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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기고] 촛불집회, 벌써 횟수를 줄일지를 고민할 때?


촛불집회, 벌써 횟수를 줄일지를 고민할 때?

[기고] 7월5일 ‘국민승리’ 선언했지만, 승리한 항목은 없다



지난 7일,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촛불 집회 주최 횟수를 줄인다"라고 발표했다. 대책회의가 주최하지 않는 날은 다른 단체들이 할 수 있도록 하고, 불매운동이나 국민투표 요구와 같이 다양한 운동방식을 병행하겠다는 내용이다. 이런 결정은 대책회의 내부 논의 과정에서 촛불집회의 방향과 관련된 진통이 있은 후 발표되었다. 촛불집회를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장기화하고 완강하게 진행하는 방식은 아니라는 입장이 있었다. 통합민주당을 참여시키고 국민투표를 제안하는 등 제도정치권 안에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집회와 행진이라는 집단적인 정치행위와는 다른 방식의 운동으로 전환해야한다는 일부 시민단체들의 입장이 반영된 결과다.

7월 5일 집회를 통해 촛불 운동의 승리를 선언했으니 이제는 좀 여유 있게 가도 된다는 뜻이었을까? 하지만 정작 상황은 더 녹록지 않다. 시청 앞 집회는 폭력적으로 원천봉쇄되고 있으며, 대책회의 실무진들은 수배자가 되어 조계사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집회 전단을 붙이던 시민이 연행되어 구속영장 청구를 받고, 조중동 불매운동에 동참한 네티즌들은 출국금지를 당하는 황당한 상황이다. 때마침 통합민주당은 국회 등원을 선언했다. 이런 국면을 지칭할 때에는 "승리했다"라는 말보다는 "역공당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해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이 과연 촛불집회 횟수를 줄이고 운동방식을 전환할 것을 고민할 때일까.

모든 개혁언론들과 대책회의조차도 "촛불분열"로 비추어질까 우려해서 부각하지 않고 있지만, 사실 촛불은 심각하게 "논쟁 중"이다. 진행 중인 논쟁을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말할 때, 오히려 진정한 쟁점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입장으로 결정되기 쉽다. 촛불집회의 방향에 대한 대중적인 토론이 지난 6월10일 대회 이후 이루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훨씬 더 심각한 방향전환이 이루어지는 이 순간에 논의는 오히려 대중적인 공간이 아니라 대책회의 운영위에서만 논의되고 있다. "대표성"도 불분명한 공간에서 말이다.


▲  7월 5일 촛불 집회/ 참세상 자료사진

시민들의 지지

모 인터넷 신문에 실린 박원석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의 최근 인터뷰를 보자. “촛불집회의 주장에는 공감하지만 집회를 지속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도 많은 만큼, 운동의 방식을 다양하게 만들어갈 필요가 있었다”는 언급이 있다. 개인의 입장이라기보다는 대책회의 안에서 진행된 논의의 결론을 소개하는 발언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지금의 상황을 보자. 다른 운동방식이 나오기도 전에 촛불집회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집회를 지속하려는 조직된 노력이 사라지는 사이에, 자발적으로 모이는 소수의 시민들은 고립되고 있는 상황이다. 시청광장에서 이루어지는 시민들의 고립이 그 "다양한 운동방식"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이제까지 촛불 운동이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왔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야 할 때다. 그리고 이 운동이 완강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생각할 때다. 그것은 "촛불집회"라는 집회의 독특한 양식 --아마도 "평화로울" 것이라고 기대되는--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요구 사항에 시민들이 공감했기 때문임을 기억하자. 오히려 집회의 양식은 "촛불"이라는 상징만 일관되게 유지되었을 뿐, 시기에 따라 꾸준하게 변화해왔다.

특히 그 요구라는 것은 비록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로 촉발되었지만, 공기업, 의료 등 공공서비스 민영화 반대, 대운하 반대, 정권의 교육정책 반대 등으로 확장되어 온 것이 이제까지 과정이다. 이 촛불 공간 속에서 시민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불만을 자신의 언어로 발견하고 발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집회는 매순간 문화제에서 침묵시위로, 가두행진으로, 전경차 끌어내기로, 그 양식의 다양한 변화를 겪으면서도 요구를 꾸준히 확대해왔다. 대책회의가 머뭇거리는 사이에도 "정권퇴진"을 외치는 상황에 이르렀다.

대책회의 내 일부단체들이 촛불집회 축소의 대안으로 제시한 쇠고기 재협상을 의제로 한 국민투표라든가, 미국산 쇠고기 불매운동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요구가 이미 시민들의 목소리로 분출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부 시민단체들이 신자유주의 반대로 촛불을 확장해가는 시민들을 오히려 뒤에서 발목을 잡고 후진하려는 상황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시민들의 대표를 자임할 근거가 있을지, 아니면 대책회의 기존 집행위가 구속, 수배된 이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이들이 적어도 지금까지 진행된 촛불집회에 어떤 발언권을 요구할 수 있는지까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 반대, 요구를 더 확대하고, 밀고갈 때

여전히 문제는 시민들이 외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대를 더 확장하고 구체화하고, 일관되게 전선으로 모아내는 일이다. 공기업, 의료 등 공공서비스 민영화 반대, 대운하 반대, 정권의 교육정책 반대와 같은 것들이 단지 이명박 대통령이 "미친" 놈이기 때문에 하는 정책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일관성을 가진 사회, 경제 정책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하고 싸워가도록 투쟁을 지속하는 일이다. 비록 대책회의는 "국민승리"를 선언했지만 정작 승리한 항목은 어느 것도 없기 때문이다.

공기업 민영화는 이름만 "선진화"라고 바꾸어 추진되고 있다. 정부가 7월2일 발표한 "경제안정 종합대책"(2008년 하반기 경제운용방향)에서는 여전히 공공부문 구조조정과 민영화를 추진하겠다는 내용을 "공기업 선진화 방안" 항목 안에서 제시하고 있다. 정책발표 시기만 두어달 늦추어서, (아마도 정세가 반전되리라 기대되는) 8~9월에 할 뿐이다. 대운하만 하더라도, 촛불집회가 사그라든다고 판단할 때 언제든지 다른 이름으로 부활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3일 대운하와 관련해서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그룹의 검토가 있었으면 좋겠고, 이것을 국민들이 한 번 더 들어보고 판단하는 게 어떻겠냐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다시 추진할 의사도 있음을 밝히고 있다.

운동의 방식을 다양하게 확장하는 것도 의미 있다. 각자가 할 수 있는 것을 더 잘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핑계로 촛불집회로 상징되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정권반대 투쟁을 고립시키는 것은 정권이 원하는 것일 뿐이다. 이미 청와대는 7월5일 대책회의의 청와대 면담과 관련하여 "촛불집회 중단"이 조건이었다고 밝히지 않았는가? 그것은 현재 국면을 정리하려면 우선 시청광장의 촛불집회라는 상징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먼저 알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히려 더 완강하고 끈질긴 싸움과 요구의 확장이다.

노동운동의 계속된 무능

한편, 이러한 과정에서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운동의 대응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 노조운동은 이 국면에서 거의 중요한 쟁점들에 대해서 "거저먹은" 셈이다. 특히 공공부문이 그런데, 촛불집회의 과정에서 여론악화를 우려한 정부가 가스, 전기 등 기간산업과 건강보험의 민영화 포기 등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물론, 공기업 민영화가 아니라 "선진화"라든가 건강보험 민영화 포기라는 것은 영리병원 허용과 같은 의료민영화 정책이 계속 추진되는 한 말장난일 뿐이다. 그러나 적어도 애초에 이명박 정권의 주요관료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올해 안에 끝내는" 상황은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노동운동은 자신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고유한 요구를 제대로 촛불집회에 결합시켜오지 못했다. 예컨대, 의료, 교육, 공기업사유화 등 다양한 곳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대가 결합하는 와중에도 왜 신자유주의 문제의 결정판인 "비정규직 문제"는 거의 언급하지도 못했을까? 불안정노동철폐연대와 같은 일부 단체들이나 비정규직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고, 이주노조 캠페인도 벌어졌으며 이랜드, 뉴코아,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촛불집회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결합하긴 했다. 그러나 너무 미약한 시도였다. 정작 광우병 대책위 안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라면 가장 "정통할" 민주노총이 제기하지 않는 마당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저임금 노동자의 생존권이라고 할 최저임금 현실화와 같은 쟁점을 광장에서 결합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노조운동은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에 노조가 관련된 주요한 과제 중 하나(공공부문 사유화 저지)에 대해서는 단지 무임승차했으며, 또 다른 하나(비정규직 철폐)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못한 셈이다. 비록 운수노조를 중심으로 한 미국산 쇠고기 반출 저지 투쟁, 총파업이 있기는 했지만 노동자들의 요구가 시민들의 다른 요구와 다르지 않음을 시민들에게 말하고 함께 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이 거대한 싸움이 진행된 과정에서도 노동운동은 여전히 광장의 시민들에게는 "손님"에 불과한 상황이다.



촛불의 양면성 속에서 우리는 어디로 더 전진할까

굳이 노동운동 이야기를 꺼낸 것은, 촛불 행진이 어디로 더 확장되어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다. 지금의 촛불집회는 여전히 양면적 혹은 복합적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대중이 모인 것을 기억한다. 그 기억 속에서 미선이, 효순이 살인미군 규탄 촛불도 있지만 노무현 탄핵반대 촛불, 월드컵의 붉은 악마라든가, 군 가산점 논쟁, 황우석 논쟁, 영화 디 워 논쟁과 같은 것도 있다. 정치적 불만이 표현되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인터넷과 미디어 문화 속에서 형성되고 강화된 맹목(그것이 불과 직전에는 민족주의적이거나 발전주의 같은 것이기도 했다)이 확산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2008년 촛불은 어딘가에서 돌출한 사건이 아니라 이런 맥락에서 형성되어온 현상이라는 점에서, 이 유례없이 완강한 촛불집회도 여전히 복합적인 성격을 그 안에 갖고 있다.

