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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출판사 리뷰
“내 몸과 삶을 바꾸는 에로스-혁명!”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연애불능시대에 던지는 에로스 처방전!
대한민국 연애발달장애 : 고미숙의 분석과 진단
“미디어는 온통 사랑과 섹스를 쉬임 없이 쏘아 대고 있건만 정작 사랑의 열정을 누려야 할 청춘들은 사랑이 없는 비애를, 사랑할 사람이 없는 비애를 부르짖고 있었다(머리말 중에서).”
왜? 도대체 왜? 왜 그렇게들 사랑타령을 하고 연애를 하고 싶어 난리면서도 다들 연애를 못하는가?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다름 아닌 ‘연애’책을 쓰게 된 이유는. 마치, 무릇 모든 사람들의 삶이란 것은 사랑과 연애로 수렴되는 게 인생의 법칙이라도 되는 것마냥 모두가 연애를 하지 못해 안달인 이 ‘연애공화국’에서, 정작 제대로 연애하는 사람은 만나서 밥이라도 한 끼 사주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는 희한한 작금의 상황을 통탄하며 고미숙은 마침내 코뮌주의자의 사랑법을 펼쳐놓게 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의 총체적 연애발달장애에 대한 고미숙의 분석과 진단은 루쉰에서, 스피노자에서,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파블로 네루다에서, 『임꺽정』에서, 『동의보감』에서 나왔다. 고미숙, 그녀는 명색이 고전평론가가 아니던가.
▶인문학적으로 성찰하는 1080 전 세대의 사랑!
이 책에서 인문학과 사랑이라는 이질적인 조합을 만들어 낸 고미숙은 붓다의 수행, 『동의보감』의 양생술, 고전문학을 통해 기존의 실용서에서 주장하는 사랑의 ‘테크닉’, 혹은 ‘매뉴얼’과는 차별된 ‘사랑의 기술’을 설파하고 있다. 이 인문학을 기반으로 한 사랑의 기술은 비단 20~30대만의 사랑이 아니라 늙어서도 하는 연애, 자식과의 관계, 중년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사랑, 즉 1080, 전 세대의 사랑 모두를 포함한다. 바로, 사랑은 삶을 바꾸고, 인생을 역전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까닭인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왜 다른 것도 아닌 ‘사랑’인가 하는 점이다. 고미숙은 사랑을 “대상이 나를 택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열어 가는 시공간적 인연의 장”으로 정의하고 삶과 사랑은 함께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 번이라도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사랑만큼 우리의 존재를 뿌리부터 흔들어 놓는 사건은 없다. 그리고 사랑만큼 기존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에너지도 없다. 다시 말해 사랑은 기본적으로 ‘탈주선’을 그리고, 본질적으로 창조적 에너지를 품고 있다는 말이다. 그 사랑의 에너지는 단순히 성(性)적 열망을 넘어서 앎의 열망으로 우리를 이끄는 힘이 된다. 기존의 금지선을 벗어나 전혀 새롭고 낯선 매트릭스로 진입하게 하는 힘, 그것이 사랑의 본래 면목인 까닭에 우리 삶을 어떻게 하면 에로스로 가득 채울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은 자본과 망상으로 도배된 지금의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출구가 된다. 삶을 창조하는 에로스! 이 책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는 결국 그 창조적 에로스의 발견을 촉구하고 내 몸을 바꾸는 에로스 혁명을 선동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 사랑에 대한 오만과 편견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는 이별에 대한 항변으로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울부짖었지만 고미숙은 이 울부짖음에 오히려 반문한다.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라고. 사랑은 당연히 변한다. 사랑을 하는 마음과 몸이 변하기 때문이다. 변해 버린 마음과 이별의 순간, 이 모든 게 갑작스럽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보편적인 사랑의 전개과정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계절이 바뀌는 모습―찌는 듯한 무더위가 지나면 낙엽이 지고, 또 엄동설한이 찾아온다! ―이 어느 기점을 넘으면 금세 달라져 버리는 것처럼, 우리 삶도 그렇고 사랑도 역시 그렇다. 모든 태어난 것은 자라고 병들고 늙고 죽는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나고 자라고 쇠하고 소멸된다. 즉, 사랑도 생로병사를 겪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불멸의 판타지를 무참히 깨뜨리는 이 ‘무상성’은 지금 사랑에 빠진 이들에게는 실로 엄청난 시한부 선고가 될지도 모르지만 사랑이 끝없이 변화하는 흐름이요 운동인 것처럼, 우리 자신도, 우리의 관계도, 그 흐름과 생성의 장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그리고 그 흐름을 전제로 한 사랑에서 관건은, 능동적으로 그 흐름을 타는 데에 있다.
