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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inaire님의 [정신질환자가진단표] 에 관련된 글.

http://www.psychonews.co.kr/test/self.php3
위의 포스트에 소개된 검사.

http://www.psychonews.co.kr/psytest/psytest0.htm
고려대 임상신경심리센터 홈페이지인데, 테스트가 하나 더 있군요.

병원에서 하는 검사하고도 유사한데 축약된 형태네요. 오랜만(?)에 다시해보니, 역시 아주 좋지 않군요; ㅋ
여러분도 한 번 정신건강 검사해보시길.

첫번째 검사는 정신분열증, 우울증, 조울증, 공황 장애, 공포증, 강박증, 외상후 스트레스, 범불안 장애, 사회 공포증, 신체화 장애, 거식/폭식증, 알콜 중독, 불면증, 스트레스 등 14가지 정신질환에 대한 수치를 보여줍니다. 두번째는 우울증 검사.
제 경우에는 '정밀진단요망' 레벨이 다섯가지에, 특히 두가지가 아주 심하고, '경계경보' 레벨이 다섯가지 나오는군요. 쩝;;. 하지만 '공포증' 항목은 점수 0. 뿌듯. (말하자면 겁대가리 상실 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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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안]세기의 전환과 세계 노동자운동의 역사

다소 거창한 제목의 교안. (교안인 만큼 역시 짜집기 텍스트이고, 특히 아리기의 짜집기)
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세미나의 일환으로 진행된 강연용입니다.

교안 텍스트
텍스트는 작년에 진행했던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의 강연의 텍스트를 수정해서, 특히 아리기의 노동자운동에 대한 지적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하려니, 목소리도 잘 안나오더군요; ㅎ (그러나 무엇보다, 함께한 분들과 특히 오늘도 오셨던 농민운동하시는 선배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세기의 전환과 세계 노동자운동의 역사"라는 내용으로 진행하면서 참 벅찬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무엇보다 역사적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야, 그 속에서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따라서, (물론 1강에서 진행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러한 맥락에서 통합적인 강연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강연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러한 인식이 전제되어야 현재의 노동자 운동의 위기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지, 따라서 어떠한 혁신이 필요한지를 사고할 수 있겠죠. 다들 결론을, 비정규직 운동이라느니, 사회적 합의주의 반대라느니, "쉽게" 이야기하지만 "왜"라는 질문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20세기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역사적 반성 속에서 던지지 않는 현실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저 역시 내용을 진행하면서, 그럼 대안은 무엇이냐라는 부분에서 갑갑하더군요.(그러니 듣는 분들은 얼마나 더 그랬을까요;;) 발리바르를 따라 '네 번째 공산주의' 혹은 대안세계화운동..이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의 실제의 내용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참 막막한 것이 사실입니다. 텍스트에 인용한 몇개의 문구와, 발리바르가 "공산주의 이후에는 어떤 공산주의가 오는가"라는 텍스트에서 이야기한, 국제주의와 인간학적 차이(지적-성적-문화적 차이)에 대한 사고가 필요하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종별적인 것의 목록에 무엇이 포함되어야할 것인지에 대한 소묘일 뿐이라는 점에서 대안에 대한 사고와 토론은 더 멀리, 더 구체적으로 진행되어야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대중운동들 속에서 발견되고 사고될 수 있을 텐데, 어려운 것은 그런 지점이죠.
다만, 그런 대안세계에 대한 전망까지는 아니지만, 노동자운동의 전망, 미래에 대해서는 몇가지 의미있는 흐름들은 남한에서도 항상 있어 왔습니다. 더구나 최근의 중요한 투쟁들이 노동자운동, 혹은 노조운동의 표상을 변화시키는 노력을 어렵지만 힘있게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조금 떨어져서 보기 때문에 더 잘보이는 지도 모르겠군요.)

최근 금속노조의 FTA반대총파업, 이랜드 상암점을 중심으로 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 국민연금 개악저지투쟁 등은 대중적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전형적인 표상이던 "대공장의 전투적인 경제투쟁"이라는 상에 생경한 충격을 주는 투쟁이라고 봅니다.

노조운동이 '다른' --계급적 이해에 관계되지만 사업장의 경제적 이해에 제한되지 않는, 신자유주의 개혁에 반대하는 사회운동적인-- 투쟁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비조합원 대중들 뿐 아니라, 노조의 조합원들도 변화시키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이러한 투쟁의 흐름이 강화되면서, 노동자운동의 지배적 표상을 내-외적으로 변화시켜나갈 수 있을 때 새로운 가능성이 더 가까와지겠죠. 그러나 여전히, 모호한 '대안세계'의 상을 대중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 뒤따라야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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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나라; A State Of Mind

어떤나라 ; A State Of Mind

북조선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는 것으로 잘 알려진 다큐. 다니엘 고든 감독은 평양의 '평범한' 소녀 두 명에 대한 다큐를 통해서 (배급사 혹은 민족주의 진영의 표현에 의하면)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고 말한다. 내가 즐겨보는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원작보다 축약된 40여분 가량으로 방영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이 축약본은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는데, 다만 대사가 영어이고 자막은 없다. 아래 링크 참조. (자막이라도 있으면 볼 만 할 텐데; ㅋ)

이 작품의 장점은, 감독이 자신의 어떤 의도를 덧칠하기 보다,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스스로 사고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는 것같다. 집단체조에 참가하는 두 소녀의 이야기. (전작인 <천리마 축구단>은 보지 못해서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걸 안 본 것은 무엇보다 내가 남북일관 민족동원 스포츠로서 축구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평양이, '전시도시'라는 것은 알려져있고, 작품 중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은 어떤 면에서는 더 장점인데, 북조선 체제가 "원하는 것" 혹은 "전시하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큐의 한 부문에서 자막이 나온다.
Developing mass gymnastics is important in training school childern to be fully developed Communist people - Kim Jong Il, 1987

이 구절만으로도 '꾸웩'이지만, 장군님 말씀에 이어지는 구절을 보자. (다른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았다.)
Developing mass gymnastics is important in training children to be fully developed communist people, to be a fully developed communist man, one must acquire a revolutionary ideology, the knowledge of many fields, rich cultural attainments and a healthy and strong physique. These are the basic qualities required of a man of the communist type. Mass gymnastics play an important role in training schoolchildren to acquire these communist qualities. Mass gymnastics foster particularly healthy and strong physiques, a high degree of organization, discipline and collectivism in schoolchildren, The schoolchildren, conscious that a single slip in their action may spoil their mass gymnastic performance, make every effort to subordinate all their thoughts and actions to the collective.'
On Further Developing Mass Gymnastics. Talk to mass Gymnastics Producers. April 11th 1987 Kim Jong Il

밑줄 친 부분만 번역해보면,
집단체조를 발전시키는 것은 어린 학생들을 완숙한 공산주의자로 훈련시키는 데 중요하다... 어린 학생들은 그들의 전체 사고와 행동을 공동체에 복속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하게 된다. (김정일 발언, 1987.4.11)



보고 나서 사람마다 여러가지 생각이 들테고, 특히 영화사의 홍보처럼, 북조선 인민들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거나, 혹은 그들의 '고난의 행군'이 이유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너무 뻔한 것들이고, 미국-남한 보수 언론들의 프로파겐다를 그대로 믿지 않는 바에야..) 그러나 위의 김정일 장군의 말씀은 다큐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을 상기해야한다.

