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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만남-서경식 김상봉 대담


만남 - 서경식 김상봉 대담
서경식, 김상봉 지음 / 돌베개

나는 이런저런 '이벤트'에 응모하거나 복권을 사거나 하는 성격이 아니다.(사실 거의 해본적이 없다.) 그러나 출판사에서 이 책의 저자들과의 대화 이벤트를 한다는 공지를 보고는, 잡혀있던 회의일정을 연기하면서까지 응모하고, 또 운좋게도 당첨되었다. 아래 이야기는 책으로 만난 대화에 대한 이야기이도 하면서, 저자와의 만남 행사에서 또 한번 만난 기억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시간상의 이유"로 내 질문서는 잘렸지만 말이다 ^^;

***
김상봉은 서경식이 자신의 "걸어다니는 철학문제"라고 말한다. 앞에 <디아스포라>에 대한 포스팅의 덧글에서도 말했지만 서경식은 디아스포라라는 "상태"가 아니라 그 모순이 "작동"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김상봉은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 "걸어다니는 모순"을 사고할 수 있는 남한에서 몇 안되는 철학자 중 한명이다. 그러니, 이 만남에 어떻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

저자와의 만남에서 김상봉은 이 대담이 518 광주 이후 한세대가 끝난 시점에서, 다음 세대에게 문제를 계승하고 제기하는 과정으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괜한 공언이 아니라, 이 만남 속 대화 전체는 이제 한세대가 지나서 화석화되고 박제화된 이른바 "민주화투쟁"'의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젊은 세대들에게 제기하기 위한 철학적 일반화의 과정, 매우 치열한 과정이다.

만남의 주제를 요약할 수 있을까? 상징적으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제목이 있다. "디아스포라와 서로주체성의 만남"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의 꿈"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디아스포라라는 서경식의 문제의식과 서로주체성이라는 김상봉의 문제의식은 "새로운 공동체"에서 만나는가? 혹은 어긋나는가?

서경식이 디아스포라의 고통에 주목한다면, 김상봉은 그 고통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 새로운 주체성, 이른바 "서로주체성"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긴장이 있다. 서경식에게 그 고통은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개인들의 분투인데 비해서 김상봉에게 그것은 소통의 매개이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의 모순, 국민국가를 넘어서고 횡단하는 새로운 주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과 가장 극한의 역사적 고통에 직면한 주체라는 조건에서, 김상봉의 시도는 전자를 의미하는 것일까?



씨알, 선험적 희망?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이들은 대담에서 디아스포라의 경험을 "코스모폴리탄적 자유"라고 말하는 것은 환상이라고말하고 한편으로는 디아스포라의 경험이 일종의 "유산"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김상봉의 경우에는 오히려 디아스포라 일반보다는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고통을 한반도 민중의 경험 속에서, 함석헌의 "씨알"개념 속에서 접목하고 해석하려고 한다. 한반도에서는 절대적인 종교적/정치적 권위가 부재한 가운데 민중의 끊임없는 투쟁, 혹은 그 가능성이 존재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김상봉은 역사를 비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씨알에게 언제나 희망이, 선험적으로 있다면 비극이 어떻게 사고될 수 있다는 말인가?[김상봉이 그리스 비극에 대한 책을 썼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의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역사에 목적론이고, 그렇게 된다면 비극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게 아닐까? 그러나 나는 또 다른 디아스포라인 벤야민이 말한 "역사의 나쁜 방향"에 우리가 처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고자하는 주체의 비극적 상황--그러나 주체를 숭고하게 만드는--을 염두에 두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서경식의 말에 귀기울이면서 어떤 회의를 갖게 된다. 저자와의 만남에서, 서경식이 말한 것처럼 디아스포라의 경험, 특히 아우슈비츠의 유태인이나 팔레스타인처럼 극한의 고통 속에서는 다른 무엇이 있다. 디아스포라 주체는 그것을 증언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한편으로는 가해자를 "이해-인식"해야한다는 고통속에서 진행되고, 어떤 순간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결국 프리모 레비는 자살했다. 그렇다면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주체들 사이에서 공감하고 이러한 "고통에 참여"하는 것은 가능한가?

디아스포라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묻는 것이다. 김상봉의 '서로주체성'이 디아스포라를 예로 하거나 그들에게도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나에게는 그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그 주체들에게 조차 항상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고통이 아닌가.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디아스포라의 경험은 보편적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또한 서경식에게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러한 고통을 교통하고 공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라면, 증언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단지 언제 누구에게 닿을 지 알 수 없는 "투병통신"(병에 넣은 편지를 바다에 던지는 행위)이라면 디아스포라의 경험은 대중정치에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이 기껏, 소수의 디아스포라 자신들과, 아주 예민한 일부의 공감으로, 지식인들의 하나의 지적 유행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정치의 문제는 대중정치의 문제, 대중 이데올로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저자와의 만남에 갔던 이 날, 우연찮게도 나는 단속추방에 반대하는 이주노동자 농성단 동지들과 함께 하는 일정이 있었다. 이주노조 조합원 동지들에게 한국에서 노동자운동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진행했다.(일제시대~80년대 중반까지 1강. 전체 3강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짧은 강의였지만, 진행하면서 나 스스로 생각하게 된 점이 많다. 우리가 운동을, 사회를 바라볼 때 "이주자의 눈으로" 보아야한다는 점.(교육을 통해서 교육자인 나 스스로를 교육하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예를 들어 일제시대 조선의 노동자운동사를 말하려면 일본에 징용된 이주노동자들, 지금도 중국, 러시아, 미국에 이산되고, 다시 "조선족"으로 남한에 돌아오는 이주노동자들의 눈으로 현재를 보아야한다는 것. 그리고 한국이라는 민족국가의 역사의 시각이 아니라 적어도 아시아, 그리고 세계체제의 시각에서 남한이 처했던 위치를 인식해야하고 이러한 자본주의 세계체계 때문에 이주자가 된 노동자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한다는 것. 또 그들의 모국이 현실과 변혁의 과제와 남한에 노동자운동의 과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한다는 점.

90년대 초중반 이후의 계급구성의 변화는 비정규직의 증가만이 아니라, 그것의 필연적 일부인 이주노동자의 증가와 함께 사고해야한다. 98년 imf구제금융 이후의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양산과정에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도입확산과 통제정책을 함께 생각해야한다, 등등.(한국인 비정규직만이 아니라 이주노동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제까지 내가 얼마나 "내국인"의 시야에 갇혀있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생각할 수 있게 된 지점은, 노동자운동의 쟁점에 접근할 때 '내국인''의 시야에 갇혀서는 안되며 그래서 오히려 "이주노동자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볼 때 온전히 전체를 인식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 정도이다. 운동의 이데올로기를 바꾸어가는 끈기있는 노력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여전히, 그것이 어떻게 대중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는지(혹은 바꿀 수 있는지)는 아직 답이 없는 문제로 느껴진다. 여전히 노동자주체는 민족국가의 "국민"이며, 투쟁의 과정에서 항상 이 이데올로기는 회귀한다.(이것을 단지 지배 이데올로기=피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실천을 통해 가능할까. (혹은 그것은 직접적으로 디아스퍼라의 고통에 대한 참여가 아니라도 매시기 "비국민"이 되는 실천들을 통해서 가능한 것일까? 예컨데 어떤 경로, 실천으로 가능한가?)



새로운 민족국가? 철학인가 정치적 행동주의인가.

