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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별노조-지역운동에 대한 추가적인 토론

지난 2월9일(금)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에서는 "산별노조 시대, 노동자운동과 지역사회운동"이라는 이름의 정책워크샵이 열렸습니다. 토론자의 한명으로 참석했습니다. 아래에 올린 <공공노조, 쟁점과 전망>을 다소 수정-보완해서 토론문으로 제출했습니다. 회원들과 지역의 몇몇 노조 활동가 동지들이 함께 한 가운데 의미있는 토론들이 있었습니다. 토론을 하면서 몇가지 생각난 지점들.

 

지역에서 노조가 사회운동을 함께 한다는 것

 

이 것은 노조가 자신의 문제를 지역의 문제로 제기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것인데요, 두 가지 과정이 결합되어야할 것으로 보입니다. (1) 우선 다소 중장기적으로 지역 공동체의 문제로 노조의 문제가 인식될 수 있어야한다는 것. 이는 노조의 다양한 노력이 필요할 것인데, 운동프로그램들만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죠. (2) 덧붙여 노조가 자신의 문제를 신자유주의의 문제로 제기할 수 있어야한다는 점.(사업장의 구조조정 문제와 같은 것이라도 말이지요.) 특히 두 번째 과정을 통해서 지역공동체가 처한 문제와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이 처한 문제의 동일한 원인을 공동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또한 이 속에서 노조는 자신의 투쟁을 광범위한 사회운동의 일부로서 위치지울 수 있겠죠.

 

두 가지는 서로 상이한 실천프로그램들을 요구할 것인데, 그것은 노조의 상황이나 지역의 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역차원에서 상시적으로 노동조합운동, 사회운동들이 공동의 운동을 기획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런 기획이 이런저런 조직적 조건, 인적 연계망을 통해서 활성화된 곳에서 이런 시도들은 어느 정도 성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역경제살리기"

 

신자유주의 불균등 발전전략 속에서 배제된 지역에서는 특히나 '지역경제살리기'라는 이데올로기가 강력합니다. 노동자들의 장기투쟁이 전개되는 지역에서는 어디서나 이런 식의 운동이 지역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일어나는데요, 건설노동자들이 투쟁했던 포항에서도, 현대하이스코 투쟁이 있었던 순천에서도, 건설플랜트, 현대차 노동자들이 투쟁했던 울산에서도 비슷합니다. 이건 결국 블랙홀이 되어서 노동자들의 요구의 해결이라는 것도 이런 틀에서 제기되기도 하는데, 그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이죠. 심지어 민주노동당 마저도 울산시장선거에서 "오토밸리의 적임자는 민주노동당"이라는 식의 공약이 제시되었는데, 대안적인 지역운동에 대한 방향이 없이 지역발전주의에 포섭되고 그것을 강화하는 꼴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지역경제살리기"와 다른 방식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제기될 수 있고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생각해보아야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저보다는 비수도권지역의 동지들이 더 답을 줄 수 있을 것같군요.)

 

그밖에 토론문에 이런 내용을 추가했었죠. 참고로.



 1. 산별노조 건설과 지역운동 강화는 별개의 과정

 

o 현재 산별노조 건설운동은 지역운동을 강화한다거나 사회운동적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서 추진되는 것은 아님. 다만, 그러한 운동을 강화할 수 있는 정세적 조건이 형성된다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주의해야


o 역사적으로도 산별노조 건설이 자동적으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노조운동의 활성화로 귀결된 것은 아니며 이는 별개의 운동과제로서 조직내에서 추진되어야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 특히 사회운동적 성격의 강화라는 쟁점은 ‘사회공공성’이라는 정책방향으로 제시되는 데 이것을 넘어서는 운동기획이 또한 도입되어야한다는 점.


o 오히려 산별노조 자체의 적극적인 의의는 ‘초기업’, ‘초업종’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음. 노동자들이 단위 기업 안에서 협소한 경제적 이익을 방어하는 것을 넘어서는 최초의 단계라는 점
- 이러한 점에서 산별노조 건설 과정에서 초기업적 운영, 초업종 운영은 각별히 강조될 필요가 있음. (산별노조 조직구조와 관련된 논쟁은 이러한 쟁점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조직형식적 논쟁이라는 한계가 있음. 오히려 적극적으로 내용적인 논쟁이 필요한 시점.)

 

2. 지역운동 강화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반대, 대안세계화 운동과 연결되어야함

 

o 지역운동은 그 자체가 독자적인 질을 갖는 것은 아니며, 지역자체를 강조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운동적인 의의가 확보되는 것은 아님


o 지역공동체의 특수한 이익을 위한 운동으로 전개될 경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보편적인 노동자계급 주체를 형성하려고 하는 시도와는 무관하게 진행, 현실에서 지역운동을 강조하는 일련의 흐름은 지역차원의 특수한 이익을 강조하는 경향도 존재함 : 울산에서 민주노동당의 ‘오토밸리’ 활성화 공약


o 그러나 지역공동체와 노동조합이 사회운동의 측면에서 결합하는 사례는 보편적인 정치투쟁과 연결될 때 가능했음. 현재의 시기에 그것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반대, 대안세계화 운동과 연결되어야함


o 이를 위해서는 지역차원의 운동전략이 노조운동과 사회운동 일반에서 공동으로 수립될 필요가 있음. 현재 상황에서는 오히려 산별노조의 지역조직이 사회운동적 의제를 외삽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음.

 

3. 지역차원의 ‘공동체 형성’이라는 문제가 특별히 강조되어야함

 

o 공공노조의 경우는 더욱 심한데, 노동자들의 생활조건, 문화는 모두 천차만별임. (공공노조의 경우 같은 지역안에서도 임금차이가 수배에 이르고 직종도 고액연봉 연구자에서 청소원에 이르기까지 다양)


o 지역차원에서 조직적 단결을 이루어내고 ‘같은 지역의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식-조직이데올로기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음. ‘시혜’가 아니라 연대를 위해서는 정체성 형성에 대한 개입이 필수적임. 이러한 공동체 의식을 형성해야하기 위해서는 문화 사업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야함.


o 이는 노동자 문화 운동에 다른 접근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기업별노조(업종별) 운동을 넘어서 노동자 운동의 ‘일반화’를 위해서 필수적인 과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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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노조, 쟁점과 전망

월간 사회운동에 실릴 공공산별노조 관련 글입니다. 아직 2월호인데 아직 안 나온 것같네요. (아마 편집과정에서 조금 수정은 있겠죠)

공공노조도 현재 노조운동의 산별노조 전환과 관련해서 (금속보다는 중요성이 덜 할지도 모르겠지만) 주목해야할 과정입니다. 하지만 금속과는 또 다르게 관심 대상이 아니거나 혹은 잘 소개가 되고 있지 못합니다. 가장 큰 원인은 논쟁이 부재-과소결정되고 관료적인 건설과정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한계와 가능성을 모두가진 과정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지금 2대 직선임원, 대의원 선거가 진행중입니다. 처음하는 직선선거라 이 실무를 진행하는 입장에서도 만만치 않군요. 또 조합원들이 '직선'이라는 명분 하에서 표찍는 기계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고민도 됩니다. 어떤 선거구에서는 한 조합원이 30여명의 후보에게 투표해야하는데, 이건 거의 말 그대로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 합니다. (직선제는 어쩌면 활동가들의 편리한 알리바이. 한 조합원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30여명의 후보에게 투표하는 게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되냐는 겁니다.)

지역본부와 함께 업종본부를 골간으로 이중적으로 인정하다보니 생긴 문제이기는 하지만서도, 더 근본적인 문제는 초기업적인 활동이 개시되기도 전에 형식부터 규약-규정의 형식논리에 따라서 만드려다보니 조합원들에게 그 책임과 부담을 전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산별의 내용보다 형식을 우선 만드려다보니 생긴 문제라고 할 수 잇는데, 더 큰 문제는 조합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일 겁니다.

그걸 조금이라도 넘어보려고 아둥바둥(이런 표현이 이렇게 절실한 적이 없습니다)하고는 있지만 쉽지는 않군요. 제도의 한계에 여전히 제한됩니다. 이후, 공공노조의 지역활동을 조직하고 창출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해야할 텐데 그것 역시도 쉽지만은 않은 과정. 그래도 아래 글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의미와 한계가 모두 공존하는 상황이니, 정세의 호기를 포착해야겠죠.
 



공공연맹을 중심으로 진행된 공공부문 산별노조 건설 노력은 작년 11월30일 “전국공공서비스노조”(이하 “공공노조”)가 출범 발기인대회를 개최하면서 실질적인 조직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조합원 직선으로 선출하는 1기 집행부 선거가 준비 중에 있기 때문에, 여전히 공공노조는 ‘건설과정’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현재 약 3만5천여명의 조합원이 가입되어 있다. 공공노조는 주로 공공연맹 가맹조직을 중심으로 기업별노조 혹은 (기업별 지부를 중심으로 한) 업종노조의 조직전환을 통해 구성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기존 노조들의 조직전환을 통한 합병이라는 방식으로서, 산별 “전환”의 의미, 쟁점이 어떻게 형성될 것인가를 규정하는 조건이 된다.

산별노조 출범 이전까지의 여러 쟁점은 산별노조 출범 이후에는 변화된 조건에서 다른 방식으로 전위되고 있다. 그러나 전체 과정의 쟁점은 일관된 흐름을 갖는데, 이는 산별노조라는 하나의 조직형태를 둘러싼 서로 다른 이해를 반영한다. 특히 현재 시점은 11월30일 이후 2월 28일까지로 예정된 1기 과도기 집행부의 임기가 막바지로 접어들고, 직선제로 선출되는 2기 집행부 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이와 함께 새로운 쟁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는 산별노조 출범 이전의 쟁점들에 대해서 모두 언급하기는 힘들고, 다만 현재의 쟁점과 구체적으로 연관된 것까지만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기업별 노조의 조직전환과정이라는 특수성 혹은 한계

공공노조는 주로 기업별 노조, 혹은 기업별 조직을 골간으로 하는 업종노조(문화예술노조, 시설관리노조 등이 여기 속한다)들의 통합을 통해 건설되었다. 따라서 조직 형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들은 기존의 활동단위였던 기업별 조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재편할 것인가와 연관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산별노조 건설이란 기업별 노조를 넘어선 더 큰 단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제시되지만, 많은 ‘산별노조’들에서 실제 활동은 기업별 조직단위를 기본으로 하는 방식을 넘어서지 못해왔다. 이는 노동자 의식을 기업 내에 제약하는 것으로 이해된 기업별 조직을 넘어서는 것이 산별노조의 실질적인 목표가 아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노조의 합병을 통해 규모를 키우고 이를 통해 (결국은 기업 내부로 귀결되는)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산별노조 건설의 현실적인 이유는 기업별 조직과 활동방식을 넘어서기 위한 운동을 활성화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었다.