대단히 미안한 말씀이지만, "공산주의"가, 위에 김정일 장군님 말씀같은 거라면, 나는 그거 안 할한다.
역겹다.
인민을 공동체에 복속시키기 위한 육체적-정신적 훈육체계를 발전시켜야한다는 것이,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 an association, in which the free development of each is the condition for the free development of all",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사람들이 할일인가? 그것은 감옥-공장-학교로 발전된 자본주의 훈육체계를 그대로 모방할 뿐 아니라, 조선식으로('우리식'이라곤 말하지 말아줘) '발전'시키고 있지 않은가?

씨네21에 영화5자평을 쓴 박평식이란 분은 다큐에 대해서 "미선이 효순이처럼 불행하진 않을 어떤 소녀들"이라고 썼는데, 대단히 미안한 말씀이지만, 박현순, 김송연 두 평양 소녀뿐 아니라 무엇보다 미선, 효순을 위해서라도 그런 식으로 후안무치한 말장난을 해서는 안된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
 
아래 포스트에 쓴 것처럼 우리가 2007년 현재에도 공산주의자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국가이데올로기가 된 스탈린주의, 김일성주의가 아닌 다른 이념이어야할 것이다.(이런 점에서도 대안세계화-다음 세대의 공산주의의 이념과 상을 사고하는 것이 시급하다.) 우리는 그것을 무엇보다 "지성의 명철함과 지성에 대한 대중운동들의 우위" 속에서 찾아가는 중이지만, 적어도 집단체조로 키워지는 사람들을 만들어갈 사회가 아닐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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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F]노동운동과 사회운동, 1차 워크샵

지난 6월 19일에는 사회운동포럼의 '열쇠말keyword" 주제의 하나인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1차 사전워크샵으로 '노동운동 진단과 평가' 라는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관련된 자료와 토론 전체 내용은 아래 링크 참조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document&id=1423
 
노동운동을 사회운동적인 시각에서 평가해보자는 것이 1차 토론의 목표이기는 했는데, 썩 잘 된 것같지는 않습니다. 주발제는 노동자운동 좌파-현장파의 입장에서 평가(노동전선)이었고, 토론자들은 문제를 제기하기는 했는데, 쟁점을 뚜렷히 부각하는 논쟁이 되지는 못했던 것같습니다.

다만, 몇가지 앞으로도 쟁점이 될 수 있는 몇가지 문제는 드러났습니다.
대표적으로 '사회운동'이라는 것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노동자운동과 어떤 관계로 볼 것인가 문제.

사실 '사회운동'의 사전적 의미는 명확합니다.
"구체적인 사회 문제를 해결하거나 현존 사회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하여 대중이 자발적으로 하는, 조직적이고 집단적이며 지속적인 행위. 노동 운동, 농촌 운동, 학생 운동, 혁명 운동 따위가 있다."(네이버 국어사전)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의 분리가 장기화되면서, 노동자운동이 노조운동을 중심으로, 경제주의 투쟁에만 몰두하면서, 마치 노동자운동은 사회운동이 아닌 것처럼, 사회운동은 "사회운동단체"라는 것들이 하는 특수한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정당운동의 입장에서는 노조-당-사회운동을 삼분하는 사고(전진)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런 인식에는 다른 판본도 존재하는데, 노동자운동의 현장파들의 생각입니다. 이날 발제에서 노동전선(활동가조직) 김태연 집행위원장은, 노동운동이 잘 하면 사회운동의 의제라고 이야기되는 교육, 의료, 반전 운동 등도 모두 할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변혁운동에서 노동운동 중심성이라는 것을 (부당)전제하기 때문에 나온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노동운동이 아니라 노동자운동이, 스스로 발전하면서 그런 사회운동 과제들을 자신의 운동과제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는 말로 바꾸어 이야기할 수는 있겠죠.(그렇게 같은 취지로 이해하자는 제안이 정영섭 동지의 발언이었던 것같은데 맞나?;;)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노동자운동, 그것이 좌파라하더라도 해온 투쟁의 역사를 볼 때, 좀 심하게 말하면 "듣기좋은 말"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그러한 주장은 노동자운동"만" 있어도 된다는 사고를 전제합니다. 운동들간의 교통을 위해서도 별로 좋지않은 다소 '무례한'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토론과정에서 느낀 것은 노동자운동이 자신을 사회운동의 "하나의" 부분으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사회운동포럼을 거치면서, 다른 운동들과의 대화과 교통의 과정에서 그러한 인식을 확인할 필요도 있을 것같습니다. 물론 이 말이 노동자운동이 "노동의제"라고 불리는 것들을 하나의 부문운동으로 수행해야한다는 의미도 아니고, "노동의제"라고 불리는 것들이 부문운동의 의제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그러나 가장 중요한, 그러나 유일하지 않은─ 운동주체로서 노동자운동이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자신을 위치지워야한다는 말이겠죠.

그렇게 보면, 이탈리아 공산주의재건당의 베르티노티가 쓴 <공산주의 재건과 대안좌파의 건설>이라는 글을 꼭 권하고 싶습니다.(<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대안세계화운동>, 윤소영 엮음/공감 2003에 실림) 몇 부분만 인용하면,

사회운동들의 다원적 성격은 '또 다른 세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들과 변증법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그 자신이 새로이 구성된 정치적 주체를 요구한다. 정치의 위기는 좌파정치, 사회갈등, 시민사회 사이의 관계를 새로이 재정립함으로써 위기로부터 탈출할 것을 요구한다. 공산주의 재건은 이런 재정립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다.
...
우선적으로 대안좌파는 대안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사회운동들과 교류한다. 대안좌파의 존재이유는 집단적 행동을 또 다시 유효하게 만듦으로서 정치 자체를 부활시킨다는 의미에서 정치의 개혁에 있다. 이 때문에 새로운 정치적 주체는 당과는 다른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조직들이 당과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70쪽)
 
여기서는 정치운동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운동들 사이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에 노동자운동이 사회운동들과 갖는 관계를 돌아보는 데도 좋은 글이죠. 특히 사회운동과 함께 투쟁하는 것이 정치자체의 부활을 가능하게 하기위한 조건이라는 점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또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동당과 같은, 혹은 노동자의힘과 같은 당-정치조직들이 사회운동에 어떻게 접근해야할지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줄 겁니다. 이번 사회운동포럼에도 이와 유사한 운동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박래군(사회운동포럼 집행위원장, 인권운동사랑방)님이 쓴 제안서에도 나와있으니 흥미로운 일입니다. 제안서 "새로운 사회운동, 가능합니다" 읽기

그리고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이러한 관계의 재정립의 필요조건으로 공산주의 재건을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운동간의 교통과 교류가 만능이 아니고, 대안세계를 위한 이념적 사상적 지향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을 공산주의 재건으로 지칭합니다. 이번 사회운동포럼에서도 운동간의 교통과 교류도 중요하겠지만, "공산주의 재건이 필요조건"이라는 점이 공유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대안세계의 상이 무엇인지, 대안세계화'운동'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묻는 방식일 수도 있겠죠.