저자와의 만남에서 이들은 새로운 국가, "가장 열린 공동체"가 한반도에서 가능할지 묻는다. 김상봉은 한반도의 재통일 과정에서 새로운 민족국가의 가능성에 대해서 그러한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할 희망에 대해서 혹은 정치적 과정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사실 한반도의 재통일과 같은 현실의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 책에서나 혹은 저자와의 대화에서도 언급들은 있지만 모호하고 추상적이기 짝이 없다. 한반도의 정세, 남북이 처한 정세를 볼 때 통일 과정을 어떤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계기로 생각하는 것은 거의 비현실적이다. 오히려 그것이 현실화되는 시기는 반공주의에 대한 투쟁, 민족주의에 대한 투쟁, 북조선 인민을 이등국민으로 전락시키는 내부 식민화에 대한 투쟁의 계기가 될 것이다.(물론 공동체 간의 관계를 문제삼을 수는 있겠지만, 오히려 전체주의 북조선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가 혹은 어떤 식으로 변용될 것인가가 정치적 쟁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정작 더욱 문제라고 느꼈던 것은 저자와의 대화에 참석한 독자들의 태도였다. (철학자거나 사상가인) 저자들에게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독자들조차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은 정치적 프로젝트, 현실의 변화를 위한 실천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철학적 공론의 문제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독자들의 질의와 토론과정에서도 구체적인 정치전략의 대상이 되어야할 정치의 변혁, 공동체의 변혁이라는 과제에 대해서 추상적인 개념들만 언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철학이 어떤 순간에는 오히려 정치적 사고와 실천을 게으르게 만들 위험, 혹은 그 게으름에 변명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혹은 현실의 정치,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이 <만남>의 대화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일까? 둘 다 다른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정치적 실천에는 철학적 방향에 대한 고민이 당연히 전제되어야하지만 거기에 머물면서 정치의 영역, 그리고 실천--정치전략을 실현하는 데로 나가지 않는데서는 그것은 공문구들에 불과하다. 하다못해 디아스포라 개념을 말하면서도 이주노동자 운동에 어떤 물질적이고 실천적인 기여가 없다면 그게 무슨 현실적 의미가 있는가? 개인의 1500cc 두뇌용량 안에 같힌 사고를 넘어서 말이다.

나는 그러한 문제의식을 저자와의 대화에 참가한 독자들만이 아니라 두분 선생에게도 느낄 수밖에 없다. 김상봉 선생은 즉자적인 reaction이 아니라 정신의 유대/연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해고 50일의 GM대우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에는 정신의 유대/연대가 아니라 몸이 따라가는 실천의 연대가 필요하다. 이랜드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구정매출 제로투쟁의 집회참가가 중요하다. 그것은 서경식 선생에게도, 죄송하지만 마찬가지이다.

선생은 자신의 '외부'에 있으며 ''내부'에 참여하지 못하는 데 부채의식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선생이 서있는 곳은 김상봉 선생의 지적처럼 그 자체가 내부일 것이라는 점을 먼저 언급하자. 게다가 문제는, 정치적 교통을 위해서는, 고통의 증언을 위해서도 그를 넘어선 참여를 조직해야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그 주체(디아스포라라고 해도) 스스로가 타자의 고통에도 또 한번 먼저 참여해야한다는 것이다. (디아스포라에게 그것이 가혹한 요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디아스포라가 아닌 주체들의 책임성을 전제하는 가운데, 둘 다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주노조 동지들은 한국의 비정규투쟁에 가장 열심히 연대하는 주체들 중 하나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 발언하고, 그것을 '사회운동'으로 조직하거나 참여해야한다. 서경식 선생이 전날 만났다고 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과의 연대와 같은 실천이, 주체들 사이의 교통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다.(자신의 고통을 증언하는 것으로 어떻게 연대가 만들어질 수 있는가? 연대는 말이나 사고가 아니라 서로 실천속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어떤 "희망"을 위해서

이런 모든 것을 저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철학자들에게는 그의 역할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치인은 아니다. 그러나 독자들도 자신을 철학자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정치적 실천은 이른바 '정치인'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옆에 앉은 어떤 독자가 자신은 "씨알" 개념 속에서 정치적 희망을 발견했다는 요지의 말을 할 때 황당해졌던 것이다. 김상봉 선생에게 내가 가장 의문스러운 점은 민족 혹은 한반도 인민에 고유한 것으로서 "씨알"개념을 초민족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지, 그것이 단지 '선험적'--타고났다는 점에서--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하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씨알"이, 구체적인 정세에 대면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대중"을, 따라서 "정치"를 대체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여전히 그 독자들이 어떤 종류의 실천을 통해서 현실을 바꾸는 나름의 실천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이 대화의 시도는 의미있다. 저자와의 대화 마지막 부분에서 서경식 선생의 말을 주목하자. (공동체 내부의 주체인) "우리"에게 희망의 요소가 보이지 않아도 "외부와의" 소통 속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희망이 소진되어아가는 일본사회의 정세 속에서 더욱 이해되는 말이기는 하지만, 보편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공동체의 변혁을 위해서라도 다른 공동체와 교통하고, 오히려 내부에 존재하는 그들의 시각-- 이주자, 디아스포라의 시각으로 운동을 사고하고 실천해야한다는 점. 교통 자체가 실천이지만, 그것에서 또 다른 실천을 시작할 수 있다면.

김상봉 선생은 또 이렇게 말한다. 도덕, 가치, 그리고 희망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 원래-당연히 있는 것이 아니다.(어떤 초월적 주체가 이런 것을 부여해준 적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에 절망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것을 만드는 것이 과제가 된다. (김상봉 선생은 그것을 "우리 역사"에서 찾자고 말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내가 썩 동의할 수 없는 것은 그 "우리"의 민족적 성격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정치적 희망을 우리는 교통 속에서, 그리고 역사적 경험 속에서 얻자는 제안이다. 그 '희망'이라는 것을 '낙관의 감정적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 실천의 방향으로 생각할 때 현실에서 진짜 희망이 될 수 있다. 두 사람의 대담을 그것을 찾는 과정으로 읽는다면 더 값질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서경식, 김상봉 두 사람의 대화는 여전히 눈부시다. 문제는, 다시 한번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그것을 수동적으로 되뇌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에서 다시 사고할 의무가 있는 것. 이정표가 길을 걸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두 다리가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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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디아스포라 기행-추방당한 자의 시선


디아스포라 기행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많은 언론에 추천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순전히 (내일 이 책에 대해서 글을 쓸 것이다) <만남>-서경식,김상봉 대담 때문이다. 그 전에는 목차를 보고는 그냥 독특한 여행책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의 첫 목차는, '마르크스의 무덤'. 나는, 마르크스의 커다란 두상이 놓여있는, 그렇게 꾸며진 마르크스의 무덤을 좋아하지 않았다. 런던에 가서도 그 곳에 가지는 않았다.

***

서경식, 서준식의 동생. 이렇게만 알고 있었다. 서준식 선생에 대해서라면, 그분을 실천과 글을 통해서 알 수 있었고, 떠나시게 된 이유를 나중에야 듣게 되었다. 그러나 존경하는 분의 형제라고 해서, "그렇구나"하는 이상의 별 생각은 가질 수 없었다. 그러다가,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을 읽고, 아...하고 감탄 혹은 탄식. 왜 아직까지 이런 분을 몰랐을까, 지금, 처음 읽었을까.

***

이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만남>이라는 책을 만나고, 또 길을 돌아서 다시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커다란 두상이 얹힌 무덤의 주인이 아니라, 한명의 디아스포라로 등장한다. 그도, 고향에서 뿌리뽑히고 흩어진 자, 디아스포라였던 것이다. 이 책은 말 그대로 디아스포라 기행, 여행기가 아니라 살아있거나 혹은 이미 죽은, 디아스포라들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이다.

