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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기획인터뷰]어떻게 지내세요? #2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쌍용차에 비정규직도 있어요! ②

 

 

 

[편집자주] 2009년 77일 동안 벌어진 쌍용자동차 공장점거파업 이후 8․6 노사합의가 도출되었다. 2012년 2월11일부로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1,000일을 맞았지만 합의는 이행되지 않았고 또다시 조합원이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대한문과 전국에 분향소가 설치되었고 먹튀자본과 정부관료들의 돈놀음 속에 희생당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문제가 사회적인 다시 제기되기 시작했다. 5월19일 22번째 죽음을 맞은 조합원의 49제를 지나 22일부로 투쟁 3주년을 맞은 쌍용자동차지부는 또다시 투쟁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사노신은 6월10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되는 '쌍용자동차 해고자 전원복직을 위한 범국민행동 주간'을 맞이하여 쌍용자동차의 정비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 생산직 노동자였던 이들의 기획인터뷰 [어떻게 지내세요?]를 차례로 연재할 예정이다. 함께 투쟁하고 있지만 각기 다른 상황과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지회장

49제 이후 새롭게 5대요구안을 정비하고 평택역과 서울 대한문 두 개의 거점에서 대정부투쟁을 벌이고 있다. 평택역에 새롭게 천막을 친 5월24일 비정규직지회장 서맹섭 동지를 만나 그 간의 투쟁 경과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쌍용차 비정규직 문제를 들어보았다. 분량 관계상 인터뷰를 2개의 기사로 나누었다. 첫번째 기사에서는 49제 이후의 투쟁계획과 이전 투쟁의 경과에 대해서, 두번째 기사는 쌍용차 해고차 내에 비정규직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1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anosin.jinbo.net/Publish/magazine.php?ex=article&b_fn=RD&gotopage=1&pkno=712

 

쌍용차에 비정규직도 있어요!


현재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은 어느 정도 되나요?

2009년도에 (공장점거)파업할 때 19명이 싸웠어요. 지금도 19명이 있는데 다만 3년이란 시간이 지나니까 다들 힘들어해요. 제일 큰 문제가 생계문제죠. 나머지 조합원들은 생계를, 처음에 한 1년 반 정도는 파업이 끝나고도 같이 싸웠어요. 도저히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생계투쟁으로 나가시라(해서), 현재는 임원간부 4명 중심으로 해서 싸우고 있어요. 저희가 투쟁을 만들어나가면서 조합원들과 소통을 하고 (있어요), 공장에 들어가게 되면 우선적으로 같이 조합원들과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4명 중에 서울에 2명이 올라가 있어요. 한윤수 사무장, 유제선 조직부장. 우리 조직부장이 얘기 잘 해요. 아주 선수에요 마이크 잡으면 한 시간 두 시간씩 지 혼자 밤새 떠들어요. 회사 정문에 가면 가처분이 떨어져 있어요. 마이크 잡고 얘기하지 말라고. 하도 회사 관리자들 깠거든.(웃음) 까는 얘기하고 열 받으면 욕도 하고 해서 명예훼손으로 (가처분이 떨어졌어요). *1편에서 이어집니다.

 

비정규직은 2009년 이전부터 잘려왔는데 쌍용차 문제 하면 비정규직 문제는 잘 부각되지 않는 것 같아요.

 

평택역 농성장 앞 선전전. 많은 시민들이 모금과 서명을 하고 간다.
정규직이 인원이 많잖아요. 비정규직은 소수가 남았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투쟁을 해왔던 거고. 어쨌든 공장에 다시 들어가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싸움을 이어왔던 거에요. 우리는 작년 10월24일부터 텐트농성을 시작했지만 그 전에 8월 달부터 1인시위를 시작했었어요. 지역시민단체와 하루 10시간, 릴레이 10시간 하면서 그 때부터 선전포고를 했던 거고. 10월 달부터 본격적으로 (농성) 들어가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해서 싸움을 계속 알려냈어요.
그렇게 가다가 12월 달에 지부가 희망텐트촌을 들어가면서 큰 싸움을 걸면서 가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우리의 목소리는 수면 아래로 내려앉았죠. 저희는 우려를 했었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싸워가는 과정을 한 번이라도 우리 농성장에 왔던 동지들은 다 알아요.
전체적으로 큰 이슈화는 못시켰지만 묻혀가면서도 우리 목소리를 계속 냈다. 다만 아쉬운 건 좀 많죠. 내가 우리 조합원 50명만 남아있어도 엄청난 할 수 있는 게 많잖아요. 소수가 두 농성장을 가지고 갈려고 하다보니까 어렵더라고요. 그 전에 우리 조합원들이 (투쟁에) 나왔을 때는 연대도 가고 그랬어요. 투쟁하는 사업장에 계속 가고 그랬는데. 농성장이 두 군데를 나눠서 하니까 어딜 가지도 못하고 뭐. 상당히 어렵더라고요.
그렇더라도 지금도 우리가 계속 목소리를 내고 있고 쌍용차에는 정규직도 있지만 소수의 비정규직들이 아직까지 질기게 싸우고 있다(는 거에요). 정말 6개월이라는 농성을 해본 적이 없어요. 지역에서도 한 단위가 없어요. 지부도 마찬가지에요. 저희는 했어요, 인원에 굴하지 않고.

 

지부와 투쟁계획이나 의견 조율은 어떻게 하시나요?

지부가 토론회나 회의를 하면 저희가 들어가요. 선도투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전체회의면 저희가 들어가요. 전체회의가 아니더라도 지부 임실장 회의에는 제가 들어가요. 제가 지회장이니까, 정비지회장도 들어오고 그래서 같이 소통하고 같이 할 수 있는 부분은 같이 해야하니까.
또 전술적으로 이건 비정규직 단위에서 해야 된다, 비정규직지회가 투쟁을 진행하면서 지부는 엄호해주고 지원해주고 역할을 하겠다, 그런 부분이 또 필요하잖아요. 그리고 지부도 지부 나름대로 투쟁을 해야 하니까. 우리의 싸움에 다 붙을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런 면은 조직적으로 열어갔던 거고 지금도 그런 부분이 있어요.
현재는 원유철 부분이 있지만 5대 요구안을 가지고 같이 힘을 모아보자, 대선 국면이 다가오기 때문에 6월 (국회)개원(이 있고), 9월 이후로 넘어가면 (대선 때문에) 우리 목소리가 묻힐 수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어쨌든 우리 싸움 만들어내 보자, 그래서 지금은 함께 가야된다(고 결정했어요).

 

앞서 말씀하셨던 것(첫번째 인터뷰 기사 참조)처럼 해고 사유가 달랐기 때문에 전술도 다르게 갔다는 건가요?

그렇죠. 지부가 열어준 거죠. 옆에서 지원해주고 함께 할 수 있는 부분 해주겠다, 다만 이 부분은 전술적으로 비정규직지회애서 끌고 가라. 지부는 다 포괄해서 큰 걸로 싸워나가겠다(고 한 거죠).
이게(역량이) 한정되어 있는 거잖아요. 우리는 86 중재했던 사람들, 지역 국회의원 상대로 싸워나가는 것은 우리 힘으로도 가능한 투쟁이었거든요. 그런데 지부가 이걸 껴안고 지역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싸우면 너무 고립되잖아요. 쌍용차 문제를 전국적으로 싸워나가야 되는데. 그런 부분이 좀 있어서 그런 부분은 약간 전술적으로 열어준 거고.

 

조직편제상 비정규직지회는 지부에 속해있는 건가요?

저희는 지부에 속해 있어요. 쌍용차지부 비정규직지회에요. 이걸(1사1조직) 언제 했냐면 원래는 우리도 현대차와 같이 독립적으로 (노조활동)했는데 2009년 파업이 끝나고 나서 2010년 (지부) 3기 지도부 선출하면서 제가 총회에 부쳐버렸어요. 원래는 대대안건인데 대대가 아니라 정규직 동지들한테 이 안건을 던지고 싶다, 그래서 2010년 3기 지도부 뽑을 때 1사1조직 안을 던졌어요. 그 때 성사가 된 거에요. 거의 96%로 찬성을 찍어서. 그 때 통합이 된 거에요. 그게 안됐으면 독립성은 있는데, 지금은 같이 움직이죠.

 

정리해고 사태가 일어나기 이전의 쌍용차지부는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를 잘 안했던 걸로 기억해요.

하도 억울해서 조직해서 (제가) 노동조합 띄웠던 당사자인데요. 2008년도 10월에 노동조합 띄웠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 때부터 싸움을 했던 거였고 일부 비정규직을 알고 있는 활동가 외에는 (정규직은) 관심이 없었어요.
그 때 당시에 정규직이 내 자리에 들어오는 전환배치였기 때문에 서로의 감정이 좋지 않았어요. 왜냐면 내가 나가면 이 사람들 내 자리에 들어와서 일하고 내가 안 나가면 이 사람들 내 자리에 못 들어오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공장 안에서 집회하거나 출투할 때도 ‘너 나가면 내가 사는데 너희들 나가면 우리 사는데 왜 시끄럽게 하냐’ 그런 얘기도 많이 들었고.
상황이 낙관적은 아니었어요. 그 해 12월 달에 2기 지도부, 한상균 전 지부장이 출마해서 당선이 됐는데 그 때부터 (정규직) 집행부에 우리 비정규직을 도와줬던 활동가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때부터 상황이 약간씩 바뀌어 나간 거에요. 조직적으로 생각이 완전히 바뀌진 않았지만 조금씩 바뀌어 가면서 2009년 파업에 들어가고, 제가 굴뚝 농성에 들어가면서 많이 바뀌었죠.
공장(점거파업)에 19명 비정규직 조합원들이 들어가서 함께 싸우면서 몸 부딪히고 똑같이 앞에 나가서 싸우고 그러면서 좀 바뀌어 나갔죠. 한상균 전 지부장이 당선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변화하면서 그 다음에 파업으로 인해, 그리고 1사1조직 편제를 하면서까지 이제 지금은 많이, 완전히 바뀌었죠. 지금은 동료이고, 정리해고 철회, 비정규직 철폐라고 외치잖아요.
이제 쌍용차 안에는 두 가지가 다 들어가 있는 거에요. 현대차나 기아차나 한국GM을 봐도 한 쪽은 싸우더라도 한 쪽은 안 싸우고 있고, (정규직이) 해고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저희는 두 가지를 충족을 하고 있는 거라, 정리해고 문제도 있고 비정규직 문제도 있고. 그래서 알려내기가 더 쉽지 않겠나 (싶어요).

