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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시려는 분들은, 전철이나 도서관같은 곳에서는.. 읽지마세요, 낱말 하나하나에 가슴 울먹이다가, 어느 구절에선가 갑자기 울음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나오니까요.
김진숙의 글들.
하지만 김진숙은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다. 그의 글은 투쟁사든, 강연이든, 교육이든, 추도사든 그녀의 '말'의 흔적이다. 말은, 보통 하나의 순간에 명멸하지만, 그것이 가진 무게와 진실에 따라서는 순간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그리 두껍지는 않지만 낱말하나 문장하나의 무게 때문에 쉬이 읽어나갈 수 없고, 눈물과 반성 때문에 며칠을 걸려 읽어야하는 책.
노조가 주최하는 이런저런 교육에 조금 다녀본 사람이라면, 열사 투쟁에, 적어도 열사가 마지막 가는 길에는 함께 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 속에서 익숙한 내용의 글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장소들에게 김진숙을 만났다. 노조 간부들, 비정규직 노동자 교육들에서, 김주익, 배달호 열사의 추모식에서 만났다. 어떤 때에는 정신을 빼앗겨서 그녀의 삶과 투쟁에 대한 두시간 가까운 강연을 듣기도 했고, 열사들의 추모식에서는 정말 펑펑 울어버렸다. 창원시청 앞 광장에서 배달호 열사의 추모식이 있을 때, 한진중공업 횡횡한 도크위에서 김주익, 곽재규 열사의 추모식에서.
우리 노동자운동은 87년 이후, 자신의 가능성을 발전시키기보다는 90년대를 거치면서 오히려 자신의 한계 속에만 갇혀왔다. 그래서 87년을 말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전투적 투쟁을 회고하지만 과연 그 속에서 우리가 길어올려야할 진실이 무엇인지를 성찰한다기 보다는 '잘나가던 그때'를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김진숙의 글이 하나 하나 영혼에 울리는 것은, 그녀가 우리의 현재에 대해서, '잘 나가던'(혹은 지금도 잘나가고 있다고 믿는) 노동운동이 굳이 외면하거나 침묵하려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87년의 진실이 그 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김진숙은 부산지하철 매표소 비정규직노동자의 단식 투쟁에서 조수원 열사를 기억한다 .배달호 열사의 추모식에서 청소용역 비정규직노동자가 될 지 모르는 부인 황길영 동지를, 유통매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할지 모르는 두 딸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보수세력에 탄압당지만 꿋꿋하게 싸우는 전교조 선생님들의 투쟁을 소중히 말하면서도, 그들이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을 돌아볼 것을, 화룡점정할 것을 나즈막한 목소리로 주문한다.
이런 점들이 아니라도 책을 읽다보면, 왜 김진숙의 말이 낱말 하나하나에 가슴 울먹이게 하고, 어떤 구절에서 갑자기 눈물을 쏟게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깊은 상처를 건너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중학생 딸이 새벽신문배달로 사온 털신을 고이 간직한 어미니를 기억하는 사람, 돌아가실 때까지 '복직했냐'를 묻던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조카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사람.
그래서 마치, 남한의 노둥운동이 경제주의와 합의주의에 빠져서 희망은 이제 없어진 것이 아닌가 몇번이고 돌아보게 되는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침묵하거나 스쳐 지나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김진숙의 글에 영혼이 울리는 당신들이 있다면, 여전히 노동자들의 눈물의 역사는 계속된다. 그것은 끝나지 않았다.
"20년 가까이 초지일관 불굴의 신념만으로 버텼겠습니까? 그 폭력 앞에서 한 없이 비굴해지던, 살려만 준다면 글마들 발톱의 때라도 햝을 만큼 비굴해지던 스물여섯의 제 모습이 떠오르면 지금도 스름 끼칩니다.
오히려 그런 모습들 때문에 용기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용기야말로 얼마나 찬란한 자유인지, 뼈가 저리지요.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지지 않는 것, 그것만큼 소중한 게 또 있을까요" 239쪽
=====
배달호 열사의 추모제와 눈물들이, 배달호 열사 추모곡인 "호루라기 사나이"가 떠오른다.