이 속에 있는 어떤 경향은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것처럼 신자유주의 반대를 위한 운동으로, 일상의 민주화와 문화혁명으로 발전해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또 어떤 경향은 운동의 부정적 수렴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도록 한다. 따라서 촛불집회의 요구를 쇠고기 수입문제에 가두지 말고 더 열어가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촛불 안에서도 사회운동들의 역할이 여전히 존재한다.

또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여러 주체가 이 운동 속에서 만나고 결합하면서 하나의 방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여성도 시민이라는 것을 촛불 광장에서 확인하는 일도 그래서 중요하다. 촛불집회에서 "시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노동자=시민", "이주노동자=시민", "여성=시민"들이기도 하다. 그것을 광장에서 "국민"으로 불리는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대화하고 논쟁하면서 주체와 쟁점을 열어가야 한다. (그럴 때, 사회운동도 광장의 시민들로부터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운동을 결산할 때 인터넷 카페나 다음 '아고라'만은 아닌 다른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운동의 조직화"를 사고할 수 있다.)

대책회의가 말한 것처럼 촛불집회가 가야 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임은 분명하다. 이 운동이 퇴행하지 않고 더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촛불집회와 행진에 참여했던 모든 시민들이 함께 고민해야할 시점인 것이다. 더구나 대책회의를 통해 시민들의 대표를 자임하고 있는 사회운동들이라면 이 논의에 참가하는 책임은 더 엄중하다는 점을 명심해야한다.(그 대표성을 비록 아무도 인정해준 적은 없지만 그 현실적 영향력이란 것이 어쨌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렇다.)

이미 해왔던 것처럼 이명박 정권은 자신들의 경제정책으로 인한 물가폭등, 민생파탄의 책임을 촛불집회에 물으면서 정세를 역전시키려할 것이다. 정권도 이제 쇠고기 협상 문제없었다는 말만 되뇌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쟁점이 이미 그것만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록 전술적으로만 생각하더라도, 이때 필요한 일은 광장에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광장을 지키고 넓혀가는 것이다. 정세의 쟁점은 정권 스스로에 의해서도 이미 광우병 쇠고기 수입만이 문제가 아닌 것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고, 시민들이 먼저 모든 방면에서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신의 요구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쟁점들에 대해서 시민들과 사회운동이, 다시 광장에서 촛불의 방향을 토론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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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박한 정세가 공공노조에 요구하는 것들을 합시다!

이 상황에 대한 책임있는 결합논의가 하도 지지부진하여 답답한 마음에 새벽에 써서 임원 사무처 동지들에게 메일로 뿌린 글입니다.

각급 대중조직 단위가 굼뜨기 그지 없는 상황에서 모든 방면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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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투쟁 정세에 대한 대응과 관련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공공노조 임원 사무처 동지들에게 드립니다.

그 저 사무처 한명으로서 발언에 무게도 없고, 내부 조직화의 실력도 없고, 다음 사무처 전체 회의는 담주나 되는데, 정세는 너무나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소 염치 불구하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뭘까 생각하다가 동지들에게 메일을 한 통 띄웁니다.

운동권 앞에 멀찍이 앞서가는 대중들 : 공공성으로, 이명박 반대로 확산되는 쟁점

오늘도 촛불집회와 거리 행진을 다녀와서 집에오는 새벽 세시입니다. 오늘도 경찰의 집회 완전봉쇄를 뚧고 거리로 진출, 가두시위를 진행했습니다.
며칠동안 계속 매일의 야간 집회, 가두행진에 참석하면서, 매일 점점 달라지는 하나의 추세를 느낍니다.
광 장에 갇혀있던 시민들이 거리로 나가기 시작한 지난 토요일 이후, 대중들은 더더욱 운동권들보다 멀리 나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지금 정세에서 가장 주도적인 대응을 하고 있는 정파인 '다함께'에 대해서 조차 대중들이 더 나갈 것을 요구하고, 통제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 오마이뉴스 기사 참고 : 촛불들을 '지도'하지 마세요 촛불시위 참가자가 운동그룹 '다함께'에 보내는 공개편지)

대 중들은 이제 광우병 쇠고기를 넘어 이명박의 퇴진/탄핵/하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명박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대중의 반대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서명운동을 선전하면서 그냥 "가스 민영화, 의료 민영화를 반대하는 서명입니다"가 아니라 앞에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는"이라는 한 구절만 더 들어가면 대중들의 반응이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그냥 지나쳤을 시민들입니다. 이 시민들이 서명을 하면서 "의료 민영화는 절대 안되", "가스도 팔아먹어?" 라고 혼잣 말을 하면서 서명합니다.

자, 이제 대중들은 파편적으로만 느끼고 있던 삶의 불만들---의료 민영화에 대한 불안, 물가인상, 교육문제, 광우병 쇠고기와 식품안전.. 등과 같은 문제를 그 본질 "이명박 정권"의 문제로 연결해서 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명박에 대한 반대와 공공부문 사유화/시장화에 대한 반대가 굳건히 결합한 만큼, 이명박 반대 투쟁의 성패는 공공성 투쟁의 성패와 직결됩니다. 이것이 우리노조가 특히 인식해야할 핵심적인 정세의 한 부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그렇게 평상시에 선전하고 알리려고 했던 것들, 신자유주의 정책의 폐해, 민영화/시장화의 문제점에 대해서 대중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의 문제이자 정치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기업 투쟁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걱정하던 때는 갑자기 너무나 오래전으로 느껴집니다.

조합원의 분신항거, 그러나 다른 3년의 차이 : 이용석과 이병렬 사이

그리고 우리 조합원 동지가 분신했습니다. 지난 이용석 열사 분신 때를 생각합니다. 불과 3년여 전입니다.
당 시 연맹은 신속하게 비상중집, 단위노조 대표자 회의를 신속하게 소집하고 투쟁방침을 결의하고 매일 집회를 조직하고 투쟁했습니다. 비정규직문제에 대한 관심이 이제 막 형성되던 어려운 시기였지만 우리는 이 투쟁을 민주노총 전체의 투쟁으로 만들어갔습니다.

지금, 우리의 대응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전 국민적인 지지를 받는 쟁점인 쇠고기 수입반대, 이명박 반대 투쟁의 요구로 분신한 이병렬 조합원의 분신항거에 대해서 우리 조직이 가지는 긴장감이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전조직적인 긴장을 걸고 조직하는 노력도 저 스스로도 너무나 부족합니다. 조직동원, 문안동원 등 모든 측면에서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 집행되고 있지 못합니다. (물론 분신조합원의 진정한 "뜻"에 따르는 조직동원은 청계광장 집회 조직화일 것입니다.)

이제 조합원을 조직해야할 시기

비 상한 시기입니다. 대중들이 공공서비스의 문제를 남의 일이 아니라고 느끼고 있고, 정세를 운동권들보다 더 정확하게 "총체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더 멀리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주노총 지도부가 청계광장에 주저앉아 '재협상'을 외치는 순간에, 대중은 청계광장을 박차고 거리고 나가서 "이명박 탄핵/퇴진"을 외치고 있습니다. 전체 운동의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노조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 시기가 바로 투쟁해야할 시기이고 이명박의 공공부문 사유화 시장화를 막을 수 있는 동맹군을 거리에서 직접, "공짜로" 찾을 수 있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정세에서 노조가 보다 주도적으로 조합원들을 집회에 조직하고 투쟁이 더 강력하게 더 길게 전개될 수 있도록 결합해야합니다. 집회에 나가서 거리를 행진한 동지들은 말합니다. 마치 87년이다!라고 말입니다. "민주시민 함께 해요"라는 구호에 시민들이 동참하고 순식간에 수배로 행진 대오가 불어납니다. 그러나 장관 고시가 이루어진 이후에 상황은 장담할 수 없고, 거리에서 행진은 여전히 혼란스럽습니다. 보다 안정적인 대오가 일종의 "코어"를 형성하고 대중들이 모일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30일 장관고시 이후 이명박이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무기로 하여 반격하지 못하도록, 현재의 이명박 반대 정세를 계속 밀고 가야합니다.이명박  정권의 정치적 신뢰성을 완전히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아예 공공부문 사유화/시장화는 말도 꺼낼 수 없게 쐐기를 박아나가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새 정세는 (특히 우리 공공부문 노조운동에 매우 불리하게) 역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직된 기본대오가 투쟁에 결합해야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집회 참여를 통해서 조합원들도 관성화된 동원식 집회가 아니라 직접 나서는 "민주시민"의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조합원들에게 놀라운 정치적 경험의 공간을 열어줍시다.

물론 어렵습니다. 공공부문 구조조정, 사유화, 시장화에 대한 현장의 긴장이 아직도 충분치 않습니다. 노조의 활동시간도 부족하고 조직력도 취약합니다.
그 러나 그 때문에 오히려 노조 중앙으로부터 적극적인 결의와 조직화가 필요합니다. 필연적으로 단위사업장의 시야게 갇일 수밖에 없는 기업별지부의 집행부보다 전체 운동과 정세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위치게 있는 것이 산별 중앙입니다. 우리가 먼저 현장을 조직해야합니다.