공공노조도 기업별 구조를 점차 극복하고 통합력을 증진하기 위한 과제를 안고 있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향은 논쟁적이다. 산별노조 출범과정에서 △ 조직의 골간단위를 (광역)지역본부로 완전 재편하며, △ 200명 이하의 중소사업장은 초기업 통합지부를 구성하도록 하는 등의 방안은 3년간 유예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특히 조직의 골간단위를 (광역)지역본부로 완전히 재편하는 방안은 일부 노조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기본방침으로 ‘선언’은 되었으나 강제력은 없는 상태다. (현재 공공노조는 지역본부와 업종본부를 모두 골간으로 인정하는 이중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특히 기업별 구조를 넘어서는 산별노조를 만들기 위한 쟁점은 지역본부 강화냐, 업종본부 유지냐는 논쟁과 혼재되어 진행되었다. 장기적인 조직의 재편방향에서는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구조가 옳다는 것이 동의되었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에는 큰 이견을 보였다.

특히 주로 업종본부의 유지, 활성화에 관심을 갖는 동지들은 기존에 ‘소산별노조’(업종노조)를 구성하고 있던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공공산별노조 내부에서 기존의 조직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산별노조’들이 산별노조 건설과정에서 보여준 입장은, 소산별이라는 ‘과정’을 경과하면 산별운영을 더 차근차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산별노조로 전환한 소산별노조 조직들은 여전히 기존의 조직체계를 유지하는 데만 관심을 가졌으며, 지역에서 보다 폭넓은 단결을 위해 자신을 넘어서는 데는 소극적이거나 역행했다. 또 공공연맹 내 대표적인 소산별노조였던 과학기술노조, 공공연구전문노조, 발전산업노조 등은 오히려 공공노조로 전환하지 못하거나 이를 위한 논의계획도 잡고 있지 못한 상태로 여전히 ‘소산별노조’(업종노조)로 남아있다.

지역본부와 업종본부

결국 조직형태는 절충적으로 구성되었다. 조직의 골간으로 업종본부와 지역본부를 모두 인정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다만,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을 발전시킨다는 지향을 실현하기 위해서 대의원, 사업비, 인력 등에서 지역본부에 가중치를 두는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절충’은 조직 구조를 과도하게 복잡하게 만들 뿐 아니라, 향후 운영과정에서 권한의 충돌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모든 종류의 집행기구, 대의기구의 선거를 이중으로 진행해야하며, 사업도 이중으로 진행된다. 이로 인해 노동조합 관료조직이 더 비대하게 구성되어야하는 문제도 발생한다.

논의 과정에서 업종본부는 그 규모는 크게, 개수는 적게, 지역본부는 가능한 지역에 최대한 설치하는 것을 방향으로 했다. 여기에는 가까운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사업을 활성화하고자한 의도도 반영되었다.

지역중심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시도

이러한 상황에서도 지역중심의 연대를 강화하고 이를 조직구조에도 반영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진행된다. 이러한 노력들은 산별노조 건설이 열어놓은 조직 재편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우선 초업종 지역지부를 산별노조 안에 구성하기 위한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다. 초업종 지역지부란, 조직의 구성과 활동에 있어서 기업별 활동을 넘어설 뿐 아니라 업종별 활동도 넘어서 통합조직을 구성하고 지역연대를 강화하는 것을 지향으로 한다. 한 지역에서 서로 다른 사업장, 업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라도 같은 지역 조직틀 안에서 일상활동과 투쟁을 함께 하면서 조직을 융합하는 것이다.

주로 기존에 “지역공공서비스노조” 등 지역노조들이 활동했던 광주전남, 대구경북, 전북, 서울 등에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산별노조의 활동과 조직형태가 지역을 중심으로 해야한다는 문제의식 하에서 이를 우선 실현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을 우선 함께 하는 단위들은 앞서 언급한 “(舊)지역공공서비스노조”들과 주로 보육, 자활, 사회복지시설 등 사회복지 관련 노조, 학교비정규직 단위 등 중소영세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이다. 전국에 지역별로 산재하고 있거나, 저임금, 비정규직인 경우가 많고, 지방자치단체 등과도 직간접적인 사용자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 부문의 노동자들은 지역을 중심으로 연대를 확장하는 것이 노조활동을 강화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다. 또한 이들 조직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것을 조직자체의 지향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지역을 단위로 하는 적극적인 조직화 사업으로 나타난다.*1)

주1) (舊)지역공공서비스노조 활동의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공공연맹 서울지역본부 건설과 지역 노동자 사회운동」, 박준형(월간 사회운동 2006.6)을 참고

이들 뿐 아니라 주로 보건의료노조에서 탈퇴한 병원사업장을 중심으로 구성된 (舊)의료연대노조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운동의 강화를 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다. 최소한 기업별지부를 넘어선 지역단위의 업종지부를 구성하고자하며, 각 지역에서 중소영세병원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사업을 핵심으로 배치하고 있다. 또한 장기적 전망으로는 초업종지역지부를 구성해야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각 지역에서 초업종 지역지부를 구성하고자하는 단위들(사회복지 관련 단위, 舊지역공공서비스노조, 舊의료연대노조)은 지역중심의 연대활동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별도의 업종본부 설치를 논의하게 된다. 현재 “사회연대본부”라는 이름으로 구성된 이 업종본부에는 (舊)사회보험노조(국민건강보험공단), (舊)사회연대연금노조(국민연금공단)까지 함께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이런 과정에서 애초 골간조직의 한 축으로 규정되었던 ‘업종본부’는 사회연대본부, 통합본부, 환경에너지본부, 공공시설환경본부라는 4개의 업종본부가 설치되는 것으로 논의가 정리된다. (통합본부는 독자적인 업종본부를 설치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은 단위들이 함께 구성한 것으로, 정보통신, 문화예술, 경제사회단체 등을 포괄한다.) 사회연대본부는 물론 ‘통합본부’까지 ‘초업종 업종본부’인 상황에서 이들은 전체 조직의 2/3정도를 점하고 있다.*2) 게다가 지방자치단체를 직간접 사용자로 하기 때문에 지역중심의 활동이 필수적인 공공시설환경본부까지 감안하면, 실제로 업종본부 위상에 맞게 실질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단위는 아직 1만명 미만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환경에너지본부 정도에 불과하다.

주2) ‘초업종 업종본부’라고 내가 칭한 용어 자체가 업종본부 설치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기본적으로 많은 업종의 노동자가 함께 조직을 구성할 수밖에 없는 공공부문에 있어서 ‘초업종’이라는 것은 모든 조직단위 구성의 기본적인 조건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다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조건은 결국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구조를 편제하고 활동을 배치하는 방향으로 공공노조가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고 있다.

<전국공공서비스노조 조직구성>
o 지역본부(12개) : 서울본부, 경기본부, 인천본부, 강원본부, 충북본부, 대전충남본부, 전북본부, 광전제주본부, 대구경북본부, 울산본부, 부산본부, 경남본부,
o 업종본부(4개) : 통합본부, 공공시설본부, 사회연대본부, 환경에너지본부

일정에 쫓긴 건설과 현장의 부담

한편, 건설일정을 먼저 확정하고 조직형식적인 투표 절차 등을 중심으로 구성하기 시작한 산별노조 건설은 여러 가지 지점에서 점차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산별전환 투표를 독려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논의되거나 검토되지 못한 쟁점들이 현장에 잠복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산별노조로 전환하면 조합비를 그렇게 많이 산별노조 중앙에 올리는지 몰랐다고 하면서 불만을 토로하는 현장간부도 있을 정도다.

현재 조직정비과정을 선거라는 계기를 통해 일단락하기 위한 준비가 진행 중이다. 그러나 정해진 일정을 중심으로 조직전환을 독려한 결과, 많은 무리가 나타나고 있다. 조직재편에 대해서 현장의 조합원들과 논의는커녕 이해조차 제대로 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초의 직선제 선거가 준비되고 있지만, 각 집행단위, 대의원 선거를 위한 후보도 미달사태를 겪을 것이 우려된다. 이런 조건에서 2월초부터 선거일정에 돌입하면 조합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공동활동의 경험이 축적되지 않은 상황에서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생소한 조직출신의 후보들에게 투표부터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조직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각종 회의는 사업장 단위의 기본적인 노조활동을 마비시킬 정도이다. 현장간부들이 임단협 준비, 현장간담회와 같은 기본적인 일정조차 소화하기 힘들다는 목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이러한 문제는 조직을 우선 형식적으로 통합하고 내용을 만들어가는 경로를 취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더구나 내용적 준비를 하는 것은 물론 형식적인 준비를 하기에도 3개월이라는 과도기 집행부 임기는 너무 짧았다는 것도 확인되고 있다.

