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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인문계 고등학교 사건 때문인지 '통합교육' 문제에 관심이 간다.
수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초등학교의 경우 대다수 부모가 통합교육을 지원한다. 장애 정도나 수준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특수학교에서 자신의 아이가 더 중증인 장애아동으로부터 혹시나 이상행동을 따라 하는 건 아닐가 하는 두려움과 걱정이 하나의 요인이다. 이러한 생각의 이면에는 그래도 비장애아동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무엇이라도 좀 더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좀 더 낫지 않을가 하는 막연한 기대가 깔려 있다.
그러나, 현실은, 이런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그나마 초등부는 낫지만, 중등부와 고등부 올라갈수록 통합교육을 받고 있는 장애학생들은 비장애학생들과 함께 있는 원적반에서는 별달리 말을 하지 않거나 못한다. 비장애학생들과 함께 있는 시간 내내 아무 말도 못하고 얌전히 있다가, 특수학급에 가게 되면 그 때서야 장애학생들끼리 수다를 하고 때론 싸우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말햐ㅐㅆ듯이 일반적으로 초등학교보다는 중학교가, 중학교보다는 고등학교가 더욱 이런 경향성을 지닌다.
당연한 일이다.
비장애학생들의 분위기에 짓눌리는 것, 그래서 말하지 못하는 것, 이 모든 것을 중학교, 고등학교 올라오면서 장애학생들은 예민하게 포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일대 다수이지 않은가? 게다가 비장애학생들은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연히 장애학생이 잘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원적반에서 주눅들어 있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고, 그나마 특수학급에 오면 서로 말이 통하는 친구들이 있기에 입을 열수있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통합교육의 현실이다. 인문계고등학교에서의 통합교육이란 게, 얼마나 불가능한지 말해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통합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장애아동에게 적절한 통합의 시기와 정도, 방법을, 장애아동 개인의 생의 주기나 단계와 상태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말일 뿐이다.
현실에서 통합교육은 이들의 존재감을 지우는 것에 불과하다. 그나마 특수학급이 이들의 존재감을 인정하나, 그것이 제 스스로 인식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그나마 이 곳이 마음 편하다는 수준에 불과한 게 아닐까?
어쩌면 통합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을 바꾸어야 하는게 아닐가 싶다. 그저, 일반학교 내 비장애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통합교육'이라고 말하기에는 현실은 너무나 척박하다. 아이들도 괴롭고, 비장애학생들도 괴롭고, 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이 문제는 통합교육에 대한 물리적 지원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의 학교 교육이 성적지상주의에다가 경쟁우선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교육 현실에서 과연 통합교육이란 게, 씨알이라도 먹히겠는가?
통합의 방법을 새로 고민하거나 모색해야하리라 생각한다.
특수학교라 해도 국민기본공통교육과정을 따르는게 아니라, 교육과정을 지역사회와 통합하는 방식으로 구성하여, 경증의 장애학생이라 해도 특수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하고, 아예 특수학급은 학생을 2-3명을 하되, 교사 한 명이 집중적으로 맡는 것이다. 지역사회와 함께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원적반을 아예 특수학급에 두는 것이다. 그래서 비장애학생들 수업 시간에 들어가는 것 조차도 하나의 통합교육의 방식으로 포섭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이렇게 하는 까닭은 비장애학생들로 하여금 역통합의 의미를 시도해보는 차원에서 말이다.. 통합한다고 하여, 무조건 장애학생에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을 탈피할 필요가 있다.
이런 방식대로 계속 통합교육을 한다면... 글세... 나로선, 학교 현장의 어려움만 가중되리라, 예상한다... 그것도 소모적으로 말이다.
우리 집 마당에는 블루베리 한 그루가 화분에 심겨져 있다. 이전에 귀농카페였던 곧은터 정모에 갔을 때, 추첨으로 받은 것이다.
처음, 가져왔을 때는 물도 주고 신경도 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해졌고, 겨울을 맞이했다.