▶사랑하는 대상이 바로 ‘나’라고?
사랑을 하다가 이별을 하는 사람들을 보자. 어떤가? 복수심이나 증오, 혹은 분노로 활활 타올라 재가 될 것만 같다. “내가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고, 얼마나 잘해줬는데…! 감히 나를 배신해!?” 화내고 소리지르고 복수를 다짐한다.
참 이상하다. 그 사랑과 헌신은 ‘내’가 원해서 한 게 아니었던가? 혹은 원하지 않았다 해도 사랑의 시작, 그 사건의 원인은 어쨌거나 ‘내’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분노를 하는 것은, 자신의 사랑이 노동이나 거래였음을 역설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모든 원인을 상대에서 찾는 것은 수동적인, 너무나 수동적인 사랑법, 즉 노예의 사랑법이다. 사랑을 대상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그 사랑을 선택한 ‘나’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일이다. 사랑은 나와 대상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발생하는 사건이고, 따라서 사랑과 대상과 나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거늘.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늘 잊고 살고, 그래서 사랑에 늘 실패한다.
우리는 늘 나의 반쪽, 나의 이상형을 갈구하면서 ‘님’만 찾으면 나의 사랑이 완성될 거라 믿지만 그것처럼 순진한 착각도 없다. 사랑은, 전적으로 ‘나’의 문제이고, 내가 어떻게 관계를 구성하느냐가 그 사랑의 내용과 형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랑이라는 흐름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므로 그 시작과 끝은 나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한다. 사랑에 대한 지독한 오해와 편견과 착각으로 넘어지고 깨지고 허우적대는 가여운 영혼들을 보다 못한 고미숙이 제시하는 에로스 처방은, 사랑을 대상의 문제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 사랑하는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라는 것!
▶실연과 짝사랑에 대한 전복적 재해석!
술과 눈물과 수염은 ‘실연’ 내지는 ‘이별’에 따라오는 자동완성기능이다. 이미 황폐해진 마음과 더불어 몸도 함께 망가진다. 실연의 아픔을 ‘불행’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별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이 착각에 빠지기가 너무나도 쉽지만, 여기서 정신을 차리고 이별이라는 상황과 이별을 맞이한 나의 상황에 객관적인 물음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실연은 불행인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을 옭아매던 인연의 장을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 다른 장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러니 관건은, 그 아픔을 불행으로 변주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고미숙은 말한다.
“병에 걸리면 누구나 아프다. 하지만, 아프다고 해서 다 불행한 건 아니다. 통증과 불행을 동일시하지 말라는 거다. 병을 치유할 때, 통증의 유무가 유일한 척도가 되면 결국 진통제에 의존하게 된다. 그건 병을 치유한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병 역시 절대 위로와 연민으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 진통제가 몸을 나약하게 만들 듯, 동정과 위안 역시 존재의 능력을 한없이 떨어뜨린다.”(본문 178쪽)
이별이란 두 사람이 만든 인연의 장이 시간적 어긋남 속에서 비틀거림을 낳은 것일 뿐, 분노와 원망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사랑은 권력 게임 혹은 자존심 경쟁이 되어 버리고 만다. ―실연에 대한 전복적 재해석!
뿐만 아니라 고미숙은 실연에 대한 편견과 더불어 ‘짝사랑’에 대한 기존의 편견도 속 시원하게 뒤집어 놓는데, 그녀가 말하는 짝사랑의 미덕은 이런 것이다. 시간 안 들고, 돈 안 들고,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희노애락의 흐름을 살필 수 있고,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을 느낄 수 있고, 그 전율로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꿀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느냐는 것. 짝사랑은 행운이라는 이 교묘한 반전은 수많은 연애 소수자들을 절망에서 탈출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한다면, 삶을 창조하라!
