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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오늘은 제 생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제 생일을 기억하시고

전화를 해주십니다.

 

그런데 언제나 제가 잊어먹고 사는

음력 생일날 전화를 하십니다.

 

"네?"

 

서울 올라오고 16년 동안

거의 매년 한번씩 이랬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처음으로 양력 생일을

그것도 전날 전화하셔서 축하해주셨습니다.

 

"통장에 20만원 넣는다"

 

느닷없이 돈이 생기면 기분이 좋습니다.

주선생님이랑 반땅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저 개인을 위해서 이 돈을 쓸 생각이고

주선생님은 미루와 절 위해서 이 돈을 쓸 생각인 것 같습니다.

 

주선생님은 어제 밤부터

압력솥에 뭘 한참 끓여댔습니다.

 

"현숙아, 이거 뭐 끓이는거야?"

"미역국"

 

왜 미역국을 이렇게 푹푹 끓이나 싶었지만

물어보진 않았습니다.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고도 싶었지만

그냥 잤습니다.

 

그런데 그게 제 생일 미역국이었답니다.

쇠고기를 압력솥에 푹푹 삶으면

입에서 살살 녹는데,

주선생님이 쇠고기 미역국을 끓여주셨습니다.

 

어머니와 주선생님 말고

제 생일을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아침에 출근해서 보니

생일축하 메일이 잔뜩 와 있고

문자도 와 있습니다.

 

전부 인터넷 업체에서 온 축하메일입니다.

이 분들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부쩍

제 생일을 축하해주십니다.

 

그 밖에도 인터넷 업체가 아니시면서도

생일 축하한다고 연락 온 개인이 계셨습니다.

참 훌륭하신 분들입니다.

 

"미루야, 가만 가만 일단 불을 붙이고~"

 

놀이집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생일 잔치 때마다

촛불 끄는 장면을 본 미루는

평소에 생일축하 촛불 그림을 보면 막 불어댑니다.

 

그런데 오늘은 미루가 마음이 급합니다.

 

"미루야~너 놀이집에서 맨날 촛불 한 개나 두 개 보다가

10개나 보니까 좋냐? 한 번에 끄기 힘들 걸?"

 

큰 것 세 개, 작은 것 네 개,

작은 것이 없어서 큰 걸 푹 눌러 작게 보이게 만든 것 세 개

이렇게 열 개로 '37'을 만들고 불을 붙였습니다.

 

"생일 축하합니다~생일 축하합니다~"

 

옆에서 주선생님이 노래를 불러주고

미루는 박수를 같이 칩니다.

 

참고 기다리던 미루

드디어 촛불을 껐습니다.

 

애 얼굴이 벌개집니다.

10개를 다 껐습니다.

 

미루는 얼굴에 크림을 묻혀 가며

케익을 손가락으로 비비적 거렸고

 

저와 주선생님은

케잌 한 조각씩을 먹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이 생일축하를 해주니까

기분이 상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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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깨나 미루생각

주선생님은 잠들자마자

잠꼬대를 잘 하는데

 

대꾸를 해주면

아예 대화를 한참 할 때가 많습니다.

 

1. 그저께 잠꼬대

 

"3마리 줄께"

 

시작입니다.

 

"뭘?"

"5마리 중에 3마리 줄께"

 

뭘 얘기하는 건지

궁금합니다.

 

"뭘 줄건데?"

"메뚜기"

 

"메뚜기?"

"응"

 

"고마워"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고맙다고 했는데

갑자기 무대에서 사회보는 사람

목소리로 소리칩니다.

 

"장안에 화제가 된 메뚜~기"

 

웃으면 안됩니다.

꿈에 메뚜기가 서커스 같은 거라도 하는 모양입니다.

 

장난스러운 마음으로

대화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근데... 그거 구워먹어도 돼?"

어떻게 대답을 할까 궁금했습니다.

 

"사치스럽지."

생각하지 못했던 대답입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왜?"