아래 포스트에 달린 '손님'의 댓글을 따라서 본 영화. 기억이나 불치병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많지만, 진부한 소재들을 진부하게 반복하지 않고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배우들의 연기가 영화를 더 단단하게 밀고갔다. 눈물을 흘리게 하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슬픔을 건드리고, 엔딩이 매우 인상적인 영화.
영화에서 두 사람의 이별은, 주인공이 상대에 대한 기억을 잃는 순간, 그래서 만나는 순간, 그 시점 이전으로 돌아간 순간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별은 마치 사랑 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사랑 전에, 과거의 일처럼 느껴진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타임리프를 탄 것처럼. 하지만 원하는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돌아가더라도 항상 너무 적게 혹은 너무 멀리 돌아가기 때문에 시간은 우리가 길들일 수가 없다.
사랑이 시작될 때처럼 이별도 각자에게 비동시적인 사건들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상호 동의하는" 이별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것일테다. 알츠하이머병 때문에 두 사람에게 사건은 비동시적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끝내 이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의 책임도 아닌. 따라서 주인공들은 그것을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아래 손님의 언급처럼,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변의 사람들에게나 사물에 남긴다. 영화는 그것을 하나씩 보여준다. 기억이 소멸할 때, 오히려 익숙했던 것들이 익숙하지 않게 되는 순간 드러나는 그 흔적들(의 도드라짐)을 통해서 감독은, 우리들 모두가 가지는 의미가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기억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아픈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는 것도. 각자는 서로 교통하면서 모두의 영혼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당신의 기억이 소진될 때, 나의 영혼이 아플 수밖에 없다.
* 좀 더 자세한 영화 소개는, 씨네21 이동진의 글이 친절하다.
(나도 요즘 며칠간 지금 하는 활동을 쉬는 일을 고민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어려운 시간들에 따뜻하게 관심가져주고 있는 동지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연영석.
김성만을 제목으로 한 글 머리에 왜 연영석이 등장하는가? 나는 연영석을 잘 모른다. 그러나 예전에 사회진보연대 기관지에 실렸던 인터뷰 하나를 보고 팬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제 노래고 불안정한 삶을 사는 노동자의 노래입니다) 노동현장의 문화운동, 노래운동이 노조에서도 단지 '선동'이 아니라 하나의 지적인 공간, 창작으로 발전 되어야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분절되고 좌절하는, 젊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을 표현하는 방식의 노래를 제기하는 것에서 놀라웠다. (그것도 대공장집회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포장된) '단결투쟁'만을 외칠 것이 아니라 그 젊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구체성을 어떻게 제기할 것인가.
(아래 연영석 동지 이미지 출처는 네이버블로그 eticform)
비정규직 노동자들.
내가 최근에 만나는 비정규직 동지들은 어떤가. 오늘 조합원 모임을 진행한 도시철도공사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중년의 여성노동자들이다. 엊그제 모임을 진행한 노동부비정규직노동자들은 30대 초중반, 낼모레 함께 투쟁선포기자회견이 예정된 노사발전재단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스마트한' 20대 후반의 청년노동자들. 430집회에서 만난 고려대 미화 조합원들은 중년이라기보다는 노년의 여성노동자, 오늘 노동조합을 결성하겠다고 상담차 찾아오신 환경미화원은 중년의 남성.
이들을 모두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묶는 만큼, 이들 각자가 가진 삶의 구체성을 존중하면서, 우리는 각자를 주체화하고 연대를 조직할 수 있을까.
자본의 추상화, 노동의 구체성
사실 이 개념(자본의 추상화, 노동의 구체성)은 정치경제학 비판의 것이다. 자본의 운동이 추상노동이 생산하는 가치와 잉여가치로 표현되는 반면, 노동자가 노동력을 지출하는 과정은 유일하게 현실적인 노동, 즉 구체노동으로서 나타난다.
