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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동화속 풍경?

지금은  피렌체.
베를린에서, 프라하, 비엔나를 거쳐서, 스위스에 있다가, 남프랑스(아를과 아비뇽)를 지나서 막 이탈리아 도착. 한동안 인터넷이 잘 안되는 유스호스텔 숙소에 주로 있다보니 아주 늦은 여행기를 올린다. 지나간 다른 곳들은 차근차근. 일단 프라하부터.

프라하, 동화같은?

주말에 도착한 프라하에는 무척 많은 사람들이 있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온 관광객들이 많은데, 가까우면서도 물가가 상대적으로 싼 이곳에 주말이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프라하의 舊도심은 중세 건물들을 보전하면서, 마치 ‘동화 속 나라’같다. 너무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도시들의 전경

유럽의 도시들을 다니다보면 한 가지 일반적인 특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도시의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전경들이 고풍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로 뭉뜽그릴 수는 없다. 각 도시들(내가 간 주로 각 국가의 수도)은 그곳이 가장 정치적, 경제적으로 흥기할 당시의 건물들이 주로 전경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런던과 빠리는 19세기의 건물들, 암스테르담에는 17세기의 건물들, 오스트리아에는 합스부르크왕조가 융성했던 18-19세기 건물들이 주로 도시의 전경을 형성한다. 그런 점에서 프라하의 중세적인 풍광은 한때 보헤미아 왕국,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 융성했다가 16세기 이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흡수된 이곳의 역사를 보여주기도 하는 것같다.

중세적인 풍광, 색감

프라하의 유명한 건물들은 주로 그런 시기에 지어진 것들이다. 프라하성, 까렐교, 화약탑 등 주요한 관광지이며 유명한 건물들이 그렇다.

그런데, 이런 풍경들은 왜 ‘동화속’처럼 보일까?
우선, 풍광자체가 미적으로 아름답다. 내가 놀라면서도 의야했던 것은, 정작 많은 곳에서 자연적인 풍경은 한반도와 그리 다르지 않은 곳들도 많은데 왜 이렇게 다른 느낌이 들까했던 점이다. 그것은 주로 그곳의 사람들이 만들어 더한 풍경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특히, 색감.
(하지만 지금 다녀온 알프스는, 자연적 풍광자체가 다르다는 점은 언급하자)

한반도의 옛 건물들은 주로 자연속에서 튀지않고, 자연과 유사한 색을 사용해서 그 속에 묻히는 방식으로 지어졌다. 그런데, 이 곳은 자연의 색과는 대비되는--주로 보색으로 건물들을 짓고, 그것은 뚜렷하게 드러나고, 풍광 속에서 나름의 미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한반도의 옛 건물들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다른 미적 효과를 만든다는 점).

녹색의 산 속에, 하얀벽과 빨간 지붕으로 만들어진 집들이 드문드문 있을 때, 그것은 뚜렷하게 드러나면서 재밌는 색감의 조화를 이룬다.



중세적인 풍광, 동화

한편,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에 더해서 '동화 속같다‘는 느낌은 이내 조금 씁쓸함?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우리가 어릴 적부터 듣고, 읽고, 영상으로 접했던 ’동화‘가 거의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다소 괴기스러운 민담들을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로 재창조한 그림형제의 영향이 크긴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이’라는 근대적인 개념을 발명하고, 어린이들에 ‘적합’하다고 판단된 관념과 관행을 만들어낸 것이 유럽이라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어린이라는 개념과 “어린이용”의 여러 가지 것이 그대로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들도 있었다. (그들은 성장기에 ‘보호’받지만 한편으로는 과소인간으로 절하되고 시민권에서 배제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프라하의 풍광이 동화스럽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프라하라는 도시의 역사와, 어린이와 동화라는 근대적 발명품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을 것같다. 이런 역사들이 만나서 “동화같은 도시 프라하”라는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이 흥미롭다.

내가 이 도시에 간 것이 주말이었기 때문이었겠지만 이곳은 마치 말그대로 “관광지”같은 느낌이다. 번잡한 기념품가게, 여행객을 상대로 뭔가 팔아보려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곳이 가장 낭만적인 도시라고 말하지만, 내 느낌은 별로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무척 아릅답다는 것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다.)

(순전히 개인적인) 내 느낌과 어느 정도는 취향으로, 오히려 낭만적인 곳은 빠리인 것같은데, 어떤 낭만적인 분위기라는 것은 건물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곳의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 보여주는 모습에서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건물들이 만드는 풍광은 어쩌면 덜 아름다울 수 있어도 빠리가 더 낭만적인 도시로 느껴진다. (빠리가 낭만적인 도시로 느껴지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원인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같다.)

여튼 프라하는 가볼만한 도시. 아름답다.

***

국립박물관 앞에 바슐라프 광장.
이곳은 1968년 ‘프라하의 봄’과 잇따른 소련군의 침공이 이루어진 곳이다. 시간이 늦어져서 박물관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그 앞에 어쩌면 별로 눈에 띄지않게 거리에 놓여진 십자가를 볼 수 있었다. 바로 프라하 봉기를 촉발했던 Jan Palach, Jan Zajic 두 청년의 분신이 일어난 장소.

다시, 사회주의에 대해서 묻게 된다. 누구를 위한 누구의 사회주의? 인민을 위한, 인민 스스로의? 혹은 사회주의 조국 수호를 위한, 소련에 의한? 그러나 한편으로 두 청년이 원했을 것이 자신이 싸운 이 도시를 북적거리는 관광지로 만드는 자본주의는 아닌 다른 것이었을 수도 있을 텐데.. 지금 이 거리의 사람들은 무엇을 원할까.

이곳에 장미꽃이 놓여있다. 긴 시간이 지나서 이렇게 죽음이 기억된다. 그러고 보니, 수많은 열사들이 사리진 곳에 우리는 변변한 상징도 없구나. 겨우 남아있는 청계천, 전태일 열사의 동판 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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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야만이냐 야만이냐

베를린/야만이냐,야만이냐

베를린에서는 마음이 불편했다. 유스호스텔은 시설이 좋아서 지내기에 편했지만, 예정보다 더 머물게 된 것은 그 때문은 아니었다.

유태인 학살과 전쟁, 불편한 기억과 대면하기

나치는 집권 이후, 2차 대전까지 유태인 600만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독일(서독)은 전후에 이에 대한 법적이고 정치적인 책임을 승계하면서 이 끔찍한 사건을 기억하는 나름의 방식을 만들어냈다. (한편,동독GDR은 독일 제3제국을 부정하면서 만들어진 국가이기 때문에 그것을 나치의 범죄로 고발하고, 연합군, 공산주의자가 분쇄한 역사로 기억한다.) 그것은, 불편한 혹은 고통스런 기억에 드러내고 대면하는 것이다.

전쟁에 대한 기억도 물질적으로 남겨두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유명한 빌 헬름 황제 기념교회(Kaiser Wilhelm-Gedaechtniskirche)는 폭격으로 부수어진 것을 그대로 남겨둔다.이런 식으로 전쟁을 도시 중심가에서 영원히 기억한다.

한 시기에 한 나라의 인민 대부분이 동조하거나 침묵한 대량학살에 대한 태도는 어떤 것이 가능할까? 그것을 부정한다면 오히려 끊임없이 그것은 억압된 무의식으로 주체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 우익들이 취하는 입장은 일종의 자기학대처럼 보일 때가 있다.) 독일인들은 그것을 드러내놓고 인정하고 기억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서 그것을 넘어서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말은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대량학살을 기억하는 것이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고, 자의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매우 진실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신들에게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념물들을 보면서, 나는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치유를 원할 뿐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서도 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들의 과거를 보면서 그것을 반복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가장 무서운 공포의 장면은 “내가 바로 괴물”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때이다. 특히 이성적인 존재들에게 그런 공포는 더 강할 것인데, 독일인들의 심성이 그렇지 않을까. 따라서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매순간 확인해야 잠시 잠시나마 그 공포에서 멀어질 수 있다.



유태인 박물관, 유태인 추모관

유태인 박물관은,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이 전체가 하나의 조형예술작품처럼 느껴진다. 건축물 자체가 칼로 난자당한 듯한, 희미하게 그 틈으로만 햇빛을 볼 수 있고 절망적으로 갇혀있는 유태인의 느낌을 표현한다. 그리고 단지 표현할 뿐 아니라, 그 건물에 들어간 사람들이 그것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건축의 이러한 효과는 전에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유태인 추모관(The Memorial to the murdered Jews of Europe ; 유럽에서 살해당한 유태인을 위한 추모관)도 놀랍다. 브란덴부르크문 옆에, 독일 의회 건너편에 있는 이 곳은 지상에는 2711개의 (마치 관처럼 생긴) 콘크리트 조형물이 놓여있다. 지하에는 전시관이 있는데, 그곳에 들어가면 마치 무덤 안에, 지하의 관들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 속의 전시물들은 개인들이 처한 수만은 가슴 아픈 사연들을 나열한다.