물론 "공산주의 재건"이 스탈린주의나 김일성주의처럼 구 사회주의국가들을 정당화했던 국가이데올로기의 부활은 전혀 아닐 것이고, 오히려 포스트마르크스적 공산주의이겠지만 말이죠. 그리고 포스트마르크스적, 혹은 네번째 공산주의의 형태와 가능성에 관련해서는 발리바르의 <공산주의 이후에는 어떤 공산주의가 오는가>를 참고해야할 것입니다.(<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소련 사회주의, 윤소영지음, 공감 2002에 실림. 인터넷에서는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document&id=1404 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말을 더 이어가자면, 발리바르가 지적하는 네번째 공산주의의 핵심적인 요소는 페미니즘과 국제주의입니다. 민족형태 비판이 전제되어야하는 국제주의에 대해서는 그래도 좌파들에게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 페미니즘과 관련해서는 좌파들의 인식도 좀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김태연 노동전선 집행위원장의 글에서 노동자운동의 혁신의 과제로 페미니즘 혹은 여성문제와 관련된 부분은 (그것도 관료화에 대한 문제제기 부분에서) 단 한문단이 이렇게 나옵니다.

- 노동운동 내부에도 여전히 전근대적인 성차별․가부장적 조직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이런 조직문화는 노동운동 내에서 동지적 관계를 파탄내기까지 한다. 동지들의 성차별적․가부장적 행태를 농담으로 용인하는 분위기는 이 문제해결을 가로막고 있다. 자본주의 상품문화의 찌꺼기이며, 전근대성의 잔재를 노동운동 내부에서 단호히 척결해야 한다.
 
안타깝죠. 여기에 대해선 구구절절 더 할 말도 없습니다.;;

여튼, 이 날 토론을 하면서 느낀 것은, △ 사회운동포럼이 보다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이념적 대안에 대한 논의까지 진행되거나 혹은 최소한 그것을 사회운동진영들이 공동으로 논의해야한다는 점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는 점 △ 노동자운동이 경제주의에 경도되면서 사회운동과 분리된 역사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점 △ 특히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과의 결합에 관련해서는 전체 사회운동포럼에서 중요한 결의로 취급되어야할 것이라는 점 등입니다. (쓰고 나니 모두 '과제들'이군요. 내가 할 것도 아니면서 이런;;ㅎㅎ)

앞으로 논의가 더 진행되는 만큼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 열쇠말 토론에서도 더 많은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겠죠. 어차피 사전토론이라는 것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확산하기 위한 의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의의에 맞게 활동가들의 관심 속에서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사회운동포럼 홈페이지가 만들어졌군요 : http://sm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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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속 5센티미터 (秒速 5センチメ-トル)


초속 5센티미터 (秒速 5センチメ-トル), 신카이 마코토 감독


초속5센티미터, 벗꽃이 떨어지는 속도. 하지만 그건, 30~40억년을 생각 속에 뛰어넘는 우리들에게도 어쩌면 어떨 때는 너무 빠른 혹은 느린 속도.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같은 작품으로 잘 알려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에 대해서 이 블로그에서도 포스팅한 적이 있다. http://blog.jinbo.net/rudnf/?pid=123)

나름대로 취향을 탈 것같은 이 작품은, 감독의 전작인 단편 애니 <별의 목소리>를 보고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라면 좋아할만하다.(그래서인지 개봉관도 많지 않다. 상암CGV까지 조조 상영에 맞춰 헐레벌떡 겨우 찾아가서 봤는데, 그나마 '인디상영관'에서 상영중.) 극장에서 <초속5센티미터>를 보더라도, <별의 목소리>는 꼭 미리 보아야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아래 링크를 따라가 보시길. 취향에 맞지 않는다면 영화에 대한 아래 나의 이야기는 아마 다 헛소리로 들릴 공산이 크다.
<별의 목소리>(ほしのこえ)보기

영화는, 초등학교 때만난 타카키와 아카리의 관계를 축으로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1부),  고등학교(2부), 어른이 된 시기(3부), 세 편의 이야기를 연결한다.
1부 : 벚꽃 무리
2부 : Cosmonaut(우주비행사)
3부 : 초속5센티미터

그러나 이 영화는 청소년기의 감정을 그린 것은 아니다. 주인공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너무나 어른스럽게 감정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청소년기라는 설정이 작품에 독특한 효과를 주기 위한 하나의 설정일 뿐, 영화는 시간과, 사랑, 그것의 엊갈림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말해준다.
 
감독은 자신이 이미 사용했던 익숙한 소재들을, 다른 공간에서 변주한다. 예를 들어 <별의 목소리>에서 문자메시지라는 소재. 영화들에서, 문자메시지는, 먼 별 어느 곳에서 시간을 지나 수광년을 떨어져서도 달려오거나, 혹은 가까이서 수천번을 보내도 1센티미터도 다가가지 못하거나, 버릇처럼 수신자없이 쓰여지고, 누군가는 그 수신자가 자신이길 바라고.. 그것은 도착하지 않은 편지, 혹은 보내지 않은 편지, 그리고 감정.

이 영화가 독특한 것은, 주인공인 타카키가 나와 같다고 느낄 뿐 아니라, 그 주변의 모든 인물들, 아카리, 혹은 카나에..들이 어느 장면들에선가 모두 나와 같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건 3부, '초속 5센티미터'에 어른이 된 타카키가 선 상황이.. 오래 찾아오던 것을 어느 새 모르게 놓쳤을 때,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나의 현재와 같다고 느껴서만은 아니다. (그래서는 다른 인물들의 모습 하나하나를 나와 같다고 느낀 것을 설명할 수는 없을 테니까.)
画像

그것은 살면서 누구나 어느 정도는, 어떤 때에는 누구에겐가 상처를 주기도 하고, 누구에겐가 어떤 때에는 상처를 입기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자신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혹은 그/녀는 그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시간은 어긋나고, 그래서 모두 그/녀들 모두는 나와 같은.., 
혹은
타카키처럼 우리 모두는 언젠가 어느 새, 오래 찾아오던 것이 무엇인지조차.. 잊거나 놓치게 되기 때문에. 그리고 또 어느 순간 갑자기 떠오르기 때문에.
항상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라고 이야기하더라도 너무 늦게.
 