 

공장마다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시기마다 1사1조직이 논쟁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때로 함께 해야 될 부분은 동의가 되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독립성이 많이 필요한 부분도 있는 거고. 저희는 어쨌든 밀려나와 있잖아요. 공장 안이 아니고 밖이기 때문에 현대나 기아차와 약간은, 차이는 있을 수 있어요. 만약에 우리가 공장에서 쫓겨나지 않고 1사1조직이 과연 됐을까, 난 안됐을 거라고 보는 거에요. 불가능하다 이거. 인식은 똑같지 않겠냐, 현대차나. 다만 우리는 같이 쫓겨나서 싸워가는 목소리는 똑같잖아요. 다시 공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싸우는 거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내가 1사1조직을 했던 거에요.
만약 1사1조직이 안됐고 우리가 지부 소속이 아니고 독립성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면 소수지만 더 목소리를 낼 수 있었겠죠. 그런데 그것만에 국한되어선 안 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1사1조직 했어요). 다 좋다고 볼 수는 없다고 없을 것 같아요. 애매한 게 있어요. 기아보다는 낫죠. 다만 똑같은 형태라고 하면 힘들지 않았을까.
비정규직도 마찬가지이지만 정규직도 자기들 욕심을 버리고 하나의 조직으로 묶으려면 서로를 먼저 알고 가야돼지 않겠냐. 나는 정규직이니까 정규직만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비정규직이라면 어땠을까. 반대로 입장을 바꿔보면 인식이 조금 더 바뀌어 나가지 않을까. 실질적으로 라인 운영도 비정규직만 쫓겨나는 게 아니라 ‘왜 쫓겨나야 돼, 이거 우리가 같이 라인에서 일하면 소통해서 풀어갈 수 있는 방식이 있는데’. 내 개인의 생존권 문제가 아니라 같이 일하는 동료를 위해서, 동료를 생각하고 동료도 나를 생각한다고 하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아직까지 그게 인식이 안 바뀌어 있기 때문에 자기들 욕심 가져가기 위해서 서로 이해를 못하고. 얘기를 해보면 이해를 한다고 해요. 이해를 한다, 말뿐이잖아요. 실제로. 저희도 마찬가지라고 보는 거에요. 같이 투쟁을 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요. 같은 해고자이면서도 그런 모습은 있어요. 그건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아쉬운 부분도 많이 있는 거죠. 때로 함께 가기 위해서는 조직을 묶어야 되겠지만 그런 욕심과 그런 생각이 안 바뀐다면 저는 1사1조직 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거에요. 저도 후회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의견이 충돌하고 그럴 때 후회하시는 건가요?

그렇죠. 의견 충돌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도 정규직이라는 고정관념을 못 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어요.

 

지금은 지부와 함께 일정을 하는 것으로 결정 난 것이죠?

지금 상황은 하나의 목소리를 내서 갈 수밖에 없는 거라. 다만 하나로 가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저희는 공장에 들어가야 될 근거가 8,6합의 약속이잖아요. 8,6합의가 아니더라도 신규채용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비정규직이 빨리 들어가야 될 입장이고.
또한 불법파견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1심에서 승소한다면 요구안은 달라지죠. 비정규직으로는 안 들어가죠, 이제. 더 큰 투쟁을 하면서 더 크게 만들어가고. 안에 있는 지금 조합비를 내려고 하는 사람들, 망설이고 있는 사람들 다 조직해야죠. 조합원들도 많아질 거고, 조직 대상들이 공장 안에 있고 이후 투쟁도 여러 가지로 고민될 부분도 있는 것 같고.
(그런데) 이런 것도 있잖아요. (불법파견 문제가) 이길 수도 있지만 지면 어떻게 할 거냐, 그것도 우려가 있는 거잖아요. 지면 지는대로 또 계속 끝까지 재판을 가야될 것 같고 또 가면서 싸워봐야 되고. 한쪽으로는 그게 있고 한쪽으로는 하루빨리 공장으로 들어가야 된다(라는 게 있어요).

 

공장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서 8.6합의 이행이든 신규채용이든 형태는 상관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지금 우리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다들 몇 년씩 근무했던 사람들이에요. 짧게는 5년 많게는 10년 이상 근무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 경력을 갖고 있고. 저는 면접까지도 필요없다고 보는 거에요.
우리 업체가 설령 없다고 하더라도, 사내하청 업체는 거의 똑같은 형태이기 때문에 업체가 3개든 4개든 인원을 나눠서 넣든, 한 군데로 다 넣든 넣으면 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우리가 들어가서 일을 하면 되는 거고. 또한 노동조합 문제는 기본적으로 갖고 가야할 문제이고.
어떠한 형태를 떠나서라도 무조건 공장 안으로 넣어주라, 그것밖에 없어요. 우리가 지금 돈을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임금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공장 안에 들어가서 일을 하겠다 그걸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약속 지키면 되요. 지금이라도 비정규직 약속 지키겠다, 그러면 우리 들어가서 일하면 되는 거거든.

 

투쟁 속의 상처와 원동력


돌아가신 분들 중에 비정규직 동지도 계신가요.

 

 
첫 번째로 있어요. 첫 번째로 비정규직. 조합원이었어요, 우리. 조합원이었는데 희망퇴직을 썼었어요. 640명 있었어요, 저희(비정규직)가. 2008년도에 그 중 350명을 쫓아내려고 했던 거였어요. 350명 전환배치 정규직이 오니까. 처음에는 350명 다 안 나가겠다고 버텼어요. 버텼는데 회사에서 업체별로 압력을 가한 거죠. ‘야, 돈 몇 푼이라도 받고 나가라, 나중에 돈도 없다, 그냥 나갈래 지금 줄 때 받고 나갈래.’
그렇게 해서 300명이 희망퇴직을 써버린 거에요. 50명은 끝까지 버틴 거죠. 50명이 끝까지 가다가 (2009년) 5월 달에 파업들어가기 전에 많이 떨어져 나갔어요. 그때 남은 게 19명이었어요. 그 전에는 50명이 2008년 11월부터 2009년 4월까지 끈끈히 본관 앞에서 농성하고 본관 들어가서 항의 투쟁하고. 우리 투쟁한 것은 까페(http://cafe.daum.net/ssybj)에 다 나와 있어요. 그 때 희망퇴직 썼던 동지가 집이 강원도 쪽인 것 같아요. 거기 가서 (돌아가셨어요). 아프더라고요 많이. 안타깝죠. 저기 현수막 첫 번째에 있어요. 그 이후 쭉 정규직, 가족.

 

와락센터에서 비정규직 동지들도 모두 심리치료 받으시죠?

네 저희도 다 해요. 지금 싸우고 있는 동지들 4명 중에 저 빼고 3명은 심리치료를 다 받았고요.

 

동지는 왜 안 받으세요?

아직까지 멀쩡하니까.(웃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분명히 상처가 있으실 것 같아요.

제 집사람이 심리치료를 받았고 아이가 또 심리치료를 받고 있어요. 어른들 문제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상처를 받았어요. 저는 굴뚝에 86일 있으면서 아이들 둘 전부 공장에 들어와서 이렇게 보고 있는데 안타깝더라고요. 그래도 밑에 있는 동지들은 한동안 가족들을 만났잖아요, 공장 안에 있을 때에는. 나는 못 만났고. 그게 제일 큰 상처로 남아있는 것 같아요.
아이들도 잘 이겨내고는 있는데 나는 그런 부분이 보여요. 지금도 노동가요 나오면 애들이 그래요. ‘아빠 또 집회 하냐.’ 경찰차 지나가면 ‘아빠 잡으러 온 거 아니냐’. 최근엔 막 그랬어요. 경찰들이 막 잡아가는 꿈 꿨다고. 이런 게 아이들한테는 상처로 있더라. 시간이 가면 잊히겠지만 그 상처를 해결하려면 이 싸움이 끝나야죠. 하루속히.
정상적으로 (돌아)갈 순 없지만 다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가족에도 평화가 올 거고, 아이들도 나와 같이 있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변화가 있지 않을까. 이제는 공장으로 들어가야 되요. 비정규직 동지들 너무 오래 싸웠어요, 1300일이 넘어가고 있어요. 거의 3년 반이 넘어가고 4년을 바라보는데. 정상적인 생활이 된 적이 없어요.
저희보다 더 오래 투쟁하는 동지들도 있지만 내가 이런 얘기하면 그 동지들한테 미안할 수 있죠. 하지만 똑같다고 보는 거에요. 누가 길게 싸우고 싶겠어요.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어요. 여기(현수막)에 보면 문구에도 해고된 노동자들은 1년 휴직 이후 복직시킨다고 약속했잖아요. 우리는 1년이 아니에요. 2009년 8월6일 이후에 딱 한 달 있다가 복귀였어요. 저런 거 보면 좀 아프잖아요. 우리는 한 달이었는데 왜 1년이냐. 차이는 좀 있어요. 근데 저런 걸 내가 또 따로 정규직 동지들한테 말을 하기가 그렇잖아요. 이런 문구 보면 아쉬움이 있어요. 근데 이걸 지부에서 만든 게 아니라 주변 동지들이 만든 건데 그만큼 우리 문제를 알려나가지 못했다는 아쉬움. 제가 그래도 인터뷰도 하고 많이 했는데 안 보나봐.(웃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쌍용차 안에 정규직 해고자도 있고 비정규직 해고자도 있고 무급자도 있고 징계해고자도 있고 여러 분류가 있어요. 있지만 다 같이 동시에 해결돼서 똑같이 손잡고 공장에 들어갔으면 제일 큰 희망이고요. 그게 안 되더라도 최소한 신규채용을 하고 있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회사가 입장을 내야 한다, 신규채용하고 있는 비정규직에 대해서, 사무직도 신규채용하고 있지만 비정규직도 계속 수시로 신규채용하고 있는 이 문제는 자기들이 약속했던 노사가 도장을 찍었던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입장을 내놓고 지금이라도 비정규직 복직시켜야된다. 그걸 위해서 우리가 소수 인원이 싸워나가고 있지만 앞으로 이 투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투쟁을 마다하지 않고 어떠한 연대를 마다하지 않고 전국에 있는 동지들한데 쌍용차 안에는 비정규직 동지들도 분명히 있다는 존재감을 더욱 더 알려나가야 될 것 같아요. 또 하나 불법파견 정규직화 소송 관련해서도 명확하게 현대기아차가 중심이지만 쌍용차에도 조직해서 함께 싸워나갈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은 우리가 공장에 들어가는 복귀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싸워나가는 과정에서 비중을 더 크게 잡고 있지만 재판의 상황에 따라서 요구안은 바뀐다. 그 이전까지는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고 가려고 하고 있어요. 그리고 정부 상대로 많은 동지들이 서울에 올라간 상태이지만 지역에도 나름대로 지역시민들과 중재했던 사람들 다 끄집어 내야할 것 같고요. 또한 이 공장이 평택에 있기 때문에 공장 상대로 이 싸움을 계속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서울과 이 지역과 연동해서 계속 알려내고. 반드시
공장으로 들어가야죠. 하루속히 공장에 들어가야 될 것 같고. 들어가는 모습을 동지들한테 보여주는 게 제일 큰 희망이지 않나. 저도 그런 희망을 갖고 있는 거고. 현재 상황은 다 어려운 국면이에요. 개인적으로도 어렵고 여러 가지로 어렵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보려고 하고 있어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보려고 조금만 더.......

 

그 힘의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 건가요?

(천막과 주변 동지들을 가리키며) 이게 힘이지 않을까요. 이 주변의 동지들이 찾아오고 지역 시민들이 그냥 지나가지 않고 모금도 해주시고 서명도 해주시고 쌍용차 관련해서 물어봐주시고 이게 난 힘이라고 봐요.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나를 지켜보고 있고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구나, 그리고 또한 나와 함께 가는 내 가족이 있잖아요. 내 가정과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그 힘으로 버텨나가야 되지 않겠나.