디아스포라는 어떤 이들인가,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 중에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참 한 후에, 전혀 예상치 못하게, 집에 돌아가 가스벨브를 틀거나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리는 낙관주의자들이 있다.(..) 누군가 죽으면 그 사람은 이제 어깨의 짐을 전부 내려놓았구나하고 쾌활하게 생각해보곤 한다.  - 50쪽에서 재인용, 한나 아렌트 "우리 망명자들" 중에서

서경식도 이 구절을 읽고 갑자기 자살한 유쾌한 친척을 떠 올리고, 자신도 이렇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존재 자체가 동요와 불안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저런 정치적 이유로 공동체에서 분리된 망명자들, 이주자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민족적, 문화적 근원으로부터 분리된 이주민 2,3세들 소수자들. 이들은 정도와 양상의 차이가 있지만, 자신의 존재와, 존재하는 곳에서 근원적인 불일치를 경험한다.

서경식과 같은 재일 조선인은 모어-모국어가 일치하지 않는다. 모어는 일본어이고 일본어로 사고하지만 모국어는 한국어, 그것은 오히려 생소하고 거칠게 입안에서 맴도는 언어다. 디아스포라는 조국(선조의 출신국), 고국(자신이 태어난 나라), 모국(현재 '국민'으로 속해있는 나라)가 분열된 사람이라고 말한다. 내셔널리티의 분열과, 그리고 영혼을 구성하는 언어의 분열은 개인에게 항구적인 상처와 균열을 새길 수밖에,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일지는 나와 같은 '내국인'들에게는 생각하기 힘들다.

더구나, 이런 분열이 살인적 폭력에 의한 경우에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란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여성 미술가 시린 네샤트는 어떨까, 우간다에 살던 인도 이주민의 후손으로, 이제는 영국에 망명해서 살아야하는 자리나 빔지는 어떨까. 백인 사회에서 자라난 코리언 입양아들은 어떨까. 그리고, 자신의 모어가 파시스트의 끔찍한 폭력의 언어가 되어 버린 독일계 유태인 시인, 강제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파울 첼란에게는 어떨까. 그리고 바로 지금, 재일조선인과 고향에서 쫒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이라크 사람들과 파리 방리유의 이민2세들과 르완다 난민들과 코소보 사람들과... 그리고, 우리 옆에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어떨까.

<만남>에서 김상봉은, 서경식은 타자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특이한 존재라고 말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것을 상상하기도 힘든 것이다. 영혼이 어떻게 그것들을 견딜 수 있을까. 디아스포라에게라면 그 자신의 영혼의 고통 덕분(?)에 타자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일까? 아니, 오히려 우리 모두에게 공동체의 윤리가 타자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하려면 서경식과 같은 디아스포라의 예를 드는 것은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그래서 서경식은 솔직하게, "보편적인 고통같은 것에 저는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만남>356쪽)

그러나 서경식이, 한명의 디아스포라로서, 우리와 대화하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고통의 차이를 과시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대화하고 만나려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도 오히려 만남에 나서야한다. 그/녀들의 고통이 대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해도, 상상하기 힘든 것이라고 해도,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녀들을 통해서 세계를 만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타자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래서 오히려 디아스포라를 만나는, 나와 같은 '내국인'에게 요구되는 윤리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에 함께 하기 위해서 "있을 수 없는 비국민"(잭 시라이)이 되는 것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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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김동률, Monologue


김동률 5집 - Monologue
김동률 노래 / Mnet Media

나오기 전부터 이곳저곳에서 주묵했던 앨범.
딴 곡들도 좋지만, 첫곡, '출발'이라는 노래는 참 좋더라.
또 여행을 떠나고 싶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촉촉한 길을 혼자 걷고 싶다.


아주 멀리 까지 가보고 싶어
그곳에서 누구를 만날수가 있을지
아주 높이 까지 오르고 싶어
얼마나 더 먼곳을 바라볼수 있을지

작은 물병 하나 먼지낀 카메라
때묻은 지도 가방안에 넣고서
언덕을 넘어 습기를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데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멍하니 앉아서 쉬기도 하고
가끔 길을 잃어도 서두르지 않는 법
언젠가는 나도 알게되겠지
이길이 곧 나에게 가르쳐 줄테니까

촉촉한 땅바닥 앞서간 발자국
첨보는 하늘 그래도 난 이큰길
언덕을 넘어 습기를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데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새로운 풍경에 가슴이 뛰고
별것아닌 일에도 호들갑을 떨면서
나는 걸어가네 휘파람 불며
때로는 넘어져도 내길을 걸어가네

작은 물병 하나 먼지낀 카메라
때묻은 지도 가방안에 넣고서
언덕을 넘어 습기를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데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내가 자라고 정든 이 거리를
난 가끔 그리워 하겠지만
이렇게 나는 떠나네
더 넒은 세상으로


노래는 아래에서 들을 수 있다. (내가 올리기는 귀찮아서 ^^:)
http://blog.naver.com/mangto91/80047524182
사진은 알프스의 산길.  "서쪽길"을 들었던 날, 날씨가 좋았다..

가사가 묘사하는 것들은 혼자서 여행을 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장면이다.

김 동률의 지난 앨범도 그런 느낌이었는데, 곡 하나마다 작은 플롯을 담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앨범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극처럼 느껴진다. 정작 가수 자신은 노래에서 "영화에서처럼 짜릿한 반전은 기대하지 않아"(4/ "JUMP")라고 말하지만, 6/ "The Concert" 나 3/  "오래된 노래" 같은 노래의 가사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사랑 이야기인 것으로 들리는 노래들이다. 사실, 누구에게나 있는, 그러나 한 사람에게만 고유한 그 사랑 이야기들은 영화같은, 혹은 그보다 더 극적일 테니까.


===
사실 요즘에 '필'이 꽃혀서 듣고 있는 앨범은 "디어 클라우드 Dear Cloud"라는 밴드의 1집.
CD 케이스가 구름처럼 폭신거린다.



지금 읽고 있는 <스피노자의 뇌>라 는 책을 보면, '느낌'에 선행하는 '정서'가 생기기 위해서는 마치 자물쇠에 맞는 열쇠같은, 어떤 자극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앨범의 몇몇 곡이 그런 셈이다. (물론 위에서 이야기한 김동률의 '출발'도 나에게 여행의 정서를 다시 불러오는 열쇠다.)

하지만 꼭 맞지 않아도 열리는 것을 보면, 내 자물쇠가 좀 허술한 것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
다락방이 있던 집에 대한 추억같은 것은 없지만,  "그 다락방이 그립습니다"라는 노래에 특정한 정서와 그것으로 인한 느낌과 이런 저런 생각들이 따라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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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
강양구 지음 / 프레시안북

 

아톰과 코난은 20~30대라면 누구나 기억할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이다. 원자력 에너지를 쓰는 아톰의 시대에서, 태양의 에너지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코난의 시대로 가자고 주장한다. 바로 석유시대를 넘어서 말이다. 프레시안 에서 황우석 사태 등 과학기술과 관련된 쟁점에 좋은 글을 써왔던 강양구 기자가 썼다.

 

석유 에너지 시대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들, 바이오디젤, 바이오매스, 태양에너지, 풍력에너지 등을 소개한다. 각각의 에너지가 유럽 등지에서 어떻게 실제로(!) 활용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공상이 아니라 이미 현실이며, 그리고 절박한 미래이기도 하다.

 

여기에 비해서 남한의 현실은 “참으로 암담하다.” 법과 제도, 정부의 의지는 재생에너지 혹은 석유 대체에너지의 개발과 사용을 촉진하기는커녕, 가능성을 봉쇄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석유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시점에 비참한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석유 정점 oil peak가 2015~25년으로 예상되는 마당에 이미 임박한 현실이다.) 90년대, 쿠바와 북한이 처했던 상황이 그것이다.