영화의 주제가인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가 흐르는 때가 영화의 클라이막스. 영화와 잘 어울리는 이 노래가 나올 때, 당신도 나처럼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에게도 위안이 된다면,
벗꽃이 초속 5센티미터로 떨어지던 그 철도 건널목, 마지막 장면에서
타카키가 아카리를 다시 마주치지 못했다고 해도,
벗꽃이 떨어지는 속도가 초속 5센티미터라는 것을 아카리가 이야기하는 첫 순간부터 그 장면까지..
그것이 슬프더라도, 여전히
모두 아름답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

これ以上 何を失えば 心は許されるの
이 이상 뭘 잃어야 마음을 용서할 수 있을까
どれほどの痛みならば もう一度君に会える
어느정도의 고통이여야 다시 한번 널 만날 수 있을까

one more time 季節よ うつろわないで
one more time 계절아 변하지 말아줘
one more time ふざけあった時間よ
one more time 함께 즐겼던 시간아

食い違うときはいつも 僕が先に折れたね
일이 안 풀릴땐 언제나 내가 먼저 양보했었지
わがままな性格が なおさら愛しくさせた
제멋대로던 성격이 더욱 사랑스러웠어

one more chance 記憶に足を取られて
one more chance 기억에 다리를 잡혀서
one more chance 次の場所を選べない
one more chance 다음 장소를 고를 수 없어

いつでも探しているよ どっかに君の姿を
언제나 찾고 있어 어딘가 너의 모습을
向かいのホーム 路地裏の窓
맞은편 홈 골목길 창가

こんなとこにいるはずもないのに
이런 곳에 있을리가 없는데

願いがもしも叶うなら 今すぐ君のもとへ
소원이 혹시라도 이뤄진다면 지금 바로 네 곁으로
できないことはもう何もない
안되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어
全てかけて 抱きしめてみせるよ
모든걸 걸고 끌어안아줄거야

さみしさ紛らすだけなら 誰でもいいはずなのに
슬픔을 달랠 뿐이라면 누구라도 좋을텐데
星が落ちそうな夜だから 自分を偽れない
별이 떨어질 듯한 밤이니까 자신을 속이지 못해

one more time 季節よ うつろわないで
one more time 계절아 변하지 말아줘
one more time ふざけあった時間よ
one more time 함께 즐겼던 시간아

いつでも探しているよ どっかに君の姿を
언제나 찾고 있어 어딘가 너의 모습을
交差点でも 夢の中でも
교차점에서도 꿈 속에서도

こんなとこにいるはずもないのに
이런 곳에 있을리가 없는데

奇跡がもしも起こるなら 今すぐ君に見せたい
기적이 혹시라도 일어난다면 지금 바로 네게 보여주고 싶어
新しい朝 これからの僕
새로운 아침 앞으로의 나
言えなかった「好き」という 言葉も
말하지 못했던 "좋아해"란 말도

夏の思い出がまわる ふいに消えた鼓動
여름의 추억이 맴돌아 갑자기 사라진 고동

いつでも探しているよ どっかに君の姿を
언제나 찾고 있어 어딘가 너의 모습을
明け方の街 桜木町で
새벽녘 거리 벛꽃나무 마을에서
こんなとこに来るはずもないのに
이런 곳에 올리가 없는데

願いがもしも叶うなら 今すぐ君のもとへ
소원이 혹시라도 이뤄진다면 지금 바로 네 곁으로
できないことは もう何も無い
안되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어
全てかけて 抱きしめてみせるよ
모든걸 걸고 끌어안아줄거야

いつでも探しているよ どっかに君のかけらを
언제나 찾고 있어 어딘가 너의 조각을
旅先の店 新聞の隅
여행 안내소 신문 모퉁이

こんなとこにあるはずもないのに
이런 곳에 있을리가 없는데

奇跡がもしも起こるなら 今すぐ君に見せたい
기적이 혹시라도 일어난다면 지금 바로 네게 보여주고 싶어
新しい朝 これからの僕
새로운 아침 앞으로의 나
言えなかった「好き」という 言葉も
말하지 못한 "좋아해"란 말도

いつでも探してしまう どっかに君の笑顔を
언제나 찾게 되버려 어딘가 너의 미소를
急行待ちの 踏み切りあたり
급행열차 대기소 횡단보도 근처

こんなとこに いるはずもないのに
이런 곳에 있을리가 없는데

命が繰り返すならば 何度も君のもとへ
생이 반복된다면 몇번이고 네 곁으로
欲しいものなど もう何もない
바라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어
君のほかに大切なものなど
너 외에 소중한 것따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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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Claude Monet)展

지난 주에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하고 있는 "빛의 화가 모네展"에 다녀왔습니다.
공식홈페이지는 여기 : http://www.monet.kr
모네는 인상파화가다..라는 정도밖에 알지 못하고 무작정 간 셈인데, '빛의 화가'라는 별칭이 어울리는 작품이 많더군요.

특히 수련을 그린 작품들로 유명한 모네의 전시회 답게, 전체 전시작의 1/3 정도는 수련들이었던 것같습니다.  모네가 수련을 왜 그렸는지는 책을 찾아보면 나오겠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아무래도 그것이 물위에 떠 있기 때문이었던 것같은데, 왜냐하면 모네는 물 위에 비친 빛의 변화를 포착해내는 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더군요.

물결에 일렁이면서 반사되는 빛, 원래의 색깔을 갖고 있지만 빛나고 투명해진 대상의 색깔을 그려내는 데 말입니다. 탁한 유화 물감으로 어떻게 이렇게 투명한 색감을 나타낼 수 있는지 감탄했습니다. 특히 붉은 노을이 비친 연못의 수련과 버드나무 그림이 있었는데, 그 투명한 노을의 붉은 색이란! (아래 그림은 Waterlillies 연작 중 하나인데, 붉은 노을 색이 있는 그림의 이미지는 찾지 못하겠더군요. 그 대신에.)

<심지어 포르비예의 세느강>과 같은 작품에서는 한길 앞을 볼 수 없는 안개까지도 물 위에서 투명해지는군요.
 