 

[편집자주] 2009년 77일 동안 벌어진 쌍용자동차 공장점거파업 이후 8․6 노사합의가 도출되었다. 2012년 2월11일부로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1,000일을 맞았지만 합의는 이행되지 않았고 또다시 조합원이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대한문과 전국에 분향소가 설치되었고 먹튀자본과 정부관료들의 돈놀음 속에 희생당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문제가 사회적인 다시 제기되기 시작했다. 5월19일 22번째 죽음을 맞은 조합원의 49제를 지나 22일부로 투쟁 3주년을 맞은 쌍용자동차지부는 또다시 투쟁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사노신은 6월10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되는 '쌍용자동차 해고자 전원복직을 위한 범국민행동 주간'을 맞이하여 쌍용자동차의 정비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 생산직 노동자였던 이들의 기획인터뷰 [어떻게 지내세요?]를 차례로 연재할 예정이다. 함께 투쟁하고 있지만 각기 다른 상황과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지회장

49제 이후 새롭게 5대요구안을 정비하고 평택역과 서울 대한문 두 개의 거점에서 대정부투쟁을 벌이고 있다. 평택역에 새롭게 천막을 친 5월24일 비정규직지회장 서맹섭 동지를 만나 그 간의 투쟁 경과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쌍용차 비정규직 문제를 들어보았다. 분량 관계상 인터뷰를 2개의 기사로 나누었다. 첫번째 기사에서는 49제 이후의 투쟁계획과 이전 투쟁의 경과에 대해서, 두번째 기사는 쌍용차 해고차 내에 비정규직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1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anosin.jinbo.net/Publish/magazine.php?ex=article&b_fn=RD&gotopage=1&pkno=712

 

쌍용차에 비정규직도 있어요!


현재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은 어느 정도 되나요?

2009년도에 (공장점거)파업할 때 19명이 싸웠어요. 지금도 19명이 있는데 다만 3년이란 시간이 지나니까 다들 힘들어해요. 제일 큰 문제가 생계문제죠. 나머지 조합원들은 생계를, 처음에 한 1년 반 정도는 파업이 끝나고도 같이 싸웠어요. 도저히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생계투쟁으로 나가시라(해서), 현재는 임원간부 4명 중심으로 해서 싸우고 있어요. 저희가 투쟁을 만들어나가면서 조합원들과 소통을 하고 (있어요), 공장에 들어가게 되면 우선적으로 같이 조합원들과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4명 중에 서울에 2명이 올라가 있어요. 한윤수 사무장, 유제선 조직부장. 우리 조직부장이 얘기 잘 해요. 아주 선수에요 마이크 잡으면 한 시간 두 시간씩 지 혼자 밤새 떠들어요. 회사 정문에 가면 가처분이 떨어져 있어요. 마이크 잡고 얘기하지 말라고. 하도 회사 관리자들 깠거든.(웃음) 까는 얘기하고 열 받으면 욕도 하고 해서 명예훼손으로 (가처분이 떨어졌어요). *1편에서 이어집니다.

비정규직은 2009년 이전부터 잘려왔는데 쌍용차 문제 하면 비정규직 문제는 잘 부각되지 않는 것 같아요.

 

평택역 농성장 앞 선전전. 많은 시민들이 모금과 서명을 하고 간다.
정규직이 인원이 많잖아요. 비정규직은 소수가 남았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투쟁을 해왔던 거고. 어쨌든 공장에 다시 들어가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싸움을 이어왔던 거에요. 우리는 작년 10월24일부터 텐트농성을 시작했지만 그 전에 8월 달부터 1인시위를 시작했었어요. 지역시민단체와 하루 10시간, 릴레이 10시간 하면서 그 때부터 선전포고를 했던 거고. 10월 달부터 본격적으로 (농성) 들어가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해서 싸움을 계속 알려냈어요.
그렇게 가다가 12월 달에 지부가 희망텐트촌을 들어가면서 큰 싸움을 걸면서 가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우리의 목소리는 수면 아래로 내려앉았죠. 저희는 우려를 했었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싸워가는 과정을 한 번이라도 우리 농성장에 왔던 동지들은 다 알아요.
전체적으로 큰 이슈화는 못시켰지만 묻혀가면서도 우리 목소리를 계속 냈다. 다만 아쉬운 건 좀 많죠. 내가 우리 조합원 50명만 남아있어도 엄청난 할 수 있는 게 많잖아요. 소수가 두 농성장을 가지고 갈려고 하다보니까 어렵더라고요. 그 전에 우리 조합원들이 (투쟁에) 나왔을 때는 연대도 가고 그랬어요. 투쟁하는 사업장에 계속 가고 그랬는데. 농성장이 두 군데를 나눠서 하니까 어딜 가지도 못하고 뭐. 상당히 어렵더라고요.
그렇더라도 지금도 우리가 계속 목소리를 내고 있고 쌍용차에는 정규직도 있지만 소수의 비정규직들이 아직까지 질기게 싸우고 있다(는 거에요). 정말 6개월이라는 농성을 해본 적이 없어요. 지역에서도 한 단위가 없어요. 지부도 마찬가지에요. 저희는 했어요, 인원에 굴하지 않고.

 

지부와 투쟁계획이나 의견 조율은 어떻게 하시나요?

지부가 토론회나 회의를 하면 저희가 들어가요. 선도투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전체회의면 저희가 들어가요. 전체회의가 아니더라도 지부 임실장 회의에는 제가 들어가요. 제가 지회장이니까, 정비지회장도 들어오고 그래서 같이 소통하고 같이 할 수 있는 부분은 같이 해야하니까.
또 전술적으로 이건 비정규직 단위에서 해야 된다, 비정규직지회가 투쟁을 진행하면서 지부는 엄호해주고 지원해주고 역할을 하겠다, 그런 부분이 또 필요하잖아요. 그리고 지부도 지부 나름대로 투쟁을 해야 하니까. 우리의 싸움에 다 붙을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런 면은 조직적으로 열어갔던 거고 지금도 그런 부분이 있어요.
현재는 원유철 부분이 있지만 5대 요구안을 가지고 같이 힘을 모아보자, 대선 국면이 다가오기 때문에 6월 (국회)개원(이 있고), 9월 이후로 넘어가면 (대선 때문에) 우리 목소리가 묻힐 수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어쨌든 우리 싸움 만들어내 보자, 그래서 지금은 함께 가야된다(고 결정했어요).

앞서 말씀하셨던 것(첫번째 인터뷰 기사 참조)처럼 해고 사유가 달랐기 때문에 전술도 다르게 갔다는 건가요?

그렇죠. 지부가 열어준 거죠. 옆에서 지원해주고 함께 할 수 있는 부분 해주겠다, 다만 이 부분은 전술적으로 비정규직지회애서 끌고 가라. 지부는 다 포괄해서 큰 걸로 싸워나가겠다(고 한 거죠).
이게(역량이) 한정되어 있는 거잖아요. 우리는 86 중재했던 사람들, 지역 국회의원 상대로 싸워나가는 것은 우리 힘으로도 가능한 투쟁이었거든요. 그런데 지부가 이걸 껴안고 지역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싸우면 너무 고립되잖아요. 쌍용차 문제를 전국적으로 싸워나가야 되는데. 그런 부분이 좀 있어서 그런 부분은 약간 전술적으로 열어준 거고.

조직편제상 비정규직지회는 지부에 속해있는 건가요?

저희는 지부에 속해 있어요. 쌍용차지부 비정규직지회에요. 이걸(1사1조직) 언제 했냐면 원래는 우리도 현대차와 같이 독립적으로 (노조활동)했는데 2009년 파업이 끝나고 나서 2010년 (지부) 3기 지도부 선출하면서 제가 총회에 부쳐버렸어요. 원래는 대대안건인데 대대가 아니라 정규직 동지들한테 이 안건을 던지고 싶다, 그래서 2010년 3기 지도부 뽑을 때 1사1조직 안을 던졌어요. 그 때 성사가 된 거에요. 거의 96%로 찬성을 찍어서. 그 때 통합이 된 거에요. 그게 안됐으면 독립성은 있는데, 지금은 같이 움직이죠.

정리해고 사태가 일어나기 이전의 쌍용차지부는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를 잘 안했던 걸로 기억해요.

하도 억울해서 조직해서 (제가) 노동조합 띄웠던 당사자인데요. 2008년도 10월에 노동조합 띄웠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 때부터 싸움을 했던 거였고 일부 비정규직을 알고 있는 활동가 외에는 (정규직은) 관심이 없었어요.
그 때 당시에 정규직이 내 자리에 들어오는 전환배치였기 때문에 서로의 감정이 좋지 않았어요. 왜냐면 내가 나가면 이 사람들 내 자리에 들어와서 일하고 내가 안 나가면 이 사람들 내 자리에 못 들어오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공장 안에서 집회하거나 출투할 때도 ‘너 나가면 내가 사는데 너희들 나가면 우리 사는데 왜 시끄럽게 하냐’ 그런 얘기도 많이 들었고.
상황이 낙관적은 아니었어요. 그 해 12월 달에 2기 지도부, 한상균 전 지부장이 출마해서 당선이 됐는데 그 때부터 (정규직) 집행부에 우리 비정규직을 도와줬던 활동가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때부터 상황이 약간씩 바뀌어 나간 거에요. 조직적으로 생각이 완전히 바뀌진 않았지만 조금씩 바뀌어 가면서 2009년 파업에 들어가고, 제가 굴뚝 농성에 들어가면서 많이 바뀌었죠.
공장(점거파업)에 19명 비정규직 조합원들이 들어가서 함께 싸우면서 몸 부딪히고 똑같이 앞에 나가서 싸우고 그러면서 좀 바뀌어 나갔죠. 한상균 전 지부장이 당선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변화하면서 그 다음에 파업으로 인해, 그리고 1사1조직 편제를 하면서까지 이제 지금은 많이, 완전히 바뀌었죠. 지금은 동료이고, 정리해고 철회, 비정규직 철폐라고 외치잖아요.
이제 쌍용차 안에는 두 가지가 다 들어가 있는 거에요. 현대차나 기아차나 한국GM을 봐도 한 쪽은 싸우더라도 한 쪽은 안 싸우고 있고, (정규직이) 해고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저희는 두 가지를 충족을 하고 있는 거라, 정리해고 문제도 있고 비정규직 문제도 있고. 그래서 알려내기가 더 쉽지 않겠나 (싶어요).

