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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장애우 논쟁의 장애운동사적 의미에 관해

이 글은, 장애인에 대한 호명 문제를 두고 '장애우'라고 부를 것이냐, 아니면 '장애인'이라고 부를 것이냐를 두고 벌어진 일련의 과정을 장애운동사의 관점에서 살펴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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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장애우 논쟁의 장애운동사적 의미에 관하여> -



이 글은 '장애인-장애우' 논쟁이 한국 사회 장애운동사에서 어떤 의미가 함의되어 있는가를 소략적으로 정리한 글이다. 처음 의도한 것은 '장애인-장애우' 논쟁을 통해 '장애'라는 개념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그러나 내 역량 부족으로 인해 논쟁 과정을 정리한 수준의 글이 되었다. 그럼에도 장애인-장애우 논쟁이 식어 가는 이 시점에 문제를 제기한 박지주씨들과 당사자인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이하 연구소)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정리한 글이 없다는 점에서 이 글의 쓰임이 어느 정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 해 본다.

'장애우' 라는 용어에 관한 문제 제기는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별 다른 호응을 얻지 못한 채 개인의 '불만' 정도로 치부되었고 연구소 역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장애인이동권연대 전 사무국장인 엄태근씨와 지난날 연구소에 적을 두기도 했던 박지주씨가 이동권연대와 연구소의 게시판, 그리고 장애인 뉴스 싸이트 등에 기사를 올려 '장애우'라는 용어의 문제성을 적극적으로 환기했다. 이들의 문제제기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상당수 장애인들이 '장애우'라는 용어가 지닌 문제성에 공감하면서 연구소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 제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한 엄태근씨의 문제 제기는 설득력이 높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었으나, 연구소 입장에선 문제 제기의 쟁점이 무엇인가에 대한 오해를 불러 올 만큼 거친 대목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왜 그들은 장애우라는 말을 유포하는가" 라는 글에서 엄태근씨는 연구소를 일러 "장애인을 주체화하지 않고 대상화"하고 있으며, 연구소와 국가관료를 등치시켜 "장애인들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하여 이 같은 엄태근씨의 문제 제기는 '장애우'라는 용어의 타당성 여부라는 논쟁의 공통 지반을 마련하지 못한 채, 연구소와 감정적 대립을 불러왔다. 이동권연대 사무국장으로 있던 엄태근씨의 정치적 입지와 거친 문제 제기로 말미암아 장애 운동계에서 장애우 연구소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가 라는 생성적 논의/긴장의 장을 형성하기 보다는, 거칠게 말해 '연구소를 씹고 밟음으로서 이동권연대가 크려고 한다'는 오해와 억측을 불러온 것이다.

이동권연대나 엄태근씨가 실제 이런 의도를 지녔는가 하는 문제는 다른 차원으로 다시 따져봐야 할 문제지만, 사실 나로선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통해 지금 연구소의 존재 의미/정체성을 비판하기엔 더러 비약적이란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이유인 즉, 이는 이후 연구소의 해명에서 드러나듯이 한국 사회 장애 운동사에서 연구소의 역사적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엄태근씨의 문제 제기는 그 의도야 무엇이었든지 간에, '장애우'라는 용어와 연구소의 현재 활동 상황을 혼용하거나 비약함으로서 '장애우' 용어에 대한 논의의 생산성을 이끌어내진 못했다. 허나 이를 두고 엄태근씨의 거친 문제제기에만 책임을 두기 어려운 것이,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연구소의 응대 방식도 그 책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소는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한 해명 과정에서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단체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정체성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불성실하거나 안이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우선, 단체의 지향성을 드러내는데 있어 어떤 단체 이름을 쓰는가 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엄태근씨의 논의에 나 역시 동의한다. 그리고 어느 단체의 표지/이름이란 것은 사회 변동의 차원에서 혹은 단체의 정체성 변동의 산물로서 바뀔 수 있고 또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임을 밝히고 논의를 이어나가 보자.