이런 걸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다소 거친 듯하지만 일렁이는 붓터치 덕분일 텐데, 이 때문에 잔잔한 물을 그리고 있지만 그림의 표면은 역동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냥 무작정 평온하게 나른하지는 않죠. 또 어떤 작품들은 의도적으로 수면의 역동성을 거친 붓터치로 그린 것도 있고 말이죠.

<일어비린 시간을 찾아서>로 유명한 푸르스트는 신문에 모네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내가 언젠가 모네의 정원을 볼 수 있다면 꽃들의 정원이라기 보다는 색채의 정원이라고 해야할 것같고..
이를 테면 색이 아닌 모든 것으로 비물질화시킨 꽃들을 보게 될 것같은 느낌이 든다. (1907.6, 르 피가로)
 
이 이야기는 특히 <일본식 다리>라든가 <장미나무길> 같은 작품을 보면 너무나 잘 어울립니다. 이 색과 빛들을 보세요.ㅎ


모든 사물이 색채만 남아가는 그림들. 이와 함께 후기 작품으로 갈 수록 점점 추상성이 강해지는 데, '인상'을 회화에 표현하는 인상파의 특징을 더 극단으로 밀어부친 결과겠죠. 추상화되는 것도 그렇지만, <등나무>같은 작품은 공간을 소거하고 필요한 것만 캔버스에 담아내면서 '공중 정원'을 표현하는 독특한 효과를 만들더군요.

나름 재밌는 전시회였습니다. 특히, 지난 번 오르세미술관전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빛을 다루는 솜씨들이 탁월하다는 생각. 일찍부터 미술을 감상하는 법을 잘 배웠으면 그런 걸 훨씬 잘 느끼고 보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이제라도 하나씩 보아가는게 재미가  쏠쏠합니다.)  일상 속에서 보이는 색과 빛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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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전략조직화에 대한, 어쩌면 다소 더 근본적인

또 몇개의 비정규조직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또 몇명의 조합원이 탈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며칠만에 다시 불면증이 찾아와서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불과 얼마전까지 내가 직접 담당해왔거나 총괄해왔던 사업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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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이것들은 일종의..데자뷰, 어쩌면 나에게 진정한 문제는 그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던 문제들이었다는 점..
그러나 답을 알지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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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무엇이 문제였을까?
투쟁의 전망?, 어떤 조합원의 말처럼 노조가 해준것이 없어서?
혹은 또 다른 무엇?
무엇 보다.. 그것은 대리주의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비정규직노동자를 조직하면서, 그들 스스로의 투쟁이 아니라 마치 노조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그렇기 때문에 노조를 만들거나 가입하라고 권유해왔던 경로말이다.

'전략조직화' 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특히 공공부문에서는 사업장 외부에서 조직화 사업을 (산별노조에 가입시키는 방식으로) 진행했던 것이 최근의 과정이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조직화 경로에 대한 분석에 입각한 것이었다. 공공서비스부문에 있어서는 외부접근의 용이함, 외부적인 사용자에 대한 압박의 필요성-효율성 등에 주목하면서 외부에서 활동가에 의한 현장 조직화 전략을 채택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드러나는 것은.. 사업장 외부로부터의 조직화가 갖는 한계, 대리주의의 한계.

무엇보다,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한다는 노동자운동의 주체적 측면이 전략조직화, 산별노조 건설 과정에서 점차 약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략조직화사업의 경우에, 노조로의 조직화를 우선하다보니, 일단 노조에 가입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되는 데, 이 과정에서 활동가들에게는 경향적으로 노조에 가입하면 해결된다는 식의, 말하자면 '대리주의'가 발동한다. (물론 의식적으로 그러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복귀한다.)

또 한편으로 산별노조라는 것은 어떤가. 우리는 산별적인 운영이라는 것을.. 마치 단위사업장의 문제를 산별집행부(그것이 지역본부든 업종본부든 노조 중앙이든)에서 해결해주는 것이라는 방식으로 생각했다. 산별노조의 의미라는 것이 관료기구(의 담당자)가 현장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그것은 사업장을 넘어서는 연대와 단결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말해왔지만, 정작 실제 투쟁에서는 사업장의 투쟁을 대리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또 사실, 눈에 보이는 어려운 사업장에 대해서 활동가가 할 수 있는게 또 무엇이 있겠는가? 방치? 그럴 수는 없는 것도 우리가 처한 솔직한 조건이다.)
산별노조에 대해서, 우리가 주장해왔던 것을 현장에서는, 실천으로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 처한 활동가의 선의와, 책임감에 대해서 어떻게 비난할 수 있는가..
 
그 렇다면, 가입의 조건─결의와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대안인가.. 나는 그것이 필수적으로 강조되어야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전 조건인 그것으로 미래의 일을 담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노조(혹은 그것이 아닌 어떤 조직형태라도)로 단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있고 확장되어야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당사자들의 주체적인 결의.. 분노를 조직하는 과정이 전제되어야한다. 어떠어떠한 문제를 노조에 가입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방식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공동의 분노로 단결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
 
다만, 한두명씩 흩어져있는 노동자들의 경우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여전이 어려운 점이 있다.(학교비정규직이나 보육노동자들이나..) 이런 작업장 조건에 있어서는 집단적 단결을 통한 자발적 투쟁이라는 모델은 별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업장 안에서 개별적으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을 집단적으로 해결하고자하는 요구가 발전한다. 이런 경우에는 오래된 모델이라고 하더라도, 어쩌면 그것이 지역적 단결을 당장은 지연시키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직업별노조 형태를 취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문제는, 결국 노동자들, 주체들이 스스로 투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특히, 활동가들의 대리주의가 발동하기에 최적의 조건이 형성되기 때문에 더욱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노동자들이 가장 용이하게 단결할 수 있는 최적의 형태, 그러나 대리주의가 아니라 스스로 단결하고 투쟁하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적의 형태는 어떤 것일까.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혹은 우리가 희망의 끈을 여전히 잡고 있는 노조가 그러한 것으로 전화되도록, 대안을 만들어내고 조직할 수 있을까..