공장마다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시기마다 1사1조직이 논쟁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때로 함께 해야 될 부분은 동의가 되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독립성이 많이 필요한 부분도 있는 거고. 저희는 어쨌든 밀려나와 있잖아요. 공장 안이 아니고 밖이기 때문에 현대나 기아차와 약간은, 차이는 있을 수 있어요. 만약에 우리가 공장에서 쫓겨나지 않고 1사1조직이 과연 됐을까, 난 안됐을 거라고 보는 거에요. 불가능하다 이거. 인식은 똑같지 않겠냐, 현대차나. 다만 우리는 같이 쫓겨나서 싸워가는 목소리는 똑같잖아요. 다시 공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싸우는 거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내가 1사1조직을 했던 거에요.
만약 1사1조직이 안됐고 우리가 지부 소속이 아니고 독립성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면 소수지만 더 목소리를 낼 수 있었겠죠. 그런데 그것만에 국한되어선 안 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1사1조직 했어요). 다 좋다고 볼 수는 없다고 없을 것 같아요. 애매한 게 있어요. 기아보다는 낫죠. 다만 똑같은 형태라고 하면 힘들지 않았을까.
비정규직도 마찬가지이지만 정규직도 자기들 욕심을 버리고 하나의 조직으로 묶으려면 서로를 먼저 알고 가야돼지 않겠냐. 나는 정규직이니까 정규직만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비정규직이라면 어땠을까. 반대로 입장을 바꿔보면 인식이 조금 더 바뀌어 나가지 않을까. 실질적으로 라인 운영도 비정규직만 쫓겨나는 게 아니라 ‘왜 쫓겨나야 돼, 이거 우리가 같이 라인에서 일하면 소통해서 풀어갈 수 있는 방식이 있는데’. 내 개인의 생존권 문제가 아니라 같이 일하는 동료를 위해서, 동료를 생각하고 동료도 나를 생각한다고 하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아직까지 그게 인식이 안 바뀌어 있기 때문에 자기들 욕심 가져가기 위해서 서로 이해를 못하고. 얘기를 해보면 이해를 한다고 해요. 이해를 한다, 말뿐이잖아요. 실제로. 저희도 마찬가지라고 보는 거에요. 같이 투쟁을 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요. 같은 해고자이면서도 그런 모습은 있어요. 그건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아쉬운 부분도 많이 있는 거죠. 때로 함께 가기 위해서는 조직을 묶어야 되겠지만 그런 욕심과 그런 생각이 안 바뀐다면 저는 1사1조직 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거에요. 저도 후회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의견이 충돌하고 그럴 때 후회하시는 건가요?

그렇죠. 의견 충돌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도 정규직이라는 고정관념을 못 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어요.

지금은 지부와 함께 일정을 하는 것으로 결정 난 것이죠?

지금 상황은 하나의 목소리를 내서 갈 수밖에 없는 거라. 다만 하나로 가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저희는 공장에 들어가야 될 근거가 8,6합의 약속이잖아요. 8,6합의가 아니더라도 신규채용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비정규직이 빨리 들어가야 될 입장이고.
또한 불법파견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1심에서 승소한다면 요구안은 달라지죠. 비정규직으로는 안 들어가죠, 이제. 더 큰 투쟁을 하면서 더 크게 만들어가고. 안에 있는 지금 조합비를 내려고 하는 사람들, 망설이고 있는 사람들 다 조직해야죠. 조합원들도 많아질 거고, 조직 대상들이 공장 안에 있고 이후 투쟁도 여러 가지로 고민될 부분도 있는 것 같고.
(그런데) 이런 것도 있잖아요. (불법파견 문제가) 이길 수도 있지만 지면 어떻게 할 거냐, 그것도 우려가 있는 거잖아요. 지면 지는대로 또 계속 끝까지 재판을 가야될 것 같고 또 가면서 싸워봐야 되고. 한쪽으로는 그게 있고 한쪽으로는 하루빨리 공장으로 들어가야 된다(라는 게 있어요).

공장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서 8.6합의 이행이든 신규채용이든 형태는 상관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지금 우리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다들 몇 년씩 근무했던 사람들이에요. 짧게는 5년 많게는 10년 이상 근무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 경력을 갖고 있고. 저는 면접까지도 필요없다고 보는 거에요.
우리 업체가 설령 없다고 하더라도, 사내하청 업체는 거의 똑같은 형태이기 때문에 업체가 3개든 4개든 인원을 나눠서 넣든, 한 군데로 다 넣든 넣으면 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우리가 들어가서 일을 하면 되는 거고. 또한 노동조합 문제는 기본적으로 갖고 가야할 문제이고.
어떠한 형태를 떠나서라도 무조건 공장 안으로 넣어주라, 그것밖에 없어요. 우리가 지금 돈을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임금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공장 안에 들어가서 일을 하겠다 그걸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약속 지키면 되요. 지금이라도 비정규직 약속 지키겠다, 그러면 우리 들어가서 일하면 되는 거거든.

 

투쟁 속의 상처와 원동력


돌아가신 분들 중에 비정규직 동지도 계신가요.

 

 
첫 번째로 있어요. 첫 번째로 비정규직. 조합원이었어요, 우리. 조합원이었는데 희망퇴직을 썼었어요. 640명 있었어요, 저희(비정규직)가. 2008년도에 그 중 350명을 쫓아내려고 했던 거였어요. 350명 전환배치 정규직이 오니까. 처음에는 350명 다 안 나가겠다고 버텼어요. 버텼는데 회사에서 업체별로 압력을 가한 거죠. ‘야, 돈 몇 푼이라도 받고 나가라, 나중에 돈도 없다, 그냥 나갈래 지금 줄 때 받고 나갈래.’
그렇게 해서 300명이 희망퇴직을 써버린 거에요. 50명은 끝까지 버틴 거죠. 50명이 끝까지 가다가 (2009년) 5월 달에 파업들어가기 전에 많이 떨어져 나갔어요. 그때 남은 게 19명이었어요. 그 전에는 50명이 2008년 11월부터 2009년 4월까지 끈끈히 본관 앞에서 농성하고 본관 들어가서 항의 투쟁하고. 우리 투쟁한 것은 까페(http://cafe.daum.net/ssybj)에 다 나와 있어요. 그 때 희망퇴직 썼던 동지가 집이 강원도 쪽인 것 같아요. 거기 가서 (돌아가셨어요). 아프더라고요 많이. 안타깝죠. 저기 현수막 첫 번째에 있어요. 그 이후 쭉 정규직, 가족.

 

와락센터에서 비정규직 동지들도 모두 심리치료 받으시죠?

네 저희도 다 해요. 지금 싸우고 있는 동지들 4명 중에 저 빼고 3명은 심리치료를 다 받았고요.

동지는 왜 안 받으세요?

아직까지 멀쩡하니까.(웃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분명히 상처가 있으실 것 같아요.

제 집사람이 심리치료를 받았고 아이가 또 심리치료를 받고 있어요. 어른들 문제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상처를 받았어요. 저는 굴뚝에 86일 있으면서 아이들 둘 전부 공장에 들어와서 이렇게 보고 있는데 안타깝더라고요. 그래도 밑에 있는 동지들은 한동안 가족들을 만났잖아요, 공장 안에 있을 때에는. 나는 못 만났고. 그게 제일 큰 상처로 남아있는 것 같아요.
아이들도 잘 이겨내고는 있는데 나는 그런 부분이 보여요. 지금도 노동가요 나오면 애들이 그래요. ‘아빠 또 집회 하냐.’ 경찰차 지나가면 ‘아빠 잡으러 온 거 아니냐’. 최근엔 막 그랬어요. 경찰들이 막 잡아가는 꿈 꿨다고. 이런 게 아이들한테는 상처로 있더라. 시간이 가면 잊히겠지만 그 상처를 해결하려면 이 싸움이 끝나야죠. 하루속히.
정상적으로 (돌아)갈 순 없지만 다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가족에도 평화가 올 거고, 아이들도 나와 같이 있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변화가 있지 않을까. 이제는 공장으로 들어가야 되요. 비정규직 동지들 너무 오래 싸웠어요, 1300일이 넘어가고 있어요. 거의 3년 반이 넘어가고 4년을 바라보는데. 정상적인 생활이 된 적이 없어요.
저희보다 더 오래 투쟁하는 동지들도 있지만 내가 이런 얘기하면 그 동지들한테 미안할 수 있죠. 하지만 똑같다고 보는 거에요. 누가 길게 싸우고 싶겠어요.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어요. 여기(현수막)에 보면 문구에도 해고된 노동자들은 1년 휴직 이후 복직시킨다고 약속했잖아요. 우리는 1년이 아니에요. 2009년 8월6일 이후에 딱 한 달 있다가 복귀였어요. 저런 거 보면 좀 아프잖아요. 우리는 한 달이었는데 왜 1년이냐. 차이는 좀 있어요. 근데 저런 걸 내가 또 따로 정규직 동지들한테 말을 하기가 그렇잖아요. 이런 문구 보면 아쉬움이 있어요. 근데 이걸 지부에서 만든 게 아니라 주변 동지들이 만든 건데 그만큼 우리 문제를 알려나가지 못했다는 아쉬움. 제가 그래도 인터뷰도 하고 많이 했는데 안 보나봐.(웃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쌍용차 안에 정규직 해고자도 있고 비정규직 해고자도 있고 무급자도 있고 징계해고자도 있고 여러 분류가 있어요. 있지만 다 같이 동시에 해결돼서 똑같이 손잡고 공장에 들어갔으면 제일 큰 희망이고요. 그게 안 되더라도 최소한 신규채용을 하고 있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회사가 입장을 내야 한다, 신규채용하고 있는 비정규직에 대해서, 사무직도 신규채용하고 있지만 비정규직도 계속 수시로 신규채용하고 있는 이 문제는 자기들이 약속했던 노사가 도장을 찍었던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입장을 내놓고 지금이라도 비정규직 복직시켜야된다. 그걸 위해서 우리가 소수 인원이 싸워나가고 있지만 앞으로 이 투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투쟁을 마다하지 않고 어떠한 연대를 마다하지 않고 전국에 있는 동지들한데 쌍용차 안에는 비정규직 동지들도 분명히 있다는 존재감을 더욱 더 알려나가야 될 것 같아요. 또 하나 불법파견 정규직화 소송 관련해서도 명확하게 현대기아차가 중심이지만 쌍용차에도 조직해서 함께 싸워나갈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은 우리가 공장에 들어가는 복귀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싸워나가는 과정에서 비중을 더 크게 잡고 있지만 재판의 상황에 따라서 요구안은 바뀐다. 그 이전까지는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고 가려고 하고 있어요. 그리고 정부 상대로 많은 동지들이 서울에 올라간 상태이지만 지역에도 나름대로 지역시민들과 중재했던 사람들 다 끄집어 내야할 것 같고요. 또한 이 공장이 평택에 있기 때문에 공장 상대로 이 싸움을 계속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서울과 이 지역과 연동해서 계속 알려내고. 반드시
공장으로 들어가야죠. 하루속히 공장에 들어가야 될 것 같고. 들어가는 모습을 동지들한테 보여주는 게 제일 큰 희망이지 않나. 저도 그런 희망을 갖고 있는 거고. 현재 상황은 다 어려운 국면이에요. 개인적으로도 어렵고 여러 가지로 어렵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보려고 하고 있어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보려고 조금만 더.......

그 힘의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 건가요?

(천막과 주변 동지들을 가리키며) 이게 힘이지 않을까요. 이 주변의 동지들이 찾아오고 지역 시민들이 그냥 지나가지 않고 모금도 해주시고 서명도 해주시고 쌍용차 관련해서 물어봐주시고 이게 난 힘이라고 봐요.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나를 지켜보고 있고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구나, 그리고 또한 나와 함께 가는 내 가족이 있잖아요. 내 가정과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그 힘으로 버텨나가야 되지 않겠나.

