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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평등의 땅에

깊은 밤에 이 노래를 듣다가 펑펑 울고 말았다.

노래가 曲이고 哭인 이유를 알겠다.

 

 

저 평등의 땅에

                               작사작곡 류형수

 

저 하늘 아래 미움을 받은 별처럼 저 바다 깊이 비늘 잃은 물고기처럼
큰  상처 입어 더욱 하얀 살로 갓 피어나는 내일을 위해
그 넓고 넓은 허물을 벗고 잠 깨어나는 그 꿈을 위해
우리 노동자의 긍지와 눈물을 모아
저 넓디 넓은 평등의 땅위에 뿌리리

우리의 긍지 우리의 눈물
평등의 땅에 맘껏 뿌리리
평등의 땅에 맘껏 뿌리리

 

 

 

 ▲ <저 평등의 땅에> ⓒ 신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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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애씨 어디가세요 2

18년만에, 두 번째 공연

지난 3월13일, 조계사 안에 있는 한국불교문화역사문화회관에서 <윤선애씨 어디가세요 2> 공연이 열렸다. 몇몇 동지들과 공연장을 찾았다.

윤선애는 말한다. 18년 전, 1992년 <윤선애씨 어디가세요> 공연 이후, 다음 공연을 언제 할 수 있을지, 혹은 할 수 있을련지도 알 수 없었다고. <소녀의 꿈>으로 시작한 윤선애의 목소리는 맑았다. 천상의 목소리, 역시 윤선애다.

윤선애의 이름을 최근에 다시 듣게 된 것은, 2005년에 나온 앨범 <하산>부터였다. 그리고 재작년에는, 언제였나, 미국산쇠고기수입반대 촛불집회가 절정이던 습한 그해 여름, 서울시청광장에서 무대에 섰다. 그녀의 등장에 나는 무척 놀랐지만, 주변에 있는 활동가들 대부분이 그녀를 잘 알지(혹은 기억하지) 못했다.


*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서 화질은 영 좋지 못하다.


성장에서 현재까지


노래공연은 1부, 2부로 나뉘었다. 1부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곡을 배치했다. 2부에서는 현재 그녀가 부르는 노래들. 중간에 나온 <윤선애 팬 까페> 중창단 공연까지 감안하자면 그녀의 표현대로 ‘가족’들의 모임같은 분위기도 있다. ‘새벽’ 멤버들이 많은 것으로 보이는 중창단은 ‘중년시대’라는 이름이다.

대학 1학년 때, 아크로폴리스, 총학생회 출범식에서 불렀다는 <민주>부터(그녀는 84학번이다), <낭만 아줌마>까지, 그게 26년이다. 벌써.

<저 평등의 땅에>, “우리 노동자의 긍지와 눈물을 모아”, 이 구절에서는 눈시울이 불거졌다. 세상을 변혁할 자신감은커녕, 갈갈이 찢겨지고 뭉개지고 비난받고, 노동자의 이름마저 다시 빼앗기고 잊혀가는 것이 지금의 우리 노동자. 하지만 “우리의 긍지 우리의 눈물 평등의 땅에 맘껏 뿌리리”,

그것이 우리 노동자 계급.

나이들어 간다는 것

공연을 함께 추진하고 준비한 이들이나, 윤선애나 40대 중반이 넘어가는 이들이다. 공연을 보면서 그/녀들이 나이들어간다는 것에 대해 각자 나름대로, 스스로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녹여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굳이 <낭만 아줌마>같은 곡까지는 아니라도, 시간의 흐름과 그 변화를 삶의 일부로 소화해간다는 것을 말이다. 그 시간에 너무 조바심내지 않게 되는 여유랄까, 아직 철이 덜든 30대 후반의 나로서는 아직 생소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사람은 나이먹어가고, 또 그렇게 살아가니까.
 


PD들의 20년 후

같이 간 동지들의 표현에 따르면 그 공연(3시)에 유일한 “현직 운동권” 집단이었던 것 같은 우리는 인사동에서 간단히 뒤풀이를 했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기대했다는 것이 중론이었고, 사회운동과는 너무 멀어졌다는 이유로 실망스럽다는 이도 있었다. 나는 그냥 윤선애의 노래가 훌륭했다는 이야기만 했다. 사실, <저 평등의 땅에>로 충분했다고 생각했다.

한명이 나에게 물었다. “선배는 왜 윤선애 공연에 왔는”지.
PD들의 20년 후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땠을까?
나는 조금 슬퍼졌다.