 

폐식용유로 만든 바이오디젤로 시내버스를 운행하는 오스트리아의 그라츠, 바이오매스로 필요한 난방, 전기에너지는 물론 비료를 생산하는 독일의 윤데 등의 사례는 흥미롭다. 이런 사례들은 대체 에너지를 사용해서 살아가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소도시들에 불과하고 농업에 기반하고 있는 사례들이라는 점에서, 전체 에너지를 대체하기에는 힘들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 적어도 이런 방식의 시작이 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한편, 이러한 대체 에너지와 관련해서는 여러 쟁점이 있다. 바이오디젤과 관련해서는, 이것의 생산(재배와 운송, 가공)을 위해서 들어가는 화석에너지로 인한 온실가스 발생, 식량대신 바이오디젤 생산을 위한 농업이 진행되면서 물의 부족, 열대우림의 파괴, 식량가격의 인상이 일어난다. 저자는 이런 쟁점에 대해서도 비교적 균형있게 소개하고 있다. (물론 내가 보기에는 저자는 바이오디젤에 대해서 너무 관대하다. 식량 가격의 측면에서 보아도, 가격인상이 ‘아직’ 충분히 현실화되지 않았을 뿐, 바이오디젤 산업이 전면화되면 큰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을 통해서 접할 수 있는 대체에너지들이 딱히 어떤 명확한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은 아니다. 소개하는 사례들은 지역적으로 제한적이고 고군분투하고 있고 아직 돈이 많이 든다.(따라서 저소득 국가에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과연 환경적으로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논쟁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에너지 체제 전환을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직은 실험, 대안 “만들기”의 과정이다. 그것을 감당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어떤 명확한 대안, 깔끔한 전망이 아직 없다고 해도 에너지 체제의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실험과 실패는 필수적인 기회비용인 셈이다. 그래서 '감히' 시도해나가야한다.

 

한편, 이러한 대안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북한에 대한 대체 에너지 지원 방안이다. 북한에 경수로 대신 풍력에너지, 바이오매스를 활용할 수 있는 시설을 제공하자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에서도 이미 제안한 바 있는 이런 대안은 에너지 체제전환과 평화를 결합하는 의미있는 방안이다.

 

유가 폭등의 시대, 유류세 인하가 쟁점이 되고 있지만, ‘언발에 오줌누기’ 식의 대책만 논의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시기일수록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현재의 석유에너지 체제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을, 운동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책에도 언급되지만 환경운동단체, 민주노동당, 공공노조-연맹 산하의 에너지 관련 노조들(가스공사지부, 발전노조 등)로 이루어진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의 활동을 더욱 활성화하고, 또한 노조운동의 유기적 일부가 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점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 최근 프레시안이 낸 책들은 이런 점에서 흥미롭다. <대한민국 병원사용 설명서>는 보건의료, 건강보험 제도와 시민의 생활의 문제를 생생하게 풀어낸다. 이 책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는 에너지체제 전환을 위해서 (노동자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의 대안에 대해서 말한다. 직접적으로 공공부문 노동자운동에 필요한 이념들을 (노조운동에 제한되지 않는) 사회운동의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셈인데, 나 같은 노조활동가들에게는 실천적(혹은 실용적)으로도 매우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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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난의 시대’에 대해서는 물론,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코난이 맞서 싸웠던 인더스트리아에서 전쟁광들이 얻어내려고 했던 에너지도 “태양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미아자키 하야오는 작품 속에서 플롯의 전개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모순을 드러내기를 즐기는 것같은데, 이것도 그 사례의 하나라고 할 만하다. (그런 사례로, 나우시카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여성인 크샤나, 모노노케 히메에서 철의 문명을 만들고 동물들과 싸우는, 그러나 여성과 나병환자를 보호하는 에보시와 제철소 마을의 존재 등을 들 수 있다.)

 

인더스트리아에 숨겨진 태양에너지는, 석유 제품(플라스틱)의 재활용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전쟁을 위한 것으로 전유된다. 그에 비해서 라나의 하이하바섬은 태양과 바람 속의, 평화로운 농경 공동체이다. 미래소년 코난의 결말은, 마치 하이하바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같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새로운 세계를 쓰자고 제안하는 것같다. (인터스트리아가 가라앉은 후 새로 떠오른 대륙처럼)

그 세계는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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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현장파&quot;의 모순

'현장파'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노동자운동에서 '좌파'와 혼용되어 사용된다.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물론 이렇게 된데에는 역사적 맥락이 있다. 사업장 단위의 경제투쟁에서 전투성과 비타협성을 좌파들이 일관되게 지지해왔고, 이것이 이러한 정서를 공유하던 현장활동가들과 결합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전노협이 약화-소멸되면서 대공장 중심의 경제투쟁은 민주노조 운동에서 더욱 중요한 위치를 갖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기업단위 경제투쟁의 전투성과 비타협성은 좌파들이 현장활동가들과 공유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경향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죄송하게도 '좌파'는 '현장파'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한 활동가가 좌파이자 현장파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좌파=현장파는 아닌 것이다. 좌파는 정치적 입장이며, 현장파는 대중운동의 한 경향이니까.(그것도 주로 대공장 현장조직들을 중심으로 하는 경향들이다.)

이런 뻔한 이야기를 다시 하는 이유는, 좌파=현장파의 도식, 좌파가 자신의 대중운동적 기반을 주장하고 확대하기 위해서 활용해왔던 이 도식의 모순이 점점 더 드러나고 있고, 그 모순을 적대적으로 전개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그 존재를 인정하고 사고할 수 있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는 생각 때문이다.

좀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류기혁 열사의 분신 이후에 민투위가 크게 비판받았던 적이 있다. 대공장 현장파운동이 비정규직 운동에 대한 태도가 문제였다. 물론 당시에 이 문제는 정파간의 비난으로 얼룩졌고, 그것을 특정 정파(말하자면 노힘)의 책임이라는 식의 비난이 많았다. 하지만 현대차 집행부의 태도가 노힘의 입장과 같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런 비난은 진정한 쟁점을 왜곡하는 효과를 낳았다. 말하자면 노힘이라는 정파의 입장이 아니라 대공장 현장파의 입장이 문제였던 것이다.(현장(파)를 '신성시'하는 이런저런 정파들의 비난이, 현장조직이 문제라는 비판이 아니라 정파(노힘)가 문제라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는 최근 공공노조나 연맹 주변의 상황을 보면서도 다시 느끼게 된다. 공공노조-연맹 안에서 좌파라는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존재한다.(본인들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하나는 산별노조를 지역조직을 중심으로 강화하고 이를 통해 비정규직노동자를 조직하고 투쟁하는 것을 주된 입장으로 하는 경향.
또 하나는 대공장의 현장투쟁을 강화하는 데 우선을 두고 따라서 산별노조로의 집중을 비판하는 경향.

경향적으로 지역운동 활동가들, 비정규직 활동가들은 전자의 입장을, 대공장 현장파 활동가들은 후자의 입장을 가진다. 이런 입장은 산별노조 안에서 대공장 조직의 발전방향, 향후 산별노조 발전방향, 지역조직과 비정규사업에 대한 예산과 인력의 배정 등에서 입장의 차이를 나타낸다. (이것은 국민파와 형성하는 산별노조에 대한 쟁점과는 또 다른 축의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어떤 현장파 간부는 이후 산별노조 내 예산배정비율을 [중앙:기업지부=3:7]로 하자고 제안한다. (현재는 4.5:5.5이며, 내년에는 5:5로 조정할 예정이니 이 현장파 활동가의 입장은 현행보다 기업별 지부의 예산을 확충하는 안인 셈이다.) 이런 입장은 사업장단위 현장에 더 큰 힘을 주어야한다는 관점에서 나온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렇게 될 경우 필연적으로 산별노조의 지역조직, 비정규직 조직화를 위한 재정과 인력은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다.