지난 겨울 내내 블루베리가 있는 화분을 간혹 보긴 했으나, 죽었나 살았나... 뭐 이런 관심을 딱히 가지지 않았다. 한 번씩 쳐다보면서, '살면 좋겠다'는 그런 바람이야 있긴 했으나, 말 그대로 바람이었고, 앙상하고 말라비틀어지는 가지를 보면서 '얘가 죽었나 보구나'... 이런 생각을 더 많이 했으니깐...
그런데, 엊그제.
아침에 바쁘게 나가다가 죽었다고 생각한 가지에 푸르른 잎이 무성한 것을 발견했다.
기분이 좋았다. 기뻤다. '이야... 이 눔이 살긴 살았네... 다행이다.. 주인 잘못 만나서 죽은 줄 알았는데...' 하지만,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내가 이렇게 마냥 기뻐할 수 있나? 기뻐할 자격이 있는건가? 이번 겨울 내내 무관심으로 방치해두었는데, 이렇게 기뻐하는 것이, 너무 염치없는 일 아닌가?
맞다. 나는 기뻐할 자격이 없다. 블루베리가 새생명을 틔우기 위해 내가 한 일이 전혀 없음으로... 그러고 보니, 부끄러웠다.
다시 생각해본다.
내가 터자에게 한 것 만큼 타자에게 기대하고 바라자. 내가 타자를 위해 어떤 활동도 하지 않았다면, 기대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며, 부끄러운 일이라는 점을...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닌,
착한 성장 영화를 보는 아픔.
<날아라 허동구, 박규태 감독>
1.
‘날아라 허동구’는 ‘성장’ 영화이다. 그리고 ‘착한’ 영화이다. 주인공 동구는 물론이거니와 동구를 둘러싼 대부분 등장인물들은 때론 미운 행동들도 하지만 착하다. 그래서 이들이 만들어내는 에피소드들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웃고 있어도, 마음이 편치 못하다. 오히려 마음이 아프다. 무엇 때문일까?
2.
IQ 60인 지적장애아동인 동구는 초등학교 3학년이다. 동구는 교실에 있는 노란 주전자에 물을 담아 같은 반 아이들에게 물 따라주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행복해하며, 학교에 다닌다. 그런데 동구는 학교(제도)와는 어떤 사회적 관계도 맺지 못한다. 오히려 이를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는 교사는, (시험 당일) 학급의 평균 점수가 낮아진다는 이유로 동구를 제도 바깥으로 내몰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제도(학교 교육) 내에서 함께 하지만 언제든지 사회적 관계를 단절하고 동구를 배제하려 드는 것이다. 교사와 교장이 준태(동구 아빠)를 불러 특수학교 전학을 강요하는 장면은 이를 잘 보여준다. 요컨대 동구는 장애아동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 제도/규칙과는 상관없는 제도로부터 배제된, 사회로부터 격리된 이방인인 셈이다.
이런 사정(모습)은 같은 반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이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행복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나, 어쨌든 줄기차게 물을 떠다 나르는 동구의 노동으로 아이들은 편하게 물을 먹지만 어느 누구도 고마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할 줄 아는 거라곤 물을 떠다 옮기는’ 일밖에 없다고, 동구를 줄곧 무시한다. 이런 모습은 야구 코치 상길과 관계 맺는 과정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야구 코치 상길은 선수 1명이 없어 시합을 나가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동구의 출현이 마냥 반갑고 고맙다. 비록 룰도 모르고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지만 가르쳐주면 습득하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구는 규칙을 말해줘도 모르고, 공도 무서워한다. 단지 주전자에 물을 떠다 나르는 일을 행복해할 뿐이다. 상길의 바람/기대는 점점 좌절되고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동구를 무시/외면하기 시작한다. 상길 역시 동구가 ‘장애아동’이라는 사실을, ‘차이’가 있음을, 모르는 것이다. 착한 성정 때문인지 ‘동구’를 이른바 ‘잘’ 대해주지만,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는 실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계의 모습은 동구의 든든한 의지처인 아빠 준태마저도 크게 다르지 않다.
3.
