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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여행;여행을 마치면서.

삶은 여행, 여행을 마치면서.

남들은 20대에 주로 가는 한달반짜리 유럽여행. 하지만 어떤 여행도 너무 늦거나 이르지 않다. 여행은 언제라도 자신이 있어야할 시간이 ‘지금’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나의 여행에서도 하루하루, 한곳한곳은 바로 그 순간에만 만날 수 있는 어떤 경험들을 주었던 것같다. 여행에서 많은 사람, 많은 시간과 장소를,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길을 잃고, 헤어지고, 아픈, 영혼을 치유한다.

엊그제 우연히 여행사에 걸려있는 지도를 보았다. 내가 여행한 곳을 따라가보니, 먼길. 그러나 지구 전체를 놓고 보면 너무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작은 여행으로 너무나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한 것에 얼굴이 붉어진다. 세상에도 겸손해져야한다.

어떤 여행

여행에서 만난 많은 여행자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여행을 한다. 주로 숙소나 길에서 만나는 한국인 여행자들은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제한된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유럽의 도시를 ‘찍고’ 가는 것이 목표인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좋다는 곳들만 찾아다니거나, 아예 자기 일정이 없이 ‘묻어가는’ 것이 목적인 사람도 있다. 도시에서도 어딘가를 다니기보다는 여행자들과 술자리를 즐기는 것이 주가 된 사람도 있다. 사치품 쇼핑을 주로 다니는 사람도 있다. 여행책자나 여행사가 짜준 일정에 충실한 사람도 있다. 다양한 사람들을 보면 어떤 때는 신기해져서 관찰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들과 만남도 여행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각자 여행하지만, 잠시잠시 이런저런 사람과 동행하기도 하지만 주로 혼자 여행하고 나와 주로 대화하고, 여행지에서 만나는 낯선 것에 놀라고, 그것에 대해서 머리와 가슴에 되새김질하기를 즐긴 나의 여행도 나쁘지 않다.

유럽에서 만난 많은 낯선 것들은, 많은 경우에 ‘관념들’에 불과했던 것에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한다.(따라서 보다 구체적으로 사고하게 한다. 우리가 가진 관념들의 상당수가 유럽에서 온 것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그 관념들이나 혹은 내 안에 있었지만 잠재되어 있거나 은폐되어 있었거나 억압되어 있었던 것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위치에 있었던 개념들을 갑자기 단락shotcut시키기도 하고, 그것은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까지 내가 보아온 것보다 세상에는 더 많은 일이, 더 다른 것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눈앞에서 확인하고 이제야 알게된다. 그래서 상상력에 혈색을 돌게 하고, 또 이제까지의 경험들, 앞으로 있을 경험들에도 겸손하게 한다.

나를 만나기

스위스에서 쓴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혼자 여행은 자신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다.
혼자 걸으면서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에게 솔직해 질 수 있다. 슬픈 마음을 슬프게 느끼고 애도한다. 삶의 기쁨이 의외의 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발견하고 놀랄 수 있다.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고, 남들은 시시하게 지나가는 것에도 감동받을 수 있다. 그런 속에서 나를 만난다.



그건 나에게는 참 독특한 경험이었다. 그만큼 내가 나 자신을 깊이 돌아보지 않고 살았기 때문일 테다. 나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면서도 정작 그러지는 못했던 것이고, 그러니 아픔에도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 어쩌면 당연했겠지.

그래서 나에 대해서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어떤 의무이나 책임같은 것으로 스스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일 속에서의 나를 돌아보면서 왜 아픈지 나를 이해해주게 된다. 비로소 나를 다독거려준다. 울고 싶을 땐 울어, 그래, 괜찮아, 괜찮아.

자신에게 진실하기

여행에서 위대한 예술들, 숭고한 자연들을 만나면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생각하게 된 것도 이번 여행에서 너무나 값진 일이다. 유럽이라는 거대한 문명이 수천 수백년 동안 만들어온 역사의 가장 위대한 것들만 매일 매일 찾아서 만나고 다녔으니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여행에서 유럽이 자신의 역사 속에서 남긴 위대한 예술과 사상을 압축적으로 만난 셈이다.

(여행과 관련된 제도와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런 기회를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유럽의 거장들에게 미안해질 만큼 감격스러운 일이다. 물론 시간과 지적 능력의 제약으로 인해서 상당부분은 주마간산 식의 만남이라는 아쉬움이 큰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무엇이 그것을 숭고하게 만드는지 생각한다.

나 자신에 매순간 진실하게. 운명--Fortuna여신--의 일은 그녀에게.
어쩌면 스스로에게 진실한 것이 어느 순간에는 운명과 부딪힐 수도 있고, 그럴 때는 비극이 될 수도 있다. 운명의 순풍을 탄다면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어떤 운명을 만나는 경우이건 그것은 다음 일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 가장 충실할 때 인간답고 숭고할 수도 있다.

이번 여행에서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얻었다거나 방법을 찾았다고는 아직 전혀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다만 인간다운 삶의 방향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고 할까. 그렇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이번 여행이 알려준 이제부터 삶의 긴 과제일 것같다.

삶은 여행

여행을 시작하면서, 이상은의 Soul Hospital을 들었다. 영혼의 치유를 위해서는 자신을 사랑하고 우리가 부딪히는 많은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한다고 노래한다. 나에게는 이번 여행이 거대한 Soul Hospital이었던 셈이다.

이번 여행 기간 중에 이상은의 새 앨범이 나왔다. (10월2일) 여기서 앨범을 살수는 없는 조건이라 (죄송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구해서 들을 수 있었다. 여행의 후반은, 이 앨범의 곡들을 듣는 곳이 많았다. 특히, 삶은 여행.

삶은 여행, 이상은

의미를 모를 땐 하얀 태양 바라봐 얼었던 영혼이 녹으리
드넓은 이 세상 어디든 평화로이 춤추듯 흘러가는 신비를

오늘은 너와 함께 걸어왔었던 길도
하늘 유리 빛으로 반짝여
헤어지고 나 홀로 걷던 길은 인어의 걸음처럼 아렸지만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가 끝나니까
소중한 너를 잃는게 나는 두려웠지
하지만 이제 알아 우리는 자유로이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난 걸

용서해 용서해 그리고 감사해 시들었던 마음이 꽃피리
드넓은 저 밤하늘 마음 속에 품으면 투명한 별들 가득

어제는 날아가버린 새를 그려 새장 속에 넣으며 울었지
이젠 나에게 없는 걸 아쉬워하기보다 있는 것들을 안으리

삶은 계속되니까
수많은 풍경 속을 혼자 걸어가는 걸 두려워했을 뿐
하지만 이젠 알아 혼자 비바람 속을 걸어갈 수 있어야했던 걸

눈물 잉크로 쓴 시, 길을 잃은 멜로디
가슴과 영혼과 마음과 몸이 다 기억하고 있어
이제 다시 일어나 영원을 향한 여행 떠나리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가 끝나니까
강해지지 않으면 더 걸을 수 없으니
수많은 저 불빛의 하나가 되기 위해 걸어가는 사람들
바라봐
 
**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 : (이상은 13집 The 3rd Place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the3rd_place/100042588037

피사의 낯선 거리, 어떤 다리를 건너면서 노래를 듣고 눈물이 나오고 말았다. 노래에 슬픔이 깊이 담겨있고, 나와도 다르지 않다. 이상은에게도 몇 년전의 앨범 Romantopia 이후에 깊은 슬픔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슬픔을 그냥 잊지 않고 자신의 영혼의 일부로 더 아름답게, 아리게 만들어가는 이 음악들을 듣는다. 그리고 그녀가 슬픔에 대면하는 자세를 듣는다.



40여일, 먼 길을 걸으면서, 여행에서 쓰러지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을 가기 위해서는 강해져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가슴과 영혼과 마음과 몸이.

그래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다시, 걸어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삶은 여행이니까, 삶은 계속되니까.

***
이번 여행에는 ‘먼곳의 동행’이 많았다. 중간 중간 내 메일을 받아준 이들,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받은 사람들, 전화 통화를 한 사람들, 나를 생각해준 모든 분들, 그리고 이 블로그를 통해서 나를 지켜봐준 모든 이들의 나의 고마운 동행이다. 이 모든 분들 덕분에 때로는 어렵고 힘든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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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델피, 디오니소스 극장, 비극을 생각하다.

그리스, 델피, 디오니소스 극장, 비극을 생각하다.