또 어떤 현장파활동가들은 '제대로된 투쟁'을 위해서 현재의 산별노조를 탈퇴해 유사업종 대공장 노조들로  새로운 산별노조를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것이 실질적인 "총파업"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산별노조의 재편단계에서 몇번씩 유사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이런 지점에서는 오히려 국민파의 "업종노조" 입장과 유사해지는 현상도 나타난다.(역설적인 현상도 아닌 것이, 양자 모두 실리주의와 경제주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양자의 입장은 상호 토론되고 합의점을 찾는 방향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적대적으로 전개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쟁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확인해야한다. 그저 범-좌파라는 입장으로 뭉개고 갈 수는 없는 상황들이 터져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정규직-대기업 사업장 운동이 어떻게 "현장에 기반하여" 사업장 경제투쟁을 넘어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노동운동으로 확장될 것인가라는 측면에서 제기될 필요가 있다.(양자의 입장의 산술적 합, 합의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업장 단위의 전투적 경제투쟁, 구조조정 반대투쟁이 가진 의미와 한계가 모두 확인될 필요가 있다.
 
사실 이런 문제제기는 이제까지 노동자운동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 많은 학자들의 논문과 정치/사회단체들의 입장에서 확인된 것들이다.(그래서 너무 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활동가들 사이에 충분히 동의되고 있지는 못하다는 점도 분명하다. 모두 "자신이 선 자리에서" 사고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좌파-현장파라고 불리는 경향 안에서 이런 쟁점과 모순이 확인되어야 그런 동의도 비로서 가능하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런 쟁점들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려고" 하는 입장들이 다수인 것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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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성경을 해방시켜라


성경을 해방시켜라
존 쉘비 스퐁 지음, 한성수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기독교 성경을 몇번이고 읽어보려고 했지만 나에게는 사실 몇장을 넘기기가 고역스럽다. 구약부터 읽으려면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고, 신약부터 읽으려고 해도 도대체 "그래서 말하려는 게 뭐지?"라는 생각이 이내 들기 시작한다. 생각해보면 구약은 다른 민족들의 그것처럼 '신화'일 뿐이고, 그런 측면에서 읽으면 될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것이 문자 그대로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나조차 그 프레임에 갖혀있는 셈이다. 신약에 대해서라면 ("무조건 믿어라"가 아니라) "어떻게 읽어야할지" 알려줄 사람을 제대로 만난 적이 없다.(그것을 정직하게 '신화'로 읽는다면 우리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상징들과 무의식을 사고할 수 있는 것처럼, 성경에서도 그런 소득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 개신교 교회의 추악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기독교라는 종교에 무엇인가 배울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성경에 다가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화와 잠언 속에 어떤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는 이가 필요하다. 천지창조와 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문자 그대로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그런 억지 말고.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같은 무신론자도 기독교를 비로서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고, 존중할 수 있게 만든다. "머리가 거부하는 것은 결코 가슴이 예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저자는 종교적 교의도 맹신의 대상이 아니라 사고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온갖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가득한 것으로 보이는 성경을 어떻게 머리가 거부하지 않게 할 수 있단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문자 그대로 성경을 이해할 경우 그런 허무맹랑함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구약 안에는 상이한 성격의 신화들이 섞여있고 따라서 대표적인 이야기인 창세기와 아담과 이브 신화는 서로가 일치하지도 않는다. 구약은 기원전 900여년 경부터 문자로 고정되기 전까지 수개의 서로 다른 신화가 융합되면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고대 유대민족의 상이한 기원과 역사적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구약은 "역사적 문서"다.

한편, 신약의 기원도 복잡하다. 그것들은 적어도 예수 사후 30년이 지나서야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고, 그나마 상이한 분파들이 다른 뉘앙스를 갖고 기록했다. 입에서 입으로, 분할된 종파들 안에서 전해진 예수의 가르침이 일관되게 제시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심지어 예수탄생과 부활의 에피소드도 각각의 복음서가 전혀 상이하게 전하고 있다.) 신약은 예수라는 하나의 기원에서 출발했지만 상이한 집단에서 다른 성격으로 발전한 종교운동의 기록을 모은 것이다. 유대인 기독교도에게(마태복음), 소아시아의 비유대인 기독교도에게(누가복음), 로마라는 세계도시의 기독교도에게(바울) 예수의 가르침은 다르게 변용될 수밖에.

그렇다면 '역사적 문서'인 성경의 가르침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고대문서의 꾸러미에 불과할까?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성경, 예수의 가르침이 가지는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각자의 입장에서, 역사적 경험에서 변용되지만 여전히 보전되는, 오히려 그러한 역사적 경험에 따라 확장될 수 있는 예수의 가르침이 있으며, 따라서 2000년이 지난 우리에게도 예수는 여전히 현재적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현재적인가? 저자에 따르면 예수가 당대에 그렇게 많은 추종자를 모았으면서도 동시에 증오받고 살해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는 것, 그것은 제도적이고 관습적이며 종교적인 안전장치들을 무장해제시키면서 제기되는 것, 어떤 이도 배제하지 않는 보편적인 사랑-인류애, 보편적 공동체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이였던 것이다. 그것은 이방인들, 문둥병자, 창녀, 세금징수원, 도둑들에게도 열린 것이다.(현대라면 이주노동자, AIDS감염인, 성노동자 같은 하위계급-소수자들일 것이다. 물론, 현재의 한국 교회는 이들을 '절멸'하고자 할 것이다. 이들의 '근본주의'는 얼마나 反-그리스도적인가!) 따라서 그것은 지배자들에게 격렬한 증오를 받고, 또 그런 소외된 자들에게 수용되고 확산된다. (이런 내용을 통해서 예상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인식은  정치적으로 좌파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유대신화의 인격적이고 부족적인 신이 아니라 보편적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무한하고 영원한 정신, 누구나 만날 수 있고 어디에나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된다. 그것은 인격적인 신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스피노자의 신, 세계 자체에 가깝다. 각자의 정신이 고양되고 무한히 확장될 때 만날 수 있는 우주-존재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신을 만나는 경험은 "존재의 심리학"에서 매슬로가 말하는 "절정경험"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자신을 대면함을 통해서 세계를 만나고 고양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매슬로 역시 절정경험의 하나로 종교적 경험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영지주의적이기도 하다. 물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이단'이라고 펄펄 뛸 일이다.)

저자 스퐁의 시도는 이런 점에서 어찌보면 위험하다. 그것은 나같은 무신론자가 성경을 역사적 문서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게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종교를 강력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구조--신비적 외양을 벗겨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문자주의를 거부한다는 것 뿐 아니라, 이런 점에서서도 기존 교회의 강력한 거부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역설적인 것은, 예수의 가르침은 이렇게 합리적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신비화될 때 물질적-이데올로기적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예수의 가르침과는 별로 상관없는 주장을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여전히 스퐁의 저작에도 불구하고 문자주의-근본주의 기독교 보수세력들은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명박이 소망교회 신도들을 청와대로 불러들이고 있는 마당에 그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이 무슨 상관이람!)