잊어서는 안될 역사의 교훈 : 1968년과 1987년

어찌 보면 지금의 행진은 철없는 10대, 20대의 냄비현상으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실제로 어떤 분은 그런 말씀도 하시더군요.)
그러나 87년 항쟁도 20대 초반 대학생들이 주축이었습니다. 1968년 세계혁명은 10대후반 20대 초반의 대학생의 투쟁이 촉발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운동의 새로운 세대입니다. 그들의 진출을 엄호하고 함께 해야합니다.

지금은 마치 40년전 1968년 혁명을 똑같이 떠올리게 합니다. 좀 장황하지만 역사를 돌아봅시다.
프 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미국, 중국, 동유럽 등에서 벌어진 혁명들말입니다. (프랑스, 독일에서 배워야할 것은 산별조직모형이나 협약적용률 이전에 이러한 투쟁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에서 그해 5월3일 폭발한 학생반란은 바리케이트를 쌓고 시가전을 벌이면서 빠리에서 1000여명이 부상하고 500명 가까이 연행되는 사태로 발전합니다. "우리의 꿈은 그들의 악몽이다"라는 구호가 현실화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프랑스 공산당은 '사이비 혁명가', '젊은 치기'라며 냉소적인 반응으로 일관했고, 노동총연맹CGT도 남의 일로 치부하고 관망했습니다. 뒤늦게 노동총동맹이 항의파업을 선언했을 때, 오히려 지도부의 예상을 넘어 기층의 노동자 80만명이 시위에 참석합니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 공산당과 노조는 끝까지 "공화국 수호"와 "임금인상""만을 요구하면서 거리시위의 대중운동과 자신을 분리시킵니다. 결과는? 불과 며칠 후에 드골은 반격하고 정세는 급변합니다. 우익의 대규모 시위가 조직되고 파업은 경찰의 공격으로 파괴됩니다. 이어진 총선거에서 우익 드골이 압승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광범위하게 후퇴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단지 한 달여 동안의 일입니다. (5월3일의 봉기로부터 5월30일 드골의 반격) 이후 프랑스 노동운동은 갈갈히 분열되어갑니다.

먼 나라 이야긴가요? 집회 행진 대오의 분위기가 87년 같다는 말을 이구동성으로 합니다. 87년 우리 역사는 또 어떻습니까? 비록 6.29 항복 선언 이후 일주일여만에 7월6일 현대엔진 노조결성으로 시작된 7,8,9 노동자 대투쟁. 그러나 6월 항쟁과 분리된 시간 속에서 진행되면서 이 투쟁이 정치체제 자체를 바꾸어내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거꾸로 이미 조직된 노동자 대중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87년 6월 항쟁과는 또 다른 결과를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대중들의 진출에 조직된 노동자들이 어떻게 결합하는가는 지금 정세가 어디로 어어질 것인가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민주노총이 이제까지 "이익집단"이라는 (상당히 근거있는) 비판을 벗어나 대중의 이익을 위해 싸운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시기입니다. "사회공공성"을 말하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경제적 요구를 넘어서 사회적 이익을 위해 진심으로 싸우자고 말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 입니다. 지금같은 시기가 아니면 언제가 그 시기겠습니까?

"준비되면 언젠가"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 우리의 요구로 투쟁할 정세

조 직적으로 조합원이 결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침, 과감한 조직동원도 필요할 것입니다. 다소간의 희생은 감수하고라도 교섭결렬-조정결렬-찬반투표 일정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민주노총, 연맹, 산별노조 차원의 몇시간 총파업이라도 나중에 "준비되면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조직합시다. 구체적인 조직동원 지침을 매일의 집회에 내립시다. 그리고 특히 30, 31일 집회에는 조직을 총동원해서 결합합시다. 이를 위한 논의공간을 만들고 조직적 결의를 만들어내야합니다. 지금 정세에서 대중들이 패배하면 우리가 싸울 공간은 아예 없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거리에서 한명 한명의 시민들이 능동적인 역사의 행위자들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단지 노조간부이기 이전에 노동운동, 사회운동의 활동가로서 임무가 있습니다. 아니, 노조간부로서의 역할만으로 "실리적"으로만 보더라도 우리노조의 투쟁요구를 관철할 수 있는 최적의 투쟁시기입니다. 현장의 조합원들도 이런 정세를 느끼고 있습니다. 노조 외부의 사회적 정세가 오히려 조합원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간부들은 조합원들이 진출할 수 있는 "판"을 만들 의무가 있을 것입니다.
보다 과감하게 투쟁을 조직할 것을 호소합니다.

너무 주제넘게 일개 사무처 활동가가 글을 드렸습니다. 주제넘다고 생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주제'보다는 운동이 중요하니 고민고민 끝에 동지들에게 개인적으로 글을 드립니다. 장황한 글이다보니 오히려 동지들의 시간과 열의만 빼앗은게 아닌지 걱정입니다. 저보다 이 정세에 대한 고민이 훨씬 더 넓고 깊은 동지들도 많이 계신것을 보기도 했으니 더 그렇습니다.

관심있게 보셨든 아니든, 많이 동의하시든 조금만 동의하시든, 다만 고민의 계기라도 되었으면 합니다. 많은 동지들이 집회 장소에서, 뒤풀이 술자리에서, 삼삼오오 담배피면서, 옆자리 동료들과 이런 쟁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고민들을 구체적이고 조직적인 실천으로 만들어가는 노력을 함께 할 것을 또한 호소드립니다.

부족하고 산만한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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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브레이브 스토리

아래 포스터에 겁먹은 표정의 소년이 와타루 미타니, "브레이브 스토리"라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다. (네권짜리 원작소설도 있고 열몇권짜리 만화책도 있는 데 우리나라에도 출간되어 있다.) 몇몇 극장에서 상영중.

RPG게임의 전개방식을 차용하기도 한 이 작품은,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지난번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볼 때처럼, 내가 여전히 하나의 소녀이거나 소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어른이 되기는 아직 좀 먼 것일까. 하지만 늦게 어른이 되어가서 좋은 점도 있다. 여전히 영화를 보고, 울기도 하면서 좀 더 클 수 있다. 그리고 좀 다른 측면에서는 작품 속의 상징들을 더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좋은 점이랄까.



"용기는 빵점, 체력은 평균"
포스터에 나온 이 구절은 와타루에게 환계(幻界)의 도사가 한 말이다. 굳이 이런 말이 아니라도, 보는 내내, 와타루, 넌 참 나와 비슷하구나, 생각한다. 아버지는 집을 나가서 이혼하고 어머니는 아파서 쓰러진 와타루는, 성공하면 자신이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여행-모험을 환계(환상계, 따라서 상상계)로 떠난다. 실패하면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모든 것을 걸어야하는 모험이다. 와타루의 소원은 가족의 복원.

이건, 부모가 이혼한 소년의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이혼한 어른들을 위한 영화이기도 한 것같다. 그 결정적인 모험이 하나의 여행이고, 그 장소가 상상계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현실(세)계로 돌아올 수 없는 위험이 있는 장소다. 사실 내가 작년에 헤어지고 떠난 여행의 장소는, (물리적으로는 유럽대륙이었지만) 바로 그 상상계였던 셈이다. (제대로 돌아왔는지는 솔직히 말해서, 전혀 확실치 않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이제는 실재계로 "어떻게 돌아와야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하게됐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여행을 떠난 와타루가 만난 것은 어떤 것들일까? 구체적인 형상을 띠고 인격을 갖춘 온갖 상징들이다. 먼저 여행을 떠난 친구 미츠루는 외롭지만 내면이 강하다. 중간중간, 그리고 마지막 장면들에서 작가는, 무엇이 강한 것인지를 다시 묻는다.

원하는 대로 운명을 바꾸어 준다는, 운명의 여신을 만나기 위한 마지막 시험에서, 와타루와 미츠루는 또 다른 자신을 만난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부정적인 면, 아니 그 보다 슬퍼하는 자신을 만나고 싸운다.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와타루가 그 자신을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보듬어 안아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신과 싸우고, 결국 그 가슴에 칼을 꽂는 미츠루와 다른 점이다.) 무엇보다 작년, 가장 힘들었던 어떤 시점에 나는 일기에 이렇게 썼던 것이다. "내가 나를 보듬어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야", 라고.



그것이 자신과 싸우는 "또다른 자신을 살해하는", 그래서 결국  "자신"을 살해하는 미츠루와 다르다. 그러나 나는 또 한편으론 그 동안 내 마음을 얼마나 살해하려고 했는지 생각한다.(그래서 나는 혹은 우리 모두는 와타루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어느 정도는 미츠루이기도 한 것이다.) 백무산 시인은 <인간의 시간>에 실린 시, "마음을 살해하다"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그러면 죄악이란 무엇이겠느냐
눈에 보이는 것들 살아있는 것들
다 쏴죽이고서
그 시체들이나 잔뜩 쌓아두고 있는
마음이여
너를 살해한다

백무산 시인에겐 죄송하지만, 나를 살해하는 대신, 품어주고 싶다고, 위로해주고 싶다고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나서 만난 운명의 여신에게, 와타루가 말한 소원은 애초에 생각했던 그것이 아니었다. (나도 작년에 얼마나 그 운명의 여신 Fortuna에 몰두했었는지, 심지어 유럽 여행지에 유명한 박물관에서 마다 그리스 조각상에서 Fortuna를 일부러 찾았던 것이다.) 그 대신, 억지로 바꾸려고 했던 운명 때문에 다른 이들이 고통받는 상황을 끝내달라고 이야기한다.(환상계의 친구들을 위한 소원이다) 운명(의 여신)을 만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던 거다. 자신의 운명에 스스로 대면하는 것. 바로 나의 운명에.