연구소가 '장애우' 라는 용어에 대해 문제 제기를 받고 처음 해명한 글은 2002년 겨울호 회원소식지에 실려 있다. 그러나 연구소의 소식지라는 무게를 가진 책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 실린 '장애우'에 대한 해명은 단순 소박함, 그 자체로 일관하고 있다. "처음 '장애우'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함께 살아야 할 세상이지만, 아직까지 장애인들이 살기에는 너무나 열악해서 우리 사회가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함께 풀어가고자 하는 의도이다... 지금은 워낙 많은 곳에서 '장애우'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그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모두 나올 수는 있지만, 장애인을 지칭하는 단어에 대해 너무 얽매이지 말았으면 좋겠다"(2002년 겨울호 연구소 회원소식지)라는 진술은 이를 보여준다. 이는 '장애우' 라는 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를 단지 용어에 대한 문제성 정도로 인식했지, 장애인의 정체성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별 달리 주목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이런 연구소의 무성의한 태도는 장애인 당사자인 박지주씨들로 하여금 분노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 글에 대해 박지주씨들은 "사회적 약자가 되는 기준과 그 배려는 누가 하는 것입니까? 또한 더디더라도 함께 가자는 외침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장애우 용어의 지속적 사용은 끊임없이 장애인을 사회적 주변부의 존재로 무언가 계속 받아야하는 비생산적인 보호의 대상으로 낙인하고, 그런 영향으로 정책·제도·인식을 만들어 왜곡된 구조를 양산해 낸다고 봅니다"라고 연구소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언급했듯이 '장애우'라는 용어 사용이 이처럼 문제성을 내장했는가 하는 문제는 다시 따져 봐야 할 문제다. 하지만 연구소의 이런 무성의함과 안이함이 장애인들의 이와 같은 분노, 혹은 논의 초점을 흐리는 결과를 불러왔다 할 수 있다. 이런 목소리가 거세지자 연구소는 2003년 2월호 함께 걸음을 통해 '공식적'으로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해 해명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 연구소는 지난 소식지에 실었던 '장애우' 용어에 대한 해명이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왔다는 점에 대해선 밝히고 있진 않다. 또한 글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과 달리 '장애우'라는 용어 비판에 대해, "이 용어를 만들어 낸 동기나 과정,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말로서 '장애우'라는 용어가 생겨난 의미를 해명하고, 되려 이를 제기하는 이들의 태도를 더러 불온시한다. 이는 2003년 4월호 함께 걸음에 실린 "장애우(友)를 사용하는 우(優)를 범하지 말라"라는 글에서 "문제는 내용, 즉 맥락인데 여전히 장애 가진 사람을 대상화시키며 동정의 눈길을 바라보는 관점이지 '장애우' 용어 자체가 시혜적 관점을 부각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으로 반복된다.

물론 이는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한 박지주씨들의 문제 제기가 <장애우 라는 용어를 하루 빨리 바꾸는 것이 장애인 복지에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연구소의 정체성에 걸맞다> 라는 식의, 본래 맥락과 다른 차원에서 제기된 비판으로 인해 기인된 바가 없지 않다. 예컨대 2월 호에 대한 박지주씨의 반론 글 중에서 "초기 연구소를 만드신 분들이 장애가 있다고 해서 당사자 주의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진술은 이를 말해주고 있다. 당사자주의가 무엇인가 라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박지주씨는 '이 사회에서 배제 당한 채 살아온 중증장애인들만이 당사자주의에 합당하고, 하기에 우리 목소리는 정당하다'는 식의, 더러 단순한 논리를 전개함으로서 오해를 불러왔다.

이런 식으로 문제 제기자와 당사자 간의 논점 일탈로 인해 '장애우-장애인' 논쟁의 요체, 즉 '장애우라는 용어를 장애인으로 바꾸는 것은, 오늘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장애인의 삶의 자존감을 조금이나마 복원하는 데 있어 필요한 사안인가' 라는 논의는 초점화가 되지 못한 채, 감정적으로 대립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났다. 그러다 보니 현재까지 두고 본다면 연구소 입장의 최종본인 4월 호에서도 논의의 진척은 안 되고, '장애우' 용어에 대한 거듭된 해명에 이어 결국 문제 제기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무엇이라 부르든지 간에 '취향의 문제다' 라는 식으로 끝나 버리고 만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장애우다 라고 표현한다면 주체성이 결여"된 것이지, 혹은 "나는 장애인이다 라고 말하면 주체적인" 것인지 라고 물으며, "'나는 장애우다'라는 표현이 익숙지 않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틀린 것이 아닙니다. 1인칭으로 사용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장애용어에 대한 선택권은 당사자들에게 있습니다. '장애인'이라는 용어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문제 맥락을 흐리면서 눙쳐 버리는 연구소의 입장은, 적어도 '장애우'라는 용어를 단체 명으로 삼고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궁색하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지금 우리가 초점화 삼고 있고, 또한 삼아야 하는 것은 '장애우' 용어의 틀리고 맞음이 아니라, '장애를 가진 사람'을 뭐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합당한가, 혹은 설득력이 있는가 라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장애인-장애우' 논쟁과 관련하여 일련의 과정을 짚어보았다. 그렇다면 이 논쟁이 무엇을 낳았는가를 정리하는 장이 필요하겠으나, 언급했듯이 내 역량 상 이는 어려운 대목이다. 다만 이 논쟁을 지켜본 사람들의 입장을 살피고 난 다음, 무엇을 낳아야 하는가와 관련하여 소략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대체로 다섯 가지 정도의 반응을 보였는데, 첫째는 장애 운동이 여느 사회 운동처럼 내구성도 부족한데 이런 '용어'에 대한 논쟁은 장애계 내에서 분열만 불러오고 소모적이다, 그러니 싸우지 말고 대동단결하자 라는 식의 '좋은 게 좋다'형. 둘째는 장애인을 사용한다고 주체적이고, 장애우를 사용하면 비주체적인가 라는 식의 '논점 흐리기'형. 셋째는 '우(友)'는 운동적 관점이기에 장애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장애우라 부르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의 '막가파'형. 넷째는 장애인이란 법적 용어가 존재하고 연구소가 이를 바꾸자고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용어 사용을 사람들의 선택에 맡기고 그것을 존중하자는 '취향선호주의'형. 다섯째는 나는 '장애인'이지 '장애우'가 아님을 조목조목 밝히고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매김하고자 했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소수이긴 하나, 비록 '병신→불구→장애→?'라는 담론적 변화를 제시하진 못했으나, '장애인-장애우' 논쟁의 지점과 방향을 헤아리는 글도 있긴 했다. 여기에서 '장애인-장애우'논쟁의 의미를 장애운동사의 차원에서 새겨볼 수 있다.