 

[편집자주] 2009년 77일 동안 벌어진 쌍용자동차 공장점거파업 이후 8․6 노사합의가 도출되었다. 2012년 2월11일부로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1,000일을 맞았지만 합의는 이행되지 않았고 또다시 조합원이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대한문과 전국에 분향소가 설치되었고 먹튀자본과 정부관료들의 돈놀음 속에 희생당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문제가 사회적인 다시 제기되기 시작했다. 5월19일 22번째 죽음을 맞은 조합원의 49제를 지나 22일부로 투쟁 3주년을 맞은 쌍용자동차지부는 또다시 투쟁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사노신은 6월10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되는 '쌍용자동차 해고자 전원복직을 위한 범국민행동 주간'을 맞이하여 쌍용자동차의 정비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 생산직 노동자였던 이들의 기획인터뷰 [어떻게 지내세요?]를 차례로 연재할 예정이다. 함께 투쟁하고 있지만 각기 다른 상황과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지회장

49제 이후 새롭게 5대요구안을 정비하고 평택역과 서울 대한문 두 개의 거점에서 대정부투쟁을 벌이고 있다. 평택역에 새롭게 천막을 친 5월24일 비정규직지회장 서맹섭 동지를 만나 그 간의 투쟁 경과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쌍용차 비정규직 문제를 들어보았다. 분량 관계상 인터뷰를 2개의 기사로 나누었다. 첫번째 기사에서는 49제 이후의 투쟁계획과 이전 투쟁의 경과에 대해서, 두번째 기사는 쌍용차 해고차 내에 비정규직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1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anosin.jinbo.net/Publish/magazine.php?ex=article&b_fn=RD&gotopage=1&pkno=712

 

쌍용차에 비정규직도 있어요!


현재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은 어느 정도 되나요?

2009년도에 (공장점거)파업할 때 19명이 싸웠어요. 지금도 19명이 있는데 다만 3년이란 시간이 지나니까 다들 힘들어해요. 제일 큰 문제가 생계문제죠. 나머지 조합원들은 생계를, 처음에 한 1년 반 정도는 파업이 끝나고도 같이 싸웠어요. 도저히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생계투쟁으로 나가시라(해서), 현재는 임원간부 4명 중심으로 해서 싸우고 있어요. 저희가 투쟁을 만들어나가면서 조합원들과 소통을 하고 (있어요), 공장에 들어가게 되면 우선적으로 같이 조합원들과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4명 중에 서울에 2명이 올라가 있어요. 한윤수 사무장, 유제선 조직부장. 우리 조직부장이 얘기 잘 해요. 아주 선수에요 마이크 잡으면 한 시간 두 시간씩 지 혼자 밤새 떠들어요. 회사 정문에 가면 가처분이 떨어져 있어요. 마이크 잡고 얘기하지 말라고. 하도 회사 관리자들 깠거든.(웃음) 까는 얘기하고 열 받으면 욕도 하고 해서 명예훼손으로 (가처분이 떨어졌어요). *1편에서 이어집니다.

비정규직은 2009년 이전부터 잘려왔는데 쌍용차 문제 하면 비정규직 문제는 잘 부각되지 않는 것 같아요.

 

평택역 농성장 앞 선전전. 많은 시민들이 모금과 서명을 하고 간다.
정규직이 인원이 많잖아요. 비정규직은 소수가 남았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투쟁을 해왔던 거고. 어쨌든 공장에 다시 들어가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싸움을 이어왔던 거에요. 우리는 작년 10월24일부터 텐트농성을 시작했지만 그 전에 8월 달부터 1인시위를 시작했었어요. 지역시민단체와 하루 10시간, 릴레이 10시간 하면서 그 때부터 선전포고를 했던 거고. 10월 달부터 본격적으로 (농성) 들어가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해서 싸움을 계속 알려냈어요.
그렇게 가다가 12월 달에 지부가 희망텐트촌을 들어가면서 큰 싸움을 걸면서 가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우리의 목소리는 수면 아래로 내려앉았죠. 저희는 우려를 했었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싸워가는 과정을 한 번이라도 우리 농성장에 왔던 동지들은 다 알아요.
전체적으로 큰 이슈화는 못시켰지만 묻혀가면서도 우리 목소리를 계속 냈다. 다만 아쉬운 건 좀 많죠. 내가 우리 조합원 50명만 남아있어도 엄청난 할 수 있는 게 많잖아요. 소수가 두 농성장을 가지고 갈려고 하다보니까 어렵더라고요. 그 전에 우리 조합원들이 (투쟁에) 나왔을 때는 연대도 가고 그랬어요. 투쟁하는 사업장에 계속 가고 그랬는데. 농성장이 두 군데를 나눠서 하니까 어딜 가지도 못하고 뭐. 상당히 어렵더라고요.
그렇더라도 지금도 우리가 계속 목소리를 내고 있고 쌍용차에는 정규직도 있지만 소수의 비정규직들이 아직까지 질기게 싸우고 있다(는 거에요). 정말 6개월이라는 농성을 해본 적이 없어요. 지역에서도 한 단위가 없어요. 지부도 마찬가지에요. 저희는 했어요, 인원에 굴하지 않고.

 

지부와 투쟁계획이나 의견 조율은 어떻게 하시나요?

지부가 토론회나 회의를 하면 저희가 들어가요. 선도투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전체회의면 저희가 들어가요. 전체회의가 아니더라도 지부 임실장 회의에는 제가 들어가요. 제가 지회장이니까, 정비지회장도 들어오고 그래서 같이 소통하고 같이 할 수 있는 부분은 같이 해야하니까.
또 전술적으로 이건 비정규직 단위에서 해야 된다, 비정규직지회가 투쟁을 진행하면서 지부는 엄호해주고 지원해주고 역할을 하겠다, 그런 부분이 또 필요하잖아요. 그리고 지부도 지부 나름대로 투쟁을 해야 하니까. 우리의 싸움에 다 붙을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런 면은 조직적으로 열어갔던 거고 지금도 그런 부분이 있어요.
현재는 원유철 부분이 있지만 5대 요구안을 가지고 같이 힘을 모아보자, 대선 국면이 다가오기 때문에 6월 (국회)개원(이 있고), 9월 이후로 넘어가면 (대선 때문에) 우리 목소리가 묻힐 수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어쨌든 우리 싸움 만들어내 보자, 그래서 지금은 함께 가야된다(고 결정했어요).

앞서 말씀하셨던 것(첫번째 인터뷰 기사 참조)처럼 해고 사유가 달랐기 때문에 전술도 다르게 갔다는 건가요?

그렇죠. 지부가 열어준 거죠. 옆에서 지원해주고 함께 할 수 있는 부분 해주겠다, 다만 이 부분은 전술적으로 비정규직지회애서 끌고 가라. 지부는 다 포괄해서 큰 걸로 싸워나가겠다(고 한 거죠).
이게(역량이) 한정되어 있는 거잖아요. 우리는 86 중재했던 사람들, 지역 국회의원 상대로 싸워나가는 것은 우리 힘으로도 가능한 투쟁이었거든요. 그런데 지부가 이걸 껴안고 지역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싸우면 너무 고립되잖아요. 쌍용차 문제를 전국적으로 싸워나가야 되는데. 그런 부분이 좀 있어서 그런 부분은 약간 전술적으로 열어준 거고.

조직편제상 비정규직지회는 지부에 속해있는 건가요?

저희는 지부에 속해 있어요. 쌍용차지부 비정규직지회에요. 이걸(1사1조직) 언제 했냐면 원래는 우리도 현대차와 같이 독립적으로 (노조활동)했는데 2009년 파업이 끝나고 나서 2010년 (지부) 3기 지도부 선출하면서 제가 총회에 부쳐버렸어요. 원래는 대대안건인데 대대가 아니라 정규직 동지들한테 이 안건을 던지고 싶다, 그래서 2010년 3기 지도부 뽑을 때 1사1조직 안을 던졌어요. 그 때 성사가 된 거에요. 거의 96%로 찬성을 찍어서. 그 때 통합이 된 거에요. 그게 안됐으면 독립성은 있는데, 지금은 같이 움직이죠.

정리해고 사태가 일어나기 이전의 쌍용차지부는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를 잘 안했던 걸로 기억해요.

하도 억울해서 조직해서 (제가) 노동조합 띄웠던 당사자인데요. 2008년도 10월에 노동조합 띄웠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 때부터 싸움을 했던 거였고 일부 비정규직을 알고 있는 활동가 외에는 (정규직은) 관심이 없었어요.
그 때 당시에 정규직이 내 자리에 들어오는 전환배치였기 때문에 서로의 감정이 좋지 않았어요. 왜냐면 내가 나가면 이 사람들 내 자리에 들어와서 일하고 내가 안 나가면 이 사람들 내 자리에 못 들어오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공장 안에서 집회하거나 출투할 때도 ‘너 나가면 내가 사는데 너희들 나가면 우리 사는데 왜 시끄럽게 하냐’ 그런 얘기도 많이 들었고.
상황이 낙관적은 아니었어요. 그 해 12월 달에 2기 지도부, 한상균 전 지부장이 출마해서 당선이 됐는데 그 때부터 (정규직) 집행부에 우리 비정규직을 도와줬던 활동가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때부터 상황이 약간씩 바뀌어 나간 거에요. 조직적으로 생각이 완전히 바뀌진 않았지만 조금씩 바뀌어 가면서 2009년 파업에 들어가고, 제가 굴뚝 농성에 들어가면서 많이 바뀌었죠.
공장(점거파업)에 19명 비정규직 조합원들이 들어가서 함께 싸우면서 몸 부딪히고 똑같이 앞에 나가서 싸우고 그러면서 좀 바뀌어 나갔죠. 한상균 전 지부장이 당선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변화하면서 그 다음에 파업으로 인해, 그리고 1사1조직 편제를 하면서까지 이제 지금은 많이, 완전히 바뀌었죠. 지금은 동료이고, 정리해고 철회, 비정규직 철폐라고 외치잖아요.
이제 쌍용차 안에는 두 가지가 다 들어가 있는 거에요. 현대차나 기아차나 한국GM을 봐도 한 쪽은 싸우더라도 한 쪽은 안 싸우고 있고, (정규직이) 해고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저희는 두 가지를 충족을 하고 있는 거라, 정리해고 문제도 있고 비정규직 문제도 있고. 그래서 알려내기가 더 쉽지 않겠나 (싶어요).