그리 오래 있지 못한데다가 마지막 여행지인 그리스에서는 무척 아쉬움이 많다. 몇가지 이야기가 있겠지만, 우선 비극에 대해서 이야기를 잠깐하자. (그리스 문명, 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인상 등은 다음 글이 가능하다면 쓸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내가 많은 비극에서 등장하는 신탁의 장소인 델피(델포이), 그리고 오늘은 아크로폴리스 옆에 디오니소스 극장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델피

아테네에서 버스를 타고 세시간 정도 걸리는 델피는, 아폴로 신전의 신탁으로 유명하다. 소포클레스가 쓴 오이디푸스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은 곳도 여기다.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가 죽게 된 것도 델피 신전에 신탁을 받으러가다가 오이디푸스를 만났기 때문이다.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 연작에도 델피가 소재로 사용된다. (모두 신화의 이야기.)

델피에 다가가면서, 아, 그리스인들이 왜 이곳에 신탁의 장소, 아폴로 신전을 지었는지 조금씩 느낄 수 있다. 낮은 구릉들만 있는 평원에 혼자서 우뚝 솟아있는 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상 쪽에는 구름까지 끼어있다. 산으로 버스가 오르자, 높은 절벽과 깊은 계곡(물은 없지만)이 펼쳐진다. 마침내 도착한 델피는, 그 장소 자체가 장관이다.



델피를 신성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 만든 신전 이전에 그 산과 계곡이었던 것이다. 자연이 만든 숭고함이다. 절벽에 걸려있는 신전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마치 하늘에서 지상을 바라보는 것같은 느낌을 준다. 신성한 장소라는 곳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하늘과 땅의 중간지대. 그리스인들이 이 곳을 신의 말(言)이 내려오는 곳이라고 생각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태양과 이성의 신인 아폴로를 예언의 신으로도 생각해서 신탁을 받았다. 현대의 우리들의 관념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않는 일인데, 예언은 이성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폴로는 운명의 신들과는 불화하면서도 예언을 관장한다. 그것은 그리스 사람들이 미래를 아는 것은 (비록 신탁이라는 종교적 형태로 표현되지만) 알 수 없고 변덕스러운 운명이 아니라 이성을 통한 예측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같다.

하지만, 그러한 신탁이 운명을 어찌하지는 못했던 것같다. 신화의 내용에서, 사람들은 신탁을 듣고 운명을 바꾸어보려고 하지만 결국은 제자리 걸음을 하고 마는 이야기가 많다.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도 그런 경우인데, 신탁은 운명의 아이러니를 더욱 강조한다.

오디이푸스는 신탁을 통해서 미래를 알았으면서도, 그리고 그 자신이 매우 현명한 사람이었으면서도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운명 앞에서 파멸하는 이유는 사소한 기질 상의 단점(길가는 노인--아버지--를 살해한 성급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고귀한 성품(진실을 끝까지 대면하고자하는) 때문이다. 위대한 인간의 파멸은 비극의 극적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디오니소스 극장

다음날 오후에 간 아크로폴리스 아래에는 디오니소스 극장이 있다. (같은 티켓으로 입장할 수 있다.) 극장을 찾느라 더운 날씨에 좀 헤메서 기진맥진해서 도착했다. 이렇게 찾은 극장은 규모가 큰 것은 아니지만, 정말 감격스럽다. 바로 이곳에서 위대한 비극들--소포클레스, 아이퀼로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이 공연되었던 곳이구나. 별이 빛나는 밤에 여기 객석 어디선가는 아리스토텔레스도 위대한 극작가들도 비극 공연을 관람했겠지.



땡볕 속에서 객석이 잘 보이는 좋은 자리를 잡아 앉는다. 비록 무너진 극장이지만, 수천년 전 공연된 비극의 감동이 남아서 울리는 것같다. 이곳에서 비극경연대회가 열리고, 비극이 초기형태로부터 완숙한 형태(아리스토텔레스가 이제 비극은 완성되었다고 말한)까지 꾸준히 창작되었다.

시간을 견디는 것

비극경연대회는 사라지고, 그리스 문명도 쇠락하고, 돌로 된 극장마저 무너졌지만, 비극은 시간을 견디고 남았다. 지금도 그리스 비극은 세익스피어와 함께 가장 위대한 비극으로 평가받는다. 평가가 문제가 아니라 작품 자체가 주는 감동은 말할 수 없이 크다.

그 비극들은 단지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윤리적이며 철학적이고, 예술적 감동을 준다. 비극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예술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물짜는 신파와는 다르지만 더 오래 남는 슬픔을 전하고, 또 단지 눈물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을 ‘사고’할 수 있게한다.

알 수 없는 운명과 불화하고 그 때문에 파멸하더라도 위대한 인간들이 위대하다는 점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운명--Fortuna여신--의 것은 그녀에게, 그러나 나의 영혼의 일은 나에게. 아폴로--태양과 이성--도 알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 어떤 미래를 불러오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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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리니, 지중해의 햇빛

산토리니, 지중해의 햇빛

스위스의 알프스와 함께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자연 중 하나는 지중해에 푸른 바다와 하얀 햇빛이다.

그리스 여행의 전반부는 지중해의 섬 산토리니에서 보낸다. 산토리니 섬은 ‘포카리스웨트’ 광고에 나오면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광고에서처럼, 푸른 바다와 하얀 햇빛을 모방하는 것같은, 마을의 하얀 벽의 집들과, 푸른 지붕이 인상적인 곳. 바다 빛은, 하늘빛보다 더 밝은 푸른 색으로 빛난다.



8시간 동안 페리를 타고 오면서 지켜본 바다는, 배에 부딪혀 부숴지면서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거린다. 카프리섬에서 본 ‘푸른 동굴’의 빛과 다르지 않은 빛이다. 잠시 갑판에서 바다를 보고 있다가 빨려들 것같은 느낌이 들어 조금 어지럽다. 조금만 눈을 들어보면, 이런 푸른 색이 수평선까지 끝없이 펼쳐져있다. 장관.

하지만, 이곳 산토리니 섬은 광고에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겠지만 대부분 지역이 황량한 황무지 언덕이다. 화산섬이기 때문이다. 그곳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사막에 온 것같은 느낌이 든다. 나무는 없고 낮은 잡초들만 듬성듬성한 바위 산들.

거대한 화산, 작은 섬

이곳은 기원전 16세기 경에 전성기를 누린 크레타와 함께 지중해의 그리스 문명이 찬란했던 곳 중에 하나라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화산 폭발로 섬 전체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고대 산토리니섬에 있던 문명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물론이지만, 이 섬과 교역하던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크레타도 큰 타격을 입는다.

이 폭발 이후에 큰 해일피해를 입고 충격을 받은 크레타도 쇠퇴하기 시작한다. 예전에 본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이후에 크레타에서는 타락한 신비주의가 만연한다. 바다의 힘에 대한 공포는 문어와 같은 바다 생물을 상징으로 하는 신을 숭배한다거나, 어린아이를 인신공양을 하는 식으로 나타나고 문명의 밝은 측면은 사라져갔다. 급기야 그리스 반도에서 넘어온 도리아인들에게 기원전 13세기 경 파괴되는데, 이후 다시 고대 그리스 문명이 꽃피는 데까지는 4세기가 지나야했다.

이 사건은 이후에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한 전설로 기억되는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하루아침에 지진과 화산폭발로 사라진 대륙. 지금도 산토리니 인근 바다에서는 고대 유적이 출토되곤 해서, 섬에는 조그만 박물관도 있다.

섬의 해안에서 보이는 곳에는 화산의 중앙 부분이 있다. 이곳은 지금도 바다 온천이 솟아나고 있어서 관광지로 개발되어 있다. 서너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산토리니의 내해는 거대한 화산의 칼데라인 셈이다.

바위 언덕, 황량하고 쓸쓸한.

이 곳에 황량해보이는 바위 언덕은 사막과 다르지 않다. 이번 여행에서 이집트, 그곳의 사막에서 하루밤을 보내지 못한 게 가장 아쉬운 나로서는 조금이나마 그런 정취를 느낄 수 있다고나할까.



오후에 오른 황무지 언덕에서 바라본 풍경은, 푸른바다와 확연하게 대조되는 황량하고 쓸쓸한 바위산의 풍경이다. 따가운 햇빛이 비추는 산턱에는 거친 바위가 널려있고 가시가 달린 낮은 잡초들만 무성한 곳이 펼쳐진다. 산토리니의 이틀째 밤에는 바람소리에 잠을 이루기 힘들 정도로 바람이 무척 강하게 불었다. 거친 바다 바람이 불고 비도 별로 오지 않는 기후는 발목정도밖에 오지 않는 잡초만 자랄 수 있게 한다. 수천년전에 일어난 뜨거운 화산폭발을 아직도 증명하는 것같다.