준태는 동구를 성심성의껏 보살핀다. 동구의 통학 길을 3년 만에 깨우치게 했다는 준태의 말에서 그의 고단한 노동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동구가 잘 때, “양 한 마리가 울타리를 넘는다”는 주문을 읊어대는 모습은 사랑스럽다. 게다가 그는 동구의 미래를 위한다는 이유로 새까맣게 태운 치킨을 먹고 담배를 하루에 몇 갑씩 피는 등 보험금을 타기 위해 눈물 겨운 노력을 다한다. 그러나 준태의 역할은 거기까지이다. “동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 라는 친구 말에 발끈하고 “우리 애가 너희 애랑 같냐?”라는 말을 하는 것에 그친다. 동구의 일상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동구의 성장과 발달의 계기를, 마련하지는 못한다. 때문에 이사를 가야 하는 현실 앞에서 두려움에 포섭되고 특수학교 전학을 강권하는 교사/교장의 말 앞에서 무릎 꿇고 빌기도 한다. 한 없이 잘해주는 ‘착한’ 아빠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마지막 장면에서 동구의 통학로에 표시를 해 놓고 동구로 하여금 스스로 찾아오게 하는 대목은, 동구를 성장 가능한 존재로서 대하고자 하는, ‘지혜로운’ 아빠의 한 단서를 볼 수 있기도 하다. 그리고 ‘동구-윤찬’의 관계 맺는 양상/과정은 이를 적절하게 보여준다.
4.
윤찬은 아이들로부터 무시당하면서도 항의조차 하지 못하는 동구가 못나고 갑갑하다. 이런 윤찬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동구로 하여금 ‘제도/규칙’을 배우게 하는 계기로서, (동구와) 사회적 관계를 맺는 구성원으로서 존재한다. 동구의 코치로서 동구가 좋아하는 주전자와 컵으로 야구의 규칙을 설명해주는 준태의 (때론 모질기도 한) 모습은 ‘장애아동’의 특성과 차이를 이해한 바탕 위에서 관계 맺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과정은 장애인 등장 영화였던 <허브>가 보여준 작위성보다는 현실성 있게 그린다. 인간 승리는 아니라 해도, 오히려 홈런이 아닌 번트를 대는 동구의 모습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공만 맞히기만 하면 되는 번트조차도 동구에게는 어려운 과정이었고 노력과 인내, 그리고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윤찬으로 인해 처음으로 동구는 규칙(사회)을 배우게 되고 또한 규칙(사회) 속에서―잘 하든 아니 하든 상관없이―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이를 수행해보는 경험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동구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제도(규칙)을 배워야 하고, 이 속에서 자신의 어떤 역할이 있으며 이를 담당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비교적 담백하게 그려내었기 때문인지 <날아라 허동구>는 상당수 평론가들로부터 호의적 평가를 이끌어 내었다. 가령 씨네21의 장미는 “<날아라 허동구>는 장애 아동이 겪는 차별 대우에 집중하기보다 조금씩 전진하는 (세상과 맞서는 법을 터득하는) 동구의 발자취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거나 강병진은 “장애아동이 세상의 편견과 맞서는 이야기는 아니다... 동구가 자신만의 즐거운 삶을 찾아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날아라 허동구>는 동정과 편견의 함정에 장애를 빠뜨리는 우를 범하진 않는다.”고 평하였다. 또한 심영섭은 “장애인 영화의 깜찍한 기습 번트”(부산일보)라는 글에서 영화의 의미를 이 같이 규정하기도 하였다.
“이 영화는 최근의 여러 상업 영화의 흥행 공식을 모두 모았다. '말아톤'과 '허브'를 잇는 사랑스런 장애인 캐릭터, 부재하는 가족, 부성애, 우정, 최후의 승리, 소박한 낙관주의 같은 것들. '장애인 영화'라고 불리워도 좋을 이러한 새로운 장르의 등장은, 장애인의 험난한 세상살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도 동시에 가족애와 휴머니즘이 꽃 피던 전근대적인 인간 관계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관객의 환타지를 차고 넘치게 만족시킨다.”