그것은 그들이 사회운동에 가까이 있지 않다거나, 혹은 함께 공연한 <윤선애 팬 까페>의 중창단 멤버들이 현직 대기업 회사원, 자영업자, 학원강사, 컨설턴트, 교수..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적어도 NL들은 그랬다. 마음놓고 김대중을 지지할 수 있었고, 노빠가 될 수도 있었고, 청춘의 야망을 어쩌면 막 실현하는 듯도 했고, 또 결국은 그들의 죽음에 슬퍼하고 오히려 자신을 애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PD들은, 적어도 한 때 진실했다면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적응하지도, 애도하지도 못했다. 노동자의 이데올로기로 전화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진보신당의 좌충우돌, NL을 비판하고 탈당했으면서도 다른 정치를 시도하지 못하는 현실도 그 일부일지 모르겠다. 혹은 18년을 그저 시계침을 멈추어버린 (더 이상은 PD가 아닌) '좌파' 정파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윤선애의 공연은, 1992년과 2010년, 긴 시간이 비어있다. 소련이 망하고, 새벽의 마지막 공연 93년, <러시아에 관한 명상>으로부터 지금 그/녀들이 만난 것은 무엇일까. NL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20년을 기억하고 살아온 PD들에게도 이제 애도가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그 뒤에 남은 PD였거나 PD의 후배들인 우리에게는 무엇이 필요할까.


** 2006년 <새벽> 공연에 대해서 <월간 사회운동>에 실린 박준도의 글을 함께 소개한다.
http://www.movements.or.kr/bbs/view.php?board=journal&id=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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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두보杜甫시선


두보시선
두보 지음, 이원섭 옮김 / 현암사


 
봄 밤에 내리는 반가운 비

좋은 비는 그 때를 알고 내리니
봄이 되어 내리네
이 밤 바람 따라 몰래 들어와
소리없이 만물을 적시고 있네
들길에는 구름이 드리워 어둑하고
강위에는 조각배 등불만 외로이 떠 있네
새벽이 되어 붉게 반짝이는 곳을 보니
금관성(청두)이 온통 꽃으로 물들어 있구나

春夜喜雨

好雨知時節 / 當春乃發生
隨風潛入夜 / 潤物細無聲
野徑雲俱黑 / 江船火燭明
曉看紅濕處 / 花重錦官城


두보를 읽을 생각을 한 건, 영화 <호우시절>, 그리고 영화에 소개된 그의 시 春夜喜雨(춘야희우) 때문이다. (위 시의 번역은 영화의 것이다.)

이백과 함께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꼽힌 다는 것, 당나라 때 사람이라는 것 정도밖에 알지 못하고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1300년 전의 감성이 지금과 닿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好雨知時節, 좋은 비는 그 때를 알고 내린다"는 단 한 구절에 그런 생각을 모두 접게 되었다.
 
※ 아래의 번역은 모두 이원섭 역해 <두보 시선>(현암사)의 것을 기본으로 하되, 시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표현을 다소 바꾸고 그 일부분만 인용한 것이다.

一片花飛減却春 / 風飄萬點正愁人
꽃잎 한 조각 날아도 봄이 움추리는 데
우수수 바람에 지는 걸 어떻게 볼까
[후략]
- 曲江(1) 중

香霧雲鬟濕 / 淸輝玉臂寒
何時倚虛幌  / 雙照淚痕乾
[전략] 밤 안개에 그대의 머리는 젖고
달빛 아래 구슬 같은 팔은 차가와라
언제쯤 빈 창가에서
달빛에 마른 눈물로 마주볼까

- 月夜 중

花徑不曾緣客掃 / 蓬門今始為君開
[전략] 꽃잎이 길을 묻어도 쓴 적이 없었더니
그대로 두어, 사립문을 그대 맞아 처음 열었다
[후략]
- 客至(손님 오시다) 중

시를 인용하는 데 부분만 가져오는 게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너무나 감칠맛 나는 구절들이라 조심스레 떠냈다. 현대적인 느낌에서 보더라도, 구체적인 대상에 시상을 담는 이런 방법이 있구나, 놀라게 된다. 꽃잎이 날려 쌓은 사립문 앞 길과 봄을, 그려보자.

알려진 것처럼, 두보의 삶은 여유있지 않았다. 안록산의 난 등 당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살았고, 최고의 문장가(시인)이었지만 제대로 된 관직을 가져보지도 못했다. 아마도 문장은 뛰어났지만 정치에는 소질이 없었던 것 같다.(문장력이 뛰어나면 관료적인 기질도 있을 것이라고 전제하는 과거제도의 단점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늘그막에는 가족과 떨어져 고생하고, 결국 객지에서 삶을 마무리한다.