공장마다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시기마다 1사1조직이 논쟁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때로 함께 해야 될 부분은 동의가 되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독립성이 많이 필요한 부분도 있는 거고. 저희는 어쨌든 밀려나와 있잖아요. 공장 안이 아니고 밖이기 때문에 현대나 기아차와 약간은, 차이는 있을 수 있어요. 만약에 우리가 공장에서 쫓겨나지 않고 1사1조직이 과연 됐을까, 난 안됐을 거라고 보는 거에요. 불가능하다 이거. 인식은 똑같지 않겠냐, 현대차나. 다만 우리는 같이 쫓겨나서 싸워가는 목소리는 똑같잖아요. 다시 공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싸우는 거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내가 1사1조직을 했던 거에요.
만약 1사1조직이 안됐고 우리가 지부 소속이 아니고 독립성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면 소수지만 더 목소리를 낼 수 있었겠죠. 그런데 그것만에 국한되어선 안 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1사1조직 했어요). 다 좋다고 볼 수는 없다고 없을 것 같아요. 애매한 게 있어요. 기아보다는 낫죠. 다만 똑같은 형태라고 하면 힘들지 않았을까.
비정규직도 마찬가지이지만 정규직도 자기들 욕심을 버리고 하나의 조직으로 묶으려면 서로를 먼저 알고 가야돼지 않겠냐. 나는 정규직이니까 정규직만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비정규직이라면 어땠을까. 반대로 입장을 바꿔보면 인식이 조금 더 바뀌어 나가지 않을까. 실질적으로 라인 운영도 비정규직만 쫓겨나는 게 아니라 ‘왜 쫓겨나야 돼, 이거 우리가 같이 라인에서 일하면 소통해서 풀어갈 수 있는 방식이 있는데’. 내 개인의 생존권 문제가 아니라 같이 일하는 동료를 위해서, 동료를 생각하고 동료도 나를 생각한다고 하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아직까지 그게 인식이 안 바뀌어 있기 때문에 자기들 욕심 가져가기 위해서 서로 이해를 못하고. 얘기를 해보면 이해를 한다고 해요. 이해를 한다, 말뿐이잖아요. 실제로. 저희도 마찬가지라고 보는 거에요. 같이 투쟁을 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요. 같은 해고자이면서도 그런 모습은 있어요. 그건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아쉬운 부분도 많이 있는 거죠. 때로 함께 가기 위해서는 조직을 묶어야 되겠지만 그런 욕심과 그런 생각이 안 바뀐다면 저는 1사1조직 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거에요. 저도 후회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의견이 충돌하고 그럴 때 후회하시는 건가요?

그렇죠. 의견 충돌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도 정규직이라는 고정관념을 못 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어요.

지금은 지부와 함께 일정을 하는 것으로 결정 난 것이죠?

지금 상황은 하나의 목소리를 내서 갈 수밖에 없는 거라. 다만 하나로 가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저희는 공장에 들어가야 될 근거가 8,6합의 약속이잖아요. 8,6합의가 아니더라도 신규채용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비정규직이 빨리 들어가야 될 입장이고.
또한 불법파견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1심에서 승소한다면 요구안은 달라지죠. 비정규직으로는 안 들어가죠, 이제. 더 큰 투쟁을 하면서 더 크게 만들어가고. 안에 있는 지금 조합비를 내려고 하는 사람들, 망설이고 있는 사람들 다 조직해야죠. 조합원들도 많아질 거고, 조직 대상들이 공장 안에 있고 이후 투쟁도 여러 가지로 고민될 부분도 있는 것 같고.
(그런데) 이런 것도 있잖아요. (불법파견 문제가) 이길 수도 있지만 지면 어떻게 할 거냐, 그것도 우려가 있는 거잖아요. 지면 지는대로 또 계속 끝까지 재판을 가야될 것 같고 또 가면서 싸워봐야 되고. 한쪽으로는 그게 있고 한쪽으로는 하루빨리 공장으로 들어가야 된다(라는 게 있어요).

공장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서 8.6합의 이행이든 신규채용이든 형태는 상관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지금 우리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다들 몇 년씩 근무했던 사람들이에요. 짧게는 5년 많게는 10년 이상 근무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 경력을 갖고 있고. 저는 면접까지도 필요없다고 보는 거에요.
우리 업체가 설령 없다고 하더라도, 사내하청 업체는 거의 똑같은 형태이기 때문에 업체가 3개든 4개든 인원을 나눠서 넣든, 한 군데로 다 넣든 넣으면 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우리가 들어가서 일을 하면 되는 거고. 또한 노동조합 문제는 기본적으로 갖고 가야할 문제이고.
어떠한 형태를 떠나서라도 무조건 공장 안으로 넣어주라, 그것밖에 없어요. 우리가 지금 돈을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임금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공장 안에 들어가서 일을 하겠다 그걸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약속 지키면 되요. 지금이라도 비정규직 약속 지키겠다, 그러면 우리 들어가서 일하면 되는 거거든.

 

투쟁 속의 상처와 원동력


돌아가신 분들 중에 비정규직 동지도 계신가요.

 

 
첫 번째로 있어요. 첫 번째로 비정규직. 조합원이었어요, 우리. 조합원이었는데 희망퇴직을 썼었어요. 640명 있었어요, 저희(비정규직)가. 2008년도에 그 중 350명을 쫓아내려고 했던 거였어요. 350명 전환배치 정규직이 오니까. 처음에는 350명 다 안 나가겠다고 버텼어요. 버텼는데 회사에서 업체별로 압력을 가한 거죠. ‘야, 돈 몇 푼이라도 받고 나가라, 나중에 돈도 없다, 그냥 나갈래 지금 줄 때 받고 나갈래.’
그렇게 해서 300명이 희망퇴직을 써버린 거에요. 50명은 끝까지 버틴 거죠. 50명이 끝까지 가다가 (2009년) 5월 달에 파업들어가기 전에 많이 떨어져 나갔어요. 그때 남은 게 19명이었어요. 그 전에는 50명이 2008년 11월부터 2009년 4월까지 끈끈히 본관 앞에서 농성하고 본관 들어가서 항의 투쟁하고. 우리 투쟁한 것은 까페(http://cafe.daum.net/ssybj)에 다 나와 있어요. 그 때 희망퇴직 썼던 동지가 집이 강원도 쪽인 것 같아요. 거기 가서 (돌아가셨어요). 아프더라고요 많이. 안타깝죠. 저기 현수막 첫 번째에 있어요. 그 이후 쭉 정규직, 가족.

 

와락센터에서 비정규직 동지들도 모두 심리치료 받으시죠?

네 저희도 다 해요. 지금 싸우고 있는 동지들 4명 중에 저 빼고 3명은 심리치료를 다 받았고요.

동지는 왜 안 받으세요?

아직까지 멀쩡하니까.(웃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분명히 상처가 있으실 것 같아요.

제 집사람이 심리치료를 받았고 아이가 또 심리치료를 받고 있어요. 어른들 문제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상처를 받았어요. 저는 굴뚝에 86일 있으면서 아이들 둘 전부 공장에 들어와서 이렇게 보고 있는데 안타깝더라고요. 그래도 밑에 있는 동지들은 한동안 가족들을 만났잖아요, 공장 안에 있을 때에는. 나는 못 만났고. 그게 제일 큰 상처로 남아있는 것 같아요.
아이들도 잘 이겨내고는 있는데 나는 그런 부분이 보여요. 지금도 노동가요 나오면 애들이 그래요. ‘아빠 또 집회 하냐.’ 경찰차 지나가면 ‘아빠 잡으러 온 거 아니냐’. 최근엔 막 그랬어요. 경찰들이 막 잡아가는 꿈 꿨다고. 이런 게 아이들한테는 상처로 있더라. 시간이 가면 잊히겠지만 그 상처를 해결하려면 이 싸움이 끝나야죠. 하루속히.
정상적으로 (돌아)갈 순 없지만 다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가족에도 평화가 올 거고, 아이들도 나와 같이 있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변화가 있지 않을까. 이제는 공장으로 들어가야 되요. 비정규직 동지들 너무 오래 싸웠어요, 1300일이 넘어가고 있어요. 거의 3년 반이 넘어가고 4년을 바라보는데. 정상적인 생활이 된 적이 없어요.
저희보다 더 오래 투쟁하는 동지들도 있지만 내가 이런 얘기하면 그 동지들한테 미안할 수 있죠. 하지만 똑같다고 보는 거에요. 누가 길게 싸우고 싶겠어요.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어요. 여기(현수막)에 보면 문구에도 해고된 노동자들은 1년 휴직 이후 복직시킨다고 약속했잖아요. 우리는 1년이 아니에요. 2009년 8월6일 이후에 딱 한 달 있다가 복귀였어요. 저런 거 보면 좀 아프잖아요. 우리는 한 달이었는데 왜 1년이냐. 차이는 좀 있어요. 근데 저런 걸 내가 또 따로 정규직 동지들한테 말을 하기가 그렇잖아요. 이런 문구 보면 아쉬움이 있어요. 근데 이걸 지부에서 만든 게 아니라 주변 동지들이 만든 건데 그만큼 우리 문제를 알려나가지 못했다는 아쉬움. 제가 그래도 인터뷰도 하고 많이 했는데 안 보나봐.(웃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쌍용차 안에 정규직 해고자도 있고 비정규직 해고자도 있고 무급자도 있고 징계해고자도 있고 여러 분류가 있어요. 있지만 다 같이 동시에 해결돼서 똑같이 손잡고 공장에 들어갔으면 제일 큰 희망이고요. 그게 안 되더라도 최소한 신규채용을 하고 있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회사가 입장을 내야 한다, 신규채용하고 있는 비정규직에 대해서, 사무직도 신규채용하고 있지만 비정규직도 계속 수시로 신규채용하고 있는 이 문제는 자기들이 약속했던 노사가 도장을 찍었던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입장을 내놓고 지금이라도 비정규직 복직시켜야된다. 그걸 위해서 우리가 소수 인원이 싸워나가고 있지만 앞으로 이 투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투쟁을 마다하지 않고 어떠한 연대를 마다하지 않고 전국에 있는 동지들한데 쌍용차 안에는 비정규직 동지들도 분명히 있다는 존재감을 더욱 더 알려나가야 될 것 같아요. 또 하나 불법파견 정규직화 소송 관련해서도 명확하게 현대기아차가 중심이지만 쌍용차에도 조직해서 함께 싸워나갈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은 우리가 공장에 들어가는 복귀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싸워나가는 과정에서 비중을 더 크게 잡고 있지만 재판의 상황에 따라서 요구안은 바뀐다. 그 이전까지는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고 가려고 하고 있어요. 그리고 정부 상대로 많은 동지들이 서울에 올라간 상태이지만 지역에도 나름대로 지역시민들과 중재했던 사람들 다 끄집어 내야할 것 같고요. 또한 이 공장이 평택에 있기 때문에 공장 상대로 이 싸움을 계속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서울과 이 지역과 연동해서 계속 알려내고. 반드시
공장으로 들어가야죠. 하루속히 공장에 들어가야 될 것 같고. 들어가는 모습을 동지들한테 보여주는 게 제일 큰 희망이지 않나. 저도 그런 희망을 갖고 있는 거고. 현재 상황은 다 어려운 국면이에요. 개인적으로도 어렵고 여러 가지로 어렵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보려고 하고 있어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보려고 조금만 더.......

그 힘의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 건가요?

(천막과 주변 동지들을 가리키며) 이게 힘이지 않을까요. 이 주변의 동지들이 찾아오고 지역 시민들이 그냥 지나가지 않고 모금도 해주시고 서명도 해주시고 쌍용차 관련해서 물어봐주시고 이게 난 힘이라고 봐요.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나를 지켜보고 있고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구나, 그리고 또한 나와 함께 가는 내 가족이 있잖아요. 내 가정과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그 힘으로 버텨나가야 되지 않겠나.

