 정도가 결합하였다. 겨울에 접어들자 가투도 끝났고, 주 1회의 촛불집회도 유지할 수 없는 곳이 많이 생겼다. 그리고 2009년 1월 용산투쟁이 시작되었을 때, 초기 동력 2,000-3,000명의 대오 중 민주노총을 제외한 시민들은 1,000명 정도로 추산되었고, 노무현 서거 때까지 대략 300명 정도가 전문 시위꾼으로서 특히 지하철로 이동하는 가투의 큰 동력이 되었다. 촛불이 시작된 지 2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촛불을 끄지 않은 사람들이 수백 명은 될 것이다. 그들은 아마 이명박정권이 끝날 때까지 촛불을 끄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2008년 5월 초부터 8월 15일까지 100일간의 항쟁 속에서 싸워온 촛불들이 어떤 열망을 품고 있었고, 어떻게 싸웠는지, 왜 이길 수 없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자세하고 지루한 서술이겠지만 ‘청와대’와 ‘광화문’을 외치며 끝없이 걸었던 촛불들, 물대포와 소화기의 분사에도 굴하지 않고 밧줄을 당기며 그날 그곳에 있었던 촛불들에게는, 그 순간 하나하나가 소중했고 그때 그곳에서 가졌던 그 마음과 서로에 대한 사랑이 소중할 것이기 때문에, 작은 움직임이라도 가급적 빠짐없이 기록하려고 한다.
촛불을 처음 든 5월 2일부터 공권력의 탄압에 밀려버린 8월 15일까지의 기간을 어떻게 구분하고 특징지울 것인가는 적아 간의 대립의 양상이 주된 기준이겠지만, 여기에 항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대책회의를 고려해야만 한다. 촛불과 이명박 그리고 대책회의의 길항과 대응이 시기를 구분하는 주요 요소이다.
제1기(5월 2일~6월 10일)는 촛불의 확산과 성장의 시기이다. 제2기(6월 11일~6월 29일)는 소강을 거친 후 탄압에 맞선 대치기이며, 제3기(6월 30일~8월 15일)는 종교계의 개입에 의한 휴식기와, 대책회의의 기만적인 ‘촛불승리선언’ 이후 고립되었던 투쟁파의 공권력에 의한 패퇴기이다.

촛불 전야

이명박은 당선된 후 ‘고소영’, ‘강부자’ 내각과 부자 감세 및 ‘어륀쥐’ 교육(영어 몰입식 교육) 등4)으로 서민들의 정서를 크게 자극했다. 대통령 취임 후 2008년 3월 하순에는 이명박의 각종 정책과 대운하에 대한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고등학생인 안단테는 ‘미친 소’ 수입이 발표되기 전인 4월 6일에 ‘대운하, 몰입식 교육, 보험 민영화, 고소영, 물가 정책, 쇠고기 고시’ 등을 들면서 탄핵서명운동을 시작했다.5)
4월 15일 0교시 수업과 우열반 허용 등 공교육 포기 조치가 발표되었고, 4월 18일 급기야 ‘미친 소’까지 퍼주자6) 사람들의 인내는 한계에 달했다. 인터넷 사이트 ‘다음 아고라’를 중심으로 정보와 비판과 불만을 공유하던 네티즌들은 들끓었고, 여학생들을 비롯한 청소년들이 자기 불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7)
촛불의 분노는 단지 미친 소만이 아니라, 미친 교육, 대운하, 의료민영화 등 이명박의 모든 정책에 대한 총체적인 불만이었다. 촛불은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머슴은 필요없고 탄핵(몰아내기)을 진심으로 바랬다.
4월 25일 탄핵서명이 5만 명을 돌파했다. ‘온라인 민란’이라고 할 만큼 네티즌들의 ‘민심이 폭발하고 있었다.’8) 인터넷카페 ‘안티엠비’9)는 28일부터 ‘미친 소 너나 처먹어라’는 대회명으로 5월 2일 청계 집회를 공지하기 시작했다.10) 4월 29일 MBC <PD수첩>의 광우병 방송이 있었고 서명자가 12만 명을 돌파했다. 미친 소 수입은 5월 1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네티즌들은 5월 2일 집회의 결집을 호소했다.11) 그리고 5월 2일 서명자가 60만 명을 넘어서고 청계광장에는 1만 5,000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였다. 5월 3일에도 2만 명이 모였다. 그중 60-70%가 청소년들이었다.12) 그들은 미친 소와 미친 교육에 대해 ‘나 아직 15년밖에 못 살았다’, ‘미친 소는 너나 즐쳐드셈!’이라면서 자신들의 감수성으로 불만을 쏟아냈다. 촛불집회는 이처럼 네티즌과 청소년들의 반란으로 시작되었다.

안티엠비는 4월 19일과 26일 주말 탄핵 집회를 공지했다.13) 하지만 4월 26일 집회 참가자는 200-300명에 불과하였다. 4월 15일 이명박의 공교육 포기 정책이 발표된 후, 19일에는 청소년 단체가, 그리고 26일에는 전교조가 주최하는 ‘공교육 살리기 촛불문화제’가 있었지만 참가자는 150명에 불과하였다.14)
미친 소, 미친 교육이란 불만이 팽배했지만, 그 불만을 폭발적으로 절실하게 공유하기 위해서는 MBC의 시청각 교육이 필요했고, 그 불만이 거리로 나오기 위해서는 시민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미친 소 너나 먹어!’라는 촌철살인의 피켓을 든 촛불여학생(촛불소녀)이 필요했다. 언론과 아고라는 그들의 촛불을 들불로 번지게 하였다. 그들 때문에 다른 십대들도 관심을 갖게 되고 아줌마들도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촛불여학생이 언론에 부각되지 않았다면 이후의 촛불집회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촛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촛불여학생이라는 바늘이 있기 전에 이미 대중의 불만을 담은 풍선은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고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었다.

제1기 촛불의 확산과 성장기

5월 2일~5월 23일: 항쟁의 시작-분노의 응축기
5월 2일 청계광장에서 열린 안티엠비의 탄핵 집회에는 15,000명의 청소년과 시민이 참석하였다.15) 그러나 안티엠비 측은 “문화제로 신고해 집회로 확대되면 내일 촛불문화제를 경찰이 불허할 것을 우려해서 강기갑 의원은 물론 참가자들의 구호와 발언, 선전물 게시 등을 제한했고, 여기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은 안티엠비의 방송차 뒤에서 따로 구호를 외쳤다. 시민들이 운집하자 ‘2MB 탄핵연대’ 측은 경찰과 협조해 촛불문화제 참가자들을 파이낸스센터 앞 광장으로 안내했다. 중앙무대가 사라지자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누어 집회를 했다.”(참세상 보도) 이날의 구호는 ‘이명박 너나 먹어 미친 소’, ‘이명박은(쥐박이는) 물러가라’, ‘이명박 탄핵’, ‘우열반 반대’, ‘민영화 반대’, ‘조중동은 쓰레기(찌라시)’, ‘동아일보 불 꺼라’ 등이었다.
5월 3일 오후 3시 인터넷카페 ‘정책반대시위연대’는 참가 인원 60명으로 신고된 작은 집회를 청계광장에서 진행했다. 그리고 이날 밤 문화제는 ‘미친소닷넷’이 주도했다.16) 경찰이 “미친소닷넷 회원 여러분! 이것은 불법집회이니 해산하라”는 경고방송을 간헐적으로 내보내자,17) “어제는 ‘이명박 탄핵’이나 ‘너나 먹어 미친 소’가 자연스러웠지만, 오늘은 처음에는 그런 분위기로 가다가 중간에 너무 많이 위축되어 오히려 맥이 빠진 듯한 느낌”18)을 준 집회였다.
5월 5일 경찰은 “구호와 피켓이 나오면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안티엠비는 이에 앞선 5월 4일,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법과 질서의 테두리 내에서 모든 시민들이 모여 주십시오.?무분별한 언동과 폭력적인 행위를 지양합니다. 우리의 울분을 이날은 침묵의 촛불로서 전 국민 전 세계에 알립니다.”라면서 구호와 피켓을 금지하는 ‘5월 6일 여의도 침묵 집회’를 공지했다.19) 5월 6일 여의도 집회는 13,000명이 모여 자유발언 형식으로 진행하였다. 한편 미친소닷넷이 주관한 청계 집회는 5,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강기갑 의원 등이 발언하는 통상적 집회로 진행되었다.20)
5월 6일 참여연대 등 1,513개 시민사회단체는 ‘협상 전면 무효, 책임자 처벌’을 내걸고,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가칭)’의 출범을 발표하고, 5월 8일 인터넷카페까지 포함한 1,700여 단체로 정식 출범하였다. 다음날인 5월 9일부터 이 단체는 촛불문화제를 주관하기 시작했고,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대책회의가 주관한 5월 9일과 10일의 촛불문화제에 대하여, “경찰의 눈치를 보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간간히 ‘미친 소 너나 먹어라’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시내 한복판에서 가두시위를 하며 소리 높여 ‘이명박은 물러나라!’라는 구호를 외칠 때라고 생각합니다. 청계광장에서 청와대까지 가두시위를 한 후, 청와대에서 이명박을 향해 ‘이명박은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입니다.”21)라는 의견들이 쏟아졌다. 5월 12일에는 대책회의와는 별도로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신고된 가두시위를 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22) 이날부터 아고라에서는 [탄핵]과 [퇴진]의 말머리를 달기 시작했다. 이제 대책회의와는 별도로 5월 13일 안티엠비는 ‘17일 여의도 가두시위’(신고된 집회와 가두행진)를 공지하였다.23)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어지자 급기야 5월 15일 정부는 수입 위생 조건의 장관고시를 연기했다. 고시는 1주일 후로 예정되었고 대중의 분노는 들끓었다. 긴박하고 강력한 행동이 요청되었다. 주말인 5월 17일 여의도에는 2,000명이 모였고,24) 청계광장에는 40,000명이 모였다. 장관고시가 확정된 후, 이명박은 5월 22일 “쇠고기 문제가 송구하다면서도, ‘광우병 괴담’을 운운하며, 한미 FTA 비준 동의를 호소”하는 대국민담화를 발표하였다. 이날 청계광장에는 20,000명의 시민이 모였다. 그러나 시민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지 못하는 대책회의가 주관하는 나약한 문화제에 대해, “광우병 노래자랑!! 제발?시위를 하라고 시위를 … 어째서 시민이?발언하고 있는데 빨리 끝내라고 보채는 것이며, 어째서 탄핵!을 외치는 분노한 농민들에게 경찰이 있다고 말하며, 노래를 틀어서 분위기를 끊어버리는 것이며, 어째서! 분노한 농민들의 발언을 중간에 끊어먹고 이상한 노래로 분위기를 다 망가뜨리는 것인가! 난 지금 문화제 진행자가 이명박의 아르바이트생이 아닌가 의심까지 든다.”25)와 같은 격한 글들이 쏟아졌다.26)
다음날인 5월 23일 대책회의는 급기야 “22일 촛불문화제에 대한 네티즌들의 비판을 겸허히 받으며, 어제의 교훈을 바탕으로 향후 촛불문화제가 국민들의 분노를 잘 담아낼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라는 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27)
이 기간 중 안티엠비가 주관한 여의도 집회에는 5월 17일 2,000명, 5월 21일 5,000명이 모여 집회를 한 후, 오후 6시부터 여의나루까지 가두행진을 하였다. 공식 구호(현수막과 피켓)는 ‘국민 기만, 서민 말살, 이명박을 탄핵하라!’였다. 이 집회와 행진들은 신고된 것이었다. 미친소닷넷과 정책반대시위연대는 5월 17일 200여 명이 명동에서 집회 후 시위를 하였다. 그리고 5월 23일에는 ‘아고라386’으로 불리는 가두투쟁파28)(단군후손, 권태로운창, 배성용 등)의 <결전의 날!! 토요일 여의도와 청계천에서 분노의 불길로>라는 격문도 올라왔다.29)