대부분 맞는 말이다. 때문에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는 나로선 더 이상 이 영화에 대한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내가 서 있는 처지 때문인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대목, 다름 아닌, 영화를 보는 동안 즐겁지만 마음이 아픈 대목이 있다. 문제는 과연 이 아픈 대목을 어느 정도 의제화 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이다. 이유인 즉, 이 영화는 장애인권영화가 아니라 대중영화이기 때문이고, 단지 ‘장애아동’이라는 소재를 활용한 것 뿐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심승보는 “장애인, 당신들이 사회에 적응해라?”(씨네 21, 562호)라는 글에서 ‘장애라는 소재만을 이용했지, 현실은 눈감았다’고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하기도 하였는데 내용을 보자.
“영화는 아무런 사회적 능력이 없는 장애아동을 둔 가정을 묘사하면서도 어떠한 대책도 제시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동구가 오직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된다는 소망만을 가지고 있을 뿐 그 뒤의 삶에는 전혀 대비하는 모습이 없다... 그리고 아무리 지능이 낮은 장애인들이라 해도 고도의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단순한 일이나 행위는 반복적인 학습을 통하면 어느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나 장애인 부모들의 견해이다. 그러나 11살인 동구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주전자 당번과 학교에 다녀오는 것 외에는 없다. 화장실 볼일까지 아버지가 일일이 지시해주어야 하고, 학교수업은 단 0.1%도 이해하지 못하는 등 배움의 능력은 전혀 없는 아이로 묘사돤다... 결국 이 영화는... 비장애인의 관점에 서서 사회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장애인들이 문제가 있는 존재이니 피나는 노력을 하든, 대충 살든 너희가 사회에 적응해서 살아가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심승보씨의 비판은 영화의 의도를 자의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 ‘비장애인의 관점에 섰다’고 하지만, 정작 이 영화는 ‘장애-비장애’의 관점으로 접근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 비평에 있어 감독의 의도를 충실히 따를 필요가 없고, 자신만의 관점을 세워 비평할 순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적어도 영화 주제에 대한 이해는 기본일 듯한데, 심승보씨의 비판에는 이 대목을 소홀하게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심승보씨의 비판을 쉽사리 지나치기 어려운 ‘대목’은 이 영화가 ‘장애아동’을 소재로 다루고 있고, 이를 일반 대중들이 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때문에 나는 지난 <허브>와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을 비평하면서 이와 같은 장애인 등장 영화를 비평하는 것이 꽤나 곤혹스럽고 어렵다는 점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대중영화라는 속성 상 장애인의 현실을 ‘극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은 말 그대로 보는 이의 처지나 입장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심승보씨의 비판과 앞서 인용한 평론가들의 비판의 차이는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여기에서 한 가지 기준을 설정해볼 수 있다면 심영섭씨가 제기한 것처럼, “장애인(아동)의 험난한 세상살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영화 속에서 얼마나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가? 달리 말하자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회 통합을 위한 제도적/인식적 장치들이 영화 속에서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고, 이에 대한 감독의 시선/입장은 어떤 식으로 그려지고 있는가?’ 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 대목과 관련해서는 “히딩크의 한국이름도 허동구입니다. 히딩크가 보여준 희망처럼 우리 동구도 여러분께 희망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감독의 소박한 인터뷰처럼, 말 그대로 소박하였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즉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회 통합적 차원에서 생각해볼만 한 대목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윤찬-동구의 관계 양상은 이를 말해준다고도 할 수 있지 않는가 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 역시 ‘소박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일반 대중들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윤찬-동구’의 관계 양상을 보고 ‘장애인의 험난한 세상살이를 보며 영화를 보는 내(우리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저 일상의 동구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이 웃기고 살짝 감동을 주는 것 뿐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하여 이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고 하여 감독을 비난할 수 있는 사안은, 결코 아니다. 다만 아쉽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때문에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맨발의 기봉이>나 <허브>보다는 현실적으로 그리지만, 정작 장애인(가족)의 현실 문제를 함께 고민해볼 만한 내용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기에 웃고 있어도 맘 놓고 웃지 못하는, 아픈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더하는 말) 2008년 4월 11일부로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이 시행되었다. 그러니까 동구 아버지는 특수학교로 전학가라고 요구하는 교사와 교장을 이 법에 의거하여 고소를 하면 승소할 것이니, 다음에는 무릎 꿇고 빌지 말고 장애인부모 단체를 찾아 도움을 구하거나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하면 될 것이다. ^^
이 블로그를 찾는 분이 누구신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앞서, 저의 글에 어떤 분이 트랙백이라는 걸어두었기에, 잠시 그 곳에 다녀왔습니다만...
