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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와 장애인 영화에 대한 단상

이 블로그를 찾는 분이 누구신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앞서, 저의 글에 어떤 분이 트랙백이라는 걸어두었기에, 잠시 그 곳에 다녀왔습니다만...

(저는 컴맹에 가까운지라...ㅠㅠ 한글 작업만 주구창창... )

 

그래서, 상당히 어색합니다. 누군가가 이 곳에 다녀가고 있다는 사실이...

 

사실, 만들 때에는 제가 쓴 글을 차곡차곡 모아놓고 싶은 바람(별로 쓴 것도 없지만서리...)도 있고, 무엇보다 '장애' 문제 '인권' 문제의 상관성과 장애인권운동의 방향이나 구체적 기획 등을 함께

고민하면 좋겠다 하는 소박한 생각에서 시작했는데,

 

막상 만들고 나니, 하도 야릇한 느낌이 들어 지워버리려고 했는제, 지우는 방법을 찾지 못해 결국 남겨 두었음다. (지금 저는 이 글을 쓰면서도 왜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인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처음인지라..아마도 이런 묘한 심사에 시달리는 것이겠죠.) 그런데 하루 지난 다음 날 보니, 무려 20여분이 왔다갔다는 내용이 뜨고, '무슨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비워두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에 글을 올려두었는데,

 

무려 160여분이 다녀갔다는 기록이나오더군요. (억! 소리가 났습니다.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구요...)

 

어떻든, 그래서 아직 이 블로그를 어떤 용도로 쓰는 것이 적절한지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만든 것이 저이니, 그냥 방치해두지 못해, 지난날 썼던 글을 하나씩 올리고 있습니다.

 

이 글은 '장애코드로 문화읽기'라는 장애문화 공동체에 제가 올린 것인데... 막상 지난 글을 올리려고 하니, 앞서 '제 글을 차곡차곡 올려두고 싶다'는 생각과 달리, '제 글을 울궈먹는다'는 생각이

들어, 이처럼 약간의 거부감이 생겨나는 듯 싶기도 합니다. ....  블로그에 대한 제 입장이 분명해지면, 덜하려나...

 

아, 어떻든, 왜 이 글을 쓰는지 여전히 묘연한 상황에서, 주절주절 거렸습니다.

 

아래는 말씀드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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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와 '장애인 영화'에 대한 단상(斷想).