1939년에 게르트 베르링거는 스웨덴에 혼자 보내졌다. 그의 가방에는 원숭이 인형이 들어있었다. 그의 부모 파울과 소피는 베를린에 남았다. 1941년, 그들은 아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하느님이 함께하시길. 우리는 다시 합치게 될 거란다.” 1943년 폴과 소피는 아우슈비츠에 끌려가서 살해당했다.

이를 통해서, 수백만이라는 숫자가 자칫 그저 숫자일 뿐인 것으로 이해되지 않도록, 그것 하나하나가 각각의 이야기를 가진 ‘한 사람’이라는 것을 부각한다. 특히 그것들은 서사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따라서 그 사연들 하나하나가 모두 비극들인 셈이다.

유태인 박물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추방자의 정원’Garden of Exile, 그리고 ‘떨어진 낙엽’fallen leaves라는 작품.

‘추방자의 정원’Garden of Exile에는 49개의 콘크리트 기둥이 있고, 그 위에는 올리브나무가 자라고 있다. 일정한 각도로 기울어진 바닥과 기둥 속에 들어가면 균형을 잃고 걷기 힘들어진다. 막막해지고 무기력해진다. 기울어져있는 벽, 기둥들은 마치 나에게 떨어져내릴 것같다. 수직의 벽이 수평으로 떨어질 것 같은 공포.

‘떨어진 낙엽’fallen leaves이라는 작품은 쇠로 만든 수많은 얼굴이 낙엽처럼 놓여진 회랑이다. 관람객들은 직접 작품을 밟게 되는데, 수많은 얼굴들은 발밑에서 웃으면서 짤그랑거리는 소리를 낸다. 모두 다른 표정의 그 얼굴들은 그렇게 해서 죽은 자들의 영혼을 만나게 한다.

이런 기념의 공간들은 일종의 ‘백신’같다. 엄청난 공포와 슬픔을 ‘대면해도 될 만한 것’, ‘기억해도 될 만한 것’으로 재구성해낸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각자가 소화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이러한 추모의 공간들은, 덩치만 큰 콘크리트 덩어리가 기억을 짓누르는 듯한 망월동 신묘역과도 비교된다. 망각을 위한 공간과 기억을 위한 공간.



베를린 장벽과 분단의 ‘전시’

한편, 베를린은 '장벽‘으로 인해, 냉전과 분단의 상징이었던 곳이다. 이제는 그것들은 과거의 ’유물‘로 전시된다. 베를린장벽의 조각들은 아직도 관광상품으로 판매되고 있다.

베를린 장벽과 관련된 여러 가지를 전시하는 곳인 ‘벽박물관’이라는 곳은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이 역사를 회고한다. 베를린장벽을 넘어 동독을 ‘탈출’하기위한 갖가지 시도들을 보여준다. 비행기, 터널, 줄 등 기상천외한 방법들도 있다. 이를 통해서 이 박물관은 장벽의 붕괴가 하나의 예정된 역사인 것처럼 보여준다.

물론, 그것이 모든 것은 아닐 것이다. 동독 사회주의 체제가 이룩한 성과, 서독 사회의 모순도 있었다는 점에서 박물관의 시각은 불공평하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질문, 왜 그들은 목숨을 걸고 장벽을 넘으려고 했는가..라는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이 ‘이미 일어난’ 사건인 지금,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에도 우리가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다시 질문하게 만드는 ‘불편한’ 공간이다. 하지만 필수적인 질문..

작센하우젠 수용소

베를린근교에 있는 이 수용소는, 아우슈비츠 이전에 ‘수용소’라는 모델을 처음으로 실현한 곳이다. 건축가들은 중앙의 감시탑에서 전체 수용소를 감시하고, 중앙홀에서 건물을 감시할 수 있는 양식을 ‘개발’했다. 유태인을 아우슈비츠로 옮기면서 주로 동성애자와 같은 ‘민족의 질병들’이나 정치범을 수용하던 시설이다. 이곳에서 20만명 이상이 수용되었고, 5만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그 중 2만명 정도는 소련군 포로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수용되고 살해된 수용소가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시골마을이다. 그곳에 역시, 지금은 너무나 평화로워서, 그런 죽음이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그래서 더욱 끔찍한 공간들을 만나게 된다.



박물관과 수용시설, 처형장 등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보여준다.
수감자들은 개인짐을 ‘맡기고’, 연병장에서 ‘입소식’을 거친다. 매일 아침 기상후 30분 내에 세면과 용변을 마치고 연병장에서 점호를 한다. 인근의 공장 등 강제노동시설로 행진한다. 당시의 수용소 막사를 포함해서 그 공간과 일상은 마치 우리나라의 군대를 연상시킨다.. 사실 별로 다를 바도 없을 수 있는데, 국가가 ‘죄없는’ 사람들을 강제로 수용하고 강제노동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연병장에는 독일군 군화의 내구성을 실험하기 위해서 수감자에게 끊임없이 걷도록 했다는 돌밭도 있다. 유태인 박물관에 있는 작품, ‘떨어진 낙엽’fallen leaves은 이 공간에서 착상하지 않았을까..

이곳에서도 역시 무기력함과 막막함이 밀려온다. 역사의 나쁜 방향에 직면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곳에 수용되어 살해된 유럽 곳곳의 공산주의자들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동독은 이 속에서 수용소의 반란을 도모하다 체포되어 처형된 독일 공산주의자와 프랑스 레지스탕스 27명을 영웅으로 부각시킨다. 그러나 그들은 영웅으로 부각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목숨을 걸고 그렇게 했을 뿐이다..

한편, 이 공간은 전후에는 소련군이 운영하는 수용소로 50년대 초까지 계속 사용된다. 6만명이 수용되고 1만2천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이때 수용된 사람들은 나치 관료들, 소련군 탈영병 등이었다. 동독에서는 무시했던 이 역사는 통일 이후 서독정부에 의해서 신속하게 ‘발견’되고 전시된다.

2000만명 이상, 전 인민의 12%가 죽은 소련의 입장에서 나치 관료들에 대한 이런 조치(죽도록 벼려두는 것)는 이해할 수 있는 복수극일 수도 있다. 수용자들의 프로필을 보면 대부분 나치의 각종 대중조직들에서 일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치의 수용소에 소련이 그러한 행위를 반복했다는 점은 정당화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1945년의 상황에서, 내가 당시의 소련 공산당원이었다고 해도 이러한 조치를 지지했을 수 있다. 말하자면, 그런 비인간적인 판단을 강요받는, (연장된) 전쟁 상황에 처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처형장의 교수대로 걸어가는 길)

왜 기억하는가

우리가 이런 죽음들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과거에 있었던 개인들의 죽음일 뿐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에게 어떤 윤리적인 각성을 요구한다. 그들의 죽음을 보다 일반적인 것, 인간 일반의 권리와 관련된 것으로 보자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기념관들에도 불구하고 유태인들은 또 어떨까.. 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학살을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독일인들이 유태인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그저 그들의 자기만족일 뿐일 수 있다. 매일 기억한다고 해도 현재와 전혀 무관하다는 점에서 그것은 과거에 속할 뿐이다. 나치 치하의 인종주의 학살을 기억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학살들에 대해서 반대해야한다. 그런 점에서 독일인들처럼, 이스라엘의 유태인들에게도 불편한 기억에 대면하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한편, 사회주의 몰락의 현장, 나에게 불편한 것들을 대면하는 내 자리는 어떤 것일까. 사회주의가 단지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것은 불편하지만 진실이며, 우리가 대면하고 한 걸음 더 걸어가야한다.

야만이냐, 야만이냐

이 역사들 속에서 우리는 단순하게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를 물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순간에는 오히려 “야만이냐 야만이냐”를 묻게 되지 않을까.. 그런 순간의 막막함을 베를린에서 느끼게 된다. 우리에게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 인간들이 한번 저지른 일은 ‘충분히’ 다시 저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제 프라하를 거쳐 빈으로 간다.