이 광경은, 어떤 아름다움도 없이 자연이 이렇게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은 항상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것. 혹은 아무 것도 없는 곳. 그리고 말한다. 나의 마음에도 이런 공간이 있는데,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황량하다는 것도 단지 사람의 느낌일 뿐일 텐데, 아무 것도 없는 마음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중해 해안의 하얀집들

지중해 해안에는 산토리니만이 아니라 다른 곳도 보통 하얀색으로 칠한 집들을 짓는다. 산토리니처럼 지붕을 파란색으로 칠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탈리아의 카프리 섬이나, 소렌토, 포지타노, 아말피 등의 남부 연안에서도 절벽에 가까스로 하얀집들이 걸린 절경을 볼 수 있다. 그리스의 여러 섬들도 사진으로 보면 대부분 그렇다. 아마도, 지중해의 뜨거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서는 하얀색으로 칠해진 두꺼운 벽이 유리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얀 햇빛을 더 밝게 빛나게 하는 하얀 집들과, 하얗게 부숴지는 파도, 어떤 섬들에서는 하얀 절벽까지 지중해와 조화를 이룬다. 해가 질 때는 하얀 벽이 붉게 물드는 모습이 아름답다. 천천히 붉게 물들다가, 해가 넘어가는 순간, 갑자기 그 빛은 사라진다.



여행의 우여곡절

산토리니에서는 페리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객들과 함께 숙소를 잡고 같이 움직이다가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일행들이 (무모하게) 렌트한 차량 접촉 사고로, 상당한 과외의 지출이 생기기도 했다. 이곳에서만은 아니지만 여행에서 배운 교훈 중에 하나는, 자신의 판단으로 움직이는 것에 잠시 게으르고 남들을 그냥 따라갈 때 항상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의 긴장된 판단이 그나마 가장 적합하고, 설사 문제가 생기더라도 스스로 고쳐갈 수 있다.
여행에서는 혼자서 걸어가는 법을 배우고, 그렇게 할 수 있어야한다.


(풍차가 있는 언덕으로 빛나는 저녁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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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여행의 사치

비엔나, 여행의 사치

여행이 끝나가는 지금, 여행기를 쓰면서 도시마다 하나의 이야기 정도는 남겼지만,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인터넷이 되지 않는 조건에 있었기 때문인데, 여행기에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나 많지만, 비엔나에 대해서는 짧게라도, 여행이 끝나기 전에.

제국의 수도

런던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의 제국의 수도가 어떤 것인지를 눈으로 볼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의 수도였던 오스트리아도, 런던과는 또 다른 분위기이지만, 하나의 제국의 수도로서 화려함을 갖추고 있다.

또한 합스부르크 왕조는 절대왕정 하에서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와 경쟁하면서 궁전의 규모까지도 경쟁하면서 화려한 건축물들을 남긴다. 이런 것들은 이제 관광명소나 시민들의 휴식지가 되었지만, 이들의 허망한 경쟁이 남긴 유물을 보는 건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 든다. 왕조의 화려한 궁전은 굳이 찾아가지 않는 여행이었지만, 빠리에서는 이제는 박물관이 된 루브르, 그리고 비엔나에서는 도심의 공원이 된 벨베데레 궁전에는 다녀왔다.



음악가들의 도시

18세기, 19세기에 왕조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무렵, 비엔나의 왕족과 귀족들은 음악을 애호하면서 후원한다. 이에 따라서 단기간에 한 도시에 가장 위대한 음악가들이 모이는 일이 일어난다. 모차르트, 베토벤, 드로브작, 슈베르트, 슈트라우스 등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음악가들이 모두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것이다. 그런 위대한 시기가 짧은 기간에 한 도시에서 가능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기적같은 일이다.

우리가 듣는 위대한 클래식 음악의 상당수가 이러한 지원 하에서 가능했던 일이다. 이런 점에서도  역사는 모든 것을 단순하게만은 판단할 수 없게 한다. (클래식음악도 지배계급의 것일 뿐이라고 폄하하는 일은 소련에서도 하지 않았으니.)

시내 곳곳에는 위대한 음악가들의 동상들이 있다. 왕궁 정원 한편에는 모차르트의 동상이 있다. 동상 한켠엔 꽃다발이 놓여져 있다. 모차르트의 동상 앞에 앉아서 ‘현을 위한 세레나데’를 듣는다. ‘캐논’을 들으면서 비엔나 오페라하우스 앞을 지나다 보면 베토벤 광장, 베토벤 동상에 이르게 된다.

베토벤 동상 앞 벤치에서 한낮이지만 ‘월광’을 듣는다. 그의 동상 옆에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프로메테우스가 고통, 그러나 굳건한 표정으로 조각되어 있다. 베토벤에 어울리는 상징이다. 그의 음악은 마치 인간에게 영원한 시간에 속하는 음악을 선사했다는 이유로 신이 가하는 것 같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마르크스와 함께, 그는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할 수 있는 인간이다.

이렇게 슈베르트, 슈트라우스 동상이 있는 시립공원을 지나서 트램을 타고 조금 가면 음악가들의 묘지가 모여있는 한적한 ‘중앙묘지’에 닿을 수 있다. 몇몇 관광객들이 들리고,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도 왁자지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그곳에는 모차르트를 중심으로,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슈트라우스 등의 묘지가 모여있다. 이곳에 이르자 MP3 플레이어서는 이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4악장이 흘러나온다.

여행의 사치

이렇게 한 하루는 나의 유럽 여행에서 가장 호화로운 하루였다. 비록 돈이 많이 든 일정은 아니었지만, 하나의 감각으로 최고의 예술을 함께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의 자취를 따라가는 한 곳 한 곳은 어느 사치스러운 여행에 비할 바가 아니다. 돈을 산 어떤 사치도 이런 호사에 따라가지는 못할 것이다.

저녁에는 (값싼) 음악회 티켓을 구해서 갔었지만, 음악회조차도 낮에 걸은 그 길의 감동에 비할 수 없었다.

베토벤, 환의의 송가

사실, 비엔나에서 느낀 것은, 최고로 인기있는 음악가는 모차르트라는 것이다. 어디가든 모차르트가 넘친다. 내가 간 날 알아본 음악회 티켓도 거의 다 모차르트 공연이 뿐이었다. (아니면 슈트라우스의 왈츠) 거리에 보이는 기념품샵도 대부분 모차르트와 관련된 것이거나, 그와 관련된 물품이 다수를 이룬다. 그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대중적인 클래식 음악가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비엔나에서는 베토벤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는 모든 인간적인 고통, 영혼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가장 위대한 예술을 창조한 인간이다. 모차르트를 들을 때는, 자유분방한 선율에 감동하게 된다. 베토벤을 들을 때는 고전적인 형식미 속에서 인간적인 열정을 녹여낸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고전적인 형식을 따르기는 하지만, 그 속에는 영혼의 고통이 있다. 그것은 때로는 열정으로 때로는 깊은, 깊은 슬픔으로 드러난다.

베를린에서는 일부러 베토벤을 듣지 않았다. 베를린장벽의 붕괴 이후에 독일의 통일, 그리고 동시에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붕괴를 축하하는 브란덴부르크 광장 공연에서 번슈타인이 교향곡9번 ‘환의의 송가’를 ‘자유의 송가’라는 것으로 바꾸어 연주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류애를 노래하는, 따라서 프랑스혁명을 지지한 공화주의자였던 그의 이력을 생각하지 않더라고 가장 공산주의적인 이 음악을 편협하게 해석한 해프닝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유럽연합은 자신들의 공식적인 상징음악으로, 베토벤의 ‘환의의 송가’를 채택하고 있다고 한다. 유럽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이 곡은 유럽이 자신들의 상징으로만 채택하기에는 너무 위대한 곡이다. 말 그대로, (유럽의 연합이 아니라) 인류의 형제애를 노래하는 곡이 아닌가! 유럽(연합)이 진정으로 자신들의 국가 간 체계를 민주화하고 그것을 세계화한다면 모를까.)

독일어로 된 가사를 들으면서 음악을 감상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아래 번역을 보면서 4악장을 들어보자. 이것이 진정으로 위대한 음악이다. (첫 구절을 제외하고는 쉴러의 시 ‘환의의 송가’를 가사로 쓴 것이다.)

오! 벗들이여 이 가락이 아니고 더욱 즐거운 가락 그리고 환희에 넘친 가락을 함께 부르자!

