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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17
    착한 성장 영화를 보는 아픔(1)
    장작불-1
  2. 2008/07/05
    '책임'에 대해 - 사건의 공정한 이해(2)
    장작불-1

착한 성장 영화를 보는 아픔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닌,

착한 성장 영화를 보는 아픔.

<날아라 허동구, 박규태 감독>

 

 

 

1.

‘날아라 허동구’는 ‘성장’ 영화이다. 그리고 ‘착한’ 영화이다. 주인공 동구는 물론이거니와 동구를 둘러싼 대부분 등장인물들은 때론 미운 행동들도 하지만 착하다. 그래서 이들이 만들어내는 에피소드들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웃고 있어도, 마음이 편치 못하다. 오히려 마음이 아프다. 무엇 때문일까?

 

2.

IQ 60인 지적장애아동인 동구는 초등학교 3학년이다. 동구는 교실에 있는 노란 주전자에 물을 담아 같은 반 아이들에게 물 따라주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행복해하며, 학교에 다닌다. 그런데 동구는 학교(제도)와는 어떤 사회적 관계도 맺지 못한다. 오히려 이를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는 교사는, (시험 당일) 학급의 평균 점수가 낮아진다는 이유로 동구를 제도 바깥으로 내몰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제도(학교 교육) 내에서 함께 하지만 언제든지 사회적 관계를 단절하고 동구를 배제하려 드는 것이다. 교사와 교장이 준태(동구 아빠)를 불러 특수학교 전학을 강요하는 장면은 이를 잘 보여준다. 요컨대 동구는 장애아동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 제도/규칙과는 상관없는 제도로부터 배제된, 사회로부터 격리된 이방인인 셈이다.

 

이런 사정(모습)은 같은 반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이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행복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나, 어쨌든 줄기차게 물을 떠다 나르는 동구의 노동으로 아이들은 편하게 물을 먹지만 어느 누구도 고마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할 줄 아는 거라곤 물을 떠다 옮기는’ 일밖에 없다고, 동구를 줄곧 무시한다. 이런 모습은 야구 코치 상길과 관계 맺는 과정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야구 코치 상길은 선수 1명이 없어 시합을 나가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동구의 출현이 마냥 반갑고 고맙다. 비록 룰도 모르고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지만 가르쳐주면 습득하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구는 규칙을 말해줘도 모르고, 공도 무서워한다. 단지 주전자에 물을 떠다 나르는 일을 행복해할 뿐이다. 상길의 바람/기대는 점점 좌절되고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동구를 무시/외면하기 시작한다. 상길 역시 동구가 ‘장애아동’이라는 사실을, ‘차이’가 있음을, 모르는 것이다. 착한 성정 때문인지 ‘동구’를 이른바 ‘잘’ 대해주지만,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는 실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계의 모습은 동구의 든든한 의지처인 아빠 준태마저도 크게 다르지 않다.

 

3.

준태는 동구를 성심성의껏 보살핀다. 동구의 통학 길을 3년 만에 깨우치게 했다는 준태의 말에서 그의 고단한 노동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동구가 잘 때, “양 한 마리가 울타리를 넘는다”는 주문을 읊어대는 모습은 사랑스럽다. 게다가 그는 동구의 미래를 위한다는 이유로 새까맣게 태운 치킨을 먹고 담배를 하루에 몇 갑씩 피는 등 보험금을 타기 위해 눈물 겨운 노력을 다한다. 그러나 준태의 역할은 거기까지이다. “동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 라는 친구 말에 발끈하고 “우리 애가 너희 애랑 같냐?”라는 말을 하는 것에 그친다. 동구의 일상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동구의 성장과 발달의 계기를, 마련하지는 못한다. 때문에 이사를 가야 하는 현실 앞에서 두려움에 포섭되고 특수학교 전학을 강권하는 교사/교장의 말 앞에서 무릎 꿇고 빌기도 한다. 한 없이 잘해주는 ‘착한’ 아빠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마지막 장면에서 동구의 통학로에 표시를 해 놓고 동구로 하여금 스스로 찾아오게 하는 대목은, 동구를 성장 가능한 존재로서 대하고자 하는, ‘지혜로운’ 아빠의 한 단서를 볼 수 있기도 하다. 그리고 ‘동구-윤찬’의 관계 맺는 양상/과정은 이를 적절하게 보여준다.