5월 24일~6월 10일: 항쟁의 상승기
            -광화문으로! 청와대로!(가두투쟁의 시기)
장관고시를 앞두고 긴장이 높아지는 가운데, 토요일인 5월 24일 전국교사대회(여의도)에 참가한 노동자 20,000명을 포함하여 50,000명의 시민들이 청계광장에 집결하였다. 한편 같은 날 오후 7시 광화문으로 집결을 공지한 아고라386팀은 300여명이 모였으나 경찰의 압박으로 청계광장으로 후퇴하였다가, 평소와 다름없는 문화제에 불만을 품고 ‘탄핵’ 구호와 ‘광화문’을 외쳤다. 사회자가 이에 맞서 노래를 더 크게 틀자 집회가 소란스러워졌다. 아고라386의 선동에 호응하여 5,000여명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광화문 쪽으로 행진하다가 스크럼을 짜고 경찰과 대치하였다.30) 청계집회가 끝날 무렵 “커다란 현수막 이어 펼치기가 끝난 후,?30대 분31)이 연단에 올라와 행진을 주장한 후, 급격히 광화문으로 이동”32)했다. 일부는 미대사관 뒷골목을 통해 청와대 쪽으로 진출을 시도하다가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고시 철회, 협상 무효’의 구호는 점차 ‘독재타도’로 바뀌어갔다.33) 대규모 가두진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5월 24일 토요일부터 시작된 시위가 일요일인 5월 25일까지 계속되자, 새벽 4시부터 광화문에서 물대포를 앞세운 강제 진압이 시작되었고, 37명이 연행되었다. “오전 8시 40분경 광화문에서 청계광장으로 이동해 집회를 계속했던 300여명의 밤샘 시위대는 오후 5시 30분경 1,500여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이 집회를 계속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시민들이 지지와 연대의 뜻을 보이기 위해 모여들었다. 밤샘 시위를 한 시민들과 새로 집회에 결합한 시민들이 뒤섞여 자유발언을 이어갔다.”(참세상 보도) 저녁 9시 30분 청계광장 집회가 끝나고 4,000여명의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명동 롯데백화점과 남대문, 서울역을 거쳐 서울경찰청으로 향했다.34) 시민들은 다시 광화문으로 합류했지만, 일부는 신촌으로 향했다가35) 자정이 넘어 32명의 연행자가 발생했다. 이처럼 고시가 임박해지자 매일 10,000명 이상이 집결하였고, 1,000명 이상의 시민들이 끝까지 해산하지 않고 밤을 새웠다.
5월 26일 밤 10시가 다 되어 청계광장의 집회가 끝날 무렵 정치조직인 ‘다함께’가 깃발을 앞세우고 행진을 선동했다. 이날 5,000여명의 시민들은 종로와 명동을 오가며 경찰과 대치했다.
5월 26일부터 28일까지 문화제가 끝난 후의 가두행진은 다함께가 선두에 섰는데, 명동이나 다른 곳을 돌다가 청계나 시청으로 돌아온 후에, 많은 시민들은 광화문과 종각에 합류하여 밤샘 대치와 연좌를 하다가 새벽녘에 연행되기를 반복했다. 대책회의의 문화제 위주에 불만을 품은 아고라386은 별도로 광화문 집결을 호소했지만 많은 수가 모이지는 않았다.
5월 27일에도 10,000명이 넘게 모였고, 밤 9시가 넘어 가두행진이 시작되었다. 명동에서 대치하다가 시청 쪽으로 돌아온 시민들은 자정이 넘자 고립되었고, 해산 명령과 미란다 원칙이 고지되자 50여명이 자진해서 경찰차에 올랐다. 이것이 ‘닭장차 투어’의 시작이다. 이날 113명이 연행되었다. 강제 진압과 연행이 계속되자 386세대들이 대거 참여하기 시작하고 ‘평화예비군’도 등장하였다.
이날부터 다함께의 ‘확성기녀’와 대책회의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대중은 ‘명박 탄핵’을 외치는데 확성기녀는 항의에도 불구하고 지긋지긋하게 ‘고시 철회’만 고집하면서 광화문과는 다른 방향으로 행진하다가, 상황에 맞지 않는 가두투쟁을 선동하고는 밤이 되면 사라진다는 등의 불만이었다.36) 대책회의에 대한 불만은 왜 청계광장을 고집하느냐는 것과, 왜 밤늦게 집회를 시작하고, 문화제만 고집하느냐는 것들이었다.37)
한편 다함께가 반자본 단체라고 폭로하는 글도 올라오고, 민주노총이 깃발을 들고 촛불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운동권이 합류하면 순수성이 의심받을 수 있고, 조중동에게 빌미를 준다는 내용도 있었다.38)
5월 28일 밤 9시 45분, 집회가 끝나고 행진을 시작하려 하자 경찰이 청계광장을 봉쇄했다. 11시가 다 되어 한 사람씩 빠져나온 시민들 중 300여명은 퇴계로를 거쳐 동대문 두타 앞으로 집결했다가 해산했다.39)
5월 29일 정부고시가 발표된 이날은 낮부터 ‘유모차’와 ‘아고라386’의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다. 이날 열린 “대책회의 긴급운영위에서는 앞으로 행진을 공식 일정으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김하영, 2009: 194) 경찰은 광화문은 물론 청계광장에서 시청까지 차벽을 쌓았고, 대책회의는 집회를 빨리 끝내고 촛불대행진을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날의 행진이 대책회의의 공식적인 첫 가두행진이었다. 밤 8시 30분, 서울광장에서 문화제를 끝내고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깃발을 들고 선두에 서서 명동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3만 명으로 시작한 대오가 종로4가를 거쳐 ‘광화문’을 외치면서 교보문고 앞에 도착했을 때는 5만 명으로 불어났다. 청와대로 가는 모든 길이 차벽으로 막히자 시민들은 주저앉아 자유발언과 노래를 이어갔다. 닭장차의 타이어 바람을 빼는 시민들도 있었다. 자정이 넘어 경고 방송이 나오고 대오가 줄어들자, 경찰은 새벽 2시부터 시민들을 인도로 밀어냈고, 3시경에 해산했다. 이날은 연행자가 6명이었다. 정부고시 발표가 있었던 이날부터 유모차부대와 의료팀, 시민악대가 선을 보였고, 시위대에는 김밥과 생수가 공급되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시작한 ‘미국산 쇠고기 고시 위헌확인 헌법소원을 위한 국민소송’도 엄청난 호응을 얻었고,40) 안티엠비의 회원은 16만 명을 돌파했다. 그야말로 민심이 폭발하고 있었다.
5월 30일 이날 오후 아고라386팀은 이대 앞에서, 전농은 청와대 앞에서 기습시위를 하였다. 서울광장에는 3만 명이 모였다. 대책회의는 “청와대까지 행진한 후 자정에 시청에서 다시 만나자”고 제안하고 밤 9시부터 행진에 나섰다. 시민들은 ‘독재타도, 명박퇴진’을 외치기도 하고, ‘불법주차 차 빼라’, ‘경찰서장 노래하면 집에 간다’, ‘어청수 동생은 성매매’ 등의 구호가 나오기도 하였다. 살수차를 가로막은 용기있는 여고생도 있었다. 명동과 광화문을 거쳐 세종로로 돌아온 대오는 새벽 2시까지 시청 앞 도로를 점거하고 집회를 계속하다가 청계광장으로 이동하여 밤을 새웠다. 
드디어 주말인 5월 31일 대책회의는 오후 5시쯤 대학로 앞 도로에서 10여 분간 약식 집회를 가진 뒤 행진을 시작했다. 2만여 명의 시민들이 손에 피켓을 들고 ‘고시 철회, 협상 무효’, ‘민주시민 함께해요’, ‘이명박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서울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대오가 4만 명으로 불어났고, 8시경에는 이미 10만 명을 넘어섰다. 8시 25분에 대학생들이 청운동에서 기습 시위를 하다가 80여명이 연행되자, 대책회의는 “청와대에서 만나자”면서 8시 40분 행진에 나섰다.41) 서울역 방향 행진 대열은 민주노총 노동자들이 선두에 섰고, 이들은 서대문 경찰청을 지나 독립문을 거쳐 사직공원으로 향했다. 또 다른 행진 대열은 대학생들이 맨 앞에 섰고, 을지로를 거쳐 청계천로와 종각4거리, 종로구청을 거쳐 사직공원 앞에서 대치했다. 시민들 일부는 정부종합청사 근처에서 대치했다. 밤 10시 40분 사직터널과 안국역 양방향에서 청와대를 향해 행진해온 시민들은 경찰의 봉쇄를 뚫고 경복궁 옆 삼청동길 입구에 도착했다. 자정을 넘어서도 4만 5천여 명의 시위대는 물대포에도 굴하지 않고 청와대를 양방향으로 압박하면서 청운경찰서 근처까지 진출했다. 경찰의 물대포에 “온수! 온수!”로 대응하면서 물러서지 않았고, 일부는 경찰차 위에 올라가 물대포에 맞서기도 했다. 광화문은 해방되었다. 경찰은 병력이 증원되자 새벽 4시 30분 효자동, 7시 30분 안국역 쪽에서 방패와 곤봉으로 강제진압을 시작했고, 총 228명이 연행되었다.
이날 새벽 여대생을 군홧발로 짓밟는 동영상은 시민들의 광범위한 분노를 자아내었다. 시위대는 일요일인 6월 1일에도 해산하지 않고 있다가, 오후 5시경 대학생들을 포함한 5천여 명이 다시 시위에 나서 경찰 저지선을 뚫고 경복궁역까지 진출했다. 8시경 집회를 마친 2만 명의 시민들은 또다시 청와대를 향하다가 세종로에서 차벽에 막혔다. 그리고 드디어 ‘밧줄’이 등장했다. 자정까지 3대의 전경차가 끌려나왔고 이날 78명이 연행되었다. 새벽까지 해산하지 않은 시민들은 횡단보도 왕복 시위를 계속했다. 6월 3일에도 2만 명이 모여 집회가 끝난 후 서대문과 남대문 방향으로 진출했다.
6월 5일부터 7일까지는 ‘72시간 릴레이 촛불집회’가 있었고, 시민들은 매일 청와대로 가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6월 6일 밤에는 새문안교회 골목에서 몸싸움을 벌이고 전경차를 끌어냈다.42) 매일 밤 세종로와 광장은 해방되었고 김밥과 생수가 충분히 공급되었다.43) 이제 시민들은 하나가 되었다. 물론 그 자리에 대책회의는 없었다. 시민들의 대책회의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다.44) 이에 대해 대책회의는 “섣불리 움직일 경우 시민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선두의 시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고 해명하였다.45)
그리고 6월 10일 드디어 유치원생부터 할머니까지 100만 명(서울 70만 명)의 시민들이 이명박 퇴진을 위해 모여들었다. 세종로에는 ‘명박산성’이 가로막고 있었다. 대책회의가 ‘100만 촛불문화제’ 말미에 “이명박은 이미 국민으로부터 심판받았다”고 말했지만, 수십만 명의 시민들은 도심을 거대한 촛불의 바다로 만들고 끝없이 청와대로 가고자 했다. 밤 9시를 조금 넘어 안국동과 서대문 방향으로 시작된 행진은 차벽과 컨테이너에 막히고 자정 무렵 광화문으로 되돌아왔다.
곳곳에서 컨테이너와 차벽에 막힌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 인권단체가 스티로폼을 준비했다. 산성을 넘자는 게 아니라 연단을 쌓는 퍼포먼스로 의지를 보여주자는 것이었지만, ‘비폭력’을 외치는 사람들은 연단 쌓기를 막으려 했고, 또 한편에서는 “왜 산성을 넘으려 하지 않느냐”고 거세게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고라에서는 스티로폼이 인화성 물질이라며 쌓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소리가 빗발쳤다. 인권단체의 여성 사회자는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새벽 1시가 되어서야 연단을 쌓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2시부터 자유발언과 토론이 계속되었다. 동이 틀 무렵 깃발만이 컨테이너 위에 올라갔다. 그것도 처음에는 태극기와 아고라 깃발만 허용하기로 했다가 모든 깃발이 올라갔다. 그리고 날이 밝았다.