두보의 젊은 시절의 유랑과 중년, 노년의 유량은 성격은 다르지만 여튼 많은 풍경을 그의 시에 담아내게 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의 시대, 그의 고난은 시에 독특한 감성을 부여한다. 어려운 시대와 자신, 그리고 민중을 노래하기 때문에 가장 사실적이지만, 또한 가장 감성적이다. (그 둘이 조화를 이룬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눈을 바라보며

싸움터 새 귀신의 슬픈 노래
슬퍼 읊조리는 늙은이 하나
구름 자욱한 저녁 어스름,
회오리바람 타고 눈발 날린다
버려진 표주박엔 술 떨어지고
화로에선 불이 꺼져 가는 날
몇 개 고을 싸움 소식은 알 수 없어
앉아서 허공에만 글을 쓴다

對雪

戰哭多新鬼 / 愁吟獨老翁
亂雲低薄暮 / 急雪舞廻風
瓢棄樽無綠 / 爐存火似紅
數州消息斷 / 愁坐正書空

이런 고통에 대한 노래는,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만이 아니라 전쟁 속에서 함께 고통을 겪는 민중의 것이 된다. 그의 충군우국(忠君憂國)이라는 것은 유교적인 어법을 따르고 있지만, 무조건적인 제왕에 대한 충성보다는 전쟁의 고통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나라 걱정”으로만 보기는 무리다. 그럼 점에서 두보의 시는 개인적인 감상을 넘어선다. 하지만 그의 생생한 표현에서 번지는 감성은 여전하다. 그 이중성이 주는 독특한 효과.

그래서 두보의 시는, 사회와 개인을, 그리고 삶의 고통과 봄의 기쁨을 함께 담고 있다. 그래서 그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쉬운 시대, 쉬운 감성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시를 써냈다. 시인 두보가, 그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 好雨知時節,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빗물들이 떨어지면서 우연히 만나고, 다시 없을 그의 시를 만들어냈다.

 


---
알튀세르의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이라는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비가 온다.
그러니 우선 이 책이 그저 비에 관한 책이 되기를.
(『철학과 맑스주의』,알튀세르, 35쪽)

클리나멘이 일으키는 편의(기울어짐) 따라 원자들의 마주침을 만든다. 그 마주침은 “원자들에, 편의와 마주침이 없었다면 밀도도 실존도 없는 추상적인 요소들에 불과했을 바로 그 원자들에, 그것들의 현실성을 부여한다.(같은 책, 39쪽)”

그러니 우연한 마주침에 관한 영화로서, <호우시절> 허진호 감독의 '비'라는 소재는 재미있는 선택이다.(물론 그 '비'의 목적론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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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추모 비판과 반비판들

 
<노무현 추모 비판에 대한 최원씨의 반비판에 대한 답변
>


참세상에 기고한 <사회운동, 노무현의 그림자에 안녕을>이라는 글에 대해서 최원씨가 논쟁을 제기하셨군요. 글들의 순서는 이렇습니다.

(1) 참세상에 기고한 글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renewal_col&id=1629&page=1
 
(2) 최원씨의 비판 (및 댓글에 저의 답변, 이에 대한 최원씨의 반비판-질의)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ers_news&nid=53282
 
(3) 최원씨의 저의 댓글에 대한 반비판-질의
http://blog.aladdin.co.kr/trackback/droitdecite/2888296

답변을 요청하시지만, 제가 깊이 논쟁할 사정은 되지 못해서 몇가지만 간단히 적겠습니다. (3) 글에 트랙백을 겁니다.

첫째.

최원씨가 저에게 묻기 전에 먼저 답해야할 것이 있을 겁니다.

제가 (2)에 대한 댓글 답변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말이죠. 저는 노무현 추모동참이 정신분석학적 의미에서 "애도"라고 등치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둘을 혼재해서 쓰시는 것으로 보이는데, 제가 보기에는 다른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김진숙 지도위원은 노무현을 "애도"하고 있지만 "추모"에 동참하는 정치적 실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 둘을 어떤 근거로 연결할 수 있는지 오히려 궁금하군요.

둘째,

제가 쓴 글중에 가장 문제제기하시는 부분이 "정세에 대해서 정치철학적 혹은 정신분석학적 비판과 정치적 분석은 하나의 실체에 대해서이지만, 사실상 다른 대상을 다루는 작업일 겁니다"라는 대목입니다.

"정치철학적 혹은 정신분석학적 비판"에서 <혹은>이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한 이유는 최원씨의 논평이 양자의 경계에 있거나 혹은 그 경계를 흐리는 방식의 작업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데리다의 "유령론"이 과연 학제상 정치철학에 속하는지 정신분석학에 속하는지 모르겠지만, 최원씨가 사용하는 논거의 하나가 아닌가요?) 첫번째 이야기와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마치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처럼 가능하지 않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최원씨는 글에서 "노선 차이이지, 정치철학 대 정치의 대상 차이라고 보이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는데요, 문제는 노선상의 차이를 드러내는 최원씨의 논거가 정세분석보다는 주로 정신분석학이나 정치철학에 근거해있다는 점입니다.

세째,

이에 대해서 "노무현 사망이라는 사건 이후 어떻게 변했길래, '하던 거 계속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시는지" 물으셨습니다.