문제들에는 어쩌면 답이 없거나, 내가 답하고 행동할 수 없다는 것.. 그러한 것 전체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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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F]여성노동권 쟁취 투쟁,이라는 쟁점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사회운동포럼의 사전 워크샵이 진행되고 있다.
전체 프로그램과 취지는 아래 링크 참고.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issue&id=449&page=1
1차> 6월 14일(목): 왜 현재 ‘비정규직철폐투쟁’이 여성 노동권 쟁취 투쟁이 아닌가
2차> 6월 28일(목): 일-가정 양립 논의에서 한국사회 노동자운동의 한계와 과제
3차> 7월 12일(목): 노동조합 내 페미니즘 실천의 현황과 과제
 
1차 워크샵의 주제는 위에 있는 것처럼 "왜 현재 ‘비정규직철폐투쟁’이 여성 노동권 쟁취 투쟁이 아닌가"라는 제목. 나도 토론자로 참석했는데, 제목은 마치 나에게 따지는 듯한 느낌. 내가 실천하지 못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취조당하는 듯한 입장에서 토론에 임할 수밖에.
토론문은 밑에 있으니 미리 준비한 내용은 보시면 되겠고, 토론과정에서 생각난 몇가지를 언급해보자. (사실 토론문에서 제기하려고 했던 ─생각하기에 나름 중요한─문제도 있었는데 그런 부분은 많이 토론되지는 못했지만, 다른 중요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다.)
1차 토론자료 전체는 아래 링크 참고.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document&id=1421

우선, '여성노동권'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특히 노동자운동 진영 안에서 '개념' 자체에 대한 인식이 없다. 그게 뭔지 모른다는 얘기다. 심지어, 토론에 참석한 나 같은 경우에도 이게 과연 어떤 개념의 하위 범주인지, 여성권과 관게는, 노동권과 관계는 무엇인지, 어떤 구체적인 실제 사례가 있는지 등에 대해서 대단히 모호하게 인식할 뿐이다. 이건 노동자운동 안에는 부재한 개념이다.

그러니, 개념에 대한 참가자들 공동의 인식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토론이 어느 정도 겉도는 것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을 전제하고, 그럼에도 유의미한 토론들은 진행되었는데, (발언하신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발언자를 일일히 언급하지 않고 내 말을 섞어서 이야기를 해보자.

먼저, 그럼 왜 (특히 비정규직투쟁 과정에서) 여성노동권 개념이, 혹은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 노동자운동-노조운동 내에 없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여성 노동의 불안정화에 대한 구조적 원인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점, 따라서 대증요법이 아니라 원인에 대한 투쟁이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같다. 노조운동이 성-맹목적인 상황에서 그것은 노조운동 안에서는 불가능한다. 불행히도 외부에서도, 노동권-여성권을 상호 배제적인 권리로 제기하는 주류 여성운동을 통해서는 노조운동 안에서 문제는 더 퇴행적으로 인식될 뿐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심지어 여성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 과정에서조차 여성노동권, 여성노동의 불안정화 등에 대해서 제기되지 못한다. 남성활동가들은 물론, 투쟁하는 여성비정규직노동자들 스스로도 문제를 인식하고 제기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의 실무자로서 내가 제기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실용적인 프로그램 정도다.
여성노동권이라는 쟁점이 심지어 여성노동자 자신에게서도 제기되지 않는다면(그것은 그녀들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사회적으로 정의되어 있지 않고, 따라서 당사자들도 그것을 인식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직은 잠재된 그녀들의 목소리를 끌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 이를 위해서는 활동가들의 의식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그녀들과 대화하면서, 요구안을 정리하면서, 그녀들이 그것을 인식하고 제기할 수 있도록 해야하는 조건이 아닐까.

이를 위해서는 또한 다소 실용적인 접근, 구체적인 프로세스가 요구된다. 조직활동가들이 우선 '여성노동권'을 개념적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하고 그 중요성에 대해서도 공감할 수 있게 조직해야한다. 그리고, 여성노동자들의 권리를 어떻게 그녀들의 목소리로 발언할 수 있도록 대화할 것인지에 대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하고, 활동가들이 훈련되어야한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럴 때에 구체적인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공간에서 여성노동권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여성노동의 불안정화라는 문제도 더 구체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 (지금 쉬는 입장에서는 다소 '오버'한 발언이었던 셈인데, 하지만 나중에 언젠가 내가 시도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이 제기하고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를 바란다.)

이런 것들이 실제의 '프로그램'으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토론회에서 제기된 것처럼 노조가 여성 노동권을 제약하는 모순, 한계를 인식하고 투쟁하려는 관점이 필요하다. (의지와 능력, 용기가 모두 요구된다.) 그것(한계와 모순)은 심지어 노조운동 안에도 존재한다.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노동권쟁취를 고유한 대상으로 하는 노조운동 자체로만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여성노동권의 침해 혹은 부재, 여성노동의 불안정화의 비밀이 작업장 밖, 다른 공간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족형태"가 아닐까.
여성의 특수한 권리로서 '여성권'을 인식하지 않으면 여성의 노동권 쟁취도 가능하지 않을 텐데,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도 가족형태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더구나 여성이 작업장에서 직면하는 문제는 가족 내에서 마주치는 억업형태를 반복하는 것이다. 여성의 일자리는 돌봄노동과 같이 '여성적인 것'이거나, 가족 내 노동과 같이 '부차적인', 따라서 '저임금과 불안정노동이 당연한' 일자리로 여겨진다. (이것은 두번째 워크샵의 주제이기도 하다. 6월 28일(목): 일-가정 양립 논의에서 한국사회 노동자운동의 한계와 과제)

운동구조에 있어서 노조가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즘 운동의 비판과 개입이 필요해지는 지점이다. 여성권-노동권을 상호 배제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방식이 아니라, 성주류화의 입장에서 노동권에 침묵하는 주류여성운동의 입장이 아니라, 다른 페미니즘 운동말이다. (그것이 가능해지다면 이탈리아에서처럼 '노조 페미니즘'이라 불릴만한 것이 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시도는 이번 워크샵과 같은 것에서 시작될 수 있을 텐데, 그런 점에서 사회운동포럼과 이번 사전워크샵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다른 일정들 때문에 남은 두번의 워크샵, 토론에 참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의미있는 시도. 많은 활동가들이 함께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첫번째 워크샵에서 참석이 저조했던 노조활동가들의 참가가 중요하다. 세번째, 노조운동 안에서 페미니즘적 실천이라는 것이 결론에 가까운 토론이 된다면, 두번째 일-가정 양립정책 비판은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여성노동권의 침해-부재, 여성노동의 불안정화의 비밀이 어디에 있는지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아래는 당일 제출한 토론문