 

어떤 대답이 나올까

귀추가 주목되는 순간,

주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구가 멸망한 이후로 단백질이 귀해졌잖아.

국물을 우려내서 먹어야지...미루도 좀 주고..."

 

그 와중에도 미루 생각은 무척 합니다.

 

 

2. 어제 잠꼬대

 

"5개 있다!!"

 

또 시작입니다.

이번에도 메뚜기인가 싶어 물었습니다.

 

"뭐가?"

"사탕"

 

"나 좀 줘"

대화를 이어가는 건

재밌습니다.

 

"가만 있어봐. 나 하나, 미루 하나..."

"나는?"

"상구 하나"

 

2개는 어떡할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또 나 하나 미루 하나"

"나는!!?"

"사탕이 5개 뿐이야아~"

 

드디어 주선생님의

속마음이 드러났습니다.

미루만 생각합니다.

 

"그러면 나 운다~"

 

"으으아아앙~~"

느닷없이 잘 자던 미루가

방에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내내 잠꼬대를 하던

주선생님. 벌떡 일어나더니

막 달려갑니다.

 

텔레비젼 앞에 가서 딱 멈춰서더니

가만히 서 있다가 몸을 획 돌려서 안방으로 들어갑니다.

 

주선생님은

자나 깨나 미루 생각에 바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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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계속 깨다

요새 미루가 밤에 계속 깹니다.

방이 건조해서 깨는 것 같기도 하고

이빨 나는 게 아파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상구....나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애"

 

거실에서 자던 저는

벌떡 일어나서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밤에 몇 번씩 깨고

한번 깨면 30분 넘게도 안 자는 미루 땜에

주선생님은 밤마다 탈진 상태가 됩니다.

 

미루는 잠이 깼을 때

주로 등을 긁어주면 자는데

자다가 일어나서 애 등 긁어주는 건

10분 넘어가면 너무 지칩니다.

 

"현숙아, 좀 누워 있어..내가 긁을께"

 

미루 옆에 앉아서

저도 꼬박 30분 정도

등을 긁어줬습니다.

 

"돼지들이 등 긁어주면 잘 자는디..."

예전에 아버지가 했던 말이 생각 납니다.

 

오른손으로 긁다가 팔이 아프면

왼손으로 긁고, 그러다 또 힘들면

다시 오른손으로 긁었습니다.

 

정말 지칠 때까지 긁었더니

미루 숨소리가 새근새근 해집니다.

이제 가서 자도 될 것 같습니다.

 

"끼잉..낑...으으..으아앙~~"

 

등에서 손을 떼자 마자

미루는 다시 울기 시작하더니

아예 벌떡 일어나 앉아서 웁니다.

 

결국 옆에 쓰러져 있던

주선생님이 "미루야 쭈쭈~"로

겨우 다시 재웠습니다.

 

이게 어제밤 일입니다.

 

오늘 밤에 미루는 10시에 잠들었습니다.

 

"상구, 갑자기 졸려 죽을 것 같애...빨리 빨래 널자"

 

건조하면 미루가 자꾸 기침을 해서

요새는 빨래 건조대에다가

밤마다 빨래를 널어서

미루 자는 침대 옆에다 놓아줍니다.

 

주선생님과 저는 열심히 빨래를 널었습니다.

"상구..건조대 좀 방에 넣어줘"

"응"

 

문을 열고

건조대 측면을 두 손으로 들어

게 걸음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습니다.

 

소리나면 미루 깹니다.

 

"쿵"

 

소리 났습니다.

 

방문 들어가는 폭하고

건조대와 제 몸통을 합한 폭이 똑같아서

문에 끼었습니다.

 

빠져나가려다가 건조대가

문하고 부딪혔습니다.

 

오른쪽을 쳐다봤습니다.

주선생님이 농담반진담반 표정으로 말합니다.

"조심해! 미루 깨겠다."

 

왼쪽을 쳐다봤습니다.

"끼잉"

 

오른쪽을 쳐다봤습니다.

"아 빨리 들어가아"

 

왼쪽을 봤습니다.