제 글 중에 "노무현을 상대화하고 다른 쟁점들을 부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민주주의의 문제와 분리되어있다거나 혹은 하던것 계속하자는 식에 불과한 것(따라서 기존의 실천과 다른 효과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는 뉘앙스가 깔려있는)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죠"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던 거 계속하자는 거 맞습니다. 하지만, 대중의 분노가 노무현 사망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가시화"되는 이상, 오히려 하던 거 잘 하는게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 분노를 노무현 사망을 "매개"로 자신들에 대한 정치적 지지로 조직하려는 또다른 신자유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경합한다는 것입니다.

네째,

질의하신 "3번"은 말 그대로 노선상의 입장차이이겠죠. 그에 대해서는 별도로 글을 쓸 생각이니 간단하게만 언급하자면,

6.10 집회(저는 2부 노무현 추모문화제 시작될 때에는 자리를 떳습니다만)에서 주된 구호는 (오마이뉴스의 헤드라인을 인용하자면)
"민주개혁 세력 하나됐다, 2012년 정권을 바꾸자"
라는 겁니다.

민주당이 주도하는 6.10준비위를 상설연대체로 전환하자는 것은 확정되어 있고, 이후 내년 6월 지자체선거, 2012년 총선, 대선을 공동대응하자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결국 87년 "국본"처럼 보수야당의 주도아래 전선이 형성되고, 민중운동이 여기에 복무하는 판인 셈입니다. 오마이뉴스의 저 헤드라인, 그리고 집회 현장에서 사회자와 연사들의 발언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지난 10여년간 사회운동이 제기해온, 보수야당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운동의 형성과정이, 한순간에 22년 전으로 후퇴하는 것이죠. 이명박이 20년전으로 후퇴했으니 우리 대응도 그러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어쩔 수 없겠습니다. 이런 정세에서 민주주의 제기를 중심으로 실천하자는 주장의 정세적 의미도 명확합니다.

---
충분한 답변은 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노선 상"의 입장차이에 대해서라면 몇번의 트랙백 토론으로 생산적인 무엇이 있을까도 싶군요. 당장 운동판에서 "실용주의"를 빙자한(이명박 당선후에 운동판에도 "실용주의"가 유행이죠.ㅋ) 기회주의와 싸우기에도 정신없는 상황이기도 하니까요.

최원씨의 주장이 그런 정치적 기회주의와 같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의 정세에 개입하는 순간 같은 효과를 낳는 것으로, 심지어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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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사망, 사회운동의 패닉


노무현 사망 이후,
전직 대통령의 투신자살이라는 사실도 충격적이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진보적인 사회운동 진영의 패닉 상황이 오히려 더 황당합니다.
노사모는 울고 불고 할 수 있지만, 사회운동은 보다 냉정하게 상황을 인식해야하는것이 아닐까요.

어제는 민주노총 임성규 위원장이 등 조문을 가고, 오늘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의장은 노무현이 "민중후보"였다..는 말씀을 하시네요.죽은 노무현도 기가 막힐 일이죠. 그러니 노무현을 추대하고 지지하는 게 본심이었다는 말씀이죠. 민주노동당 선거운동 하던 때에도 말입니다.

문성현 민주노동당 전 대표는 (노무현과) "어떻게 보면 우리는 역할분담을 하는 것이 아닌가도 싶었다"고 했다는데 미사여구없이 너무 솔직하시군요. 상층 인사들께서는 그게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고 고백하시면 순진하게 열심히 놀아난 아랫것들은 뭐가 됩니까?

[프레시안 기사] 진보 인사들도 봉하로…"노무현은 민중 후보"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서 죽음을 높여부르는 "서거"라는 표현을 노동조합이나 사회운동 진영도 무비판적으로 사용하고 있지요. 열사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쓰지 않았던 말. 누구는 그게 뭐가 문제냐고 하시던데..

문제제기를 하니 어떤 분은 "조갑제도 그런 말 하던데"하는 말씀. 조갑제와 노무현의 거리보다, 노동운동과 노무현의 거리가 가깝다고 느끼니 그런 말씀이 나오겠죠. 오히려 조갑제만큼도 당파적이지 못한 노동운동이 부끄럽습니다.

민주노총이 집회 자제를 발표하는 가운데 건설노조 파업은 고립되고, 용산학살 사건, 박종태 열사 투쟁, 쌍용차 파업투쟁 등 모두 관심밖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핵실험이 있었는데요,
관련해서도 "국상 중인데 어쩌구"하는 논평이 참여연대는 물론이고 진보신당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상황에 할말이 그것밖에 없습니까? 오히려 상황이 이렇게까지 오게 만든 이명박 정부의 6자 회담 훼방정책, 북한에 대한 "악의적 무시" 정책을 북한의 모험주의와 함께 비판해야죠.

그런데도 노조에서도 반 이명박 정서가 확산되는 정세에 어떻게 묻어갈까에 대해서 "실용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주류입니다. (민주노총의 조문도 그런 맥락이겠죠.) 실용이 정치를 대체하는 상황이랄까요.