* 베를린의 케테 콜로비츠 미술관, 페르가몬 미술관 등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 저녁에 기차를 타고 가면서 쓰는 것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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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암스테르담

암스테르담, 고흐박물관

* 지금은 베를린에 있지만, 인터넷 상태가 오락가락해서 이제 겨우 암스테르담에서의 이야기. 베를린은, (인터넷만 아니면) 지내기는 편하지만, 마음은 무척 불편한 도시다. 그런데도 예정보다 이틀을 더 넘기고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 도시에 가서.

파리에서 독일로 넘어가는 길에 암스테르담을 들려 간 건 두 가지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17세기 세계자본주의 헤게모니 국가였던 네덜란드를 간단하게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이었고, 그것은 주로 암스테르담 박물관과 도시 자체를 둘러보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에 온 목적의 팔할 이상은, 고흐박물관이 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서둘렀는데도, 암스테르담에 도착해서 숙소를 잡고 고흐박물관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 이때부터 시작한 관람은 다음날 다시 찾아가서 오후까지 있었으니, 이번 여행에서 한 장소에 있었던 것으로 따지면 오르세 미술관보다 길다. 그러나 어쩌면 평생 이 그림들을 다시는 못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떠나는 길이 아쉽기만 하다.

일단 17세기 네덜란드 작품들을 본 경험(암스테르담 박물관)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무엇보다 고흐에 대해서 말해야한다.

글쎄, 보고 나서 느낌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제까지 미술작품을 통해서 이렇게 강렬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니와, 그 깊이와 폭으로 말하자면, 이제까지 다른 장르의 예술적 경험 속에서도 이런 느낌은 없었다. 영혼을 울린다. 니체는 열정적인 감정, 도취는 음악에서만 가능하다고 하면서 디오니소스를 특권화했지만, 만약 그가 고흐를 보았다면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아폴로를 긍정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흐의 눈빛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고흐박물관 이전에 오르세미술관에 전시된 고흐의 말년의 자화상을 언급해야한다. 오르세미술관에도 두 번 찾아가면서 매번 한참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지켜본 그림이 이것이었다.

이 그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고흐와 눈이 마주치는 각도에 서서 지켜보면서 눈빛과 대화해야한다. 그러면 고흐가 자신의 자화상에 그려넣은 자신의 감정이 전달되어온다. 그것은 어떤 두려움,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 슬픔과 그런 아픔이다. 누구나 영혼에 그런 것들이 있을 텐데, 고흐의 자화상은 내 안의 두려움,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 슬픔과 그런 아픔에 거울처럼 직면하게 한다.

노동하는 사람의 손

이런 감동의 상당부분은 여행을 오면서 챙겨와서 읽은 책, 고흐와 동생 테오의 서간집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덕분이다. 책은 고흐가 자신의 작품과 영혼에 대해서 말하는 편지들을 담고 있다. 편지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인 이 책을 통해서 눈 앞에 보이는 그림에서 고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다.

초중기 작품을 먼저 보자. 고흐는 <감자먹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램프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 자신을 닮은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려고 했다. 그 손은,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를 암시하고 있다.



이 작은 사진으로도 어느 정도 볼 수 있지만, 노동하는 손의 표정을 보라. 그리고 표정굵은 얼굴을.
노동하는 사람의 손, 그 자신의 얼굴과 같은 손, 그것은 가장 신성한 모습으로 금빛 조명아래 빛나고 있다. (고흐는 서간집에서 이 그림은 진한 금색 벽에 걸어야한다고 말하는데, 고흐 박물관에는 그렇게 걸려있다. 조금 떨어져보면, 화면 전체에서 빛이 벽으로부터 배어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목사가 되기 위해 탄광촌에 있던 시절, 광부들의 파업을 지원하면서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기도 했던 고흐는, 그 표현은 달라졌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끝없이 간직한다. 아를에서도 고흐는 이렇게 말한다.

농부를 그릴 때는 파란색의 무한한 하늘에 창백한 별 하나가 신비롭게 반짝이는 것을 그리려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내가 그리려는 훌륭한 농부가 찌는 듯한 한낮의 열기 속에서 곡식을 거둬들이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빨갛게 달궈진 다리미처럼 빛나는 오렌지색과 황금색의 반짝이는 톤을 담은 그린을 그렸다.
사랑하는 동생아, 높은 양반들은 이런 과정을 봐도 단지 서투르게 모방한 탓으로 생각하겠지. 그러나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우리는 ‘대지’와 ‘제르미날’을 읽은 사람이다. 농부를 그린다면, 우리가 읽은 작품이 우리의 일부가 되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을 그리면서는 이렇게 말한다.

모델은 카페에서 일하는 여자인데, 내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면류관을 쓴 그리스도’ 같은 모습이다. 그녀는 밤새 꽤 바쁘게 일했음이 분명한 모습을 하고 나를 찾아왔다. 인상적이게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샴페인은 나를 즐겁게 해주지 않아요, 오히려 아주 슬프게 해요.”

그녀를 그린 그림은, 피곤함과 슬픔이 눈빛에 나타난다. 고흐는 그런 인상이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고난스러운 것, 하지만 그럼에도 혹은 그 때문에 가장 성스러운 것. 나중에 고흐가 들라클루아의 피에타를 다시 그린 그림도 전시되어 있는데, 그림에서 성모에게 안긴 죽어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마치 고흐의 자화상과 같다. 그래서 고흐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포함해서) 하나의 개인들의 영혼에서, 성스러운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일하는 농부의 모습이 금박으로 장식한 그리스도 상보다 더 성스럽게 나타난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흔히 고흐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박물관의 설명을 보면 별로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서간집에서 언급하는 마지막 작품이 비슷한 이미지인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충분한 이유가 이 그림에는 있다.



그림에서 밀밭의 밀들은 정말 금빛으로 반짝인다. 그 위로 날아가는 까마귀들은 불행한 화가들의 영혼을 먼 행성으로 데려가는 것같다. 그들이 날아가는 하늘은 어두운데, 그곳에는 별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그리기 전해에 고흐는 <해뜰 무렵 밀밭에서 수확하는 사람>이라는 그림을 그린다. 이 작품의 영문제목은 ‘Wheatfield with a reaper’이다. ‘reaper’는 수확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죽음의 신’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수확하느라 뙤약볕에서 온 힘을 다해 일하고 있는 흐릿한 인물에서 나는 죽음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그건 그가 베어들이는 밀이 바로 인류인지도 모른다는 의미에서다. 그러므로 전에 그렸던 <씨뿌리는 사람>과 반대되는 그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죽음 속에 슬픔은 없다. 태양이 모든 것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환한 대낮에 발생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

그러나 고흐의 그림의 전반적인 정서가 죽음일까? 전혀 그렇지는 않은 것같다. 많은 그림들이 생명력으로 충만해있고 죽음은 그것을 더욱 두드러지게 대조해서 그러나게 한다. “씨뿌리는 사람들”이나 “해바라기”를 비롯한 여러 꽃 그림들을 보아도 그렇다. 잘 알려진 “해바라기”를 보면, 그 꽃이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디선가 꽃들이 말하는 것을 한번 쯤 들어본 사람이라면. 고흐가 전하는 해바라기의 말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테오는 자신의 아들에게 빈센트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그려준 그림이 “아몬드 꽃”이라는 그림인데, 빈센트 자신에게 그려준, 자화상 같아 보이는 그림도 있다. 이 흰꽃은 이렇게 이어진다.

전시의 마지막에는, 아, 고흐가 자살한 해인  1890년에 그린 ‘나비가 있는 정원’이 있다. 하얀 나비가 막핀 꽃처럼 풀밭에 있다.

지상에 머무르는 동안 지도 위에 검은 점으로 표시되어 있는 마을이나 도시에 직접 가볼 수 있는 것처럼, 어쩌면 나비가 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무수한 별이 있을지도, 그리고 죽은 후에는 우리도 그곳에 갈 수 있게 될지도 모르지 않겠나.
- 고흐가 베르나르(동료화가)에게 쓴 편지 중

고흐의 영혼은 나비(프시케)가 그림을 그리는 어느 행성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죽기 전까지 주변에서 피어나는 꽃을 그렸던 고흐는 1890년 7월 권총으로 가슴을 쏜다. 그는 이틀 후에 숨지는 데 “왜 나는 제대로 하는 것이 없을까, 총을 쏘는 것조차”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7월29일, 동생 테오의 품에 안긴채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 숨을 거둔다. 동생 테오도 고흐가 죽은 후 6개월 후에 건강이 급속히 나빠지면서 숨을 거둔다.

