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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 쌤 강연 후기

노들바람에 글을 쓰라는 요구에 응해 쓴 글인데, 정말 오랜만에 글을 쓰면서 나름대로 고민을 정리한 것 같아 올려봅니다. 나도 "내일 당장 그린비 인문플랫폼이 사라진다해도 한 줄의 씨앗문장을 올리는" 마음가짐으로.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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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파업, 자본의 일정표를 멈추고 사건을 시작하는 선언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하금철

 

 

고병권 쌤의 강연 후기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미 한 달도 더 지난 강연의 후기를 쓴다는 것은 초등학교 때 밀린 방학 숙제를 몰아서 하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든다. 그래서 부랴부랴 비마이너에 실린 강연 원고도 찾아서 다시 읽어보고, 그것도 부족해 위클리 수유너머에 실린 고병권 쌤의 연재 글도 훑어봤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무슨 이야기로 시작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내게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초등학교 1,2학년 때 쯤이었을 법한 아버지의 파업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 했었다. 누구보다 순종적인 도덕관을 가지신 아버지가 사장의 명령을 어기고 파업의 대열에 동참하실 때에는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었을까? 기억을 더듬어 그런 이야기로 한페이지 넘게 써내려가 봤지만, 결국 다 엎어버렸다. 고병권 쌤이 강연을 통해 절실하게 요청했던 ‘총파업’은 아버지의 파업을 포함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이러저러한 파업의 반복은 아닌 것 같아서였다. 아버지가 파업에 동참한 그 동기야 물론 인간적인 분노와 설움 때문이었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자본이 짜 놓은 욕망의 회로에 갇혀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고병권 쌤은 “모든 곳을 점거하라,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라!”라고 했지만, 우리 아버지는 분명 야근에 특근을 해서라도 임금을 더 받기를 원했던 분이셨다.

그래서 대체 뭘 어째야 된단 말인가? 하루 종일 고민해서 썼던 글을 엎어버리고 나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고병권 쌤은 지금 당장 “체제의 중단”을 요구해야 한다고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이 말이 그저 ‘이론적 표어’ 같다는 생각만 맴돌았다. 지난 5월1일 있었던 한국은행 앞에서의 ‘총파업’ 행진도 체제의 중단을 선언하고 실천하는 자리라기보다는 한 판의 축제 같다는 느낌이 더 강했던 것이다. 축제가 끝나고 난 뒤엔 여전히 내 안에도 자리잡고 있는 자본의 혈관은 잘만 돌고 있었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의 수많은 1인 시위 행렬에 끼어, “자본주의 물러가라”라고 주술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만 같은 무력감을 느꼈다고 하면 너무 심한 비유인가? (물론 아직까지 그런 들썩거리는 집회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나의 이질감 탓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나니 한편으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런 불편한 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병권 쌤이나 ‘총파업’ 행진을 기획했던 분들에게, 장판 활동가들이 가끔 시청 장애인복지과 등에 프로포절 내듯이 <총파업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2012년 사업계획서>를 써오라고 요구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사업계획서를 백가지 천가지를 써온다고 한들 수많은 우연과 사건의 충돌로 형성되는 역사의 순간들 앞에서 어차피 무용지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건이 시작되는 순간, ‘총파업’

 

생각해보면 ‘총파업’은 그와 같은 용어로 지칭되는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도망가기를 언제나 주저하지 않았다. 역시나 올 해에도 민주노총은 메이데이 집회에서 총파업 투쟁을 감행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총파업’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시청 광장을 가득 메웠던 깃발들과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월차내고 재능 갑시다”라고 배짱 좋게 이야기하던 어떤 활동가의 위트 있는 한 마디와 더 잘 어울렸다.

