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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전, 밀레, 고흐

양재동 예술의 전당에서 하고 있는 "오르세미술관전"에 다녀왔습니다.
사실은 멀지않은 기간 안에 유럽 배낭여행을 가려고 생각 중인데, 프랑스 가서도 못보고올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갔더랬습니다.(단순한 동기;;)

몇몇 작품을 소개한 것 뿐이지만, 좋더군요. (하지만 정말 '몇몇' 작품에 불과하니, 비싼 관람료가 좀 무색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도판이나 이미지들, 모작까지도 작품들의 느낌은 커녕 원래의 색조차 제대로 못살린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왜 진품을 보려고들 그러는지 알 것같더군요.)

오르세미술관은 1848년에서 1914년까지 19세기 작품을 중심으로 소장하고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번 전시회도 19세기 작품들. 산업혁명의 시기이고 프랑스에선 1848년 혁명과, 1871년 파리코뮌을 기억해야겠죠. 그래서인지 부상하는 부르조아를 묘사한 그림도 많았고(19세기 말은 부르조아지들에게는 그야말로 Belle Epoque였으니까요, 그에 비해서 어떤 그림들은 부르조아의 호사스러운 취미와는 별로 잘 맞지는 않았을 듯한.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고흐의 "아를에 고흐의 방"이라는 작품.



그림을 보는 순간, 아, 창문을 통해 들어온 남프랑스의 햇빛이 그림에서 환하게 번져오더군요.
그 햇빛에 취해서, 한참을 가까이서 멀리서 반짝거리는 그림을 바라봤습니다.
남프랑스에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저 햇빛을 봐야겠어요.

그리고 언론에 많이 소개된 밀레의 "만종".


평론가들은 이 그림에 대해서 '종교화의 새로운 경지'라는 표현도 한다는데, 굳이 성스럽고 혹은 영적인 것이 종교와 연결될 필요는 없겠죠. 그것은 오히려 종교적인 것보다 상위에 있는 개념일 겁니다.

여튼, 작품을 보면서 그런 영적인 느낌, 정말 가슴이 울리더군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철학적 인간학이라고 비판하더라도) 인간의 본질이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이성적' 존재라고, 포이에르바하처럼 '종교적' 존재라고, 푸리에처럼 '사랑하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맑스가 말하는 것처럼 노동하는 존재라는 것, 그 속에는 육체적인 것뿐아니라 지적인 것, 더구나 영적인 것까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노동하는 인간의 신성함. 작품을 보면서 더불어 경건해질 밖에요.

작품들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참 아쉬웠던 느낌, 아니 그보다 프랑스나 유럽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이 생기더군요. 어릴때부터 지척에 있는 박물관, 미술관에서 이런 작품들을 보면서 느끼고 자랄 수 있다니.. 그런 문화적 깊이를 우리가 따라가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식민지적 감상이라해도 어쩔 수없습니다. 차이가 있는 건 있는 거니까;;)

유럽여행을 정말 간다면 암스테르담에 반 고흐 미술관은 꼭 가보고 싶군요. 특히 아래 그림.  고흐의 "한짝의 구두 a Pair of Shoes"


목사가 되려던 고흐는 복음을 전하러 갔던 탄광에서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산업프롤레타리아를 만나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그리고는 곧 목사가 되려던 생각을 접고 그림을 그립니다만.) 아마 이 신발은 고흐 자신의 것이었겠지만, 그런 경험이 녹아있겠죠. 고흐는 벼룩시장에서 새로 윤을 낸 헌 구두를 사와서는 너무 윤이 난다고 생각하고 비오는 날 신고 진흙으로 더러워진 구두를 그렸다는 일화도 있으니, 노동하는 자의 구두라고 봐도 괜찮을 듯.

오늘부터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빛의 화가 모네展"을 합니다. 다음 주에는 거기로 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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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놀이, 그리고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붉은사랑님의 [연이은 고양이 놀이] 에 관련된 글.

진보넷 블로그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고양이 놀이. 저도 해봤습니다.
내 이름으로 해보니 이런 녀석이 나오는군요.ㅋ



다른 사람들은 더 귀여운 고양이가 나오기도 하는 것같아서 좀 샘도 나지만, 이 정도면 귀엽죠.

고양이와 관련해서, 잘 알려진 단편 애니가 있는데,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彼女と彼女の猫)라는 단편 흑백 애니. 신카이 마코토, 1999년 作.
고양이를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여기 나오는 '그녀의 고양이', 비의 향기, 눈의 향기를 아는 매력적인 친구네요.




고양이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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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반자본주의


反자본주의
사이먼 토미 지음, 정해영 옮김 / 유토피아


반자본주의라는 제목의, 다소 초정세적인 자본주의 반대운동을 다룰 것같은 이 책은 그러나 최근의 정세에서 반자본주의라는 정치적 지향이 가지는 의미를 소개한다. 20세기 후반부터 다시 활성화된 반자본주의 정치적 실천들을 개괄한다. 초보자를 위한 안내서라고 하지만, 정작 정세에 둔감한 고참 활동가들에게도 매우매우 유용한 책이다.

이 책은 현재의 반자본주의는 반신자유주의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보다 내용을 정확히 반영하는 책의 제목은 '반신자유주의'일 수도 있다.) 이 점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대중운동은 이전 시기의 반자본주의 운동으로서 좌파 운동을 한편으로는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특징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운동들에, 하나의 새로운 경향들이 활성화된다.