이 글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를 둘러싸고 생겨난 논란과 관련하여, '장애인 영화란 어떤 내용과 형식을 담아야 할까' 라는 물음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한 글이다. 이를 위해 <오아시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몇몇의 글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는 장애인의 현실(장애인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해 퍽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장애인인 공주 명의를 빌려 새 아파트에 들어가 사는 그의 오빠, 공주와 한 집에 있는데도 상관 없다는 듯이 성관계를 맺는 이웃 부부, 종두네 가족 사진 찍을 때 짐짝 부리듯이 공주의 훨체어를 옮기는 종두 형, '너 변태지, 저런 얘에게 성욕이 생기데...' 라고 말하는 경찰까지. <오아시스> 이전에도 장애인 등장 영화, 예컨대 <고양이를 부탁해> <안녕 유에프오> 등을 보면 장애인과 관계 맺는 비장애인의 모습이 드러나긴 했으나, 이처럼 선명한 방식으로 나타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장애 여성의 현실/삶을 다루지 않았다'는 식의 적지 않은 비난을 몇몇의 비/장애 여성들로부터 거세게 받았다. 가령 장애여성 <공감>이란 단체 구성원인 박주희씨는 '오아시스는 없다'는 글에서 "강간은 사랑이 아니"며 "감독의 상상처럼., 장애 여성은 비장애여성이 되길 염원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해야 할 일이라면, 장애 여성은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의사 표현을 한다"고 주장하며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장애여성"으로 그려 두었다 비판했다. '영화 <오아시스>에서 보여주지 않는 것에 관하여'의 홍성희씨는 "종두와 달리 공주에 있어서는 환상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으며,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서의 현실적인 삶의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 즉 "진짜 장애여성으로서의 욕망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반면 류미례 감독은 '정상화의 관점에서 본 영화 <오아시스>의 소중함' 이란 글에서 <오아시스>는 기존 장애인 등장 영화와 달리 장애인을 특별하게 다루지 않는, '장애 문제에 관한 조용히 스며드는 계몽 영화'라는, 그들과 더러 상반된 주장을 했다. <오아시스>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다르지 않다'고 습관/상투적으로 읊조리는 비장애인들로 하여금 '진정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는가' 라고 두 시간 내내 묻고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주장은 제 나름의 일리가 있는 듯 하나, 꼼꼼히 따져보면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다. 우선 류미례 감독의 경우, <오아시스>가 '장애 문제에 관한 조용히 스며드는 계몽 영화'라 주장하는데, '계몽 영화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남아 있다. 만약 영화에서 등장하는 비장애인들의 일방적인 태도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계몽 영화'라 한다면, 비장애인들의 태도를 '사실적'으로 그리기만 한다면 그것이 곧 '계몽 영화'가 될 수 있는지, 그렇다면 언급한 다른 장애인 등장 영화와 <오아시스>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의 물음 등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이 류미례 감독처럼 '내가 장애인을 평소 어찌 대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적 태도를 취할 것인가도 남아 있다. 나로선, 이 대목에 대해 회의적이다. 우리들 대개는 어떤 영화를 볼 때,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읽고자 하는지 의식하기 보다 영화 소비자로서 등장 인물들의 행위가 '좋았다/나빴다'는 식의 정서적 반응/인상만이 남을 가능성이 크다 생각한다. 영화 속 인물들의 부정적인 모습에 대해 자신의 삶의 태도와 무관하게, (타자의 부정적인 모습에선)'나를 예외로 한다' 할까. 그런 점에서 <오아시스>는 장애 문제에 대한 '계몽의 가능성이 있는 영화'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창동 감독은 <오아시스>를 만든 목적이 '장애인의 현실이니 장애 문제니 등을 다루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자 했다는 것이다. 즉 그에게 '장애/인 문제'는 부차적이었거나, 거칠게 말해 고려/계몽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조용히 스며드는 계몽 영화'라는 류미례 감독의 비평은 감독의 의도/목적에 바탕해서 글을 썼다기보다 장애 운동이란 차원에서 정리한 것이라 짐작된다. '장애 여성을 수동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박주희씨나 홍성희씨의 비판도 이창동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관심하기 보다, 얼핏 보면 수동적으로 그려지는 장애여성이 등장하는 영화 <오아시스>가 낳을 수 있는 부정적 효과에 주목한 바가 아닐까 싶다. 다만 류미례 감독이 생각한 것과 달리 이들은 대개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장애인을 어찌 생각하는가'에 대해 성찰적 태도를 취하기 보다 '장애 여성은 사랑하는 사람이 억울하게 잡혀가도 말도 못하는 사람이다'는 식으로 오해/이해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주목하여 비판한다.