 

4.

윤찬은 아이들로부터 무시당하면서도 항의조차 하지 못하는 동구가 못나고 갑갑하다. 이런 윤찬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동구로 하여금 ‘제도/규칙’을 배우게 하는 계기로서, (동구와) 사회적 관계를 맺는 구성원으로서 존재한다. 동구의 코치로서 동구가 좋아하는 주전자와 컵으로 야구의 규칙을 설명해주는 준태의 (때론 모질기도 한) 모습은 ‘장애아동’의 특성과 차이를 이해한 바탕 위에서 관계 맺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과정은 장애인 등장 영화였던 <허브>가 보여준 작위성보다는 현실성 있게 그린다. 인간 승리는 아니라 해도, 오히려 홈런이 아닌 번트를 대는 동구의 모습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공만 맞히기만 하면 되는 번트조차도 동구에게는 어려운 과정이었고 노력과 인내, 그리고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윤찬으로 인해 처음으로 동구는 규칙(사회)을 배우게 되고 또한 규칙(사회) 속에서―잘 하든 아니 하든 상관없이―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이를 수행해보는 경험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동구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제도(규칙)을 배워야 하고, 이 속에서 자신의 어떤 역할이 있으며 이를 담당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비교적 담백하게 그려내었기 때문인지 <날아라 허동구>는 상당수 평론가들로부터 호의적 평가를 이끌어 내었다. 가령 씨네21의 장미는 “<날아라 허동구>는 장애 아동이 겪는 차별 대우에 집중하기보다 조금씩 전진하는 (세상과 맞서는 법을 터득하는) 동구의 발자취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거나 강병진은 “장애아동이 세상의 편견과 맞서는 이야기는 아니다... 동구가 자신만의 즐거운 삶을 찾아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날아라 허동구>는 동정과 편견의 함정에 장애를 빠뜨리는 우를 범하진 않는다.”고 평하였다. 또한 심영섭은 “장애인 영화의 깜찍한 기습 번트”(부산일보)라는 글에서 영화의 의미를 이 같이 규정하기도 하였다.

 

“이 영화는 최근의 여러 상업 영화의 흥행 공식을 모두 모았다. '말아톤'과 '허브'를 잇는 사랑스런 장애인 캐릭터, 부재하는 가족, 부성애, 우정, 최후의 승리, 소박한 낙관주의 같은 것들. '장애인 영화'라고 불리워도 좋을 이러한 새로운 장르의 등장은, 장애인의 험난한 세상살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도 동시에 가족애와 휴머니즘이 꽃 피던 전근대적인 인간 관계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관객의 환타지를 차고 넘치게 만족시킨다.”

 

대부분 맞는 말이다. 때문에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는 나로선 더 이상 이 영화에 대한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내가 서 있는 처지 때문인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대목, 다름 아닌, 영화를 보는 동안 즐겁지만 마음이 아픈 대목이 있다. 문제는 과연 이 아픈 대목을 어느 정도 의제화 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이다. 이유인 즉, 이 영화는 장애인권영화가 아니라 대중영화이기 때문이고, 단지 ‘장애아동’이라는 소재를 활용한 것 뿐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심승보는 “장애인, 당신들이 사회에 적응해라?”(씨네 21, 562호)라는 글에서 ‘장애라는 소재만을 이용했지, 현실은 눈감았다’고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하기도 하였는데 내용을 보자.