제2기 소강과 대치기

6월 11일~6월 19일: 소강기
6월 11일 대책회의는 “20일까지 재협상을 하지 않을 시, 정권퇴진운동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쇠고기 교역 금지에 대한 민간 자율 합의가 실질적이고, 또 효과적으로 집행이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소비자들의 신뢰가 다시 회복되도록 하는 것이 방미의 목적”이라면서 재협상이 아니라 추가협상을 벌일 것임을 분명히 했다.
100만 명이 모였지만 이루어진 게 없었다. 시민들은 심한 피로감을 느꼈고 답답해했다. 집회 참여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KBS, MBC 등 공영방송의 위기 때문에 주중에는 여의도에 합류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6월 11일부터 시작된 ‘KBS 지키기 인간띠 잇기’는 첫날 30명, 다음 날에는 200명 정도가 모였다. 효순?미선 추모 6주기인 6월 13일, 화물연대가 파업을 시작하고 20,000여명이 서울광장에서 집회를 가진 후, 일부가 여의도로 이동하여 ‘공영방송 KBS 지키기 촛불집회’에 합류했다. 집회가 끝나고 500여명이 한나라당사 앞에서 구호를 외치다가 MBC로 향하기도 했다.
네티즌들은 대책회의의 시청 집회와는 별도로 6월 16일에 KBS에서 모이기도 하고(1,000여명), OECD 장관회의가 열리는 코엑스에서 촛불집회를 한 후 강남역에서 가두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6월 17일에도 코엑스 앞에서 촛불문화제가 열렸고, 안티엠비는 한나라당사 앞에서 집회를 가졌다.
6월 19일 이명박은 “식탁 안전에 대한 국민의 요구를 꼼꼼히 헤아리지 못한 점에 대해 뼈저린 반성을 한다면서도, 재협상은 불가하고, 국민이 반대하면 대운하는 추진하지 않겠다”는 기자회견을 한 뒤, 6월 21일 추가협상 결과를 발표했다.
6월 19일 밤 10시부터 ‘광우병 쇠고기 촛불운동,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대책회의가 주관한 ‘국민대토론회’가 열렸다. 대책회의는 토론회에 앞서 수렴한 제안들을 정리해 제시했다. 그 내용은 정권퇴진운동의 주장이 다수이지만 다른 의견도 많이 있다는 것이었다.46)

6월 20일~6월 29일: 탄압과 맞대결의 시기-본격 투쟁의 시작
6월 20일부터 ‘48시간 릴레이 행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책회의가 첫날 준비한 정권퇴진운동의 내용은 다양한 볼거리와 퍼포먼스뿐이었다. 대책회의가 서울광장에서 영화 상영을 하고 있는 동안, 시민들은 광화문에서 닭장차를 밧줄로 견인하면서 경찰과 대치하였다.
6월 21일에는 대책회의의 제안으로 ‘국민토성’을 쌓고 많은 시민과 깃발들이 올라갔다. 경찰이 모래를 실은 트럭 운전사의 열쇠를 압수하자, 시민들은 남영역 부근에서부터 모래를 자루에 담아 세종로로 옮겼다.47) 그리고 촛불집회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대책회의 방송차가 단순한 행진이 아닌 투쟁하는 시위대에 공개적으로 합류했다.48) 시민들은 새벽까지 경찰과 대치하면서49) 전경들이 타고 있던 닭장차를 끌어내고 환호하였고, 동틀 무렵엔 바닥에 비가 흥건한 광화문에서 대동놀이를 즐겼다. 이날 닭장차 3대가 끌려 나왔고, 그 중에는 10여명의 전경들이 탄 채로 끌려나온 경우도 있었다.