▶엄마도 아이도, 제대로 좀 살아 보자
한번 빠지면 어지간해서는 헤어나오기 어려운 늪이 있다. 그 늪은 바로 엄마. 엄마와 아빠의 과잉서비스. 그 달콤함에 빠지면 우리의 청춘들은 스무 살이 넘어서까지 이유식을 먹어야 하는 ‘아이’로 남아 있게 된다. 엄마가 아이의 모든 것을 결정해 주고, 모든 것을 사주고, 입혀 주고, 먹여 준다. 이렇게 온실 속에서 자라게 되는 아이들은 이 ‘편안한 불행’이라는 역설적인 삶을 사는 대신 신체의 무능력과 영혼의 잠식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서 결국 엄마의 늪에 빠진 아이들은 자신의 열정을 찾지도 분출하지도 못하고 사그러져 간다. 모성의 탈을 쓴 이 연민과 집착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청춘을 들끓게 하는 폭풍을 삼켜 버리는 무시무시한 ‘늪’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엄마 자신을 가두는 늪이 되기도 한다.
아이들의 동선을 체크하고, 모든 걸 대신 해주려 하면서 엄마들은 자식들의 삶을 기어코 자기 것으로 만들고 만다. 사랑의 이름을 한 ‘지배욕’의 모습이다. 그런데 가족 내의 조성이 이렇게 꾸려질 때 자식들의 청춘만 잠식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삶을 잃어버린 엄마의 삶 역시도 함께 잠식된다. 아들의 성적표, 남편의 월급, 넓어지는 아파트 평수밖에 자신의 기쁨이 될 수 없는 현실. 그것은 대한민국 엄마들의 삶과 삶에 대한 열정을 갉아먹는 좀벌레와도 같다. 물론 가족을 사랑하고, 아이가 잘되었으면 하는 모성애는 아름답지만, 진정으로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의 삶을 만들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먼저 창조적으로 만드는 게 선행되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창조적으로 만든다 함은, 새로운 인연의 장과 네트워크를 만든다―봉사활동도 좋고, 시민운동도 좋고, 공부도 좋다!―는 말이고, 외부와 맺는 관계성을 확장시킨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진부하던 일상에도 힘과 탄력이 생기고 몸에서 내뿜는 기운도 당연히 달라질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줄 삶의 서사, 즉 ‘선물’이 생길 것이다.
사랑은, 대상에 집착하고 내면에서 웅크리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과 소통하고 그 속으로 성큼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엄마들이여! 아이를 사랑한다면 먼저 자신의 삶을 창조하시라!
▶나를 창조하는 힘, 공부와 연애!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대상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내가 사랑하는 대상과, 더 넓게는 이 세계와의 공존을 기획하는 일이다. 이 공존에서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자신이 원인이 되는 것이다. 사랑을 통한 삶의 창조, 그것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영역이다.”(본문 230쪽)
그렇다. 사랑은 둘만의 일이 아니라 세계와의 공존을 고민하는 일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관찰하고, 그가 속한 세계를 관찰하고 공부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과 세계와의 능동적인 소통을 할 필요가 있다. 그것만이 상생하는 연애의 비법이고, 삶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삶을 창조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를 구성하고 있는 내 몸의 리듬과 강도를 바꾼다는 말이다. 현재 나의 시공간적 장을 바꾸고 리듬을 만들면, 딱 그만큼 나의 미래가 바뀐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인생역전도 충분히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렇게 인생역전까지도 가능한 우리의 ‘사랑’은 종종 구속으로 변질된다. 사랑을 하게 되면 누구나 질투와 광기, 변덕과 같은 힘에 끌려다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에 붙들려서는 나를 바꾸는 연애, 삶을 창조하는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 부정의 중력장을 해체하려면 더 큰 긍정의 힘으로 공부하고 기뻐하고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랑과 대상과 나에 대해 적합한 인식을 하면 수동적이고 부정적 정서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까닭에, 공부와 앎이라는 네트워킹은 ‘나를 창조하는 힘’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명령은? “공부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두려움 없이!”
에로스 처방전
一. 돈 쓰지 말고 몸을 써라!
사랑이란 무엇보다 생명의 활기로 표현된다. 자신의 욕망을 자본의 프레임에 구겨넣지 말고 몸을 써라! 지금 당장 쇼핑몰에서 나오고, 자동차에서 내려라!
二. 실연을 행운으로 받아들여라!
한번 변곡점을 통과할 때마다 인생은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되어 있다. 그때 케케묵은 인연에 발목이 잡힌다면 참으로 난감할 터. 그러니 그 전에 나를 버리고 떠나준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三. ‘공부’하라!
앎의 크기가 내 존재의 크기를 결정한다. 그리고 사랑은 존재가 외부와 맺는 모든 관계를 포함한다.