고흐는 노동하는 사람들 속에서 영혼을 발견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이 금박으로 치장한 어떤 성화보다도 성스럽다는 것을 자신의 그림으로 증명했다. 고흐는 자신의 강렬한 눈빛과 그림 속에서 그들의 영혼을,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만날 수 있게 한다. 이 글에서도 하나하나의 그림에 대한 느낌을 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것은 그림을 보면서 눈물이 날만큼 너무 아픈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개개인의 영혼의 상처를 더 큰 아픔들 속에서 인식할 수있게 하고 돌아볼 수 있게 한다.

이번 여행에서 느끼는 여러 가지 것들, 매일 매일 만나는 새로운 것들 속들 속에서 현기증을 느낄 정도이지만, 누군가의 강렬한, 그리고 상처입은 영혼에 직면하는 이런 특별한 기회는 다시 없을 지도 모르겠다.


*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원래 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 알고 있던 "구두"나 "고흐의 의자(초가 있는 의자)"같은 작품을 보지 못했다. 다른 곳에 순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튼 무척 아쉽다.

* 고흐의 그림에 대한 감동에서 앞서 언급한 <반고흐, 영혼의 편지>라는 책을 다시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 감동적인 책이다. 특히 고흐만이 아니라 동생 테오의 글들도 그런데, 진정한 영혼의 동료들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테오의 글이 어쩌면 더 가슴을 울린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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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어떤 점들.

여행의 어떤 점들.

 

이제 기차로 빠리를 떠난다. 예정보다 하루 더 있던 빠리를 아침 기차로 떠나는 이유는 암스테르담에 고흐 미술관이 월요일에는 열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가야 오후 반나절을 볼 수 있다.(하지만 정작 와보니 잘 못된 정보였다;; 월요일도 연다.)

 

혼자 여행하기

 

* 좋을 때

 

나의 속도대로 움직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루브르박물관에 들라클루아 앞에서 한시간 넘게 보내도 부담이 없고, 페르라세즈 묘지에서 한참을 헤메도 누구에게 미안하지 않다. 기분내키면 빠리에 하루 더 머물수도 있고.

 

내 느낌대로 움직일 수 있다. 런던에서 최근 한국인에게 인기 뮤지컬은 ‘빌리 엘리엇’이나 ‘맘마미아’. 혼자라면 시간이 허락하지 않을 때에도 ‘레미제라블’을 선택할 수 있다.

눈치보지 않고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 오르세 미술관, 미술 작품 앞에서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난다면, 그럴 수 있다. 쪽팔려서 감정을 자제할 필요가 없다.

 

셀카 찍는 재미. 특히 야경을 배경으로 타이머로 셀카찍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가 뭔가 만드는 느낌인데, 정말 재밋다.

혼잣말 하기. 같이 다니면 대화할 사람은 같이 있는 상대방 뿐이다. 하지만 혼자 다니면, 말할 수 있는 상대는 무한정. 나한데 혼잣말을 해도 되고, 누군가 맘에 내키는 상대에게 말할 수도 있다.(물론 들리진 않겠지만;;)

 

배경 음악깔기. 굳이 대화할 필요가 없을 때가 많으므로, 분위기에 적합한 음악을 mp3로 들으면서 다닐 수 있다. 음악을 깔면 주변이 아주 달라보이고, 느낌이 새롭다. 빠리 밤거리에서 쇼팽을, 퐁피두 현대미술관에서 punk rock을 들어보자.

 

대략 스릴있다. 누군가에게도 의존할 수 없고 가끔 실수하기도 하는 긴장과 스릴. 전방위적인 판단을 스스로 할 것을 요구받게 되는데, 단점이자 장점.

 

* 좋지 않을 때

 

Please, Take me a picture.. 라고 말하기 짜증날 때가 있다. 마음씨 좋아보이는 (주로 젊은 여성;;) 외국인을 찾으려고 두리번 거려야하고 귀찮을 때가 있어서 사진은 주로 등장인물 없음.

 

2인분씩 먹는 메뉴는 주문하기 힘들다. 뭐 먹으라면 먹겠지만 돈 아깝다. 중국식당의 딤섬 같은 경우가 그런데, 이런 식이다보니 그냥 샌드위치나 핫도그 먹는게 편하다. 문제는 식사는 부실하고 걷기는 많이 걷다보니 살이 너무 빠진다는 것. (아, 적당한 다이어트에는 좋으니 장점이라고 해야하나?)

 

가끔 한국어가 그립다. 하지만 장기간 유학간 분들이나 이민간 분들에게 비할 바는 아니니 패스.

 

한국에서 투쟁 소식들을 때. 어차피 한국에 있다고 도움되는 형편도 아니지만, 마음이 또 그렇지가 않고 무거워진다. 로밍한 핸드폰으로 집회 안내 문자도 몇 개씩은 오는데, 거참.

 

그밖에 단점은.. 생각보다 많이 없는 것같다. 흠, 더 생각나면 나중에 이야기하자. 나가봐야할 시간됐다.

 

빠리의 인상

 

떠나는 마당에 이야기하자면, 번잡한 대도시이지만 문화적으로 풍성한 곳이라는 것, 그리고
괜히 낭만적인 도시라고 하는게 아니라는 점도.

 

노틀담 성당에서부터 퐁네프 다리, 예술가의 다리, 루브르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길은 환상적이다.(그에 비해서 유명한 상젤리제 거리 같은 곳은 좀 번잡하다.) 곳곳에 길거리에서 키스하는 연인들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전혀 어색해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자연스럽다. ‘빠리의 연인’ 같은 드라마가 나올 만한 분위기라는 건데, 모르는 남녀라도 여기서는 며칠만 붙여놓으면 연인이 될 것같다.

 

* 에펠탑 뒤, 안경너머로 바라본 빠리의 석양

 

Sur le quai

 

Sur le quai, ‘버스, 정류장’의 OST(루시드 폴)이기도 하고, 내 핸드폰에도, 네이트온의 아이디에도 있는 문구다. ‘on the dock'이라는 뜻의 불어라고 하는데, ’on the platform'이라고 새길 수도 있다.

 

빠리의 역에는 quai 1, quai 2, quai 3.. 이렇게 플랫폼을 표시한다. 이제 sur le quai.

 

이 문구가 노래 가사에 나온 적이 있는데, 영화 “셀부르의 우산” 주제가에 이 문구가 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더욱 아련할. 잊을 수 없는 영화와 그 음악이다.
http://blog.naver.com/ydiana?Redirect=Log&logNo=80033815735

 

Ils se sont separes sur le quai d'un gare
Ils se sont eloignes dans un dernier regard
어느 역 플랫폼에서 그들은 서로 헤어졌답니다.
그들은 마지막 눈길을 건네며 서로 멀어져 갔답니다.

 

이렇게 이어진다.
빠리, 안녕.

 

 

* 좀 서둘러 가느라 빠리에서 들렸던 중요한 곳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못했다. 루브르 박물관--오르세 미술관--퐁피두 현대미술관과 프랑스 공화주의의 기념물인 팡테온 사원 등에 대한 것. 일단 여기 암스테르담을 뜨면서 정리해보자. 인터넷 환경이 너무 좋지 않은데, 그건 베를린도 만만치 않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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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리, 꼬뮌 전사들의 벽

빠리, 꼬뮌 전사들의 벽

 

페르라세즈(Pere Lachaise) 묘지에 갔다. "꼬뮌전사들의 벽“이라고 불리는,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빠리 꼬뮌 전사들이 총살당한 벽이 있는 곳이다.

 

아침부터 찾아간 이곳은 한적한 마치 한적한 공원 같다. 쇼팽, 발자크, 짐 모리슨 등 유명한 이들의 무덤도 많은 곳이라 찾는 사람들이 아침부터 드문드문 있다.


 

찾기가 쉽지 않다. 묘지입구의 이정표에는 한참을 찾아도 꼬뮌전사들의 벽은 나오지 않는다. 무작정 걸어가서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묘지 동쪽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관리사무실에 가서 안내 지도를 받아보았지만 거기에도 없다. 한시간반 정도를 언덕빼기의 묘지를 헤멘다. 오늘은 날씨가 덥다. 그리고 문득 한 구석에서 그 벽을 만났다.



 

한적한 구석. “AUX MORTS DE LA COMMUNE, 21-28 Mai 1871”이라고 씌여있다. (사전을 찾아보니 “꼬뮌의 죽음을 위해”라는 뜻. 불어아시는 분들, 맞나요?)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묘지 자체의 벽돌 벽이다. 앞에는 장미 꽃 다발들이 놓여있다. 벽에 손을 대본다. 슬픔이 들려오는 것같다. 벽에는 총알 자국 같은 것들도 있다. 피처럼, 혹은 혁명처럼 붉은 담쟁이가 참혹한 벽을 감싸고 있다.