o ‘여성의 일자리’를 규정하는 맥락에 대한 비판 필요

- 60~80년대 섬유산업, 80~90년대 전자산업 등 수출산업 중심의 경공업에 ‘여공’, 90년대 이후 사무보조, 유통, 돌봄 노동의 여성노동자 등, 여성노동자가 집중된 노동영역에 대한 분석필요
- 역사적으로 보면, 항상 ‘가치절하된’ 노동에 여성이 집중되고(여성이 집중된 업종이 가치절하되고) 이에 따라 저임금과 고용불안이 일상적. 현재 여성노동의 불안정화도 이러한 역사적 맥락 하에 있다고 할 때, 여성저임금 일자리와 관련해서는 이러한 비판 필요
- 현재 여성들의 일자리라고 이해되는 직종, 직무들은 비정규직, 무기계약제, 외주화 등을 통한 저임금, 불안정한 일자리로 새롭게 규정되고 있음.
- 정부가 추진하는 ‘사회적 일자리’같은 경우에는 애초에 사업의 의도가 출산률 저하에 따라 여성노동력을 노동시장에 진입시키는 방안이었다는 점에서 ‘여성 일자리’로 규정된 것으로 볼 수 있음. 정부는 이를 거의 대부분 민간에 맡기는 방식으로 불안정 일자리로 창출할 뿐 아니라, 비정규법안 시행령에서도 ‘정부의 복지대책으로 만들어진 일자리’로 규정하여 기간 제한 없이 비정규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함.
- 여성들의 일자리는 항상 가장 불안정한 일자리였을 뿐 아니라, 노동의 불안정화에 가장 취약하기도 함. 따라서 불안정노동철폐투쟁에서 여성의 불안정노동에서는 집중적인 문제제기가 필요
- 그러나 여성노동의 불안정화와 같은 문제는 비정규직 투쟁 과정에서, (심지어는 여성 비정규직 투쟁사업장에서조차) 이러한 방식으로 문제제기를 결합시키지 못하는 등 제대로 제기되어오지 못했음.
- 다만 노동운동 진영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여성노동의 불안정화라는 문제를 “특권화”할 경우에, 모든 방면에 밀려오는 노동의 불안정화 문제를 노동자 전체의 ‘일반적인 문제’로 제기할 수 없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 현재의 불안정노동철폐 투쟁의 핵심은 노동의 불안정화가 비정규직, 정규직. 업무의 성격을 가리지 않고 모든 노동자에게 밀어닥치고 있다는 점에서 전체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기 때문. 따라서 여성노동권 문제를 불안정노동철폐 투쟁의 과제로 함께 제기한다고 할 때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임.

o 무기계약제라는 ‘대안’

- 우리은행 사례 이후에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도 무기계약방식으로 비정규법안의 기간 제한을 피해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음
- 정부-자본의 무기계약제의 도입 이유 : △ 계속 교체하는 계약직으로 사용할 경우 비용부담이 더 되기 때문이며, △ 비정규직법안에서 ‘보호’의 방법으로 정부가 ‘사용기간제한’이라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계약기간 문제가 결정적 △ 또한 그 동안 한국식의 연공급 임금체계에서 (노조 등의 반대로) 도입이 어려움을 겪던 직무급 체계를 도입하려는 시도 (일부에서 직무급 체계 도입을 긍정하는 것은 오히려 생계비 임금모델로의 발전이라는 과제에 역행하는 것으로 위험할 수 있음)
- 이러한 대안은 비정규직 노동자 중에서도 일부에게만 적용 가능한 것 ; 기간제 사용 기간 제한으로 인하여 교체할 경우에 더 많은 인사관리, 교육 비용부담이 발생할 수 있는 직접고용 비정규직, 일부직종(사무보조, 은행창구업무 등)만 적용
- 이러한 일부 직종에 여성들이 있다고 해서, 여성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대안인 것은 아님 : 우리은행 300여명(무기계약 배제 인원) 해고사태, 무기계약 시행 이전 학교비정규직 해고사태 등
- 간접고용 노동자(특히 청소용역이나 보육, 간병 등 돌봄 노동), 일용직 노동자(1년 미만 단기간 계약) 등을 체계적으로 배제하고 있음. 이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무기계약제와 같은 모델은 실효성이 없음.
- 무기계약 방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에는 ‘무기계약으로 전환할 만한’ 일자리/‘외주용역이 어쩔 수 없는 일자리’에 대한  암묵적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혹이 있음(자본의 입장에서도 정기적인 ‘교체’가 더 많은 비용이 드는 ‘전문성’을 가진 일자리가 무기계약 전환의 대상이 되는데, 무기계약 방식을 요구하는 직종도 이러한 성격의 업무에 집중되어 있음).
- 또한 무기계약제는 직군의 분리를 통해(주로 여성 직군의 분리를 통해) 구조적으로 차별을 온전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여성 노동자의 저임금과 고용불안을 고착화할 것임. 또한 성별화된 업무구분을 만연하게 할 우려가 있음.

o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 비정규법안 등 비정규직 관련제도의) 성별화된 영향평가의 필요성

- 여연, 여성노조 등은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에 대해서 ‘성별화된 영향평가’가 필요하다는 점을 제기하여 왔음. 여성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이 많고, 특히 이들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대책이 수립될 수 있기 때문에 제기된 것
- 정부의 대책수립과정에서 실제로는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대책 내용 중 일부에 여성비정규직노동자에 대해서 언급되었음, 공공부분비정규직대책이나 비정규법안(시행령 포함) 등과 같이 비정규직관련 제도에 대한 투쟁에서 그것의 성별화된 효과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대책을 요구하는 투쟁 필요.

o '비정규직 철폐, 정규직화‘는 대안인가

- 비정규직이 이미 주류적 고용형태인 상황에서, 기존의 정규직 모델을 요구하는 것이 대안일 수 있는가 문제는 검토가 필요 (불안정노동철폐, 고용안정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기존의 ‘정규직’ 직제의 특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임)
- 기존 ‘정규직’은 90년대 초중반까지의 경제성장의 상황의 지대를 옹호하면서 기업 내(기업별) 복지와 고용안정에 몰두하여 왔음. 이 결과, 자본은 정규직(노조)을 우회하는 비정규직 일자리를 양산(기업 내 비정규직은 물론 아웃소싱을 통한 저임금불안정 노동의 외부화)
- 그런데 비정규직이 이러한 정규직 모델에 편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가능하고, 올바른가 하는 문제
- 현재의 정규직이 확보한 수준의 임금, 고용조건은 특정한 정세의 산물일 뿐 아니라 구조적으로 비정규직을 배제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 개별 기업 내에 제한된 노동자에 대한 고용안정을 확보하는 구조라는 점(따라서 운동과제도 기업 내에 집중되고 연대는 매우 실용적인 것이거나 부차적인 것이 된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불안정노동철폐는 곧바로 ‘정규직화’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고, 정규직노조 운동 모델을 모방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음. 이를 초과하는 운동모델-연대 지향적이고 사회운동적인-을 만드는 문제가 될 수 있음.
- 현재 일부 비정규직 운동이 기업 내 경제투쟁에 몰두하고 연대투쟁에 소홀한 방식으로 정규직 기업별 노조의 방식을 모방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음.
- 오히려 비정규직 운동은 지속적으로 단위 사업장에서는 고용과 관련한 문제를 갖고 싸우지만, 전체 비정규직(에 적용되는) 문제에 대해 싸우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점.
- 기존의 정규직 노조의 운동 모델을 모방하는 방식으로는 여성노동권 쟁취라는 요구도 도구적이거나 부차적인 문제가 수밖에 없음(특히 기업별 문제 해결 방식에 집중할 경우 여성문제는 도구적으로 활용됨). 따라서 여성노동권 쟁취 투쟁도 불안정노동철폐 투쟁의 다른 과제들처럼, 개별 기업별 요구를 넘어서는 것으로 조직하고 투쟁할 필요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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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파프리카Paprika


파프리카 (Paprika, 2006) , 콘 사토시 감독

줄거리나 설정은 검색엔진에 찾아보면 나올 테니 생략.
다른 사람의 꿈에 개입해들어갈 수 있는 DC mini라는 기계가 만들어지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놀라운 설정과 상상력의 산물. 프로이트를 애니메이션에 초대해서 '노는' 셈인데, 흥미롭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1.