(저는 컴맹에 가까운지라...ㅠㅠ 한글 작업만 주구창창... )
그래서, 상당히 어색합니다. 누군가가 이 곳에 다녀가고 있다는 사실이...
사실, 만들 때에는 제가 쓴 글을 차곡차곡 모아놓고 싶은 바람(별로 쓴 것도 없지만서리...)도 있고, 무엇보다 '장애' 문제 '인권' 문제의 상관성과 장애인권운동의 방향이나 구체적 기획 등을 함께
고민하면 좋겠다 하는 소박한 생각에서 시작했는데,
막상 만들고 나니, 하도 야릇한 느낌이 들어 지워버리려고 했는제, 지우는 방법을 찾지 못해 결국 남겨 두었음다. (지금 저는 이 글을 쓰면서도 왜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인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처음인지라..아마도 이런 묘한 심사에 시달리는 것이겠죠.) 그런데 하루 지난 다음 날 보니, 무려 20여분이 왔다갔다는 내용이 뜨고, '무슨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비워두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에 글을 올려두었는데,
무려 160여분이 다녀갔다는 기록이나오더군요. (억! 소리가 났습니다.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구요...)
어떻든, 그래서 아직 이 블로그를 어떤 용도로 쓰는 것이 적절한지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만든 것이 저이니, 그냥 방치해두지 못해, 지난날 썼던 글을 하나씩 올리고 있습니다.
이 글은 '장애코드로 문화읽기'라는 장애문화 공동체에 제가 올린 것인데... 막상 지난 글을 올리려고 하니, 앞서 '제 글을 차곡차곡 올려두고 싶다'는 생각과 달리, '제 글을 울궈먹는다'는 생각이
들어, 이처럼 약간의 거부감이 생겨나는 듯 싶기도 합니다. .... 블로그에 대한 제 입장이 분명해지면, 덜하려나...
아, 어떻든, 왜 이 글을 쓰는지 여전히 묘연한 상황에서, 주절주절 거렸습니다.
아래는 말씀드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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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와 '장애인 영화'에 대한 단상(斷想).
이 글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를 둘러싸고 생겨난 논란과 관련하여, '장애인 영화란 어떤 내용과 형식을 담아야 할까' 라는 물음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한 글이다. 이를 위해 <오아시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몇몇의 글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는 장애인의 현실(장애인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해 퍽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장애인인 공주 명의를 빌려 새 아파트에 들어가 사는 그의 오빠, 공주와 한 집에 있는데도 상관 없다는 듯이 성관계를 맺는 이웃 부부, 종두네 가족 사진 찍을 때 짐짝 부리듯이 공주의 훨체어를 옮기는 종두 형, '너 변태지, 저런 얘에게 성욕이 생기데...' 라고 말하는 경찰까지. <오아시스> 이전에도 장애인 등장 영화, 예컨대 <고양이를 부탁해> <안녕 유에프오> 등을 보면 장애인과 관계 맺는 비장애인의 모습이 드러나긴 했으나, 이처럼 선명한 방식으로 나타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장애 여성의 현실/삶을 다루지 않았다'는 식의 적지 않은 비난을 몇몇의 비/장애 여성들로부터 거세게 받았다. 