전망 ; 가능성과 한계의 공간으로서 산별노조

눈썰미 있는 독자들은 이러한 논쟁들을 살펴보면서, 과도하게 조직형태에 논란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공공노조에서는 금속노조와도 다르게 과연 산별노조를 통해서 어떤 투쟁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거의 제기되지 않고 있다. 하다못해 올해 산별노조의 임금요구는 어떻게 만들 것인지, 1년차 산별노조의 핵심투쟁 의제는 무엇으로 할 것인지, 산별교섭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 대한 논의가 모두 이루어지지 못하거나 혹은 쟁점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진행되는 이유는 산별노조 건설이 투쟁을 통한 단결의 확대보다는 조직 통합에 더 방점이 찍혀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우선 지적할 수 있다. 특히 2006년에 7월에 공공연맹이 집중하고자 했던 대정부 투쟁이 사실상 맥없이 마무리된 상황도 산별조직 하의 공동투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활성화되지 못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렇게 조직형태에 논란이 계속 집중되는 이유는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다. 공장단위의 조직형태를 취하는 제조업과는 달리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의 조직형태가 다양하고 복잡하다는 점, 금속노조와는 달리 산별노조의 축적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조직논의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조직형태 논의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닌데, 이를 통해서 지역을 중심으로,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중심으로 노조운동을 재편하고자하는 다양한 시도가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산별노조 건설의 하나의 ‘효과’로서 그 동안 지지부진했던 지역운동 강화를 위한 실질적인 논의가 촉발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초업종) 지역지부는 산별노조로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논의조차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대기업노조의 지역조직들을 지역사업에 결합시키는 것도 산별노조로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더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산별노조 건설을 통해서 새로운 조직적 가능성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산별노조 건설과정에서 이렇게 새로운 운동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은 몇몇 공간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특히 각급 집행단위, 대의기구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준비를 비롯해 산별중앙-업종/지역본부 등 상급조직을 구성하는데 많은 역량이 집중되고 있다. 이로 인해서 출범한 지 불과 2개월에 불과한 공공노조에 벌써 현장공동화, 관료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공공노조가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될 ‘건설과정’에서 몇 가지 점이 특히 강조되어야한다.

우선, 산별노조 건설 과정이 조직체계에 대한 논란을 넘어서 산별노조 차원의 투쟁과 일상활동 등 ‘사업’이 실질적으로 준비되어야한다. 조직체계를 제대로 세우기 위한 준비도 매우 중요하지만, 이러한 각급 조직의 구성이 투쟁, 사업과는 분리될 수 없다. 선거기간이라는 이유로 이들 논의가 서로 분리되고 연기된다면 조직형식주의에 빠지고 말 것이다. 지역본부라면 지역차원에서 지방자치단체를 사용자로 하는 조직들의 교섭쟁취 투쟁, 지역공동 임단투와 지역교섭단 구성에서 시작할 수 있다. 이 사업들은 지역차원에서 ‘공공성’을 쟁점으로 한 사회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야한다. 산별노조 중앙 역시 올해 임단투부터 시작하여 ‘공공성’을 쟁점으로 한 사회적 투쟁까지 나가기 위한 계획이 준비되어야한다.

두 번째로, 산별중앙, 지역본부, 업종본부 설치과정이 현장공동화 혹은 관료기구의 비대화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는 매우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이들 기구나 사업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식의 주장은 아니다. 산별노조 건설은 기업별 현장의 활동을 지역, 산업으로 확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 상급기구의 구성과 강화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각급 단위의 사업이 현장활동을 활성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집중되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일상활동과 투쟁을 함께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인 지역본부 사업과, 이 사업과 각 지부 사업의 결합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

세 번째로, 지역을 중심으로 연대활동을 활성화할 수 있는 다양한 노력이 이루어져야한다. 산별노조 안에서 지역차원의 단결을 확대하는 것은 기본이지만, 민주노총 지역본부 사업에 대한 결합력을 강화하는 등 산별노조를 넘어서는 지역차원의 단결에 기여해야한다. 또한 지역적 단결의 확장이란 지역의 노동자 운동 뿐 아니라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확장-강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지역사업을 강화하고, 지역 내 연대투쟁을 활성화하는 것을 조직적 목표로 해야한다. 이러한 과정은 조직재편 과정에서도 앞서 언급한 (초업종)지역지부의 구성, 지역본부의 강화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공공노조의 건설과정은 다른 이미 건설된 산별노조들과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주체적이고 객관적인 강력한 현실적 제약 속에 놓여있다. 따라서 이 노조는 이전의 다른 경험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기업별조직의 연합체의 역할을 반복할 수도 있으며 그럴 가능성이 오히려 높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노조는 ‘보다’ 지역에 가깝게, ‘보다’ 사회운동에 가깝게 운동을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여전히 열려있다는 점을 지적해야한다. 따라서 이미 건설된 산별노조 가 이러한 운동적 지향을 강화할 수 있는 산별노조의 사업을 수립하고 지역적 거점들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지역적 거점을 강화하는 노력은 일부 공간에서 ‘실패’하더라도 또 다른 일부에서는 운동적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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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운수산별노조와 공공-운수 4개 연맹 통합>

공공연맹, 화물통준위, 민주택시연맹, 민주버스노조 등, 4개 공공-운수 연맹 조직의 통합은 공공노조와 운수노조 건설 논의 과정의 결과이다. 애초 공공연맹 내에서 산별노조 건설의 경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쟁점은 결국 공공노조와 운수노조를 별도로 건설하고 이를 재통합하는 것으로 논의가 정리되었다. 이는 최소한 공공연맹이 포괄하는 업종을 하나의 노조로 통합해야한다는 주장과, 몇 개의 업종노조를 우선 건설하고 이를 재통합하자는 주장이 경합한 결과였다. ‘몇 개의 노조’를 공공노조와 운수노조 정도로 정리해서 합의된 셈이다.

이러한 건설경로에 관한 논쟁은 이미 금속산업에서 산별노조 건설과 관련해 벌어진 논쟁과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대산별조직을 건설하고 이를 지역중심으로 운영하고자 하는 입장과, (비록 대산별노조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업종별 조직을 활성화하고자한 입장이 서로 대립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2005년 5월, 민주버스, 민주택시, 화물통준위, 공공연맹 4조직 대표가 회합하고 ”운수노동자들의 대단결과 산별 건설을 위해 공동 노력한다“고 합의한다. 이는 공공연맹 내외의 운수조직과 산별노조 건설을 동시에 추진한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논의는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2006년 안에 공공노조와 운수노조를 별도로 건설하되 2007년 말까지 재통합한다는 합의를 만들게 된다. 이에 따라 공공노조와 운수노조는 각각 2006년 11월30일과 12월26일 창립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은 정치적 타협의 결과다. 조합원들은 오히려 ”1년 후에 합칠 조직을 왜 따로 만드냐“고 묻는다.

그러나 운수노조 출범은 공공-운수 4연맹 통합과 밀접하게 연관된 과정으로서, 연맹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출범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통합과정은 각 조직의 이견으로 인해서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민주택시연맹 등이 통합예정 1주일을 앞두고 제출한 새로운 입장은 기존의 통합관련 논의를 모두 혼란에 빠트리면서 통합대의원대회 하루 전까지도 개최 여부가 결정되지도 공지되지도 못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결국 12월26일 통합대의원대회가 진행되었지만 결국 성원미달로 회의 중간에 유회되었다. 해를 넘겨 1월23일 다시 개최되어 비로소 통합이 이루어졌지만 이 기간 동안에도 현장토론 등은 거의 진행되지 못하였다.

운동의 역사들이 서로 다른 조직들이 공동투쟁의 과정도 없이 ‘통합준비위’ 몇 명의 논의를 통해서 조직을 통합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지지부진한 논의과정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이 과정에서 조직통합에 대한 각 단위노조, 현장 논의는 거의 진행되지 못했다. 게다가 사실상 운수노조를 출범시키기 위해 진행된 연맹통합과정은 기존의 조직적 질을 상승시키는 과정이라기보다는 하향평준화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공공연맹의 지역본부는 통합연맹에서는 모두 해체되고 지역협의회 수준으로 격하되었는데, 이는 별도 의결기구, 상근자, 예산도 없다는 의미다. 기존이 연맹 기능도 대폭 축소된다.

공공-운수 4연맹 통합은 조직통합을 통해 규모를 확대하고자하는 시도가 얼마나 조직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조직적 단결의 확대가 공동사업, 공동투쟁을 전제하지 않고 추진될 때에는 최소한의 민주적인 토론조차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 결과, 조직적 질을 상승시키는 효과도 만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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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 바탕화면을 바꾼다는 것

하루중 많은 시간 동안 pc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바탕화면은 나름대로 사소하지만 신경쓰이는 고려사항이다. 바탕화면을 어떤 이미지로 설정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성격이나 정서가 드러나기도 한다. 아니면 일부러 무미건조한 바탕화면을 쓰거나 아니면 아예 그림없는 단색으로 쓰기도 한다.

 

내가 사용하는 pc는 세 개인데, 하나는 집에 있는 개인 pc, 사무실 pc, 그리고 노트북까지다. 각각에 깔려있는 바탕화면들은 다르기도 하고 공통되기도 하는데, 여튼 평균 한달 정도 주기로는 바뀌는 것같다. 바탕화면바꾸기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기분전환 수단 중에 하나다. 그리고 이 것들은 어느 정도는 그 당시의 기분을 반영하기도 하는데, 그런 점에서 정신분석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무실 pc에는 이런 화면이 깔려있다. (이 바탕화면들은 모두  "가까바탕화면"creensaver.pe.kr s 사이트에서 다운 받은 것이다. 가장 괜찮은 바탕화면 사이트. 이미지가 커서 로딩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겠다.)

 

 [크게보기]

 

주로 업무용으로, 낮에 사용하는 pc에는 요즘에는 이 그림이 깔려있고, 노트북도 비슷한 이미지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집에 개인 pc에는 이런 그림이 깔려있다.

 

[크게보기] 

 

역시 밤에 많이 쓰는 pc여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더 개인적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

이 그림을 보고 물끄러미 있으면 그림 속 눈발날리는 강변에 서 있는 것같고, 걷고 있는 것같고, 길을 걷다가 누군지 모를 어떤 사람이 손을 내밀 것같다. 역시, 깊은 밤에 와인이라도 한두잔 마셨을 때 이야기다.

 

둘의 공통점이라면 모두 어디론가 이어진,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라는 것. 그곳을 걸어가면 어디에 닿을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어디론가 이어진 길을 걷는다. 길을 욕망하는 내가 만날 길은 어디로 이어져있을까. 숲속의 그 길은 어디로, 그리고 눈발날리는 강변, 밤길은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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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노조 활동가들의 노동조합

EM님의 [상근자 노조 논쟁(?)에 부쳐] 에 관련된 글.