그래서, 용기는 빵점인 소년 와타루의 이야기에 제목이 브레이브 스토리 Brave Story가 된 사정을 이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용기란, 무서운 괴물, 적들을 대면하는 것만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을 대면할 수 있는 것, 품어줄 수 있는 것, 자신의 운명에 스스로--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것, 그리고 타자를 만나고 고통을 공감할 줄 아닌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운명에 마주했을 때, 비로소 와타루는 환계(상상계)를 구하고, 그곳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원했던 것, (정상)가족의 복원이 아니라도, 여전히 살아갈 수 있다.

(상상계에서 오히려 실재계에서 보다 더 진실한 자신을 만날 수 있다는 역설이란! 주체들은 사실 실재계보다는 상상계 속에 있기 때문일까?, 또는 진정한 용기는 상상계를 추악한 마물들로부터 구하는 그 행위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자신의) 상상계를 구하는 와타루의 행위는 자신을 보둠어주는 행위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렇게 난삽하게 이야기하다보니, 오히려 맥빠지고 밋밋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애니에는 이런 얘기들은 안 나오니 안심들 하시길, 쓰고 나서 보니, 이 글은 애니의 구체적인 장면들을 증류시키면 이렇게 김빠진 술처럼 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랄까. 생생하게 살아있는 와타루의 모험을 함께 하다보면, 내가 굳이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생각하게 될 내용이다.


* 주제곡도 좋다.
動かせる足があるなら 向かいたい場所があるなら
움직일 수 있는 다리가 있다면 가고 싶은 장소가 있다면
この足で歩いてゆこう
이 다리로 걸어 가자





決意の朝に
(결심의 아침에)

Artist : Aqua Timez

作詩:太志 作曲:太志

どうせならもう ヘタクソな夢を描いていこうよ
기왕이면 서투른 꿈을 꾸면서 가자
どうせならもう ヘタクソで明るく愉快な愛のある夢を
기왕이면 서투르고 밝고 즐거운 사랑이 있는 꿈을
「気取んなくていい かっこつけない方がおまえらしいよ」
「신경 안써도 돼. 폼 안잡는 쪽이 너 다워서 좋아」

一生懸命になればなる程 空回りしてしまう僕らの旅路は
열심히 하면 할 수록 헛도는 우리들의 여행은
小学生の 手と足が一緒に出ちゃう行進みたい
초등학생 때 손과 발이 동시에 나가는 행진 같아
それもまたいいんじゃない? 生きてゆくことなんてさ
그것도 좋지 않아? 살아 간다는 건
きっと 人に笑われるくらいがちょうどいいんだよ
분명, 다른 사람에게 비웃음당할 정도가 딱 좋아

心の奥の奥 閉じ込めてた本当の僕
마음의 안의 나. 가둬 두었던 진짜 나
生身の36度5分 飾らずにいざwe don't stop
몸의 36도 5부. 허세 부리지 말고 we don't stop
けどまだ強がってるんだよ まだバリアを張ってるんだよ
하지만 또 강한 척 하고 있어. 또 방어막을 치고 있어
痛みと戦ってるんだよ
아픔과 싸우고 있어

辛い時 辛いと言えたらいいのになぁ
괴로울 때 괴롭다고 말하면 될 텐데 말야
僕達は強がって笑う弱虫だ
우리들은 강한 척하며 웃는 겁쟁이야
淋しいのに平気な振りをしているのは
외로운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것은
崩れ落ちてしまいそうな自分を守るためなのさ
무너질 것 같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야

僕だけじゃないはずさ 行き場のないこの気持ちを
나 뿐만이 아닐거야. 갈 곳이 없는 이 기분을
居場所のないこの孤独を
있을 곳이 없는 이 고독을
抱えているのは…
안고 있는 것은…

他人の痛みには無関心
다른 사람의 고통에는 무관심
そのくせ自分の事となると不安になって
그런 주제에 자신의 일이 되면 불안해 하고
人間を嫌って 不幸なのは自分だけって思ったり
인간을 싫어해. 불행한 것은 자신뿐이라 생각해
与えられない事をただ嘆いて 三歳児のようにわめいて
가지지 못한 것을 단지 한탄하면서 3살짜리처럼 우는
愛という名のおやつを座って待ってる僕は
사랑이라는 이름의 과자를 앉아서 기다리는 나는
アスファルトの照り返しにも負けずに
아스팔트의 열에도 지지 않고
自分の足で歩いてく人達を見て思った
자신의 다리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깨달았어
動かせる足があるなら 向かいたい場所があるなら
움직일 수 있는 다리가 있다면 가고 싶은 장소가 있다면
この足で歩いてゆこう
이 다리로 걸어 가자

もう二度とほんとの笑顔を取り戻すこと
이제 두번 다시는 진정한 웃는 얼굴을 되찾을 수는
できないかもしれないと思う夜もあったけど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밤도 있었지만

大切な人達の温かさに支えられ
소중한 사람들의 따뜻함에 도움 받아
もう一度信じてみようかなと思いました
다시 한번 믿어 볼까 하고 생각 했어
                     
辛い時 辛いと言えたらいいのになぁ
괴로울 때 괴롭다고 말하면 될 텐데 말야
僕達は強がって笑う弱虫だ
우리들은 강한 척하며 웃는 겁쟁이야
淋しいのに平気な振りをしているのは
외로운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것은
崩れ落ちてしまいそうな自分を守るためだけど
무너질 것 같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지만

過ちも傷跡も 途方に暮れ べそかいた日も
잘못도 상처도 어찌할 바 모르고 울상 짓고 있던 날도
僕が僕として生きてきた証にして
내가 나로서 살아간 증거로서
どうせなら これからはいっそ誰よりも
기왕이면 이제부터 아예 누구보다도
思い切りヘタクソな夢を描いてゆこう
마음껏 서투른 꿈을 꾸며 가자
言い訳を片付けて 堂々と胸を張り
변명을 정리해버리고 당당히 가슴을 펴고
自分という人間を 歌い続けよう
자신이라는 인간을 계속 노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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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ate It.

이번 주말에 사무실이 이사를 한다. 일요일 노가다까지 하게생겼다. 다들 짐싸느라 정신이 없다. 오늘은 광주시청 비정규직 투쟁이 있는 날이라 많은 사람이 광주에 가서 썰렁하면서도 남은 사람들은 짐싸고, 나는 회의자료(지긋지긋하군) 때문에 남았지만 역시 전혀 일할 분위기는 아니다. 전혀.

짜증나고 정신없을 때는 더 정신없이 음악을 들으면서 일(하는 척)하는 것이 가장 좋다.
사실 앞으로 출근시간은 획기적으로 줄어들지만 이사가는 것이 썩 맘에 들지 않는다. 넬Nell의 새 앨범을 듣다보니 이런게 일종의 분리불안(Separation Anxiety, 이게 앨범 제목이다)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여기 사무실에서 벌써 몇년이람.

그래서 플레이시켜놓은 것이 Ellegarden 의 Riot on the Grill 앨범이다. 맨 끝곡이  I Hate It.
딴 건 잘 모르겠고 "I Hate It"을 반복하는 후렴구가 있는 데, "싫어 싫어 싫어" 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
정말, I Hate It.



같이 넣은 곡은 Nell의 앨범 중에 Moonlight Punch Romance 라는 곡.
Nell은 슬픈감정을 극단적으로 오버하는 게 뭔지를 보여주는 밴드인데,(그래서 좋아하긴 하지만ㅋ. 일종의 대리만족이랄까) 그나마 이 곡은 그나마 "겉으로는" 좀 밝은 곡이다. 묘한 효과가 있다 싶다. Moonlight Punch 라는 칵테일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I woke up and I found that I was sleeping on the couch
깨어보니 소파에서 잠들었다는걸 알았어
Cast away the papers unread
읽지 않고 흩어진 신문들.
Half awake and a bit confused
반쯤 깨서 조금 멍하게
Just trying to understand if I was dreaming or not
꿈을 꾼건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있어
I hate it I hate it I hate it
싫어, 싫어...
when you are not around When you are gone
네가 곁에 없을 때, 네가 가버렸을 때가
I hate it I hate it I hate it
싫어, 싫어...
when you say it's not truth
네가 거짓이라 말한 때가
I walked down the street to buy some junks and tooth paste
몇가지 물건과 치약을 사러 내려갔어
I couldn't find my favorite ones
좋아하는 것들을 찾을순 없었어
I unsealed the new paste and I'm trying to understand
새로 산것을 열어보고, 이해해보려 해
How does this world looks to you
이 세상은 네게 어떻게 보일지
I hate it I hate it I hate it
싫어, 싫어...
when you are not around When you are gone
네가 곁에 없을 때, 네가 가버렸을 때가
I hate it I hate it I hate it
싫어, 싫어...
when you say it's not truth
네가 거짓이라 말한 때가
I hate it I hate it I hate it
싫어, 싫어...
when you are not around When you are gone
네가 곁에 없을 때, 네가 가버렸을 때가
I hate it I hate it I hate it
싫어, 싫어...
when you say it's not truth
네가 거짓이라 말한 때가
I woke up and I found that I was sleeping on the couch
깨어보니 소파에서 잠들었다는걸 알았어
If I was dreaming or not
꿈을 꾼건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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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앙토넹 아르토 지음, 조동신 옮김 / 도서출판 숲


 

반 고흐의 그림에는 유령도 없고, 환영도 없고, 환각도 없다.

그것은 오후 두 시에 내리비치는 태양의 작열하는 진실이다.