가령 장애여성 <공감>이란 단체 구성원인 박주희씨는 '오아시스는 없다'는 글에서 "강간은 사랑이 아니"며 "감독의 상상처럼., 장애 여성은 비장애여성이 되길 염원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해야 할 일이라면, 장애 여성은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의사 표현을 한다"고 주장하며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장애여성"으로 그려 두었다 비판했다. '영화 <오아시스>에서 보여주지 않는 것에 관하여'의 홍성희씨는 "종두와 달리 공주에 있어서는 환상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으며,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서의 현실적인 삶의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 즉 "진짜 장애여성으로서의 욕망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반면 류미례 감독은 '정상화의 관점에서 본 영화 <오아시스>의 소중함' 이란 글에서 <오아시스>는 기존 장애인 등장 영화와 달리 장애인을 특별하게 다루지 않는, '장애 문제에 관한 조용히 스며드는 계몽 영화'라는, 그들과 더러 상반된 주장을 했다. <오아시스>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다르지 않다'고 습관/상투적으로 읊조리는 비장애인들로 하여금 '진정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는가' 라고 두 시간 내내 묻고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주장은 제 나름의 일리가 있는 듯 하나, 꼼꼼히 따져보면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다. 우선 류미례 감독의 경우, <오아시스>가 '장애 문제에 관한 조용히 스며드는 계몽 영화'라 주장하는데, '계몽 영화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남아 있다. 만약 영화에서 등장하는 비장애인들의 일방적인 태도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계몽 영화'라 한다면, 비장애인들의 태도를 '사실적'으로 그리기만 한다면 그것이 곧 '계몽 영화'가 될 수 있는지, 그렇다면 언급한 다른 장애인 등장 영화와 <오아시스>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의 물음 등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이 류미례 감독처럼 '내가 장애인을 평소 어찌 대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적 태도를 취할 것인가도 남아 있다. 나로선, 이 대목에 대해 회의적이다. 우리들 대개는 어떤 영화를 볼 때,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읽고자 하는지 의식하기 보다 영화 소비자로서 등장 인물들의 행위가 '좋았다/나빴다'는 식의 정서적 반응/인상만이 남을 가능성이 크다 생각한다. 영화 속 인물들의 부정적인 모습에 대해 자신의 삶의 태도와 무관하게, (타자의 부정적인 모습에선)'나를 예외로 한다' 할까. 그런 점에서 <오아시스>는 장애 문제에 대한 '계몽의 가능성이 있는 영화'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창동 감독은 <오아시스>를 만든 목적이 '장애인의 현실이니 장애 문제니 등을 다루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자 했다는 것이다. 즉 그에게 '장애/인 문제'는 부차적이었거나, 거칠게 말해 고려/계몽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조용히 스며드는 계몽 영화'라는 류미례 감독의 비평은 감독의 의도/목적에 바탕해서 글을 썼다기보다 장애 운동이란 차원에서 정리한 것이라 짐작된다. '장애 여성을 수동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박주희씨나 홍성희씨의 비판도 이창동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관심하기 보다, 얼핏 보면 수동적으로 그려지는 장애여성이 등장하는 영화 <오아시스>가 낳을 수 있는 부정적 효과에 주목한 바가 아닐까 싶다. 다만 류미례 감독이 생각한 것과 달리 이들은 대개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장애인을 어찌 생각하는가'에 대해 성찰적 태도를 취하기 보다 '장애 여성은 사랑하는 사람이 억울하게 잡혀가도 말도 못하는 사람이다'는 식으로 오해/이해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주목하여 비판한다.
