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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시간을 달리는 소녀 (時をかける少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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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달리는 소녀 (時をかける少女) 

2006년작 애니메이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어 호평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SF 혹은 그냥 판타지의 성격을 띄기도 하지만 , 소녀의 성장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 듯.
 
주인공 콘노 마코토(소녀)는 우연한 기회에 타임 리프(시간을 뛰어넘는 것)를 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훌륭한 SF, 판타지들이 그렇듯 그것은 하나의 설정.
 
콘노는, 몇번이건 시간과 사건을 반복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시간과 사건을 자유자재로 반복할 수 있는 가운데, 시간과 그것과 연결된 사건은 유일무이하고, 단 한번, 그래서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이 작품에서 시간은 항상 사건과 연결된다.) 가장 소중한 시간-사건은 그 많은 반복가능한 시간-사건 속에서 다만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하나의 시간, 그것이 가장 소중하다.
 
이 영화에서는 그것은 미래에서 온 소년, 치아키와 마지막 순간. "미래에서 기다릴게"
 
 
이 영화는 소녀의 성장소설, 애니이라는 점에서 하야오의 <귀를 기울이면>을 떠올리게 한다. 소녀의 성장소설, 하지만 어떤 때엔 이미 지난 것처럼 보이더라도 여전한 사람의 마음, 꿈들에 대해서 다시 두근거리게 하는 작품들.
 
<귀를 기울이면>의 이 장면에서 함께 부르는 <컨트리로드>는 정말 명곡. 동영상을 구할 수 있는 분들은 꼭 보시길. 애니메이션 최고의 명장면과 OST.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찾은 시간의 의미. 우리는 굳이 타임리프가 없더라더라도 사건과 시간들을 수없이 반복한다. 마치 굴레 속에 있는 것처럼. 하지만 콘노처럼, 단 하나의 사건-시간의 의미를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야 겨우 알게 된다. 그것이 비가역적인 시간 속에 사는 우리의 운명.
 
이 영화의 멋진 주제가.  ガ-ネット
 
그라운드를 달리는 그대의 뒷모습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보다도 자유로워
노트에 나란히 쓴 네모난 문자마저
모든 것을 비추는 빛으로 보였어
좋아한다는 이 마음을 알지 못해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이 시간이
그 의미를 나에게 가르쳐줬어
그대와 지낸 나날을
이 가슴 깊이 새겨두자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괜찮게
언젠가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다 해도
당신은 영원히 특별하고 소중하고
또 다시 이 계절이 돌아와
끝없는 시간 속에서
그대와 만난 일이
무엇보다 날 강하게 만들어줬어
나도 모르게 달려온 내일을
맞이했다고 해도
당신은 영원히 특별하고 소중하고
또 다시 이 계절이 다가 와
언제까지나 잊지 않겠다고
그대가 말해준 여름
시간이 흘러가 이제 와서 난
눈물을 흘렸어
그대와 지낸 나날을
이 가슴 깊이 새겨두자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괜찮게
언젠가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다 해도
당신은 영원히 특별하고 소중하고
또 다시 이 계절이 돌아와
 
그래, 그래, 시간은 그런 것.
소녀, 힘껏 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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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루시드 폴,The Light Of Songs (노래의 불빛)

 

Lucid Fall (루시드 폴) - The Light Of Songs (노래의 불빛)
루시드 폴 (Lucid Fall) 노래 / 만월당

 

이 블로그 오른 쪽 위에 있는 프로필 이미지는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 2004년 앨범 표지이다. 루시드폴이 자신의 라이브공연 앨범에 붙일 '노래의 불빛'이라는 제목을 생각해낼 때 아마 머리속에 떠오르지 않았을까. 공통점이 거의 없어보이는 두 앨범이지만 말이다.

 

루시드폴의 이제까지 세장의 앨범에 실렸던 곡들 중에 공연에서 불렸던 스무곡이 두장의 시디에 실려있다. 공연실황이라 녹음이 아주 깔끔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맛이 있고, 맘에 드는 좋은 곡만 모았기 때문에 듣기에 편하다. 가슴에 남는 곡들. 공연에 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루시드폴을 처음 안 것은 1집 후에 나온 <버스, 정류장>이라는 영화의 OST를 통해서였다. 지금 생각해도 가장 듣기 좋은 음반이다. 영화도 좋았다.

 

영화에서 테마였던 곡은 Sur Le Quai 라는 연주곡, 불어인데 영어로는 On the dock 라는 뜻이라고한다. 그래서, OST 표지에서나 뮤직비디오에서 시디표지와 같은 이미지가 사용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도 하다.

+ 음악듣기 link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실 <버스, 정류장>의 '정류장'이란 어쩌면 dock였다면 더 의미가 어울렸을지 모를 상징이다. 그래서 이 시디표지의 이미지는 너무 친절해서 약간 억지스럽다. 작품이 영화가 아니라 시였다면 '정류장'보다는 dock 였을 것같다. 그렇게 음악에서는 dock. 각각의 장르가 가진 고유한 가능성과 한계들.

 

dock은 땅의 끝, 걸어갈 수 있는 마지막 곳, 길이 끝나는 곳, 만나는 곳,헤어지는 곳, 알수없는 어딘가로 열린 곳...이기 때문이다. 가사가 없이도, 가사가 없는 것이 그래서 어울리는 곡.

 

아래 어느 포스트에서 내가 '길'의 이미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앨범을 BGM처럼 계속 듣는 이유는,

그런데 요즘 내가 서있는 곳은 길보다는 dock이 아닐까. 저 이미지에 뒷 모습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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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2007년 예산과 사업계획이 말한다.

[근조] 허세욱 동지의 명복을 빕니다.  한미FTA저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분쇄!

 

지난 번 민주노총 1차 중앙위원회가 성원부족으로 한번 진행되지 못한 이후에, 두번째 열린 중앙위에서 대부분의 안건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통과되었다. 그 중에는 "마땅히" 논란이 되었어야하는 내용이 상당히 많았다. 특히 비정규직 사업과 관련한 부분들이 그랬는데, 또 한번 유회에 대한 부담때문이었는지, 이 역시 토론없이 통과되었다. 이 안건은 며칠후인 4월19일 예정되어 있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 그대로 상정될 예정이다.
 
얼마전에는 민주노총이 주최한 가운데 비정규직 사업에 대한 의견수렴을 위한 토론회가 대영빌딩에서 열렸다. 나는 일정이 겹쳐 가지 못했지만, 참가한 동지들이 전하는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민주노총의 '비정규사업 계획'이라는 것 자체가 부재했다는 지적부터, 많은 동지들의 문제제기에 대해서 일단 들어봤다는 명분을 쌓기 위해서 자리를 마련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럼, 지난 3월15일 진행되었던 민주노총의 중앙위원회 회의자료(이 내용은 4월19일 예정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도 대부분 그대로 반영될 예정이다)에 나타난 민주노총 사업의 문제 몇가지만 짚어보자. 나는 예산을 먼저 보자고 제안하는데, 대부분 골치아픈 숫자에 그냥 지나치는 예산안에는 조직의 사업방향이 객관적으로 녹아나있기 때문이다.
 
미조직사업비 0원
 
자료집 300쪽, 민주노총 2007년 예산안 지출부 세부내역 "미조직사업비" 0원, "전략조직사업비" 0원이 '당당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로서 민주노총의 비정규직 사업비는 2006년 4천3백여만원에서 2007년 2천1백여만원으로 반 이상 삭감되었다. 일반 사업비중 비정규실사업비로 배정된 금액은 0.3%에 불과하다. 그래도 지난 집행부들은 말로는 비정규직 사업을 외치고 예산이라도 증액하지 않았나..
 


왜 이런 결과가 생겼는가? 자료집 293쪽에는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비정규사업비는 실제 1천만원 정도 증가했으나 전략조직화 사업과 연관된 부분은 비정규기금(50억기금)에서 집행하여 지표상으로는 3천만원 정도 감액된 것으로 표시됨"

문제제기가 있을 것으로 예상해서 넣은 설명일 것이다.
 
결국, 일반회계에서 집행되어야할 비정규직 사업비를 "전략조직화"를 위해 모금한 50억기금(실제로는 1/3정도 모금에 그쳤지만.)에서 집행한다는 것이다. (전략조직화 외에도 미조직사업비 일반까지 말이다.) 그렇다면 50억기금은 어떻게 되는가? 2단계로 활동가를 충원하기로 한 계획은 폐기되었고, 특수고용 등에 대한 조직화 계획은 없게 되었다. 기존 활동가들이 퇴직할 경우 충원도 없기 때문에 실제로 전략조직화 사업은 축소된다.
 