장애인-장애우 논쟁의 최종적 귀결은 표면적인 것만 두고 보아서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단체 이름을 바꾸거나 고수하는 것 정도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중증 장애인들이 자신들을 규정하고 불리는 용어를 거부했다는, 이른바 '장애 담론'의 주체 변화/확장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은, 특히 '장애우'에 관한 문제 제기의 축을 이루고 있는 중증 장애인은 어떤 선택권/결정권도 없이 가족과 국가에 의해 배제/박탈당해왔다. 이는 그들을 호명하는 방식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9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장애인에 대한 호명은 중세적·봉건적 용어라 할 수 있는 '병신'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를 전후로 하여 산업 발달로 생겨난 후천적 장애인을 일러 이 사회는 '불구자'라는 용어로서 규정했다. 즉 "불구자라는 용어는 선천적인 장애보다 후천적 장애의 발생이 더 중요해져 가는 사회적 변동의 산물"이며, 이는 비장애인들의 새로운 인식의 결과로서 자리잡았던 것이다. 이 같이 후천적 장애/인의 증가는 장애인에 대한 호명을 복잡하게 했으며, 이런 혼란 상은 1980년대 초반 법전과 일상적인 언어에서부터 여실하게 드러난다. 당시 장애인에 대한 지칭은 법전으로 명시된 언어는 "불구자·심신장애자·심신박약자·신체 장애자"였고, 언론 매체에 사용된 구체적 용어는 "맹인·장님·소아마비·하반신 불구자·귀머거리·곱추" 등으로서 뒤섞인 채로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장애 운동계의 당사자들의 문제 제기로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장애인'이란 용어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장애인'이란 용어가 비장애인들 혹은 우리 사회의 삶의 자리까지 아주 조금이나마 실질적으로 스며든 것은 불과 몇 년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이유인 즉슨, 오늘날 장애인의 현실, 이동권과 교육권, 그리고 노동권의 열악함에서 드러나듯이 우리 내면에는 여전히 장애인에 대해 병신·언청이와 같은 낙인(烙印)이 자리잡고 있음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장애인'이란 법적 용어가 생긴 지 벌써 20여 년이 지났으나, 우리의 생각이나 행위는 '병신→불구자→장애인'이란 담론 변화와는 무관하거나 동떨어진 채로, 실질적 내용은 여전히 비장애인들로 하여금 장애인을 '병신'이라고 부르게끔 되어 있다는 것이, 오늘날 장애인이 처한 현실이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장애우'라는 용어는 이런 실질적 내용이 부실한 상황에서 운동적 동력을 견인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기에 오늘날 '장애인-장애우' 논쟁은, 비로소 '장애인'이란 호명이 한국 사회에 '보편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즉 그런 장치마저도 거부해도 될 만큼의 운동적 역량을 견인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징표라고 하겠다. 근자 들어 전국에서 조금씩 생겨나는 중증장애인독립센터는 이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다만 우리가 좀 더 멀리 지향할 바란, 객관/현상적 지칭인 '장애인'이란 용어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이 사회에서 장애인이란 정체성을 담아내면서도 한 명의 동등한 인간으로서 보편적/실질적 지위를 지향하는 언어를 만들어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민중'이란 개념이 이 사회의 변혁 운동에 참여하는 구성원 전체를 일컫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기 위한 필요 조건으로서 오늘날 논란이 되고 있는 '장애인-장애우' 논쟁이 '맞다, 틀리다', 혹은 '각자의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식이 아니라, 좀 더 다양하고 설득력 있는 근거와 목소리를 가지고 치열한 논쟁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 지칭은 단순히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서 대상에 대한 인식의 폭과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되살리고 이를 지향한다는 장애 운동을 한다는 연구소는,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운동의 대상으로 선택'당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선택'하는' 지점에 서 있다는 사실을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김규항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지금 여기에서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 장애 운동의 원칙이 존재한다면, 적어도 지금까지 언제나 호명의 대상으로 불려왔던, 즉 배제/박탈당해왔던 그 이들의 고통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태도, 신영복 선생의 말을 빌자면 '하방연대(下方連帶)' 바로 그 지점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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