 

얼마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끝난 <반 고흐 展>, 한쪽 벽에 인용된 문구다. 앙토넹 아르토, 이 책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63쪽)

 

그러나 그 "작열하는 진실"은 역설적으로 "광기"로 취급되었다. 아르토가 이 책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1947년 당시 파리에서 열린 전시회 직후에 한 정신과 의사(베르와 르르와)가 고흐는 광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쓴 책 때문이다. 여전히, 60여년 지난 이곳에서도 고흐는 "광인 화가"로 이해되고 있다. 그림보다, 몇몇 (그의 광기를 증명하는) 극적인 에피소드들이 잘 알려져있고, 그래서 고흐는 예술가의 "광기"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어떤 인물로 이해된다.

 

반 고흐는 최고의 명석함을 지닌 사람들 중 하나로서,

어떤 경우에도 앞날을 멀리, 사실들의 즉각적이고 명백한 실재성보다

멀리, 무한하고 위험할 정도로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47쪽)

 

그렇다. 그래서, 고흐는 그 눈으로 그림을 그렸고, 그림들은,

심장에 단도를 찔러넣는 것처럼, 붓으로 진실의 진실의 심장을 꺼내 보여주는 것이다. 피가 흐르는 채로,

그래서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없는 충격과 당혹스러움을 안겨준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Wheatfield with Crows, 1890,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하물며 자살의 경우라면 육체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끊는,

이 자연에 반하는 행동을 결심하기 위해서라면

나쁜 인간의 대무리가 있어야한다. (110쪽)

 

아르토가 보기에는 고흐를 "치료"하려했던 정신과 의사 가셰가 그 대무리의 앞장에 섰던 사람이다. 그는 고흐에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리"라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라니! 이 정신과의사 양반은 진실이란 것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마치 한 공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아르토는 고흐가 "까마귀들"(위의 그림 말이다.) 이후 반 고흐가 단 한점이라도 더 그림을 그렸다고 믿을 수없다고 말한다. 나도 그 그림 앞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비록 그림 밑의 해설에는 그것을 확증할 수는 없다고 쓰여있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생명으로 가득 찬 죽음이다. 고흐의 죽음은 그의 영혼에 필연적이었다기 보다는 갑작스런 중단. 그것은 그의 영혼에 "강요된" 것이다.

 

광인이라고? 반 고흐가?

언젠가 인간의 정면을 바라볼 줄 알게 된 자

반 고흐가 그린 초상화를 바라보라. (105쪽)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Autoportrait au chapeau de paille 1887,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얼마전 서울전시회에 전시되었다.


고흐의 자화상을 보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나는 이처럼 압도적인 힘으로 인간의 얼굴을 탐색하고,

반박할 수 없는 인간의 심리학마저 도마 위에 올려놓듯

해부할 줄 알 정신병 의사를 전혀 알지 못한다.

반 고흐의 눈은 대천재의 것이다. (107쪽)

 

고흐의 태양에서 직접 내려온 것같은 눈빛은 바라보는 사람의 안구를 통해 영혼에 날아 꽂힌다. 그리고는 그것을 흔들고, 따가운 햇빛 아래 드러낸다. 마치 해부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것은 잊을 수 없는 강력한 충격이다. 어떤 정신과 의사도 고흐의 자화상, 그 눈빛처럼 보는 사람의 영혼을 자신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의사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이런 이유로, 자화상 앞에서는 그 눈빛이 바라보는 각도에서 다리가 굳어지고 마는 것이다.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고 해도, 어디에서 이런 경험에 또 가능하겠는가.

 

그래서 반 고흐를, 그의 작품을 보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모험이다. 이 책의 아르토에게 모두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더라도, 고흐에 대해서는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

동생은 얼마 전 이 책을 먼저 보고 나서 며칠 후에 함께 갔던 <반 고흐 展>을 혼자서 훌쩍 한번 더 가고 말았다. 나도 서울의 전시회가 끝난 3월15일 전에 이 책을 보았더라면 한 번 더 갔었을 것이다. 땅을 칠 일이지만, 차라리 암스테르담에 언젠가는 한 번 더 가보자고 생각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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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에 대해 읽지 않은 책

겨울철쭉님의 [[독서]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에 관련된 글.

그래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용기를 얻어,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한다.
물론, 들어는 본 책(Heard Book ; HB)이라 할 것인데, 그 들어본 곳도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인 만큼 여러모로 궁합이 맞는다고나할까.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책이다.  이렇게 생겼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상수 옮김, 배미정 그림 / 신세계북스

바야르에 따르면, 이 책은 진짜 책보다 오히려 더 창조적인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유령 책"의 존재를 보여준다. 주인공인 고양이가 바라보는 인물 중 '금테안경을 쓴 미학자'는 '신경성 위염인 주인'에게 과감하고 뻔뻔스러우면서도 사실은 그리 거짓말이라 할 수도 없을 이야기를,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대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런 "유령책"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고양이가 나오는 다른 작품이다. 사실 소세키의 책과 별로 상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고양이가 주인공이면서 어떤 "사람"인 주인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고양이 주인공은 여전히 고양이들의 사회와 단절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아마 이 작품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그 나라의 작품이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아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설정을 "창조적으로" 애니에서 반복하는 것이랄까. (역시 신카이 마코토에게도 이 책은 FB이거나 SB였을 것이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彼女と彼女の猫

(불과 5분도 안되는 길이의 애니다.)

다시 보니, 생각했던 것처럼 신카이 마코도 감독은 익숙한 소재들--소나기위, 핸드폰, 여름의 냄새와 햇빛, 전철, 심지어 이별과, 초조한 상태를 나타내는 그 배경음악까지--을 다음 작품(별의 목소리), 다음다음다음 작품(초속5Cm)에까지 다시 등장시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역시, 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 작품이 유일하다.

그러면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을 보거나 그 이야기를 듣는 주인을 갖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그녀의 고양이"가 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뭐, "그녀의 고양이"조차도 썩 가망이 없다면  고양이가 되는 것은 별로 매력적이지도 않는 일인 것같으니, 차라리 내가 직접 이렇게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나은 것같다.

여튼, 이렇게 읽지 않은 책을 통해서 전혀 다른 종류의 텍스트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읽지 않은 책이라도 충분히 유익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된다. 뭐, 믿거나 말거나. 이상,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대한 심심풀이 짧은 임상실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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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책을 읽고 글을 남기는 블로그를 가진 나로서는, 가끔 예전에 쓴 글을 볼 때, 내가 과연 이 책을 읽었는지, 이런 글을 썼는지 낯설고 놀라울 때가 있다. 아닌게 아니라, 며칠전에 동생이 보고 있는 책을 재밌겠다고 빌린 나는, 예전 홈페이지에 이 책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다지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다니, 이런.

그런 한편으로는, 책을 사놓고도 절반 정도밖에 읽지 못하는 나로서는, 항상 책상 위에 쌓아놓은 책들과 서점 사이트의 장바구니에 담긴 책들, 그리고 펼쳐놓고 보고 있는 책들 중에서 갈등하고 있다.(그러다가 기껏하는 일이라곤 장바구니에 한권을 더 담아서 주문하는 일 따위다.) 게다가, 그러다가는 이책 저책 손대다가 결국 읽기를 중단한 책을 볼 때 마다 몰려오는 부채감에 부들부들 떨고는, 다시 무거운 마음으로 외면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일들로 해서 책읽기에 자괴감을 가진 나 같은 독자에게, 이 책은 유쾌한 해독제와 같다. 모든 독서는, 그 순간부터 지속적으로 시간 속에 흩어지는 비독서로 바뀌어가고, 그래서 본질적으로 독서와 비독서의 차이조차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저자 피에르 바야르는 책을 이렇게 구분한다.
  • UB ; Unknown Book 전혀 접해보지 못한 책
  • SB ; Skimmed Book 대충 뒤적거려 본책
  • HB ; Heard Book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책
  • FB ; Forgotten Book 읽었지만 내용을 잊어버린 책
보면 알겠지만, 그냥 "읽어본 책"(Red Book;RB, 그런데 써놓고 보니 Red라니 ^^;;)란 아예 범주에조차 없다. 그것은 굳이 말하자면 (읽었다는 사실조차도) 읽었지만 잊어버린 책들이라 할만하다. 모든 읽어본 책은 이미 FB가 되어가는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몽테뉴의 이런 말은 얼마나 위안과 공감이 되는지 모른다.

이미 수년 전에 꼼꼼히 읽고 주까지 이리저리 달아놓은 책들을 마치 한번도 접한 적이 없는 최신저작인 양 다시 손에 든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기에, 나는 내 기억력의 그러한 배반과 극심한 결함을 어느 정도 보완하기 위해, 얼마전부터 의례적으로 모든 책(한번만 읽어보고 싶은 책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의 말미에 그 책을 다 읽은 때와 그 책에 대한 개략적인 판단을 덧붙이곤 한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책을 읽으면서 품게된 저자에 대한 전체적인 관념과 그 분위기만이라도 남을 것같기 때문이다. - 몽테뉴, '수상록'

그러니까, 이 블로그도 몽테뉴식의 메모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책이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라기 보다는 유동적인 대상이다. 책은 만나는 순간마다 다르게 해석되고 읽힌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것인 종이 묶음 형태를 한 물질적인 실체로서의 책이라기 보다는, 형성된 관념으로서 (저자의 용어를 따르면서 다소 도식적으로 정리하자면) "화면 책", "내면의 책", "유령 책" 같은 것들이다. 그것은 각각 "집단 도서관", "내적 도서관", "잠재적 도서관"에 소장된 것들이다.