어떤 순간에 우리는 역사의 “나쁜 방향”을 마주할 수도 있지만, 죽음에 도망치지 않고, 죽음도 어쩔 수 없는 주체들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역사를 어떻게 살아야할까.

 

벽 앞의 계단에서 가져온 사과를 하나 먹으면서 한참을 앉아서 바라본다. 가끔 이곳을 찾는 사람이 들렸다가고, 나처럼 사진을 찍는다.

 

벽이 보이는 맞은 편에는 프랑스공산당에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레지스탕스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가 있다. 여기에는 루이 아라공이 레지스탕스를 위해 쓴 Strophes pour se souvenir (Strophes to help you remember, 1955)라는 시의 한 구절이 새겨져있다.

 

그 옆쪽에는 “프랑스공산당의 누구누구”이런 식의 묘비명이 적힌 무덤들이 이어져있다. 프랑스의 공산주의자들도 죽으면 이 벽이 보이는 곳에 함께 있고 싶어했나보다.

 

이걸로 빠리까지 와서 꼭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거의 한 셈이다. 여행의 이제까지의 과정 중에서 가장 의미있는 시간.


가는 길에는 쇼팽의 묘지를 만났다.

 

  (혹시나 나중에 가실 분이 있다면, 이렇게 하시라. 정문에 들어서서 언덕을 약 100미터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좀 더 가면 관리사무실이 있다. 들어가면 지도를 구할 수 있다. 지도는 정문에서는 나누어주지 않는다. 꼬뮌전사들의 벽은 지도 상에서 97블럭 맞은 편, 76블럭 옆쪽에 있다. 묘지의 동쪽 끝 구석이다. 꼬뮌 시민군들이 그곳까지 몰려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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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리,첫번째;로댕과 모네,까미유 끌로델

빠리, 로댕과 모네, 까미유 끌로델

 

겨우 어제 도착했기 때문에 빠리에서 이야기는 좀 더 있다가 쓰려고 했지만, 오늘 다녀온 두 곳의 이야기는 먼저 해야할 것같다. 도착한 다음날, 다녀온 곳 중 두군데 이야기. 에펠탑이나 개선문 같은 것들도 있지만 그보다, 로댕미술관과 모네미술관.

 

로댕, 클로델

 

에펠탑에서 조금 걸어가면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는 앵발리드 군사박물관 옆에 로댕 미술관이 있다. 수수하게 보이지만, 안쪽의 정원이 멋지다. 그리고 로댕과 까미유 클로델의 작품들이 있다.

 

나는 조각은 잘 모르지만, 로댕이 인상파 화가들이 대상 속에서 “보이는 것”을 묘사하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작업을 조각에서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대상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형상으로 창조해낸다.

 

그의 작품 중에서 미술관의 앞뜰에 전시된 “칼레의 시민들”과 “지옥의 문”은 당장 눈에 띈다. “칼레의 시민들”은, 어떤 대의(포위당한 도시의 동료 시민들을 위한)를 위해서 희생하는 “시민”들을 형상화한 작품인데, 도덕적이기도 하고 자신의 결정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비극적인 것일 때, 드러나는 숭고함을 나타낸다.



 

“지옥의 문”도 잘 알려진 작품. 이 작품을 둘러보면, 이 문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영화와 같은 동적인 영상이 없을 시기에는 정지한 것 속에서 움직임을 형상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였을 것이다. “지옥의 문”은 지옥을 들어가려고 하는, 혹은 거부하려고하는 영혼들의 끔찍한 몸짓이 가득한 문을 형상화한다. 현대에 그러한 이미지를 표현하려 했다면 아마 영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댕의 작품은 그것이 비록 정지한 것이지만 사실상 움직임을 보여준다. 조금만 주의 깊은 감상자라면 그것이 청동으로 만든 고정된 물체가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로댕이 그려내는 인물들은 생생하다. 그것은 특히 그들이 살아있는 육체의 특성, 움직이는 근육들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에도, (이 작품은 단테를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생각은 근육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말하는 것같다. 생각은 단지 두뇌라는 기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육체--따라서 그것이 존재하는 물질적 관계--와 근육 속에서 존재하는 데, 로댕의 작품은 그것을 형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움직이는 것을 쉽게 표현하는 지금과는 달리 정적인 표현수단을 통해서 동적인 것을 표현하려고 할 때, 그것이 얼마나 치열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같다. 현대에는 한편으로 너무 손쉽고, 그래서 그런 치열함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미술관의 한 방은 까미유 끌로델의 작품으로 채워져있다.

 

Sentiment님의 블로그에서 인용(http://blog.naver.com/insomnia0?Redirect=Log&logNo=150021674671)

 

16세의 천재 소녀 조각가. 까미유는 그렇게 로뎅과 운명적인 만남을 시작한다.

42세의 대조각가 로뎅은,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형태는 깊이로 보아라,

주가 되는 면을 분명하게 나타내어라,

형태가 너를 향해 있는 것으로 상상하라,

모든 생명은 중심에서 나오고, 안에서 점점 밖으로 퍼져 나간다,

소묘에서 윤곽선을 보지말고, 돋을 새김을 보라,

돋을 새김이 윤곽선을 결정한다,

중요한 것은 감동하기. 사랑하기. 소망하기. 걱정하기. 살아가기이다,

예술가가 되기 전에 먼저 뜨거운 가슴을 가져라,"

 

그녀와 로댕의 관계는 영화 “까미유 끌로델”과 같은 작품을 통해서 많이 알려져있다. (나는 영화는 보지 못했다.) 작품만 보더라도, 까미유 끌로델은 훨씬 동적이고 격정적인 감정을 작품에 쏟아 붓고 형상으로 창조한다.

 

로댕의 어떤 작품에도 비할 바가 아닌 작품이 이곳 전시실에 있다. the Waltz 라는 작품. 보면서 코끝이 찡해질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남녀가 춤을 추는 모습을 묘사한 이 작품 속에서 그들은 살아있다. 특히 여성의 끌리는 치마는 대상에 움직임을 부여한다.


이 작품은 말 그대로 왈츠. 그냥 보아도 움직임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이지만, 이렇게 해보자. 작품 주위에서 내가 대신 왈츠를 춰보자. (마침 MP3 플레이어에는 쇼팽의 Waltz No.1 In E Flat Major Op.18(Grande Valse Brillante)가 있었기 때문에 들으면서) 잘 모르지만 영화든 어디서든 본 듯한 왈츠 스텝을 작품주위에서 밟아보자. 그렇게 보면 작품이 정말로 춤을 추기 시작하고, 열정적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사실, 까미유 끌로델의 감성은 왈츠같은 ‘춤곡’과는 어울리지 않아. 그런데 왜?)

 

까미유의 이 작품은 정지한 조각 속에서 움직임을 표현한다는 측면에서만 아니라, 사랑하는 남녀의 육체적 움직임을 작품 속에서 표현한다는 점에서도 탁월하다. 그러나 그 육체적 움직임은 단지 육체적인 사랑만이 아니라 예술적으로 고양된 것이다. 비록 로댕이 그것을 거부하고, 그녀는 30년 동안 정신병원에 유폐되었지만, 그녀의 조각에서는 로댕의 작품들 속에서 느낄 수 없는 진실함과 치열함이 동시에 배여난다. 그래서 가슴 아프고 코끝이 찡해진 걸까.

 

클로드 모네, 빛에 대하여

 

지도를 보고 어렵게 찾아간 모네미술관.

정작 모네의 작품은 지하 한 층에 50여점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서울의 모네展에서의 느낌을 좀 더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관람.

 

전시된 모네의 작품 중, “템즈강에 비친 런던의 영국의회”Londres le palerant Reflets sur la Temise(1899-1901, 불어를 모르니 한글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다)이라는 작품은 빛의 방향에 따라서 건물사이로 새어나오는 빛과 그림자, 물에 반사되는 빛을 그린다. 물에 비친 빛은 같은 흰색이라도 다른 곳에서는 다시는 불가능한 효과를 만들어낸다.(아래 그림은 전시된 것은 아닌데, 같은 것을 찾지는 못했다.연작시리즈 중 하나)


모네의 수련시리즈는 전에 국내전시를 보고 이야기한 포스트(http://blog.jinbo.net/rudnf/?pid=129)에서도 언급한 것이지만, 수련보다는 물에 비친 빛을 묘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역시 여기서 보이는 작품들도 그렇다. 모네의 수련시리즈에서는 물에 비친 대상에 대해서 직접 보이는 대상(수련)이 비교되면서 물에 비친 대상은 모호하게, 수련은 뚜렷하게 보인다. 모네는 이 뿐 아니라, 대상이 비추어지는 각도가 다르다는 점에 착안해서, 물에 비친 것과 직접 보이는 것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한다.