 

[편집자주] 2009년 77일 동안 벌어진 쌍용자동차 공장점거파업 이후 8․6 노사합의가 도출되었다. 2012년 2월11일부로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1,000일을 맞았지만 합의는 이행되지 않았고 또다시 조합원이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대한문과 전국에 분향소가 설치되었고 먹튀자본과 정부관료들의 돈놀음 속에 희생당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문제가 사회적인 다시 제기되기 시작했다. 5월19일 22번째 죽음을 맞은 조합원의 49제를 지나 22일부로 투쟁 3주년을 맞은 쌍용자동차지부는 또다시 투쟁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사노신은 6월10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되는 '쌍용자동차 해고자 전원복직을 위한 범국민행동 주간'을 맞이하여 쌍용자동차의 정비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 생산직 노동자였던 이들의 기획인터뷰 [어떻게 지내세요?]를 차례로 연재할 예정이다. 함께 투쟁하고 있지만 각기 다른 상황과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지회장

49제 이후 새롭게 5대요구안을 정비하고 평택역과 서울 대한문 두 개의 거점에서 대정부투쟁을 벌이고 있다. 평택역에 새롭게 천막을 친 5월24일 비정규직지회장 서맹섭 동지를 만나 그 간의 투쟁 경과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쌍용차 비정규직 문제를 들어보았다. 분량 관계상 인터뷰를 2개의 기사로 나누었다. 첫번째 기사에서는 49제 이후의 투쟁계획과 이전 투쟁의 경과에 대해서, 두번째 기사는 쌍용차 해고차 내에 비정규직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1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anosin.jinbo.net/Publish/magazine.php?ex=article&b_fn=RD&gotopage=1&pkno=712

 

쌍용차에 비정규직도 있어요!


현재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은 어느 정도 되나요?

2009년도에 (공장점거)파업할 때 19명이 싸웠어요. 지금도 19명이 있는데 다만 3년이란 시간이 지나니까 다들 힘들어해요. 제일 큰 문제가 생계문제죠. 나머지 조합원들은 생계를, 처음에 한 1년 반 정도는 파업이 끝나고도 같이 싸웠어요. 도저히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생계투쟁으로 나가시라(해서), 현재는 임원간부 4명 중심으로 해서 싸우고 있어요. 저희가 투쟁을 만들어나가면서 조합원들과 소통을 하고 (있어요), 공장에 들어가게 되면 우선적으로 같이 조합원들과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4명 중에 서울에 2명이 올라가 있어요. 한윤수 사무장, 유제선 조직부장. 우리 조직부장이 얘기 잘 해요. 아주 선수에요 마이크 잡으면 한 시간 두 시간씩 지 혼자 밤새 떠들어요. 회사 정문에 가면 가처분이 떨어져 있어요. 마이크 잡고 얘기하지 말라고. 하도 회사 관리자들 깠거든.(웃음) 까는 얘기하고 열 받으면 욕도 하고 해서 명예훼손으로 (가처분이 떨어졌어요). *1편에서 이어집니다.

비정규직은 2009년 이전부터 잘려왔는데 쌍용차 문제 하면 비정규직 문제는 잘 부각되지 않는 것 같아요.

 

평택역 농성장 앞 선전전. 많은 시민들이 모금과 서명을 하고 간다.
정규직이 인원이 많잖아요. 비정규직은 소수가 남았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투쟁을 해왔던 거고. 어쨌든 공장에 다시 들어가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싸움을 이어왔던 거에요. 우리는 작년 10월24일부터 텐트농성을 시작했지만 그 전에 8월 달부터 1인시위를 시작했었어요. 지역시민단체와 하루 10시간, 릴레이 10시간 하면서 그 때부터 선전포고를 했던 거고. 10월 달부터 본격적으로 (농성) 들어가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해서 싸움을 계속 알려냈어요.
그렇게 가다가 12월 달에 지부가 희망텐트촌을 들어가면서 큰 싸움을 걸면서 가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우리의 목소리는 수면 아래로 내려앉았죠. 저희는 우려를 했었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싸워가는 과정을 한 번이라도 우리 농성장에 왔던 동지들은 다 알아요.
전체적으로 큰 이슈화는 못시켰지만 묻혀가면서도 우리 목소리를 계속 냈다. 다만 아쉬운 건 좀 많죠. 내가 우리 조합원 50명만 남아있어도 엄청난 할 수 있는 게 많잖아요. 소수가 두 농성장을 가지고 갈려고 하다보니까 어렵더라고요. 그 전에 우리 조합원들이 (투쟁에) 나왔을 때는 연대도 가고 그랬어요. 투쟁하는 사업장에 계속 가고 그랬는데. 농성장이 두 군데를 나눠서 하니까 어딜 가지도 못하고 뭐. 상당히 어렵더라고요.
그렇더라도 지금도 우리가 계속 목소리를 내고 있고 쌍용차에는 정규직도 있지만 소수의 비정규직들이 아직까지 질기게 싸우고 있다(는 거에요). 정말 6개월이라는 농성을 해본 적이 없어요. 지역에서도 한 단위가 없어요. 지부도 마찬가지에요. 저희는 했어요, 인원에 굴하지 않고.

 

지부와 투쟁계획이나 의견 조율은 어떻게 하시나요?

지부가 토론회나 회의를 하면 저희가 들어가요. 선도투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전체회의면 저희가 들어가요. 전체회의가 아니더라도 지부 임실장 회의에는 제가 들어가요. 제가 지회장이니까, 정비지회장도 들어오고 그래서 같이 소통하고 같이 할 수 있는 부분은 같이 해야하니까.
또 전술적으로 이건 비정규직 단위에서 해야 된다, 비정규직지회가 투쟁을 진행하면서 지부는 엄호해주고 지원해주고 역할을 하겠다, 그런 부분이 또 필요하잖아요. 그리고 지부도 지부 나름대로 투쟁을 해야 하니까. 우리의 싸움에 다 붙을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런 면은 조직적으로 열어갔던 거고 지금도 그런 부분이 있어요.
현재는 원유철 부분이 있지만 5대 요구안을 가지고 같이 힘을 모아보자, 대선 국면이 다가오기 때문에 6월 (국회)개원(이 있고), 9월 이후로 넘어가면 (대선 때문에) 우리 목소리가 묻힐 수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어쨌든 우리 싸움 만들어내 보자, 그래서 지금은 함께 가야된다(고 결정했어요).

앞서 말씀하셨던 것(첫번째 인터뷰 기사 참조)처럼 해고 사유가 달랐기 때문에 전술도 다르게 갔다는 건가요?

그렇죠. 지부가 열어준 거죠. 옆에서 지원해주고 함께 할 수 있는 부분 해주겠다, 다만 이 부분은 전술적으로 비정규직지회애서 끌고 가라. 지부는 다 포괄해서 큰 걸로 싸워나가겠다(고 한 거죠).
이게(역량이) 한정되어 있는 거잖아요. 우리는 86 중재했던 사람들, 지역 국회의원 상대로 싸워나가는 것은 우리 힘으로도 가능한 투쟁이었거든요. 그런데 지부가 이걸 껴안고 지역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싸우면 너무 고립되잖아요. 쌍용차 문제를 전국적으로 싸워나가야 되는데. 그런 부분이 좀 있어서 그런 부분은 약간 전술적으로 열어준 거고.

조직편제상 비정규직지회는 지부에 속해있는 건가요?

저희는 지부에 속해 있어요. 쌍용차지부 비정규직지회에요. 이걸(1사1조직) 언제 했냐면 원래는 우리도 현대차와 같이 독립적으로 (노조활동)했는데 2009년 파업이 끝나고 나서 2010년 (지부) 3기 지도부 선출하면서 제가 총회에 부쳐버렸어요. 원래는 대대안건인데 대대가 아니라 정규직 동지들한테 이 안건을 던지고 싶다, 그래서 2010년 3기 지도부 뽑을 때 1사1조직 안을 던졌어요. 그 때 성사가 된 거에요. 거의 96%로 찬성을 찍어서. 그 때 통합이 된 거에요. 그게 안됐으면 독립성은 있는데, 지금은 같이 움직이죠.

정리해고 사태가 일어나기 이전의 쌍용차지부는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를 잘 안했던 걸로 기억해요.

하도 억울해서 조직해서 (제가) 노동조합 띄웠던 당사자인데요. 2008년도 10월에 노동조합 띄웠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 때부터 싸움을 했던 거였고 일부 비정규직을 알고 있는 활동가 외에는 (정규직은) 관심이 없었어요.
그 때 당시에 정규직이 내 자리에 들어오는 전환배치였기 때문에 서로의 감정이 좋지 않았어요. 왜냐면 내가 나가면 이 사람들 내 자리에 들어와서 일하고 내가 안 나가면 이 사람들 내 자리에 못 들어오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공장 안에서 집회하거나 출투할 때도 ‘너 나가면 내가 사는데 너희들 나가면 우리 사는데 왜 시끄럽게 하냐’ 그런 얘기도 많이 들었고.
상황이 낙관적은 아니었어요. 그 해 12월 달에 2기 지도부, 한상균 전 지부장이 출마해서 당선이 됐는데 그 때부터 (정규직) 집행부에 우리 비정규직을 도와줬던 활동가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때부터 상황이 약간씩 바뀌어 나간 거에요. 조직적으로 생각이 완전히 바뀌진 않았지만 조금씩 바뀌어 가면서 2009년 파업에 들어가고, 제가 굴뚝 농성에 들어가면서 많이 바뀌었죠.
공장(점거파업)에 19명 비정규직 조합원들이 들어가서 함께 싸우면서 몸 부딪히고 똑같이 앞에 나가서 싸우고 그러면서 좀 바뀌어 나갔죠. 한상균 전 지부장이 당선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변화하면서 그 다음에 파업으로 인해, 그리고 1사1조직 편제를 하면서까지 이제 지금은 많이, 완전히 바뀌었죠. 지금은 동료이고, 정리해고 철회, 비정규직 철폐라고 외치잖아요.
이제 쌍용차 안에는 두 가지가 다 들어가 있는 거에요. 현대차나 기아차나 한국GM을 봐도 한 쪽은 싸우더라도 한 쪽은 안 싸우고 있고, (정규직이) 해고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저희는 두 가지를 충족을 하고 있는 거라, 정리해고 문제도 있고 비정규직 문제도 있고. 그래서 알려내기가 더 쉽지 않겠나 (싶어요).