그러나 스퐁과 같은 방식으로 기독교를 이해한다면, 위대한 예술가들의 종교적 색채를 갖는 걸작들이 왜 "영적인" 감동을 주는 지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허무맹랑한 신화에 빠지지 않더라도 그러한 숭고한 경험들을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미신적인 기복신앙이 아니라도 다른 종교적 경험이 가능할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아마도 나 같은 무신론자들은) 앞으로도 교회 신도들처럼 신이나 종교를 여전히 믿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예수에게서 시작된 2000년의 가르침에 대해서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다. (2000년 전에 단 한번 발생했을 뿐 아니라 위대한 예술가들이 재현해온 것들까지.) 그리고 덕분에 문자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이며 미신적인 신자들이 아닌 기독교 신자들과는 열린 대화를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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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금융세계화와 한국경제의 진로


금융세계화와 한국 경제의 진로
조영철 지음 / 후마니타스

 

이명박이 당선된 이후에 재벌에 대한 규제완화를 비롯한 "친기업정책"이 쏟아지고 있다. 이런 정책들은 온통 재벌, 대기업에게 유리한 것들로 채워져있다. 이명박의 정책패키지는 이전 정권들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더욱 급진화시킬 것이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명박의 경제정책들은 "친기업적"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상당히 모순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모순은 조만간 작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을 상징하는 인물이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국가경쟁력강화특위장인 사공일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발전국가 하에서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인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의 재등장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발전국가를 재도입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왜 그런지, 그것이 성공할 수 있는지를 이 책을 통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사공일은 5공 하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한 인물이고, 3저 호황 시에 재경부 장관이었다. 그가 주도하는 '세계경제연구소'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씽크탱크인 국제경제연구소(IIE)와 긴밀하게 연계해왔다.)

 

금융세계화에 대한 실증적 분석으로 채워진 이 책은 (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금융세계화의 역사에서 시작해서 미국-독일-북유럽 모델을 검토한다. 한국자본주의에 대한 평가와 진로가 이 책의 또 한 축인데 꼼꼼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책을 소개하는 것이 여기서 목적은 아니니 몇가지 눈에 띄는 시사점을 언급해보자.

 

우선, 금융구조, 기업지배구조, 노사관계 제도/관행을 포함하는 경제체제는 각각이 결합되어 있어서 각각 분리해서 몇몇 개별적인 제도를 '도입'하는 방식으로 적용되기는 대단히 어렵다는 점이다.(혹은 거의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북유럽이나 독일에서 산별노조-중앙교섭은 정부 차원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과 복지제도뿐 아니라 기업이 자금을 주식시장이 아니라 주거래은행을 통해서 확보한다는 사정까지 연관되어 있다. 주주자본주의의 취약성은 기업의 장기적 성장에 이해관계를 갖는 은행자본과 종업원(경영진과 노동자)들이 타협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거시적 차원에서의 타협도 가능하다.)

 

작년부터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던 "사회연대정책"과 같은 경우는 북유럽모델 경제정책 패키지의 일부인 "연대임금정책"의 한국판 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문제는, 이런 정책이 스웨덴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경제구조가 달라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연대임금정책을 "노동자양보론"이라고 비판한 입장들도 정당하긴 하지만 더 나가서 말할 필요가 있다. 요컨데 그렇게 제기되어서는 "불가능"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의 문제는, 민주노동당이 "국민연금 개혁"이라는 측면에서는 동의할만한 정책대안을 "사회연대전략"이라는 운동전략 수준으로 비약시켰다는 점에도 있다. 물론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주체들의 입장은 다분히 논쟁적이고 '의도적'이었지만 말이다.)

 

물론 남한이 미국과 같은 조건이 아닌 이상, 미국식 경제체제로 수렴될 것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구조의 변화는 전면적인 것이어야 그나마 '사소한' 개량주의 정책, 사민주의적인 정책이라도  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물론 나의 입장에서는, 세계자본주의의 생산적 팽창이 일어나던 시기에 가능했던 그러한 경제모델이 금융세계화 국면에서, 반주변에서는 실현되기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경제체제를 전면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에 동반되지 않은 채 제기되는 "사회연대전략"과 같은 것은 허망할 수밖에.

 

둘째로, 주주자본주의의 전면화라는 방식의 금융화된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에 조차도 "역사의 필연적인 완성"은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적으로도 (심지어는 영미에서도) 주주자본주의가 전면화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을 뿐더러, 현재에도 유럽이나 일본 등에서는 상당히 독자적인 모델의 자본주의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 물론 이들이 영미식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인 구조가 바뀌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금융세계화를 미국식 주주자본주의의 전면화로 이해하고, 따라서 (쌍둥이 적자로 유지되는) 미국경제의 유지불가능성을 곧 금융세계화된 자본주의 자체의 유지불가능성으로 등치시키려는 유혹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미국경제의 붕괴가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심각하고 결정적인 위기가 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지만, 앞으로 발생할 위기의 원인이 모든 국가의 경제모델이 미국식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금융세계화가 심각하게 진전되고 있으나 미국과 같을 수는 없고, 따라서 한국의 조건에서 제기될 수 있는 구체적인 경제체제 대안이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구체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기껏해야 다른 자본주의 모델을 대안사회 모델로 제기하는 것과 같은) "정책대안"이라는 방식으로 제기되어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남한"이 아니라 "세계"자본주의 체계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변혁적이고 국제주의적인 대안이 제기될 필요가 있다. 요컨데 일국적 모델이 문제가 아니다.

 

세째로, 이런 맥락에서 한국에서의 정세를 진단하고 대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책은 특히 한국전쟁이후 남한 자본주의의 역사를 국가의 개입이라는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서술하는데,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90년대와 2000년대, 현재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이명박의 경제정책은 모순된 요소를 포함한다. 한편으로는 금융허브 구축, 금융자유화를 추진하고, 또 한편으로는 금산분리완화, 출총제완화, 공정위 폐지(축소)와 같은 친재벌적인 금융정책, 그리고 대운하건설과 같이 경기부양을 위한 (아마도 결국은 재정정책이 될)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편, 몇몇 전략적인 업종에 대해서는 산업정책도 시행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금융자유화는 재벌의 왜곡된 지배구조 보장과 충돌하고 과도한 재정정책은 거시경제 측면에서 금융자본의 이해를 침해한다.

 

아마도 지배계급 입장에서는 과거에 찬란한 영광을 안겨준 발전주의 전략(산업정책과 금융정책, 재정정책)과 현재 국제적인 자본주의의 "대안"인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모두 결합하고 싶겠지만 그것은 "동그란 네모"와 같이 불가능한 전략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을 통합해주는 것은 "친기업정책"이라는 정치적 선언일 뿐이지만 조만간 정책적 실패 앞에서는 그런 수사는 별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결국 이명박 정권은 한 쪽의 선택을 해야할 것이라는 것인데, 그 지점에서 동요하다가 임기응변을 '실용주의'로 포장할 가능성이 많다.(이명박도 노무현만큼 럭비공처럼 튀어다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김대중-노무현이 오히려 정책적으로 일관되었던 셈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권의 (예정된) 실패가 가지는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예상하는 것이 앞으로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는 우리가 그것을 대중들에게 어떻게 폭로하고 어떤 대안을 낼 것인가와도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재벌옹호 정책을 신자유주의 논리로 비판하는 (참여연대 식의) 비판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비판은 위에서 "어떤 다른 대안"과 함께 제기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책의 저자의 주장이 내가 이제까지 언급한 이런 것들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민주적 시장경제"를 주장하고 이를 위해서 정책정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일단 통합신당은 불가능해 보이니, 결국 민주노동당이 그러한 역할을 자임할 것인가?) 미국경제의 위기를 예상하는 가운데 내포적 성장전략을 채택하고 조정시장경제와 (숙련된 인적자원을 활용하는) 고진로 전략으로 정책을 전환하자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에 곧바로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저자가 제기하는 수준의 구체성을 가진 논쟁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장점은, 금융세계화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서 대안에 대한 논의도 구체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한편, 이런 입장과 지난 대선에서 가장 가까웠던 것은 창조한국당 문국현과 한국사회당 금민이었다. 노동자운동 안에서도 "새흐름"의 일부 분파는 이와 유사한 입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향후에 노동/사회운동 안에서  고전적인 좌-우 구분이 흐트러질 것을 예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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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분당이 답이려면.