 

민주노동당의 상근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든다는 일로 논쟁이 되고 있던 즈음, (뭐 우리밖에는 아무도 관심갖지 않았지만 ^^;) 나를 포함한 공공연맹의 상근활동가들도 공공노조의 지부형태로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의 경우에도 최종적으로 지금 진행되는 선거인 명부가 확정되는 2월18일 전에 가입절차를 마무리할 것을 상근활동가동지들에게 적극적으로 제안했고, 며칠후 '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민주노동당노동조합의 간부를 이런저런 일로 우연찮게 보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연맹의 상근활동가 동지들에게 적극적으로 공공노조에 집단 가입할 것을 제안했던 이유는, 우리가 그 운영에 함께 하는 조직에 정당한 일원으로 책임을 갖고 또한 그에 걸맞는 발언을 할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제안하고 나서 보니 주로 "전진"쪽 선배상근활동가들은 이미 각자 개별적으로 가입원서를 공공노조에 제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참.) 그 조직의 일원이 아니라 단지 '월급받고 채용된 사람'의 위치에 남는다면 그것은 계속 관료기구의 실무자가 될 뿐이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핵심적인 것은 '멤버쉽'이었던 것이다.

 

사실, 채용 상근활동가들은 유리한 조직적 위치에서 큰 힘을 발휘할 때도 있지만  부당한 배제를 당하기도 한다. 연맹에 있는 1/3 정도의 상근활동가들은 단위 노동조합에서 직선간부의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나머지 동지들도 단위노조의 경험이 있는가의 여부를 떠나서 책임있고 훌륭한 동지들이 많다. 하지만 정당한 조직적 멤버쉽을 갖지 못한 모호한 상태에 있었다. 연맹 소속 노조의 직선 사무국장으로 있다가 사업장을 퇴직하고 연맹에 채용상근자로 올라온 동지라도 같은 상황. 민감한 정치적 문제에서는 배제되었다. 다만 (힘쓰는 정파에 속한 경우에) 정파들을 통해서 비공개적으로 개입하는, 부적절한 관행만이 그것의 결과였다.

 

나는 공공노조의 '연맹사무처지부'(일단 향후 초업종 지역지부가 구성되기 전까지는 독자적인 지부형태를 취하기로 했다. 서울지역지역지부가 구성되는대로 통합하는 것을 전제로 지부를 설치했다. 서울지역의 초업종지역지부와 관련해서는 이 블로그의 <우리들의 미망 혹은 희망>을 참조.)가 상근활동가들이 공공노조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는 점과 더불어, 일반적인 노동조합 활동과는 달라야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EM님이 위의 글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말이다. (그에 비해서 일각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노동자가 아니라거나, 노조를 만들 수 없다거나 하는 주장의 문제점은 이미 EM님이 정리했거니와, 적어도 그것들을 쟁점으로 제기하는 수준은 넘어야 의미있는 논쟁이 가능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이 구조적으로 가지는 한계 때문이다. 노조에서 활동하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직하다면, 노동조합 조직은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의 1번인 '법 이데올로기'에 기초하고 있다. 그 이데올로기는 노동조합의 조직적 기반을 규정할 뿐 아니라, 매시기 활동의 모든 측면에 전방위적으로 침투한다. 우리는 매순간 그것들과 전투를 치루어야한다.

 

노동조합은 조직의 구조, 운영방식, 활동의 범위, 활동양식 등 전반을 노동관계법을 중심으로 한 부르조아 법에 의해서 규정되는 제도다. 그래서 그것은 (알튀세르가 탁월하게 지적했듯이) 역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AIE의 하나이다. 노동조합의 규약이라는 것도 사실 법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닌데, 규약으로 풀리지 않는 (내부운영 등에 대한) 쟁점이 종종 법정으로 간다는 사실은 그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 노동조합의 활동과정에서도 그것은 느낄 수 있다. 노동조합의 활동은 부르조아 국가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무해하다고 인정된 경제적 투쟁에 국한되며, 그것을 관리한다. 경제투쟁이 한계를 넘어서 법의 규제를 받는 순간까지가 노동조합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이다.

 

물론 최근의 경험에서도 80년대말과 전노협 시기에는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가장 빛나는 시기이며 항상 기억해야하는 투쟁이다. 우리가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이유라면, 그 속에서 이러한 법적 제한에 갇히지 않는/을 주체를 형성하는 계기를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때때로만 성공하지만, 지속적인 과정이다. 노동자들이 결사체인 노동조합이 법 이데올로기에만 제한되지는 않는 자신의 생명력을 갖기 때문이다. 활동가들은 그 과정에 개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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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AIE에 대해서는 (직접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알튀세르를 인용하자.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1970)」,『아미앵에서의 주장/1991,솔』에 실림, 무엇보다 전체를 직접 읽는 것이 좋겠지만.)

"계급투쟁은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적인 형태들 속에서, 따라서 AIE들의 이데올로기적 형태들 속에서 표현되고 시행된다. 그러나 계급투쟁은 이러한 형태들을 훨씬 넘어선다. 그리고 피착취계급의 투쟁이 또한 AIE들의 형태들 속에서 시행될 수 있고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라는 무기를 권력을 쥔 계급들에게로 돌릴 수 있는 것은, 계급투쟁이 그러한 형태를 넘어서기 때문이다."(각주11, 강조는 원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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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들도, 자신의 조직형태를 노조로 규정하는 순간 같은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그들의 노동조합은, 그 제도 자체의 정의에 따라 '사용자'를 누군가로 정의하고 '단체협약', '임금협약'을 요구하며,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익을 모아내려한다. 그리고 이에 걸맞게 자기 조직 구조를 형성한다. 그것이 노조 활동의 시작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굳이 만들 조직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를 묻게된다. 이러한 노조 기구의 한계를 인식하는 활동가들이라면 오히려 평의회 형태를 조직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집단적인 발언을 하기 위해서 상호 평등한 관계에서 토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조직으로서 말이다. 설사 그것이 노동조합의 형태를 취했더라도 그 운영이 기존의 노동조합과 같은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런 점에서, 사후적인 이야기이지만 만약 다른 상황이었다면, 내가 민주노동당 상근자였다면 민주노동당과 같은 경우에는 '당직자 평의회'와 같은 형태를 제안했을 것같다.(물론 조직형태만이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곳에서는 '조직이데올로기'가 작동하며, 그것은 조직의 성격자체를 규정하는 충분히 강력한 요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조합 형태를 취하는 것은 가볍게 볼,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민주노동당과 같은 조직 안에서도 노동조합 조직형태를 반복한다는 것은 그 당이 스스로도 대안적인 구조와 운영을 실현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노동당 노동조합을 만든 동지들만의 책임은 아니며, 당의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다. 그것이 당직자들에게 당지도부와 자신들의 관계가 '노사관계'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날 때 당직자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얼마나 가능할까?  다만 노동조합이라는 조직형태로 인해 부여되는 가상--부르조아 법이 제한하는 구조와 운영--에 스스로 빠지지 말아야한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미 노조형태를 취한 상황에서 어떤 방식이 가능할까? 그것은 당사자들이 우선 고민해야할 문제이지만, 만약 민주노동당노동조합이 공공노조에 가입하게 된다면 지역별로 사회복지, 비정규직 등 운동과제에 '조합원으로서' 해당 현장의 노동자들과 결합하는 방법도 있을 것같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전형적인 '노조'활동과는 또 다른 방식의 노조활동일 것이고, 노조 안에서 사회운동을 강화하는 또 다른 의미의 활동이겠지만.)

 

"연맹사무처지부" 경우는 다를까? 나의 경우에는 '멤버쉽'이 가장 문제라고 보았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참여한 상근활동가 모두 서로 다른 이유 때문에 함께 했을 것이고, 그중 다수는 기존의 노동조합 활동관행을 더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찬가지의 위험에 처해있다. 이것 역시 일차적으로는 자본주의적 노사관계에 가까운 무엇이 우리 내부에서도 실현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날 현상이다. 그러나 그것이 적어도 활동가들의 조직이라면 자본주의적 노사관계를 조직 내에서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것을 지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한다.

 

물론 민주노동당 안에서나, 공공연맹 안에서나 그것은 조직의 객관적 현실이라는 한계에 규정당하고 있다. (말하자면 조직들 자체가 다른 관계를 실현하기에는 아직 너무 "후지다".) 그러나 주체적으로도 부르조아 법이 부여한 가상에 갇힐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이러한 진술이 이제 '조합원'이 된 사람들에게 너무 과도한 기대라는 것도 알고 있다. 민주노동당에서 '노동조합'까지가 가능했던 이유는 당기구의 한계만이 아니라 주체들의 한계까지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공연맹에서도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이와 함께 주체적인 측면에서도 더욱 강조되어야할 것은, 이러한 노동조합들이 조직의 상근관료들이 조합원을 대신하는, 관료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그럴 위험이 상당하다.) 그들도 발언권이 있지만, 구조적으로 그것은 과잉대표될 수밖에 없는 위험이 있다. 따라서, 상근활동가들을 직접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하려는 시도에 진실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강조되어야한다. 그것이 자신의 관료적 지위를 강화하고 권력화를 비호하는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노동조합과는 다른 조직이어야한다. 그것은 지속적이고, (모순의) 이중의 항에 대항해야하는 어려운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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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민주노동당에서 '노동조합'이 적절치 않다고 비판하는 동지들의 진술이, 일면적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동시에, 그 형태를 '노동조합'으로 결정한 동지들에게도 항상 자기비판-자기지양이 필수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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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안] 자본주의의 위기, 노동자운동의 미래

작년 12월에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 강좌에서 "자본주의의 위기, 노동자운동의 미래"라는 다소 거창한 제목으로 진행한 강의 교안입니다. 제가 이런 주제로 교육을 할 위치는 아직 아닌데, 뭐 그래도 사례들을 곁들인 교육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었던 것같습니다. 강의하면서 스스로 깨닫는 부분들도 있고 말이지요.

아래와 같은 두개의 인용문으로 시작했습니다.  사실 뭐 대부분의 내용이 제가 쓴 것이든 다른 사람이 쓴 것이든 짜집기 한 것이기는 하지만, 교안이라는 것의 운명이 본래 그렇죠.