환희여, 신들의 아름다운 광채여,
낙원의 처녀들이여,
우리 모두 감동에 취하고
빛이 가득한 신전으로 들어가자.
잔악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자들을
신비로운 그대의 힘은 다시 결합시킨다.
그대의 다정한 날개가 깃들이는 곳,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
위대한 하늘의 선물을 받은 자여,
진실된 우정을 얻은 자여,
여성의 따뜻한 사랑을 얻은 자여,
환희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그렇다. 비록 한 사람의 벗이라도
땅 위에 그를 가진 사람은 모두...
그러나 그것조차 가지지 못한 자는
눈물 흘리며 발소리 죽여 떠나가라.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연의 가슴에서 환희를 마시고
모든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환희의 장미 핀 오솔길을 간다.
환희는 우리에게 입맞춤과 포도주,
죽음조차 빼앗아 갈 수 없는 친구를 주고
벌레조차도 쾌락은 있어
천사 케르빔은 신 앞에 선다.
장대한 하늘의 궤도를
수많은 태양들이 즐겁게 날 듯 형제여
그대들의 길을 달려라,
영웅이 승리의 길을 달리듯.
서로 서로 손을 마주잡자,
억만의 사람들이여,
이 포옹을 전 세계에 퍼뜨리자.
형제여, 성좌의 저편에는
사랑하는 신이 계시는 곳이다. 엎드려 빌겠느냐,
억만의 사람들이여, 조물주를 믿겠느냐
세계의 만민이여, 성좌의 저편에 신을 찾아라,
별들이 지는 곳에 신이 계신다.

내가 유럽에서 많은 성당들을 둘러보면서 느낀 것은, 어떤 성스러운 것에는 그것이 그 종교의 구체적인 관행과 교리에 제한되지 않는 보편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신’이라는 것이 굳이 기독교의 ‘야훼’가 아니라도 인류가 공유하는 성스럽고 숭고한 이상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인류 모두의 환의의 송가가 될 수 있다. 그런 영혼에 울리는 보편적인 것을 각각의 종교, 문화, 언어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있다면, 충분히 그렇다.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 영웅이 승리의 길을 달리듯, 서로 서로 손을 마주잡자,
억만의 사람들이여, 이 포옹을 전 세계에 퍼뜨리자.

위대한 인간의 위대한 예술을 다시, 청각과 시각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다시 만날 수 있는 곳. 짧은 비엔나의 일정은 그래서 나에게는 이번 여행에서는 어쩌면 주제넘을지도 모르게 가장 사치스러운 경험이었다.

***
영화 ;  Immortal beloved

여행에서 본 영화 중에는 유럽 여행자들이 십중팔구는 본다고 하는 Before sunrise (그리고 Before sunset) 와 함께 베토벤에 대한 영화인 Immortal beloved 가 있다.

전자의 영화는 워낙 유명하게, 비엔나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영화. 여행에서 어떤 우발적인(혹은 운명적인), 그러나(혹은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을 만나기를 바라는 여행자들의 기대를 담는다.

후자는, 베토벤의 주요한 작품들을 (주로 전기적 근거는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이는) 개인적 경험과 연결해서 보여준다. 베토벤에게, 불멸의 연인이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력을 전제로.

영화의 상상력도 별로 나쁘지는 않다. 영화는 영원immortal하지만, 시간에 어긋난 사랑의 무대에 베토벤을 등장시킨다. 아, 시간의 덧없음이여. (여기서 시간이란 더 이상 위대한 무엇이 아니라, 가장 슬픈 결과를 낳는 운명Fortuna, 혹은 그녀의 장난과 같은 것. 오히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영원하다.)

하지만, 영화의 설정 때문에 주로 베토벤의 음악들을 거의 그의 개인사와 연결시킨다는 단점이 있다.(게다가 대사를 통해서 그의 음악들을 그런 식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을 통해서 베토벤을 작품 속에서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설사 실제로 그러한 측면이 없지 않더라도, 베토벤의 음악은 그의 개인적인, 개인의 영혼의 고통을 그대로 표현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영화는 다소 편협한 측면이 있다. 그의 음악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고통받는 영혼의 인간이고, 그 고통을 음악에 담았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 그것을 모두가 함께 공명할 수 있도록 보편적인 것으로 표현한 점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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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간과 대면하는 곳

로마, 시간과 대면하기

로마는 시간이, 마치 퇴적암처럼 쌓인 몇 개의 지층으로 이루어진 도시다. 고대 로마 유적부터, 중세, 르네상스,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시간대가 남긴 물질적 증거들은 도시를 독특하게 만든다.

로마를 여행하면서 처음 느끼게 되는 당혹스러움은 바로 이런 시간대가 구별되지 않고 시야에, 머리 속에 섞여들면서 생기는 혼란 때문이다. 시간의 지층에 따라 여행일정을 짜기 보다는 가까운 곳에 있는 유적, 박물관 등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혼란은 어쩔 수 없다. 잠시 전에는 미켈란젤로가 15세기에 조각한 기원전 12세기 인물인 모세의 상을 보고 나서, 20분 후에는 기원전 3세기부터 건설된 로마 신전과 공회당 유적을 보게 되는 식이다. 수천년의 시간 대가 눈앞에서 질주한다.

이렇게 되는 것은 로마의 복잡다난한 역사가 한 공간에 모여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 제국의 수도로 수백년간 융성했던 로마는, 제국의 붕괴와 함께 황폐화되지만, 기독교의 중심으로 다시 건설되어가고, 15-16세기에 막대한 힘을 갖게 된다. 르네상스 시기, 그리고 종교개혁을 불러오는 그 시기에 막대한 자원이 투입되어 위대한 건축과 조각, 회화 작품이 탄생한다.

이런 한편에, 고대 로마 유적에서 보이는 요소들이 기독교 교회에서 다시 발견되는 것도 흥미롭다. 기독교도들은 신탁의 공간 정도였던 로마의 신전과는 달리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을 원했는데, 이것은 로마의 공회당(바실리카)과 같은 건축물을 활용하거나 모방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한 건축의 요소들은 뚜렷히 계승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명한 성당 내부에는 그리스-로마 신전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이 서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많은 성당이 로마의 판테온(모든 신들을 위한 신전)의 돔을 모방한 두오모를 갖고 있다.

(기독교가 교인들의 공동체를 구성한다는 것도 역사적으로 특수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지적--이데올로기는 실천 속에서 형성된다는--에 영향을 준다. 신도들이 공동체의 공간, 교회에 모여서 집단적인 물질적 실천, 무릎꿇고 기도하고, 예식을 집단적으로 매주 수행하는 것은 기독교에 고유한 요소. 그리스, 로마의 종교적 행위는 다른 방식이었던 것이다.)

산재한 고대 로마 제국의 유산도 엄청나지만, 기독교(현재는 그 한 분파인 카톨릭)의 중심인 로마에는, 이 성당에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저 성당에는 카라바조의 그림, 옆 성당은 베르베니가 설계한 식으로, 도시가 르네상스 시기 예술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를 생각하다

이곳에서 인상적으로 본 작품들을 열거하자면 끝도 없을 것같다. 그래서 그런 것은 일단 (그런 게 있다면)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고, 전체적인 인상, 그리고 그 속에서 생각한 기독교에 대한 단상만.

이곳에는 기독교의 각종 유물이 ‘현존’한다.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는 예수의 제자였던 베드로의 유골과 (여기부터는 좀 미심쩍기는 하지만) 예수가 못박힌 십자가 조각,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롱기누스의 창 등의 성물이 안치되어 있다. 쇠사슬의 성 베드로 성당에는 베드로 성인을 묶었다는 쇠사슬이 보관되어 있고(옆 사진), 성스러운 계단 성당에는, 예수가 빌라도 총독 앞에 끌려갈 때 올랐다는 계단이 옮겨져 있다.

(대부분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라나가 수집한 것이다. 아마도 제국의 변방에 300년도 지난 이런 유물을 찾으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지역 총독이 어떤 식으로 황제의 어머니가 요구한 것들을 “찾아”냈을지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런 것들을 보고 있자면, 기독교가 어떤 초역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종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냥 추상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이 만들어낸 종교라는 점. 따라서 그것은 오히려 ‘유한해’ 보인다. ‘역사적 기독교’를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고나할까.

또 한편, 이 속에서 기독교의 역사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4세기에 이르러서 기독교를 공인하는 과정이 있다. 이미 제국 곳곳에 기독교가 널리 퍼지면서, 더 이상 탄압으로는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조성되기 때문이다.(황제는 자신도 사실은 기독교도라는 식으로 주장하지만 신빙성이 없다고 알려져있다) 기독교는 신분의 차별을 부정하는 혁명적인 평등주의 사상으로 대중에게 확산되었는데, 지배계급은 그것을 변용하여 수용하고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용하려고 한다.