새벽길님의 [민주노동당의 분당이 답이라고 생각하면서...] 에 관련된 글.

새벽길님의 말씀에 많은 부분 동의합니다.
특히 '새로운 진보정당'을 위한 논의에 당 안에 있는 동지들만이 아니라 당외에 있는 대중운동, 사회운동이 논의를 함께 해야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같은 사람들도 책임감이 필요할 것같습니다.

아래 글에 대한 댓글에도 언급한 것처럼 당내의 논쟁만 진행될 경우 그것은 논쟁의 구도상 필연적으로 자주파라는 세력에 대한 공격으로 나가게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런 논의결과로 진행되는 분당은, 말그대로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형성하는 신당창당이라기 보다는 잡다한 반-자주파들이 모인 (유행하는 표현을 응용하면) '민주노동당 시즌2'가 될 뿐이겠죠. (물론 분당을 주장하시는 분들 중에는 더 '민주노동당'다운 '민주노동당'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내에서 논쟁하시는 동지들의 책임이 덜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레디앙에서 장석준 동지의 글은 계속 읽고 있지만, 과연 당내 논쟁에 임하는 평등파(주로 전진)동지들이 이러한 입장에 따라 논쟁을 제기하는 것인지도 계속 모호합니다. 특히 지난 중앙위에서 벌어진 논쟁은 (자주파의 후진 대응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1) 우선 당외곽의 사회운동, 대중운동의 입장과 발언, 어떤 개입들("바로 지금"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지 매우 고민됩니다)이 시급하게 필요할 것이고,
(2) 이와 함께 현재 논쟁이 어쨌든 이미 당내에서 쟁점을 형성하고 사회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당내에서 논쟁하시는 동지들이 논의의 방향을 제대로 가져가는 것이 매우 중요할 수 밖에 없을 것같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당 밖에 있는 운동들은 결국 당내의 논쟁구도를 보면서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도, 당내 논쟁이 정파간 대립의 형태를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구도가 만들어내는 필연적인 효과일 테니까 말입니다. 물론 그것만으로 면피하려고 해서는 안되겠죠.

이런 조건들 속에서만 분당이든 신당창당이든 (아니면 민주노동당 개혁이든간에) 의미있는  운동적 실천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조건들을 만들기 위한 실천을 함께 해야겠지만, 그것이 실패하는 상황이라면 여전히 이 과정 전체가 하나의 '해프닝'이 될 수 밖에 없을 것같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아래 제 글에 댓글 중에 '트루로드'님의 제기처럼, 대안의 논의에 있어서는 오히려 당형태 운동의 상대화, 그러니까 제도정치에 진출하기 위한 당, 혹은 운동들을 '지도'하는 당이라기 보다는 운동들(사회운동, 대중운둥)을 위한 당이라는 관념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런 지점에서 논의가 진행될 때, 당밖에 있는 운동들이 결합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겠죠.
( 이런 지점에서는 민주노동당 외부의 당-좌파들과는 입장의 차이가 좀 있을 수도 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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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의 마지막날들

12월31일. 잘 '기념'되지는 않는 기념일 중 하나. 어찌보면 그저 사람이 만들어놓은 날짜들의 구획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하나의 계기들이라는 점에서 그것들은 의미가 있다.

2007년의 마지막 며칠 동안. 그제는 베토벤의 '합창', 9번교향곡 연주회를 갔다. 오늘은 휴가를 내고 서울시립미술관 반고흐展에 다녀왔다. 고난에 찬 2007년을 마감하면서 나 스스로에게 두 개의 선물을 한 셈이다. 우연한 것들이었지만 그것들이 다가온 어떤 이유들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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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9번 교향곡은 흔히 보편적인 인류애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곡을 들으면 그것은 그저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속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들의 형제애, 민족(국가)을 넘어선 연대가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 느낄 수 있다.

곡의 해설에 대해서는 붉은털실님의 포스팅이 좋다.
http://blog.jinbo.net/egalia227/?pid=155
링크를 따라가면 푸르트벵글러의 1951년 공연도 들을 수 있다.

예술이 (마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자선언'처럼) 하나의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선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그렇다.

그렇다면 그것이 하나의 이념이자, 구체적인 개인들에게는 어떤 활동의 지침같은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나갔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국제주의적 연대. 너무 거창해 보이지만 마치 공산주의자선언이 그런 것처럼, 그것이 우리의 이념이라면 그것은 개인들을 '활동가'로 만들 수도 있다.(이 위대한 작품을 단지 정치적 선언으로 해석하고 긴박될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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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 당시 네덜란드 반고흐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 등지에 보고 세달만에 다시 만난 전시회.
몇몇 작품은 만난적도 있어서 괜히 반갑다.

여행에서 쓴 글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고흐의 그림에서 특징적인 것 중에 몇가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영혼의 고통을 자신의 예술로서 구원받고자한 열정.

이번 전시에서는 유럽에 갔을 때 꼭 보고 싶었지만 못봤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슬픔'이라는 제목의 석판화.

동거하던 시엔이라는 여인을 그린 1882년 작품이다. 여행을 시작할 때, 이 그림은 마치 나의 마음 속에 있는 슬픔을 이미지로 표현한 것같은 느낌이었다. 웅크리고 떨고 있는, 누군가 다독거려주기를 기다리는 절망적인.

결국 한달반 여행을 거치면서 그 누군가는 무엇보다 자기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오늘 보았을 때에서 그 슬픔을 다시 만나고 한참을 앞에 서있기도 했지만, 훨씬 덜 격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다시 만난 고흐의 다른 그림들, 자화상이라든가, 피에타(들라클루아 모작) 같은 작품들도 나에게는 지난 3개월 전과 지금을 비교해보는 리트머스시험지와 같은 것이었던 셈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는, 슬픔에도 어느정도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더 담담하게 직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개인사적인 느낌 외에도, (초기 네덜란드 시기부터 아를까지 이어지는) 고흐의 그림의 어떤 이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베토벤에 대해서 말한 것처럼, 고흐의 작품도 하나의 이념들이 포함되어 있다. 가령 <씨뿌리는 사람>같은 경우를 보라. 그것은 태양의 진실 속에 표현된, 노동하는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고흐가 그리고자 했던 "영원의 흔적을 지닌 사람들"이다.

한편으로는 영적이고, 한편으로는 정치적이기도 한 이러한 이념 역시 우리 활동에 어떤 '선언'이 될 수 있고, 활동가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삶에 녹여낼 지향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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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국제주의, 형제애와 노동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영적이고 정치적인) 애정은 어쩌면 멀리 떨어져있는 것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인민의 해방을 위한 운동에 다양한 모습으로 결합되었던 이념적 근원들의 일부다.

그것들을 예술 속에서 사고할 수 있고, 또한 실천 속에서 녹여낼 수 있을까를, 올해 마지막으로 생각하게 된다. 우연찮은 계기로 나에게 선물한 두 가지의 예술적 체험은 아마도 2007년, "삶의 한가운데"(루이제 린저)를 지나온 나에게 어떤 방향을 말해주는 것같다.(목적론적인가? ^^;) 2007년이라는, 어떤 방식으로든 개인사적으로 가장 깊은 의미를 가졌던 한해를 정리하기 위해서 그런 것을 간절히 찾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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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분당이 답인가?

