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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의 방법적 차이를 인정하는 법?

 

07, 1, 25, 01:31



교육권연대 일일호프를 앞에 두고 빚어진 논란,

운동의 방법적 차이와 역할에 대한 인식



‘일일호프 해보자. 돈을 벌면 좋고, 못 번다 해도 홍보효과 있지 않겠는가’

일일호프 제안의 맥락이었다. 대다수 사람들이 동의했다. ‘일이야, 박간사가 알아서 하니깐, 하면 좋지’ 정도 수준이 아니었나 싶다. 일을 추진했고, 각 단체들이 맡을 금액 등을 분담하였다. 단체 규모 등을 고려하여 차등 분배했고, 분배 금액에 대해 구성원 모두 동의했다. 목표액은 1백만원.


반론이 있었다.

‘돈 1백만원 벌려고 일일호프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차라리 돈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각 단체 분담금을 합쳐서 돈을 내자. 그리고 일일호프 말고 다른 일도 많은데, 굳이 일일호프라는 수단/방법을 택하여, 교육권연대를 홍보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름, 타당한 반론이다. 주장을 거칠게 나누면 다음과 같다. ‘교육권연대의 홍보/활동 차원에서 일일호프를 하는 것은 가능하다/가능하지 않다.’ 이 논란의 핵심을 짚어보자. 


나는, 타당하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활동이든지 간에 그 활동 과정과 결과 속에서 ‘교육권연대의 필요성을 환기/의식하는 활동’이 되어야 하는 것이, 활동의 ‘원칙’이라고 한다면, ‘일일호프’라는 수단/방법이 최고나 최선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최악은 아니라고, 적어도 ‘원칙’을 배반하거나 거스르는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단, 내 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되어야 한다. ‘교육권연대의 필요성을 환기/의식하는 활동’으로서 일일호프를 준비한다면, 그에 따르는 부수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교육지원법의 내용을 담은 홍보물이라든지 부산지역 부모들의 활동을 담은 영상물/소식지 등이 최소한의 준비일 수 있겠다. 이를 통해 그 자리에 온 장애 학생 부모들이 예의 ‘교육권연대의 필요성을 환기/의식한다면’, 그런 계기가 된다면, 이를 두고, 나는 일거양득이라고 말하겠다. 비록 많은 돈을 번 것은 아니라 해도(많은 돈을 벌면, 더욱 좋겠지만), 돈도 벌고, 구성원/단체 간 결속력도 강화시켰으니 말이다. 만약 이런 준비 없이, 여느 시민사회 단체들이 하는 것처럼, ‘하루 술 먹고 노는 마는’ 식이라면, 이것은 아니 하는 것이 옳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구성원 간 결속력을 높이기는 커녕, 서로에 대한 실망만을 가득 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기실 어떤 단체이든지 간에 이러한 행사를 준비하면서 서로에 대한 존경과 관계의 깊이를 확보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서로 실망하면서 행사를 준비하고 소모적으로 치루어낸다. 우리 또한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내가 교육권연대의 홍보/활동 차원에서 일일호프를 하자고 주장한다면, 적어도 저 정도의 준비는 해야 한다. 그것이 내 책임이고, 의무이다. 만약, 해당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면, 다시 말해 교육권연대 구성원 간 결속력을 다지는 계기로서 일일 호프를 활용하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내 역량 부족이고, 기획 실패이다.


반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쪽이 있다. 일일호프보다는 다른 활동 방안/수단을 통해, 교육권연대 활동 홍보를 하자는 것이다. 일일호프를 교육권연대 활동의 근본/원칙에 어긋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선 여기에서 나는 해당 ‘근본/원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말을 길게 하기 어렵다. 다만, 교육권연대의 활동 ‘근본/원칙’에는 해당 일일호프가 ‘그르기 때문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이며, 적어도 이 점에 대해서 나로서는 예의 선택을 ‘존중’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내가 취해야 할 처신이 있다면, 최대한 깔끔하게 방법적 이견을 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이번 한 번 서로 방법적 이견이 다르다고 해서 이후에도 함께 하지 않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들 대다수는 ‘좋은 게 좋다’ 식의 미봉적 선택을 취하며, 나 또한 여기에 따랐다.