저자는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신자유주의가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는 데서 시작한다. 특히 두 가지 관점이 눈에 띄는데, 하나는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내에서 모순으로 작동하던 하나의 경향-시장의 절대적 우위를 관철하려는 시도라는 관점.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 내부의 모순의 작동으로 제기하는 셈이다. 또 하나는, 신자유주의가 정치의 종말(혹은 후쿠야마식으로 역사의 종말)을 주장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은 곧이어, 신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정치 양식이 출현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정치'에 대해서 사고할 수 있게 해준다.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시애틀 전투로부터 눈에 띄게 전면화된 반자본주의/반세계화운동에서 사파티스타, 세계사회포럼으로 이어지는 운동의 출현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 이 운동들 속에 어떠한 경향이 있는지, 그 지형을 보여준다.

그것을 크게 개혁주의-근본주의로 나누고 그 아래의 여러 경향을 소개한다. 개혁주의 진영에는 이 운동 스팩트럼의 가장 오른쪽에 있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자유주의적 개입주의, 미국에서는 민주당식의 국제주의=개입주의니까.)에서부터 '민족주의적 국제주의'로서의 사민주의, 전지구적 사민주의 등이 소개된다. 근본주의에는 구좌파적 마르크스주의에서부터 자율주의, 평의회 공산주의, '비-정통'급진주의 조류들, 아나키즘, 급진적 환경주의 등이 소개된다.

다만 이 과정에서 다소 거친 분석은 이러한 분류기준을 횡단하는 사고와 입장들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점이 단점이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 좌파들이 모두 당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대안세계화라는 논리를 저자는 초국적 시민권+세계정부라는 구도의 지구적 사민주의의 것으로 설명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사민주의와 무관하게(그러나 초민족적 시민권에 대해서는 긍정할 것이지만)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대안을 세계화하는 국제주의적인 근본주의 운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2003년에 나온 이 책에 붙인 2007년, 한국어판 후기에서는 일관되게 '대안세계화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지구적 시민성'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언급한다.)

별도로 강조되는 것은 사파티스타. 사파티스타는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가 나타났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열광한다.) 저자는 사파티즘가 탈이데올로기 정치를 구현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어떤 거대담론을 운동의 지침으로 삼는다기 보다는 대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특히 이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제도들이 약속해왔지만 언제나 배신해왔던 대중의 실질적인 정치참여를 가능하게 하고 '자유민주주의'와 다른 판본의-그러나 더 민주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한다. (이 점은 '소수자'-정치의 논리와도 이어진다. 이 개념에 대해서는 아래  문단 참고. 그러나 저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제도화를 배제하는 것이 능사는 아닌데, 제도화없이는 오히려 목소리 큰 일부가 득세하는 등 비민주적인 상황이 초래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재의 반자본주의/반세계화 운동을 "운동들의 운동"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포괄하는 범위가 매우 넓으며 통일적인 이데올로기-강령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다양한 운동들이 만나고 상호 작용하면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존재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운동을 밀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 좌파 운동과 다르게 현재의 반자본부의/반세계화운동이 당적 구조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점, 각각의 운동을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단일한 정치 프로그램에 종속시키는 것을 거부한다는 특징으로 이어진다. (물론 모두가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운동의 단층선이 발생하는데, 저자는 다소 거칠게 이것을 ['다수자'-정치]의 논리, ['소수자'-정치]의 논리로 구분한다.)

정치의 위기와 새로운 정치의 부활에 대한 지적은 눈여겨볼만하다. 저자는 각국에서 제도정치가 위기에 처하는 상황을 분석하면서 이는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라고 지적한다.(월러스틴의 지적과 통하는 부분일 텐데, 여기서 저자는 새로운 대항정치로 더 나간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신의 승리라고 간주했던 이데올로기의 위기와 관련이 있다. 68년 이후, 그리고 구 사회주의권이 붕괴 이후 저항정치의 공백 속에서 대중들은 새로운 정치─능동적인 직접행동을 중심으로하는─을 재발견한다.
 
이런 지점들 요약해서 저자는 한국어판 후기(2007)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용해보자.
"새로이 거듭난 반자본주의 운동이란, 목소리와 현전의 정치이자 대화와 소통의 정치이고, 저마다의 꿈을 나누며 구체화하는 정치인 셈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낡은 간판을 달고 있지만 전에 없이 새로운 유형의 정치를 펼치고 있다. 말하자면 대표와 엘리트들의 민주주의가 아닌, 다채로운 무늬를 지닌 민중들의 민주의의다."

이렇게 '성장중인' 반자본주의/반세계화 운동은 성공할 수 있을까? 혹은 몇번의 시위 이외에는 너무 힘이 미약할 뿐인 것은 아닌가? 저자는 전자의 질문에는 답변할 수 없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한다. 이미 신자유주의와 함께 역사가 끝났다는 주장, '대안은 없다'는 주장들이 이 운동의 과정에서 시효만료되었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도 몰락 중이다. 더 많은 변화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

* 그런데 이 책의 말미에 왜 이재영(민주노동당 전 정책실장)씨의 글("자본주의를 넘어서-한국에서의 도전")이 실렸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재영의 글은 결론이 없는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기껏해야 현재 민주노동당의 좌충우돌과 혼란을 변명하는 논리가 될 뿐이다.
 어찌보면 <反자본주의>의 저자인 사이먼 토미도 결론이 없는 것이 아니냐고? 아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 반대 속에서 대안세계화운동으로 성장한 반자본주의 운동의 고유한 양식-성격과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지적한다. 그것은 논쟁도, 운동의 새로운 양식-성격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민주노동당 내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추상수준의 문제인 것이다. 한국에서의 반자본주의, 대안세계화운동은 민주노동당을 골백번을 들여다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을 대상으로 한 글이 그런 제목을 달고 들어가다니 참.
이재영의 글은 레디앙에도 실려있다. :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5923
 
* 글을 쓰고 나서 보니, 독일에서 아셈과 G8회의에 반대하는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이 참세상 블로그에 올라왔다. 책의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매일매일, 어느곳에서나, 세상이 예전과는 다르게 돌아가는 흐름이 지하에서부터 움직인다.
 [속보] 함부르크 아셈 반대! G8반대! 6000명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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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소금꽃나무,김진숙


소금꽃나무
김진숙 지음 / 후마니타스

 

 

이 책을 읽으시려는 분들은, 전철이나 도서관같은 곳에서는.. 읽지마세요, 낱말 하나하나에 가슴 울먹이다가, 어느 구절에선가 갑자기 울음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나오니까요.