 

“영화는 아무런 사회적 능력이 없는 장애아동을 둔 가정을 묘사하면서도 어떠한 대책도 제시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동구가 오직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된다는 소망만을 가지고 있을 뿐 그 뒤의 삶에는 전혀 대비하는 모습이 없다... 그리고 아무리 지능이 낮은 장애인들이라 해도 고도의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단순한 일이나 행위는 반복적인 학습을 통하면 어느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나 장애인 부모들의 견해이다. 그러나 11살인 동구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주전자 당번과 학교에 다녀오는 것 외에는 없다. 화장실 볼일까지 아버지가 일일이 지시해주어야 하고, 학교수업은 단 0.1%도 이해하지 못하는 등 배움의 능력은 전혀 없는 아이로 묘사돤다... 결국 이 영화는... 비장애인의 관점에 서서 사회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장애인들이 문제가 있는 존재이니 피나는 노력을 하든, 대충 살든 너희가 사회에 적응해서 살아가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심승보씨의 비판은 영화의 의도를 자의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 ‘비장애인의 관점에 섰다’고 하지만, 정작 이 영화는 ‘장애-비장애’의 관점으로 접근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 비평에 있어 감독의 의도를 충실히 따를 필요가 없고, 자신만의 관점을 세워 비평할 순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적어도 영화 주제에 대한 이해는 기본일 듯한데, 심승보씨의 비판에는 이 대목을 소홀하게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심승보씨의 비판을 쉽사리 지나치기 어려운 ‘대목’은 이 영화가 ‘장애아동’을 소재로 다루고 있고, 이를 일반 대중들이 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때문에 나는 지난 <허브>와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을 비평하면서 이와 같은 장애인 등장 영화를 비평하는 것이 꽤나 곤혹스럽고 어렵다는 점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대중영화라는 속성 상 장애인의 현실을 ‘극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은 말 그대로 보는 이의 처지나 입장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심승보씨의 비판과 앞서 인용한 평론가들의 비판의 차이는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여기에서 한 가지 기준을 설정해볼 수 있다면 심영섭씨가 제기한 것처럼, “장애인(아동)의 험난한 세상살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영화 속에서 얼마나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가? 달리 말하자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회 통합을 위한 제도적/인식적 장치들이 영화 속에서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고, 이에 대한 감독의 시선/입장은 어떤 식으로 그려지고 있는가?’ 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 대목과 관련해서는 “히딩크의 한국이름도 허동구입니다. 히딩크가 보여준 희망처럼 우리 동구도 여러분께 희망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감독의 소박한 인터뷰처럼, 말 그대로 소박하였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즉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회 통합적 차원에서 생각해볼만 한 대목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윤찬-동구의 관계 양상은 이를 말해준다고도 할 수 있지 않는가 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 역시 ‘소박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일반 대중들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윤찬-동구’의 관계 양상을 보고 ‘장애인의 험난한 세상살이를 보며 영화를 보는 내(우리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저 일상의 동구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이 웃기고 살짝 감동을 주는 것 뿐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하여 이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고 하여 감독을 비난할 수 있는 사안은, 결코 아니다. 다만 아쉽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때문에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맨발의 기봉이>나 <허브>보다는 현실적으로 그리지만, 정작 장애인(가족)의 현실 문제를 함께 고민해볼 만한 내용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기에 웃고 있어도 맘 놓고 웃지 못하는, 아픈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더하는 말) 2008년 4월 11일부로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이 시행되었다. 그러니까 동구 아버지는 특수학교로 전학가라고 요구하는 교사와 교장을 이 법에 의거하여 고소를 하면 승소할 것이니, 다음에는 무릎 꿇고 빌지 말고 장애인부모 단체를 찾아 도움을 구하거나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하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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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에 대해 - 사건의 공정한 이해

 

‘책임’에 대해 - 사건의 공정한 이해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발달장애학생이 체육시간에 운동장을 돌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학교/체육교사 측 말로는 장애학생에게 뛸 것인지 말 것이지 물으니, 학생이 뛰겠다고 하여 뛰도록 하였고, 운동장을 약 네 바퀴 정도 돌고난 후, 학생이 갑자기 쓰러졌다고 한다. 응급조치를 하고 119를 불러 병원에 후송하는 과정에 학생의 심장이 멎었다고 한다.