전략조직화 사업의 방향에 대해서 논란이 있지만, 그래도 의미있게 정규직 노조의 자원을 동원하여 비정규직노동자를 조직하고자한 시도였다.
 
이에 비해서 늘어난 금액은 무엇인가?
각 특위장 활동비는 2천만원이 증액되었다. 교육원 사업비 1억3천, 홈페이지 등 미디어사업 8천, 기념행사 7천 등이 크게 증액되었다.
 
기존 예산도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많다. 특위장 활동비가 늘어난만큼 특위사업비를 보면, 통일위원회 사업비가 7천3백만원으로 전체 특위 사업비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정치/여성/노동안전 등은 2천만원 대에 불과하고 사회공공성강화위는 5백만원 수준으로, 지난해에 비해서도 2백만원 삭감되었다. 압도적으로 통일사업에 방점이 찍혀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일위원회 사업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교류협력사업비로, 아리랑 및 백두산 통일기행 참가비, 615방문 대표단 참가비 같은 것들이다.
 
연대사업비의 경우를 보자. 연대사업비 총액 7천4백의  1/2 정도인 3천6백만원이 "한국진보연대" 사업에 배정되어 있다. 이에 비해서 다른 민중운동, 사회운동과의 연대사업비는 모두 합쳐도 1천만원대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작년에도 1억원 가량을 쓴 것으로 알려져 문제가 되었던 11월 전국노동자대회는 7천만원의 행사비가 배정되어 있다. 남북노동자대회 행사비도 4천5백만원이 배정되어 있는데, 5월1일 행사비 2천만원에 두 배가 넘는 금액이다. (아마 이번에 영남권 대회로 한다는 축구대회 예산이 이 것인가 보다.)
 
여튼, 이런 상황에서도 비정규실 사업계획에는
 - 기금 목표액인 50억 모금 사업이 현재 모금액의 33% 수준에서 머물고 있는 현실이다. 기금 모금 100%를 달성하기 위하여 의결단위인 중앙위. 대의원대회 등의 재 결의를 추진한다.
라고 되어 있다. 실소할 수밖에. 무슨 근거와 명분으로 기금 재결의를 요구한단 말인가?
 
“사회적 일자리 창출사업”?
 
다른 사업도 문제가 있는 것들이 있지만, 굳이 이야기해봐야 손가락만 아프니까 넘어가자. 이런 한편에, 민주노총 사업계획 중에는 이런 부분도 있다. 이게 민주노총에 나온 문서라는 게 눈을 의심할 정도다. “고용안정센터사업” 중에 보면,
 
3) 사회적 일자리 창출사업
(1) 사업취지
- 정부의 사회적 일자리 사업에 적극 결합하여 내실을 기한다.
- 자립이 가능한 모범적 사회적 일자리를 창출한다.
(2) 사업내용
① 사회적 일자리 사업 점검
-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회적 일자리 사업을 조사.점검하여 발전방향을 세운다.
- 실업운동단체들과 지역에서 사회적 일자리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도록 전략적 대응방안 을 모색한다.
② 노동부 사회적 일자리 사업 공동 제안
- 사회적 일자리 사업 아이템을 모색․개발하여 전국단위의 사회적 일자리 사업, 또는 광역단위 사회적 일자리 사업 추진한다.
 
거 참참참. 노동부에 ‘사회적 일자리’ 사업을 공동으로 제안한다는 부분이 압권이다. ‘사회적 일자리’ 사업은 사회서비스를 시장에 맡기는 것이라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외국의 ‘사회적 일자리’와 또 다르게 사실상 정부 주도로 사회서비스 시장을 사적자본에 열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업이다.
 
또한 이 일자리에는 고용되는 노동자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예산이 책정된 상태에서 기본적인 노동3권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예를 들어 노동부는 자활사업 참여자들에게 노동조합을 만들 권리마저 부인한다. 게다가 정부의 이른바 ‘비정규보호법안’에는 기간제 사용기간제한의 예외로 아래의 일자리가 명기되고 있다.( ‘공공부문비정규직종합대책’에도 거의 같은 구절이 들어있다.)
 
제4조【기간제근로자의 사용】
① 사용자는 2년을 초과하지 아니하는 범위 안에서(기간제 근로계약의 반복갱신 등의 경우에는 그 계속근로한 총기간이 2년을 초과하지 아니하는 범위 안에서) 기간제근로자를 사용할 수 있다. 다만,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2년을 초과하여 기간제근로자로 사용할 수 있다.
1. 사업의 완료 또는 특정한 업무의 완성에 필요한 기간을 정한 경우
2. 휴직ㆍ파견 등으로 결원이 발생하여 당해 근로자가 복귀할 때까지 그 업무를 대신할 필요가 있는 경우
3. 근로자가 학업, 직업훈련 등을 이수함에 따라 그 이수에 필요한 기간을 정한 경우
4.「고령자고용촉진법」제2조 제1호의 고령자와 근로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5. 전문적 지식ㆍ기술의 활용이 필요한 경우와 정부의 복지정책ㆍ실업대책 등에 따라 일자리를 제공하는 경우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우
6. 그밖에 제1호 내지 제5호에 준하는 합리적인 사유가 있는 경우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우
 
‘사회적 일자리’는 “정부의 복지정책ㆍ실업대책 등에 따라 일자리를 제공하는 경우”로 분류되어 평생비정규직 신세를 면치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노동부의 전략이 그것인데, “공동제안”이라니!


더 많은 이야기가 있겠지만 이하 생략하자.

나는 중앙위원들에게도 불만일 수밖에 없다. 이런 사업계획을 중앙위의 두번째 유회를 걱정해서 일사천리로 통과시켜주었다는 정황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적어도 반정도는 좌파나 중앙파네 하는 사람들일 텐데 이럴 수가 있나.

 

최근에 비정규직관련 사업을 하는 여러 동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민주노총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다. 하는 것도 없고 할 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법안의 시행령이 나오고, 줄줄이 비정규직 해고자가 만들어지고 투쟁사업장이 올라오는 상황에서도 민주노총이 이를 투쟁으로 모아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을 갖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의지가 매일매일의 활동에서도, 사업계획에도 예산에도 드러나는 법이다. (예산은 숫자로 나오니 비교하기도 쉽다.) 결국, 당장 투쟁하는 단위들이, 투쟁해야할 주체들이, 답답한 사람들이 모여서 판을 짜고 스스로 전선을 형성해갈 수밖에 없다. 그런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럼 도대체 우린 민주노총은 왜 만든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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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30일, 공공노조 대의원대회 이후

공공노조는 회의날짜를 참 잘 못잡는다. 공공노조 출범 발기인대회를 한 11월30일은 비정규법안이 통과되어 투쟁이 있던 날이었다. 중앙위원회가 열렸던 3월8일은 여성대회 날이었다.(결국 오전 서울집회만 서울동지들 중심으로 참석했다.) 이번에 대대가 있었던 3월30일은 애초 협상시한이었을 뿐 아니라 한미FTA 막바지 투쟁이 늦게까지 진행된 날이었다. 날짜를 잡는데 불가피한 사정은 내부에 있는 나도 잘 알 고 있지만서도, 정말 정세적 긴장감, 책임감이 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가 아닌가 싶었다.

 

여튼, 대부분의 동지들이 FTA반대 투쟁으로 서울시내를 달리는 시간에 진행된, 새 집행부 구성 이후 첫번째 대의원대회는 역시 여러모로 실망스러운 점이 많았다. 직선으로 선출된 대의원들의 두드러진 책임감과 열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나마 희망이라고 할까.

 

참고로, 아래 글은 얼마전에 이 블로그에 쓴 글 "산별노조가 뭐 이래?"의 말하자면 후속편인 셈이다. 더 올라가서는 월간 사회운동에 썼던 "공공산별노조 건설의 쟁점과 전망"에 연결된 글이다. (이렇게 묶어서 노기연의 "민주노동과 대안"에 기고.)

 

대의원대회에서 규약개정과 관련된 논란

 

3월30일 진행된 대의원대회에서는 몇가지의 규약개정안이 제출되었다. 대부분은 단순한 문구조정에 불과한 것들이었지만, 의결기구의 구성과 운영과 관련된 중요한 안건이 있었다. 일상적인 운영을 논의하는 ‘중집위원회’에 2개 이상 광역지역에 걸친 1000명 이상의 대기업지부를 참가시키고 상설위원장과 실장에게 의결권을 부여하자는 내용이었다.