 

 

김진숙의 글들.

하지만 김진숙은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다. 그의 글은 투쟁사든, 강연이든, 교육이든, 추도사든 그녀의 '말'의 흔적이다. 말은, 보통 하나의 순간에 명멸하지만, 그것이 가진 무게와 진실에 따라서는 순간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그리 두껍지는 않지만 낱말하나 문장하나의 무게 때문에 쉬이 읽어나갈 수 없고, 눈물과 반성 때문에 며칠을 걸려 읽어야하는 책.

 

노조가 주최하는 이런저런 교육에 조금 다녀본 사람이라면, 열사 투쟁에, 적어도 열사가 마지막 가는 길에는 함께 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 속에서 익숙한 내용의 글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장소들에게 김진숙을 만났다. 노조 간부들, 비정규직 노동자 교육들에서, 김주익, 배달호 열사의 추모식에서 만났다. 어떤 때에는 정신을 빼앗겨서 그녀의 삶과 투쟁에 대한 두시간 가까운 강연을 듣기도 했고, 열사들의 추모식에서는 정말 펑펑 울어버렸다. 창원시청 앞 광장에서 배달호 열사의 추모식이 있을 때, 한진중공업 횡횡한 도크위에서 김주익, 곽재규 열사의 추모식에서.

 

우리 노동자운동은 87년 이후, 자신의 가능성을 발전시키기보다는 90년대를 거치면서 오히려 자신의 한계 속에만 갇혀왔다. 그래서 87년을 말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전투적 투쟁을 회고하지만 과연 그 속에서 우리가 길어올려야할 진실이 무엇인지를 성찰한다기 보다는 '잘나가던 그때'를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김진숙의 글이 하나 하나 영혼에 울리는 것은, 그녀가 우리의 현재에 대해서, '잘 나가던'(혹은 지금도 잘나가고 있다고 믿는) 노동운동이 굳이 외면하거나 침묵하려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87년의 진실이 그 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김진숙은 부산지하철 매표소 비정규직노동자의 단식 투쟁에서 조수원 열사를 기억한다 .배달호 열사의 추모식에서 청소용역 비정규직노동자가 될 지 모르는 부인 황길영 동지를, 유통매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할지 모르는 두 딸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보수세력에 탄압당지만 꿋꿋하게 싸우는 전교조 선생님들의 투쟁을 소중히 말하면서도, 그들이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을 돌아볼 것을, 화룡점정할 것을 나즈막한 목소리로 주문한다.

 

이런 점들이 아니라도 책을 읽다보면, 왜 김진숙의 말이 낱말 하나하나에 가슴 울먹이게 하고, 어떤 구절에서 갑자기 눈물을 쏟게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깊은 상처를 건너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중학생 딸이 새벽신문배달로 사온 털신을 고이 간직한 어미니를 기억하는 사람, 돌아가실 때까지 '복직했냐'를 묻던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조카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사람.

   

그래서 마치, 남한의 노둥운동이 경제주의와 합의주의에 빠져서 희망은 이제 없어진 것이 아닌가 몇번이고 돌아보게 되는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침묵하거나 스쳐 지나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김진숙의 글에 영혼이 울리는 당신들이 있다면, 여전히 노동자들의 눈물의 역사는 계속된다. 그것은 끝나지 않았다.

 

"20년 가까이 초지일관 불굴의 신념만으로 버텼겠습니까? 그 폭력 앞에서 한 없이 비굴해지던, 살려만 준다면 글마들 발톱의 때라도 햝을 만큼 비굴해지던 스물여섯의 제 모습이 떠오르면 지금도 스름 끼칩니다.

오히려 그런 모습들 때문에 용기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용기야말로 얼마나 찬란한 자유인지, 뼈가 저리지요.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지지 않는 것, 그것만큼 소중한 게 또 있을까요" 239쪽

 

=====

배달호 열사의 추모제와 눈물들이, 배달호 열사 추모곡인 "호루라기 사나이"가 떠오른다.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곳(배달호 열사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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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광주를 다녀왔습니다.

지난 주말, 비오는 광주를 다녀왔습니다.

이날은 노동부비정규직지부 동지들의 광주전남지역 동지들의 모임, 교육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또 공공노조 내에서 지역운동을 강화하기위한 노력으로 조직되고 있는 "(초업종)지역지부"인 광주전남지역지부가 출범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만두겠다고 생각한 이후에 광주동지들은 꼭 만나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마침 영섭동지는 "그만두려면 광주가서 허락맡아오라"를 발언을 하기까지 했지요. 그래서 갔습니다.