2004년 탄핵당시와 비슷하게 전선이 형성됩니다. 그 때보다 더 우울한 것은 당시에는 보수야당의 정치쟁점에 휩쓸려가는 것이 "우파-국민파" 혹은 "다함께" 정도의 문제였다면 지금은 "거의 모든 운동권"의 입장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물론 모두 그런 입장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이런 반성-돌아봄도 있습니다. (사실 노무현 정권에서 돌아가신 열사들의 명단을 보면서는, "아, 그들이 모두"라는 탄식이 나옵니다.)

[한국인권뉴스] 노무현 前 대통령 재임 중 산화한 노동자민중 열사들을 기억하며
http://www.k-hnews.com/home/bbs/view.php?id=newest&no=1600


[참세상] 민주노총 지도부 조문 유감 : 다시 두 통의 유서를 아프게 읽으며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3164


아래는 이런 상황에 비판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 노조에서 토론을 위해서 썼던 글.(조금 첨삭)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운동들은 대중의 정념에서 거리를 두고 상황을 보아야할 때입니다.
 


정세에 대한 몇가지 의견


1. 노무현 사망

- 우선, 노무현 사망은 신자유주의 노선의 인민주의(포퓰리즘) 정치인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분석해야함 (20세기 후반부터 각국에 나타나는 인민주의 정치는 기존정치에 대한 거부와 공격을 중심으로 하는 ‘반대의 정치’로서 부패무능한 정치가와 제도를 공격하는 ‘원한의 정치’를 통해 대중을 동원)

- 이는 노무현 사망으로 인한 쟁점이 이명박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것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들의 인민주의적인 대중동원과 “원한의 정치”에 종속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함. (이런 점에서 2005년 노무현 탄핵국면과도 현재를 비교할 수 있음)

- 단기적으로는 이명박에 대한 반대층이 이를 계기로 집결하고 정국을 주도할 것임. 이런 맥락에서 대규모 촛불집회가 예상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민주당의 원내 공세도 강화될 것 ==>따라서 이명박 정권의 정치적 위기, 이른바 MB악법의 단기적 지연이 예상됨

- 이러한 단기 국면은 당장 MB악법을 마주하고 있고, 공공기관 선진화 관련 정책이 추진되는 상황에서 당장은 노조운동이 “활용가능한 정세”로 판단할 수도 있음. 그러나 기존 노동자민중운동에 쟁점, 즉 용산학살/박종태열사/건설파업/쌍용차투쟁 등은 모두 정세에 묻힐 수밖에 없음. 이 쟁점들은 이명박에 대한 정치공세만으로는 해결불가능

- 이 상황의 정치적 구도 자체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것은 단기적인 효과에 불과함. 보다 멀리보면, “노무현 사망효과”는 정치적 쟁점의 구도를 지난 정권에서 “노무현이냐 아니냐”로 만든 것처럼, “이명박이냐 아니냐”로 제한하게 될 것임. 이는 지속적으로 노동자민중운동의 의제들이 상대화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

- 문제는 민주당이 5/19 발표한 “뉴민주당플랜”에서와 같이 정책적으로 한나라당과 더욱 수렴하고 있다는 점. 더구나 초유의 경제공황 상황에서 민주당은 전혀 대안세력으로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중기적인 시야에서도 문제. 즉 노동자민중운동이 정치적 대안을 적극적으로 스스로 구성하고 부각하는 것이 더욱 시급하고도 중요
 
2. 북한 핵실험-남한 PSI 참여

- 북한의 핵실험은 2008년12월의 6자회담 교착(이명박 정권의 발목잡기), 2009년1월 이후 오바마의 “선의의 무시” 전략에 대한 도전, 장거리 로켓 발사 이후 4.13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 등 압박에 반대 등으로 이미 예상되어 왔던 것임

- 이에 대해서 UN은 안보리에서 대북제재를 논의하겠다는 입장(5.25)

- 정부는 26일 아침 PSI 전면참여를 발표함. 이명박 정부는 PSI라는 쟁점을 통해서 노무현 사후 보수야당(창조한국당, 친박연대)을 동원하려 할 것임.

- UN의 대북제재, 남한 정부의 PSI 참여는 북한의 입장에서는 “공화국에 대한 사실상 선전포고로 간주”한다는 것으로, 서해교전 등 전쟁위기 고조. 문제는 2008년 이후 서해교전의 교전수칙 변경으로 인해(기존의 5단계 대응에서 3단계 대응으로) 국지전은 위험의 증가는 물론, 국군의 서해안 지대한기지 폭격 검토 등과 연결되어 전면전으로 확전도 심각하게 우려됨

3. 결론

- 노무현 추모-반이명박 투쟁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노동자민중운동의 쟁점(MB 노동악법, 쌍차투쟁, 건설투쟁, 용산-박종태 열사투쟁 등)을 오히려 정세적으로 적극적으로 제기해야

- 북핵실험, 남한의 PSI 참여로 전쟁위기가 고조될 수 있으므로 반전평화 운동에 대한 노조운동의 관심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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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학생포럼- 대학, 비정규 노동을 말하다


"2009 학생포럼- 대학, 비정규 노동을 말하다"
라는 행사가 열립니다.