전자의 내용은 아직도 기업별 지부 체계가 온존하고 권력이 집중된 상황에서 효율적인 사업의 집행을 위해서는 이러한 지부 단위가 함께 결의하고 집행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제기되었다. 후자는 집행을 담당하는 상설위원회와 실장들 역시 책임있게 의결에 참여할 수 있어야한다는 점에서 상정되었다.


그러나 두 개의 개정안 모두 논란이 되었는데, 실제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집은 일상적인 조직운영의 핵심적인 단위이다. 모든 주요 회의단위의 안건 상정은 여기서 시작되고 집행도 결의된다. 대기업지부의 중집참여와 의결단위 참가가 이루어진다면, 이제까지 논의해왔던 지역본부, 업종본부를 중심으로 사업을 진행하자던 논란은 사후적으로 사실상 별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결국 기업별 지부가 주요한 의결, 운영의 골간으로 인정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업종본부의 설치기준인 3000명 이상이라는 규정보다도 훨씬 낮은 수준인 1000명 이상 조합원으로 결정되면서 조직체계의 일관성도 유지하지 못했다.


대기업지부가 사업에 결합을 해내지 못하는 이유는 앞서 조합비에 대한 문제에서 지적한 것이지만, 여전히 모든 사업을 기업별 단위에서 하려고만 하지 산별차원에서 (그것이 지역이든 업종이든) 통합해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개정안은 기업별지부를 사실상 골간으로 인정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온존시키고 만다. 왠만한 규모만 되는 지부면 이제 지역본부와 업종본부의 얼마 안 되는 예산사용을 제외하고는 주요한 권한을 지역, 업종본부와 마찬가지로 모두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안건은 불과 세표 차이로 가결되었다.


후자의 안건(상설위원장, 실장에 중집 의결권 부여)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민주노총에서 집행부가 일방적으로 의사를 관철하는 주요한 수단이 실장들의 의결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안건은 58%의 찬성에 불과해 부결된다. 하지만 예기치않은 부작용도 있는데, 애초에 1000명 이상 지부를 중집에 참석시킬 경우 기업별지부들의 의결권이 크게 확대된다는 점에서 균형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두 개의 개정안이 하나의 세트의 성격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전자만 가결되면서 기업별 지부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이후에 기업별 활동을 지양해가기 위한 노력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상설위원회, 집행부의 중집 의결권으로 산별중앙을 강화한다는) 해결방법이 잘 못되었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지 대의원들의 판단이 미숙해서 생긴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크게 부족한 산별 투쟁과 사업계획

 

대의원대회에서는 올해 사업계획도 심의 의결하게 되어있다. 사업계획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대의원들은 사업계획의 많은 부분이 부족하기 때문에 보완되어야한다는 의견들을 제시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쟁점이 형성되고 토론이 진행되지는 못했는데, 쟁점이 형성될 만큼의 구체적인 사업계획이 제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올해 공공노조 차원의 가장 중요한 투쟁 사업은 무엇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산별노조 1년차의 활동으로 산별교섭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가동해야한다. 산별교섭을 쟁취하기 위한 전단계로서 정부의 임금가이드라인, 공공기관 통제구조를 분쇄하기 위한 투쟁이 ‘산별적인 방식으로’ 준비되어야한다. 또한 비정규법안의 통과로 인한 비정규직 대량해고가 예상되는 정세에서 공세적인 비정규직 투쟁이 조직되어야한다. 작년에 함께 통과된 노사관계로드맵, 특히 공공부문 사업장의 필수유지업무 폐기를 위한 투쟁이 진행되어야한다.


이러한 투쟁과제들에 대한 정밀한 방향이나 세부적인 계획이 거의 제출되지 못했다.
산별노조가 힘을 갖지 못하는 이유가 단지 개별 사업장지부들의 조직이기주의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개별 사업장지부가 보기에도 산별적인 투쟁이 어떻게 조직될 것인지, 그것이 가능성이 있는지 확인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부별 사업과 투쟁을 놓아버리고 산별노조에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산별노조에 강화에 힘쓰지 않는다고 개별 기업별지부만 비난할 수 없다는 점.


산별노조 1년차의 투쟁은 산별노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혹은 적어도 무엇을 지향하는 조직인지를 대중적으로 확인하는 매우 중요한 계기이다. 산별노조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올해 정세에서는 힘을 모아 투쟁해야하는 과제가 산적해있다. 공공부문 노동자운동의 과제는 이제 공공운수연맹에 기댈 수도, 공공연대에 기댈 수도 없고, 공공노조가 우선 제기하고 주별을 조직해야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대의원대회 이후에라도 이러한 관점에서 산별적인 투쟁을 공공노조가 적극적으로 조직할 수 있어야한다.

 

* 노기연 "민주노동과 대안"에 기고한 원고 전체(hwp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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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아민 말루프 지음, 김미선 옮김 / 아침이슬

  

애초에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사람잡는 정체성>이라는 책 때문이었다. 책의 저자인 아민 말루프는 레바논에서 태어나서 프랑스에 사는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강요하는 것이 어떤 폭력이 되는 지 흥미롭게 보여주었다.(이 책 역시 추천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그리고 그가 쓴 또 다른 책인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은 이런 저자의 시각에서 쓰여진 책이다. "아랍인의 눈"이라고는 하지만 아랍인의 입장을 '종파적으로' 대변한다기 보다는, 침략당한 자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쓴 사료를 바탕으로 역사를 바라본다.

 

유럽인의 시각으로 재단된 '성전'으로서의 십자군 전쟁이 아닌 다른 시각을 접하기 위해서 의미있는 이 책은, 여기에 더해서 매우 흥미롭기도 하다. 100여년의 시간 동안 수많은 인물들이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소아시아 지역의 전쟁에서 명멸해갔던 것이다. 마치 팔레스타인의 삼국지라고 할 수 있을 것같은 이 역사는 하나의 서사이기도 하다.

 

특히 이 책의 포인트는 왜 아랍인들이 그렇게 무기력하게 침략당하고 학살당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솔직하게 보여주는 데 있다. 아랍세계는 단일한 정치체제가 무너진 후에 만성적인 내전에 시달려왔으며, 정치적 통일은 요원하였다. 심지어 수만명이 사는 도시의 인구가 깡그리 학살당하는 상황에서도 이런 조건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랍이 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정치적 단결을 우선 회복해야 했으며 여기에는 10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 점에서 아랍세계를 통일하고 프랑크족을 몰아낸 살라딘이 현대의 아랍 지도자들에게 이상적인 인물로 비치고 모방하기 위한 상징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미국이라는 기독교국가가 창설한 "라틴왕국"인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아랍인들을 학살하고 있지만, 아랍세계는 만성적인 정치적 분열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지 않는가. 그러니 살라딘의 땅인 시리아에서부터 칼리프의 땅인 이라크까지 (민족주의자이자 발전주의자들인) 바트당의 독재자들이 살라딘과 자신을 동격화하려는 것은 절실한 정치적 요구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 형식이지만 소설과 같이 생생하다. 김태권의 뛰어난 만화작품인 <십자군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다시 받을 수 있다. (도대체 <십자군 이야기> 3권은 언제 나온담!) 무지막지한 보에몽, 정신나간 사기꾼에 가까운 '은자 피에르'를 떠올리면서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생생한 느낌을 얻으려면 시공디스커버리총서로 나온 <십자군 전쟁-성전탈환의 시나리오>를 함게 보는 것이 좋다. 십자군 전쟁의 역사를 풍부한 도판과 함께 보여주기 때문에 당시에 프랑크족(유럽인들 말이다)과 아랍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시각적으로 알 수 있다.

 

이런 시각적 이해 속에서 특이한 점을 곧 발견할 수 있다. 유럽인들이 그린 전투장면은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느낌이 드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영화 <반지의 제왕>이다. 수많은 판타지 작품들의 기원 말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후의 판타지작품들에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아래는 영화에 정의의 편으로 나오는 중세기사들, 이런 녀석들이 바로 십자군 전쟁에서 프랑크족이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서 영화에서 우르크하이 같은 녀석들은 유럽이 그린 아랍인과 유사한 이미지. 검은피부에 갑옷도 못갖추고 있다. 당시 전투에서 프랑크족의 주력은 갑옷을 입은 기병이었으며, 이에 비해서 아랍인들은 갑옷은 없는 경기병 혹은 기마궁수였다.