"으....으아앙~"

 

오른쪽을 봤습니다.

주선생님이 좌절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습니다.

저한테는 머리통 위쪽만 보입니다.

 

저는 지금 블로그에 일기를 쓰고 있고

주선생님은 지금 다시 미루를 재우느라고 분투하고 있습니다.

 

제가 주선생님이라면

절 되게 미워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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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미루야 밥 먹자~~"

"바압~바압~바압~"

 

저 쪽에 있던 미루가

식탁 위로 뛰다시피 옵니다.

 

집에서 평소에 맘마란 말을 안 써서 그런지

성인용 단어를 구사합니다.

 

쇠고기버섯국에

밥을 말아 줬더니

쩝쩝 잘 받아 먹습니다.

 

밥을 받아 먹으면서

미루는 식탁 위로 올라가더니

튀밥을 엎었습니다.

튀긴 쌀 알이 사방으로 튑니다.

 

"미루야 한 숟갈 더 먹자"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듭니다.

 

"더 먹자아~"

"어기 시여요"

 

앗, 먹기 싫답니다.

 

"먹기 싫어?"

"에~"

 

별 말을 다합니다.

요새 부쩍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희안하게 문장을 구사합니다.

 

밥을 다 먹고

미루와의 놀이가 시작됐습니다.

체력이 모자랄 때는 자꾸 말을 걸어야 합니다.

 

"미루야~이게 뭐야?"

아무거나 잡고 미루한테 물었는데

곧바로 대답이 날라옵니다.

 

"모아요"

"몰라요?..."

 

"책 읽을까?"

"에~"

 

미루가

읽고 싶은 책을 꺼냅니다.

 

'Sweet Dreams, Sam'이라는,

우리집에 안 어울리는 영어책입니다.

아는 사람한테서 촉감책을 받은 겁니다.

 

제목부터 읽어줬습니다.

"좋은 꿈 꾸삼~"

 

두 페이지 쯤 넘기더니

이 책 저 책을 마구 꺼냅니다.

 

고전유아서적 '손이 나왔네'가 나왔습니다.

 

"손이 나왔네~"

 

미루가 한손으로 다른 손을 받치고

감자를 먹이는 자세를 취합니다.

 

손도 알고, 머리고 알고, 얼굴도 압니다.

코랑, 눈, 입도 구분합니다.

 

"띵동 띵동"

 

주선생님이 퇴근했습니다.

"5시쯤에 젖 짰어야 하는데 못 짰어. 미루야~엄마 쭈쭈 먹자~"

"주쭈..주쭈..주쭈.."

 

미루는 허리가 뒤로 확 꺾인 자세로

젖에 매달렸습니다.

 

"미루 먹일려고 자전거 타고 막 왔지~~"

"우유 배달이군"

 

"현숙아 근데 미루는 어떻게 이런 자세로 젖을 먹냐?"

"완전 요가야"

 

우리 대화를 듣던 미루가

두 사람을 보고

히~하고 웃습니다.

 

"인제 웃음도 자기 의사를 가지고 웃는 것 같지 않냐?"

"그러게...사교적인 웃음이야, 이건"

 

미루는 지금

점점 더 세상을 잘 이해하고,

의사소통 방식도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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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사태

오늘은 퇴근하고

제가 미루를 봤습니다.

 

"미루야~밥 먹자~"

 

미루가

밥을 통 안 먹습니다.

 

요새 혀에 물집이 막 잡혔다가

나아가고 있는 중인데

그것 때문에 뭘 먹기가 힘든가 봅니다.

 

어금니가 나는 것도

꽤 아파보입니다.

 

어금니 머리가 세군데에서

올라오는데, 이게 어금니 하나입니다.

으...좀 무섭습니다.

 

"미루야 이거 버섯 볶은 건데 좀 먹어봐"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듭니다.

 

"그럼, 바나나 먹자"

 

역시 고개를 흔듭니다.

 

제가 밥 먹는 걸 보면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길까 해서

미루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쩝쩝..쭈웁"

"미루야, 너 그게 뭐야? 어휴...."