문제는, 아이의 심장이 원래 좋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부모는 입학하면서 이 사실을 특수학급 교사에게 알렸고, 체육교사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체육교사는 아이에게 뛸 것인가를 물어보았고, 아이는 제 심장이 고장 나서 멈출 때까지, 뛰었던 것이다. (영화 <말아톤>에서 발달장애인인 초원이의 마라톤 감독이었던 형욱이 사우나를 하러 가면서 ‘운동장 40바퀴 뛰어’ 라고 농담으로 말했지만, 거의 기다시피하면서도 마지막까지 뛰었던 장면과 겹친다.)


여기까지 보면, 체육교사 (어느 정도 명백한) 과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이 아버지는 조용히 넘어가기를 원하셨다. ① 아버지의 말인 즉, ‘교사/학교의 측의 과오가 심각하다면 책임을 물을 수 있으나, 장애학생을 돌보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생각되기에, 이 문제로 더 이상 시끄럽게 하기는 싫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의 장례식까지 치룬 이후, 아이와 함께 특수학급에 다니는 장애학생의 부모님들이 ‘특수교사의 자질’ 문제를 제기하면서 ‘특수교사-어머님(들)’의 갈등 관계가 부각되었다. 그래서 ② 어머니들은 특수교사 때문에 아이가 죽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장애학생을 대하는 특수교사의 관심이나 태도가 미흡한 만큼, 학교 측에 개선방안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③ ‘특수학급 교사와 부모와의 간담회를 매달 실시한다. 장애학생의 교육 과정에서 부모와 수시로 협의한다’ 는 내용으로 학교(교장/교감) 측과 학부모들은 협의하였고,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여기까지 보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실제 이런 일은 빈번하게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대부분 사건 전개 과정과 결과는 이와 같다. 그러나 이 사건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내보인 태도에서는 ‘책임’이나 ‘공정한 태도’와 관련하여, 우리가 생각해봄직한 대목들이 적지 않다. 하나하나 챙겨보도록 하자.


① 아이의 아버지 : ‘이 일로 더 이상 시끄럽게 하기 싫다’


아버지의 이 말 앞에서, 이른바 ‘장애운동가’인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마음 아프시겠지만, 이 일을 계기로 장애학생의 건강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절차를 구비할 수 있도록, 교육청이나 학교에 요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당사자가 하기 싫다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라는 식으로 간단히 체념해버린 나의 태도는, 이런 사건의 재발방지에 책임이 있는 ‘운동가의 정체성’으로서는 결격이다. 또한, 이후 교육청 담당자와 만남에서도 이 사건을 계기로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을 요구하기보다, 그들이 제시하는 우려(‘일선 학교에 장애학생에 대한 관리 문제를 공문으로 지시하면 교직 사회의 성격 상, 자칫 체육시간이나 현장 활동에 장애학생이 배제될 수 있다’)에 이해를 표하는 선에서 그쳤다. 그리고 여전히 교육청은 이 사건을 계기로 어떤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으며, 이를 방관하는 내 태도는 운동가로선 직무유기이다. 결국 나의 대처방식은 아이의 죽음이 아무런 ‘사회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 하나의 ‘사고’에 불과한 것으로 처리하도록 만들었고, 이후에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재발할 수 있는 가능성에 기여하도록 하였다. 더욱 문제적인 대목은 ‘운동가’로서 나는, 내가 해서는 안 될, 사건 해결이 아닌 미봉이나 수습에 힘을 썼다는 점이다.


② 아이의 어머니 및 특수학급 어머니들 : ‘특수교사의 자질이 영 시원치가 않다.’