 

<반지의 제왕>만이 아니다. 일전에 화제가 되었던  <다빈치 코드>는 "성전기사단Knights Templar"의 전설에 대해서 다룬다. <다빈치 코드>가 신성한 존재로, 핍박받는 순교자로 그리는 "성전기사단"은 죄송하지만 십자군 전쟁의 호전적인 학살자들이었다. 이들은 무장한 수도사들과 같은 조직으로, 기사와는 달리 상비군을 구성하고 강력한 무장력을 갖추었다. 덕분에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는데, 이런 과정에서 발생한 유럽의 왕조들과의 대립은 아시아에서 프랑크국가들의 몰락 이후 성전기사단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진다. 이들이 탄압받았다고 해서 '선량'한 것은 전혀 아닌 것이다. 갖가지 방식으로 침략 전쟁의 침략자들을 미화하는 방식이라고나 할까. (이들 "성전기사단Knights Templar"은 여러 판타지에, 심지어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게임에도 반복된다. "하이템플러" 혹은 "다크템플러"로 등장하는 포로토스 유닛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미지는 최근의 영화에도 다시 반복되고 있다.

말도많은 <300>이라는 영화다. 크게 히트하고 있다고 하는데,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아래의 이미지가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유럽인들이 처음 보고 놀란 동방의 괴물, 바로 코끼리인데, 당시 유럽인들은 코끼리를 보고 놀라서 이렇게 그렸을 것이다. (왼쪽은 <반지의 제왕>, 오른쪽은 <300>의 한 장면.)

 

 

 코끼리뿐 아니라 야만족의 모습도 비슷한데, <300>에서는 이 야만족은 직접적으로 페르시아인, 현재의 이란을 지칭한다. 결국 이 모든 이미지가 동일한 근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십자군 전쟁에서 시작된 아랍인에 대한 이미지를 인종적, 문화적 편견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페르시아는 그리스에 비해서는 한참 앞선 문명국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이런 점에서 <300>이라는 영화가 가지는 정치적 프로파겐다로서의 성격을 지적한 아래 기사도 참고할만하다. 프레시안의 기사 "괴벨스의 나치선전물 같은 영화 <300>" 나도 TV의 영화소개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영상만 보고도 역겨웠는데 역시 그렇고 그런 정치영화였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로보면, 아랍인이 훨씬 문명적이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적이라고 해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으며, 학살을 일삼는 프랑크족을 이해하지 못했다. 문화적으로도 훨씬 성숙되어 있었는데, 이후 유럽은 이 전쟁 이후 많은 것을 아랍으로부터 배워갔고, 특히 이들이 다시 접하게된 그리스-로마의 유산은 르네상스를 촉발한다.

 

그에 비해서 아랍의 피해의식은 아랍세계를 점진적으로 후퇴시키는 요인이 되는데, 이 결과는 십자군 전쟁 후 6~700여년이 지난 19세기, 20세기 유럽에 의한 아랍의 정복과 분열까지 이어진다.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은 굳이 '현재의 시각으로' 역사를 재해석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실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역사적 사실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만으로 현재를 다시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모든 전쟁에서 침략자가 아니라 피침략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먼저 바라보아야한다면 십자군 전쟁에도 마땅히 그래야한다. 그 과정에서 보다 많은 진실을 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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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총학생회, 뉴라이트, 오래된 반성

연세대 총학생회가 총여학생회를 폐지하겠다고 학생 총투표를 한다고 한다. 기가 막히는 노릇이다. 여기에 더해서 의결기구로서 단과대 학생회와 함께 구성하게 되어 있는 중운위를 폐지하고 그 권한을 총학생회 상집이 가져갈 뿐 아니라, 단과대 학생회가 "외부" 단체와 하는 연대활동(성명서까지도)도 총학생회의 허락을 받도록 한다고 하니, 독재를 위한 쿠데타가 따로 없다.

 

관련 내용은 아래 링크 참고

[연대총여] 연세대 총학생회의 독단적 총투표 강행과 총여 폐지 주장을 규탄한다!

 

학생동지들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아울러 들은 이야기는 (내가 요즘에 학생운동에 관심이 좀 많이 없었나 보다) 서울시내 규모가 있는 주요대학 17개 정도를 따져보니 몽땅 비운동권-반운동권 총학생회더라는.

 

연세대 총학생회는 '뉴라이트'라고 알려져있는데, 이들의 정치가 어떤 내용인지 시사적으로 보여준다.

반여성주의, 반정치주의(역설적이게도)에 입각한 대중의 정치적 동원. 이것은 그냥 '보수'라기 보다는 파시스트들을 떠올리게하는 정치양식이다. 특히 자신들이 장악한 총학생회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제반의 비민주적 학생회칙 개정 사항을 반여성주의적 동원 아래 묻어가고 있다는 것은, 반여성주의가 가진 성격, 따라서 여성주의에 대한 쟁점이 가지는 보편적 성격을 드러낸다.

 

이들은 자신들에 반대하는 대자보들도 학내에서 훼손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들이 정치적이지만 또한 反정치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치란 무엇보다도 공동체 내에 이견과 쟁점을 다루는 방식일 텐데, 이들의 방식이란, 의견을 억압하는 폭력으로서 도대체 정치라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이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동의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있다는 것이 현재의 학생사회라고 생각하니 우울해지는 일이다. 여기까지 오는데에는 많은 복합적인 요인이 있고, 특히 신자유주의 하에서 어떠한 집단적 희망도 발견할 수 없는 대중의 정치적 후퇴가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우리가 현재의 노동자운동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한때 실천했었던 학생운동을 반성할 필요도 있을 것같다.

 

90년대 중반부터 우리가 만들어낸 학생사회의 논쟁이란 참으로 빈약한 것들이었다. 특히 학생사회의 논쟁이 집중되는 총학생회 선거 공간에서 '정치적 후퇴'란 좌우파가 모두 공범이었다. 정치적 구호가 중심이던 총학생회 선거에서 92년부터 처음으로 이른바 '복지공약'이라는 것이 NL 선본의 대대적인 선전 아래 핵심적인 쟁점으로 부각되었고, 좌파들도 93년부터 이를 모방했다. 그래도 그나마 정치적 쟁점이 남아있던 것이 93년까지 정도였던 것같다. 그 이후로는 모든 정치세력의 선본이 학내 복지사항을, 기껏해야 학교와 협의해서 만들 수밖에 없는 아이디어 상품들로 선거를 도배했던 것이다. 미디어 선거를 전면화했던 것은 애초에는 NL이 시작이었으나 이후에는 오히려 좌파가 더 유능했던 것같다.

 

군대를 다녀온 90년대 말에는 이런 상황은 더욱 전면적이어서, 총학생회 선거에서 정치적 입장이란 선본 자료집 맨 뒤 몇페이지에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들 선거에서 항상 NL들이 복지공약에는 유능했지만, 그렇다고 좌파들이 그나마 정치적으로 나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데 그런 감각에 무능했을 뿐이다.

 

결국, 노동자운동에서 노조운동이 90년대 내내 단위 사업장 내에 경제적 이익에 몰두하면서 모든 방면에서 노조를 실리주의에 빠지게하고, 결국 신자유주의에 제대로 대항할 수도 없게 조합원 사회(그것을 '현장'이라고 부르지)에서도 실리주의가 만연하게 만들고 말았다.

 

학생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학생회는 실리적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학생들에게 보여준 것은 애초에 운동권들이었다. 운동권들이 학생회를 '수권'하기 위해 몰두할 수록 이런 경향은 강화되었다. 그러나 결국, 비운동권, 반운동권들이 세력화될 수 있었을 때, 이런 쟁점이 훨씬 유리한 것들은 이들이었다. 일말의 꺼리낌없이 '정치'를 배제하자는 주장이었는데, 그래도 이제까지 복지사안이라는 것을 도구적 쟁점으로 제기했을 뿐인 운동권들보다 이런 방면에서 훨씬 유능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사태는 매우 불행하지만, 어쩌면 이런 상황의 원인중에는 90년대 우리가 해왔던 학생운동의 실천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중요한 요인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학생사회의 중요한 정치적 주체였던 학생운동 세력이 이러한 상황에 전혀 책임이 없을 수 없다면, 그 책임의 내용과 성격이 무엇이었는지 반성하는 것이 필요할 것같다. 나 자신도 이러한 상황에 (내가 활동했던 캠의 상황이 아니라고 해서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동의 책임이 있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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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별노조가 뭐 이래?

공공노조 출범 이후, 지난 2월 말 선거와 과도기 집행부 이후 제도를 정비하는 3차 중앙위원회가 지난 주 끝난 이후 나에게 특징적인 정서는 (많은 분들에게 대단히 죄송한 일이지만) "환멸"이다. 이런 낱말을 쓴다는 것이 참으로 나 자신에게도 분노스러운 일이라도 그렇다.