 

역시 인상적인 작품은 모네의 "장미정원". 로댕의 작품을 감상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것을 영상으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천천히 장미정원으로 걸어가자.(일본풍 다리가 있는 정원도 마찬가지다) 차츰 빛과 색채가 제각기 흔들리는 곳으로 한걸음 씩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는 형체도 없고, 다만 살아있는 색채들, 그리고 그것을 비추는 빛들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천천히 다가가면서 감상한다.)

 

모네는 형태보다 색이 우위에 있는 그림을 그리고, 점점 형태 자체는 사라져간다.(말년에 그의 시력저하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후기의 몇몇 작품은 밋밋한 느낌이다. 빛을 강조해주던, 마치 빛의 ‘보색’과 같은 형태라는 양념이 사라지면서 빛이 도드라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느낌.

 

 

빠리에서 첫날, 두 개의 미술관을 보고 나서 생각해보니, 가야할 곳들이 많다. 하루 정도 더 있어야할까. 이 곳이 맘에 드는 이유 중에 하나는 와인과 어울리는 치즈가 터무니없이 싸다는 점이다. 그리 좋은 것을 욕심내지 않는다면, 2003년 보르도産 와인 한 병이 우리돈 5000원 정도, 혼자 먹기는 부담되는 크기의 브리치즈 한 조각이 1500원 정도. 글을 쓰면서 혼자서 한 병을 다 비우고 기분좋게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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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두번째

런던에서, 두 번째

 

런던에서 (여행자의 입장에서) 가장 좋고, 부럽기도 한 것은 이 곳의 주요 미술관, 박물관들이 무료라는 것이다. 물론 박물관-미술관이 아닌, 의회 같은 경우에는 투어비를 받기도 하고 웨스트민스터나 세인트폴과 같은 성당들은 입장료를 받지만 말이다. 덕분에 내셔널갤러리, 테이트 브리튼, 데이트 모던 등을 연결해보면 미술사를 조망해볼 수도 있고, 영국박물관을 통해서 문명의 역사를, 자연사박물관, 과학박물관을 통해서 자연과 과학의 변화와 발전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이 부러운 이유는, ‘공짜’여서만은 아니다. 이 정도 수준이 되는 전시물들이 있다는 것부터 그렇다. 한편으로는 학문, 과학과 예술이 ‘공공’의 것으로 대중이 언제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열려있다는 점에서 훌륭한 일이다. 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과학과 예술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정념을 고양시킬 수 있다. (사진은, 일단 공룡화석에서 시작하는 자연사박물관.)

 

빅뱅, 지구의 탄생과 공룡시대부터 석기시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로마를 거쳐 다빈치(르네상스)와 미켈란젤로를, 그리고 르누아르와 고흐에서, 피카소까지, 최초의 증기기관에서 우주선까지 자연과 인류의 역사와 그 성과를 종합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기회다.

 

(물론 나는 ‘구경’은 했지만 그런 ‘기회’를 누렸다고 하기는 힘든데, 수박겉햝기 식의 관광객식 구경일정으로는 전시물의 내용을 확인할 틈도 없이 단지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한달쯤 더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간절히 들었다. 여튼 이번 여행은 주마간산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 갈 수밖에. 하지만 운에 따라 가끔 한 두가지라도 깊이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있기를 바랄 뿐이다.)

 

미술사 ; 추상에서 추상까지


미술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보면서 느끼고 생각하게 된 것들을 이야기해보자.

영국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의 예술은 한편으로는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추상적이라고 할만하다. 대상의 특질 중에서 부각하고 싶은 것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이 이들의 전략이기 때문이다.(그것은 사실과 유사하게 만들 '실력'같은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어 아래 사진과 같은 람세스2세 두상은 대단히 사실적이다.)




그런 추상의 극단적인 경우가 여러 신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종교이기도 하지만, 현실에 대상이 없는 추상적인 개념들을 눈에 보이게 표현하는 과정에서는 대상의 어떤 특징은 묘사되는 형상 속에서 '순수하게' 드러난다. 종교적 열망과 세계를 개념화하려는 철학, 그리고 예술은 이런 방식으로 같은 뿌리에 얽혀있는 것일까?

 

이집트의 경우, 사람 그림은 얼굴은 옆면, 눈은 앞면, 몸통은 정면, 다리는 옆면을 그린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대상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쪽으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리스에서 미술은 사실化되었지만 황금비례에 맞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그린다는 점에서 이어지는 측면이 있다. 이런 미술의 특징은 그것의 존재 이유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라기보다는 보여주고 싶은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미술을 발전시켰다.

 

르네상스 이후에 근대에는 점차 대상과 말그대로 닮은 것을 그리려는 노력이 집요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내셔널 갤러리) 미술사 책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 15세기에 원근법을 도입하는 그림들이나 사실적 묘사가 뛰어난 16, 17세기 미술들이 그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내셔널 갤러리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인상파 전시실은 다시 보다 화가가 전달하고자하는 것을 전달하는 것에 충실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대상과 닮은 것은 다음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데, 마네와 고흐 등은 빛을 통해서 그런 느낌들을 전달한다. 대상과 닮지 않았더라도 대상을 더욱 잘 드러내는 빛을 화폭에 담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변화들 덕분에 사진과 영상으로 대상을 담을 수 있는 시대에도 회화가 아직 살아남을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사실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사진이 정확하고, 영상과 서사를 결합시켰던 회화들(특히 그리스도의 수난이나 그리스-로마 신화를 표현한 작품들)은 영화가 대체하는 시기에도 말이다.

 

템즈 강을 건너서 데이트 모던에 가면 현대미술을 전시한다. 20세기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작품들. 사실 작품들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아서 이럴 때만큼 영어실력이 아쉬울 때가 없다. 오디오 가이드라도 들으면 좀 더 이해가 될 텐데.(미술관, 박물관들에는 영어와 함께 불어, 이태리어, 독일어, 일본어 오디오 가이드가 있다. 박물관 미술관에는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넘친다. 얼마 있다가는 중국어 오디어 가이드도 등장할 듯.) 칸딘스키나 피카소 정도를 넘어가면 이해가 너무 힘들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회화가 대상 자체가 아니라 어떤 추상적인 관념, 이념들을 전달하는데 몰두한다는 점. 사진이나 영화와 경쟁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미술계 밖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죄송하지만) 그런 측면은 현대미술에 일종의 강박처럼 느껴진다.

  

미술관, 박물관에는 주중에는 수업삼아 단체 관람온 학생들로 넘친다. 이런 기회를 가지면서 성장한 어린이들이 과학과 역사, 예술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가지는 것은 물론, 그것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런 곳에는 어린이들을 위해서 ‘직접’ Acting 해볼 수 있는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테이트모던에서는 이미지를 조작해서 추상적인 이미지를 직접 만들어보거나, 개념들을 환유적으로 연결해볼 수 있는 장난감도 있다. 예를 들어 카지노 슬롯과 같은 것을 돌리면 무작위로 개념들이 조합되어서, “사과--뒤짚다--이것은 예술이다”라는 식으로 말을 만들면서 상상할 수 있다. 초상화 미술관에서는 자기 초상화를 손으로 조합해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예술과 과학이 먼 곳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해볼 수 있는 무엇이 된다.

 

이번 여행에서 테이트 브리튼에서는 Millais의 ‘오필리아’를 꼭 보고 싶었는데 보지 못했다. 오는 27일부터 전시라 지금은 전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림이 들어있는 포스터만 볼 수 있었다. 지구반대편까지 와서 일부러 목표했던 것을 놓칠 때 정말 크게 아쉬울 수 밖에.

 

영국박물관 British Museum

 

이건 이름을 영국박물관 British Museum이라기 보다는 World Museun 이라고 해야할 것같다. 세계 곳곳에서 (대부분 약탈행위를 통해서) 가져온 유물들로 채워져있기 때문이다. 하이라이트는 메소포타미아-이집트-그리스 관인데,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지배한 이들 지역의 유물을 제국의 수도에 전시하면서 서양문명의 정당한 계승자로서 자신들을 드러내려고 한 것 같다.