소개를 보니 이렇군요 ^^;
- 학교비정규직, 보육, 시설관리, 예술종사직, 미화 등 여러 업종을 초월해 하나의 조직으로서 서울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공공노조 서울경인공공서비스지부]가 [대학 비정규직과 함께 하는 학생 네트워크]와 함께 진행하는 사업입니다.
- 여러 동지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랍니다. 대학생이 주된 대상이기에 직접적으로 홍보해주시기 바라며, 대학생 이외 여러 사회운동 단위들에서도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 받아보신 동지들께서도 함께 적극적인 홍보를 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혹시 블로그를 보시는 대학생 분들이 계시면 관심갖고 참여하셔도 좋을 것같아요.
오랜만에 블로그에 남기는 포스트가 광고가 되어 버렸군요.

부활좀 해야겠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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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최종병기그녀



금융위기가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는 시기에, 블로그에 글을 잘 올리지는 않고 있지만 가장 몰두하게 되는 독서는 역시 금융위기와 공황,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관련된 책들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상하게도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이런 위기와는 상관없어 보일지도 모르는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최종병기그녀(最終兵器彼女).

자세한 설정을 여기서 소개할 여유는 없지만, 세계가 멸망해가는 전쟁통에 "최종병기"가 된 치세와, 그녀의 남자친구 슈지의 이야기다. 한편으로, 여성의 신체를 군사무기로 전유하는 설정에 대해서 페미니즘적 비판이 있기도 하고, 군국주의적인 설정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렇게 비판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정작 "최종병기그녀"가 보여주는 세계는 전혀 가상적이다. 말하자면 전혀 있을법하지 않고, 그래서 일종의 판타지.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는 매우 현실적이라고, 혹은 현실과 닮았다고 말할 수 있다.

둘이 사랑하던 말던, 아파하던 말던, 세상은 전쟁으로 멸망할 예정이다.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당연히 희망도 별로 없다. 마지막편에서는, 주인공들이 있던, 후카이도에  마지막 남은 마을마저 폭격과 해일로 사라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금융위기의 시작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뒤메닐-레비나 윤소영선생의 분석처럼 2012/13년 경에 최종적 위기를 경험하게 될까, 혹은 지금일까, 혹은 더 먼 언젠가일까,

여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우리의 주관적 희망과는 무관하게 점점 더 최악으로 상황으로 전개되어갈 것이다. (하지만 치세와 슈지가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그러나 끝까지 사랑하고 살아남고자 했던 것처럼)

***
너희들이 무슨 점쟁이냐는, 혹은 너희가 뭔데 그렇게 오만하게 예상하냐는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아마 그렇게 말하는 운동권들의 심리는 순전히 사태의 진실을 믿고싶지 않은 주관적 희망 때문일 것이다. 희망이 무지의 근거가 될 수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니면 어떤 선의에 기반한 희망들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세상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래도 최후의 희망은 노동자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혹은 구하는 것일테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어떤 준비라도 다 할 것이다. 이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있는 이상, 우리는 적어도 5년 후의 시각에서 현재를 보아야한다. 매순간 그렇다. 5년후에 지금을 돌아본다면, 그 때 무엇을 했어야한다라고 생각하게 될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상황을 인식하는 우리 모두는 전혀 다른 책임감으로 행동해야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결과가 만들어질지는 전혀 알수 없다.
다만 시간은 그저 '역사의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최종병기그녀"의 시간대, 그 시간대에 살아가는 치세와 슈지의 시간대는 현실과 너무나 닮아있다. 무엇에 최선을 다하는지는 치세와 슈지와는 다르겠지만(이건 연애얘기는 아니니까), 그/녀들의 말처럼, 살아남아야한다.

하지만 어쨋든, 결과가 세상이 망하는 것이거나 혹은 아니거나, 알 수 없으니 우리는 치세와 슈지처럼,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적어도 아직은 그/녀들 보다는 좀 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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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연금술사, 불한당들의 세계사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사실, 내가 제목에 적은 두 책은 일종의 판타지들(환상문학)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그리 큰 상관은 없어보인다. <연금술사>는 게다가 판타지라기 보다는 일종의 "처세술" 혹은 "자기계발서"로 이해되는 분위기가 있는 것같다. (덕분에 책은 아주 많이 팔린 것으로 안다.)

코엘료도 남미 문학가이니, 그리 보면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닌 것같다. 어쨋든 보르헤스가 쓴 언어로 읽고 쓰는 사람이니까.