‘일일호프의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후 활동을 고려하여 이번에는 분담금을 내도록 할 것이다. 다만 현재 책정된 금액을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대목이 있으니, 다소 감한 금액 정도는 낼 용의가 있다’


나는 방법적 이견을 달리한 단체의 해당 제안을 ‘호의’로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방법적 이견’을 확인한 마당에 굳이 아니 내어도 될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안한 이가 언급하였던 것처럼 이렇게 접근하는 것은 사실상 ‘논리적’ 차원이고 인간관계이니 만큼 ‘정서’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사실 내가 ‘호의’로 해석한 대목도 상대방에 대한 내 호의적 정서가 개입해 있다. 만약 상대방이 다른 이였다면, 나와 정서적으로 공감대 형성이 덜한 사람이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깨끗하게 ‘거절’했을 개연성이 높다. ‘방법적 이견이 다른 마당에 굳이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후에 다른 계기가 되면, 함께 해 보자’ 정도로 언급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 돈을 두고, 마치 우리를 ‘동정’하는 식으로 이해했을 개연성이 높다. (그래도, 상대방이 주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대부분 일반적 사람이라면 그처럼 ‘거절’을 당했다면, ‘알겠다. 그럼 그리 하시라’고 말하면서 거두어들일 것이다. ‘나는 갑갑할 것, 딱히 없다.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당신들의 처지 아닌가’ 식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연대하는 구성원으로서 방관자의 위치로 서는 것이다. 이것이 ‘정서의 작용’이며, 대부분 사람이 보이는 평균적 행위이고, 일상의 관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나의 모습에서 드러나듯이 평균적인 사람들 대다수는 해당 제안을 ‘불편해 하면서도’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언급한 바, 우리들은 ‘깔끔하게 방법적 이견을 인정’하여 적어도 이 사안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사안을 매듭짓는 형태가 아니라, 이후 관계를 고려하여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제안을 수용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각각의 심리 동학을 엿보면 어떨까?


일단, 방법적으로 의견을 달리하나, 주는 입장에서는 말했듯이, ‘이후에 함께 활동을 계속 할 테니, 그래도 아예 손 놓아 버린다면, 서운함이 더욱 커지 않겠는가. 그러니 모든 금액은 우리 입장에서는 어려운 일이고, 이 정도의 성의라도 보여주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라고 인식했을 개연성이 높다. 받는 입장에서는 깔끔하고 합리적으로 ‘받지 않는’ 것이 가장 최선인지도 모르나, 대부분 ‘받는다’. 물론 받으면서도 예의 호의에 대해서 고마움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언급했듯이 ‘아니 받으려다가, 주는 것이니 주는 사람 입장에서 무안해할까봐 받는다’ 식의 생각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또 다른 정서적 서운함을 낳기도 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어렵게, 하는 것인데, 왜 이처럼 거칠게 대하는가.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일 아닌가?’ 라는 식의. 뭐, 내가 독심술가가 아니니 이 정도로 정리하자. 다만 이와 같은 심리적 작용들이 오가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서로 아니 해야 좋을 계약이라는 것이다. 해서 서로 손해 보는 계약이라고나 할까? 서로의 욕망이나 기대를 서로 달성시킬 ‘의지’나 ‘의사’가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서로 기대하고 있으니, 어찌 관계가 파토나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다면 ‘돈’을 아예 아니 내는 것이 ‘타당한 처신’인가 라고 반문할 수 있다. 사실 받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호의’로 이해하는 사람도 드물지 모른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는 사람과 정서의 공감대가 큰 사람이라면, ‘호의’로 이해하고 ‘감사함’을 표할지 모른다. 그러나, 주는 사람과 정서 공감대가 크지 않은 사람이라면, 혹은 얼마간 정서적 불편함을 안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방법적 이견을 달리 한 마당(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욕망을 좌절시켜 버린 사람에 대한 정서)에 그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한다 해도 ‘불편함’을 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속된 말로, ‘미운털’이 이미 박힌 상황에서 주면 주는 대로 안 주면 안 주는 대로 그 사람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평균적인, 일반적인 인간관계이며, 대부분의 우리들은 이 정도의 수준과 차원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다.