 

원래 있던 곳이 아닌 곳까지 건너온 유물들을 보면, 과연 이집트나 이라크, 그리스에는 무엇이 남았을까하는 생각까지 든다.(그래서 그리스-이집트까지 갈 생각인 나는 기운이 좀 빠지는 일이다.) 핵심적인 것들을 집요하게 모아왔기 때문이다. 피라미드처럼 좀처럼 가져올 수 없는 것들은 없지만, 파르테논 신전에서는 기둥과 지붕을 제외하고 가져올 수 있는 조각들은 모조리 가져왔다.

 

물론, 덕분에 유적들이 보존된다거나, 영국이 이들 나라의 유적보호나 박물관에 지원하고 있다는 말도 있지만, 그렇다고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이라크를 지배하고 유적을 약탈해온 영국은, 이제 다시 이라크를 미국과 함께 침공한 상황에서 그런 정당화는 더더욱 설득력을 잃는다. (비록 얼마전에 패퇴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민족국가단위로 분할된 세계체제에서 민족의 역사적 이상을 나타내는 고대 유적들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보게 한다. 영국의 약탈이 부당하기는 하지만,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유물들이 꼭 그 자리에 있어야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의 북경박물관에 진나라의 수도였던 서안에 있던 유물이 있다고 할 때 부당하게 느낄까? 하지만 거리로는 더 가까운 만주에 있는 고구려, 발해 유적이 북경에 있다고 할 때 당신의 느낌은?

 

(다소 포스트콜로니얼리즘적인 시각이라고 해도) 역사적 유적들이 민족사를 구성하고 민족국가를 정당화하는 상징들이 된다는 점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 유적을 약탈한 제국주의가 정당화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해야한다. 영국인들은 자신을 세계를 지배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물들을 단지 “옮긴” 것일텐데,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동시에 비판할 필요성.

 

뮤지컬,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

 

런던에서 마지막날 저녁은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봤다. 여행을 떠나면서 가지고 있던 몇 개의 로망 중에 첫 번째 것.

 

CD로 보고 들었던 것과는 배우들도 약간씩 다르고 해서 느낌이 같지는 않았지만 훌륭했다. 감동할 준비를 하고 간만큼, 몇몇 장면에서는 펑펑 눈물 흘린 작품.

 

레미제라블은 인물들이 모두 생생하게 살아있는 작품이다. 플롯도 감동을 주지만, 무엇보다 인물 하나 하나가 깊은 인상을 주고 생각하게 한다. 특히 “숭고한” 인물들은 깊은 감동을 준다.

 

장발장은 주인공인만큼 가장 그렇다. 자신이 누구인지 고뇌하면서도(What Have I Done?) 다른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자기 대신 누군가가 누명을 쓸 상황이 되자 자신을 밝히고 쫒기는 몸이 된다.(Who am I?) (비록 간접적이라도) 자신의 잘못으로 죽음에 이르는 판틴과의 약속을 지키기위해서 코젯(과 그가 사랑하는 마리우스)을 위해 희생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누구에게보다 자신에게 정당하기 위해서 매 순간 위험한 선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심지어 악역이라는 자베르도 그렇다. 그가 장발장을 집요하게 쫒는 것은 “법과 정의”에 대한 내적인 신념 때문이다.(Star)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충실하기 위해서, 자신이 믿던 “법과 정의”가 허구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쪽을 선택한다.(Soliloquy) 자신이 믿던 법과 정의가, 정의가 아니라는 모순적인 상황에서 그것을 회피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자신을 부정하는 선택. 역설적으로 가장 진실된 인물 중 한명.

 

그리고 에포닌이 있다. 그녀는 코젯을 사랑하는 마리우스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는 질투하거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비극으로 받아들이고, 그러나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 그래서 마리우스가 부탁한 편지를 코젯에게 전하고 오는 길에 시민군의 바리케이트 뒤에서 총에 맞아 죽어간다. 뮤지컬에서 가장 슬픈 장면. 그녀가 부르는 On my own도 잘 알려져있는 감동적인 곡이다.

 

그리고 앙졸라를 비롯한 학생과 시민들. 그들은 혁명을 위해서 싸우고 바리케이트에서 최후를 맞는다.(내가 본 공연에서 앙졸라 역은 흑인배우가 맡았는데, 카리스마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다음시대의 혁명은 노동시장 밑바닥의 이주노동자로부터?) 그들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바리케이트에 남는데, 광주에서 도청에 남은 시민군을 떠올리게 한다.(Drink with me ; 최후의 전날, 바리케이트에서 술을 나누는 시민, 학생)

 

이들 비극적인 인물들이 불러일으키는 숭고함은, 내가 나 자신에게는 어떻게 충실해야할지, 어떻게 존재를 걸어야할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번 여행 속에서 본 훌륭한 그림들이나 이런 작품에서 느끼는 숭고함은, 쓸쓸한 자유와 함께 이번 여행의 주된 느낌 중 하나다. 레미제라블은 그런 느낌들로 꽉찬 작품.

 

 

이제 아쉬운 런던 일정을 마치고 빠리로 떠나는 유로스타 기차 안이다. 워털루 역에서 빠리 북역까지, 영화에서만 보던 체크무늬 치마를 입은 스코틀랜드 홀리건들이 맥주를 마시면서 내내 시끌벅쩍거리는 2등석 기차 간. 빠리에 영국팀의 축구경기가 있나보다. 막 도버해협을 지하로 건넜다. 이제 프랑스의 끝없는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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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여행을 시작하면서.

서울에서는 이랜드투쟁과정에서 1000여명의 구사대가 집회 참가자에게 폭력을 휘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손도끼도 등장했다고 하는데, 그런 상황들로 부터 멀리 와있는 게 미안할 뿐이다.

여행을 시작하는 이야기,런던.

지구의 자전 속도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서 하루를 묵고 런던으로 날아왔다. 시속 900Km가 넘는 속도로 날아왔지만 출발한 곳의 시간보다 런던이 4시간 정도 늦었다. 엄청난 속도로 서쪽으로, 태양으로부터 도망쳐왔지만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되지 못한 셈이다.

지구의 자전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다시 느끼게 된다. 그런 속도에도 관성, 때문에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번 여행이 그런 나의 관성을 넘어서는 혹은 그것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12시간의 비행 동안,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노트북에 저장해놓은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자전거도둑”을 보았다. 2차 대전 직후의 절망적인 상태의 로마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런 종류의 영화 몇 개를 여행동안 틈틈이 볼 생각이다.) 이 영화는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서 로마의 실제 거리에서, 그리고 일자리를 잃은 금속노동자나 신문배달 소년을 영화배우로 기용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영화를 보면서, 여행에 대해서 겸손해져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그곳들은, 단지 “관광지” 혹은 좋게 말해서 “역사”들이 있는 곳들만이 아니라 “사람들”과 그들의 “삶”이 있는 곳이라는 점. 여행을 출발하면서도 벌써 단지 그 세계들을 나의 시각으로만 꿰어 맞추려고 했구나..

이번 여행 속에서 사실 그런 “삶”들을 얼마나 만날 수 있을지는 알지 못한다. 말도 통하지 않고 사람도 제대로 사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찾아가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구의 자전 속도에 겸손해야하는 것처럼.

지구 반대편, 막 도착한 런던은 맑지만, 공기는 차갑고 습하다.

혼자 여행하기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묘한 느낌이다. 전에도 혼자 다녀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멀리 그리고 장기간 혼자 여행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것은 단순한 자유, 그러나 한편 쓸쓸함.

빅벤과 영국의회 건너편 템즈 강변에서 맥주를 혼자 마시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이 그렇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면서 역설적으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런 여행인데, 말하자면 누구보다 “나” 자신과 대화하고(사실 말할 다른 사람이 없다), 혹은 누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생각하고, 쉴새 없이 새로운 생각들을 촉발하는 새로운 대상들을 만난다.

우리 두뇌는 그 대상이 어떤 것이든 새로운 것을 만나면 새로운 사고를 하는 것으로 반응하게 만들어 진 것 같다. 새롭게 만나는 것들이 떠올리게 하는 것들을 모두 메모하기도 힘들 정도다.