그나마 공공노조의 지역본부 중에서는 운동역량이 많다고 생각되는 광주지역이지만, 어려운 것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광주시청 청소용역 조합원들의 투쟁이 두달이 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이번주에는 7보1배, 518까지 광주시내 전역을 행진하고 있습니다. 현안 투쟁도 투쟁이지만 서울'지역'에서 느끼는 것과는 또 다른 지역에서의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날, 광주전남지역지부 출범은, 1시간 전 "광주전남공공서비스지부"의 해산 총회에 이어졌습니다. 공공연맹 안에서 지역연대운동, 업종을 넘어선 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에 모범을 보였던 조직입니다. 그러나, 이어진 광주전남지역지부 출범에서 지부 임원도 선출하지 못했고, 결국 지부는 결성했지만 집행부가 공백이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광주전남공공서비스지부 임원들이 지부 해산과 함께 자동적으로 사퇴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단지 형식적인 이야기일 뿐이겠죠. 지난 집행부를 구성하면서 다음 번에는 현장에서 임원을 배출한다는 것을 전제로 활동가 동지들을 중심으로 집행부를 어렵게 구성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이제 그것도 불가능한 조건이 된 것입니다. 또한 재정적으로도 상근활동가를 부양할 수 없는 조건, 그나마 (산별전환 이전) 연맹 시절 지원하던 인력과 예산의 지원마저도 오히려 축소되는 상황..



지역동지들의 진단을 들으면서 산별노조 안에서 지역으로부터 연대운동을 강화하고, 사회운동과 접합한다는 우리의 시도가 하나의 매듭을 지났다는 것을, 이제까지의 시도들에 대해서 근본적인 반성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붕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최근 1년여 동안 노조활동을 안타깝게 중단한 지역동지들이 많았습니다만, 그것은 역시 개인들의 문제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적인 혹은 사적인 문제들은 개인에게 있어 상호작용되겠지요.)

우리는 지역일반노조와 어떤 점에서 다른 시도를 하는가, 달라야하는가를 많이 고민해왔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시작하는 운동이라면 이전에 진행되었던 시도를 평가하고, 한 걸음 더 나가야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지역공공서비스노조 운동의 몇가지 고민, 쟁점들" 참고

그러나 광주에서, 우리는그런 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산별노조(공공노조)로 전환 한 후에도 여전히 전국적인 산별노조의 지역골간인 지역지부라기 보다는 지역노조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 현실. 이 속에서는 산별교섭 혹은 산별노조에 걸맞는 운영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비정규직 조직이 많은 특성상 투쟁사업장은 언제나 끊이지 않는데, 이런 조건에서 지역노조 형태로는 지역일반노조의 한계들로 지적되는 철새형 조직화와 투쟁, 활동가를 남기는 데 있어서의 한계, 일상사업의 부재, 사회운동과의 결합의 난점.. 등을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초에 지역공공서비스노조 형태를 고민했던 주체들은, 산별연맹-산별노조가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준다면 그것을 넘어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기대한 산별노조 건설 이후에는 역설적으로 연맹 수준에서 제도적 틈새를 지속적으로 벌이면서 지원되었던 자원의 지원도 봉쇄되고 더 어려운 상황에 있습니다. (물론 현재 상황에서도 집행부가 매우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불가능하지는 않겠으나, 이미 그렇게 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그보다 문제는, 여전히 지역지부가 "지역노조"와 다를 바 없는 조직 내에 "섬"으로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아직 기업별 운영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공공노조가 가지는 조직적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만, 구체적으로 지역차원에서도 정규직 노조의 책임있는 결합도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현장 출신의 간부들이 자생적으로 성장하고 지역운동의 책임있는 활동가-임원으로 나올 것을 기대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여튼, 이런 조건이다보니 활동가들이 봉착하는 고통(운동의 전망도 전망이지만, 아, 누가 그들의 '고통'에 주목할 수 있을까요!)은 만만치 않습니다. 서울과는 또 다르게 제가 느낀 것은 지역의 활동가들이 대중들과 가지는 정념의 거리가 매우 좁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조합원과 정서적으로 깊이, 직접적으로 교감한다는 것을 뜻하고 또 한편으로는 필요한(?) 거리를 확보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에 비해서 서울에서는 조직과 활동가의 규모가 더 크기 때문에 좀 더 제도화되어 있고, 투쟁 시에도 조직 내 시스템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강하고, 따라서 필요한 거리를 유지하는 데 용이합니다.)

현장의 구체적인 조합원들에 대한 애증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서울지역의 활동가들에게선 보기 쉽지 않은 모습입니다. 지역운동이 봉착한 한계 속에서, 그 때문에 멈칫거리는 대중들을 항상 직접적으로 교통하면서 정념의 거리가 매우 좁아진 활동가들이 느끼는 정신적 고통이란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제가 갖고 있는 문제가 그것들과 얼마나 관계되어 있는지는 저도 가늠하기 쉽지 않습니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나의 고통의 일부임은 분명하지요. 우리가 가졌던 희망 혹은 미망을 평가하고 무언가 현재 봉착한 벽을 돌파할 가능성을 찾지 않으면 더 많은 지역 활동가들이 더 어려운 조건에 처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보입니다. 그 징후는 지역에서부터, 열심히 활동하던 활동가들로부터 이미 시작되고, 진행되고 있는 중이라는 점에서 심각합니다. 저 역시, 이 과정에서 붕괴중이기 때문에(그래서 쉬려는 것이지만) 할 말이 많지는 않지만 말이죠. 다만 그들과 함께 그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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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조직되는 대중들은 거의 대부분 비정규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따라서 앞으로 노동자운동의 모습이 어떨지를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을 다시 한번 느끼는 오늘 집회의 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공공부문비정규직 집중투쟁 기간의 일환으로 진행된 노사발전재단분회 집회가 있었습니다.

집회에서 발언한 한 조합원의 말이, 오늘 서울에서 오래된 고등학교 동창을 십년 만에 만났답니다. 오전 집회에서 말이죠. 바로 KTX 승무원으로 투쟁하고 있는 조합원이었습니다.