6월 19일의 특별담화 후 물러설 곳이 없었던 이명박은, 6월 25일 고시를 강행하면서 강경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시민들은 폭력진압과 연행에도 굴하지 않고 밟힐수록 강해졌다.
고시가 강행된 6월 25일, 대책회의는 오후 2시 청와대 인근 청운동 동사무소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오후 3시부터 경복궁역에서 200여명의 시민들과 함께 선전전을 벌였다. 대책회의 대표자들과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은 청와대로 가려다 입구에서 막히자, 경복궁역 부근에 다시 합류하여 항의 시위를 계속했다. 경찰은 오후 5시 갑자기 이정희 의원을 포함한 20여명을 연행했고, 이에 항의하며 호송차를 막는 시민 10여명을 또 연행했다. 시민 300여명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밤늦게까지 경복궁역을 고수했다. 시청에서 보수단체의 행사가 있어서, 대책회의는 오후 7시부터 대한문 앞에서 촛불집회를 열었다. 대책회의 상황실장은 “1박 2일 동안 이명박 정부를 심판하는 끝장투쟁을 제안한다”며, “집회를 최대한 간결하게 진행한 후 이명박 정부를 향한 분노를 담아 실천투쟁을 전개하자”고 말했다. 경복궁에서 또 연행을 하고 있다는 소식에, 7시 30분 2,000여 시민들은 집회를 끝내고 청와대 쪽으로 행진했으나 세종로에서 차벽에 막혔다. 시민들은 속속 세종로로 모여들었고 밤 9시쯤에는 15,000명으로 불어났다. 시민들 사이에서 토성을 쌓아 차벽을 넘자는 의견이 나와, 새문안교회 뒤 공사장으로 갔다가 경찰과 대치했다. 밤 11시경부터 세종로 사거리에서 밧줄 견인이 시작되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엄청난 소화기 분사에도 불구하고 새문안교회와 투섬플레이스 건물 앞에서 격렬하게 대치하며 전경차 4대를 끌어내었지만, 새벽 2시부터 물대포와 방패에 밀려 점차 시청 쪽으로 후퇴했다. 이날 100여명의 부상자(중상자 22명)와 139명의 연행자가 발생했다.
6월 26일, 관보 게재가 이루어진 이날 4만 명이 시청광장에 모였다. 저녁 7시 20분에 시작된 집회가 끝나자 시민들은 8시부터 ‘청와대로 가자’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지만 세종로에서 또 차벽에 막혔다. 밤 9시 30분 새문안교회 골목에서는 밧줄 견인과 소화기 분사가 시작되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역사박물관 뒤 공사판에서 모래를 담아, 세종로에 있는 차벽에 토성을 쌓았다. 11시 30분 시민들이 토성을 딛고 버스 위에 오르자 물대포가 시작되었다. 자정이 넘어 강경진압이 시작되자 시민들은 시청 쪽으로 밀리다가, 새벽 3시경 프레스센터 앞 차도를 점거하고 경찰과 대치했다. 분노한 시민들은 조선일보사 정문에 쓰레기를 쌓았다. 이날 안민석 의원이 심하게 폭행당했다.
6월 27일 시청광장의 천막이 강제로 철거되고 시청은 차벽으로 봉쇄됐다. 어청수 경찰청장은 “물대포에 최루액과 형광물질을 넣고, 체포 전담조를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10,000명이 참석한 청계광장 집회에서, 대책회의는 “이제 물러설 수 없는 우리의 투쟁”이라며, “내일부터 1박 2일 집중 투쟁, 7월 2일 민주노총 총파업, 7월 5일에는 전국에 백만이 모이는 촛불문화제를 열 예정”이라고 밝혔다. 저녁 8시 30분 청와대를 향해 출발한 행진은 한국언론재단 건물 앞 태평로에서 가로막혔다. 시민들은 해산 방송이 나오면 ‘닥쳐라’, ‘노래해’, ‘차비 줘’ 등의 구호로 응수했다. 이날은 새벽에 안민석 의원이 폭행당한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시위대의 앞에서 경찰과 대치했기 때문에 폭력진압은 없었다. 시민들은 새벽 5시까지 태평로에서 노래와 율동 그리고 토론을 하다가 해산했다.
6월 28일은 ‘반민주정권 심판의 날’로 정해졌다. 오후 2시 ‘기륭전자 투쟁 1,040일’을 맞아 노동자들이 시작한 8보 1배는 코리아나호텔 앞에서 막혀 종로구청 쪽으로 향했다. 붉은 스카프를 손에 두른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출신들은 청계광장에서 따로 모여 종로구청 쪽으로 합류했다가, 노동자들과 함께 500여명이 삼청동 길로 진출해서 대치했다. 대학로에서 결의대회를 마친 공무원노조 조합원 20,000여명을 포함한 시청에 모인 100,000여명의 시민들은, 밤 8시가 넘어 두 패로 나뉘어 세종로로 향했다. 종각 쪽에서는 밤 9시부터 물대포를 쏘기 시작했고, 전경차를 당기던 밧줄이 끊어져 부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프레스센터 쪽에서는 시민들이50) 소방호스를 당겨서 물대포와 대적했다. 까나리액젖을 쏘는 시민들도 있었다. 전경들은 버스에 접근하는 시민들에게 곤봉을 휘두르고 유리병과 돌멩이를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다. 자정이 넘자 곤봉과 방패를 휘두르며 해산 작전이 시작되었다. 경찰은 이날 유모차에까지 소화기를 난사하는 등 작심하고 폭력을 휘둘렀다. 태평로에 있던 시민들은 새벽 2시부터 진압에 밀려 종각 쪽으로 합류했다. 종로 쪽 광화문 우체국 앞에선 새벽까지 5,000여명의 시민들이 빗속에서 노래와 율동을 하다가 아침 7시에 자진 해산했다. 이날 59명이 연행됐고, 새벽에 ‘눕자행동단’의 이학영 YMCA 사무총장이 부상당했다.
6월 29일 경찰이 시청광장을 차벽으로 원천봉쇄하자, 오후 6시 30분부터 주변에 있던 시민들 500여명은, ‘독재정권 타도하자’를 외치며 을지로 쪽으로 행진을 시작해, 저녁 8시경 종각에서 2,000여명이 연좌했다. 시위대는 계속 불어나 9시경에는 4,000명을 넘어섰다. 경찰은 시위대의 앞줄에 있는 국회의원들을 통해 2개 차선을 열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시민들은 이를 거절했다. 한편 모든 차량을 억류당한 대책회의는 밤 11시 30분 방송차량을 가지고 종각에 합류했다. 자정 무렵엔 경찰서장에게 ‘노래하면 집에 간다’를 연호하면서 대치하기도 했다. 12시 30분 경찰은 의원들을 제외한 시민들을 인도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해산당한 시민들은 다시 청계천을 통해 동대문을 돌아, 종로3가에서 인도를 통해 을지로를 거쳐 시청으로 향했다. 이날 많은 사람들이 체포조에게 연행되었다. 새벽 4시를 넘어 마지막까지 해산하지 않고 인도에 남아 있던 20여명의 시민들도 연행되었다.
“이날의 게릴라 가두투쟁은 ‘경찰 막으면 인도로 가고, 인도 막으면 돌아가면 되고’라는 ‘되고송’을 연상시키면서 누구도 지도하는 사람 없이 시민들은 그때그때 난상토론을 벌여 진로를 정하고, 행진을 이어갔다.”(참세상 기사)

제3기 항쟁의 휴식에 이은 고립과 쇠퇴기

6월 30일~7월 4일: 종교계의 개입에 따른 휴식기
6월 25일부터 시작된 폭력적인 강경진압 때문에 국회의원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폭행당했다. 부상자가 속출했고 많은 사람들이 연행당했다. 경찰은 6월 27일 대책회의 집행부 8명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검거 전담반을 편성했다. 6월 28에는 대책회의 간부 2명이 구속되었다. 6월 30일에는 대책회의 사무실에 대한 전격적인 압수수색이 있었고, 검찰총장은 “불법 폭력 촛불시위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밝혔다.
이런 분위기에서 대책회의의 요청으로 종교인들이 등장했다. 6월 30일부터 3일간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미사와 침묵 행진이 있었고, 7월 3일에는 개신교의 시국기도회, 7월 4일에는 불교의 시국법회가 끝난 뒤 구호를 외치는 평화행진이 있었다. 6월 30일 7만, 7월 3일 1만5천, 7월 4일 5만 명이 참석했고, 이 기간 동안 대치나 연행자는 없었다.