 

앞서 썼던 글들에도 말했던 것처럼, 공공노조의 출범과정은 대단히 문제가 많이 있었고 많은 쟁점이 '봉합'된 채로 '일단 출범'한 상태였다. 결국 선거와, 그 이후의 제도 정비과정에서 묻혀있던 여러 쟁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던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쟁점들은 노동자 운동의 발전을 위한 고민에 입각해서 발전적으로 정리되기보다는 기존 조직들, 특히 대공장 사업장들의 이해를 반영하는 가운데 (또한 감히 말하건데) 폭력적으로 정리되었다. 

 

선거=민주주의?

 

아래 글에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선거가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담보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이번 공공노조 선거와 그 이후의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2월말에 진행된 선거는 아래와 같았다.

(1) 공공노조 위원장-사무처장 (2) 업종본부 본부장-사무처장 (3) 지역본부 본부장-사무처장 (4) 업종선출 노조 대의원 일반 (5) 업종선출 중앙 노조 대의원 여성할당 (6) 지역선출 노조 대의원 (7) 지역선출 노조 대의원 여성할당

조합원들은 총 7장의 투표용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대의원 투표의 경우 많은 경우 16명에 이르는 후보에 대해서 투표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어떤 선거구의 조합원은 30여명에게 투표해야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3월말에도 선거가 예정되어 있는데,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가 쟁점이 되었다. 앞서의 선거에서 (1)을 제외하고 선출되지 않은 기구에 대한 보궐선거(많은 경우 6개)에다가 지역본부 대의원(일반, 여성할당), 업종본부 대의원(일반, 여성할당) 등 총 10장의 투표용지를 받아야하는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다. 평조합원의 입장에서 불과 한달만에 이런 선거를 두 번이나 한다는 것이 어떻게 느껴질까?

 

쟁점은, 이러한 과중한 선거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3월말 선거에서 지역본부, 업종본부에 당연직 대의원제도를 임시로 운영하는 등의 방안을 도입하자는 서울본부의 제안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제안은, 조합원들이 표찍는 기계도 아니거니와, 지난 선거 경험을 통해 볼 때 이러한 규모의 선거를 진행할 경우 한달간 모든 활동이 마비된다는 점에도 있었다. 학교 비정규직 등 투쟁사안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고 산별적인 사업을 위해서 현장 순회 등으로 조직력을 정비해야할 시기에 모든 일정이 연기된다면 단위 지부의 임단협마저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

 

일부의 주장은, 완고하게 "제도에 정한 대로"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규약과 규정도 사람이 만든 것인 이상, 지난 선거 이후 모든 제도가 얼마나 탁상에서 만들어졌는지를 실제로 확인한 이상 그대로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지역본부와 업종본부 대의원 선거는 이번에는 각 단위 자율로(결국 대부분의 단위가 선거를 진행하지 않게 되는 상황이다)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돌이켜볼 때 선거는 각 집행기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민주주의를 증진하는 과정이 되기 위해서는 사실상 노조의 활동 방향에 대해서 토론이 가능하게 되어야하는데 30여명에게 투표해야하는 선거에서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선거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선거라는 것이 민주주의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결국 과도하게(지역-업종으로 2중으로 불어난) 노조의 기구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조합원을 동원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노조 민주주의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선거를 많이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며, 조합원이 노조와 노동자 운동의 쟁점에 대해서 사고하고 발언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노조의 활동, 노동자운동의 방향에 대해서 조합원들과 교육이든 토론이든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공유하고 조합원들이 스스로 사고하도록 할 수 있어야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대리인을 선출하는 것으로 자신의 권리를 '위임'하고 노조의 방침에 따르는 수동적인 조합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능동적 조합원으로 조직해야한다. 이 과정에서 선거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과정은 민주주의에 대한 알리바이로 선거가 이용되고 있다.

 

조합비, 0.65%

 

가장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조합비와 관련된 부분이다. 많은 노조에서 보통의 조합비는 1%로 생각되어 왔다. 0.65%라는 조합비 기준은 기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임금규모가 일정하게 되고 조합원수가 어느 정도 수준을 넘는 노조들에서 총임금의 1%가 아니라 기본급의 1% 등의 방식으로 조합비를 낮게 책정해온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이 금액의 10%는 희생자구제-투쟁기금으로, 나머지의 60%는 다시 지부에 교부된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조합비 결정과정에서 많은 "유예"조항이 신설되었다. 기존 조합비가 인상되는 지부에 대해서는 1년간 이를 유보하고 이후 3년동안 점진적으로 인상한다든가, 해고자가 많은 사업장 지부에 대해서는 조합비를 감면한다든가 하는 조항이 그것이다.

 

유예조항이 도입됨에 따라 기존에 노조 활동을 열심히 하느라고 조합비를 많이 걷었던 지부들은 기존의 규모만큼 부담해야하고, 그렇지 않았던 곳은 오히려 계속 혜택을 보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열심히 하는 데만 부담이 가중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더구나 해고자 부담 등을 이유로 사회보험 지부에는 산별중앙에 할당된 금액의 50%를 감면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는데, 문제는 조합비를 감면하는 대신 해고자들이 산별노조의 각급기구에서 활동한다든가하는 조치가 함께 통과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산별노조에서 일하는 해고자에 대해서는 상근자 임금수준의 급여를 지부 대신 노조 중앙이 부담하기로 하면서 '이중혜택'논란까지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결정되는 과정에서 조직적인 공동의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 지부가 어렵다"는 것만이 모든 주장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자세는 사회보험만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사업장 규모가 클 수록, 임금이 높은 사업장일수록 그런 모습이 강했다.

 

이는 산별노조 건설 이후에 어떻게 각종 사업을 산별차원에서 함께 진행하면서 통합력을 증진할 것인가를 각 단위가 고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사업을 보전하고 산별노조(중앙과 지역, 업종본부까지 포함하여)에 납부되는 기금은 마치 어딘가 빼앗기는 것처럼 사고하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막 출범한 산별노조에 대한 신뢰에 대한 문제도 있겠지만, 애초에 산별노조를 출범하는 과정에서부터 원칙으로 천명되던 '단결의 증진과 힘의 결집'이라는 것과는 다른 사고가 팽배해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 가장 비판적이었던 것은 역시 중소영세비정규사업장 동지들이었다. 이들은 보전해야할 사업장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도 않으며 최대한 많은 사업을 산별노조 차원에서 함께 하기를 바라는 곳들이다. 결국, 조합비를 낮게 책정하고 산별노조의 기구들, 특히 지역본부를 약화시키는 것은 대공장 정규직 사업장과 중소영세비정규사업장의 관심이 충돌하는 쟁점이 되었다.

 

결국 결정된 예산안을 볼 때, 가장 예산축소에 따른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은 지역본부들이다. 원래 예산의 규모가 작은 상태에서 심지어 가장 작은 강원, 대전충남, 충북, 전북, 울산 등의 지역본부들은 월 130만원 대의 예산으로 사업을 집행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대부분의 사업을 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이 과정에서 기본에 연맹 지역본부가 설치되어 있던 지역에서는 가용한 예산이 줄어들기도 했다. 서울의 경우에는 연맹 때와는 '현상유지'를 한 정도지만 전북, 대전충남 등에서는 연맹 지역본부 시절보다 예산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지역운동을 활성화하겠다는 취지가 무색해지는 일도 발생했던 것이다. 노조 중앙이라고 상황이 나은 것은 아니어서, 현재 작성중인 예산에 따르면 중앙의 각 부서의 사업비가 총 20여만원에 불과한 상황이다. 5개 정도 실이 만들어질 경우 4만 몇천원으로 사업을 하라는 이야기다.

 

전국단위의 비정규직노조들의 상태는 심각하다. 학교비정규직, 보육, 자활, 사회복지 등 지부들은 이미 지역별로 조직을 편제하기로 하고 중앙조직을 해산하고 있는 과정이다. 이들 사업장은 어차피 임금총액이 적기 때문에 조합비 교부금을 받아도 독자적인 사업이 불가능하다. 이런 속에서 지역별로 편제할 경우에도 지역별 주체형성도 문제이거니와 노조의 지역본부가 매우 취약하게 되면서 공세적인 조직화 사업은 커녕 조직유지도 힘들어지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들 조직의 상근자들은 공공노조에 고용이 승계되면서 최소한 지역-업종본부, 중앙단위 이상으로만 인사배치가 이루어지게될 것인데, 이 경우 상근활동가가 조직을 담보하기도 힘들어지는 상황이 된다.