이 속에서 우리는 현실에서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을 떠 올릴 수 있다. 자본은 언제나 추상적인 어떤 힘, 기껏해야 자본의 대리인에 불과한 사장과 같은 '것'(자본가의 본질은 인간이 아니라 추상적 사물이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언제나 구체적인 삶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개인들의 집단이다. 물론, 그들이 '반역'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문화'의 일부이자 효과, 결과로서 이데올로기.
김성만, 삶의 노래
김성만은 거칠다. 그가 만든 노래도, (죄송하지만) 그의 노래 실력도 역시 그렇다. 연영석과 마찬가지로 김성만도 투쟁사업장에 공연보다는 '연대'하러 다닌다. 그래서 가난하다. 삐까번적한 큰 무대에는 부르지 않는다. 맥빠진 민주노총 집회에 섭외가 안될 때 불러도,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는 곳에서 소리를 지른다.
나는 오늘 도시철도공사비정규직 조합원들의 교육을 하는 김성만 동지를 보고, 또 한명의 동지에게 반했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어쩌면 하층문화, 그 속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삶의 진실을 길어올리는 모습을, 불과 몇십분 동안에 노래교육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연영석이 젊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삶의 분절성을 노래한다면, 김성만은 나이든 노동자들이 팍팍한 삶과 그 속에서 희망을 노래한다.
그가 직접 쓰고 오늘 노래한 "까대기"라는 곡. 악보 밑에는 "까대기란 여성의 유통노동자들이 박스에 들어 있는 물건을 풀어 진열대에 차곡차곡 쌓아 정리하는 것을 뜻함"이라고 씌여있다. 유통여성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하면서 만든 곡이라고 한다. "경괘한 뽕짝"이다.
세상에 포장을 뜯어 널 부러져 흩어진 것들 / 높은 곳에 차곡차곡 낮은 곳에 가지런하게
날 때부터 비정규직 울 때부터 차별을 받는 / 정해져서 바꿀 수 없는 그런 노동이 아냐
우리가 차곡차곡 우리가 하는 거야 / 노동이 아름답게 다시 쌓아야 해
우리가 하는 거야 우리가 힘을 모아 / 세상을 다시 한 번 까대기 하는 거야
다시금 사랑으로 다시금 희망으로 / 우리가 힘을 모아 함께 가는 거야
땅위에 하늘아래 차별이 없는 거야 / 사람이 사람답게 아 살맛나는 세상 (가사전체)
오늘 함께 한 도시철도 비정규직 조합원들과 신나게 불렀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구체적인 노동 속에서 대안세계를 노래한다.
지금 투쟁하고 있는 울산과학대와 광주시청의 여성비정규직노동자들과 연대하면서 만든 곡, "청소아줌마"라는 곡도 있다.
..쓰레기를 치우다 내가 쓰레기가 되었다.. 억장이 무너지고 너무 울어서 눈물이 말라버렸다... 청소만하다가 내가 청소되었다...내가 살아서 알몸뚱이로 분노에 벌벌 떨었다...(가사 일부)
울산과학대, 광주시청의 투쟁을 접한 사람들이라면 노래의 가사가 어떤 울림을 갖는지 알 것이다. 김성만은 그 울림을 노래로 공유하자고 한다. 아프지만, 조합원들이 같은 장소에서 함께 노래하고 하나되는 것처럼 먼 곳의 투쟁하는 비정규직노동자들과 공유할 수 있게, 노래로. 그 이야기를 이제 처음듣는 수천리밖에 있는 노동자들이 서로 공감할 수 있게. 노래로.
김성만은 겸손하게도 자신이 만든 '비정규직철폐연대가'가 '비정규직의 아픔을 그때까지는 잘 몰라서' 책이나 문서를 읽고 썼다고 했다. 그래서 다소 추상적이기도 한 '비정규직철폐연대가'는, '청소아줌마', '까대기' 때문에 더 빛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집회에서는 잘 포장된 '비정규직철폐연대가'만 연신 방송된다. 맥빠진 민주노총 메이데이 집회서 조차. 그것이 맥빠진 이유는 '청소아줌마'와 '까대기'의 삶의 구체성을 폄하하고 결코 노동절에 부르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노래 : 대중의 반역을 위해서.