하지만 박주희씨가 '장애 여성이(의 관점에서) <오아시스>를 읽었다'는 대목은 앞서 '조용히 스며드는 계몽 영화' 라는 것 만큼이나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다. '장애 여성의 관점에서 읽는 것과 비장애 여성의 관점에서 읽는 것이 어떤 차이가 나는가, 장애 여성이라 할 때, 모두 같은 생각을 한다 할 수 있는가' 등의 물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기에 '오늘날 장애 여성의 현실/삶을 그려내지 못했다'는 비판은 <오아시스>라는 영화의 목적과는 다소 거리가 있고, 그래서 비판의 초점이 모호하다. 그럼에도 이 같은 논란은 장애/인 문제와 관련한 담론의 빈약한 우리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다. 어떤 매체에 등장하거나 다루어지는 장애/인 문제에 대해 장애인 당사자의 시선으로 읽고 그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해 보는 것은, 비록 그것이 작품 목적/의도와 거리가 있다 해도 장애/인 문제를 다시 환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 장애인의 현실에선 말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대목이 있다면 이 같은 논란이 생기게 된 '그렇다면 장애인/여성 영화란 무엇인가. 장애인/여성 영화는 어떤 내용과 형식을 담아 내어야 하는가'에 대한 생산적 논의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난날 <오아시스> 논란은 저 정도 수준에서 그친 채, 끝나고 말았다. 여기에서 그 까닭을 해명하는 것은 나로선 무리인 바, 다만 이 논란을 통해 마련된 '장애/인 영화는 어떤 내용과 형식을 담아야 할까'에 대한 물음과 관련하여 내 생각을 간단하게 정리해보고자 한다.
영화 <여섯 개의 시선> 중 여균동 감독의 <대륙횡단>을 보면 장애인의 외출 장면이 등장한다. 대개 가족과 함께 외출하던 주인공 김문주. 어느 날 그는 혼자 외출해 보리라 마음을 먹고 목발에 의지한 채 나오는 중, 아파트 문을 잠구다가 키를 땅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다. 그런데 지나가던 위층 아주머니 왈, '아이구,,, 문주 어디 나갔다 오는가 보네.. 엄마는? 열쇠 떨어뜨렸네.. 자 내가 열어줄께... 집에 들어가서 엄마 기다리고 있어...' 라고 말하며 바깥으로 나오려던 그 이를 되려 집 안으로 밀어 넣고 만다. 아주머니로선 '호의/선의'를 베푼 것이었지만 김문주로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장면, 즉 비장애인의 호의나 무관심이 장애인에겐 난감한 일로 다가가는 일이 장애인의 일상에서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대다수 비장애인들은 이런 자신의 행위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호의가 예의 장애인에게 '고마운 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소박한 (그러나 장애인 입장에선, 때론 폭력적인) 바람말곤 없다는 것이다. 마치 <오아시스>에서 강간 혐의로 종두가 잡혀나가던 순간, 경찰서에서 이 사실을 알리지 못한 분노와 자책, 그리고 자괴감 등이 폭발하여 캐비넷에 머리를 박치기 하던 공주에게 '아가씨... 모두 끝났어요... 이제 안심해요' 라고 말하던 올케의 모습처럼 말이다. 여기에서 나는 비장애인의 호의가 장애인에겐 어떤 식으로 엇나가거나 뒤틀리는지에 대한 관계 맺기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장면들이 담겨 있다면, 그것을 일러 '장애인 영화'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와 유사한 상황을 저지르곤 하는 비장애인들이 그런 엇갈림의 장면/영화를 보았다면, 그나마 장애인을 달리 대할 수 있는 가능성, 류미례 감독의 표현을 빌자면 '계몽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쓰고 나니, 중언부언한 듯 하다. 이 글에서 나는 <오아시스>를 둘러싸고 오간 비판들을 통해 장애인 영화는 어떤 내용과 형식을 담아야 할까 하는 물음에 대해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관계 맺는 방식, 그 중에서 특히 비장애인의 호의가 장애인의 실제 삶에 어떤 식의 부정적/긍정적 영향을 미치는가를 관객들이 보고 헤아릴 수 있을 때, '장애인 영화'일 수 있음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았다. 물론 이는 매우 기본적인 수준의 답변이고 이후로도 이 물음은 지속되어야 하고, 그에 따라 풍성한 논의가 따라야 할 것이다. 하기에 '장애 운동'을 한다는 우리들이 해야 할 몫이란 장애 차별의 현실을 구체적 영상에 담아낼 수 있도록 좀 더 섬세하게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 맺기 방식에 대해 관찰/성찰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우리들의 삶이 곧 운동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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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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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3909 3449전화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상업광고따위 뭐 그딴거 아닙니다
저는 상문고학생 김동철이라고합니다.
전화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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