7월 5일~8월 15일: 항쟁의 쇠퇴기
6월 30일부터 천주교 시국미사로 시작된 휴식 국면은 7월 5일 ‘국민승리선언’으로 마감되었다. 7월 5일 오후 6시 30분 ‘국민승리선언 범국민 촛불대행진’ 집회가 시작되었다.51) 대책회의는 “국민은 이미 승리했으며 재협상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시작하는 ‘국민승리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날 대책회의가 선창한 구호는 ‘국민이 승리한다. 될 때까지 모여라!’였다.
50만 명이 모인 이날 집회에서 주최 측은 “오늘 평화롭고 안전한 행진을 벌일 것”이라고 강조하며, “어떤 자극에도 흔들리지 말고 평화의 촛불을 지켜주시기 바란다”고 당부하면서, 시민사회단체 대표들과 종교계 지도자들이 앞장서는 ‘인간 방패’를 만들었다. 밤 9시경부터 행진을 시작한 대오는, 남대문 방향으로 출발해 명동, 을지로, 종로, 안국동까지 나아갔다가 다시 종로를 거쳐 시청으로 돌아왔다. 밤 11시부터 시청광장에서 시작된 문화제는 새벽 2시 30분까지 이어졌다. 사회자는 “전경차를 끌어내고 청와대를 향하는 것만이 항쟁이 아니라, 이 자리를 늦게까지 지키면서 촛불의 힘을 보여주는 것도 항쟁”이라고 말했다.
문화제에서 대책회의가 발표한 5가지 요구사항은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 재협상 △재협상이 이뤄질 때까지 유통 중인 미국산 쇠고기를 모두 회수하고 더 이상의 유통을 중단 △어청수 경찰청장과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파면 및 구속자 석방과 수배 해제 △의료민영화, 방송 장악 음모, 교육 공공성 포기, 한반도 대운하, 물/공기업 민영화 등 중단 △위 문제 해결을 위한 대통령 면담 및 대국민 공개 토론회 개최 등이었다.
한편 문화제에 불만을 품은 시민 2,000여명은 교보문고 앞에서 새벽까지 차벽과 대치했다. 경찰과의 충돌을 우려해 차벽 앞에서 시민들을 등지고 앉아 있던 ‘눕자행동단’은 한 시민의 질타를 받고 철수했다. 이날 대책회의 관계자들은 도로에 나가 있는 시민들을 끊임없이 문화제에 합류하도록 권유했다
6월 25일부터 대책회의에 대한 탄압과 강경 진압이 시작되자 대책회의는 동요했다. 집회를 평화적으로 끝내고 공식 종료 선언을 하지 않는다면 대책회의와 함께할 수 없다는 단체도 나왔다. 일부 단체의 대표들은 청와대 비서진을 만나 교섭을 시도하려고 했다가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것조차 거절당했다.(참고자료 2) 이런 상황에서 ‘국민이 승리했다’고 선언하고 평화적인 음악감상회로 집회를 마무리한 것은 항쟁 의지를 포기하겠다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7월 7일 대책회의는, ‘촛불집회 직접 개최 중단(주말 등 주 2회만 집중) 및 생활 촛불 구상’을 발표했다. 주 2회만 집중하겠다면서 생활 촛불 즉 지역에서 미국산 쇠고기 불매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운운하는 것은 중앙에서의 정권퇴진운동을 더 이상 추진할 힘이나 의지가 없다는 고백과도 같았다. 촛불은 이제 외롭게 싸워야 했다.

7월 6일부터 다시 시청광장 원천 봉쇄가 시작되었고, 7월 8일에는 그동안 촛불집회에 몇 번 나와 눈도장을 찍었던 민주당이 국회 개원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각 단위가 주최한 주중 집회와 행진은 수백 명에서 천 명 정도가 참석했지만 경찰의 억압을 받았다.
7월 8일에는 여의도 MBC 앞에서 민주노총과 함께 1,000여명이 문화제를 한 뒤 한나라 당사를 거쳐 KBS 앞에서 해산했다. 7월 9일에는 시청광장의 차벽 안에서 100여명의 시민들이 촛불집회를 했다. 7월 10일, 교수 3단체, 보건의료 단체, 문화예술계가 주관한 보신각 앞 촛불집회에는 500명이 모였다. 집회가 끝난 뒤 플래카드를 들고 인도를 따라 을지로로 향한 행진은, 명동 입구에서 도로를 무단 횡단하다가 경찰력에 밀려 인도에 고립되기도 하였다.52) 7월 11일 민주노총이 주관한 청계 집회에는 1,500명이 참석했다.
주말인 7월 12일 시청광장이 봉쇄되자, 저녁 7시경부터 시청 부근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앞에서 대책회의와 함께 500명으로 출발한 행렬은 명동, 을지로, 종로를 거쳐 조계사로, 다시 안국동 로터리에서 종로, 동대문, 을지로, 명동을 거쳐 숭례문을 돌아 4시간 만에 시청 앞에 도착했다. 비옷을 입고 우산을 든 시민들의 대오는 20,000여명에 달했다. ‘촛불자동차연합’도 경적을 울리며 행진에 참여했다. 중간에 조계사에서 문화제를 하려고 했던 대책회의는, “행진할 필요도 없는 적적한 거리에서, 시민들이 많거나 이슈가 될만한 거리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 조용한 곳에서 문화제를 왜 하느냐”53)는 시민들의 비난에 문화제를 포기했다.
7월 13일 시청광장이 봉쇄되어 시민들 100여명이 보신각에 모이자, 대책회의가 집회를 시작했다. 일부 시민들은 ‘대책회의와 함께할 수 없다’며 청계로 이동했고, 보신각에 있던 시민들도 집회가 끝나자 청계로 합류했다. 밤 9시에 200여명의 시민은 YTN으로 행진을 했고, 100여명의 시민은 청계광장에 남았다.
7월 17일 밤 9시경, 100여명의 시민들은 청계광장에서 종로구청 입구 도로로 진출해, 동대문 방향 4개 차선을 막고 연좌했다. 밤 9시 30분 청계광장에서 촛불문화제를 마친 20,000여명의 시민들은 종각으로 합류했다. 경찰이 종각 쪽에서 봉쇄하자, 일부 시민들은 종로2가를 거쳐 종로4가까지 갔다가 다시 종각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민주노총과 대학생들이 앞장선 시위대는 대책회의와 함께 조계사와 일본 대사관으로 향했다. 밤 10시 30분 시위대는 안국동 동십자각에서 대치했고, ‘매국노 이명박 퇴진’이라고 적힌 깃발을 들고 나온 200-300명의 시민들은 “비폭력을 외칠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라”고 말하면서 전경차 중 한 대의 타이어 바람을 빼고 철창을 뜯어냈다. 물대포와 소화기에 맞서 전경차 유리창을 깨고 밧줄로 당기다가, 자정 무렵 진압이 시작되자 종각으로 후퇴해 인도에서 대치했다. 경찰은 이날 ‘촛불다방’ 자원봉사자들을 연행했다.
7월 19일 청계광장에서는 집회가 시작되기 전 주경복 교육감 후보의 유세가 있었다. 저녁 7시에 집회가 시작되자 ‘전대협’과 ‘안티엠비’의 깃발을 든 1,000여명의 시민들은, ‘타도 이명박! 해체 한나라당!’을 외치면서 종로로 진출해 종로3가 서울극장 앞을 지나 을지로를 거쳐 다시 종로2가로 행진했다. 밤 8시 30분 청계광장에서 집회를 끝낸 시민들이 행진에 합류하자, 시위대는 3,000여명으로 불어났다. 시민들은 전대협의 지휘 아래 스크럼을 짜고 경찰과 대치했다. 몇몇 사람들은 폭죽을 쏘기도 했고, 사복에 흰 우비를 입고 이동하는 경찰들도 보였다.
7월 26일 집회 중인 청계광장을 경찰이 봉쇄하자 천변을 따라 빠져나온 시민들은 종로1가로 진출했다. 밤 11시가 넘자 경찰은 방패를 앞세워 시민들을 인도 위로 밀어붙인 뒤 강제연행을 시작했다. 5,000여명의 시위대는 종로2가, 종로3가, 세운상가까지 후퇴하면서 새벽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이날 종로2가에서는 크레도스 차량이 시위대에 돌진하여 부상자가 발생했다.
8월 2일 청계 집회 후 5,000여명의 시위대는 명동 밀리오레 앞 도로를 점거하고 대치하다가 백골단에게 밀려 명동 안으로 후퇴하여 해산하였다.
부시가 방문한 8월 5일, 경찰이 청계광장에 난입하자 30,000여명의 시민들은 종로로 이동하여 대치하였다. 경찰의 초강경 진압과 연행 때문에 여러 차례 무너졌지만 시민들은 종로2가부터 3가와 5가까지 후퇴하면서도 대치를 반복하다가 자정 무렵에 해산했다.

이날 이후 촛불은 아고라에서 [8.15 100만]을 선동했다. 8월 15일 오후 5시쯤 대학로에서, 민주노총 집회와 ‘광복 63주년 기념 8.15민족통일대회’에 참석한 노동자와 시민 5,000여명, 탑골공원과 종각 등지에서 유관순 열사 플래시 몹 등을 진행한 인터넷카페 ‘소울드레서’ 회원 300여명 등 시민 3만 명은, 저녁 7시 신세계백화점 앞 소공동 로터리에 집결했다. 대책회의가 “더 이상 남은 것은 없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건강권을 지키기 위한 촛불을 끄지 않을 것이다”라며 ‘100차 촛불문화제 선언문’을 낭독하는 동안, 경찰은 5거리 중 4개 방향에서 진압 대오를 갖추었다. “을지로 방면에서 3,000-4,000여명의 경찰 병력을 동원해 살수차와 경고 방송으로 시민들을 압박하는 경찰에 맞서, ‘흑사단’, ‘십대연합’, ‘시민사수대’ 등이 맨 앞에 섰다. 십대연합 회원들은 자체 제작한 ‘촛불 방패’를 들고 나왔으며, 방패에 ‘형, 오빠, 오늘밤 무장해제’라는 글귀를 적어 넣었다. 시민사수대는 ‘죽지 않을 만큼만 맞겠습니다’라고 적힌 깃발을 들었다.”(참세상 보도) 밤 8시 10분경 사방에서 색소포가 섞인 물대포를 쏘며 몰려오는 경찰에 의해 30,000 대오는 순식간에 해산되었다. ‘국민과 대화할거요? 퇴진할거요? 둘 중 하나만 선택하시오!’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연좌했던 ‘815평화행동단’ 20여명도 물대포를 맞으며 처절하게 연행되었다.54) 명동으로 후퇴한 시민들 중 3,000여명은 종로2가 탑골공원으로 향했다가 9시 35분경에 진압당했고, 노동자들과 함께 을지로를 거쳐 동대문 밀리오레 앞에 재집결한 5,000여명의 대오 역시, 10시 20분 전경들이 양방향에서 몰려오자 저항 한 번 못하고 속절없이 해산되었다. 참으로 분했다. 일부는 탑골공원으로, 일부는 명동성당으로 이동해 밤새 투석전을 벌이며 저항했지만, 그 숫자는 수백 명도 안 되었다. 도심에서의 대규모 항쟁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각주)-----------------
 

1)_ 2008.6.10 경찰청장 어청수는, 광화문 사거리 이순신 동상 앞에 컨테이너를 2단 높이로 쌓아 올리고, 용접을 한 뒤 구리스 칠을 하였다. 이에 네티즌들은 ‘경축! 08년 서울의 랜드마크 명박산성’이란 현수막을 컨테이너에 매달았다.