알튀세르는 지배이데올로기는 피지배이데올로기라고 말했는데, 바로 이런 기독교 역사에 대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았을까. 기독교의 역사가 바로, 피지배이데올로기를 오히려 지배이데올로기로 영유하는 과정이었다. 이후에 기독교는 계급지배를 인정할 수 있을 만큼 ‘순치’되지만, 그것은 지배계급 자신의 이데올로기 이전에 피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이러한 기독교 교회의 권력은 로마에 집중되었는데, 도시 전체가 위대한 종교적 건축물들로 넘치게 만들었다. 이런 성당에 들어가면, 종교를 믿지 않는 나 같은 사람도 숙연해지는 성스러움이 가득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많은 경우에, 특히 바티칸의 상징인 성 베드로 성당의 경우에는 그것을 건설하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면죄부를 판매하고, 결국 종교개혁과 전쟁을 불러오게 되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교황청은 이 점을 반성하면서, 앞으로는 성 베드로 성당보다 큰 성당은 지을 수 없도록 했다고 한다. 카톨릭은 그나마 이런 자기 제어라도 있지만, 개신교는 날로 거대한 교회를 짓고 있다. 사실상 면죄부를 교회 안에서 판매하면서 말이다.

거대한 시간

고대 로마의 유적은 주로 ‘포노 로마노’라고 불리는 유적군에 집중되어 있다. 이 곳은 주로 언덕에 살던 시민들이 모일 수 있는 언덕 사이의 저지대에 공회당, 원로원, 신전 등을 건축하면서 형성된다. 지금도 많은 유적이, 비록 무너졌지만 당시의 규모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회화들(‘모나리자’도 그런 경우)을 보면 배경에 거대한 폐허를 그려넣는 경우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이곳의 풍경, 특히 로마 제국 황제의 궁전이 있던 카피돌리노 언덕 폐허의 장면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것들은 상상의 산물이 아니었구나.

원로원 유적 앞에는 시저가 부르투스에게 암살된 장소가 있고, 그 옆에는 안토니우스가 시저에 대한 추모연설을 통해서 로마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곳이 있다. 서기 70년 예루살렘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한 티투스황제가 세운 개선문도 남아 있는데, 그 문의 부조에는 성서에 나오는 솔로몬왕의 7개의 대가 있는 금촛대, 예리코 성벽을 무너트릴 때 사용된 은나팔을 노예와 보물과 함께 가져오는 장면도 있다. 유명한 콜로세움도 인접해있어서 보인다.

이런 식으로 역사의 현장이, 돌덩이 유적으로 남아 이 곳에 있다.

유적 한켠, 무너진 대리석 기둥에 앉아서, 숙소에서 싸온 사과를 베어 먹으면서 그곳들을 바라본다. 거대한 유적들만큼 거대한 시간을 실감하게 되는 현장이다. 이곳에서는, 시간은 마치 곳곳에서 급류를 만드는 거대한 강물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절대로 후퇴하지 않고 어느 것에도 제지당하지도 않으면서 모든 것을 밀고 나간다.

내가 있는 시간도 그렇게 밀려간다. 이곳에 살았던 로마 시민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느끼고, 욕망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했을까. 그것들이 모두 돌덩이로만 남아서 수천년 후에 관광객들의 기념사진 배경이 된 곳. 우리에게 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 우울해지지만, 그렇기 때문에 결과를 알 수 없는 어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만 자기 자신과 현재에 충실할 수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간에 겸손해야한다는 것도, 그러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과감하게, 앞으로 나가야한다는 것도.

로마에서의 경험은, 너무나 거대한 것들 앞에 섰을 때, 느껴지는 한 인간의 외소함 같은 것이다. 그것은 단지 시간과 규모에 있어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시스틴 성당에 미켈란젤로가 그런 천장화나 최후의 심판과 같은 작품을 대할 때 느끼는 감정은, 미켈란젤로라는 한 인간이 창조한 위대한 예술에 앞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숙연함이다. 그런 존재들 앞에서 나는 있는 힘껏 내 존재의 최대치를 살아야할텐데,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곳이다.


* 바티칸에 있는 몇 개의 작품은 다음에 언급하자, 무엇보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성당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 그리고 피에타. 카라바조의 같은 작품들. 그리고 고대의 유물인 라오콘 군상에 대해서.

* 이제 내일이면 마지막 여행지, 그리스로 간다.

* 너무 인상적이라 숙소 근처에서 담은 노을빛, 본 것만큼 환상적인 색감은 값싼 디지털 카메라에 잘 담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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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가난한 골목길

나폴리의 골목길

나폴리는 이곳에서 만난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그리 인기있는 여행지는 아니다. 소매치기 등의 범죄가 많다고 소문이 자자할 뿐 아니라, 정작 나폴리 시내에는 별로 볼 것이 없어서 로마에서 출발해서 나폴리 근처를 여행하는 패키지 투어를 가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폴리에 묵는 여행자들도 나폴리 자체보다는 근처의 카프리 섬이나 소렌토, 폼페이 유적을 가려는 것이 목적인 사람들이 많다.

카프리섬이나 소렌토 같은 이탈리아 중남부 해안은 멋지다. 카프리섬은 하얀 햇빛이 더 하얀 절벽과 푸른 바다에 부딪혀 공기 중에 흩어진다. 햇빛이 공기중에 가루처럼 부숴진다는 표현이 비유적인 것이 아니라는 걸 그곳에서 알았다.



카프리 섬에 유명한 “푸른 동굴”은 작은 구멍으로 들어온 햇빛이 하얀 석회암 바닥에 반사되면서 어디서도 보기 힘든 투명한 파랑색을 만들어낸다. 굳이 “푸른 동굴”이 아니라도 지중해의 바다는 빨려들어갈만큼 투명하다. 깍아지른 절벽에 하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포지타노 마을의 해변은 어디를 찍어도 그림같다. 이런 곳들에 오면 사람이 ‘비현실적’인 모든 것들이 눈앞에 현실로 펼쳐지는 느낌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곳을 넘어서 어떤 것이든 가능하다는 것을, 놀라면서 다시 느끼게 된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폴리 자체는 그리 인기있는 관광지는 아니다. ‘세계3대 미항’이라는 건 뱃사람들이 편한 항구를 말하는 것일뿐, 여행자에게도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나폴리 곳곳은 지저분하고 혼잡한데, 그것은 이곳이 이탈리아의 “남부”라는 것을 보여준다. 공식실업률이 25%대에 이르고, 체감 실업률은 50%라는 도시.

'돌아오라 소렌토로'라는 유명한 이탈리아 노래도, 가난 때문에 나폴리와 인근 소렌토 항에서 배를 타고 이민해야했던 남부 사람들의 슬픔을 노래한 것이라니, 아름다운 소렌토 항구도 낭만만 있는 곳은 아닌 셈이다.

숙소 밖에서는 매일 밤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거리에는 흑인 노점상들을 어디든 볼 수 있는데, 어떤 날은 폭력배에게 자릿세를 내지않은 듯한 흑인 여성이 물건을 ‘압수’당하는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옆에 있는 흑인 상인들도 아무 행동도 할 수 없다.

이 도시의 뒷골목은 마치 우리나라의 달동네 모습같다. 이제는 대부분 철거되고 재개발되었거나 예정된 그곳들. 5층 정도 되는 다가구 주택 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을 걷는다.

빨래가 가득 널려있다. 아이들이 뛰논다. 어느 모퉁이에서는 위층에서 버리는 물벼락을 맞기도 했다. 관광지가 아닌 사람이 사는 골목길을 만나면서 마음이 찡하다.

이곳 골목길은 언덕 위까지 쭉 이어져있다. 하지만 언덕 전체가 달동네는 아닌데,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좋은 집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전망이 좋은 그곳은 아예 순환도로로 분리된 별도의 구역을 형성한다. 좋은 집들이 있는 고지대에는 지하철도 잘 되어있고 거리도 깨끗하다. 비싼 물건을 파는 상점들도 많다.