오랜된 친구를 만나도 비정규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규채용이 비정규직 이상,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그리고 이 동지들은 서울경인공공서비스지부, 공공노조 안에 지역노조 형태의 지부에 속해 있습니다. 이 동지들이 노조가입을 상담했을 때, 이들의 투쟁을 지원하고 조직적으로 담보할 수 있는 공간은 지역지부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이어진 집회는 학교비정규직 지부의 투쟁이었는데 이 역시 지역지부로 통합을 논의하고 있는 단위입니다.

이런 조건은 분명한 하나의 경향을 보여줍니다. 지역연대운동을 중심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투쟁하고 있고.. 이것이 분명한 현실의 경향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존 노조운동의 지원과 결합이 여전히 난점을 겪고 있는 가운데 조직이나 활동가 개인이나 어려운 조건이라는 것. 특히 조직과 운동을 지키기 위해서도 자리를 지켜야할 활동가들이 가장 고통받고 좌절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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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내일의 기억 明日の記憶


내일의 기억(明日の記憶)

 

 

아래 포스트에 달린 '손님'의 댓글을 따라서 본 영화. 기억이나 불치병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많지만, 진부한 소재들을 진부하게 반복하지 않고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배우들의 연기가 영화를 더 단단하게 밀고갔다. 눈물을 흘리게 하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슬픔을 건드리고, 엔딩이 매우 인상적인 영화.

 

영화에서 두 사람의 이별은, 주인공이 상대에 대한 기억을 잃는 순간, 그래서 만나는 순간, 그 시점 이전으로 돌아간 순간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별은 마치 사랑 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사랑 전에, 과거의 일처럼 느껴진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타임리프를 탄 것처럼. 하지만 원하는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돌아가더라도 항상 너무 적게 혹은 너무 멀리 돌아가기 때문에 시간은 우리가 길들일 수가 없다.

 

사랑이 시작될 때처럼 이별도 각자에게 비동시적인 사건들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상호 동의하는" 이별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것일테다. 알츠하이머병 때문에 두 사람에게 사건은 비동시적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끝내 이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의 책임도 아닌. 따라서 주인공들은 그것을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아래 손님의 언급처럼,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변의 사람들에게나 사물에 남긴다. 영화는 그것을 하나씩 보여준다. 기억이 소멸할 때, 오히려 익숙했던 것들이 익숙하지 않게 되는 순간 드러나는 그 흔적들(의 도드라짐)을 통해서 감독은, 우리들 모두가 가지는 의미가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기억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아픈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는 것도. 각자는 서로 교통하면서 모두의 영혼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당신의 기억이 소진될 때, 나의 영혼이 아플 수밖에 없다.

 

* 좀 더 자세한 영화 소개는, 씨네21 이동진의 글이 친절하다.

 

(나도 요즘 며칠간 지금 하는 활동을 쉬는 일을 고민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어려운 시간들에 따뜻하게 관심가져주고 있는 동지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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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quot;육군수첩&quot;에 대한 트랙백

자비님의 [일기] 에 관련된 글.

위의 글을 읽다가 오랜만에 군대생각이 났다. 26개월. 논산에서 훈련받고 철원 6사단, 최전방 사단에서 육군, 90미리 무반동총 소대에서 복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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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는 가장 끔찍한 기억이다. 물론 지금도 만만치는 않지만.
특히,
훈련소는 그렇다. 위의 글에서도 느껴지는 것처럼.

나에게는 낡은 "육군수첩"이 하나 있다. 그런 걸 보관하는 이유는, 내가 첫번째 면회를 하기 전까지,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는 공간인 입소대, 훈련소와 첫배치받은 부대에서 스스로와 대화하기 위해 작성한 글들이, 정말 깨알같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혀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나는 매일 밤, 화장실에서 몰래 글을 썼다.민중가요를 잊지 않기 위해서 생각나는 모든 노래를 적었고, 매일 일기를 썼다. 반공교육 교재에 나오는 한총련 출범 선언문을 배껴적었다.('교재'에서 배껴쓴 94년 슬로건; "자주의 시대, 그 길에 빛나는 백만의 영광, 미국반대 김영삼타도의 자랑찬 성전에서, 통일조국 건설로 내달리는 청춘은 승리한다", 이건 아직도 똑똑히 기억난다.)

아마 그것도 없었다면그 공간에서 나는 미쳐버렸을 지도 모른다.

수첩을 "보급"받은 날은 입대 3일째 되는 날부터. 이날의, 며칠의 일기. 어쩌면 유치하지만 가장 솔찍한.

나는 1995년2월28일 육군 논산훈련소, 28교육연대 제5교육중대에 입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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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째] 지루하다. 불안하다. (중략) 오늘부터 민가가사를 적기 시작했다. 지금도 몇개씩 틀리는 것이 잊고 기억안나는 것도 있다. 점점 더 잊어먹겠지. 빨리 기억에서 지워지기 전에 써야지. 그래도 오늘은 삼일절이다. 이런 글 쓸 정도의 여유라도 있다. 이런거라도 계속 쓰니까 시간은 간다. 갑자기 앞일이 막막하다. 그래, 오기 전 생각으로 지내야지. 가볍게 생각하자, 겨우 2년이다. 금방 갈거다. 제대해서 웃는 얼굴로 동지들을 다시 만나자! 아, 지금도 검은 창살아래 박노해, 백태웅, 수많은 구속수배 노동자들. 사회와 격리되고 운동과 격리되고 의미없는 하루하루를 소모할 수밖에 없는 동지들. 치열하게 자신과 싸우는 그런 동지들이 있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나은 편이겠지. 돌아가자, 살아서 돌아가자.