 

문제는 이러한 조건을 모두 아는 상태에서(회의 장소에서 조합비에 따른 각단위 사업비의 시물레이션이 즉각 공개되었다)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몰라서 그랬다"는 식의 변명은 이루어질 수 없고, 산별노조에 대한 각 단위 간부들의 솔직한 입장이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오히려 저임금 사업장, 중소영세비정규직 동지들이 조합비 인상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최저임금을 받는 사업장의 한 간부는 이런 논란이 '우습다'는 말도 했는데, 0.65%로 책정될 경우 산별중앙이 가져가는 조합비 수준은 연맹-민주노총의무금에도 미달하기 때문이다.(최저임금 조합원이 늘어날 수록 산별중앙 사업비는 줄어든다는 말이다.) 또한 이런 조건에서 지역, 중소영세비정규직 사업장에서는 오히려 "연맹 때가 좋았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너무나 역설적인 일이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결국 이 과정은 산별노조 건설의 과정이 운동적 의의를 공유하고 충분한 토론을 거쳐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 '일단 결의하고 보자'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이렇게 만들어진 이후에도 최소한의 원칙을 확인하지 못하고 "제도 정비"를 중심으로 전개된 이후 과정이 만들어낸 결과다.

 

산별노조, 어떤 활동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일이 벌어지게된 이유를 사업장 현장 간담회라든가 이런 저런 과정에서 본 것을 통해서 생각해보면, 산별노조는 여전히 명분뿐이거나 개별 기업별 사업장의 이해를 지키기위한 방편정도로 인식되는 것같다. 기업별을 넘어서 적어도 유사한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하나라는 의식, 당장 자신의 일은 아니라도 투쟁하는 노동자가 있으면 연대한다는 연대의식이라든가 중소영세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겠다는 목표들은 공문구가 된다.

 

당장 사업비가 월130여만에 불과한(추가 할당된다고 해도 170만원을 넘기는 힘들 것이다.) 지역본부에서는 운영비도 빠듯할 뿐더러 투쟁사업장이 발생할 경우 제대로 지원도 할 수 없는 조건에 이른다. 이런 조건에서 미조직비정규직 전략조직화라거나 지역 차원의 산별교섭이나 사회공공성투쟁과 같은 것은 "좋은 사업계획"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오히려 산별노조를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산별노조는 이런 것'이라는 관성이 이미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내부투쟁은 물론이지만) 제한된 자원을 활용하면서 최대한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할 수밖에. 그것은 당장은 조직적으로는 "초기업-초업종 지역지부"를 조직하는 노력과 사업으로는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 사업으로 볼 수 있다. 기존 조직 내에 조직적 근거를 확보하는 것과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노조운동의 주체를 이를 중심으로 조직하는 것이 관건이다.

 

물론, 기존의 노동조합들을 바꾸어내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이번 과정을 통해서 아무리 훌륭한 관점을 갖고 있더라도 대기업 정규직 노조 간부는, 자신들의 조건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말았다.(그런 것을 확인할 때마다 느껴지는 막막함이란!)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말로 되는 것은 아니며, 새로운 실천이 기존의 운동을 압도해가도록 할 수밖에. 그것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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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노조;선거-관료제-민주주의etc.

영국 인민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의 의원을 선거하는 기간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다시 노예가 돼버리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 루소, "사회계약론" 3권.

 

 

무한히 복잡한 공공노조 선거제도

 

공공노조 선거 기간이다.(투표는 21~23일 동안 진행된다.) 금속노조는 1차 선거가 끝나고 결선이 예정되어 있다. 금속노조보다는 작지만 유례없는 규모와 복잡한 조건 속에서 진행되는 선거를 보면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당장 걱정되는 것은, 이 선거가 과연 제대로 진행될 수 있겠느냐는 불안. 이것은 선거제도의 지나친 복잡성과 관련있다. 아래 공공노조에 대한 글에서, 공공노조가 지역본부-업종본부의 이중골간 체계를 인정하면서 관료조직이 두배로 확대되고 말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번 선거에서도 이러한 조직을 구성하기 위해서 선거는 두배로 진행되고 있다.

 

한명의 조합원이 투표해야하는 투표용지는, [중앙 위원장/처장], [지역본부 본부장/처장], [업종본부 본부장/처장], [지역선출 중앙대의원], [업종선출 중앙대의원]다섯개 선거에 여성할당 별도 투표용지까지 모두 7장이다. 후보는 특히 대의원의 경우 큰 선거구는 12~16명에 이르는데, 이 결과 한명의 조합원이 투표해야하는 후보자수는 무려 30여명에 이른다. 이번 선거와 지부-지회 선거를 겸하는 경우에는 그 수는 더 늘어난다. 게다가 현재 규약규정상 3월 중에 지역본부, 업종본부 대의원을 선출하기 위해서 이러한 규모의 선거를 한번 더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이쯤되면 "조합원을 표찍는 기계로 전락.."운운은 더 이상 수사가 아니라 현실이 된다. 선거를 많이 한다고 민주주의가 증진되는 것은 아닌만큼 나는 3월 선거는 하지 않도록 제도를 개정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산별노조 건설 직후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30여명의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 조합원에게 어떻게 느껴질까? 투표용지에는 얼굴도, 소속사업장도 없이 오직 성명 세 글자 뿐이다. 게다가 투표방식 역시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너무나 엄격하다. 각 종이박스로된 투표함은 모두 20곳을 봉인해야하며, 각 투표용지에 지부 선관위원의 날인이 필요하고, 각 비표는 따로 봉인해서 23일 저녁까지 개표소에 인편인든 퀵이든 박스채로 모두 보내야한다. 볼펜기표는 금지되며 반드시 인주를 사용해야하고... 나는 내가 조직하고 주로 대해왔던 환경미화, 청소, 경비 고령의 노동자들이 이걸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당장, 투표용지가 빠졌다는 전화를 받으면 어떤 경우에는 (선거구가 다르기 때문에) 단지 옆 지부와 투표용지 크기가 다를 뿐인 경우들도 있다..

 

투표에서 ; 민주주의 조건

 

이쯤되면 직선투표가 과연 '민주주의'인가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위로부터의 조직구성,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 조합원을 고문하는 수준이라는 생각까지 들 때가 있다. 30여명을 모두 투표해야하는 서울대병원분회 조합원들은 근무 중 현장에서 뛰어다니다가 이 투표를 해야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최소한 고민해야할 것들이 (그야말로) 대규모로 누락되고 있다. 아무리 선거가 복잡하더라도 선거제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원칙이 있는 법일텐데, 실무적으로 바쁘다는 이유로─다른 말로 하면 관료기구의 편의를 위해서─면밀하게 보지 않는 것들. 누구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선거제도는 가장 쉽게 구성되어야한다. 가장 지적으로 부족한 조합원의 눈높이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제도 전반은 사무전문직 조합원들의 수준, 가장 높은 수준에 맞추어져있다. 이 기준에 따라가지 못하는 비주류-교육수준이 낮고, 고령이며, 행정제도에 익숙하지 않은 여성들은 권리를 행사하는 데 곤란을 겪는다.

 

바쁘더라도 더 신경써야하는 부분도 있다. 10여명의 이름이 있는 투표용지에 최소한 사진이나 사업장같은 기초 인적 사항이 들어가지 않으면 구별할 수도 없을 정도다. 조합원 선거 공보물에는 대의원의 경우 '엑셀'로 만든 표가 그대로 건조하게 들어간 정도여서 내 선거구 후보를 찾는데 나조차 곤란을 겪을 정도다.(그나마 서울본부의 경우 사진-경력-출마의 변이 담긴 포스터를 겨우 제작했다.)

 

물론, 선거구의 크기, 후보의 크기와 같은 면에서 지역 선거구를 분할하는 과정에서 나의 경우에도 신경쓰지 못한 부분이 있다.(초기업 선거구를 만드는 것을 관건으로 보다보니 일부 선거구는 너무 비대해졌다.)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선거구도 더 분할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느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선거가 복잡해지는 것은 지역-업종 이중골간체계에다가 과도한 선거제도, 불친절한 선거행정.. 등의 복합물이다. 우리가 버려야할 것과 버리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 민주주의와 지역-현장에 밀착한 운동구조, 그리고 가장 낮은 조합원의 눈높이에 맞춘 제도의 구성을 지킨다면 버릴 수 있는 것들도 많을 텐데.