가난하고, 더 가난한 사람들은 더 낮은 곳에 사는 도시. 그 뒷골목은 여행에서 만난 길 중에 가장 인상적인 곳 중에 하나다. 그곳은 단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이 아니라, 힘겨운 삶의 공간자체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남부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엿보는 이곳에서, 어느 여행지도 단지 ‘관광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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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르네상스와 석양

피렌체, 르네상스와 석양

여행 중반을 넘어서 스위스 일정부터 여행은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스위스 알프스에서 날씨는 내내 흐리고 진눈깨비가 내렸고, 인터넷으로 예약한 숙소는 기차역에서 오르막으로도 한참을 가야했다.(약도에는 바로 지척으로 그려져있다;;) 아를에 가기 위해 경유해야하는 아비뇽에 가는 열차는 일찍 매진되어서 예정보다 늦게나 움직일 수 있었고, 아비뇽에 도착해서는 알아본 숙소는 문을 늦게 열고, 새로 알아본 숙소는 너무 멀어서 남프랑스의 햇빛 아래서 탈진할 정도였다.(가방은 왜 이리 무거운지..!)

아를에서 묵고, 다음날 유스호스텔을 check out하고 짐을 맡기러 간 역 앞에 짐 보관소는 문을 닫아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짐을 맡기러 아비뇽에 다시 다녀와야했다. 최악의 상황은 그 다음이었는데, 아비뇽에서 니스를 거쳐서 피렌체까지 오기 위한 기차표가 문제였다. 아비뇽 역에 역무원 아줌마는 황당하게도 아비뇽에서 니스는 당일날짜로, 니스에서 피렌체까지의 야간열차(침대)는 엉뚱한 날짜의 표를 준 것이다. 연결되는 두 번째 티켓을 다시 확인하지 않은 내 실수도 있겠지만, 덕분에 프랑스-이탈리아 국경에서 자리에서 쫒겨나서 이등석 의자에서 쪼그려서 선잠을 자야했다.

이렇게 찾아간 피렌체에서는 첫날 점식 식사하면서 엉뚱한 청구서를 받아서 항의해야했고, 일정이 늦어지면서 숙소 예약이 어긋나서 이틀째 숙소를 다시 옮겨야했다.(다행히 옮긴 곳이 조선족 분이 하는 아래 이야기한 그 민박집이다.) 이런 상황에서 도착한 피렌체에서 출발은 기진맥진하고 신경은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두오모

하지만, 피렌체 두오모(돔dome 형 성당, 원래는 주교가 있는 곳을 뜻한다).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쥰세이와 아오이가 만나기로 약속한 곳으로 잘 알려진 피렌체 두오모의 쿠폴라는 463개의 가파른 계단을 통해서 올라갈 수 있다. 오전에 올라간 이곳에서 한참동안 피렌체 시내를 바라보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내려왔다.

("냉정과 열정사이"는 두권의 책이 있고, 영화로도 나왔다. 그러나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배역부터 시작해서 줄거리의 변형에 이르기까지, 혹은 사실성까지도 영화는 매우 실망스럽다.)

피렌체는 그곳에서 빛과 색깔로 가득하다. 왜 아오이가 그곳을 “연인들의 성지”라고 말하는지 알 것같은 곳. 정오가 되어서 성당마다 울리는 종소리가 마치 화음을 이루고 서로 대화하는 것처럼 퍼져나올 때, 그곳은 마치 천상에 있는 느낌이 든다. 종소리들이 마치 중력을 사라지게하는 힘이 있는 것처럼.



르네상스, 도시의 전경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도시로 잘 알려져있다. 15-6세기에 전성기를 맞은 이 도시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들과 스페인이 지중해 무역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세계의 헤게모니를 형성하고 있을 때 메디치가의 지배 하에서 화려한 유산을 남긴다. 이곳은 단테, 다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도시다.

여기서 역사적 설명을 할 것은 아니니까, 몇가지 인상만.
우선, 피렌체에는 화려한 궁전은 없다. 토스카나 공국의 ‘수도’이기는 했지만 그 자체가 도시국가였던 이 곳은, 메디치가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부르조아 시민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력했다. 이 때문에 지배 귀족의 권력은 항상 제한되었는데, 메디치가조차도 막강한 부에도 불구하고 절대군주 국가의 궁전과 같은 것은 만들 수가 없었다.

이런 느낌은 도시 전체의 전경에 배여난다. 메디치가의 궁전조차도 도시의 다른 건물들 속에서 자기 자리를 가질 뿐이지 튀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느낌은 이전에 가본 도시 중에서는 암스테르담과 비슷하다. 그곳에서도, 시민들의 힘이 강력했던 곳 답게, 평범한 건물들이 도시의 전경을 지배했던 것이다. 절대군주들이 화려한 건물을 과시적으로 건설한 런던이나 빠리와는 다른 느낌.

르네상스, 우피치 미술관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라는 우피치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2시간 정도는 줄을 서야한다. (예약을 할 수는 있지만 예약비를 따로 내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피렌체에서는 거의 ‘의무적으로’ 가는 곳. (물론 들어가서 관람객들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작품들을 감상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미술관에서는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 그림에 어떤 변화들이 생겼는지 알 수 있다. 원근법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진 Paolo Uccello 의 “산로마노의 전투”같은 그림도 그런 것 중에 하나. (이 그림은 피카소가 자주 스케치 해갔다고 하는데, 가이드북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 그림이 생동감있어서라기 보다는, “입체”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태초의 시도’가 어떤 것이었는지, 입체를 평면에 나타내는 것이 주된 관심을 보였던 피카소가 흥미로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여러 변화를 상징하는 것은 두 개의 성모자상이다.
Filippo Lippi 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성모에 그려넣는다. 이제 성모의 모습은 여전히 천상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현실의 사랑을 담아낸다. 그녀는 수도원에서 함께 도망쳐 나온 연인이기도 했는데, 신에 대한 금욕적인 봉사보다 현세의 사랑에 더 가깝다고나 할까. Madonna with the Child and two Angels, 1465, 왼쪽위

이 작품과 함께 인상적인 것은 Parmigianino 의 “목이 긴 성모 Madonna dal Collo Lungo”(1534~40). 보면서, “아, 이게 르네상스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모는 오히려 매혹적인 여인으로 나타나는 데, 봉긋하게 드러난 가슴은 불경하게도 성적인 매력을 보여줄 정도다.  왼쪽아래

이런저런 역사적 설명들보다도 여러 작품들, 특히 두 작품을 보면서, 르네상스 시기,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해갔는지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내 이 속에서 사람들은 ‘개인’을 발견한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르네상스 이후 서양 근대의 가장 위대하고 독보적인 발견이다.

유디트, 그녀들의 분노와 그의 당혹

이 두 작품 외에 더 깊이 인상적인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니 그것은 Artemisia Gentileschi 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1620)

페미니즘 미술의 선구자로도 알려진 그녀의 이 작품은 두 여인의 결연한 의지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모습이 담겨있다. (그녀와 작품에 대해서는 인터넷을 찾아보아도 흥미로운 정보들도 얻을 수 있다. 구약 성서 내용 중 유디트라는 여성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아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에게 접근해서 그를 암살하는 내용이다. 젠틸리스키는 독보적인 여성화가로, 성폭력을 당하고도 오히려 고문을 받으면서까지 가해자의 유죄를 입증해야헸던 어려운 상황에 처한 적이 있다.)

두 여성(유디트와 하녀)의 표정도 그렇지만 목이 베이는 홀로페르네스의 표정도 흥미롭다. 여러 화가들이 이 테마로 그림을 그리는 데, 이 미술관의 보디첼리도 마찬가지고 대부분 근심하는 철학자의 표정을 한 베어진 목으로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이 그려진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남성은 당혹해 하면서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표정을 짓는다. 손을 하늘로 뻗지만 이미 힘은 빠져있다.

이 그림은 남성인 나에게(도) 매우 인상적이다. 다른 그림들에서 홀로페르네스는 마치 ‘여성의 복수’에 대해서 “다 알아, 그건 너희편 남성들의 국가를 위한 것이지”라고 말하는 반면에 이 그림은 “도대체 왜 이 여자들이 분노하는 거지”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훨씬 진실에 근접해있다. (오히려 남성들은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반면, 여성인 젠틸리스키는 그것을 정확히 포착해서 그림 속에 넣었다.)

(복제품으로 우피치에 전시되어 있는 “라오콘 군상”도 한참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 이야기는 진품이 있는 바티칸을 보고 나서 이야기하자.)

피렌체의 석양

이제까지 다닌 어떤 도시보다, 피렌체는 석양이 아름다운 도시다.
노을이 질 때, 피렌체 건물들의 붉은 색은 더욱 붉게 빛나고 하얀 벽들도 밝은 붉은 색으로 물든다. 무엇보다 말로 표현하기도, 카메라에 담기도 힘든 것은 두오모와 종탑의 하얀 대리석 벽이 노을 빛에 물들어가는 모습이다. 천천히, 불그스레한 노을빛이 그 속에 배여든다. 