2)_ 정식 명칭은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이다.

3)_ 2009.1.19 최소한의 보상도 없이 진행되는 재개발사업에 불만을 품은 용산 4구역 철거민들은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있는 5층 건물인 ‘남일당’ 건물을 점거하고 옥상 위에 망루를 짓고 저항하였다. 이에 경찰은 바로 다음 날인 1.20 오전 7시, 시너와 화염병 등 사고의 위험을 충분히 예견하면서도, 경찰특공대를 컨테이너에 실어 옥상 위에 있는 철거민들을 공격하였고, 이 과정에서 철거민 5명이 화재 등으로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4)_ 이명박은 취임 직후부터,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출신들을 청와대 비서진으로 임명하고, 강부자(강남, 부동산, 부자)들을 장․차관에 임명함으로써, 고소영, 강부자 정권이란 말이 널리 회자되었다. 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은 2008.1.30 ‘영어공교육 공청회’에서 “미국 가서 오렌지를 달라고 했더니 못 알아듣더라. 그래서 ‘어륀쥐’라고 했더니 알아듣더라”고 말했다. 이를 놓고 사람들은 ‘어륀쥐’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고, 인수위는 “사교육을 조장한다”는 강한 역풍에 휩싸였다.

5)_ “국민들이 이명박 대통령 탄핵서를 제출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3개월 동안 이명박 대통령은 국정에 성의를 다하지 않았습니다. 국민들의 반발이 심한 대운하 건설 추진, 영어 몰입식 교육 추진으로 국가의 위신을 크게 추락시킨 것은 물론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였습니다. 보험민영화를 추진하여 국민의 정보를 보호해야 할 대통령이 국민의 정보를 오히려 팔아먹고 당연지정제를 완전 폐지가 아닌 완화라는 언어 속임으로 국민들을 속이려고 합니다(의료 산업화 정책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중립을 지켜야 할 대통령이 어느 특정 당을 옹호하며 선거 유세를 도왔습니다. 자신의 측근들(고소영)을 장관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일부 장관들은 공청회를 거치지도 않았습니다. 물가를 대책 없이 강제적으로 안정시키려는 공산주의적 경제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대선 때 약속했던 공약들을 대부분을 변경 또는 삭제하고 국민들을 속였습니다. 일본 왕을 천왕이라고 언급하며 일본 왕에게 머리를 숙였습니다. 또한 공권력을 동원하여 평화 가두행진을 하는 시민들을 강제로 연행하였으며 쇠고기 고시를 강행하였고, 이젠 독도까지 일본에게 넘기려 하고 있습니다. 국민과 국가와 자신의 자존심을 갖다 버리신 대통령님 이런 대통령은 우리는 계속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대통령을 밑의 서명한 국민들이 탄핵을 신청합니다.” 안단테, <탄핵 서명문>, 2008.04.06.

6)_ 이명박은 부시와의 한미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2008.4.17(현지 시간), 워싱턴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CEO 라운드 테이블’ 행사에서, ‘한미 FTA’의 4대 선결조건 중의 하나였던 ‘쇠고기 협상’이 타결되었다고 발표했다. 농림수산식품부(장관 정운천)는 4월 18일 “미국산 쇠고기의 단계적인 수입확대 방안에 양측이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 수입 방안에 따르면, 한국은 1단계로 30개월 미만의 소에서 생산된 갈비 등 뼈를 포함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허용하고, 2단계로 미국이 강화된 동물사료 조치를 공포할 경우, 국제수역사무국(OIE) 기준에 따라 30개월 이상의 소에서 생산된 쇠고기도 허용키로 했다. 수입되는 쇠고기는 OIE가 ‘광우병위험통제국’에 적용하는 기준에 의한 특정위험물질(SRM)과 머리뼈, 등뼈 등에 남아 있는 고기를 기계적으로 회수해 생산한 고기를 제외한 모든 부위가 포함된다. SRM은 30개월령 이상 도축소의 경우 7개 부위(뇌, 눈, 머리뼈, 척수, 척주, 편도, 회장원위부), 30개월령 미만 도축소의 경우 2개 부위(편도, 회장원위부)가 해당된다.

7)_ “(청와대 게시판에 올린 중학생 글입니다.) 저는 현재 대전의 중학교에 재학 중인 중3 여학생입니다. 신문부에서 활동하고 있구요, 나름대로 꿈이 있는 학생입니다. 이번에 이명박 대통령께서 당선되신 후, 많은 정책을 시행하셨는데요. 일제고사의 부활이라 하여 시행하신 전국모의고사. 사교육비의 절감이 아니라 사교육비의 증가를 일으킨 첫 작품이셨죠. 어쨌든 지금부터 이명박 대통령께서 친히 미국까지 가셔서 아무런 이득 없이 얻어오신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체결에 대한 저의 입장부터 말하겠습니다. 너무 좋아서 전 국민적으로 데모라도 일어나 이명박씨를 상큼하게 물갈이하려 하는 분위기에요^^. 어렸을 때 가난하셨다고 하셨죠. 서민경제 살리신다고 하신다구요. 네, 얼마든지 받아들이죠. 저도 맨 처음에 그럭저럭 잘 하실 거라 믿었거든요. 근데 역시 의학계 쪽이 아니라 그러신지 여러 전문화된 개념을 모르신 것 같습니다. 아직 어리지만 제가 알고 현재 모든 이들이 알 수밖에 없어진 광우병의 증상에 대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광우병은 초식동물인 소에게 죽은 소의 부산물, 도축물을 먹여서 변형 단백질 프리온이 발생하고 프리온이 뇌에 퍼져 뇌에 구멍이 뚫려서 소가 죽는 병입니다. 인간광우병도 광우병에 걸린 소를 먹은 인간이 뇌에 구멍에 뚫려 죽는 병입니다. 대통령은 독재자 아닙니다. 왕도 아니고요. 오히려 국민한테 굽신거려야 하는 사람이 대통령이라는 건 아직 모르고 계시나 보십니다. 이번에는 잠 푹 자고 찬물로 세수하고 들어보세요. 아직까지 조금은 많은 사람들이 ‘광우병? 까짓것 뭐, 잘 피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데요. 그런 사람들이 피해자 되고 아는 사람들도 피해자 되는…대한민국 되면 안됩니다. 적당히 하세요. 더 이상은 국민들 모두가 이 행각을 봐드릴 수 없습니다.” 사람사는세상, <[중딩의 분노] 쥐박이의 최후가 오고 있습니다!!>, 08.04.24, (이하 모두 아고라 자유토론방).

8)_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용광로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현재 카페의 상황입니다. 오늘 하루 가입 인원: 1,868명(총회원수: 21,658명), 방문자: 18,287명, 새글: 1,182명, 접속 인원: 175명. 민주주의와 정의를 사랑하는 네티즌 여러분!! 실시간으로 참여하는 국민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망설이시는 분이 있다면 과감하게 성스런 대열에 동참하십시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힘을 하나로 결집합시다. 그리하여 종국적으로는 이명박의 퇴진을 이끌어냅시다.” 사람사는세상, <[베스트요청] 민심이 대폭발 하고 있습니다.>, 08.04.24.

9)_ 이명박 탄핵연대(http://cafe.daum.net/antimb), 항쟁이 시작되자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로 명칭을 바꾸었다.

10)_ 아름다운 청년, <5월 2일 촛불문화제…청계천 소라광장 앞>, 08.04.28.

11)_ “우리 지금 이 열기로 내일 촛불집회 나와야 합니다. 내일 촛불집회가 소규모로 열려 언론도 못 타고 이명박이 무시하게 되면 우린 정말 끝장이죠. 기회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광우병 쇠고기 문제는 무엇보다 시간이 촉박합니다. 방송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취재해줄 절호의 기회라고 봅니다!”, 미친 소, <내일 촛불집회 소규모로 열리면 우린 끝장>, 08.05.01.

12)_ “제가 가장 기대했던, 시민들이 5분 동안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직접 지켜보았습니다. 사회시간에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가 지켜져야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배웠다는 중3 학생부터, Fuck the mb를 외치며 랩을 하는 고3 학생까지⋯ 대부분이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생이라 정말 반가웠고, 더욱 희망을 얻었습니다. 9시가 가까워지자, ‘여러분 귀가시간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어서 돌아가세요’라는 방송이 나오더군요.” katy, <오늘 청계천 집회 후기>, 08.05.03.

13)_ 아름다운 청년, <[안티2mb토요집회] 함께하지 않으시렵니까??>, 08.04.25.