어제 민주노동당 중앙위가 파행적으로 끝난 이후에 분당론이 더 힘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당원도 아니니 좀 자유롭게 혹은 거리를 두고 이야기해보자. 물론 많은 관심을 갖고 있고 사업도 많이 함께 하고 있으며 이번 대선은 아니지만 이제까지 선거 때마다 투표는 했다는 정도는 밝혀둔다.

왜 분당하려고 하는가?

분당을 주장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왜 분당하려고 하는가?"라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분당론자라는 분들이 주로 이야기하는 이유들이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엊그제 민주노동당 중앙위에서 제기된 요구를 보면 아래와 같다. (레디앙 인용)

현장 발의안의 주 내용은 △종북주의 및 패권주의 청산, 당 강령 정신 및 당 민주주의 실현, 대선평가 당 전면 쇄신안을 임시당대에서 확정하고 △1월 15일 이전 임시 당대회 개최하며 △비례대표 추천권, 당규개정권 등 중앙위 권한의 비대위 전면 위임 등이다.

중앙위의 요구사항이 그 자체로 분당론의 모든 이유는 아니겠지만, 다른 분당 주장 입장들을 보아도 종북주의, 패권주의는 중요한 근거로 제기되는 것으로 보인다.

위기의 원인은 종북주의와 패권주의인가?

종북주의와 패권주의가 물론 하나의 문제들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민주노동당이 이번 대선에서 보여준 심각한 위기의 주된 원인인가? 혹은 권영길이 문제인가? 권영길의 노쇄한 이미지 때문에?

그렇다면 종북주의와 패권주의가 없었다면, 권영길이 후보가 아니었다면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런 결과를 만든 원흉이며 앞으로도 이런 식의 '뻘짓'을 할 자주파와 분리하면 대중의 지지를 받는 건강한 진보정당 운동이 가능할까?

글쎄, 나는 이 대목에서 분당을 주장하시는 분들이 일부는 '순진한 분'들이고 일부는 (좋게 말해서) '영악한 분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번 대선에서 코리아연방공화국 논란이 당내에서 심각하기는 했지만 실제 선거과정에서 대중적으로 인식되지도 않았다. 패권주의적 작태 때문에 기층 당조직이 의기소침했다는 이야기들은 들었지만 적어도 당원, 활동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운동에 헌신적이었다.

이번 대선 참패와 당위기의 원인을 주로 종북주의, 패권주의로 제기하는 것은 자주파에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비당권파들은 면책받고 면피하기 좋은 방식일 뿐이다. 그러니 '그래봤자 정파적인 권력투쟁 아니냐'는 비아냥을 받는 것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자기반성을 포함한 지난 5년의 비판

구체적인 쟁점에는 논란이 있겠지만, 이번 대선 참패의 주된 원인은, 민주노동당이 사실상 '진보'라고 자신을 표상하는 노무현, 통합신당, 문국현류와 같은 세력,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의 이중대로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찾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탄핵사태를 정점으로 주요 쟁점들에서 이들과 함께 했으며, 입장이 갈릴 때에도 국회 안에서 '예의바르게' 정책대안을 제시했다. 주로 노무현 심판이라는 회고투표로 진행된 이번 대선에서 노무현과 친한 것으로 생각되는 민주노동당이 지지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은 지난 5년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민주노동당은 기껏해야 민주노총의 정규직 조직노동자를 대변하는 세력으로 인식되었다.(심상정, 노회찬이 후보가 되었으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환호했을까?) 그리고 이런 상황은 대선후보 선출 후부터 선거운동기간까지의 과정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지난 4~5년 활동의 결과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자주파만의 책임일까? 물론 자주파가 비판적 지지, 과도한 통일전선론의 입장에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어오기는 했지만, 사실상 당 내의 어느 세력도 의미있는 다른 정치활동을 전개하지 못했다. 평등파라고 불리는 非자주 정파들은 순치된 개혁적 의제를 중심으로 의회활동을 전개하면서 신자유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운동이 아니라 '열우당의 조금 왼쪽'에 있는 성실한 정책정당을 만들고자 했을 뿐이다. 게다가 '전진'으로 말하자면,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의 표상이 만들어지는 데에는 민주노총 안에 있는  그 멤버들(이른바 중앙파)의 역할이 오히려 지대하다고 할 정도다.

어떤 운동적 대안?

자, 하지만 이제 책임소재를 묻기 전에 운동적 대안을 만들어야하니 분당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다면 다시 이야기해보자. (사실 자주파에 "책임소재"를 묻고 있는 것은 평등파라는 점에서 모순된 문제제기일 수는 있지만 말이다.)

새로운 진보정치 혹은 노동자정치운동을 만들고자 한다면 왜 그 제기방식이 종북주의와 패권주의 비판인가? 그리고 이를 명분으로 하는 분당논의인가?

오히려 민주노동당을 신자유주의 개혁의 이중대이며, 세상을 바꿀 의지도 힘도 없는 고분고하고 제도화된 합리적 정책정당이고, 정규직 노동자들 이해를 대변하는 데 불과한 '민주노총당'으로 만들어온 과정에 대해서 비판이 이루어져야하는 것이 아닌가? (자주파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기비판 말이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운동을 시작하고자 한다면, 자주파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식의 분당론이 아니라 어떤 내용으로 정치운동을 할 것인지를 제기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대중을 조직하고 변화시키는 운동정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대안사회를 급진적으로 제기하고 투쟁할 것인지를 물어야하지 않는가?

만약 그 반성과 대안에 대한 논의의 결론이 결국 '분당'이라면 그렇게 하면 된다. 하지만 작금의 민주노동당 내의 문제제기는 문제의 책임을 자주파에게 전가하는 것으로만 집중되고 있으며, 자신들은 부정하더라도 결국 당내 권력투쟁에 불과한 것으로 되어가고 있다. (당내 권력투쟁의 결과로 분당한다면 그들이 이후에 창당하더라도 당외의 좌파들이 왜 이들과 함께하겠는가? 그렇다면 기껏해야 사민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을 대거 포함하는 민주노동당내의 非주사 정파들의 연합당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실용적으로 생각해보더라도 그렇다. 분당으로 새로운 운동을 하고자 한다면 자주파에 대한 책임전가와 네거티브한 평가만이 아니라 어떤 운동을 하겠다는 포지티브한 입장이 있어야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분당 후 만들 신당의 정체성을 '반자주당'으로 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분당, 혹은 신당이 진정으로 필요하다면.

'민중의 소리'라는 NL 정파기관지가 폭로한 전진 한석호씨의 문건 전문을 보면 향후 정황, 정세에서 자주파의 행동을 예측한다. 이대로 간다면 2012년에는 평등파는 괴멸한다고 진단한다.

한석호씨의 진단을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대안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대중운동을 위해서는 새로운 정당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2012년, 이명박의 실패 이후 대중의 선택이 더 반동적으로 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위한 운동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그것은 매우 긴박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분당'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정치운동의 주체형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자주파는 그런 정세에서 올바른 역할을 전혀 할 수 없는 세력이고, 그것은 남한에서 사회운동 전체의 파멸이 될 수도 있다. 민주노동당 내에서 그들이 계속 득세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객관적 현실이라면 새로운 정당운동은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동당 내의 평등파를 주목한다.

그러나 작금의 분당논의의 내용과 방식은 이런 기대를 실망으로 바꾸기에 충분하다. 결국 민족자주당 대 사민당이라는,  불모의 구도를 만들거라면 그냥 민주노동당 안에서 소멸하는 것이 차라리 운동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한석호 씨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다. 새로운 운동주체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당내 권력투쟁으로 이 과정을 사고한다면, 시간만이 아니라 희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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