 

식탁 위에 유축기로 유축할 때 쓰는

깔대기랑, 아주 얇고 동그란 고무막 같은 부속물이 있었는데

미루가 그 고무막을 입속에 넣고 오물오물 거립니다.

 

밥은 안 먹고

그런 것만 자꾸 입에 넣습니다.

 

미루가 안 먹으면

저라도 밥 먹어야지

같이 굶었다가 나중에 컨디션 나빠지면

미루한테 화만 냅니다.

 

밥을 먹었습니다.

기왕 먹는 거 열심히 먹었습니다.

 

"켁..케엑"

"미루야!! 너 왜 그래? 미루야~!!"

"커~억"

"미루야! 미루야!"

 

미루 얼굴이 금세 빨개 지더니

숨을 못 쉽니다.

고무막을 삼킨 겁니다.

 

등을 퍽퍽 때려주고, 뒤로 번쩍 안아 올려서

먹은 걸 토하게 했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자기 밥 먹느라고

애가 뭘 삼키는 데 그걸 몰랐습니다.

 

계속 등을 쳤습니다.

미루는 고개를 숙이고 켁켁 거립니다.

얼마나 그렇게 했을까

 

이제 괜찮아졌습니다.

고무막을 완전히 먹어버렸습니다.

 

"미루야...물 마셔..."

 

안쓰러워서 쳐다 볼 수가 없어서

미루를 꼭 안아줬습니다.

 

"미안해 미루야..."

 

...

 

10시 조금 넘어서

주선생님이 들어왔습니다.

 

"아까, 진짜 대형사태가 났었어"

 

자초지종을 얘기하는데

주선생님 얼굴이 점점 굳어집니다.

 

"게다가 밥은 하나도 안 먹었어"

 

제 설명을 다 듣더니

주선생님은 화도 안 내고

"많이 놀랐겠다" 합니다.

 

"똥으로 나올거야"

"그렇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병원 가서 물어보자"

"응"

 

밥을 하나도 안 먹어서

배가 쑥 들어갔던 미루는

주선생님한테 매달려서 젖을 먹었습니다.

겨우 안정을 찾는 것 같습니다.

 

근데 뱃속에 고무가 들어 있는 상상을 하니

속이 울렁거려 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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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바쳐 놀아주기

퇴근하고 자기 전까지 내내

미루는 활력이 넘칩니다.

 

아침에 감기 걸려서

놀이집에 보내놨는데

 

찾을 때쯤 되니까

쌩쌩합니다.

 

"헉헉헉"

 

미루가 숨을 헐떡이면서

엄마한테 한번 갔다가

아빠한테 한번 왔다가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주선생님은 쇼파에 앉아서

새로 산 동요CD에 맞춰서

노래를 따라부르면서 혼자 율동을 하고 있습니다.

 

미루는 그 옆에 서서

푸우 인형을 껴안고

덩달아 춤을 춥니다.

 

"우와~방금 내가 한 율동이 책에 나와 있는 거랑 거의 똑같애~역시!!"

 

노래마다 '따라해봅시다'라고 해서

율동이 그려져 있는데

그걸 안 보고 그냥 혼자서 한 게 책에 있는 거랑 똑같답니다.

 

확인하면 진실이 밝혀지겠지만

귀찮아서 응접실 구석에

그냥 누워 있었습니다.

 

미루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다시 저한테로 옵니다.

 

뛰듯이 달려온 미루는

제 두 다리 사이로 들어와서

배쪽으로 몸을 날립니다.

 

"헉!"

 

기합을 줘야

장파열이 안 일어납니다.

 

미루가 활짝 웃습니다.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다리 쪽으로 갑니다.

 

한번 더 몸을 날립니다.

 

"헉!"

 

또 다시 다리 쪽으로 갑니다.

이번엔 몸을 날리지 않고

냅다 걸어옵니다.

 

"으허억!!!!!!"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습니다.

평생 이런 건 처음입니다.