‘특수교사의 자질’ 운운하는 특수교사에 대한 어머니들의 원망 어린 말 앞에서, 나는 비겁하게도 ‘침묵’을 지켰다. ‘특수교사의 자질’과 관련하여 어머니들이 제기하는 근거라는 것들이 설득력 없는 것임을, 즉 어느 특수학급에서나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점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어머니들의 주장은 지금 이 상황 앞에서 ‘희생양’을 만들고 싶어 하는 감정의 산물임을 파악하였다. 그러나 ‘교사 편을 든다’는 오해가 싫었고 갈등을 피하고 싶었기에, ‘침묵’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 특수교사의 ‘책임’을 묻기에는 타당하진 않다. 물론 도의적 차원의 책임이야 이야기할 순 있다. 그러나 이는 나를 비롯하여 어머니들이 거론할 성질이 아니다. 결국 ‘법적’ 책임의 문제가 남는데, 특수교사는 아이의 심장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양호 및 체육교사에게 알렸다. 따라서 직무유기/업무상 과실로 볼 수 있는 대목은 없다. 굳이 법적 문제를 제기한다면 체육교사가 일정 부분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이의 부모님은 체육교사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설득력 없는 근거로 특수교사의 자질/책임 문제를 제기하였다. 때문에 특수교사로서는 어느 의미에서 퍽 억울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나는 사건을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미봉이나 수습에 방점을 두면서, 해당 특수교사에게 매우 적절치 못한 행위를 할 뻔하였다. 나는 부모들 중 한 분과 통화를 하면서, 학교에 방문하여 교장/특수교사와 면담을 하고 그 이의 ‘자질(책임)’ 문제를 거론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통화 이후에,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특수교사에게 ‘내일 부모들과 면담 할 텐데, 가급적 갈등을 피하는 방향(부모들이 자질 문제를 제기해도, 동의하기는 어려워도 침묵으로 대처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이었으면 좋겠다. 감정끼리 대립하다보면 이 사건은 법적으로 넘어갈 것이다’는 요지로 전화를 걸려고 하였다.


나의 태도가 문제적이었던 것은, 내가 특수교사에서 이렇게 말할 ‘자격’이 없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오지랖’이었고, 그것도  부적절한 것이었다. ‘감정 충돌’이라고 하지만, 교사의 ‘감정’은 억울한 처지에 내몰린 사람이 정당하게 항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반면, 부모들의 ‘감정’은 (아이 죽음에 따른 슬픔은 이 상황에서는 차치해야 한다. 문제는 이것이 구분되지 않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지만...) 거칠게 말해서 근거 없는 마녀사냥식의 한풀이였다. 따라서 이를 단순하게 ‘감정 대립/충돌’로 간주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를 ‘감정 대립/충돌’이라는 싸잡아 버렸고, 오히려 피해자에게 ‘침묵’을 요구하려 들었다. (지난날 계두인 사태 당시, 내 처신을 떠올리게 한다) ‘당신이 참는다면, 체육교사가 무사할 것이다’는 이유로 말이다.