책을 읽은 순간부터 그것은 독자의 내면에서는 주관적인 "내면의 책"으로 남고, 그것은 담론을 공유하는 집단들의 도서목록 속에서 특정한 이미지를 취하기 시작한다. "화면 책"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집단 도서관의 관계들 속에서 형성된 위치를 차지하는 대상이다. 그것은 급기야 무의식 속에서 재구성된 "유령 책"이 되는 데 이 것이 원래의 책과 얼마나 유사한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유령책들은 실재하는 책들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실재하는 진짜 책들보다 훨씬 더 우리의 대화와 몽상을 풍요롭게 해주는 책이 된다.

"화면 책"의 대표적인 예로 저자는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수도사 조사관 바스커빌이 찾아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을 든다. 바스커빌은 책을 들고는 중요한 부분을 읽기도 전에 <시학>2권의 내용을 추측해서 말한다. 이런저런 책들을 통해서, 혹은 사건들을 통해서 그 위치가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심지어 이미 실체적인 책으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책으로 존재한다. 독서가 시작되는 즉시,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서로 말하는 즉시 진짜 책 대신 화면 책과 그 담론들과 견해들만 남게 된다. 예컨데, 책에 대한 이 블로그에는 진짜 책이란 없으며 책에 대한 이미지들만 존재하는 것과 유사할 것이다. 여튼, 호르헤 수도사가 이 책에 접근한 자들을 죽이는 방법은 책갈피에 묻은 독인데, 그러니 진짜 책에 "중독"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게 좋을 것같다.

사실, 서점에 꽂혀있는 대부분의 책이 어차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읽을 수 없는 것들이라면 그것들 중에 어떤 것을 실제로 읽어보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돌이켜보면 "원전"이라고 우리가 불렀던 (그리고 숭상했던)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원저작들은 (나는 물론이지만 내 주변에도) 대부분의 동료들에게 HB, 혹은 UB였는데, 그러니 그 책들의 이미는 실재하는 어떤 대상으로서의 의미라기 보다는 우리의 "집단 도서관" 안에 있는 "화면 책"일 뿐이었던 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친구들이 용돈을 모아서 다섯권짜리 자본론 전집과 여섯권짜리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을 사놓곤 했는데 기껏해야 그 책은 SB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들을 폄하하는 순간, 우리는 그 "원전" 자체를 폄하하게 되는 셈이니 이쯤에서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이 모두에게 좋을 것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나에게나 읽지 않은 책을 인용해서 세미나를 지도하던 선배들이나, 그 책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들을 위해서도 말이다.)

이런 주장은 급기야, 비평을 위해서는 책을 대충 훑어보아야한다거나, 영혼이 침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책과 거리를 두어야하고, 학생들의 창조성을 위해서라도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것까지 연결된다. 이쯤되면 농담인지 진담인지 헛갈리기 시작하지만, 뭐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 마저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오스카 와일드에 대해서라면 그가 쓴 책은 모두 나에게는 UB 혹은 HB에 속한다.)

 "나는 내가 논해야하는 책은 절대 읽지 않는다. 너무 많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Thank you, Mr. 오스카 와일드!

물론, 이 책에는 독서의 본질 같은 것에 대한 철학적인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점에서는 매우 유용한 실용서라 할만하다. 예컨데 이런 실용적인 충고들도 담고 있는 것이다. ; 저자를 만나면 책의 내용이 아니라 모호하게 좋았다는 이야기를 할 것,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 말할 때는 책을 꾸며내고 돌려댈 것 등, 누가 지적할 경우 착각했다고 둘러대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등등.

사실, 이 책의 교훈대로 서문부터 역자후기까지 모두 읽어야한다는 강박관념만 아니라도 훨씬 재미있는 독서가 될 것같지 않은가. 그러니. 이 책은 나와 같은 증세를 가진 게으른 책 "중독"자(독묻은 책갈피를 조심했어야했는데..)에게나 혹은 정말 실용적으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배우고 싶은 독자들 모두에게 "독서"(혹은 이를 둘러싼 대화)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훌륭한 책이라고 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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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ing Class Hero, Greenday버전

아래 "자본주의의 노동세계"에 대해서 쓰고 나니 생각나는 곡이 있어서 보너스로.

John Lennon이 불렀던
Working Class Hero.
Green Day라는 밴드가 다시 부른 버전이다. 혹자들은 곡을 망쳤다고 뭐라하는 것같은데, 흠흠.. 나름대로 좋은데 왜 그럴까, ^^; 펑크락을 하는 친구들인데, 다른 앨범도 좋다.

중간중간에 흑인노동자들의 인터뷰가 들어가는데 인상적.(사실 리스닝이 약해서 정확히 못알아 듣겠다.;;) 수단의 다르푸르 학살과 관련된 이야기다. 내용적 연관은 잘 모르겠지만, 가사가 전하는 노동자계급의 어떤 이상주의와 평화주의가 공명할 수 있을 것같다.
듣다보면, 남한과는 또 다른 "노동계급문화"라는 것이 있는 사회에서 나올 수 있는 곡이라는 생각도 들고.

요즘은 어쩌면 계속 패배하고, 또 의기소침하지만,
노동자계급이 영웅적인 시기가, 곧 다시 올 것이다.

Working Class Hero - Green Day





As soon as you're born they make you feel small

네가 태어나자마자 그들은 너를 작은 존재라 느껴지도록 했어
By giving you no time instead of it all
너에게 아무 것도 아무 시간도 주지 않고서
Till the pain is so big you feel nothing at all
고통이 커다랗게 남아 있는 한 너는 아무것도 아니란 걸 느끼겠지
 
A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
노동계급의 영웅은 되어볼만한 것이지
A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
노동계급의 영웅은 되어볼만한 것이지
 
They hurt you at home and they hit you at school
저들은 고향에서 너에게 상처를 입히고 학교에서 너를 때렸지
They hate you if you're clever and they despise a fool
저들은 니가 현명하면 증오하고 바보라면 무시하지
Till you're so fucking crazy you can't follow their rules
니가 정말 미치지 않았다면 그들의 룰을 따라선 안돼
 
A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
노동계급의 영웅은 되어볼만한 것이지
A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
노동계급의 영웅은 되어볼만한 것이지
 
When they've tortured and scared you for twenty odd years
괴롭힘과 박해 속에서 너는 스무 살이 되었지
Then they expect you to pick a career
그때 그들은 너를 일꾼으로 뽑아 쓰리라 기대했지
When you can't really function you're so full of fear
네가 정말 제 기능을 못할 때 너는 굉장히 두려웠지
 
A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
노동계급의 영웅은 되어볼만한 것이지
A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
노동계급의 영웅은 되어볼만한 것이지
 
Keep you doped with religion and sex and TV
저들은 너를 종교와 섹스와 TV에 중독시키고 있어
And you think you're so clever and classless and free
너는 현명하며 계급도 없고 자유롭다고 생각해
But you're still fucking peasants as far as I can see
그러나 내가 보기엔 아직 너는 농부에 불과해
 
A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
노동계급의 영웅은 되어볼만한 것이지
A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
노동계급의 영웅은 되어볼만한 것이지
 
There's room at the top they are telling you still
저들이 너를 부려먹는 한 꼭대기에는 밀실이 있지
But first you must learn how to smile as you kill
하지만 너는 쥐죽은 듯 웃음 짓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해
If you want to be like the folks on the hill
니가 언덕 위 사람처럼 보이고 싶다면 말이야
 
A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
노동계급의 영웅은 되어볼만한 것이지
A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
노동계급의 영웅은 되어볼만한 것이지
 
If you want to be a hero well just follow me
만약 너가 영웅이 되길 원하면 나를 따라와
If you want to be a hero well just follow me
만약 너가 영웅이 되길 원하면 나를 따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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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자본주의의 노동세계


자본주의의 노동세계
찰스 틸리, 크리스 틸리 (지은이), 윤정향, 이병훈, 조효래 (옮긴이) | 한울(한울아카데미)


우리가 "노동"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이렇다. 정해진 출근 시간에 직장이라는 공간으로 가서 관리자의 통제나 지시를 받으면서 정해진 시간을 일하고 일급, 주급, 혹은 월급을 받는다. 일자리를 구할 때에는 채용공고를 보고 찾아나서는데, 이런 제도를 "노동시장"이라고 한다, 등등. 저자들에 따르면 이런 이미지는 널리 확산되어 있기는 하지만 자본주의 노동세계의 극히 일부만을 묘사할 뿐이다. 노동세계는 훨씬 복잡하다. 이 책은 그런 양상을 통해서 노동을 다시 이해하기 위한 시도다.