[4일째] (중략) 시를 외우기로 했다. 지금 갖고 있는 건 "썩으러 가는 길" 뿐이다. 다음에 편지하면 용운형과 명진이 형한테 시좀 프린트해서 보내달라고 할 생각이다. 일단 있는 것부터 외워야지. '민들레처럼', '강철은 따로 없다', '전사2'가 먼저 보고 싶다. 그 외에도 몇가지. 고 김남주님의 '시의 요람 시의 무덤' 등등등. 빨리 편지 쓸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나는 왜 언제나 최상의 조건만을 요구하는 지.. 나보다 고생하는 친구들은 많은데.  (중략) 그리고 오늘 새로온 친구들을 갈궜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고 그러다니, 고참되어서 남을 괴롭히지 않을까 걱정이다. 반성하자. (후략)
*가장 치욕스러웠던 순간 : '복무신조'라는 것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개소리 나올 때와 애국가를 부르라는 데 '동해물과~'가 나올 때. 이 치욕.

[일주일후-주특기배치후] '낙관적이라고 해로울 것은 없다. 나중에 실컷 울어도 늦지 않으니까" 리더스다이제스트에 95년2월호에 나온 말이다. 정말 좋은 말 같다. 정말 낙관적이라고 해서 손해볼 일은 없으니까.
군의 정신교육기능 중 하나로, 저들이 말하는 것이 국군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수호하지 않으며 오직 '자유민주주의'만을 수호한다는 것이다. 저들은 자신들 부르조아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같다..(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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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이후 26개월 동안 어쩔 수 없이 군가 몇곡을 부른 적은 있어지만 한번도 '애국가'와 '멸공의 횟불'같은 것은 부르지 않았다.(물론 지금도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다.) 그대신 눈밭 겨울 100km 행군 중에 '녹슬은 해방구', '빨치산의 밤'을 혼자서 불렀다.

그런 시기를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어쩌면 더 나약한 지도 모르겠다.
10년도 넘은 수첩을 다시 펼쳐보면서, 오늘의 나를 돌아본다. 오래된 내가 나의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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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 세미나가 열리는군요.

호호, 관심있는 주제들도 있으니 몇몇 세미나는 참석하고 싶은 맘이 듭니다. 어차피 좀 널널해질 것같으니;;
강좌라기 보다는 말 그대로,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세미나 형태라고 하네요.

저는 사회운동에서 교육방식은 보다 토론에 기반한 대중의 자기교육이어야한다고 보는데, 이런 식의 학습이 확산되었으면 합니다. 노동자운동에서도 노조교육들이 너무 천편일률적으로 일방적 강의들로 이루어지는 데, 노동자들도 자기교육을 통해 스스로 주체화하는 과정이 더 의미있다고 생각.

여튼, 아래 내용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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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만, 삶의 노래, 노동의 구체성

연영석.

 

김성만을 제목으로 한 글 머리에 왜 연영석이 등장하는가? 나는 연영석을 잘 모른다. 그러나 예전에 사회진보연대 기관지에 실렸던 인터뷰 하나를 보고 팬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제 노래고 불안정한 삶을 사는 노동자의 노래입니다)  노동현장의 문화운동, 노래운동이 노조에서도 단지 '선동'이 아니라 하나의 지적인 공간, 창작으로 발전 되어야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분절되고 좌절하는, 젊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을 표현하는 방식의 노래를 제기하는 것에서 놀라웠다. (그것도 대공장집회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포장된) '단결투쟁'만을 외칠 것이 아니라 그 젊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구체성을 어떻게 제기할 것인가.

(아래 연영석 동지 이미지 출처는 네이버블로그 eticform)

 

비정규직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복수다.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외치지만(나는 이 구호를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사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조차도 모두 다양한 조건에서 자기 문화를 가진다.(앞서 연영석이 인터뷰에서 강조한 내용이기도 하다.)

 

내가 최근에 만나는 비정규직 동지들은 어떤가. 오늘 조합원 모임을 진행한 도시철도공사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중년의 여성노동자들이다. 엊그제 모임을 진행한 노동부비정규직노동자들은 30대 초중반, 낼모레 함께 투쟁선포기자회견이 예정된 노사발전재단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스마트한' 20대 후반의 청년노동자들. 430집회에서 만난 고려대 미화 조합원들은 중년이라기보다는 노년의 여성노동자, 오늘 노동조합을 결성하겠다고 상담차 찾아오신 환경미화원은 중년의 남성.

 

이들을 모두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묶는 만큼, 이들 각자가 가진 삶의 구체성을 존중하면서, 우리는 각자를 주체화하고 연대를 조직할 수 있을까.

 

자본의 추상화, 노동의 구체성

 

사실 이 개념(자본의 추상화, 노동의 구체성)은 정치경제학 비판의 것이다. 자본의 운동이 추상노동이 생산하는 가치와 잉여가치로 표현되는 반면, 노동자가 노동력을 지출하는 과정은 유일하게 현실적인 노동, 즉 구체노동으로서 나타난다.

 

이 속에서 우리는 현실에서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을 떠 올릴 수 있다. 자본은 언제나 추상적인 어떤 힘, 기껏해야 자본의 대리인에 불과한 사장과 같은 '것'(자본가의 본질은 인간이 아니라 추상적 사물이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언제나 구체적인 삶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개인들의 집단이다. 물론, 그들이 '반역'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문화'의 일부이자 효과, 결과로서 이데올로기.

 

 

김성만, 삶의 노래

 

김성만은 거칠다. 그가 만든 노래도, (죄송하지만) 그의 노래 실력도 역시 그렇다. 연영석과 마찬가지로 김성만도 투쟁사업장에 공연보다는 '연대'하러 다닌다. 그래서 가난하다. 삐까번적한 큰 무대에는 부르지 않는다. 맥빠진 민주노총 집회에 섭외가 안될 때 불러도,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는 곳에서 소리를 지른다.