따라서 운명을 건 도약, 운명을 건 사랑을 하고 싶으면 앎의 열정으로 불타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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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4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그 자신을 속이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남들을 속임으로써 그것의 종말을 고한다.
거듭 당부하거니와, 절대 상품을 주고받는 식으로 사랑을 확인하지 마시라. 물론 선물은 중요하다. 하지만, 진짜 소중한 선물에는 '삶의 서사'가 묻어 있어야 한다. 즉, 나의 일상의 리듬과 무관한 선물이란 그야말로 쇼에 지나지 않는다. 일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쇼"가 되는 순간, 아무리 정성을 다한다 한들 결국 화폐로 환산될 수밖에 없다. 특히 요즘같이 상품과 예술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에는 정성과 화폐가 분리되기 어렵다. 갖은 정성을 다한 선물일수록 가격에 비례한다. 따라서, 그 노선을 취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랑은 화폐권력의 장에 포획되어 버린다. 그 다음부터는 일상의 모든 흐름에 상품의 혼이 따라붙게 된다. 처음엔 얼떨결에 따라했던 작업들이 나중엔 자신의 본성인 양 전도되어 버리는 것이다.(197~8쪽)
왜 사회를 전면적으로 전복하기를 꿈꾸면서 사랑과 성적 관계에 있어서는 새로운 실험을 기획하지 않는 것일까? 사랑이야말로 혁명의 뇌관임을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왜?(83쪽)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우리시대 모든 연인들이 연애와 쇼핑 사이의 이 은밀한 공모관계만 해체해도 신자유주의 체제는 휘청거릴 것이다, 라는. 세상에, 이렇게 간단하고 기막힌 혁명전략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니 청춘들이여, 아니 사랑에 빠진 모든 이들이여, 세상이 바뀌기를 정말 원하는가?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가장 먼저, 쇼! 하지 마라! 쇼! 그럼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는가? 그래서 창의성이 필요하다. 나의 사랑이 지닌바 특이성이 유감없이 발휘될 수 있는 사랑법을 창안하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유한 사랑법을.(198쪽)
흔히 연애가 시작되면,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거나, 하릴없이 유원지를 헤매거나 한다. 한마디로 온통 소비를 통해서만 사랑을 확인하려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다. 힘으로 일어선 자 힘으로 망한다고, 소비로 맺어진 연애는 반드시 소비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 사랑만큼 소중한 감정도 없지만, 사랑만큼 부서지기 쉬운 감정도 없다. 10년 이상을 한 이불 밑에서 알콩달콩 살던 부부도 순식간에 파국을 맞이하곤 하는데, 하물며 처녀총각의 연애야 말해 무엇하랴. 그래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라는 것이다. 함께 책을 읽으면서 데이트를 하면 돈도 덜 들고 서로에 대한 신뢰도 높아진다. 또 책을 읽으면 주고받을 이야기도 자연 많아진다. 그러면 말하는 능력, 서사적 힘도 절로 붙게 된다. 일석삼조! 아니 사조! - (208쪽)
사랑이란 단지 그 대상하고만 소통하는 것이 아니다. 그 대상이 살아가는 시공간과도 깊은 교감을 나누어야 마땅하다(이쯤에서 “사랑하는 대상이 바로 ‘나’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스스로 창조한다!”는 테제들을 암기해 보는 것도 좋겠다). 그러므로 사랑이 시작되면 내면에 웅크리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 속으로 성큼 들어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그 힘에 의거하여 인연이 형성될 수 있고, 인연이 맺어진 다음엔 그렇게 만들어진 삶의 서사를 다시 나눌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인연이 생길 수도 있고. 암튼 이래저래 남는 장사다! - (226쪽)
사람들은 사랑을 언제나 대상의 문제로 환원한다. 한 마디로 대상만 잘 고르면 만사형통이라 여기는 것이다. 사랑에 실패한 건 대상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고, 아직까지 사랑을 못해 본 건 ‘이상형’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참으로 신기한 인과론이다.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판에 나는 몸만 쏙! 들어가면 되는가? 실패한 다음엔 다시 몸만 쏙! 빠져나와 복수극을 펼치면 되고? 이렇게 지독한 이기주의가 또 있을까? 상대를 잘못 만나 인생을 망쳤다면, 그런 상대를 선택한 ‘나’라는 존재는 대체 뭔가? - P. 15
‘불멸의 사랑’은 망상 중의 망상이다. 그건 마치 어린 아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어른이 된 다음에도 계속 끼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다. - P.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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