… 따라서 노동자 조직들 (특히 계급정당)은 결코 노동자 운동의 총체성을 '대표'했던 것이 아니며 노동자 운동과 주기적으로 모순에 처해야만 했는데, 그 이유는 노동자 조직의 대표성이 산업혁명의 특정단계에서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한 '집합 노동자'의 특정분파를 이상화하는 것에 토대를 두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대표성이 국가와 정치적 타협의 특정한 형태에 조응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존 노동자 조직의 실천적 형태들에 반대하여 노동자 운동이 재구성되어야하는 순간이 항상 도래했다.
- 발리바르, 「계급투쟁에서 계급없는 투쟁으로」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과 노동계급의 지속적인 형성과 재형성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런 문제설정 덕택에 우리는 노동계급의 형성을, 통상적으로 제기되는 “누가 노동자인가?”라는 질문 속으로 던져버릴 위험성에서 비껴서 있게 된다. 노동계급의 역사적 존재형태라는 문제가 자본에 의한 노동시장의 분단, 인종·민족·젠더 등 비계급적 토대에 따른 노동계급의 배타적 자기 동일성의 형성, 국가에 의한 시민권의 경계 분할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경계긋기의 과정으로 역사화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건은 (재)형성을 추동하는 기제를 어떻게 분석하느냐가 된다. 실버가 자본이동, 제품주기, 세계정치의 측면에서 노동운동의 지역적·세계적 추세와 근대세계체계의 변화가 맞물리는 지점, 즉 시간의 동학과 공간의 동학이 맞물리는 접합을 분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백승욱, 『노동의 힘』역자후기

신자유주의라는 정세와, 이 속에서 노동자계급이 전화한다면 노동자운동은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운동적 노조주의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연대의 확장, 대안세계화운동(그리고 여성운동, 반전평화운동)과 결합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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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빌딩 투쟁 승리, 86일째.

서경공공서비스지부 지부장 동지에게 이런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대우건설비정규투쟁위원회 일괄고용
민형사상면책합의
노조인정 25일15시 타결"


이 사진을 찍었던 것이 23일, 집중투쟁 기간 선포식 집회였으니까 최종적으로 합의, 타결된 25일이 86일째군요.

http://member.jinbo.net/rudnf/blog/p070123122604.gif

요즘같은 상황에서, 특히 오늘 코오롱동지들의 주점이 있었던 날 '장기투쟁'이었다고 말하기에 미안하기도 하지만, 고령의 노동자들에게 86일의 투쟁이란 ㅤㅉㅏㄻ은 기간이 아닙니다.

서경공공서비스지부 활동가동지들은, 항상 이 투쟁이 승리한다면 그것은 "연대의 힘" 덕분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습니다. 말 그대로, 이 투쟁에는 주변의 투쟁사업장 동지들, 지역노동자들, 학생동지들이 항상 헌신적으로 연대해주었습니다. 투쟁이 길어지면서도 항상 투쟁대오는 줄어들지 않았고, 강도높은 투쟁을 진행할 수록 더 많은 동지들이 모여주었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에는 무려 14명의 동지들이 투쟁과정에서 연행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결국 25일 최종적으로 투쟁의 성과를 얻어냈습니다. 물론 합의서는 합의서고, 현장에 들어가서 투쟁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미 계약을 체결한 용역사들은 인원을 줄이고 비용을 줄이는 것을 전제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따라서 복직한다고 해도 현장의 노동강도는 높아진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투쟁과정에서 형성된 조직력은 현장 투쟁에서도 다시 확인되어야합니다.

24일에는 서울역광장에서 330일째 파업투쟁을 진행하고 있는 KTX동지들과 연대투쟁 문화제를 가졌습니다. 서울역을 앞뒤로 투쟁공간을 함께 하고 있는 두 사업장의 동지들은 그 동안 집회에는 서로 연대해왔지만 서로 같이 이런 행사는 못했었습니다. 어제 문화제는 날씨는 추웠지만 참 '따뜻한' 공간이었습니다.  진작부터 했어야했는데 말입니다.

http://member.jinbo.net/rudnf/blog/p070124193404.gifhttp://member.jinbo.net/rudnf/blog/p070124182748.gif

24일 서울역 문화제. "우리 어깨걸고 현장으로 돌아가자"   왼쪽은 꽃다지. 오른쪽은 고대 문선패 '단풍'. 맨앞에 있는 동지가 요즘 학생운동권 '스타'라는 군요. 예전에 주로 총학생회장이 그랬는데,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지 문선패 패장이 '스타'가 되는군요.
 
대우센터빌딩 동지들이 이 투쟁이 '연대의 힘'으로 승리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 동지들이 그 연대를 자신의 실천 속에서 녹여낼 것이라는 걸 의미하기도 합니다. "연대가 연대를 부르는" 연대투쟁의 연쇄를 만들어가야겠습니다.

"늙고 힘없는 계약직 인생이지만
우리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투쟁으로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는 우리 조합원동지들에게 감동합니다.
http://member.jinbo.net/rudnf/blog/p070123122724.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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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흐름,「새로운 실천을 꿈꾸며」


'새로운 실천을 꿈꾸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는 금속노동자들" 엮음


재작년 금속연맹 임원 선거(박병규 선본)을 통해서 하나의 세력 혹은 경향(흐름)으로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새흐름"은 작년 7월에 300여 페이지 분량의 책자를 발표했다. '노동운동의 발전과 미래를 고민한 글 모음'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소책자는 그 동안에 "새흐름"의 내부에서 공유되고 간간히 외부에도 제안되곤 했던 문서들을 정리해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새흐름'은 스스로의 주장처럼 명확한 조직적 형태를 취하기 보다는, 하나의 경향성이고 네트워크 형태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경향들을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이 중에는 서로간에 매우 이질적인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만큼 정치적 방향에 있어서도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타 정파'들로부터는 이들의 비일관성이라든지, '새흐름'으로 분류된 일부의 문제점을 전체 '새흐름'의 문제인 것으로 부풀려 비난한다든지 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렇다고 해도 이들이 '새흐름'의 일부인 이상 비판이 아예 틀린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은 문서로 제출된 입장을 살펴보는 것일테다. '새흐름'은 주로 금속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이 소책자는 매우 흥미롭다. '조직'의 입장을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려니 부담되는 점도 없진 않지만, 암튼, 개인적인 느낌들이다. 우선 소책자의 핵심적인 주장, 내용을 살펴보고 몇가지를 평가해보자.


현장의 정서(자동차 대공장을 중심으로)

우선, 앞 부분은 현장의 정서를 금속 자동차 공장을 중심으로 진단한다. 현장활동가들의 증언을 모았기 때문에 생생하게 제조업 대공장 노동자들의 정서를 읽을 수 있다.(금속 외부의 활동가들에게는 좋은 읽기 경험이다.) 생산의 해외이전 추세, 98년 정리해고 경험 등으로 고용불안이 극히 심화되어 있다.(2007년 위기설 등) 이와 함께  “있을 때 벌자”는 분위기가 현장에 팽배하다.  이것은 장시간 노동으로 이어지는 데 주40시간제 시행에도 불구하고 잔업을 확보하는 것이 노조의 능력으로 평가받는 것이 현실.

이  속에서 삶의 질은 오히려 지속적으로 저하된다. 그러나 잠재된 휴식에 대한 욕망은 이 이면에 팽배하다. 과도한 장시간 노동으로 인하여 가족의 위기가 발생하고 오히려 삶의 질을 저하되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불만도 잠복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노동조합의 현장 장악력은 저하되고 있다.  회사측의 일상적 회식을 통한 조직관리 등에 노동조합이 대응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조합원과 활동가의 거래’가 선거를 매개로 일어난다. 조합원은 자신의 실리를 직접 요구한다.  작업장 내부의 공동체성은 붕괴되는 중이다. ( 이는 새흐름이 노동자운동의 대안으로 ‘작업장 혁신’을 주장하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완성차와 부품사 노조의 갈등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 바이백 등에 대응하는 데에는 완성차의 지원이 필요하지만 무관심한 것이 현실이다.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대부분 무관심하지만 (사업장에 따라서는) 투쟁이 ‘과도하다’는 정서도 존재한다. 그러나 노조는 구조조정의 방패막이로 사고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노동조합 활동의 관행과 타락

현장조직, 활동가들은 노조 선거에 대한 과도하게 몰입하고 있다. 현장투쟁보다 선거 대응이 중심이며 대공장 현장조직은 사실상 선거조직이라고 볼수 있다. 이들 현장조직들은 선거 때마다 후보의 인맥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새흐름의 이런 주장만이 아니라도, 이에 대한 연구논문도 많이 나와있다.) 그러나 중소사업장에서는 간부층을 충원하기 어려워 임원선거도 힘든 조건이다.

상급단체의 정파적 대립이 이러한 현장단위의 ‘맹목적’ 대립과 선거정치를 부추기고 있다.  운동노선에 따른 현장조직의 분립은 이미 과거의 이야기이며  현장조직에 속하는 것이 작업장 배치 등에 있어서 일종의 ‘보험’을 드는 것으로 사고될 정도다.  상급단체에서도 간부의 인선이 ‘전문성’, ‘현장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줄’을 기반으로 형성되고 있다.

이  속에서 현장 조합원들 사이에는 ‘노조 도구주의’가 만연한다.("자판기 노조") 노조가 노동자 민중과 투쟁하는 기관이 아니라 자신의 협소한 이권을 지키기 위한 이익단체, 도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업별로 담합적 노사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노조가 연대를 배제하고 이권을 단위 기업별 노조 안에서 나눌 뿐이며 그렇다면 전투적이라고 해도 담합적일 수 있다고 진단한다.  이를 비판하기 보다는 득표를 위해서 담합적 노사관계를 인정하는 정파들도 함께 문제가 있다.

민주노총 평가

주로 96-97년 총파업투쟁을 평가하면서 민주노총은 가두정치를 선택하기 보다는 의회 내의 타협을 통한 재협상을 선택했다고 비판한다. 민주노총은 IMF 이후 이갑용(현장파) 집행부도 총파업을 번복하면서 동일한 한계를 반복한다.  현대자동차 등 대공장에서도 비정규직 비율 16.9%유지합의라든가 식당여성노동자 정리해고 수용과 같이 신자유주의 공세에 후퇴해왔다.