교육권연대의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일일호프를 하는 것은 가능하다/가능하지 않다(가능하다 해도, 다른 일로서 교육권연대의 활동을 하는 것이 좀 더 낫다)는 상반된 주장을 살펴보면서, 방법적 이견이 다른 상황 앞에서 일반적으로 어떤 식의 관계 흐름이 구성되는가를 정리해보았다.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일일호프이든, 찻집이든지 간에 어느 활동이든 ‘교육권연대 활동을 해야 할 필요성을 의식/환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며, 만약 이와 같이 되지 않는다면, 흔히 볼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 ‘해서 서로 상처와 불신만 쌓고 마는 것’이라면, 아니 하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오늘 회의 때, 일일호프에 대한 회의를 시작하면서, 이 점을 먼저 환기하면서 시작하였다. 그 결과, 내가 전전긍긍했던 것과는 다소 다르게, 어느 의미에서 간단하게 ‘하지 말자’고 결론 내렸다. 일을 중심적으로 해야 할 ‘발달부모회’의 입장이었는데, 이에 대해 나는 ‘존중’한다. 전교조나 한울, 그리고 뇌병변이나 참배움터의 경우 당일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반면, 발달은 가장 많은 인원을 차지하며, 따라서 발달의 선택에 따라 일일호프를 하거나 말거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면 좋고, 아니 해도 그만이다’는 전교조나 타 단체의 입장은, 사실 그들 입장에서는 ‘취할 수밖에 없는’ 선택지였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형편이니 말이다. (여기에서 표를 파는 노동은, 일단 차치하자.) 그런데, 일에 대한 실질적 준비, 예컨대 홍보물을 비롯하여 영상물의 제작 등은, 내가 담당해야 할 몫이었음을 고려한다면, 결국 당일 서빙 문제만이 남은 과제였다. 그처럼 간편하게 ‘과업이 부담스러우니 하지 말자’고 결론 내릴 만큼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단, 방법적 이견을 달리하는 것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존중의 태도를 취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논의는, 내가 전전긍긍했던 것과는 다르게, 언급했듯이 퍽 간단하게 ‘하지말자’는 결론으로 끝이 났다. 이유는, 내가 제시한 우려 중의 한 가지,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오늘 회의에서 ‘하지말자’고 결정한 우리의 판단이 틀렸다거나 타당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로 하여금 고민을 하게 만든 것은 ‘책임과 역할’에 대한 것이었다. 만약 내가 일일호프를 꼭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내가 ‘자원봉사자’를 섭외해서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 또한 그 정도의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고, 이는 구성원 모두의 공통된 태도이기도 하였다. 즉 일일호프에 대한 매력을 크게 느끼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과 역할’ 문제는 여전히 나로 하여금 고민을 하게 만든다.


언급했듯이, ‘발달’은 타 단체들에 비해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도자 단체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거나 역할을 생성하려 하기보다는, ‘왜, 우리는 이 만큼 하는데, 타 단체는 저것만 하는가’ 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는 발달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며, 어느 단체도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발달이 교육권연대 내에서 이 정도의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존경과 지지의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며, 충분히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어른스러우면서도 품위 있는 태도일 것이다. 문제는, 저 정도의 인식 수준으로는 하나의 조직/단체가 성장하기가 요원하다는 것이다. 그런 안타까움이, 이번 일련의 상황을 통과하면서 내게 들었던 생각의 한 자락이다. 발달이 ‘하지 말자’고 내린 결정의 배경에는, 저 정도의 인식 수준에서 일처리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방법적 이견을 달리한 한울의 입장을 존중했듯이, 예의 발달의 입장도 존중한다. 내가 보았을 때, 두 단체의 행위 수준은, ‘일을 추진하는 합리성과 어른스러움’의 차원에서 볼 때,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두 단체만 해당하는 것이 아님은, 지금까지 누차 언급했던 바이다. 즉 우리들의 대개 수준이 저처럼 어느 의미에서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조악한 수준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우리가 이 사회를 좀 더 낫게 해 보기 위해 사회 운동을 하고 있으니, 어찌 우리 사회가 발전이, 품위가 있겠는가 싶기도 하다... 너무 위악적인 진술인가??? (한 가지 환기하자면, 이런 평가는 퍽 거칠기는 하나 어떻게 하면 좀 더 낫게 하기 위함이라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처럼 구구절절 쓸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이번 사안을 통과하면서 ‘방법적 이견을 달리하는 이들과의 소통’ 문제를, 한편으로는 ‘책임과 역할’ 문제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하였다. 아직까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떤 처신이 좀 더 어른스럽고 품위 있는가를 말이다. 만약 내가 일일호프를 ‘강행’했다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을까? 언급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밟았을까? 아니면 최악은 피해갔을까? 글쎄, 내 능력으로 보자면, ‘최악’에 가까웠을지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이번에는, 아니 한 게 더 나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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