불한당들의 세계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최근에 보르헤스 연작을 읽는 중인데, 모두 다섯권 짜리다.
첫째 권인 <불한당들의 세계사>에는 천일야화의 한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꿈을 꾸었던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는 제목이다. 천일야화 351째 밤의 이야기. (이 대목만은 "뻥"이 심한 보르헤스에게도 "예외적으로" 진짜인데, 실제로 천일야화 351째 밤의 에피소드는 비슷한 내용이다.)

이 짧은 에피소드는 코엘료의 <연금술사>의 전체 구조와 같은 내용이다. 아마도 코엘료는 보르헤스의 글을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코엘료는 어디에도 보르헤스도, 심지어는 천일야화도 언급하지 않는다.(물론 번역된 책이 아닌 다른 글에서 언급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어판에는 언급이 없다.)

그렇게 보면, 참 실망스러울 수 밖에.
적어도 소재의 출처는 밝혀주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한편, 앞서 말한 것처럼 코엘료의 <연금술사>는 어느 정도는 유행하는 자기계발서들의 맥락에서 소비되는 것같기 때문에 더 그렇다. 예를 들어 베스트셀러로 역시 대박을 터뜨린 <시크릿> 같은 책이 유행하는 맥락, 모든 것을 "자아"의 문제로 환원하는 식의 사고방식. (종교적으로는 80년대 이후 미국의 뉴에이지 운동, 신사상 New Thought운동 등과 관련되어 있다. 기존 종교의 위기에 대한 대응의 하나인 셈인데, 이에 반대하는 극단은 종교적 근본주의다.)

뭐, 어찌 보면 천여년 전의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재현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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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 금융위기,사회운동들도 긴장해야.

미국에서 리먼 파산 신청 이후 불어닥치는 금융위기는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국내 금융시장에 대한 파급은 더 엄청난데, 한국 경제의 금융화, 그리고 세계화(미국에 대한 금융종속)의 심각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죠.

이명박 정권과 지배계급의 대응을 보면, 과연 이들이 "국민경제"를 책임질 수 있는 세력인지 조차도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산업은행의 민영화(투자은행화) 프로세스의 일환으로 리먼 인수를 추진해오고 있었고, 까딱했으면 국가 전체를 말아먹을 뻔 했습니다. (산업은행 총재인 민유성은 리먼 서울지사장이었죠.)

그뿐은 아닙니다. 페니메이와 프레디맥에 대한 한은의 400조 투자는 얼마를 회수할 수 있을지 전혀 장담할 수 없고, 한은은 이미 잘못된 환율정책의 설겆이에 200억달러 (22조)를 털어먹은 바 있습니다. 한국투자공사KIC는 이번에 부실위기로 BoA에 인수된 메릴린치에 20억달러(2조)를 투자했었는데, 그것도 큰 폭의 손실로 이어질 전망.

일부에서는 이런 이명박 정권 경제팀의 행태를 보면서, 이들이 몰라서 그런게 아니라, 일부러 한국 경제위기를 도발하고 있고, 제2의 IMF같은 사태를 통해서 개인적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강만수 같은 자야 이미 98년 IMF 협상팀을 이끌면서 IMF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던 자입니다. 그 과정에서 공기업 매각과 같은 엄청난 국부유출이 일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엄청난 리베이트가 오갔을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고 있습니다. 최근 금융위기 과정에서도 IMF는 일관되게 강만수 경제팀을 옹호했는데, 말이 안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쯤되니 사람들 가운데서는 강만수는 사실 IMF의 스파이가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정부 고위관료들이나 특히 경제관료, 금융계 고위인사들은 자녀들이 미국국적을 갖고 있는 등 거의 한국인이라고 볼 수 없는 자들이 다수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어떤 종류의 '상식적인' 애국심을 요구하는 것도 우스운 일일 수 있습니다.

한편, 이 과정에서 정부는 국민연금을 조기에 폭락 증시에 투자한다고 합니다. 이쯤되면 정말 막가자는 것이지요. 상식적으로도 이런 투자는 없습니다. 폭락증시를 무턱대고 몸으로 막겠다는 것인데.. 230조 규모인 연금이 올해 무리한 주식투자로 6조3천억원의 손실을 기록했습니다. 방금 나온 뉴스를 보니 국민연금공단이 파산신청을 한 리먼브라더스와 매각된 메릴린치, 긴급자금 지원을 요청한 AIG에 7000만 달러가 넘는 투자했다고 하는데 엄청난 손실로 이어지겠죠.(관련기사 : http://www.ytn.co.kr/_ln/0102_200809161801471729)

전체 규모에 비해서도, 단기간 손실로 보면 엄청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추가적인 손실은 국민연금에 대한 국민적인 불신도 가속화할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위험합니다.

(이미 연기금의 금융화를 촉진할 기금운용공사 설립이 구체적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에서, 공공노조, 사회연대연금지부를 비롯한 사회운동의 대응이 중요합니다.)