새흐름은 민주노총의 위기에 몇가지 사례를 드는데 이런 것들이다. 대의원대회 정족수 미달, 재정자립 실패(정부보조금 수령), 한국노총과 차별성 약화 등. 특히 이들은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는 상층 지도부만의 위기는 아니라는 점. 실리주의는 현장에서 더욱 만연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대공장)현장에서 사용자로부터 관리되는 대의원, 활동가, 노조간부는 한편으로는 권력화되고 한편으로는 대중과 유리된다. "노동운동은 무능을 넘어 위선으로 나가고 있다"

지도부가 문제인가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도부 교체 전술은 한계가 분명하다. 98 노사정 합의 이후, 2002 4.2파업 철회 이후 비대위와 새 집행부가 구성되었지만 역시 제대로된 투쟁은 조직하지 못했다.따라서  지도부 교체가 대안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현장이 대안이라는 주장도 한계가 있다.  현장이 실리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점에서 “깨끗한 민주노조의 근거지”로만 사고할 수는 없으며 현장을 바꿀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정정파의 문제라는 주장도 한계가 있다. 정파들은 줄서기를 통한 권력장악에 몰두해왔다.  98년 이후 현장파-중앙파-국민파가 민주노총 권력을 번갈아 교체해왔지만 어느 집행부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역사가 있다. 따라서 특정정파가 민주노총 위기의 원인이라 주장하기 힘들다는 것이 명확하다. 모두가 위기의 공범이라는 인식이 필요한 대목. 그러나 현실에서 정파들은 역설적이게도 위기를 봉합하기 위한 정파연합을 발전시킨다.

노동단체 운동도 한계가 드러났다.  단체들은 독자적인 사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노조와 당의 정책사업을 대리하는 정도의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다.  정파들도 민주노총 내 정치에만 몰두하는 중이다.

또한 현장주의, 조합주의의 한계도 지적한다.  산업적, 지역적, 사회적 의제를 간과하는 ‘현장제일주의’는 협소하다는 것. 조합원의 실리주의와 계급적 노동운동의 원칙 사이에 동요하다가 전투적 실리주의로 전락해왔고 이는 (민주노동당을 통한) 조합주의적 정치활동으로 연결된다. 정치/경제의 분리로 노조의 실리주의는 정당화된다.  이런 상황에서 ‘투쟁이냐 타협이냐’는 식의 (잘 못된) 대립구도는 결국 국민파의 입지만 강화시키고 있다.

각 정치운동에 대해서는 이렇게 평가한다.  민주노동당은 의회 선거정치에만 올인하고 사회운동을 외면하고 있다. 노동자의 힘은  ‘중앙파와 연합한 반국민파 결집’을 반복한다. 만약 ‘비제도적 투쟁정당’의 이상이 민노당 내에서 가능하다고만 하면 중앙파와 혹은 민주노동당 내 해방연대 등 좌파들과 차이가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또한 노동자의 힘은  정파운동의 방식 반복하는데, 노조 투쟁지원단체로 등장하다가 현장 셀을 꾸리고 조직원을 늘려가는 방식의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새흐름은 노힘에게 "오히려 자신의 정치계획을 제시하라"고 요구한다. 또한 비합정파들. 이들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전위’를 구성하고 대중을 지도하려 한다는 점에서 관념적이고 여전히 계몽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흐름은 "좌파 통합"은 불가능성하다고 말한다. ‘좌파’의 위치는 오직 ‘반우파’로만 확인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내 좌파, 민주노총 내 좌파들) ‘공유 지반’이 없기 때문에 ‘좌파통합’노선은 불가능하다는 것. 이제까지 노동자의 힘은 좌파 중 중간정도의 스펙트럼으로 ‘좌파 좌장’ 역할로서, 중앙파와도 연합할 수 있고 비합좌파와도 연합할 수 있는 위치에서 힘을 발휘해왔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각 정파들의 차이가 소진되는 상황에서, 좌파가 단일한 정치노선을 갖지 못하는 현실에서 노동자의 힘을 중심으로한 좌파 결집론은 불가능(’활동가 조직‘)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좌파통합’ 보다는 새로운 질의 운동을 시작할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 과제라는 주장이다.

운동적 대안

새흐름은 우선 운동의 현실, 즉 정파, 단체운동의 쇠퇴와 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한 재편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대안을 구성하자고 제안한다. 이 속에서  이념을 급진화하자, 신자유주의에 대항하자는 등의 주장을 하지만 이 소책자에서 그 실체는 모호하게만 나타난다. 다만  대안‘의제’를 만들자는 주장은 보다 구체적이다.

우선 "분배에서 개입과 통제로" 나가자고 제안한다.  경제투쟁으로 대공장의 임금은 인상되었지만 하청과 임금격차는 더욱 심화되었다. 노동과정에 대한 개입과 통제, 기업과 산업, 사회적 통제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기술을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위해 사용할 것인가를 제기하자는 것. 새흐름은 구조조정에 대한 개입과 통제를 통해 노동자가 작업장과 산업에 개입하는 것은 자본주의 소유관계에 대한 투쟁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제기되는 주장이 논란이 되는 사회적 합의와 관련된 것. "사회적 합의주의는 반대하지만 사회적 합의는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동자가 요구하고 정부와 자본이 받아들이는 것이 사회적 합의라면 국가차원의 교섭구조, 산업차원의 교섭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의제'를 통해 노동자를 사회적·정치적 계급으로 형성하자고 제안한다. 그것은  협소한 현장주의를 넘어서 재생산영역을 포괄하는 "계급형성"(의료, 주거 등)의 쟁점들이다.  재생산의 정치=생활의 정치=산업과 지역의 정치. 현장에서 재생산의 정치란 더 적게 더 쉽게 더 안전하게 일할 권리, 노동의 질을 추구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작업장 혁신이 제기된다. 그밖에 요구에 있어서 공세적인 투쟁, 시기에 있어서 계획된 투쟁, 투쟁형태의 혁신 등을 주장하고 사회적 연대 강화를 제기한다.

임단투도 혁신되어야하는데, 임금은 양의 문제에서 구조의 문제로 전환되어야한다. 산업연대임금을 형성하자는 제안은 여기서 나온다. 사회적 복지, 사회적 임금을 확보하자는 것. (완성차의 2004년 ‘사회기금’의 예)  단협은 경영과 산업의제에 개입할 수 있도록, 작업장 혁신을 위한 규범을 담아야한다. 대공장은 단협을 통해 경영권과 산업의제에 대한 개입과 통제의 근거를 만들고 그에 기초하여 생산과 투자계획에 대한 협상, 산업정책에 대한 협상에 주력해야한다.

이어서 임금전략, 고용전략, 노동의 질, 산업정책과 경영에 대한 개입과 통제를 요구하는 것으로 투쟁의제를 혁신하자고 제안한다. 산업적-사회적 의제란 이런 것들이다.

제조업 공동화에 대한 대응으로 산업정책에 개입. 이는 조합원의 단기 실리주의 극복의 방법이며, 노조의 사회적 고립에 대응, 노동운동의 전략적 발전 방향이다.(노동자가 사회적 주도계급으로 나선다) 이를 위해서는 임단협 수준이 아닌 운동전략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의제선점도 필요하다. 이와 함께  산업적·사회적 의제를 다루기 위한 교섭은 필요하다.(“아무런 대책없이 노사정위 불참을 주장하는 대안없는 반대를 외쳐서는 안된다.”)

새흐름의 주장 중 또한 독특한 것이 '작업장 혁신'이다. 작업장을 노동자 생애의 가장 중요한 터전으로 사고하자는 것이다.  작업장은 노동계급의 자기 훈련과 재생산의 핵심공간(작업장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응력필요)이라는 점에서 작업장 혁신은 단순히 작업현장투쟁이 아닌 자본전략에 대한 전면적 투쟁이라고 주장한다. 작업장 진단,작업장 ‘협상의 혁신’ 사업을 진행하자는 것.

조직적 대안

새흐름은 산별노조에 대해서 '널뛰기' 입장을 보여왔다. 신자유주의 시대, 산별노조 전환은 한계를 갖고 있다고 진단한다.(그래서 자동차 업종산별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어서 금속산별에서 “이중단일체계”를 제안하기도 했다.(업종과 지역 동시편제)) 그러나 이후 형성될 산별교섭과 투쟁은 (1) 산업정책⇒지역산업정책  (2) 지역적 공간적 동일성⇒지역공동체 두가지 방향이 가능하나, (1)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지역연대강화가 가지는 한계가 있다는 것.

정규직, 비정규직, 신세대 노동자, 정당 등 모두 새로운 운동 주체가 출현하기는 한계적.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활동가 네트워크 자체가 주체가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

 

구체적인 현장감각과 노동자운동이 처한 현실 분석

새흐름의 이 소책자의 전반부가 매우 흥미로운 이유는 생생한 현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이데올로기 공간인 '현장'에 대한 진단은 구체적이고 치밀하다.

(나는 '현장' 개념에 대해서 예전 홈페이지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현장"은 어떤 신비화된 공간도 아니며, 어떤 때는 계급적 입장에 맞게 투쟁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보수적-퇴행적이기도 한 대중들의 삶의 공간 자체, 노동대중들이 노동"현장"에서 자발적으로 구성하는 하나의 "사회"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간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모순들이 관통하는 모순적인 공간이다. - "현장" 개념의 모순과 난점)

특히 자동차 대공장 노동자들이 가진 △ 대중 이데올로기, △ 그것이 형성된 배경과, 또한 △ 그것이 노동조합 활동관행, 노조운동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연결고리를 해석하는 대목은 인상깊다. 이러한 분석들을 통해서 자동차 대공장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가지는  생산과정에서의 '구조적 힘'을 자각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할지는 아직 잘 방향잡지 못한 상황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럼 그 '방향'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가이다.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운동대안

그러나 이 소책자를 읽으면서 1/2 정도의 분량을 넘어가면서부터는 물음표가 쳐지기 시작한다. 운동의 대안을 제시하는 대목에서는 현실진단에 걸맞는 깊이가 부족하다. 그래서 새흐름의 현실진단과 대안은 대단히 불균형하게 느껴진다.

대표적인 대안으로 제시하는 작업장 혁신, 산업정책 개입과 같은 것들. 이런 과제들은 (이런말 죄송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연맹급의 노조 상급단체의 정책담당자의 현실적 고민이 될 만한 문제들이다. 문제는 이런 대안은 딱 그 정도의 수준이지, 애초에 새흐름이 제시하려고 했던 "노동운동의 발전과 미래"를 말하기에는 크게 미달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문제 분석과 대안 제시가 논리적으로도 불균등하기 때문이다. 현장의 문제로 제기된 것들이 발생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과정이다. 따라서 원인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안, 투쟁방향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로 나와야한다. 그런데 정작, 작업장 혁신, 산업정책 개입과 같은 것은 중요한 정책적 과제이기는 하지만 운동의 방향으로는 부정합하다.