 

미루가 급소를 아주 제대로 밟았습니다.

 

주선생님은 멀리서

어깨를 들썩였다

손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율동 중입니다.

 

얼굴은, 이마쪽은 고정시킨 채로

턱만 왔다 갔다하는 시계추 동작 중입니다.

 

미루는 제 위에서 활짝 웃고 있습니다.

 

"아학..후..후.."

 

신음소리도 제대로 못 내자

주선생님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습니다.

율동은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상구 괜찮아?"

 

"으...죽을 것 같애..."

 

사태가 아주 심각했습니다.

저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방바닥을 느리게 뒹굴었습니다.

 

미루도 심각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다가

자기 엄마한테 달려 갑니다.

 

주선생님이 매우

그럴 듯한 처방을 내놨습니다.

 

"보호대 사줄까?"

 

동요CD를 확 꺼야 합니다.

 

조금씩 몸이 나아질 쯤

주선생님이 외칩니다.

 

"미루 간다~~. 조심해!!"

 

다시 몸을 웅크리고

방어 자세를 취했습니다.

 

미루는 신난 얼굴로

아까랑 똑같이 몸을 날렸습니다.

 

"흐억"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서

버텼습니다.

 

미루는 만족스러운 듯

다시 주선생님에게로 가고

저는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습니다.

 

"마아이 아프나?"

 

서울 출신이

사람을 위로할 때

강원도 억양을 쓰는 경우는 없습니다.

 

진정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상구, 진짜 아파 보인다. 눈도 퀭하고..."

 

뭐, 이 정도 위로면 됐습니다.

마음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듯 합니다.

 

문득, 혹시 육아용품 중에

보호대를 정말 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은 전혀 제자리를 못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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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 깎기

주선생님이 베트남 갔다 온 직후의 일입니다.

 

미루가 아침부터 보채더니

계속 젖에 매달립니다.

 

한쪽을 빨면 그냥 그쪽에만 집중할 것이지

꼭 다른 쪽 젖꼭지를 만지작 만지작 합니다.

 

"아야! 미루야 엄마 아퍼"

 

더 매달립니다.

 

말귀를 잘 알아듣는 미루는

이럴 땐 못 들은 척합니다.

 

주선생님이 잠시 몸을 피해서

소파 위로 올라가면

미루도 따라서 올라갑니다.

 

다른 쪽에 가서 누우면

역시 그쪽에 따라가서 젖을 뭅니다.

 

할 수 없이 조금 더 젖을 먹이던

주선생님, 더는 못 참고 좀 크게 소리칩니다

 

"아퍼, 정말로...미루야!!!"

 

"으으아앙~!!!"

이번엔 미루가 확실히

말귀를 알아들었습니다.

 

주선생님은

정말 너무 아파서

더는 젖을 못 주겠답니다.

 

"으아악악악!!"

 

미루는 아예 바닥에 털퍼덕 앉아서

두 손으로 땅을 치면서 통곡을 합니다.

요즘 들어서 미루가 자주 구사하는 동작입니다.

 

"상구! 나 베트남 가 있을 동안 미루 손톱 안 깎아줬지!"

 

"아니, 깎아줬어"

목소리가 살짝 떨립니다.

 

"근데 손톱이 왜 이렇게 길어. 아파 죽겠잖아"

 

"현숙아, 너 힘들어서 안되겠다. 내가 미루 데리고 밖에 나갈께"

 

외출하기 위해서

동생한테 얻은 추리닝 바지로

급히 갈아 입었습니다.

 

전날 새벽 3시에 빨아 넌 것입니다.

 

"그거 다 말랐어?"

"응, 말랐어."

 

다 안 말랐습니다.

 

기왕 입는 것

추리닝 윗옷도 입었습니다.

 

주선생님 제 모습이 확 눈에 들어오는 모양입니다.

 

"이야~한벌 빼 입으니까

동네 아줌마 같애"

 

그 사이에 미루는 울만큼 울었고

주선생님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젖을 한번 더 물렸습니다.