그것을 보면, 피렌체 사람들은 어떤 예술 작품들 이전에 자신의 도시 자체를 르네상스 식으로 창조했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 전체가 중세적인 딱딱함을 넘어서, 사람의 온기가 있는 곳, 그러나 빛나는 곳으로 만들어졌다.

번잡한 관광지가 되어 버렸지만, 피렌체는 여전히 아름다운 도시. 황제와 왕들의 화려한 궁전은 없지만, 그것들보다 도시 전체가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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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 ‘조선족’ 아주머니

피렌체에 ‘조선족’ 아주머니

피렌체에서는 유스호스텔이 아니라 민박집에 묵었다. 민박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전문적으로 숙박을 할 수 있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식사가 한식이고 우리말이 숙박객들이나 주인과 통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유스호스텔과 다를 바도 없다.

피렌체에서 민박집으로 온 이유는 한편으로는 독일에서부터 거의 계속된 유스호스텔 생활의 긴장이 피곤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터넷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인 민박은 인터넷을 꼭 갖추고, 대부분 무선 인터넷까지 가능하지만 유스호스텔은 거의 대부분 유료인데다가 비싸기까지 하며, USB 메모리도 사용할 수 없는 게 많다.

피렌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숙소에서 만난 ‘조선족’ 아주머니 이야기를 하자. (‘조선족’이라는 말이 그리 좋지 않은 용법이기는 하겠지만, 그 ‘느낌’이 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따옴표를 붙여서 그냥 쓰는 것으로 하자.) 피렌체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할만한 곳이기는 하지만.

이탈리아에는 유독 민박집을 ‘조선족’분들이 많이 하신다. 내가 묵은 민박도 그런 곳이었는데, 한국인 유학생이 하는 곳보다 밥도 푸짐하고 지내기도 편하다. 인터넷 사이트를 보다보면 ’조선족‘ 분들이 하는 민박을 폄하하는 글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모종의 편견이 작용하는 것같다. 여기 주인은 ’조선족‘ 아주머니고, 일하시는 분도 ’조선족‘ 아주머니가 계신다.

남한에서 추방

이들은 이주 노동자. 저녁을 먹기 전에, 일하시는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는다.
올해 쉰넷 되신다는 이 분은 연변에서 알콜 공장에서 남편과 함께 일하셨다고 한다. 퇴직을 하고 나서 ‘배운 것이 없어서’ 남한에 일하러 오셨다고 한다. 벌써 6년전 이야기다. 역삼동 식당에서 하루를 일하고 단속이 있자, 신당동 포장마차로 옮기셨는데, 다음다음날 법무부 단속에 걸리고 말았다.

아주머니는 단속반에 하소연한다.
“내가 사람을 친 것도 아니고 물건을 훔친 것도 아니요, 그냥 일을 했을 뿐인데, 세상 어디에 일하는 게 죄가 된단 말이요?”

“불법” 이주노동자는 단지 일할 뿐이다. 자기 손으로 먹고살 돈을 버는 노동이 범죄가 되는 희안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결국 강제추방된 아주머니에게 남은 건 1500여만원(남한 원화)의 빚이었다. 아무리 일해도 갚을 수 없는 빚 때문에 아주머니는 다시 시도한다. 이번이 이탈리아였다.

이번에는 이탈리아

이탈리아로 가기 위한 브로커비 등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민박집 주인인 학교 동기생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북경에서 홍콩으로 기차를 타고, 홍콩에서 말레이시아로 넘어왔다. 말레이시아에서 다시 싱가폴로, 다시 여기저기 여러나라를 거쳐 일주일이 걸려서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아마 ‘불법적’인 신분증 같은 것도 만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거리에 장사하는 중국인들 상당수가 이용한 루트가 아니었을까.) 같이 오던 분들 중 몇몇은 단속에 걸려서 추방되는 것도 지켜봤다.

한 5년을 생각하고 오셨다는 아주머니는 중국에 가족이 있다. 한달에 두 번 정도 전화하신다는 아주머니는, 남편과 딸, 아들이 있다. 과년한 딸이 시집을 안 간다고 고집이라고 걱정이라고 한다. 지구 반대편으로, 돈을 벌기위해서 가족과 5년간 이별..

올 때 주인 아주머니가 대준 비용 때문에, 1년은 월급없이 일하신다는 아주머니는, 이제 10개월째다. 월급을 받기 시작하면 남한에 올 때 진 빚부터 갚아나가야한다. 5년은 있어야하는데 이빨이 흔들려서 걱정이 많으시다. 이곳에서는 의료보험도 없이 치과 치료 받기가 끔찍하게 비싸다.

이주자들

주인아주머니는 거의 남한 말투의 억양을 사용하시는데, 왠지 물었더니 3년 동안 남한에 식당에서 일하셨다고 한다. 그 때 번 돈으로 이탈리아에 남편과 함께 와서 민박을 하신다. 남편은 베네치아에 가서 민박집을 하신다니 수완도 좋으시다.

왜 아주머니가 돈을 벌러 오셨냐고 하니까, 여자들이나 돈 벌 자리가 있다고 하신다. 민박집 같은 숙박시설이나 이런 저런 서비스업종에 일하시는 걸 텐데, 저임금의 여성 이주노동자를 요구하는 것은 전세계적인 현상인 것같다. 한편으로 여성, 불안정노동자로 착취하고, ‘불법’이라는 약점으로 더 착취한다. 일부러 국가가 ‘적당히’ 유지하는 불법의 현장들인 셈이다.

이곳에 온 ‘조선족’ 분들도 그렇지만 중국인들은 특유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상권을 장악한다고 한다. (마치 주인아주머니가 친구분을 불러온 것과 같이 연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방식의 연결을 통해 적어도 이탈리아에서는 민박은 대부분 ‘조선족’분들이 ‘장악’하고 계신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피렌체에 '매대‘들을 보면 대부분 중국사람들이고, 이탈리아 사람들이 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것같다는 생각도 드는 게, 이탈리아 사람들이 스스로 신뢰도를 깍아먹는 경우도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아주 개인적인 경험이라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 이탈리아에 첫날 와서 식당에서 먹은 점심에는, 계산서에 메뉴에 안 씌여있는 cover fee 라는 자릿세에다가, 서비스비 별도, 게다가 먹지도 않은 음료수에, 마신 것의 2배가 되는 물을 마신 것으로 청구되었다. 실수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정황도 있는데, 뒤에 두 개는 항의하고 고치기는 했지만 매우 기분 상하는 일이다. 물론 개인적인 경험들일 뿐. 그랬다가 나폴리에서는 나서서 길을 가르쳐주는 노인들을 많이 만났는데, 나폴리노인들은 친절하다는 '편견'도 생긴다.;;)

'조선족'에 대한 편견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탈리아의 ‘조선족’분들의 민박에 대해서 편견을 가진 평가가 인터넷에 많다. 그런 평가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조선족’에 대한 편견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적어도 이번은 묵었던 어떤 곳보다 음식도 숙소도 좋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젊은 한국출신 사람이 하는 것과 같은 ‘말이 통하는’ 분위기는 없을 텐데, 아마도 그런 점도 이유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과 말하면서 느낀 것은 적어도 어떤 사람들은 '조선족'에 대해서 동질감을 느끼는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민족'이라는 게 얼마나 웃긴 건지를 다시 느낀다.(아마 앞으로 북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같은 민족'으로는 사고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주머니 이야기를 들으면서, ‘민족’이라는 희미한 끈으로 나와 연결되고 먼 이국에서 우연히 만난 그분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세계를 돌아 첩보작전을 방불케하는 방법으로, "불법“이주를 감행하고 일하고 지구반대편의 가족에게 송금하는 여성 이주노동자. 이번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분.

그리고 그녀가 중국에서도 걱정없이 살 수 있도록 세계경제는 변화될 수 있을까, 혹은 그녀가 원하는 곳에서 “불법”에 불안하지 않게, 안전하게 노동할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국경들이 민주화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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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은 글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피렌체에 가깝다는 이유로 반나절 다녀온 피사에 있는 그 유명한 "피사의 사탑"
.
나도 이 앞에서는 완전히 관광객 모드로 돌입했는데, 전세계에서 온 갖가지 모양의 사람들이 모두 기울어진 사탑에 손을 대고 서있는 포즈로 똑같은 사진을 찍는게 흥미로운 곳이다.