14)_ 이들 집회가 청소년들과 대중들의 불만이 있고 공감을 살 수 있음에도 그들만의 집회가 되어버린 이유에 대하여, 과연 관성적인 동원 방식의 문제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가 필요하다.

15)_ 이날 참가자에 대하여 아고라 닉네임 ‘민족자주SNUT’은 10,000명이라 하고, 참세상은 안티엠비가 준비한 초 10,000개가 중반에 소진된 점을 들어 20,000명이라고 하나, 다음날 훨씬 빼곡히 참석한 시민들이 20,000명으로 추산된 점을 보면 15,000명 정도로 봐야 할 것이다.

16)_ 당시 촛불집회의 주도권을 놓고 ‘안티엠비’와 ‘미친소닷넷’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kimjs, <아고라내 분란 조장 문제에 대한 대책을 제안합니다>, 08.05.04.

17)_ 6002, <[필독] 2개의 촛불문화제, 어느것이 진실인가?>, 08.05.04.

18)_ 다니엘, <오늘 청계천 문화재에서 아쉬웠던 점!!>, 08.05.03. 다니엘은 이 글에서 안티엠비에 가두시위를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가 강퇴당했다고 밝혔고, 자신도 그런 경우를 당했다는 사람들의 댓글도 올라왔다.

19)_ 아름다운 청년, <[긴급속보] 침묵촛불 시위(미친 소 너나 처먹어라 2)>, 08.05.04.

20)_ ooc, <청계천 집회 정말 속시원하다……!!!>, 08.05.06.

멜랑꼴리, <두 곳 집회 분위기가 판이하네요>, 08.05.06.

21)_ Sisyphus, <촛불문화제는 이제 그만 집어치웁시다!!!!!!!>, 08.05.11.

22)_ tild, <오늘 가두 시위의 배후세력이요?>, 08.05.12.

23)_ 아름다운 청년, <[최종공지] 14일 집회와 17일 가두시위>, 08.05.13.

24)_ minewanka, <여의도가두행진부터 청계천 촛불집회까지>, 08.05.17.

애플소다, <여의도 집회 갔다 왔습니다. 실망했어요.>, 08.05.17.

25)_ 성현웅, <오늘 청계천 문화제를 정리하자면>, 08.05.22.

26)_ “우리가 미친 소 하나 때문에 이렇게 절규하고 있는 것인가요? 쥐박이라는 큰 쥐가 일으키는 모든 분란에 화병이 나서 이런 것 아닌가요? 탄핵을 외치고 전경을 밀치고 나아가 청와대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강기갑, 노희찬, 심상정 등등의 의원들과 함께 싸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고작 앉아서 우우-- 하는 야유나 하고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나긋한 구호나 외치고…미치겠습니다. 오히려 화병이 더 도질 것 같았습니다.” 권태로운창, <최악의 청계천 집회(22일)–후기와 대책이 시급(베스트 요청)>.

안단테–백수씨, <<알림>!! 엄청난 의문점!! 집회와 시위..!!>, 08.05.22.

27)_ 광우병대책회의, <22일 촛불문화제에 대한 네티즌들의 비판을 겸허히 받으며>, 08.05.23.

28)_ 이들은 나중에 ‘토론의 성지 아고라’라는 깃발을 들었고, 자신들이 ‘아고리언’들에게 호소하는 386세대임을 밝혔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아고라386’이라고 부른다.

29)_ 권태로운창, <결전의 날!! 토요일 여의도와 청계천에서 분노의 불길로~>, 08.05.23.

30)_ “7시에 광화문도착. 뻘쭘. 모인 사람이 200-300여명. 시작은 하였는데 앰프도 없구 ㅋㅋ 소라광장 소리에 묻혀서 아무 소리두 안 들림. 300명 중 절반이 여성분들. 구호랑 민중가요 부르다가…

집행부의 작전 소개. 뻘쭘. 한다는 작전이 소라공원 집회 현장 급습하여 단상 점거 및 선동. 순간 뻘쭘해서 뒤돌아올 뻔. ㅋ 그 뒤에 20분간 난상토론. 그러던 중에 배성용 학생 등장 차분한 목소리루 응원하더군요. 그러던 중 전경이 광화문 집회현장 둘러쌈. ㅋ 300여명이 둘러싸니 아무 것두 할 수 없었음. ㅋ 그래서 결국 각개전투로 소라공원집회 침입하기루 하구 해산. 길 건너는 중에 시위 시작…명박탄핵. 결국 300여명이 소라공원 집회 침투 성공. 우리의 목소리로 집회현장은 아수라장. 더욱 더 큰 소리루 명박탄핵. 그러던 중 군중심리 발동으로 꼬리에 꼬리를 뭄. 이리저리 활로를 찾다가 경찰 저지선과 부딪혀보기두 했구…일선에 섰다가 찡겨서 죽는 줄 알았음. 그러다 밀려서 다시 후퇴. 다른 길 활로를 열구 뛰기 시작. 군중심리 발동. 너두 뛰구 나두 뛰구. 어디 거리인지 잘 모르는 대로변 접수. 순식간에…그 뒤엔 아수라장…1만여 명 거리 접수. 대충 이 정도 집회 현장이었구요. 자영업하는 통에 먼저 일어섬.

절반의 성공???? 1. 386집행부의 작전 부재(솔직히 소라공원 집회 급습하여 단상 점거 및 선동은 유치하였소.) 2. 집행부의 절실함(군중심리두 군중들 모았을 때 집행부의 적절한 컨트롤만 있었음 광화문 사거리는 접수하였을 것임.) 3. 의외루 많은 단체 난립(대학생 단체, ‘다함께’라는 단체, 그리구 우리 강철대오 386 인원 300여명 그리구 모르는 단체들. 결국 우왕좌왕…) 4. 절반의 성공은 그동안 촛불집회에서 할 수 없었던 소리들 맘 놓구 하다 왔음. 민중가요두 맘 놓구 불러봤구…이리 뛰고 저리 뛰고 결국 포위당했지만⋯ 좀더 강력한 집행부의 필요성 절감.” 아고라 폐인, <[퇴진]광화문집회 다녀와서… 절반의 성공…>, 08.05.24.

31)_ 이 사람은 대책회의 공동상황실장 박원석이었다. 박실장의 이런 행동에 대해, “대책회의 운영위 소집자인 한국진보연대 집행위원장은 “박실장이 그렇게 말해서 깜짝 놀랬다”며, ‘왜 일을 내느냐’는 듯이 유감을 표명했다”(김하영, 2009: 189).

32)_ 새벽강, <<속보> 광화문 현장 상황>, 08.05.24.

33)_ 안단테–선구자, <[타도] 광화문 가두시위당시 동영상>, 08.05.24

새벽강, <<속보> 광화문 현장 상황>, 08.05.25.

34)_ 에반님, <시위 다녀와서 방금 집에 들어왔습니다>, 08.05.25.

35)_ 프락치에게 유인되었다는 설이 있다.

36)_ 페르소나, <[베스트요청] 확성기 여자를 비판할 수밖에 없는 이유>, 08.05.27.

배후세력64, <★ 확성녀 프락치건 아니건 간에 지금 이상합니다★>, 08.05.28.

쥐잡자, <확성기녀를 의심한다고 착각하는 분들 보시오!!!>, 08.05.28.

세상의빛, <다함께 확성녀 지지 철회합니다>, 08.05.29.

정신이드드나?, <★확성녀에 대해서…저는 어제 뛰댕겼던 사람입니다★>, 08.05.29.

천사친구<★오늘 시위의 문제점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08.05.29.

37)_ 안단테_레인, <[진지하게 질문]왜 주최측(?)은 끝까지 청계광장을 고집하죠??>, 08.05.28.

38)_ 새하얀밤, <[베스트]방금 청계천 민노총분!!!!! 깃발 조끼 안됩니다!!!!!>, 08.05.28.

헌법제1조,<◐ 민노총이 복장을 착용하고 깃발을 들으면 안됩니다(수정)◑>, 08.05.28.

초령, <민노총의 촛불집회 합류 반대하는 분들께>, 08.05.28.

39)_ 이날 행진에 앞장섰던 다함께 관계자가 “오늘은 해산하고 내일 만납시다”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자 항의가 빈발했지만 대오는 흩어졌다”(참세상 보도, 08.05.29). 이에 대해 “시위를 마무리 할지 말지를 토론해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확성기를 빼앗으며 토론 자체를 가로막은 일부 자발성주의자들의 행동이야말로 완전히 비민주적 처사였다”(김하영, 2009: 195)는 반론이 있다.

40)_ 6월 3일 마감된 국민소송 참가인단 신청자는 총 103,476명이나 되었다.

41)_ “그런데 대책위 상황 실장, 무대 위에서 사람들에게 청운동 연행 비상사태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아직 발언하는 사람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고 우리는 행사를 마쳐야 합니다. 중간 중간 속보가 들어오는 대로 여러분에게 알려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말했죠. 시민들이 속보 받으려고 광장에 모인 거 아니라는 거 누가 말해줘야 압니까. 그런데도 대책위 계속해서 공연했습니다. 공연 하나 끝나고 시민들이 술렁거리면서 항의했죠. 대책위에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구요. 시민들이 ‘지금 갑시다’ 하고 외쳤죠. 그래서 문화제란 것이 일단락되고 가두가 시작되었습니다.” 일찍가두함께해산, <정작 대책위에서 했던 중요 포인트는 다 뺀 답변이네요??>, 08.06.07.