 

나는 오늘 도시철도공사비정규직 조합원들의 교육을 하는 김성만 동지를 보고, 또 한명의 동지에게 반했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어쩌면 하층문화, 그 속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삶의 진실을 길어올리는 모습을, 불과 몇십분 동안에 노래교육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연영석이 젊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삶의 분절성을 노래한다면, 김성만은 나이든 노동자들이 팍팍한 삶과 그 속에서 희망을 노래한다.

 

그가 직접 쓰고 오늘 노래한 "까대기"라는 곡. 악보 밑에는 "까대기란 여성의 유통노동자들이 박스에 들어 있는 물건을 풀어 진열대에 차곡차곡 쌓아 정리하는 것을 뜻함"이라고 씌여있다. 유통여성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하면서 만든 곡이라고 한다. "경괘한 뽕짝"이다.

 

세상에 포장을 뜯어  널 부러져 흩어진 것들 / 높은 곳에 차곡차곡 낮은 곳에 가지런하게

날 때부터 비정규직 울 때부터 차별을 받는 / 정해져서 바꿀 수 없는 그런 노동이 아냐

우리가 차곡차곡 우리가 하는 거야 / 노동이 아름답게 다시 쌓아야 해

우리가 하는 거야 우리가 힘을 모아 / 세상을 다시 한 번 까대기 하는 거야

다시금 사랑으로 다시금 희망으로 / 우리가 힘을 모아 함께 가는 거야

땅위에 하늘아래 차별이 없는 거야 / 사람이 사람답게 아 살맛나는 세상 (가사전체)

 

오늘 함께 한 도시철도 비정규직 조합원들과 신나게 불렀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구체적인 노동 속에서 대안세계를 노래한다.

 

지금 투쟁하고 있는 울산과학대와 광주시청의 여성비정규직노동자들과 연대하면서 만든 곡, "청소아줌마"라는 곡도 있다.

 

..쓰레기를 치우다 내가 쓰레기가 되었다.. 억장이 무너지고 너무 울어서 눈물이 말라버렸다... 청소만하다가 내가 청소되었다...내가 살아서 알몸뚱이로 분노에 벌벌 떨었다...(가사 일부)

 

울산과학대, 광주시청의 투쟁을 접한 사람들이라면 노래의 가사가 어떤 울림을 갖는지 알 것이다. 김성만은 그 울림을 노래로 공유하자고 한다. 아프지만, 조합원들이 같은 장소에서 함께 노래하고 하나되는 것처럼 먼 곳의 투쟁하는 비정규직노동자들과 공유할 수 있게, 노래로. 그 이야기를 이제 처음듣는 수천리밖에 있는 노동자들이 서로 공감할 수 있게. 노래로.

 

김성만은 겸손하게도 자신이 만든 '비정규직철폐연대가'가 '비정규직의 아픔을 그때까지는 잘 몰라서' 책이나 문서를 읽고 썼다고 했다. 그래서 다소 추상적이기도 한 '비정규직철폐연대가'는, '청소아줌마', '까대기' 때문에 더 빛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집회에서는 잘 포장된 '비정규직철폐연대가'만 연신 방송된다. 맥빠진 민주노총 메이데이 집회서 조차. 그것이 맥빠진 이유는 '청소아줌마'와 '까대기'의 삶의 구체성을 폄하하고 결코 노동절에 부르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노래 : 대중의 반역을 위해서.

 

대중은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의 반역이 결합될 때 혁명에 나선다. 착취의 모순이 자동적으로 이데올로기적 반역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신자유주의 최근10년의 경험을 통해서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데올로기의 반역을?

 

김성만과 연영석은 대중의 구체적 삶을 노래로 서로 교통하자고 제안한다. 서로 주목하는 세대는 다르지만 말이다. 서로 다른 비정규직 대중들이, 서로의 구체적인 삶의 고통을 노래를 통해서 교통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경험이 가지는 보편성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이 새로운 주체화의 시작이 아닐까. 하나의 대공장에 모여있는 노동자들과는 달리 분절되고 흩어진 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는 삶의 구체성을 함께 할 수 있는 문화적 매개가 필요하다.

 

연영석이 인터뷰 말미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저는 다른 민중가요 가수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음반은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을 위한 음반이다. 네가 주로 가는 현장에서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렇게 말이죠."

 

삶의 구체성, 운동의 구체성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최근에 그 동안 활동하던 노조에서 활동을 곧 그만두고, 쉬고,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주변의 동지들과 많은 이야기를 더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마도 그렇게 결론을 낼 것같다.

 

지난 시간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아주 잠깐씩 이런 계기를 통해서 돌아보게 된다. 나는 현재의 활동에서 얼마나 노동자들의 삶의 구체성에 접근하는 운동을 했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공간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삶의 구체성에 어떻게 다가가고 인식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지금처럼, sur le quai, 길이 끝난 곳에 서있을 때, 혹은 어디에 서있는지조차 혼란스러운 거리 한복판*에서 길을 잃을 때, 그것을 다시 생각한다.

 

 

[보너스 이미지]

==== * 아래는 언급한 그 "혼란스러운 거리 한복판"

*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거의 마지막 부분의 장면. 시간이 정지한 거리 한 복판. 치아키가 남겨지고 마코토는 인파 속에 사라진다.