나는 흠.. 찍어줄 사람이 없어서 그냥 일반적인 포즈의 셀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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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의 하얀 햇빛

아를의 하얀 햇빛

남프랑스의 아를. 스위스를 떠나서 간 이 곳에 온 것은 순전히 고흐 때문이다. 고흐가 그림에 담았던 햇빛을 직접 보고, 피부에 담고 싶어서다.

아비뇽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아를. 남프랑스의 첫 느낌은 ‘밝다’는 것이다. 이곳의 태양은 어느 곳보다 밝게 빛난다. 이곳보다 위도가 더 낮은 동남아 같은 곳보다 더 밝은 빛을 띈다. 그 빛은 모든 것을 희게 빛나게 만든다.



모든 것에 흰색이 섞여들어간다. 왜 고흐가 유화를 그리면서 흰색 물감을 그렇게 많이 사용해야했는지 알 수 있을 것같다. 들판에도, 나무에도, 론강의 강물에도, 집들에도 흰색이 넘치고 눈부시다. 그것은 강렬하기는 하지만, 뜨겁다는 느낌보다는 ‘밝다’는 느낌.

고흐가 그렸던 몇군데 장소를 찾는다.
첫날 밤은 하늘이 흐려서, 밤늦게 까지 기다렸는데도 아쉽게 론강에 비치는 별빛을 보지는 못했다.
이튿날. 고흐가 그렸던 랑그루아 다리를 찾아간다.(이제는 아예 반 고흐 다리로 불린다.) 버스가 다닌다고는 하지만 시간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를 시내에서부터 운하를 따라 걸어가기로 했다. 지도에서는 그리 멀어보이지 않는 그곳까지 따가운 햇빛을 맞으며 40여분을 걸어서 도착했다. 자갈길을 걸으면서 벌써 발이 아프다.

고흐는 햇빛이 있는 현장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이런 곳을 매일 그림을 그리기위해서 오갔을 것이다. 마치 농부가 자신의 밭을 갈기위해서 찾아가는 것처럼, 하나의 노동처럼.



다리와, 주변의 들판을 둘러본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도 흰빛이 가득하다. 한참을 들판을 바라보았다. 어찌보면 평범하고 단조롭기 그지없는 들판에서 고흐는 어떻게 그렇게 살아있는 장면을 포착하고 그려낸걸까. 자연의 깊은 곳에 있는 본질적인 것을 고흐는 그 곳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과 함께 찾아낸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깊이 느끼고 포착해야 가능한 일이다.



천천히 걸어돌아오면서 발견한 건, 반짝거리는 무언가였다. 그것은 흔들리는 나뭇잎.
바람은 나뭇잎은 흔들고, 햇빛이 반짝거린다.
그 흔들림은 사진으로도 잡아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반짝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흐는 다소 거칠고, 역동적인 붓터치를 통해서, 정지한 화면에 반짝거리는 빛의 강렬한 움직임을 그려넣었다.

시내에 들어와서 고흐가 머물렀던 요양원과 고흐가 그렸던 ‘밤의 카페’(이제는 이름이 반 고흐 카페)를 둘러본다.



아를 시내에는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로마 시대에 갈리아 진출을 위한 전진기지였기 때문이다. 아를의 햇빛에 받아 빛나는 그 유적들도 무척 아름답다. 하지만 고흐는 고집스럽게 ‘어디에나 있는’ 밀밭과 들판, 복숭아나무, 빨래하는 여인, 추수하는 농부를 그렸다. 고흐는 평범한 것들 안에 있는 진실을 만날 수 있게 캔버스에 담았고,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그것들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다.

모든 것을 가장 밝게 빛나게 하는 아를의 햇빛 아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보는 방법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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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서쪽숲’을 만나다

스위스, ‘서쪽숲’을 만나다

사실 스위스를 일정에 잡으면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산이 뭐 어딜가나 똑같지”라는 게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이내 알게되었다.



스위스에서 닷세를 보내는 동안 하루는 이래저래 이동하는 날이었고, 사흘은 날씨가 흐렸다. 알프스의 깊은 산은 항상 구름을 만들어내서 흐린날이 더 많다. 그렇지만 그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인상적이다.

수만년 동안 빙하가 만들어낸 U자형 계곡(나는 이게 교과서에만 나오는 개념인 줄 알았다)은, 목축을 하는 마을 바로 뒤편에 3000-4000 미터짜리 절벽을 만들어놓는다. 그 밑에는 빙하가 녹은 자리에 호수가 만들어지고, 석회질의 흰빛이 섞인 물은 청록색으로 빛난다. 이제까지 자연에 대한 내 관념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규모의 경관이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서부터 펼쳐진다.

그 자연은 이제까지 인상적으로 보았던, 인간이 만든 모든 건축물들을 왜소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에펠탑이든, 빅벤이든, 브란덴부르크문이든, 어떤 것을 그 근처에 가져다 놓아도 장난감처럼 보일 수밖에 없을 테고, 아름다움에 있어서도 비교할 거리가 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자연만이 만든 풍광은 아니다. 사람들이 만든 건물은 자연의 거대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고, 목축업이 만든 푸른 초원은 더 넓게 시야를 확장시킨다.)



거대하다는 느낌을 넘어 그것은 숭고함을 느끼게한다. 자연에서 느끼는 숭고함이란 감정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걸까. 사람에 대해서라면, 그것은 전에 ‘레미제라블’에 공연에 대한 느낌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신의 내면에 진실로 충실하고, (그것이 비극일지라도) 운명에조차 맞설 때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자연의 숭고함은 그와 같지는 않다. 그것은, 압도적인 어떤 힘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거역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고, 그 앞에서는 자신의 운명에 대면할 때 가지는 감정을 갖게 한다. 그 안에서도 나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자연의 위대한 힘을 또한 인정한다는 것. 또는 온갖 운명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지켜낸 위대한 인간과도 같이, 수만년 동안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온 위대함에 대한 감정이랄까.



다시,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 숭고함 앞에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내가 충실해야할 나의 내면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스위스에서의 여행이 좋았던 것은 단지 그러한 자연이 그곳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의 여행은, 여행자를 ‘생각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새로운 볼거리를 쉼없이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산을 오르거나 내리면서, 한걸음 한걸음 계속 변화하는 광경은 끊임없이 새롭다.) 오히려 그냥 그것을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그 속에서 그 자연은 눈앞 시야에 틈을 벌여준다. 그곳 뒤에서 ‘나’를 만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내가 충실해야할 나는 누구인가. 내가 가졌던 사고와 이념, 감정들은 무엇이고, 나는 어디에 있는가.

이제까지 살면서, 나 자신보다는 오히려 나의 어떤 의무감, 책임감 같은 것들이 나를 대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자신을 지워가거나 억압하면서.

심지어 운동에 대해서도 그렇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그것은 어떤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먹을거리를 만들고 자신의 노동으로 세상을 만드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그들의 권리를 위한 정의가, 어떤 대의명분 이전에 “내가” 운동하게 하는 근원적인 동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고흐의 그림 ‘감자먹는 사람들’과 막 추수가 끝난 남프랑스 아를의 들판에서도 그것을 다시 생각한다.)

스위스에서 마지막 일정을 보낸 루체른. 운좋게도 그날 날씨만은 맑았다.
그날 오른, 알프스 봉우리들이 보이는 ‘리기쿨룸’이라는 산을 천천히 걸어내려오다가 문득 산속 마을의 벤치에 앉았다. 날씨가 흐려서 정작 그곳에 갔을 때에는 눈보라만 보았던 알프스 최고봉이라는 융프라요흐와 그 밑의 숲이 보이는 곳. 그리고 MP3 플레이어에서 이적의 ‘서쪽숲’이라는 노래가 흘러 나온다.



나 어릴 적 어머니는 말했죠
저기 멀리 서쪽 끝엔 숲이 있단다
그곳에선 나무가 새가 되어
해질 무렵 넘실대며 지평선 너머로 날아오른단다
오, 내 어머니, 오, 난 가지 못했죠
오, 난 여기서 언젠가 언덕을 넘어 떠나고 말리라 노래만 부르죠

커갈수록 사람들은 말했죠
어디에도 서쪽 숲같은 건 없단다
너는 여기 두발을 디딘 곳에
바위틈에 잡초처럼 굳건히 견디며 버텨야한단다
오, 내 어머니, 오, 난 가지 못했죠
오, 난 여기서 언젠가 언덕을 넘어 떠나고 말리라 노래만 부르겠죠


노래를 듣다가 뭉클해서 울어버리고 말았다.
먼길을 떠나 바로 여기서 서쪽 숲 앞에 선 느낌이었고,
천천히 자리를 일어나면서 다시 조금 커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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