런던, 제국의 수도

런던에서 이제 사흘(늦게 도착한 첫날을 제외하면 이틀)을 지나면서 받은 이 도시의 첫 인상은, 과연 19세기의 세게 헤게모니 국가의 수도답다는 것이다. 세계제국의 수도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

이곳에는 말하자면 19세기가 넘친다. 런던 시티 안쪽에는 상당수의 건물들이 19세기에 화려하게 지어진 것들이다. 그 것들은 규모자체도 엄청날 뿐 아니라, 그 규모에 비례하는 화려함을 갖추고 있는데, 그 엄청난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마치 앙코르와트와 같은 거대한 제국의 수도가 그곳처럼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



이러한 것들을 건설하기 위한 자원을 집중해낼 능력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주로 볼거리로 알려진 각종 미술관이나 박물관도, 영국이 가졌던 (프랑스나 독일 등을 생각하자면 근대 세계체계에서 유럽이 가졌던) 힘을 생각하게 한다.

또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영향도 있겠지만 여러 인종이 다양하게 그리고 규모있게 섞여서 살고 있다는 점. 영국이 식민지로 지배했던 나라의 사람들을 포함해서 ‘세계도시’라는 말에 걸맞게 많은 인종이 섞여있다.

런던이라는 대도시의 특성이기도 하겠지만 영국에서 원래 살던 백인에 1/3 정도되는 다른 인종들이 사는 것 같다. 흑인, 아랍인, 인도인, 동양인 등등. 남한에서 이런 일이 았으면 당장 인종적 증오가 판을 쳤을 텐데, 차별은 존재하더라도 부끄럽지만 나에게는 그들이 같이 어울려 사는 것 자체가 놀라워보인다.

한편, 어제 숙소에서 만난 한 한국사람은 여행하면서 느낀 것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이, 사람을 밀치게 되면 "미안하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남한에서는 보기 힘든 시빌리테(시민적 에티켓이라는 의미도 있으니까)라는 건데..

아마 여기저기 다녀보면 이런 ‘느낌’이 의미하는 것도 알수 있게 되겠지.
런던에서 짧게 본 것들의 느낌은 내일까지 지나서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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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여행 출발

오늘 여행갑니다.
한달반 정도, 국내에서는 안보일 겁니다. (블로그나 인터넷에는 출몰할 수 있죠.)

유럽일대, 이집트까지를 여기저기 다닐 생각인데,
누구 표현대로 스스로 제가 "물가에 내놓는 심정"입니다. 흨;;

특별한 목적보다는, 그냥 지구반대편으로 가고 싶어서. (아직 안드로메다는 너무 멀고.) 30대 중반인데 또 언제 해보겠냐는 막차타는 심정으로다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역사의 역순으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무지무지무지 강조하는 적당한 수건도 준비했으니 아마 살아돌아오는데 데는 지장이 없겠죠.

옆에 있는 배낭하나 메고 출발. (넘 무겁네.. 빼도빼도 남는 중량감은 도대체 근원이 어디란 말인가..)


* 연락이 필요하신 분은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로. (핸드폰 로밍이 되는데, 통화료는 끔찍하게 비싸군요. 하지만 문자받는 건 공짜, 보내는 건 인터넷으로다가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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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여행을 앞두고 읽은 "여행도서" 중 하나.
전우주적인 농담을 엽기발랄하게 진행하는 책이다.
다만 5권 합본인 이 책의 쪽수는 1236쪽에다가, 두께가 상당해서 가벼운 책이지만 질량은 꽤 나간다. 그래서 침대에 누워서 볼만한 책을 책상에 좌정하고 봐야하는 고통이 있다. (그래서 다섯권을 따로 사는게 좋을 수도 있는데 다만 2000원이 비싸다.)

마치 여행안내서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책이다.
여행안내서라면 우리나라건 너무 딱딱한 편이고, Lonely Plenet 같은 경우만 해도 어떤 도시를 "쇼핑몰만 있는 형편없는 도시"라고 말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자유분방한 편.(사실 책 제목도 애덤스가 여행하다가 "유럽을 여행하는 히키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착상한 것이다.)

이런 책하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루이스 캐럴의 말장난의 계보를 이은 것같다. Give me your hand(도와줘)라고 하면 로봇 마빈이 자기 팔을 떼어준다. (영국식 말장난 유머라고나 할까, 이해하기 쉽지 않다. ─.─;;) (위에는 영화에 나오는 "안내서"이미지. "겁먹지 마세요"라고 씌여있다. 여행자에게 꼭 필요한 문구다.)

영국에서는 라디오드라마로 시작했고 책으로 나왔다. 나름대로 코믹SF라는 장르를 뚜렷하게 형성한 웃기고 재밋는 책. (하지만 시시껄렁한 영국식 유머에 간질나는 분들에게는 비추.) 뜬구름 잡는 말장난만은 아니고, 우리가 사는 사회의 웃기는 짬뽕들이 우주적 차원에서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다룬다고나 할까.

워낙 유명한 책인데다가 영화도 나왔기 때문에 내용소개는 필요없겠지만, 소설에서 남성들은 하나같이 나사가 한두개가 아니라 백개 이상 단위로 빠진 것같고, 여성들은 그나마 "제 정신"에 가깝다.(가장 괜찮은 생물은 돌고래인데, "그 동안 물고기는 고마웠어"라고 노래하고 그냥 지구를 떠나 버린다. 어디로? 알게뭐야) 그게 아주 자연스럽게 읽히는 걸 보면, 현실에서도 그런 경향이 뚜렷하다는 걸 다시 느낄 수 있다.

여튼 책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해함(Mostly Harmless)이라 할 수 있다. (이건 지구에 대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설명이다.---여기 소설책 말고 그 설명서 말이다---전체가 두 단어나 된다;; 이 책의 5권 제목이기도 하고.)

가장 호감이 가는 인물(?)은 마빈인데, 우울증에 걸린 로봇이다. 아.. 너무 아는 것도 많고 고민이 많아서 그렇다. 영화에는 이런 이미지로 나온다. 머리가 행성만큼 크고 특별히 설계된 GPP를 갖고 있다. GPP? "Genuine People Personalities" 크크



사실, 영화는 책에 비해서 좀 실망스러운데, 너무 "그럴 듯하게" 결론을 낼려고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다. 우주는 말도 안되게 엉망이라야하거든. 그래서 영화에서는 딱 두개, 마빈의 이미지와 돌고래들이 부르는 엽기발랄한 노래(So long and thanks for all the fish)만은 맘에 든다.
마빈은 위에 이미지, 돌고대들의 노래는 아래 동영상.



가사가 이렇다. (시작하는 부분의 영화 자막까지)

"사물들이 겉보기와는 항상 똑같지 않다는 것은 중요하고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은 지구상에서 자기들이 가장 지적인 종족이라고 늘 알아왔지만, 알고보면, 인간은 3번째 영물밖에 안되고 두번째 영물은 돌고래로서, 흥미롭게도, 돌고래들은 오래전부터, 지구의 종말이 임박해 있음을 알아왔다.

그들은 인류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수많은 시도를 했으나, 인간들은 돌고래들의 대부분의 의사소통을 축구공을 펀치하거나 생선 한조각을 먹고 싶어 휘파람을 부는 등의 인간들을 즐겁게 하는 놀이 정도로 오해를 하였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그들 자신만이라도 지구를 단독 탈출하여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심지어는,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마저 오해를 하였는데, 휘파람 불며 고리를 뒤로 재주넘어 통과하는 묘기를 하기 위한, 고난이도의 놀이 정도로 또 잘못 해석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인즉은 그 메세지는 이랬다 "
        
잘있게들, 그 동안 맛있는 생선은 고마웠어...
이렇게까지 되어서 너무 슬퍼   
우리는 너희들에게 알려줄려고 무진장 노력을 했건만,   
우리 가르침에 귀를 안기울이니 우린들 어쩌겠나   
너희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적인 경이로움에   
무신경하게도 존경하지 않은 결과라네   
안녕 안녕, 생선은 고마웠네   
너희 세상은 곧 파괴가 될걸세   
너무 안절부절 할 필요 없네   
그저 느긋하게 누워서   
지구가 네 주위에서 분해되도록 놔두면 되는거야
참치군을 쓸어가는 저인망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의 대부분은 착하고 괜찮은 종족이라고 생각했네   
특히 너희들의 임산부와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 말이네...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생선은 고마웠네   
만약 내게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맛있는 생선을 맛보고 싶어   
만약 우리가 한가지를 바꿀 수만 있다면,   
그건 우리 모두가 노래부르기를 배우는 것   
자 모두들, 어서요   
인간과 포유 동물   
나란히 나란히   
생명의 위대한 유전 풀 안에서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고마워!    
생선은 고마웠~~~~~네

아아, 이번 여행이 끝나면 언젠가 은하수 여행도 해야할텐데, 언제나 할 수 있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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