이번 위기가 아마 미국 헤게모니의 최종적 위기는 아닐 것이라는 전망이 아직은 우세할 것같습니다. 그러나 금융위기의 위험에 대해서 사람들이 체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겠죠. 환율 폭등으로 이후 물가도 엄청나게 오르고, 경기후퇴도 심각해질 것인데, 자영업자의 대거 몰락을 중심으로 큰 사회적 문제가 될 것입니다.

당장 생계가 문제가 되는  빈곤가구가 크게 늘 텐데, 사회운동의 비상한 대응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요구를 어떻게 제기할 것인가..

특히 이 과정에서 당면한 생계의 어려움에 대한 항의를 넘어서 금융세계화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인가, 대중의 불만을 어떤 정치적 지향으로 모아낼 것인가..와 같은 문제들. 이를 위해서는 긴박한 정세에 맞는 정세토론-분석과 대응, 정치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순발력이 다시, 요구되는 타이밍. (상반기 촛불 정세의 무기력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미국 헤게모니의 최종적 위기는 아마 몇년후(5년 정도?)로 예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때까지 시간이 별로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대안사회를 위한 이념과 운동, 조직을 재건하지 못한다면, 미래는 야만일 수밖에 없겠죠.

그런 점에서 이번 금융위기는 사회운동이 이후 미국헤게모니의 최종적 위기--그것도 금융위기의 형태를 취할 텐데--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를 테스트할 수 있는 장일 뿐 아니라, 자신을 재구성할 수있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합니다. 상반기의 촛불행진에 이어서 이런 정세에서, 사회운동의 긴장감, 그리고 순발력과 행동이 더욱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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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롬, 불로그 글쓰기 안되네요, 깔끔하긴 하지만.

레니님의 [구글의 새 브라우저, 크롬 (Chrome)] 에 관련된 글.

진보넷 블로그 에디터는 크롬에서 작동을 하지 않는 것같습니다. 글을 끄려고 하면 에디터가 보이지 않고, 트랙백 보내기 같은 것을 해도 html 소스코드가 그냥 노출되는군요.

웹표준의 문제만은 아닌 것같고, 이런 응용프로그램은 제작자가 손을 봐야할 것같기도 하고 그렇기는 합니다만.. 엑티브X도 아닌데 실행이 안되는 건 좀 안습. (하지만 또 진보넷 이메일 에디터는 작동을 하는군요. 어찌된 일일까 싶습니다)

깔끔하긴 하지만 단점도

외형상으로 깔끔하긴 하지만 단점도 아직 많다는 생각입니다.
파이어폭스처럼 부가기능이 많지 않은 것은 출시 초기이니까 금새 보완될 것이라고 봅니다만,

일단, 각 탭마다 독립적인 프로세스로 운영되는 건, 다운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지만 덕분에 시스템 자원을 훨씬 더 많이 차지합니다. 각각의 탭이 다른 프로그램처럼 운영되는 건데, 마치 외형상으로는 하나의 프로그램 같지만, 실제로는 4개의 탭을 열면 4개의 응용프로그램이 실행되는 것과 같은 효과인 것이죠.

파이어폭스와 비교해봤을 때, 크롬에서 탭 2개만 열어도 파이어폭스에서 탭5개를 여는 이상으로 메모리를 차지합니다. 메모리 많이 쓰는 분위기라 문제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다들 그런 건 아니죠. 게다가 CPU 사용도 있고.

그리고 아직은 즐겨찾기(북마크)를 창에 고정할 수 없네요. 와이드 모니터를 쓰는 경우에는 좌우여백이 많기 때문에 북마크를 왼쪽 창에 고정시키고 쓰는 경우가 많은 데 이것도 안됩니다.

엑티브X 등 문제

그밖에 구글에서는 일부 인터넷 사이트(은행, 정부기관)에 대해서는 엑티브X를 사용하도록 화이트리스트를 만들어서 프로그램을 보완할 수도 있다고 했다는군요. 일반 이용자 입장에선 편하긴 할텐데, 그보다는 오히려 정부나 공공기관들이 더 이상 웹표준을 지키지 않는 행태를 할 수 없도록 엑티브X같은 악성프로그램이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분위기가 더 중요할 것같습니다. 그래서 좀 반대.

서로서로 웹 표준을 지키는 노력이 필요할 것같고, 각 웹브라우저 호환성을 위해서 배려하는 것도 필요할 듯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오페라 브라우저가 아주 맘에 들긴 하지만(가장 속도도 빠르다고 느낍니다. 인터페이스도 좋고.) 결정적으로 Gmail에서 한글로 글 쓸때 오류가 있어서 사용을 못하거든요. 구글이 문제인지 오페라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당분간은 진보넷 블로그에서 글쓰기도 그렇고 해서 파이어폭스를 주로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 파이어폭스 3.1이 빨리 나와야할텐데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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