 

젖을 문 미루는

조용해지더니 눈을 감았습니다.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주선생님은 곧바로 미루 손톱을

깎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생존의 문제야..."

 

"그러게"

추리닝 윗옷을 벗으면서

호응해줬습니다.

 

"상구..."

 

"응?"

또 아줌마 같다는 얘기 하면

뭔가 응분의 복수를 해주리라 생각하면서

대답했습니다.

 

"손톱 안 깎아줬지?"

 

"......응"

 

"앞으로 자주 깎아줘."

"어..."

 

손톱은 거짓말을 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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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셋

"미루 에미 이리 와 봐라"

 

추석때 큰 집에 내려갔는데

할아버지께서 주선생님을 부르십니다.

 

"너 베트남 갔을 때

상구 혼자 미루 봤냐?"

 

결국 이 말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순간 긴장감이 흐릅니다.

 

분명 할아버지는 어떻게 남편한테 애를 맡기고

어딜 갈 수 있느냐는 말씀을 하실 거고

 

주선생님은 억지로 참아가며

죄송하다고 말할 겁니다.

 

저는 옆에서 괜히 안절부절 못하면서

주선생님 눈치를 볼 겁니다.

 

할아버지의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그건 그렇고..."

 

저 혼자만 긴장감이 흘렀습니다.

할아버지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하시려는 거였습니다.

 

"너, 둘째는 언제 나을래?"

 

갑작스러운 질문에 주선생님

순발력 있는 대답을 못하고 있습니다.

 

옆에서 치매기가 있으신

할머니가 덧붙이십니다.

 

"그려, 애는 셋은 있어야 혀. 셋"

둘이 셋이 됐습니다.

 

주선생님은 "네...헤헤" 하면서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날 할아버지는 주선생님을 한번 더 불러서

애 셋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셨고

 

주선생님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뜬금없이 "할아버님 건강하세요" 등의 대사를 날렸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럴 때 마다 "왜? 나 건강하면 애 셋 날려고?" 하시면서

끝까지 일관된 기조를 유지하셨습니다.

 

"상구야...양구 방금 전에 애 낳았다."

 

어제 동생이 애를 낳았습니다.

동생이 낳은 게 아니라

동생과 같이 사는 박슬기씨가 애를 낳았습니다.

 

16시간을 진통을 하다가

제왕절개를 했답니다.

 

덩치도 좋고

이미지도 저랑은 완전 반대인데다

학교 다닐 때 운동선수였고

한번은 학교 근처 조폭들하고 '1:여러명'으로 붙어서

도합 전치 수십주를 선사했던 동생은

 

박슬기씨가 산소호흡기랑 그 밖의 이것저것을

몸에 달고 수술실에서 나오는 걸 보고

울어버렸답니다.

 

고생했을 박슬기씨에게

엄청난 격려와 위로를 보냅니다.

 

그 옆에서 같이 고생했을

동생에게도 같은 걸 보냅니다.

 

가까운데 사시는 바람에

병원에서 덤으로 고생하셨을

우리 어머니에게도 역시 같은 걸 보냅니다.

 

이제 우리 삼형제에게 애가 하나씩 생겼으니까

다 합하면 애 셋이 됐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애 셋을 바라셨는데

이제 된 걸로 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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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

미루한테 신발을 신겨 놨더니

예식장 주차장을 신나게 걸어다닙니다.

 

시골 저희집이

예식장을 합니다.

 

"삐옥..삐옥..삐옥..삐옥.." 

 

소리나는 신발을 사줬더니

걸을 때마다 신나합니다.

 

그 넓은 주차장을 지나서

옆 건물 당구장 계단을 올라가는 걸

잡아왔습니다.

 

16개월 된 애가 출입하기엔

좀 무리가 있는 장소입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

기차 좌석에서 바닥으로 내려가는 미루에게

신발을 신기려고 하는데

"으어어어~" 소리를 지릅니다.

 

"미루야, 왜?"