그러다보니 사회적 교섭과 같은 쟁점에서는 혼란이 발생한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코포라티즘의 위상, 국가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쉽게 산업정책 개입을 위한 사회적 교섭을 말하기 힘들 것이다. 공장이전과 같은 문제는 국가의 산업정책 개입의 문제라기 보다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자본의 생산으로부터의 철수와 금융화, 초민족화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정책실무 차원에서 국가의 산업정책에 개입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겠지만 그것은 '운동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좌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작업장 혁신'과 같은 쟁점도 신자유주의 하에서 린생산, 적기생산과 같은 자본의 전략에 대한 면밀한 비판이 없이는 위험하게 동요할 수 있다.

정책실무 차원의, 실무적 고민은 산별노조와 관련된 입장에서는 동요로 나타난다. 사회운동과의 연대 확장이 중요하다는 새흐름이 오히려 업종 산별, 자동차 대공장을 중심으로 한 업종노조를 옹호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산별이 가결된 상황에서도 지역-업종본부의 '이중단일체계'를 주장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광역지역본부'를 주장한 좌파들보다 후퇴한 안이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지역본부를 골간으로 하자는 입장으로 전환하였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이런 동요 역시, 실무적 고민이 정세 분석에 기반한 운동적 전망을 압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로 보인다. 이렇게 실무적인 단기 판단을 자주하다가는 자신의 정체성조차 혼란스러워지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이는 지역운동과의 결합, 지역중심의 운동과 같은 쟁점에 대해 '의미는 인정하지만 현실 가능하지 않다'는 접근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는 자동차 산업에 주로 기반한 인식틀 때문이기도 하다.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은 사업장 내의 구조적 힘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지역적 연대를 통한 연합적 힘 형성에 소극적이었는데, 이런 경향이 새흐름에서도 변형된 형태로 반복된다.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이 21세기에도 여전히 노동자계급의 전형일 수는 더 이상 없다는 점에서, 이런 한계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자운동의 전망을 고민하는 데 있어서 치명적일 수 있다.

넘어서야할 곳

그래서 안타깝다. 한 금속 활동가 동지는, 금속에서는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솔직한 사람'을 만나서 일을 함께 해야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적어도 새흐름은 그런 점에서 '솔직'하고 진정성이 있어 보인다. 그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것이 '운동'인 이상 어떤 방향으로 하는 것인지는 결정적인 문제다.(솔직한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옳은 말'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여전히 중요하다.) 새흐름은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를 인정하고, 그럴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옳은 말'만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문제들의 본질도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인식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은 매우 소중한 장점이다.

그러나, 운동적 대안을 내고 함께 투쟁하기 위해서는 더 나가야한다. 솔직한 것만으로 운동의 대안이 나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실의 문제의 원인을 인식하고 투쟁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인식이 필요하다. 현재에 있어서 그 고갱이는 신자유주의 비판이다. 이에 대한 인식이 누락되고는 보다 일반화된 대안을 제출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 비판이란, 단지 신자유주의가 나쁘다, 그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라고 말하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새흐름의 이 소책자도 충분히 하고 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문제는, 그것이 원인은 무엇인지, 따라서 어떻게 작동하고 노동자 민중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래서 어떻게 싸워야하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새흐름의 이 소책자가 온 지점은 여기까지인 것같다. 자동차 대공장의 현실에 대한 인식,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한 정책, 운동의제 대안. 그러나 이 활동가들이 단지 자동차 업종 운동을 할 것이 아니라 사회운동, 변혁운동의 일부로서 '노동자운동'을 하고자 한다면 한 걸음 더 나가야할 것같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실천'은 요원할 것이다. 새흐름 동지들이 "새로운 실천을 꿈꾸며"라는 소책자에서 보여준 진정성을 생각해본다면, 새흐름의 그런 전진은 우리 운동에 큰 성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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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씨의 아이러니

김명호 교수의 사건이 참세상에서도 많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재판부 기록을 보면, 이런 대목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증언을 기반으로 한 것이니까 이 것들도 사실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수업 중 학생들의 시위 소리가 귀에 거슬리자 '저런 새끼들이 학생이냐', '저런 놈들을 총으로 쏴 죽여버리고 싶다'라는 말을 한 점 △수업 중 공공연히 '내가 내년에 학과장이 되면 과내 모든 써클을 없애버리고 학생회도 없애버리겠다'고 말한 점 △학생들에게 '애가 어렸을 때 잠자는데 울길래 패버렸다', '성대 수학과 대학원생들은 쭉정이들이다'고 말한 점 △수학과 동아리 학생들에게 '씨팔놈', '개새끼'라는 욕설을 한 점

그냥, 뭐, 이렇다는 겁니다. 공대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저같은 사람 입장에서 이런 교수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선배 과학생회장은 91년 강경대 열사 투쟁 때 수업을 빼는 문제로 학과장면담하다가 재털이가 날아와 크게 위험하기도 했지요. 우리과만 그런것도 아니었죠. 그땐 참, 그런 인간도 덜된 자들이 교수랍시고 선생'질'한다는 게 분노스럽기도 하고 가소롭기도 했습니다. 나이도 들고 공학적 지식이 머리에 있으면 뭐합니까, 인간이 덜 되었는데 말이죠. 김명호 교수도 뭐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던 것같습니다.

이번 판결 자체는 심각한 문제가 있고 사법부의 본질을 또 한번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명호라는 양반도 존경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고.. 그래서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김명호씨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던 것은 그것이 어느 방향이든 하는 사람인 것같은데(이번 "테러"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총쏴버리고 싶다고 했던 시위대 출신들, 없애버리겠다던 학생회 출신의 진보적인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다니 말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사법부의 기만적인 작태에는 분노하면서도, 비판하면서도 (더구나 반동적인 사법부가 저런 증언들을 판결문에 인용한다는 것자체가 역겨운 일입니다. 이런 걸 증거로 제출한 삼성재단이 지배하는 성균관대 역시 그렇죠. 그들도 학생회 없애버리겠다는 데에는 동감하면서도 이런 걸 증거라고 내다니, 구역질 나옵니다. )
김명호씨를 그냥 옹호하는데 까지 가기엔 씁쓸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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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플루토Pluto, 아톰Atom

 
플루토 Pluto 
테츠카 오사무 지음, 우라사와 나오키 그림

술자리 대화에서 추천받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 <플루토>.
<20세기 소년>, <몬스터>, <마스터 키튼> 등을 그렸던 우라사와 나오키는 테츠카 오사무의 <철완鐵腕 아톰> 24~25화, "지상최대의 로봇"편에서 테마를 가져와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 테츠카 오사무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인지, '지음'을 그로 했다. 작품의 이미지, 인물 모든 곳에서 오마주를 확인할 수 있다.(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상최대의 로봇"편을 애니메이션으로 봐야한다.)  이제 일본 만화들이 세대를 넘어 세대간-재해석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작품소개는 주요 포탈사이트를 참고하시면 되겠고. 현재 국내에는 2권까지 정식발매되어있다.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 4권+a까지 볼 수 있다.)
"지상최대의 로봇" 편에 나오는 7개의 로봇과 이들을 차례로 '살해'하는 '플루토'가 나온다. 캐랙터들은 모두 재창조되었는데, 위에 책 표지에 나오는 것이 게지히트 형사(左)와 아톰(右)이다. 각각의 로봇 캐랙터 모두(인간도 마찬가지로) 보다 '인간적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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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左] <철완 아톰>에서 게지히트 형사와 플루토의 대면, [右]  <플루토>에서 아톰.

그들은 모두 '인간적'이다. "공각기동대"에서 시작해서 헐리우드의 "AI", "바이센티니얼 맨", "아이,로봇"에 이르기까지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들의 인간화, 로봇이 인간과 유사한 영혼을 갖게 되는 이야기들은 많이 변주되어왔다. 그러나 그 원형은 아무래도 '아톰'이라고 할 만한데, 이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그들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마침내 '완벽한 로봇'은 증오와 분노, 질투, 그리고 슬픔까지(그렇다면 사랑까지), 인간의 감정을 갖게 된다는 (아톰의 원래 창조자인) 텐무 박사의 이야기는 이 작품이 놓여진 배경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단지 '배경'이라고 말한다. 이 만화는 발달한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철완 아톰>이 처음 연재된 50년대초부터 60년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방영된 70년대는 일본의 전후복구와 경제부흥이 가시화되면서 마치 인간이 기계의 부속으로 완전히 편입되는 것으로 느껴졌던 시기, 그래서 '인간적인 것'에 대한 고민이 더욱 커진 시기다. 그런 고민은 비인간적인 것의 인간화라는 우회로를 통해서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묻는다. 인간은 인간적인 무엇을 갖고 있는가.

(그런 점에 비해서 "공각기동대"는 고유한 '인간'에 비해서는 '인공적인 지능' 자체에 촛점을 두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를 제기하지만, 나는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 맥락, 의미는 <철완 아톰>에 비해서 후퇴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특히 "공각기동대2-이노센스"는 더 심하다.) 그런 점에서 그것을 다시 복제하는 헐리우드는 말할 나위가 없다.)

http://member.jinbo.net/rudnf/blog/pluto2.gif그래서, 우라사와 나오키의 이 작품도 오히려 우리에게 묻는다. 인간적인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그것을 갖고 있는가. 그들은 전쟁에 가슴 아파하고, 아이를 돌보며, 사랑하는 사람과 로봇을 지키려고 하고, 살아있는 것들/혹은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을 갖고 있다.("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 해야지" /윤동주, 序詩) 증오와 분노로 고통받는다.(한 에피소드에 자신을 드러낸 플루토가 보여주는 감정은, 다른 것들보다 '슬픔'이다.) 당신들은 그것을 갖고 있는가.

"그 아이는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나는 마음이 벅차 올랐다. 로봇인 내가.."
(로봇 형사 게지히트가 아톰을 만나고 헤어지는 장면.)