 

 * 윗 장면이 나오기 직전. 예정된 사고를 결국 막지 못하고 "기진맥진 상처입은" 치아키. 다 소진한 줄 알았던 마지막 타입리프 단 하나,가 남아있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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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선거는 민주적인가


선거는 민주적인가
버나드 마넹 지음, 곽준혁 옮김 / 후마니타스


한미FTA를 생각해보자 한미FTA를 추진하는 노무현에게 우리는 그 권한을 위임한 적이 없다.
그럼 노무현은 할 수 없는가?  죄송하지만 할 수 있는 권한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왜? 선거를 통한 대의제가 대표의 자율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한미FTA 국민투표는 따라서 선거 대의제와는 다른 민주주의 모델을 사고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 책을 통해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선거는 민주적일 수도 있지만 선거가 민주주의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거는 민주주의와는 별로 상관없는 별도의 제도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민주주의 제도의 핵심으로서 선거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발생한 제도이고, 선거가 민주주의를 담보하지도 않는다는 것.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오히려 추첨제도가 민주주의에 근접할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선거는 귀족정의 것으로, 추첨은 민주정의 것으로 사고 되었다. 추첨을 통해서는 누구나 공직에 접근할 수 있고 관직을 평등하게 교체할 수 있다. 추첨이 작은 공동체에만 가능한 것도 아닌데, 추첨제도와 부분적인 선거, 자격조건을 혼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테네 폴리스의 예를 보면, 직접민주주의는 오직 작은 공동체에만 가능하다는 것은 선거로 구성된 대의제도를 절대화하기 위한 신화에 가깝다.)

또한 이러한 제도는 '전문가'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는다. 엘리트의 배타적 지배를 막는 효과가 기대되었다. 이것은 지적 차이가 권력이 되는 사회를 방지하고, 오히려 지식을 권력의 문제와 무관하게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을 만든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이러한 제도는 '평등'에 대한 자본주의 사회의 이해와는 다른 이해를 발전시킨다. 추첨과 자발성의 결합이 (정치적) 평등이라는 것이다. 결과의 평등 혹은 기회의 평등이라는 개념 구분과는 전혀 다른 평등개념인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평등 개념의 새로운 가능성을 사고할 수 있다. (물론 이 자발성이란,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지적, 경제적 독점을 배제하는 장치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정치적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이나 생계때문에 정치에 개입할 수 없는 시민은 정치로부터 '자발적으로' 배제되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선거는 귀족정에 적합한 것으로 사고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근대초기에도 마찬가지어서, 이탈리아의 공화제 도시국가에서도 추첨이 널리 사용되었다. 루소는 "추첨에 의한 선발은 민주정의 본질"이라고 말하고 선거는 귀족정에 적합하다고 쓴다. 귀족정은 시민들 사이의 차이와 구별이 자유롭게 나타날 수 있는 그런 체제이다. (따라서 현대 자본주의-대의민주정 사회도 귀족정에 가깝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17~18세기를 지나면서, 선거가 가진 정치체에 대한 정당성 부여라는 효과 속에서 선거제도는 민주정에 필수적인 것으로 이해되어간다. 영국(청교도)혁명과 미국독립전쟁이 특히 중요한 정치적 계기가 된다. 새롭게 구성된 정체에서, 정당성의 확보는 필수적이고, 선거는 여기에 유용했다. 또한 미국 헌법 논쟁은 선거의 의미를 더 확장한다. 통치에 우월한 자를 선정하는 데 선거가 유용하다는 것이다. '민주적 귀족정'이라 불릴 만한 것이 출현한다.

한편, 이러한 선거제도와 함께 확립된 대의제에서 여론의 자유는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선거로 선출된 대표가 자율적 판단을 허용받았기 때문에 인민에게는 '여론'을 형성할 자유가 주어졌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보가 공개되어야하고,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의 표현이 가능해야한다. 이 '의사표현'은 개별적인 것은 물론 집단적인 것을 포함한다.

대의제도는 정당정치 속에서 변형된다. 대표를 선출하는 투표행위는 소속감을 반영하는 행위가 된다. 특히 서유럽에서 계급정당의 발전은 투표행위는 계급공동체나 종교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하는 행위로 변형된다. 투표는 소속감과 정체성의 문제가 된다. 정당정치 속에서 '대표의 자율성' 혹은 '의회 내 토론' 과정도 제한된다.

저자는 최근의 경향으로 '청중민주주의'라는 것을 제시한다. 정당보다는 신뢰받는 개인, 미디어 선거, 여론조사의 영향력확대 등등이 요소이다. 저자는 이것이 인민이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방식으로 서술한다. 이 과정은 최근 각국에서 (특히 계급에 기반한) 정당정치의 약화, 인민주의의 확산과 궤를 같이 한다.

저자가 '청중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것의 한 경향인 인민주의 정치로 노무현 정권은 탄생했다. 그 정권은 대의제의 맹점인 권력의 위임을 극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대의제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통치에 대한 정보의 공개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고(한미FTA 협정문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여론의 형성과 정치적 의사의 표현도 봉쇄하고 있다.(집회/시위의 원청봉쇄, 방송광고 봉쇄 등등까지) 이를 통해서 노무현 정권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선거제도의 한계와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해서 다른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컨데 '민주주의'가 '선거'는 아닌 것이다.

이 책은 '선거'를 역사적으로 고찰할 수 있게 함으로서 그것이 민주주의와 갖는 제한적 관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것은 선거를 절대화하고 맹목하는 것을 넘어서 민주주의 자체를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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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노동조합과 같은 대중조직에서 선거는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정치체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와 똑 같은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조직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대중적 권위를 부여하고, 대중이 신뢰하고 이들을 따르도록하는 헤게모니를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민주주의'는 아니며, 따라서 다른 민주주의를 담보할 수 있는 제도들이 도입되어야한다. (일부 공직에는 추첨이 이용될 수도 있다. 자발성과 결합하여, 평등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조합원 발의, 대표소환, 중요한 결정에 대한 조합원 투표가 보장되고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남한의 '민주노조' 운동에서 모든 노사합의사항은 '잠정합의'로서 조합원 찬반투표를 거쳐야하는 것과 같은 관행은 직접민주주의가 노동 현장에서 '발명'되었던 87년 민주주의 투쟁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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