고병권 쌤은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대와의 만남을 계기로 이러한 글을 쓰고,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 만남을 하나의 ‘사건’이라고 지칭했다. 지친 몸을 쉬러 떠난 타국의 현장에서 만난 시위대와의 만남이 하나의 ‘사건’이듯이,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모두 사건들이 쌓이고 쌓여 생긴 퇴적암이었다가 그 사건들 외부에서 가해오는 또 다른 사건의 열기에 의해 다져진 편마암이 아닌가. 나는 이렇게 무수한 사건의 과정 속에 있는 총파업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고병권 쌤은 강연 서두에서 발달장애 아이를 둔, 투사가 된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어머니는 “부양의무제 폐지, 활동지원 시간 확대, 평생교육, 가족지원 등… 그 어떤 의사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던 사람을 살리는 말들”을 자신과 처지가 같은 사람들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투사가 되는 길이, 아들을 살리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점거’와 ‘총파업’에 대한 강연에서, 왜 굳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발달장애 아이를 둔 어머니의 이야기로 시작했을까? 내가 받아들이기로는 이 ‘사람을 살리는 말들’을 듣는 순간이, 월가를 점거한 사람들이 ‘뭔가를 일으키는’ 사건의 순간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경찰이 점거 집회 예정장소를 원천봉쇄하자 점거자들이 주코티 공원으로 자리를 옮긴 후 누군가 ‘우리 모두 여기서 이야기를 하자’고 선언하면서 상황은 놀랍게 변했다. 처음에는 쭈뼛쭈뼛하던 사람들이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주변 사람들과 곳곳에 작은 원들을 만들었다. 그러자마자 이런저런 말들이 마구 쏟아져나왔다. 집을 잃은 이야기, 건강보험 없이 아이들을 키우는 이야기, 직장을 잃은 이야기, 대학등록금이 너무 높아 학업을 접게 된 이야기…”

 

이렇게 내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각인되고 있는 이 ‘사건’이란 대체 무엇인가? 적어도 이 ‘사건’은 자본의 방식으로는 발생하지 않는다. 자본은 오로지 ‘집행’할 뿐이다. 수익률의 하락을 타개하기 위해 노동자를 정리해고하는 업무를 ‘집행’하고, 대양해군을 육성하기 위해 수천 수만년 숨쉬어 온 구럼비 바위를 파괴하는 업무를 ‘집행’한다. 여기에서 존재와 존재가 만나 벌어지는 ‘사건’같은 것은 출현하지 않는다. 오로지 한 존재가 완전히 대상화되어 가치의 쓰레기통에 분리수거 되거나 운 좋게 살아남아 자본이 정해놓은 틀 속에서 근근이 숨 쉴 뿐이다. 요즘엔 심지어 ‘사랑’조차 집행될 뿐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최근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알랭 바디우의 『사랑예찬』이란 책에서 저자는, 프랑스의 결혼 중매 사이트쯤 되는 ‘미틱’(Meetic)이란 사이트의 광고 문구에 의문을 표한다. “위험없는 사랑을 당신에게!”,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사랑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설렘, 갈등과 시련… 이 따위의 위험들을 모두 제거하고도 사랑할 수 있다는 이들의 ‘사랑’에는 우연적인 사건, 즉 ‘만남’이 배제되어 있다. 오로지 특정한 조건과 조건을 일치시키는 프로그램을 ‘집행’할 뿐이다. 이러한 사랑의 과정, 사건의 과정에서 기계적으로 소외된 인간들은, 미틱의 집행에 의해 선택되거나 버려지거나 둘 중 하나만이 가능할 뿐이다.

점거는 그리고 총파업은, 이렇게 자본의 계획표에 따라 진행된 집행에 의해 버려지고 배제된 존재들이 드디어 입을 열고 이야기를 벌릴 자리를 제공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으로서는 아무런 쓸모도 가치도 없다고 여겨지는 자신의 발달장애 아이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해 달라고 말하기 위해, 어머니는 교육청을, 보건복지부를,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하는 ‘사건’을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 고립된 삶을 살아왔던 발달장애 가족들은 서로를 인간적인 관계망으로 끌어당기게 되고, 발달장애인을 배제한 채 작동되는 체제의 ‘중단’을 요구하는 ‘총파업’을 실천한다.

 

 

자본의 일정표에서 일탈하기

 

총파업(General Strike). 그것은 이 어머니처럼 체제의 중단을 요청하는 ‘온갖 요구’들이 모이는 순간의 사건을 지칭한다. 그것은 모이는 사람들의 수로 ‘계산’되지 않고, 특정한 기관의 계획과 일정표에 의해 ‘집행’되지 않는다. 총파업이 작동되는 원리는 오로지 사람들이 광장에서 만나는 사건의 순간, 각자가 터뜨리는 웃음의 크기, 흘리는 눈물의 염도에 좌우될 뿐이다.

 

 

 

어제 오랜만에 집회에 나갔다.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23번째 죽음을 막기 위한 ‘희망행진’. 오랜만에 집회 단상에 오른 김진숙 지도위원의 발언은 또 한번 요약 불가능한 감동을 전해줬다. 그녀의 발언에는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2012년 총파업 사업계획서>같은 것은 없었지만, 자본에 맞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실천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었다. “울다가 웃자. 그리고 사랑에 빠지자.”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 월스트리트 점거운동 르포르타주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 월스트리트 점거운동 르포르타주
고병권
그린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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