고유하게 '인간적'이라고 정의된 것들에 대해서 질문하면서 우라사와 나오키는 이 속에 존재하는 증오와 고통을, 인간적인 것의 또 한 부분으로 대면시킨다. 가장 예술적이고 '인간적인' 영혼을 가진 플루토는 (오히려 아마도 그것 때문에) 고통받고 주체할 수 없는 폭력으로 나간다. 그런 점에서 우라사와 나오키는 또한 단지 '인간적인 것'이 고유하게 '선한 것'으로 규정된 어떤 것들이 아니라는 점, 그렇기 때문에 증오와 고통에도 눈감지 말 것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합성을 눈앞에서 대면할 것을 요구한다.

'플루토'는 말하자면 그런 존재다. 인간을 비추어보는 거울.

한편, 로마신화의 플루토Pluto는 그리스신화의 하데스Hades, 저승의 신이다. 그래서 Pluto는 명왕성冥王星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년, 국제천문연맹의 결정으로 태양계의 형성planet이 아니라고 '결정'되고 소행성asteroid 134340라는 이름을 얻었다. 마치 이 만화에서 플루토가 SOL228350..뭐 이런 이름을 달고 있는 것처럼. 작년에 이 결정이 있은 후에 '미국 방언협회'라는 단체가 plutoed라는 단어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고 한다. '추락하다, 위신이 떨어지다'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저승의 신이 이런 식으로 취급받아도 되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플루토, 하데스를 먼 태양계 외곽의 소행성대인 카이퍼벨트에 추방하고자하는 무의식들이 작동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라사와 나오키가 보여주는 것처럼, 플루토-죽음은 인간적인 것-삶의 이면이며,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한 측면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외면할 수 없고, 우리의 '인간적인 것' 그 자체일지도 모르는 고통들에도 대면해야한다. 마치 아톰이, 플루토에게 뛰어드는 것처럼. 그래서 그 속에서, 그것은 (주인공격인) 게지히트, 이건 또 하나의 당신이라고, 아니 (어쩌면) 당신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처럼.(4권,Act27) 그때 아톰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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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미망迷妄 혹은 희망希望

나는 산별노조 건설과 관련된 몇몇 글이나 논의에서, 산별노조 건설 자체가 노동자운동의 대안이 될 수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조직적 재편을 강제하는 정세를 창출하고 따라서 개입을 위한 열린 공간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그런 점에서 공공연맹의 산별노조 건설(전국공공서비스노조 전환) 과정 속에서 지역을 중심으로 사회운동과 친화적인 노동조합 구조를 조직하기 위한 나와 우리 동지들의 노력은 이런 계기들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속에서 기존의 고루하고 관료화된 노조 조직구조를 혁신하고 '운동'조직으로서 노동조합을 복원하기 위한 여러가지 시도가 있다.

공교롭게도 공공연맹의 임시대의원대회가 성원부족으로 개회조차 못하고 무산된 날, 산별노조의 서울지역본부를 구성하기 위한 논의와 초기업-초업종 서울지역지부를 구성하기 위한 논의는 나름대로 알차게 진행되었다. 오전에 있었던 서울지역본부 논의(산별노조 서울지역 지부-지회 대표자회의)는 지역의 운동구조를 강화하기 위한 논의를─현재 논의일정이 대단히 부실한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진행했다. 그리고 저녁에 있었던 서울지역지부 준비모임도 의미있게 진행되었다.
 
▶ 당일 대의원대회와 관련된 참세상 기사
공공연맹 임시대대 개회도 못하고 무산
토론회에 이어 임시대대도 무산, 통합연맹 빨간불

 


지역을 단위로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사회복지부문 등을 중심으로 한 (초기업, 초업종) 지역지부를 건설하는 노력일 것이다. 그리고 이를 전체 산별노조 조직질서 속에서 '보장'하기 위한 초업종 "업종본부"를 구성하는 노력이 병행된다.

('전국공공서비스노조'의 조직형태는 금속노조에도 미달하는 것으로, 광역지역본부와 업종본부 양자를 모두 골간으로 인정하고 두 본부에 모두 편제되는 것을 강제하고 있다. 이 부분은 마치 금속 새흐름이 예전에 주장한 "이중단일체계"와 유사하다. 게다가 금속에서도 많은 동지들이 반대했던 '한시적 기업지부' 또한 인정된다. 더더군다나 '한시적'이라는 말은 사실 수사에 불과한데, 이 기한을 3년으로 못박자는 주장은 주로 우파들의 고집으로 인해 '3년 후 논의한다'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 덕분에 지역을 중심으로 운동하고자 하는 단위들도 의무적으로 "업종"본부에 편제되어야하는 곤란함이 발생한다. 게다가 전국단위 기업별노조에 속해있지만 지역중심의 운동을 전개하려는 동지들은 조직 내에서 구조적 제약을 받는 상황이다.)

각 지역에서 초기업, 초업종 지역지부를 구성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서울지역에서는 이날 "서울지역지부 준비위" 1차 모임을 가졌다. 대부분의 "지부"단위가 기업별로 구성되고 있고, 그나마 '나은' 단위들이 업종지부를 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시도는 지역차원에서 연대의 정신을 부활시키고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이념에 따라 조직을 구성하려 한다.  이러한 노력은 산별노조 자체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노조운동을 위한 '코어'를 형성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 단위를 중심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조직 내 '경향'을 강화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를 가능하게 하는 조직 내적이 여건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산별노조 건설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일반화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어서, 대공장 사업장 활동가들이 산별노조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세사업장, 비정규직사업장의 경우 연합적 힘을 강화하기 위한 조직적 조건으로서 산별노조가 의미가 있지만, 대공장 사업장에서는 그나마 존재했던 현장투쟁을 약화시키고 관료화를 부추길 염려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공장 현장파 활동가들의 산별부결운동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만, 자신의 사업장의 현장주의에 갖혀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하게' 지적하고 싶다. 노동자운동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공간은 대공장의 '사업장'이라는 현장보다는 오히려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지역'이라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각 지역에서 이러한 형태의 조직을 구성하는데 각 지역에서 주로 우선 나서는 조합원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방자치단체 비정규직 노동자, 용역-외주위탁 비정규직 노동자, 청소, 시설관리노동자, 영세사업장 노동자, 학교비정규직노동자, 사회복지부문 노동자(보육, 자활기관, 사회복지시설 등)와 같은 사람들이다. 지역을 근간으로 해서 "연합적 힘"을 형성해야하는 노동자들이다.(이 '연합'의 대상이 노동조합으로만 제한되지 않으며 지역차원에서 사회운동도 그 대상이라는 점에서, 사회운동적 노조주의 경향을 가질 수 있는 조직적 여건이 형성되기도 한다.)

모임을 갖고 간단한 뒤풀이. 회의를 하면서 모두 어려운 상황에서 노조운동을 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함께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들을 확인했다. 뒤풀이를 하면서는 각자의 조건을 대화 속에서 확인하면서 어려움도 있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탐색했다. 학교비정규직 동지들은 새롭게 조직되는 학교내 시설관리 노동자들과, 기존에 시설관리 용역 노동자를 조직했던 동지들이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발견한다. 자활지부에서 조합원들이 만나는 청소용역, 사회서비스부문의 비정규직노동자들을 함께 조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한다. 청소용역, 학교비정규직, 보육 등 여성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역에서 함께 만나고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한다. 사회복지, 사회서비스, 빈곤이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지역에서 여러 사회운동들과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이것은 공공부문 노조운동 안에서는 "사회공공성"이라고 불린다. 나는 이 개념에 다소 불만이 있지만 ^^;) 이렇게 가능성들을 찾아갔다.

(일전에 자활기관에서 일하는 블로거인 체게바라님과 사회서비스업무를 자활기관이 위탁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논쟁한 적이 있다. "근데 왜 굳이 청소용역입니까" 등. 이날 회의 뒤풀이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하는 과정에서 참여주민을 조직하고 함께 투쟁할 수 있다는 점을, 이 과정에서 각각의 주체들이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어려운 문제에 대한 현실의 답을 찾은 셈이다.)

이렇게 해서, 산별노조 내에서 우리가 새롭게 만드려고 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초업종, 초기업 조직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작은 감동도.

하지만, 그것이 희망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지난 6월에 같은 방식으로  이미 조직해왔던  "지역공공서비스노조"에 대한 평가토론 워크샵을 진행하면서 한계를 너무나 분명하게 확인했던 것이다. 지역연대확장과 강화, 비정규직 조직화, 조합원의 주체화, 사회운동과의 연대의 가능성을 확인했지만 마찬가지로 (아니, 오히려 더 심각하게)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기업별 조직구조, 취약한 조직역량, 조직확대의 한계를 뼈져리게 평가했다. 따라서 지난 2~3년 동안의 각 지역에서의 실천에 대차대조표를 그려본다면 결코 좋은 성적을 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엊그제 있었던 초기업-초업종 지역지부를 구성하기 위한 모임도 지난 몇년간의 지역공공서비스노조 운동을 좀더 규모가 큰 서울지역에서, 산별노조 건설 이후라는 조건에서 반복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한계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확인한 희망希望은 어쩌면 미망迷妄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우리는 서울지역에서도 이제 처음 모여서, 지역을 중심으로, 사업장과 업종을 넘어선 노동자의 연대, 사회운동과의 연대, 비정규직 조직화라는 이념으로 만나지만 그것을 온전히 실현하는 조직을 만들 수 있을 지 솔직히 장담하지 못한다. 우리가 엊그제 잠시 서로 확인한 가능성들은, 지난 몇년간의 각 지역에서 실천에 대한 평가에 비해서는 너무나 연약하고 취약하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것은 희망이라기보다 미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현재의 조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그것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고, 어쩌면 성공한 대차대조표를 만들지 못할 가능성이 더 많을지 모르지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최대한.
몇 년 동안의 (비록 부정적인 부분들이 많이 지적되었다고 하더라도) 평가가 있고 교훈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실천을 함께 고민하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자. 각 지역 동지들의  몇년 동안의 어려운 실천과 실패 덕분에 우리는 좀 더 나갈 수 있다.(그 실천들에 경의를!)

그래서, 그것의 모든 가능성들을 사고해야하겠지만, 다만, 희망하는 자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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