 

노조에서 대안적인 조직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노조에서의 선거는 또한 지속적으로 대안적인 관계, 대안적인 조직을 실현해나가야한다는 점에서 다른 고민이 필요하다. 산별노조를 건설하자마자 관료조직이 (제대로 구성되고 작동하지도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복잡해지는 것을 보면서 그러한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말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가 행정은 이렇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국가관리들이 우리들이 위임한 사업의 단순한 집행자, 즉 책임을 지며 소환 가능하고 근소한 보수를 받는 "감독과 부기 계원"(물론 여기에는 모든 종류와 모든 등급의 기술자들이 포함된다)의 역할로 끌어내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프롤레타리트적 임무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수행하면서 먼저 시작할 수 있고 또 먼저 시작해야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 같은 시작은 대규모 생산을 토대로 하여 저절로 모든 관료제의 점진적인 "사멸"로 나갈 것이다. 또한 그러한 식은 더욱더 단순화되는 감독과 계산의 기능을 모든 사람이 순번대로 수행하여 나중에는 그것이 습관이 되는, 그리하여 결국 특수한 인간계층의 특별한 기능은 소멸되어 버리는 그러한 질서─괄호없는, 즉 임금노예제와 같은 유보조건이 없는 질서─가 점차 조성되게 할 것이다. (돌베게 판, 71쪽)

 

그러나 조건이 필요하다는 점이 또한 중요하다.

 

...왜냐하면 국가를 폐지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직무의 기능들이 주민 대다수에 의해, 나중에는 주민 모두에 의해 이해되고 수행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통제와 회계사무로 전화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05쪽)

...모든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또 실제로 사회적 생산을 관리하게 되며 독립적으로 계산을 하게될 그 때에는.. (137쪽)

 

노조기구를 전화하는 것이 사회주의에서 국가의 전화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조직에서 노동자의 자기통치를 위해서 우리가 무엇에 착목해야하는지를 발견할 수는 있다. 그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갈 사회에 미리 훈련될 것이다.

 

여기서 두개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하나는 행정이 더욱 단순해져서 누구나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 그리고 이와 함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적 차이가 감축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에 익숙해지도록 훈련되는 것이다. 이는 노조에서도 (선거제도까지 포함하여) 노조행정의 단순화, 그리고 단순히 선거를 조합원 머리위로 위해서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들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현실적인 조건─교육과 훈련─을 전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레닌의 첫번째 인용문은 하나의 논쟁점을 포함하고 있다. 노조 활동가들의 경우 억압적인 자본주의국가의 '국가관리'가 아니며 '감독과 부기계원'도 아니라는 점. 유기적 지식인이자 활동가라는 점에서 '단순한 집행자'로 끌어내려가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없다. 문제는 지적 차이를 감축하면서 대안적인 조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순번대로"

 

레닌의 첫번째 인용문중에 주목할 만한 한 단어가 있다. "순번대로".

레닌은 베른슈타인이 이러한 자신의 주장(마르크스의 주장)을 "원시적" 민주주의라고 비웃었다고 말하면서 반박한다.(62쪽) 따라서 이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 제도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하의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논의는 주로 "선거는 민주적인가/버나드 마넹"에서 참고한 것이다.)

 

아테네에서 공직은 (선출되는 것도 있었으나) 추첨에서 의해서 선발되었다. 오늘날, 대의제가 지배적인 "민주정"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지만, 그것은 간단히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모든 시민이 지배자이자 피지배자가 되어야하기 때문에 그것은 적절한 제도이다.(아리스토텔레스) 그것은  시민들이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운영에 적합하도록 교육되고 훈련될 것을 요구한다.(정체의 필수적인 유지조건으로서 시민들 사이의 지적차이의 감축) 그리고 그것은 평의회, 법정, 입법 위원회, 민회 등 다양한 기구를 구성하고 필요한 자리에는 선출제를 택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는 시민이 모두 참여하는 민회가 인민 그자체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인민의 규모의 문제, 기술적 문제는 전혀 아닌데, 충분히 대규모 조직에서도 추첨은 가능하다.(법정의 배심원제도와 같이 현재도 운영되고 있으며 충분히 가능하다.) 시민들의 평등한 권리에는 추첨이 더 적절해보인다. 추첨이 무정부적으로 아무나 고르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제도와 기구를 갖추고 있다는 점은 다시 상기해야한다.

 

(이번 공공노조 선거에서 자신이 좌파라고 주장하는 어떤 후보는 자신이 "지도자형"이며 "실무자형"과는 다르기 때문에 위원장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노조가 지향해야할 '민주정'에 대한 생각에 큰 차이가 있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조합원-노동자들은 누구나 공동체에서 지도자이자 피지도자이다. 그것을 고양하고 공동체의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선출될 후보가 특권적인 "지도자형"이 될 것을 요구하는 모델은 전혀 아니다.)

 

한편, 여기서 시민 개념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민은 "일차적으로 민주정에서 존재한다." 시민은 "판결권과 집행권에 참여하는 자이다." 시민은 민주정에서만 가능할 뿐 아니라, 민주정은 판결권과 집행권을 시민에게 부여한다. 그것이 민주정.

 

레닌이 말하는 민주주의 제도에서도 그러한 순번, 혹은 추첨이 사회의 운영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묘사하는데서 나타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노조에서는 그런 것이 불가능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예를 들어 대의원 제도와 같은 경우에는 추첨을 통할 수도 있는 문제다. 아테네에서처럼,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 출마하고, 추첨하며, 다만 선출될 경우에는 회의 참가에 따르는 일급을 지급할 수 있다.(무한히 복잡한 선거제도에 돈을 쓰는 것보다는 이것이 적절한 '민주주의 비용'일 것이다.) 지금의 선거에서 20~30명이 출마한 선거구에서 기계적으로 투표하는 것보다는 민주적이다.

 

(대부분의 선거구가 미달이거나 후보자와 선출자수와 같기 때문에 선거제도가 변별력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없을 뿐더러, 경선이 된다 치더라도 대사업장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며 중소영세사업장은 불리하다. 게다가 과반수 이상 득표해야 당선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나마 정상적으로 노조 기구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간부들은 조합원들에게 "모두 투표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과제들

 

지금 진행되는 선거의 이례성─그 규모 등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새로 만든 조직의 첫선거이며 따라서 아직 '관례'가 아니고 우리에게 '낯설다'는 점─ 은 노조에서 선거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미 민주노총 직선제 주장에서도 직선제가 만능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했던 적도 있지만, 민주주의는 제도의 문제이자 그것을 넘어서는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지금 문제는 관료제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조합원 사이의 민주주의를 증진할 의지와 고민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일부 정파에서 말하는 것처럼 "현장 민주주의"라는 말을 수없이 한다고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제도의 문제이자 그것을 넘어서는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문제의 복잡성 속에서 끈기있게 작업할 수 있어야 겨우 가능할 수 있는 문제다. 물론 첫 시도에서 우리에게는 끈기보다는 감각과 속도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미 많이 늦었고, 당장은 이번 주의 선거, 투표-개표까지 실제로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것이 관건이다. 선거 이후 다시 평가들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그 평가가 선거의 문제들의 해결책으로 다시 한번 관료제의 편의성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증진할 수 있도록 논쟁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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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관련글을 다시 보다가.

겨울철쭉님의 [김명호씨의 아이러니] 에 관련된 글. (내 글에 트랙백)

별로 인기없는 내 블로그에 폭발적인 댓글이 달린 위의 글을 보면서 이유를 생각해봤다. 흠흠..

왜 이런 짦막한 단상이 사람들의 '분노'(내가 느끼기엔 그렇다)를 불러일으켰을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이 사건에 대해 교수노조를 비롯한 지식인 단체들의 대응의 성격은, "(대학-제도권) 지식인들의 경제투쟁"이었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같다. 사실 사법부의 전횡을 고발하려면, 더 분노할 만한 사건은 언제나 더 많았기 때문이다. 최근에만 해도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은 사법부가 돈과 권력 앞에서 어떠한 입장을 갖는지 보여주는 너무나 적나라한 사례였다.

 

김명호 사건과 굳이 비교해보더라도, 이번 건에서는 삼성의 모든 범죄행위는 무죄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제기한 김성환 위원장은 명예훼손이라는 이유로 유죄 판결에다가 집유까지 엎어서 곱징역을 살아야했다. 그냥 피고(성균관대)가 무죄가 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다. 이후에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 김성환 위원장의 옥중 투쟁과 부모님 상, 최근 엠네스티의 양심수 인정 등...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사건들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여러가지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사법부의 권력-자본 유착과 전횡을 폭로하려면 김성환 위원장 사건이 더 심각하고, '극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명호 사건은 언론은 물론 지식인들에게도 다른 대접을 받았는데(물론 후자는 전자의 효과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언론도 만약 아무리 석궁 사건 할애비라고 해도 삼성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신속하게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그럼 지식인들에게는?