공장마다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시기마다 1사1조직이 논쟁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때로 함께 해야 될 부분은 동의가 되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독립성이 많이 필요한 부분도 있는 거고. 저희는 어쨌든 밀려나와 있잖아요. 공장 안이 아니고 밖이기 때문에 현대나 기아차와 약간은, 차이는 있을 수 있어요. 만약에 우리가 공장에서 쫓겨나지 않고 1사1조직이 과연 됐을까, 난 안됐을 거라고 보는 거에요. 불가능하다 이거. 인식은 똑같지 않겠냐, 현대차나. 다만 우리는 같이 쫓겨나서 싸워가는 목소리는 똑같잖아요. 다시 공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싸우는 거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내가 1사1조직을 했던 거에요.
만약 1사1조직이 안됐고 우리가 지부 소속이 아니고 독립성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면 소수지만 더 목소리를 낼 수 있었겠죠. 그런데 그것만에 국한되어선 안 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1사1조직 했어요). 다 좋다고 볼 수는 없다고 없을 것 같아요. 애매한 게 있어요. 기아보다는 낫죠. 다만 똑같은 형태라고 하면 힘들지 않았을까.
비정규직도 마찬가지이지만 정규직도 자기들 욕심을 버리고 하나의 조직으로 묶으려면 서로를 먼저 알고 가야돼지 않겠냐. 나는 정규직이니까 정규직만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비정규직이라면 어땠을까. 반대로 입장을 바꿔보면 인식이 조금 더 바뀌어 나가지 않을까. 실질적으로 라인 운영도 비정규직만 쫓겨나는 게 아니라 ‘왜 쫓겨나야 돼, 이거 우리가 같이 라인에서 일하면 소통해서 풀어갈 수 있는 방식이 있는데’. 내 개인의 생존권 문제가 아니라 같이 일하는 동료를 위해서, 동료를 생각하고 동료도 나를 생각한다고 하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아직까지 그게 인식이 안 바뀌어 있기 때문에 자기들 욕심 가져가기 위해서 서로 이해를 못하고. 얘기를 해보면 이해를 한다고 해요. 이해를 한다, 말뿐이잖아요. 실제로. 저희도 마찬가지라고 보는 거에요. 같이 투쟁을 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요. 같은 해고자이면서도 그런 모습은 있어요. 그건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아쉬운 부분도 많이 있는 거죠. 때로 함께 가기 위해서는 조직을 묶어야 되겠지만 그런 욕심과 그런 생각이 안 바뀐다면 저는 1사1조직 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거에요. 저도 후회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의견이 충돌하고 그럴 때 후회하시는 건가요?

그렇죠. 의견 충돌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도 정규직이라는 고정관념을 못 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어요.

지금은 지부와 함께 일정을 하는 것으로 결정 난 것이죠?

지금 상황은 하나의 목소리를 내서 갈 수밖에 없는 거라. 다만 하나로 가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저희는 공장에 들어가야 될 근거가 8,6합의 약속이잖아요. 8,6합의가 아니더라도 신규채용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비정규직이 빨리 들어가야 될 입장이고.
또한 불법파견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1심에서 승소한다면 요구안은 달라지죠. 비정규직으로는 안 들어가죠, 이제. 더 큰 투쟁을 하면서 더 크게 만들어가고. 안에 있는 지금 조합비를 내려고 하는 사람들, 망설이고 있는 사람들 다 조직해야죠. 조합원들도 많아질 거고, 조직 대상들이 공장 안에 있고 이후 투쟁도 여러 가지로 고민될 부분도 있는 것 같고.
(그런데) 이런 것도 있잖아요. (불법파견 문제가) 이길 수도 있지만 지면 어떻게 할 거냐, 그것도 우려가 있는 거잖아요. 지면 지는대로 또 계속 끝까지 재판을 가야될 것 같고 또 가면서 싸워봐야 되고. 한쪽으로는 그게 있고 한쪽으로는 하루빨리 공장으로 들어가야 된다(라는 게 있어요).

공장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서 8.6합의 이행이든 신규채용이든 형태는 상관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지금 우리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다들 몇 년씩 근무했던 사람들이에요. 짧게는 5년 많게는 10년 이상 근무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 경력을 갖고 있고. 저는 면접까지도 필요없다고 보는 거에요.
우리 업체가 설령 없다고 하더라도, 사내하청 업체는 거의 똑같은 형태이기 때문에 업체가 3개든 4개든 인원을 나눠서 넣든, 한 군데로 다 넣든 넣으면 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우리가 들어가서 일을 하면 되는 거고. 또한 노동조합 문제는 기본적으로 갖고 가야할 문제이고.
어떠한 형태를 떠나서라도 무조건 공장 안으로 넣어주라, 그것밖에 없어요. 우리가 지금 돈을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임금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공장 안에 들어가서 일을 하겠다 그걸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약속 지키면 되요. 지금이라도 비정규직 약속 지키겠다, 그러면 우리 들어가서 일하면 되는 거거든.

 

투쟁 속의 상처와 원동력


돌아가신 분들 중에 비정규직 동지도 계신가요.

 

 
첫 번째로 있어요. 첫 번째로 비정규직. 조합원이었어요, 우리. 조합원이었는데 희망퇴직을 썼었어요. 640명 있었어요, 저희(비정규직)가. 2008년도에 그 중 350명을 쫓아내려고 했던 거였어요. 350명 전환배치 정규직이 오니까. 처음에는 350명 다 안 나가겠다고 버텼어요. 버텼는데 회사에서 업체별로 압력을 가한 거죠. ‘야, 돈 몇 푼이라도 받고 나가라, 나중에 돈도 없다, 그냥 나갈래 지금 줄 때 받고 나갈래.’
그렇게 해서 300명이 희망퇴직을 써버린 거에요. 50명은 끝까지 버틴 거죠. 50명이 끝까지 가다가 (2009년) 5월 달에 파업들어가기 전에 많이 떨어져 나갔어요. 그때 남은 게 19명이었어요. 그 전에는 50명이 2008년 11월부터 2009년 4월까지 끈끈히 본관 앞에서 농성하고 본관 들어가서 항의 투쟁하고. 우리 투쟁한 것은 까페(http://cafe.daum.net/ssybj)에 다 나와 있어요. 그 때 희망퇴직 썼던 동지가 집이 강원도 쪽인 것 같아요. 거기 가서 (돌아가셨어요). 아프더라고요 많이. 안타깝죠. 저기 현수막 첫 번째에 있어요. 그 이후 쭉 정규직, 가족.

 

와락센터에서 비정규직 동지들도 모두 심리치료 받으시죠?

네 저희도 다 해요. 지금 싸우고 있는 동지들 4명 중에 저 빼고 3명은 심리치료를 다 받았고요.

동지는 왜 안 받으세요?

아직까지 멀쩡하니까.(웃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분명히 상처가 있으실 것 같아요.

제 집사람이 심리치료를 받았고 아이가 또 심리치료를 받고 있어요. 어른들 문제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상처를 받았어요. 저는 굴뚝에 86일 있으면서 아이들 둘 전부 공장에 들어와서 이렇게 보고 있는데 안타깝더라고요. 그래도 밑에 있는 동지들은 한동안 가족들을 만났잖아요, 공장 안에 있을 때에는. 나는 못 만났고. 그게 제일 큰 상처로 남아있는 것 같아요.
아이들도 잘 이겨내고는 있는데 나는 그런 부분이 보여요. 지금도 노동가요 나오면 애들이 그래요. ‘아빠 또 집회 하냐.’ 경찰차 지나가면 ‘아빠 잡으러 온 거 아니냐’. 최근엔 막 그랬어요. 경찰들이 막 잡아가는 꿈 꿨다고. 이런 게 아이들한테는 상처로 있더라. 시간이 가면 잊히겠지만 그 상처를 해결하려면 이 싸움이 끝나야죠. 하루속히.
정상적으로 (돌아)갈 순 없지만 다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가족에도 평화가 올 거고, 아이들도 나와 같이 있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변화가 있지 않을까. 이제는 공장으로 들어가야 되요. 비정규직 동지들 너무 오래 싸웠어요, 1300일이 넘어가고 있어요. 거의 3년 반이 넘어가고 4년을 바라보는데. 정상적인 생활이 된 적이 없어요.
저희보다 더 오래 투쟁하는 동지들도 있지만 내가 이런 얘기하면 그 동지들한테 미안할 수 있죠. 하지만 똑같다고 보는 거에요. 누가 길게 싸우고 싶겠어요.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어요. 여기(현수막)에 보면 문구에도 해고된 노동자들은 1년 휴직 이후 복직시킨다고 약속했잖아요. 우리는 1년이 아니에요. 2009년 8월6일 이후에 딱 한 달 있다가 복귀였어요. 저런 거 보면 좀 아프잖아요. 우리는 한 달이었는데 왜 1년이냐. 차이는 좀 있어요. 근데 저런 걸 내가 또 따로 정규직 동지들한테 말을 하기가 그렇잖아요. 이런 문구 보면 아쉬움이 있어요. 근데 이걸 지부에서 만든 게 아니라 주변 동지들이 만든 건데 그만큼 우리 문제를 알려나가지 못했다는 아쉬움. 제가 그래도 인터뷰도 하고 많이 했는데 안 보나봐.(웃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쌍용차 안에 정규직 해고자도 있고 비정규직 해고자도 있고 무급자도 있고 징계해고자도 있고 여러 분류가 있어요. 있지만 다 같이 동시에 해결돼서 똑같이 손잡고 공장에 들어갔으면 제일 큰 희망이고요. 그게 안 되더라도 최소한 신규채용을 하고 있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회사가 입장을 내야 한다, 신규채용하고 있는 비정규직에 대해서, 사무직도 신규채용하고 있지만 비정규직도 계속 수시로 신규채용하고 있는 이 문제는 자기들이 약속했던 노사가 도장을 찍었던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입장을 내놓고 지금이라도 비정규직 복직시켜야된다. 그걸 위해서 우리가 소수 인원이 싸워나가고 있지만 앞으로 이 투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투쟁을 마다하지 않고 어떠한 연대를 마다하지 않고 전국에 있는 동지들한데 쌍용차 안에는 비정규직 동지들도 분명히 있다는 존재감을 더욱 더 알려나가야 될 것 같아요. 또 하나 불법파견 정규직화 소송 관련해서도 명확하게 현대기아차가 중심이지만 쌍용차에도 조직해서 함께 싸워나갈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은 우리가 공장에 들어가는 복귀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싸워나가는 과정에서 비중을 더 크게 잡고 있지만 재판의 상황에 따라서 요구안은 바뀐다. 그 이전까지는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고 가려고 하고 있어요. 그리고 정부 상대로 많은 동지들이 서울에 올라간 상태이지만 지역에도 나름대로 지역시민들과 중재했던 사람들 다 끄집어 내야할 것 같고요. 또한 이 공장이 평택에 있기 때문에 공장 상대로 이 싸움을 계속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서울과 이 지역과 연동해서 계속 알려내고. 반드시
공장으로 들어가야죠. 하루속히 공장에 들어가야 될 것 같고. 들어가는 모습을 동지들한테 보여주는 게 제일 큰 희망이지 않나. 저도 그런 희망을 갖고 있는 거고. 현재 상황은 다 어려운 국면이에요. 개인적으로도 어렵고 여러 가지로 어렵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보려고 하고 있어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보려고 조금만 더.......

그 힘의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 건가요?

(천막과 주변 동지들을 가리키며) 이게 힘이지 않을까요. 이 주변의 동지들이 찾아오고 지역 시민들이 그냥 지나가지 않고 모금도 해주시고 서명도 해주시고 쌍용차 관련해서 물어봐주시고 이게 난 힘이라고 봐요.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나를 지켜보고 있고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구나, 그리고 또한 나와 함께 가는 내 가족이 있잖아요. 내 가정과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그 힘으로 버텨나가야 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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