말을 꺼냈으니 "노동"에서 시작해보자. "노동"을 "재화와 서비스의 사용가치를 증가시키는 인간의 노력"이라고 할 때, 20세기 이전의 세계노동자들의 대다수는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유급일자리가 아닌 다른 환경에서 일했다. 서구 산업자본주의와 그 노동시장에서 조성된 편견은 집밖에서 임금을 위해 일하는 것만을 "진정한 노동"으로 인정하고 다른 것들은 단순히 놀이이거나 집안일, 범죄 등으로 분류한다. 하지만 "진정한 노동"을 다른 것들과 구별하는 본질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자와 사용자를 연결해주는 노동시장도 "노동경제학"에서 나오는 것처럼 깔끔한 계산이 가능한 영역은 아니다. 수많은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관습, 관행, 관계의 복잡한 체계다. (그래서 저자는 모든 노동계약이 생산과 비생산 관계를 포함하는 보다 폭넓은 사회적 관계들에 배태embeded되어 있다고 말한다.) 노동시장이란 것이 형성되던 시기에 자본가들도 그리 탐탁히 않아 했는데, 왜냐하면 노동시장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사용자들이 생산수단에 투자하는 것은 물론 노동과정을 조직하고 감독해야하고 채용, 해고, 직무배치, 보상 등의 인사관리체계를 만들어야할 뿐 아니라 최소한의 생계비를 지급해야하고 이런 과정에서 정부기관이나 노조, 노동자가구 등의 개입에 대비해야하는 등 골치아픈 일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노동시장의 발명과 확산은 노동자의 프롤레타리아화와 함께 일어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19세기 내내, 그리고 20세기 후반까지 지속적으로 강화되어왔다. 예를 들어 전문직이라는 의사들조차 미국에서 관리의료의 확산과 더불어 자영업자에서 일종의 종업원으로, 임금노동자로 변화되어가는 중이다. 전형적인 과정은 18~19세기 면방직 공업에서 상업자본의 (가내생산에 대한) 구매시스템은 선대제(원료와 생산수단을 제공하는)로 변화하고, 또 산업자본의 방직공장을 통한 직물 생산으로 변화되면서 프롤레타리아화가 진행된 일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역전현상도 발생한다.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의 확산과정에서 오히려 비공식노동이 증가하고 고전적인 노동시장이 약화된다. 이러한 상황은 20세기말 이후 19세기적 형태의 노동소요(연합적 힘에 기반한)이 확산되는 과정을 설명해준다. 게다가 노동시장들은 다른 노동조직들을 완전히 제거하지도 못했다.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아직도 만은 노동들은 노동시장 외부에서, 즉 학교, 가장, 감옥, 비공식경제, 가족기업, 소상품생산 등등, 심지어는 노예노동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상당히 그렇지만,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공개적인 노동시장이라기 보다는 "연줄"이라고 불리는 노동자들의 네트워크를 통해서다.(공급네트워크)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채용네트워크) 예를 들어 한국계 미국인의 친족집단은 뉴욕의 식품점 점원을 채용하는 데 있어서 거의 친족-인종 네트워크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미국의 경우 특정한 인종에 따라 직업별로 큰 편차가 발견되기도 한다. 노동시장, 작업장에서의 분할은 사회적 관계가 깊은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간호사에는 백인과 흑인은 있지만 히스패닉은 거의 없는 식이다. 이런 인종, 민족, 성, 종교에 따른 차별화된 네트워크는 직무의 차별적 배치로 강화되고, 이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남-녀의 임금격차는 대부분 직무능력의 차이나 동일직무 내의 임금차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직무들의 성별분리에서 비롯된다.(따라서 남녀고용평등법, 비정규법의 차별시정제도는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차별은 순환논리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효율성에 대한 평가도 객관적이라 보기 힘들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 간호사들이 의사보다 환자들과 더 지속적으로 접촉한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이 더 잘 진료할 수 있다는 일반적으로 가정되고, 이는 처우에도 반영된다.)

이런 노동시장을 어떻게 통제하는가는 공급자나 수급자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노동력공급자 측면에서 노동시장 통제전략의 대표적인 경우는 전문직들이다. 의사들이나 변호사, 회계사 등은 적극적으로 공급을 제한하려고 시도한다. 일전에 있었던 의사파업 사태 이후, 남한의 인구당 의사수는 매우 낮은데도 불구하고 의대 정원은 감축되거나 동결되었던 것이다. 로스쿨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변협의 태도같은 것도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런 노동시장은 내부에서 상이한 집단으로 분절되어 있다. 단일한 노동시장이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종적으로 분할되어있을 뿐 아니라, 성별, 학력 등 다양한 기준이 적용된다. 상이한 직종들 사이의 투쟁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아이를 낳을 때 지금처럼 누구나 산부인과 병원에 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미국에서조차 20세기초 이전에는 조산사가 출산을 봐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여성인 조산사 혹은 산파는 집안일까지 봐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도 내부의 투쟁과정에서 조산사는 거의 사라졌다. 아이는 산부인과에서 낳는 것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노동시장에서 산부인과의사들이 승리했던 것이다.

심지어 의사들 내부에서도 20세기 초를 거치면서 어떤 의료행위가 "정상적"이며 어떤 의료행위가 "사이비(돌팔이)의사"의 것인지 규정하는 과정을 통해서 노동시장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이 진행된다. 병원 안에서는 의사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했던 간호사들이 점차 세력화하면서 증대된 영향력을 임금과 권력에 반영시킨다. 병원관리자들은 비싼 의사들 대신에 간호사들에게 여러가지 의료과정을 맡겼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간호사들의 노동조합 조직화와 함께 여성운동의 발전이 동시에 영향을 준다. 노동자 집단들 사이의 권력관계에 변화에 노동자의 조직화와 사회운동이 개입하는 순간이다.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투쟁, 사회운동은 노동세계의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기술변화조차도 순수한 기술적 과정이라기 보다는 계급투쟁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마르크스주의적인 선험적 주장이 아니다.) 분업은 자본가들이 노동자들로부터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선제공격의 성격이 있다. 효율성만이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노동력의 수급은 권력관계를 변화시키고 이것은 생산기술에 영향을 준다. 노동력이 부족했던 미국에서는 면방직 공업에서 노동절약적인 링방적기가 확산되어 숙련노동자를 제거했던 반면, 영국에서는 뮬방적기가 상당기간 동안 더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석탄 채광에서도 유럽과 미국에서는 각각 긴벽생산방식, 기둥생산방식이라는 상이한 기술이 도입되었던 것이다. 파업물결 이후에도 조직구조의 변화가 시도된다. 이탈리아의 뜨거운 가을(1969)를 계기로 노동자들은 공장수준의 노동자조직구조를 형성했고, 사용자들은 생산시스템을 바꾸는 것으로 대응했다. 외주하청, 작업팀 구조의 도입 등이 확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편, 노동자들이나 사용자들이나 노동현장에서 노동력과 임금만을 교환하거나 그것만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기업의 생존, 작업장 안에서의 질서, 공동체 안의 위상, 권력과 같이 상이한 목표들을 추구한다. 노동자들은 돈을 벌기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을 위해, 작업장 안에서의 사회적 관계, 일을 배우는 즐거움, 동료와의 좋은 관계나 전통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일한다. 이런 요소들 중에서 특히 작업장에서의 권력이 문제가 된다. 조직의 유지와 권력은 '효율성'에 대한 사용자들의 명시적인 강조에도 불구하고 항상 강력하게 작용한다. 특히 노동체계, 작업조직 형태의 혁신은 권력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매우 드문일이며, 오히려 현존 방식의 유지가 일반적이다. 중간관리자들에게 특히 권력은 핵심적인 문제가 되며, 따라서 작업장 체제의 변화에 대한 아래-위의 압력에 강하게 저항한다.

사용자들은 권력을 강화하는 노력으로 노동자들로부터 헌신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부단히 시도한다. 그러나 이 이면에는 노동자들의 저항이 존재한다. 노동자들은 설사 집단적인 저항(노조와 같은)이 아니라도 일거리를 회피하거나 작업기구를 망가뜨리거나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개인적으로 저항한다. 사용자가 집단적인 저항을 분쇄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모든 형태의 저항을 분쇄하고 헌신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은 사회적으로 제도화된다. 초기의 전투적인 저항의 형태는 국가에 의해 정교한 협상과 투쟁의 절차로 만들어지고 "정당한 파업"이라는 것이 특정한 것으로 규정된다. 이런 틀 안에서만 집단적 저항이 가능하게 된다. 이는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조직을 안정화하고 혹은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법적으로 안전할 수 있다는 이유로) 촉진하지만 더 이상 극단적으로 위험한 것은 아니게 만든다. (남한에서도 노동자들의 파업은 완전히 불법적인 경우는 거의 없으며, 불법을 감수해야만 하는 투쟁--공공부문이나 비정규직과 같이 노동3권이 제한된 영역--에서도 그러한 여지를 최소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법적 절차를 끝까지 가져가게 된다.)

노동자들의 집단적 저항, 특히 파업은 사업장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지만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중간집단 노동자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노동시장을 통제하는 권력을 강하게 가진 전문직들은 파업이 별로 필요없다. 또한 너무나 조직적으로 취약해서 승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경우에도 파업은 매력적인 선택이 아니다. (이러한 조건은 변호사와 의사와 같은 전문직뿐 아니라 비정규직, 특수고용,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이 오히려 노동조합에 조직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저자들이 인용하는 사무엘 콘Samuel Cohn의 파업연구는 흥미로운 점을 몇가지 지적한다. 당면 파업이 실패했을 때조차 작은 파업은 인금인상을 불러온다는 점, 노동조건과 정치현안에 대한 파업은 임금파업보다 더 장기적인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점, 단기적인 파업이 장기적인 파업보다 효과적이라는 점, 관료화되고 중앙집권화된 노조들은 더 적은 성과를 얻는다는 점, 이데올로기적으로 분열된 복수노조는 노동자의 이익을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 그러나 이런 이득은 모두 노동자의 동원능력, 확살한 파업위협의 존재여부에 좌우된다는 점 등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할 수 있는 파업투쟁의 효과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인 셈인데, 남한에서의 노동자운동만의 경험이 아니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세계는 잘 정의된 노동시장 제도, 노사분쟁의 제도와 관행 같은 것들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요소들 중에서는 단지 설명적인 의미를 갖는 것도 있지만 노동자운동에서 고려할 중요한 사항들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경험하지만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 "인간답게 살고싶다"는 노동자들의 요구가 투쟁을 촉발할 경우, 그것은 고전적인 임금인상 투쟁은 아니지만 노동자들의 노동세계 경험 속에서는 충분히 중요한 요구가 된다. 억압적인 중간관리자의 해고를 요구하는 투쟁도 노동현장의 권력문제라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마지막에 언급한 콘Cohn의 지적처럼 실천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내용들도 있다.