하지만 박주희씨가 '장애 여성이(의 관점에서) <오아시스>를 읽었다'는 대목은 앞서 '조용히 스며드는 계몽 영화' 라는 것 만큼이나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다. '장애 여성의 관점에서 읽는 것과 비장애 여성의 관점에서 읽는 것이 어떤 차이가 나는가, 장애 여성이라 할 때, 모두 같은 생각을 한다 할 수 있는가' 등의 물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기에 '오늘날 장애 여성의 현실/삶을 그려내지 못했다'는 비판은 <오아시스>라는 영화의 목적과는 다소 거리가 있고, 그래서 비판의 초점이 모호하다. 그럼에도 이 같은 논란은 장애/인 문제와 관련한 담론의 빈약한 우리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다. 어떤 매체에 등장하거나 다루어지는 장애/인 문제에 대해 장애인 당사자의 시선으로 읽고 그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해 보는 것은, 비록 그것이 작품 목적/의도와 거리가 있다 해도 장애/인 문제를 다시 환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 장애인의 현실에선 말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대목이 있다면 이 같은 논란이 생기게 된 '그렇다면 장애인/여성 영화란 무엇인가. 장애인/여성 영화는 어떤 내용과 형식을 담아 내어야 하는가'에 대한 생산적 논의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난날 <오아시스> 논란은 저 정도 수준에서 그친 채, 끝나고 말았다. 여기에서 그 까닭을 해명하는 것은 나로선 무리인 바, 다만 이 논란을 통해 마련된 '장애/인 영화는 어떤 내용과 형식을 담아야 할까'에 대한 물음과 관련하여 내 생각을 간단하게 정리해보고자 한다.

영화 <여섯 개의 시선> 중 여균동 감독의 <대륙횡단>을 보면 장애인의 외출 장면이 등장한다. 대개 가족과 함께 외출하던 주인공 김문주. 어느 날 그는 혼자 외출해 보리라 마음을 먹고 목발에 의지한 채 나오는 중, 아파트 문을 잠구다가 키를 땅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다. 그런데 지나가던 위층 아주머니 왈, '아이구,,, 문주 어디 나갔다 오는가 보네.. 엄마는? 열쇠 떨어뜨렸네.. 자 내가 열어줄께... 집에 들어가서 엄마 기다리고 있어...' 라고 말하며 바깥으로 나오려던 그 이를 되려 집 안으로 밀어 넣고 만다. 아주머니로선 '호의/선의'를 베푼 것이었지만 김문주로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장면, 즉 비장애인의 호의나 무관심이 장애인에겐 난감한 일로 다가가는 일이 장애인의 일상에서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대다수 비장애인들은 이런 자신의 행위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호의가 예의 장애인에게 '고마운 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소박한 (그러나 장애인 입장에선, 때론 폭력적인) 바람말곤 없다는 것이다. 마치 <오아시스>에서 강간 혐의로 종두가 잡혀나가던 순간, 경찰서에서 이 사실을 알리지 못한 분노와 자책, 그리고 자괴감 등이 폭발하여 캐비넷에 머리를 박치기 하던 공주에게 '아가씨... 모두 끝났어요... 이제 안심해요' 라고 말하던 올케의 모습처럼 말이다. 여기에서 나는 비장애인의 호의가 장애인에겐 어떤 식으로 엇나가거나 뒤틀리는지에 대한 관계 맺기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장면들이 담겨 있다면, 그것을 일러 '장애인 영화'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와 유사한 상황을 저지르곤 하는 비장애인들이 그런 엇갈림의 장면/영화를 보았다면, 그나마 장애인을 달리 대할 수 있는 가능성, 류미례 감독의 표현을 빌자면 '계몽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쓰고 나니, 중언부언한 듯 하다. 이 글에서 나는 <오아시스>를 둘러싸고 오간 비판들을 통해 장애인 영화는 어떤 내용과 형식을 담아야 할까 하는 물음에 대해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관계 맺는 방식, 그 중에서 특히 비장애인의 호의가 장애인의 실제 삶에 어떤 식의 부정적/긍정적 영향을 미치는가를 관객들이 보고 헤아릴 수 있을 때, '장애인 영화'일 수 있음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았다. 물론 이는 매우 기본적인 수준의 답변이고 이후로도 이 물음은 지속되어야 하고, 그에 따라 풍성한 논의가 따라야 할 것이다. 하기에 '장애 운동'을 한다는 우리들이 해야 할 몫이란 장애 차별의 현실을 구체적 영상에 담아낼 수 있도록 좀 더 섬세하게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 맺기 방식에 대해 관찰/성찰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우리들의 삶이 곧 운동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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