다른 사람의 꿈에 개입한다는 것은, 무의식에 들어간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것은 우리 세계에서는 정신분석가, 혹은 정신과의사들의 일일텐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들이 우리 무의식에 접속하거나 들어오는 과정은 항상 불충분하다. 그러니 직접 '접속'할 수 있는 기계를 상상할 만도 하다.

그렇지만, 영화에서처럼 직접 '접속'할 수 있다면 좋을까? 그것은 확신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정신분석이나 정신과치료의 과정에서, 피분석자 혹은 환자는 '이야기하기'를 통해서 자신을 인식하고 치유해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 직접 무의식을 투명하게 보고, 개입한다고 되는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의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저항'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중요할 때가 있다.)
게다가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것은 전이-역전이를 너무나 위험하게 만들 것같다.
 
2.

A dream you dream alone is only a dream, A dream you dream together is reality.
John Lennon의 부인인 Yoko Ono가 한 잘 알려진 말.

그런데 영화는, 함께 꾸는 꿈이 현실..이 되긴 하는데, 그런데,
그 꿈이 악몽이면 어쩌지? 라고 묻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하나의 거대한 집단적인 꿈을 꾼다. 그것은 온갖 상징들, 욕망들이 뒤엉켜 혼란스럽고 기괴한 모습이다. (위에 포스터에서, "This is your brain on anime."라는 말, 파프리카 안에 있는 이미지들이 그것들이다.)

집단이 혹은 대중이 함께 꾸는 꿈은, 그래서 현실이 될 가능성이 언제나 있지만, 그것은 항상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하나의 집단적인 꿈이 현실이 된다면 어떨까?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이 공유하는 이데올로기가 반역에 필수적이라고 믿는 우리가 집단적인 꿈을 모두 기각할 필요는 없다. 감독은 오히려 집단적인 꿈 자체를 의문에 부치는 느낌이지만 말이다.(그 위험성에 비추어 볼 때 그 경고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의식적인-지적인 요소와 결합하고 반성하지 않는, 날 것 자체의 무의식과 욕망은 현실이 될 때 끔찍할 수 있다.
 
3.

(꿈 공간의) 파프리카는 (현실 세계의) 아츠코 치바의 또 하나의 주체. 파프리카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있는 꿈의 세계에서 치바 대신 나타난다.

지나가는 대사이지만, 매우 인상적인 것이 있는데, 이 장면. (그림은 파프리카)
대사를 그대로 옮겨보자.


(치바) : 멋대로 앞서가지 마, 파프리카
(파프리카) : 항상 너만 옳은 건 아니잖아
..
(치바) : 왜 내 말을 안 듣는 거지? 파프리카는 내 분신이잖아
(파프리카) 아츠코(치바)가 내 분신이라는 발상은 못 하나봐?
(치바) : 내 말을 들어
(파프리카) : 모든 사람이 자기 멋대로 되리라는 생각은 어느 대머리 아저씨랑 똑같은 것 같은데?

(참고로, 여기서 '어느 대머리 아저씨'는 모든 사람의 꿈을 지배하려는 노인네를 지칭한다.)
의식-무의식의 경계에 있는 주체인 파프리카가 오히려 의식-주체인 치바에게 네 멋대로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주체로서 우리는 항상 무의식에 이런 저런 것을 강제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무의식이 항변한다.. 그럴 때 신경증이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나나 다른 사람들도 그것 때문에 고통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장면.
파프리카는, 치바의 말처럼 '멋대로 앞서'간다. 주체가 어쩔 수 없이..


정신분석책에나 나올 개념들을, 스토리로 구성해서 영상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후반부에는 이야기를 수습하는 데 약간 무리하는 것같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상상력과 사고력을 자극하는 흥미진진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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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여행자의 로망 백서


여행자의 로망 백서
박사.이명석 지음 / 북하우스


"
그러나, 갸날픈 인간이여, 살아남은 우리는 그 모든 상황을 '로맨틱'이라는 한 단어로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117쪽, 폭풍의 로망
"
 
노골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가진 것이 '로맨틱' 한 단어일 뿐라도, 로망이 있(었)다면 성공.
여행자가 꿈꾸게 되는 자질구레하고 잡다한, 그러나 당장이라도 짐을 싸고 싶게 만드는 로망들의 컬랙션. 손에 잡는 순간부터 내내 내 안에 있는(나 한테 그게 있기나 했었나?ㅎ) 방랑벽을 깨우는, 상상력으로 놀라운 책.
 
커피 한잔의 로망, 동물친구의 로망, 쇼핑의 로망, 이방인의 로망, 도장 꽝의 로망, 낯익은 문자의 로망, 길거리 낙서의 로망, 변장 여행객의 로망.. 그리고 시간여행객의 로망까지(오, 이건, 시간을 달리는 소녀.^^;;). 여행에서 경험해 보았거나 이야기 속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부터, 글쓴이들의 왕성한 상상력의 산물인 로망까지, 아, 정말 여행을 꿈꾸게 한다.
 
하나 하나 글 하나 하나와 함께 상상하면서 여행에 안달나게 만드는 책이지만, 덕분에 여행을 더 풍성하게 즐길 수 있을 듯. 또 여행에서 (어쩌면 다 똑같아 보일지도 모르는 미술관-박물관 틈에서) 더 많은, 생각치 못했던 것들을 보고 발견할 수 있을 듯.(사실 길거리 낙서의 로망같은 건, 느낄 줄 모른다면 어느 여행설명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을 머리 속에 담아두게 만들고, 그래서 여행의 정신없는 순간 속에서 더 많은 것들을 상상력 넘치게 풍성하게 느낄 수 있도록 나의 상상력도 자극하는 책이다. 상상력이 놀랍다.
 
나도 미처 몰랐던 나의 어떤 로망을 여행에서 더 발견할 수 있겠지. 나의 어떤 로망.
글쓴이들이 제시해준, 상상하고 느끼는 방법 덕분에 더 많은 것들을. Tha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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