"아...미루야, 양말 신고 신발 신자고?"

 

양말과 신발에 관한 한

언제 신고 언제 벗어야 할 지를

미루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서울에 도착해서

근처 식당에 갔습니다.

바로 들어가봐야 집에 밥이 없습니다.

 

"어? 미루야 너 뭐해~~?"

 

식당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자 마자

미루는 양말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미루야, 여긴 집이 아니니까..."

 

"괜찮아, 미루야. 그냥 벗어"

 

제 말을 막으면서 주선생님이 말합니다.

미루는 끝을 잡아 당겨서 양말을 벗었습니다.

 

맨발의 미루는 쌀국수를 실컷 먹었습니다.

식당에서 나오면서 다시 양말을 신겼더니

좋아라 합니다.

 

택시를 잡았습니다.

드디어 집으로 갑니다.

명절의 피로를 풀고 이제 푹 쉬고 싶습니다.

 

미루도 기차 타고 다니느라고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피곤하지만 기쁜 표정으로

옆에 앉은 미루를 쳐다봤습니다.

 

미루는

양말을 벗고 있었습니다.

 

택시 안도

실내는 실내입니다.

 

주선생님과 저는

동시에 미루를 말렸습니다.

 

20분쯤이 지나고

우리는 드디어 집에 도착했습니다.

 

현관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 마자

주선생님이 힘차게 외쳤습니다.

 

"미루야~인제 진짜 양말 벗어도 된다~!!!!"

 

올해에도 이렇게

추석이 지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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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때 일하기

추석 때 고향가는 길이 기쁜 사람이

얼마나 있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 며느리들은

그 길이 기쁠 리가 없습니다.

 

자기 고향도 아니고

자기 부모를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고

가 있는 내내 죽도록 일만 하는데

좋을 턱이 없습니다.

 

"추석을 맞아 벌써 마음은 고향에 가 있는 귀성객" 어쩌고 저쩌고는

사실 순전히 남자의 시선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남의 고향에 내려간 주선생님이

별로 투덜거리지도 않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저는 미루를 봤지만

어른들이 많이 봐줘서 전혀 힘들지 않았고

고생은 순전히 주선생님이 했습니다.

 

"어머니 마무리는 제가 할테니까

집에 가셔서 좀 쉬세요"

 

이랬답니다.

 

주선생님은 혼자 남아서

전 부치기 마무리 작업을 하고

차롓상에 올라갈 생선을 구웠답니다.

 

"근데 있잖아. 어머니는 생선을 살짝만 익히시더라구..

나는 생선을 후라이팬에 올려놨다가 다른 일도 하면서~"

 

생선이 푹 익었답니다.

 

꼬리를 잡고 생선을 드는데

꼬리가 툭 떨어져나갔답니다. 

 

"그래서 소쿠리에 생선 올려놓고 꼬리를 살짝 붙여놓고 도망왔어...

근데 어머니는 아마 이쑤시개로라도 꼬리를 이어놓지 않을까? 히히"

 

우리는 생선꼬리 떨어진 게

안 걸리길 기도하면서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날.

 

어머니는 꼬리 떨어진 생선을

기어코 발견하더니 이러셨습니다.

 

"현숙이 너 왜 이랬니?"

 

전혀 망설임 없는 지적에

주선생님 역시 망설임 없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몰라요. 이게 왜 이러지?"

 

비겁한 발뺌입니다.

 

"근데 어머니...이거 이쑤시개로 이을까요?"

 

어머니는 주선생님의 말을 듣고

"그냥 저 옆으로 치워놔"라고 하셨습니다.

 

주선생님과 어머니의 빛나는 노동으로

이번 추석은 마쳤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음식 장만에 전혀 기여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밥을 먹고

음식을 챙겨서 떠났습니다.

 

정말 이대로는 안되겠습니다.

무턱대고 부엌으로 뛰어드는 일은

예전에 실패했었습니다.

 

내년부터는 추석 대개혁을 위한

프로그램을 아예 문서로 써서

제안을 할까 생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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