===
다만 이 책은 원래 좀 너무 많은 개념이 방만하게 사용되는 느낌인데다가, 번역 또한 읽기 쉬운 우리말 문장으로 된 것은 아닌 것같다. 그래서 읽기가 상당히 힘들다는 점은 언급해야겠다. 한동안 다른 책에 대해서 쓰지 못한 이유 중에 하나는 이 책과 "싸움"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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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비정규후보 논란

민주노동당이 비례대표 2번으로 민주연합노조 홍희덕 위원장을 올리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논란이 있다.
두 가지인데,
첫번째로, 왜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적 중요성이 있는 이랜드-뉴코아가 아니냐는 것
두번째로, 민주연합노조의 산별노조 등에 대한 행보를 볼 때 추천받을 만하냐는 것이다. (민주연합노조는 대의원대회 결의로  산별노조로 전환했다가, 총회를 다시 부쳐서 부결하고 공공노조를 탈퇴했다.)

이에 대해서 민주노동당과 후보는 각각 이렇게 해명한다.


첫번째에 대해서.
이랜드노조 지도부를 민주노동당 비례후보로 전략 공천하지 못한 이유는 이러합니다. 혁신 비대위가 김경욱 위원장, 이남신 수석부위원장과 직접 면담한 결과를 바탕으로 비정규투쟁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인물 등 여러모로 손색이 없지만, 혁신 비대위가 애초 원했던 김경욱 동지는 고사했으며, 추천된 이남신 동지는 비정규직 노동자 당사자는 아니라는 점, 비례후보 출마에 반대하는 조합원들이 적지 않은 상태에서 사측의 악선전도 예상된다는 점, 민주노동당 비례후보 등록마감이 3월 2일인데, 비례후보 채택 여부, 어느 정당인지 여부, 누가 나갈 것인지 여부에 대한 이랜드의 최종 판단은 3월 4일 조합원 총회에 좌우된다는 점, 집행유예와 고법재판 계류 중이라는 점 등이 반영되었습니다. -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전략공천에 대한 혁신 비상대책위원회의 입장>

두번째에 대해서,
Q: 민주연합노조는 대의원대회 결의로 공공노조에 가입했다가 조합원 총투표로 탈퇴를 한 적이 있다. 산별연맹을 통해서만 민주노총에 가입할 수 있는 규정 때문에 (법적으로는) 한동안 민주노총 소속이 아닌 적이 있었다. 상급조직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A: 대의원대회에서 가입결의한 다음 조합원 총투표를 거친 것은 노동조합의 규약에 의한 것이었다. 민주연합노조 규약에 의하면 총회 의결사항의 대부분을 대의원대회에서 갈음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분할 합병 해산에 관한 것은 반드시 총회에서 의결하도록 되어 있다.
한동안 법적으로 민주노총 소속이 아닌 적이 있었다는 것은 동의하지 않는다. 민주노총 규약 제5조 2항 및 제8조 1항에 의하면 전국규모의 산업별 단위노동조합과 연합단체, 일반노동조합,전국 규모의 산업별 협의회와 직업별 노동조합등이 가입신청할 수 있다. 민주노총에 산업별 연맹만 가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민주노총 중앙에 가입신청하지 않고 각 지역본부에 직가입한 노동조합도 여럿이다. -<비례대표 전략 2번 홍희덕 후보 지상청문회[진보정치]>


첫번째에 대해서 다시.
나는 이남신 동지가 진보신당의 후보로 출마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사실 별로 동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미 조합원 총회에서 결정한 마당에, 이제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 관련된 정황에 대해서는 "진보신당은 우리를 이용하지 말라"-정경섭/레디앙 기사를 참고.

그런데 민주노동당의 이러한 "해명"은 매우 궁색하다.
우선, 민주노동당은 이남신 동지가 비정규직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부적절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말하는 김경욱 위원장도 역시 정규직이라는 점에서 곧바로 모순된다.

게다가 그런 식의 기준이라면 민주노동당 후보로 추천된 민주연합노조의 홍희덕 위원장도 현재 비정규직이라고 할 수 있는가? 홍희덕 위원장은 의정부시설관리공단에 속해있다. 노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민간위탁 반대투쟁을 전개했지만, 현재는 지방공기업의 "정규직"인 셈이다. 적어도 법적, 형식적으로는 그렇다.(물론 이 경우에도 시청이 위탁주체를 지방공기업이 아니라 민간에 전환할 수 있어 간접고용비정규직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현재 고용된 법적 신분이 무엇이냐는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홍희덕 위원장이 적절할 수 있는 조건이 "비정규직 투쟁의 경험"이라면 이남신 동지도 다르지 않다.(물론, 여성비정규직 노동자 당사자였다면 더 좋았을 것이지만.)

비례대표 추천마감일과 노조 총회날짜의 이틀차이 문제도 마찬가지다. "출마여부-정당-후보" 세가지가 결정이 안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선 이러한 사항에 대해서 이틀의 여유를 더 갖지 못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일일 뿐더러, 더 많은 모순이 있다. "정당"의 경우, 민주노동당이 홍희덕 후보로 확정하지 않았다면 민주노동당을 결정될 가능성이 (아마도 훨씬) 더 많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 "후보"의 경우에도, 이미 민주노동당이 이남신 동지를 거부한 상황이다. 조합원 총회에서 이남신 동지가 추천되었다라도 거부했을 것이라는 말인데, 이것이 변명의 거리가 되는가?
마지막에 언급된 집행유예, 재판계류 문제는 별로 언급할 가치가 없을 것같다.


▲지난 해 열렸던 이랜드노조 총회 모습.(사진=이랜드 노조/레디앙에서 펌)

두번째 문제는, 이미 많이 논란이 된 문제다.
최근에는 민주연합노조가 사실상 휴면조직 상태에 있었던 시설연맹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우회해서 민주노총에 다시 가입하게 되었다. 애초에 가입되어 있던 공공운수연맹에는 복귀하지 못했다.(민주노총 직가입도 아니다.)

* 관련된 기사와 게시물 :
민주연합노조-공공노조, 공공연맹, 민주노총 탈퇴처리
민주연합노조는 시급히 민주노총으로 복귀 하여야 합니다.

민주연합노조가 대의원대회에서 가입하는 결의는 90%이상의 찬성으로 이루어졌다. 얼마 후에 총회에서 산별 가입안건은 90%이상이 반대하는 것으로 부결로, 각각 정반대로, 그러나 압도적인 한쪽으로 결정되었다. 즉 집행부의 매우 강력한 의지가 작용하는 가운데 결정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식의 조직기풍은 최근 민주연합노조가 진행하는 100%조합원의 민주노동당 가입운동으로 연결되는데, 대중조직에서 이런 방식이 가능한지 갸우뚱해지기도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사항에 대해서 순전히 형식적인 논리로 자신들이 규약을 잘 못해석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민주연합노조가 총회를 하기 전에 이미 민주연합노조의 핵심지도부들은 공공노조 임원선거에서 비공식적인 논의를 이런저런 세력들과 깊숙히 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당선가능한 방식으로 공공노조 임원출마가 불가능해진 직후, 민주연합노조의 총회가 잡히고 압도적으로 부결되었다는 점은 무엇을 말할까?

자, 그런데 홍희덕 위원장의 발언은 이렇게 이어진다. "한동안 법적으로 민주노총 소속이 아니었다는 점을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뒤에 말하는 민주노총 가입과 관련해 여러조직형태가 가입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민주연합노조는 시설연맹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민주노총에 가입했다. 그러나 이것이 민주연합노조가 이런저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계속 민주노총 소속이었다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이렇게 주장할 수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법적, 절차상의 문제 때문에 민주노총 탈퇴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는 것이므로" 정신상으로는(혹은 정치적으로는) 민주노조 정신을 갖고 민주노총과 함께 투쟁했다고 말할 수 있다. 형식적인 가입상태가 문제가 아니라고, 민주노조 정신이 문제라고,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된다.

그러나 다시 문제는, 이렇게 말할 경우에는 앞에 산별노조 가입과 관련해서 법적, 규약상 문제 운운하는 것과는 전혀 일관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당시에 이미 사실상 가입한 사실을 법적이고 규약상의 문제를 들어 다시 총회에 붙이고 부결시켰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은 홍희덕 위원장, "진보정치'에서 펌)

홍희덕 비례대표홍희덕 위원장을 여러 사업속에서 가까이 보아온 나로서는, 그분의 운동상의 신념이나 활동가로서의 자질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는다. 여러해동안 환경미화원, 간접고용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에 헌신적이었고 인간적으로도 훌륭한 분이라 존경한다. 그래서 국회의원 후보로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연합노조가 만든 많은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홍희덕 위원장에게 그 책임을 다 물을 수 없다고도 생각한다. 위에 "진보정치" 인터뷰의 40문40답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23. 일 잘 하고 못된 사람, 일은 못 해도 착한 사람 가운데 누구와 일할 지 : 일 잘하고 못된 사람", "못된 사람"과 하고 계신 것같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보여준 민주노동당의 변명은 매우 구차하고 치졸하기 그지없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남신 후보가 정당성이 없다는 식의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홍희덕 위원장께 대한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분명하게 잘 못된 것이 있었다면, 혹은 정치적 판단이 달라져서 남들(우선 공공노조에 남은 3만명의 조합원들부터 민주연합노조 조합원들에게까지.)에게 피해와 혼란을 주었다면 인정하고 사과하면 될 일이다.

전후 사정을 모두 다 알면서 뻔한 방식으로 변명하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홍희덕 위원장답지도 못하다. 아예 그 모든 과정이 문제가 없었다는 식으로,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라면 존경을 철회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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