 

김명호 사건에 (대학의) 지식인들이 분노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학의 재임용제도의 불합리성과, 이 속에서 드러나는 대학권력의 전횡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법부의 문제로 보자면,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제까지 수많은 판결에서 반복된 문제를 다시 한번 드러낸 것이고, 최근의 다른 사건에 비해서 그 정도가 심각한 것도 아니다.

 

(나는 "비해서"라고 했으니 오해 없으시길, 나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의 판결이 많은 사건에서 이미 일상적이라는 것. 다만 여기서 지식인들이 자신의 문제를 '일반화'하려는 속성이 작용한다. 지식인들은 어쩌면 자신의 특수한 문제인 대학제도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을 사법부의 문제로, 일반화해서 제기한다. 뭐, 나쁘지는 않지만 때로는 다소 뜬금없는 비약이 될 수도 있는 만큼 솔직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다.)

 

문제를 제기하려면 오히려 솔직해지는 것이 좋다. 사법부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대중에게도 호소력을 갖는 그런 '대의'를 스스로 믿기 이전에, 이 사건에서는 대학 재임용제도의 문제가 결정적이라는 것을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최원씨가 이야기한 것과 같은 결론이지만 다소 다른 맥락에서.) 하지만 그런 경우에라도 '재임용제도'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지식생산과 공유의 민주화라는 문제의식으로 나갈 때 최소한 대학 내 지식인들의 경제투쟁을 넘어설 것이라는 점은 언급해두자.

 

나는 이제 김명호가 선생으로서 존경받을만 하지는 않다고 하는 말이 그런 입장에서는 분노스러울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하지만 그가 대학에서 선생으로서 존경받을 만한지는 여전히 전혀 확신할 수 없다.) 재임용 문제가 쟁점이될 때, 그 사람이 교수 자격이 있느냐 아니냐가 핵심적인 쟁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의미에서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문제가 사법부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이 핵심쟁점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김명호의 교수로서의 자격에 대한 비판에 분노하는 입장들이다.

 

결국, 이 문제는 대학-제도 내의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법부의 문제'를 제기하려면 지식인으로서 스스로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 사건과 같은 것에 그 만큼의 정력을 투자해서 공동대응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글에 달린 댓글에 '징후'를 언급한 적이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대학제도권 內이든, 비제도권이든) 지식인들도 자기분석과 자기비판이 필요한 법이다. 무의식과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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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사람풍경, 천개의 공감


사람풍경
김형경 지음 / 예담

천 개의 공감
김형경 지음 / 한겨레출판

  

정신분석학의 여러 개념들은, 나에게는 말 그대로 '개념'들일 뿐이었다. 물론 자기분석을 해보는 과정에서나, 몇번의 정신과 상담에서 드문드문 그 개념들의 현실적 의미를 생각할 수 있었지만, 아무튼 나에게는 그 개념들은 현실의 지시대상이 불분명한 채, 이론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점유하는 토픽(topique)들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두 책은 그 개념들이 현실의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나에게 있어 추상적인 개념들이 현실의 지시대상을 획득했다고나 할까. 놀라운 독서 경험. 사람들에게 추천하거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사람풍경>은 외국을 여행하면서 있었던 이런 저런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정신분석의 개념들, 혹은 사람들의 정념의 정신분석학적 의미를 설명한다. 낯선 곳에서의 여행이, 그 '낯선 것'들을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도 알았다.(그래서 '관광'이 아니라 '여행'이 의미있는 것이란 걸 이제야 알다니!) 

 

<천개의 공감>은 신문에 연재된 상담을 묶은 책으로, 정신적 문제를 앓고 있는 사람들의 사례를 분석하고 나름의 처방을 내려주고 있다. 역시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저자가 각각의 책에서 솔직하게 자기분석의 결과를 책 속에서 드러내는 덕분에 이해가 쉽다. 그것은 또한 똑같이 나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녀와 내가 유사한 정신적 문제를 갖고 있다고 느꼈다면 아마 다른 독자들도 그랬을 텐데, 왜냐하면 우리 대부분이 유사한 정신적 문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형경은 소설가다. 오랜 동안 정신분석치료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비전문가인 작가가 이렇게 구체적이고 능수능란하게 사례들과, 개념들을 다루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비전문가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서 서로 논쟁하는 상이한 학파들의 개념을 편리하게 끌어 쓸 수 있다는 것이, 드문드문 서로 논리적으로 정합하지 않는 설명을 내놓는 단점으로 작용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 정도는 독자들이 가려읽을 일이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많은 것이 나의 이야기로, 어떤 것은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로 들려왔다. 무엇보다 각각의 주체 안에 그런 여러가지 정신적인 문제들이 복합적이며, 그나마 내가 나를 가장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게다. 많은 사람들이 또 그런 각자의 문제를 나와 유사하게 갖고 있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위안이 된다. 많은 이들과 동병상련.

 

이 책들을 통해서 우리 경험의 어떤 구체적인 요소들이, 그를 통해 형성된 무의식의 어떤 측면들이 우리에게 어떤 문제들을 나타나게 하는 지 알 수 있다. 그것도 평범한 우리 모두가, 한국 사회의 가족구조에서 겪었을 문제들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건 매우 값진 일인데, 추상적인 개념 이전에 우리가 가족 속에서 어릴 적부터 겪었을  문제들을 한국의 가족형태, 이 가족형태의 모순 속에서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우리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례가 된다.(어쩌면 소설가로서 저자의 묘사능력이 도움을 주었을 수도 있다.)

 

책을 읽는 동안, 한장 한장을 넘길 때마다 내내 나 자신을 돌아보느라 독서의 속도가 나지 않는다. 나에게 이런 상황은 정신의 어떤 요소를 형성시켰을까, 그래서 내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의 충족 혹은 좌절에 어떻게 반응해왔을까, 때로 그것이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상처도 되었겠구나..

 

그렇게 해서, 나 자신의 고유한 문제를 인식할 수 있게 하고 그것을 한결 더 객관적으로 대면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단번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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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1

 

정신분석 치료는 너무 비싸고 시간도 많이 들어서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은 엄두를 내기 힘든게 사실이다. 이런 종류의 치료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할 때, 건강보험은 물론 이려니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얻어내는 데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뜻맞는 사람들이 있으면 같이 해볼 만한 운동의 하나라는 생각도 든다.

 

그건 그렇고 책을 읽으면서 생각난 노래 두가지만 언급해보자.

 

우선, 델리스파이스의 '동병상련'

여기서 들을 수 있다. : "푸른사막"님의 블로그

어쩌면 모든 것이 여기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왜냐하면 모든 문제들의 근원에 있는 '사랑'이라는 정념이 시작되는 데서, 김형경이 지적하는 것처럼 (자신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사랑을 선택하는 병리적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Simon & Garfunkel의 Bridge Over Trouble Water.

여기서 들을 수 있다. : "나야"님의 블로그

When you're weary, feeling small, When tears are in your eyes.
I'll dry them all, I'm on your side.
Oh, when times get rough and friends just can't be fou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lay me down.

여기서 "I"란 말 그대로 그 누구보다 "나"일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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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2

 

다만 정신분석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경향인 것같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정신분석이 특정한 치료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그 치료의 결과는 사회의 '정상적' 관계망 속으로 환자를 복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 결과, 기존의 사회적 관념에서 부적절하거나 병리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것은 '교정'의 대상이되고 이데올로기적 통념이 '정상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이런 것은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근대 정신의학의 성격으로 지적한 것이다. 정신의학과 결합한 형태로 진행되는 정신분석의 특수성(한국에서만 그런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김형경이 제시하는 정신분석의 실천도 본질적으로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서 직장에서 반항적인 여성에 대해서 외디푸스 컴플렉스단계를 제대로 거치지 못했다고 진단한다거나(-따라서 그 단계를 반복해야한다고 말할 때), 군복무가 나르시즘을 치유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거나하는 언급 등이 있다. 정상가족이 정신건강을 위해서 필수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도 있다. 매번의 정신적 문제가 해결되는 목표는 '가족의 유지'가 되기도 한다.(그럼 다른 가족 형태를 시험하는 것은 정신건강에 해로운 일로, 지양되어야하나?)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통념, '정상'이라고 규정된 정신적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주체의 무의식을 치료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정신분석과 이를 통한 치유의 결과가 기존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통념에 기초한 '정상적인 상태'에 이르러야만 주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까? 설사 그렇다고해도, 그렇다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다른 종류의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단적인 주체는 치료의 대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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