대중은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의 반역이 결합될 때 혁명에 나선다. 착취의 모순이 자동적으로 이데올로기적 반역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신자유주의 최근10년의 경험을 통해서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데올로기의 반역을?
김성만과 연영석은 대중의 구체적 삶을 노래로 서로 교통하자고 제안한다. 서로 주목하는 세대는 다르지만 말이다. 서로 다른 비정규직 대중들이, 서로의 구체적인 삶의 고통을 노래를 통해서 교통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경험이 가지는 보편성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이 새로운 주체화의 시작이 아닐까. 하나의 대공장에 모여있는 노동자들과는 달리 분절되고 흩어진 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는 삶의 구체성을 함께 할 수 있는 문화적 매개가 필요하다.
연영석이 인터뷰 말미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저는 다른 민중가요 가수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음반은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을 위한 음반이다. 네가 주로 가는 현장에서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렇게 말이죠."
삶의 구체성, 운동의 구체성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최근에 그 동안 활동하던 노조에서 활동을 곧 그만두고, 쉬고,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주변의 동지들과 많은 이야기를 더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마도 그렇게 결론을 낼 것같다.
지난 시간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아주 잠깐씩 이런 계기를 통해서 돌아보게 된다. 나는 현재의 활동에서 얼마나 노동자들의 삶의 구체성에 접근하는 운동을 했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공간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삶의 구체성에 어떻게 다가가고 인식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지금처럼, sur le quai, 길이 끝난 곳에 서있을 때, 혹은 어디에 서있는지조차 혼란스러운 거리 한복판*에서 길을 잃을 때, 그것을 다시 생각한다.
[보너스 이미지]
==== * 아래는 언급한 그 "혼란스러운 거리 한복판"
*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거의 마지막 부분의 장면. 시간이 정지한 거리 한 복판. 치아키가 남겨지고 마코토는 인파 속에 사라진다.
* 윗 장면이 나오기 직전. 예정된 사고를 결국 막지 못하고 "기진맥진 상처입은" 치아키. 다 소진한 줄 알았던 마지막 타입리프 단 하나,가 남아있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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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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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두 가 보고 싶어요. 작품이 많지는 않을거라고 생각이 되지만, 그래두 한 작품이라도 제대로만 있으면야... ^^ 참 그리고 저두 저 구두 그림 엄청 보고 싶어요. 고흐가 저 구두 그림을 그릴때는 민중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많았다는데 저는 메트로폴리탄서 그 그림들이 참으로 좋았던 기억이 있어요. 하여간 요즈음 서울에 인상파의 물결이 넘치는 군요. ^^부가 정보
겨울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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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칠맛'납니다. 하지만 좋은 작품들 몇몇이 있기 때문에 가볼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는 것같아요.부가 정보
트루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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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다 스캔해서 올린것?부가 정보
겨울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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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인터넷에 여기저기 고흐 그림은 이미지로 많이 올라와있지. 그 중에 색감이 그래도 가장 괜찮은 걸 골라서 사이즈만 조정해서 올린거죠.부가 정보
2류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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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오베르와 오르세 미술관을 갔던 기억이 나네요. 실제 저 방은 햇볕이 저리 환한지는 모르겠지만, 그 마을은 온통 햇살 가득한 곳이랍니다. 오르세는 좋은 작품도 많았고, 한국에서 오르세미술관전을 보는 것과는 느낌이 또 다를 겁니다.갠적으로 짜증나는 파리에서 좋았다고 꼽고 싶은 곳이었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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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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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그렇군요. 저도 꼭 가서 보고 싶어요.^^; 정말 예술의전당 전시회는 너무 감칠맛나서 견딜 수가 없더군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