42)_ ‘아고라 CSI’는 6월 8일 사다리와 소화기를 들고 전경차를 파손하던 사람들이 프락치임을 사진 비교를 통해 증명했다.

43)_ 인터넷 사이트 ‘디시인사이드갤러리’에서 공급한 음식들에는 ‘우리들이 촛불의 배후입니다’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44)_ “자유발언에 웃고 놀고 떠들고, 간간히 적당한 구호 제창…시청 앞에서 연좌 놀이, 광화문 앞 전경버스 유람하기…다시금 제자리…곳곳에서 청와대 진입 시도 중이란다. 지금도 새문안교회 골목길로 진입을 시도 중이란다. 그런데도 대책위는 아직도 유흥에 지화자로 시민들을 이끌고 있다. 과연 저들이 바라는 이 집회…순수, 숭고할 이 촛불집회의 목적은 무엇일까?…” 방랑자, <방금 귀가했더니…도대체 대책위의 존재 이유가 뭔가?>, 08.06.07.

“왜 자꾸 사람들이 빠지기 시작하는 밤에 청와대로 향해야 합니까? 촛불문화제하면서 전경들이 자리잡을 시간을 만들어주는 거 같아요…앉을 때도 어제 전경들이 막았던 그 길목들에 미리 앉아 있었으면 좋겠구요…후 새벽까지 너무 답답했어요…어제 모인 인원이 20만이라던데…우리 언제까지 같은 일만 반복해야 하는 건가요?? 일찍 나오신 분들은 제발 가는 길목을 사수합시다!!! 촛불문화제 청와대 가서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제는 필요없는 주위 가두시위랑 촛불문화제 과감히 생략 좀 했으면…언제까지 축제?? 문화제?? 그렇다고 폭력을 하자는 건 아니지만 전 청와대에 가서 우리의 목소리를 꼭 들려주고 싶어요….” 여사님, <우리 왜 자꾸 밤에만 청와대로 향하는지????>, 08.06.07.

“대책위가 말하는 72시간 릴레이 집회라는 것이 낮에는 시청에서. 밤에는 광화문 사거리로. 거기서 전경차 좀 흔들어주고, 한쪽에서는 술 마시고 놀고 그러다 날새면 다시 시청으로 모이고 또 밤 되면 광화문으로 가는 그런 릴레이를 말하는 겁니까? 대책위는 대책이 없습니다.” 프린스, <오늘 새벽 광화문에서…72시간 릴레이의 실체>, 08.06.07.

45)_ “새벽 12시 상황입니다. 여러 우려와 비판에 대해 짧게 상황설명 드립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경찰들이 청와대로 향한 모든 골목골목에 전경버스를 대고 가로막고 있어 진출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 골목골목마다 경찰과 대치하며 참가자들이 청와대 진출을 위해 행진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젊은 학생과 청년들에게는 거리 진출을 하는 곳으로 가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한편,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님들과 고등학생들 그리고 그 외의 많은 분들이 광화문 앞에서 짧은 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후 어떻게 움직일지 판단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에 통해 올라온 글 중에 대책회의에서 집회를 해산했다고 하는 부분은 사실이 아닙니다. 상황실은 시민들의 청와대로 향한 평화 진출 행진을 중단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72시간 릴레이 국민행동 시간 중인 현재 집회를 더욱 힘있게 진행할 것을 명확히 밝히는 바입니다.

새벽녘 올라오는 글들에 대해 다시 짧은 답변 드립니다. 지금 이곳 게시판을 보면 아주 다양한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평화적인 촛불대행진을 하는 것에 불만인 사람들이 있고 정부에 대한 비판을 행동으로 강하게 보여주시는 시민들에 대한 우려도 있습니다. 저녁에만 문화제를 한다는 비판에 대해 낮에 범국민대회와 거리행진 일정을 잡고 있습니다. (사실 낮에 거리행진에는 저녁 촛불대행진보다 훨씬 적은 인원이 모입니다. 일정이 없는 게 아니라 저녁 촛불에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현실이 있음을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7일(토) 오후 4시에도 대학로부터 낮 거리 행진을 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대치상황에 있어서 여러 시민들이 청와대 방향으로 평화행진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경찰과 대치하는 등 여러 상황이 있었고 이곳 게시판을 통해 대책회의가 대치 중인 상황을 외면한다는 글들이 올라왔습니다. 대책회의 상황실에서는 청와대로 향하는 골목들을 확인한 바 섣불리 움직일 경우 시민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판단 하에 광화문 네거리에서 약식 집회를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러다가 연행자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모두 연행자를 석방하라며 청와대 쪽으로 행진해 나아갔습니다. 시민들의 항의에 3명의 연행자는 무사히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새문안교회 골목 등에서의 대치 상황은 풀릴 기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새문안교회 골목은 매우 좁은 골목입니다.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곳이라 자체적으로 시민들이 광화문으로 가자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상황실에서는 큰 무리가 없는 선에서 선두에 계신 시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처음처럼, <광우병 국민대책회의의 답변입니다. Best로 점…>, 08.06.07.

46)_ 광우병대책회의, <[대책회의]오후 10시 국민대토론회에 참석해주세요>, 08.06.19.

광우병대책회의, <[대책회의] [네티즌의견 갈무리] 향후 촛불운동의 방향>, 08.06.19.

47)_ 처음 열쇠를 뺏긴 곳은 한국은행 앞이었는데(대책회의 발표), 모레를 옮긴 곳은 서울역 부근(참세상)과 숙대역 근처(아고라), 용산 전자상가 앞 국민은행 뒤 주차장 등 다양한 목격담이 있다.

48)_ “방송차량을 빼야 하는 시점과 밤샘 싸움에서 지친 시위대에 제안을 했고 그 방송을 들은 분들의 다수에 의해 시청으로 가서 해산한 것입니다. … 왜 일방적으로 대책회의가 해산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꾸 이러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차량을 빼낼 때도 대책회의는 시민들의 요구에 따라서 밧줄을 수거하란 멘트를 수정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다수가 원했기 때문에 시청으로 간 것이지, ‘강요, 강압’ 없었습니다.” 김태형, <대책회의 인터넷 팀 자봉 김태형 입니다>, 08.06.23.

49)_ 이날은 ‘마이크녀’(30세 정도의 젊은 여성)가 대책회의의 마이크를 빌려 경찰 ‘방송녀’와 맞짱을 뜨면서 시민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일도 있었고, 6월 23일 새벽엔 전경차에 불을 지르려고 한 시민이 같은 시민들에게 붙들려 경찰에 인계되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불행한 일도 벌어졌다.

50)_ 아고라에는 전대협이라는 얘기도 올라 왔지만, 전대협이나 민주노총 소속이 아니라 열성적인 시민들이 마침 소방호스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여럿이 힘을 모아 대적한 것이다.

51)_ 국민 ‘승리를 위한’ 촛불대행진이 아니라, 국민승리 ‘선언을 위한’ 촛불대행진이다.

52)_ 참세상 기자는 7월 5일 이후 최초의 가두 진출이라고 하나, 필자가 느끼기엔 인도를 따라 행진하던 대오가 지하도로 건너기가 불편해서 무단횡단을 한 것이었다.

53)_ 구국의 빚더미, <(엠비아웃돌아왔습니다. 12일 서울대첩 완전분석>, 08.07.13.

54)_ “밤이 오고, 한국은행 앞이었습니다. 저 멀리서 경찰부대와 살수차가 대로를 따라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예상보다 수가 적어서 연좌는 단 한 줄로 형성이 되었습니다. 스크럼을 짰습니다. …뒤에서 강철대오 전대협이 외치는 구호에 뒤를 돌아봤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습니다!”라고 그분들은 외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익숙한 살수차 돌아가는 소리가 납니다. 물이 바닥을 타고 흘러와 신발과 다리와 엉덩이를 적십니다. 그런데 파란색입니다. 뒤이어 거품물이 밀려옵니다. 곧 이어 우리를 겨냥한 살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앞에 서 계셨던 분들이 어찌 되셨는지 걱정되던 찰나에 물대포가 우리를 훑고 지나갑니다. 멀어졌던 물 부서지는 소리가 다시 가까워옵니다. 이번에는 한 명씩 얼굴에 대고 조준살수를 하는 모양입니다. 오른쪽에 계신 남자분에서 살수가 오래 머무릅니다. 그분은 처음엔 팔에 힘을 주고 버티시다가 곧 숨이 막히는지 몸을 비틀기 시작했습니다. 이분을 도망가시게 놓아드려야 하나 고민할 때쯤 물대포가 저에게 옮겨왔습니다. 숨이 막히고 감은 눈 사이로도 물이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왼쪽에 앉은 여학생 차례에서 그분은 아예 몸이 뒤로 밀립니다. 제 왼팔에 더 힘을 주었습니다. …곧 군홧발소리와 방패 찍는 소리가 들립니다. 고함소리도 들렸던 것 같습니다. 전경 또는 체포조가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이미 눈은 물이 들어가서 잘 안보이고, 소리의 공포에 고개를 들 수도 없었습니다. 곧 머리를 찍히겠구나…생각하며 고개를 움츠리고 있는데, 지휘관의 소리가 들립니다. “얘네 놔두고 저 뒤에 싹 밀어버려!”, “얘네들 둘러 싸!” 먼저 남자들이 뜯겨나가고…여경들이 둘러쌌습니다. 곧 여자들을 연행해가기 시작했습니다.” 모의고사, <[8.15 평화행동단] 연좌에서 연행까지 후기입니다>, 08.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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