내가, 체육교사의 신변 문제에 대해 관심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사건의 원인과 책임을 규명하고자 한다면, 공정한 태도를 취하고자 한다면, 특수교사 자질 문제를 제기하는 어머니들의 주장이 적절치 않음을 말해야 했다. 혹은 어머니들의 주장에 대해 ‘동의하기 어렵다’는 입장은, 최소한 밝혀야 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들의 주장 앞에서 ‘비겁한 침묵’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피해자’ 입장에 서 있는 특수교사에게는 ‘침묵’하는 게 아니라, 전화를 걸어 특수교사에게 ‘침묵’을 제안하려 들었다. 결국, 나는 피해자에게 또 다른 한 명의 가해자가 될 뻔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내가 취해야만 하는 태도는 학교와 부모들의 면담 전, 장애학생의 어머니들과 갈등을 빚는다 해도 내 입장을 정직하게 밝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특수교사에게는 전화를 걸어 내 입장을 밝힐 이유도 없거니와 상황 설명을 할 필요도 없다. ‘당신(특수교사)이 나서서 사건의 원인 규명 및 책임 여부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라’고, 내가 말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그는 아이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3자였고 나 역시 3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특수교사)은 억울하지도 않냐? 부모들이 말도 안 되는 근거로 특수교사 자질 운운하는데, 교사로서 자긍심도 없느냐? 어머니들에게 강력하게 문제제기하라’고 말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비겁한 태도다. 어머니들의 부당한 주장 앞에서는 침묵한 채, 이른바 뒷담화를 즐기면서 서로 싸움을 붙이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진정 내가 ‘사건의 원인 규명 및 책임 여부’를 묻고자 하였다면, 피해자인 부모를 어떻게라도 설득해야 했다. 이것이 ‘실패’하여 어머니들이 ‘특수교사 자질’ 및 ‘책임’ 문제까지 제기한다고 해도, ‘어머니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특수학급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따라서 이를 두고 특수교사 자질 문제로 볼 순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야 했다. 특수교사 편에 서서, 굳이 저런 말을 할 이유 따위는 없다. 공정성을 해치는 행위는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로 공정성을 기하는 행위 또한 아닐 때, 이런 경우에는 ‘침묵’이 현명한 처신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나는 공정성과는 거리가 먼 비겁한 ‘침묵’으로 이 사건을 대했다. 게다가 나는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부적절한 처신을 취했다. 그리고 이는 나만이 아니라, 학교 관리자나 교육청도 마찬가지였다.


③ 아이가 다녔던 중학교의 교장/교감 : ‘특수교사에게 이야기를 해서, 앞으로 잘 하도록 지도하겠습니다.’


사건이 일단락된 후, 학부모들은 ‘특수교사의 자질’ 문제를 거론하면서 학교에 항의 방문하였다. 여기에서 교장/교감은 ‘특수교사에게 이야기를 해서, 앞으로 특수학급 아이들을 더욱 잘 돌보도록 하겠다’고 대답하였고, 구체적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부모와 교사 간에 간담회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표면적으로 보면 잘 처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특수교사 입장에서는 자신의 자질 문제를 제기하는 부모들의 주장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볼 기회조차 배제당한 채, 졸지에 ‘특수교사의 자질이 미비한’ 이로서 평가/매도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 자리의 교장이나 교감 역시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학부모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해 함께 검토(특수교사 자질과 제기하는 문제들이 상관성 여부에 대한)하는 태도, 즉 사건의 원인을 제시하고 책임을 규명하려는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사태 무마를 위해 무조건/표면적적으로 부모들의 문제제기를 수용하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들이 좀 더 용기 있고 공평하고자 하였다면, 부모들에게 사과를 할 지언정 이 사건에 대해 특수교사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체육교사에 대한 선처를 부탁하는 모습으로 드러나지 아니었을까? 물론 학부모와 특수교사와 1달에 1번씩 간담회 하는 결과가 부적절하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런 결과가 나온 맥락/과정을 두고 볼 때는 내가 범한 과오를 똑같이 저지르고 있고, 때문에 동의할 순 없는 것이다. 이는 교육청의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역시 특수교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리고 재발방지를 위해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결국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장애학생의 죽음을 둘러싸고 학부모들과 교장/교육청, 그리고 나의 ‘태도’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았다. 모두들 하나 같이 사건에 대한 공정한 이해나 원인 및 책임 규명과는 거리가 먼, 심리적인 판단으로 해당 상황을 정의하려 들었다. 또한, 교장/교육청 및 나의 경우에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사건을 수습하거나 미봉하는 것에만 관심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장애학생의 죽음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특수교사의 경우 부모들 간의 신뢰는 고사하고, 오히려 ‘불신의 싹’을 뿌린 모습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렇게 된 것이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고 말하기 어려우나, 제법 기여한 것은 부정할 순 없다. 장애운동가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남은 과제는, 이런 사건 앞에 ‘공정한 시선’을 견지하는 일과 예의 공정성을 기반으로 하여 정직하고 용기 있게 사건의 이해 당사자들과 마주하는 일이다. 적어도 이와 같이 알고 행할 때, 나는 장애운동가로서 정체성을 확보/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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